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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847년 ◈
◇ 입당구법순례행기(847년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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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圓仁(엔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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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卷) 제(第) 4
2
 - 당(唐) 선종(宣宗) 대중원년(大中元年)
 
 
 

847년 6월

 

6월 1일 (음)

5
- 회수로 진입하다
 
6
六月一日。風波稍靜。趁潮漸入。
 
 
7
6월 1일, 바람과 파도가 조금 잠잠해졌다. 밀물을 타고 서서히 회수로 들어갔다.
 
 

 
 

6월 5일 (음)

9
- 초주에 도착하다
 
10
五日得到楚州。新羅坊惣管劉慎言專使迎接([□@考]使迎東池兩本作使仰今改之)兼令團頭一人。般運衣籠等。便於公廨院安置。訪知明州本國人早已發去。料前程趁彼船的不及。仍囑劉大使謀請從此發送歸國。
 
 
11
[6월] 5일, 초주에 도착하였다. 신라방 총관 유신언 註 615이 특별히 사람을 보내 우리를 맞이하였다.註 616 아울러 단두(團頭)註 617 한 사람으로 하여금 옷과 바구니의 짐 등을 운반하여 공해원(公廨院)註 618에 안치하도록 하였다. 이곳을 방문하여 비로소 명주에 있던 본국 사람은 이미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배의 앞 행로註 619를 따져 생각해보니 그들의 배를 쫓아가도 따라 잡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에 유대사(劉大使)에게 부탁하여 이곳에서 출발하여 귀국할 수 있도록 도모해주기를 청하였다.
 
 
12
註) 615 이 무렵에는 유신언(劉愼言)이 설전(薛詮)에 이어 총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311쪽).
13
註) 616 원문에 “專使迎接”이라고 하였다. 초본(抄本)에는 “專使仰接”이라고 하였으나 의미에 따라 고친다. 전사는 그 목적을 위해 특별히 교환한 사신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四卷, 鈴木學術財團, 1969, 290쪽).
14
註) 617 조직의 대표자를 말한다. 돈황문서에 그 사용 예가 자주 보이는데, 여기서는 신라방 내의 거류민이 이 때 5인조로 조직되어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단 및 단두에 대해서는 양화단, 보살단의 내용 참조(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291쪽).
15
註) 618 공사(公舍)를 말한다. 여기서는 아마도 신라방의 사무소를 지칭할 것이다. 원은 한 울 안에 있는 지역에 세워진 건물의 의미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291쪽).
16
註) 619 여행 여정에 앞서는 행로를 말한다. 《돈황변문》섭정능시(葉淨能詩)조에 “但劣赴任 將絹以充前程”이라고 하였다. 전하여 여비의 의미로도 쓰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291쪽).
 
 

 
 

6월 9일 (음)

18
- 일본으로 가는 배가 노산에 있다는 서신을 받다
 
19
九日得蘇州船上唐人江長。新羅人金子白欽良暉金珍等書云。五月十一日。從蘇州松江口發。往日本國。過廿一日。到萊州界[崆-工+牛]山諸人商量。日本國僧人等。今在登州赤山。便擬往彼相取。往日臨行次遇人說。其僧([□@考]僧東本誤作便)等。已往南州。趁本國州。趁本國船去。今且在[崆-工+牛]山相待。事須[A28]廻棹來(云々)。書中又云。春太郎。神一郎等。乘明州張支信船歸國也。來時得消息。已發也。春太郎。本擬雇此船歸國。太郎往廣州。後神一郎。將錢金付張支信訖。仍春太郎。上明州船發去。春太郎兒宗健兼有此、、、物。今在此船(云々)。又金珍等付囑楚州惣管劉慎言云。日本國僧人。到彼中即發遣交來(云々)
 
 
20
[6월] 9일, 소주(蘇州)에서 출항한 배를 타고 있던 당나라 사람 강장(江長)과 신라 사람 김자백(金子白), 흠량휘(欽良暉),註 620 김진(金珍)註 621 등의 서신을 받았는데 이르기를
 
21
“5월 11일 소주의 송강(松江) 어귀註 622에서 출발하여 일본국으로 갑니다. 21일을 지나 내주(萊州) 관내의 노산 註 623에 도착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의논하기를 일본국의 승려 등이 지금 등주의 적산촌에 머물고 있으니 곧 그곳으로 가서 그들을 데리고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날에 떠나려고 할 즈음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말하기를 ‘그 승려 등은 이미 남쪽 주로 가서 본국으로 가는 배를 찾아 떠났다.’라 하였습니다. 지금 바로 노산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반드시 배를 타고 돌아오십시오.”
 
22
운운하였다. 서신에 또 이르기를
 
23
“춘태랑(春太郞)과 신일랑(神一郞)註 624 등은 명주 장우신(張友信)註 625의 배를 타고 귀국하였습니다. 올 때 소식을 들었는데 이미 출항했다고 합니다. 춘태랑은 본래 이 배를 빌려 귀국하려고 하였는데, 춘태랑이 광주(廣州)註 626로 간 후에 신일랑 註 627이 돈을 가지고 가서 장우신에게 주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춘태랑은 명주의 배를 타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춘태랑의 아들 종건(宗健)은 여기에 있고 그의 물건들도 지금 이 배에 있습니다.”
 
24
운운하였다. 또 김진 등은 초주 총관 유신언에게 부탁하여 이르기를
 
25
“일본국 승려들이 그곳에 도착하면 곧 떠나보내 이곳으로 오게 해주십시오.”
 
26
운운하였다.
 
 
27
註) 620 일본·당 무역업자 중 하나이다. 그가 852년(인수 2년)에도 일본에 배를 타고 왔었고, 원진(圓珍)이 그 배를 이용했던 것은 원진의 《청홍전지관진언양종관첩(請弘傳止觀眞言兩宗官牒)》 및 《원진전(圓珍傳)》에 보인다. 원진은 음량휘를 대당국 상인이라고 하였으나,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는 신라인이라고 하였다. 해상 무역업자가 상황에 응하여 국적 등을 편의에 따라 자칭하거나 변경하는 것은 자주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293쪽).
28
註) 621 이들은 재당 신라인으로 당의 연해안 교역은 물론 당·일간의 무역업에 종사해온 사람들이다. 흠량휘는 이 뒤(852) 일본에 내항하여 일본 천태종 스님 엔진[圓珍]을 입당시키고 있다. 당시의 국제무역업자들은 때에 따라 국적을 다르게 말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일본 사람들의 혼동도 있었을 것이다. 흠량휘도 《원진전(圓珍傳)》에 보면 ‘대당국상인(大唐國商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같은 엔진 관계 문서에서도 혼동하여 기록되어 있는 예가 있다. 그의 《진서부입당공험(鎭西府入唐公驗)》에 보면 ‘대당상객왕초(大唐商客王超)’로 기록하였다가도 그의 《기태주공험(乞台州公驗)》에는 ‘신라상인왕초(新羅商人王超)’로 되어 있다. 물론 왕초는 신라 상인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522쪽).
29
註) 622 당대의 소주는 오현(吳縣, 강소성 소주)에 치소가 있었으며, 7현을 관할하였고 송강 유역에 있었던 곤산(崑山), 화정(華亭)의 2현도 이에 더해졌다. 송강은 태호(太湖)에서 발원하여 곤산현을 거쳐 현재의 상해 북부를 흘러 황포강과 합해져서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원화군현지》 권25 소주조에도 “松江 在縣南五十里 經崑山入海 左傳云 越伐吳 軍於笠澤 卽此江”이라고 보이며, 송강 어구를 오송해구(吳松海口)라고도 하였다(《대청일통지》 권58 송강부)(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293쪽).
30
註) 623 뇌산(牢山), 로산(嶗山)이라고도 쓰며 일반적으로는 노산(勞山)이라고 한다. 예부터 산동의 명산으로 알려졌다. 즉묵현 동남에 있으며(청도의 동북 35km) 바다에 임하였고 그 높이가 약 1,150m라고 한다. 《원화군현지》 권11에는 “大勞山 小勞山 在縣東南三十八里 晏謨齊記曰 大白自言高 不如東海勞 昔鄭康成領徒於此”라고 하였다. 강성은 후한 정현(鄭玄, 127-200)의 자이다. 산동의 고밀(高密)이 그의 고향이었다. 예부터 신선의 산으로서 유명했다. 높고 험한 바위산으로, 항해의 좋은 목표였다. 해주의 동해산, 밀주의 대주산, 등주의 적산 등과 함께 기항지(寄港地)였는데, 이는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해 증명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294쪽).
31
註) 624 일본의 성을 당의 한자식으로 고친 것으로 “神”은 “大神”, “春”은 혹은 “御春”의 줄임말일지도 모르겠다. “御春”에 대해서는 백제 귀화인으로, 御春宿禰, 御春朝臣 등이 알려져 있다. 또한 “田口圓覺”을 “田圓覺”이라고 쓴 예로 미루어 보면, 두 글자의 성 중 앞 글자를 딴 것이라고도 생각되는데, “春原”, “春苑”, “春道”, “春岑”, “春井” 등의 예도 많으므로 꼭 “御春”이라고 결정할 필요는 없다. 또한 진태신(陳泰信)이 원진(圓珍)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당인시권》), 여기서 정월 4일이라고 한 것은 정관 5년(함통 4년)으로, 진태신은 전년 7월에 배를 타고 왔던 이연효(李延孝) 등의 일행이었다고 이해된다. 이 편지에 따르면 그들이 가져온 당의 물건을 수매하기 위해 축자(筑紫)의 홍려관(鴻臚館)에 갔던 조사(朝使)와 만났던 파주소목춘일대랑(播州少目春日大郞)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 17년 후의 일이지만,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춘대랑과 동일인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입당구법순례행기》를 통하여 견당사의 폐지 이후 일본 사람의 해외 도항(渡航)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며, 또한 무역도 신라선 등에 편승하여 적지 않게 행해졌다는 것을 이 춘대랑, 신일랑의 활동을 통해 엿볼 수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294쪽).
32
註) 625 원문에 장지신(張支信)이라고 하였는데 《속일본후기》의 장우신과 동일인이다. “支”와 “友”는 글자의 형태가 유사하고 또한 글자의 뜻도 통하지만, 아마도 우신이 정확할지 모르겠다. 같은 책 권17 승화 14년 7월조에는 “辛未(8일) 天台留學僧圓載傔從仁好及僧惠蕚等 至自大唐 上奏圓載之表狀, 唐人張友信等四十七人 乘而來著”라고 하였다. 또한 이 배에는 안상사의 개조였던 혜운(慧運)도 있었다. 《안상사자재장》에 관련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도 또한 장우신이라고 하였다. 이에 비해 지신이라고 쓴 예는 《안상사혜운전」(《입당오가전(入唐五家傳)》)에 있다. 이들은 우신과 지신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인데, 정관 2년(861) 일본에 머물러 비전백도(肥前柏島)에서 배를 만들었던 당나라 사람으로도 또한 장지신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두타친왕입당략기」(《입당오가전》)에 기록이 보이는데, 이에 따르면 진여친왕(眞如親王), 혜악, 종예(宗叡) 등의 일행 60명이 이 배로 오도(五島)로 갔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장지신이 함께하였다. 이 장지신은 통사(通事)였으나, 배를 만드는 데에도 관여하였으므로 항해업자였던 장지신의 모습이 상기된다. 이 일행은 동년 9월 3일에 오도를 출발하여 7일에는 명주에 도착하였다. 명주와 오도 사이가 최단거리라고 해도 이것은 매우 운이 좋았던 단기간의 항해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장지신이 명주사람이라고 하였다. 장우신이 명주사람이라는 기록은 다른 곳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본과 당의 교섭에 관계가 깊은 명주와 장우신의 결합은 자연스러운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296쪽).
33
註) 626 광동성 주강(珠江) 하류 동안에 위치하며, 번우현(番禺縣)을 곽하로 하여 부근의 10현을 관할하였다. 당대에는 무역항으로서 번창하였다. 8-9세기 광주에 갔었던 일본인 대다수는 사절과 구법승으로, 이 기록과 같은 무역업자는 아니었다. 물론 일본에도 또한 향약(香藥)과 기타 남방의 진귀한 산물은 많이 양주에서 수입되었으므로, 실제로는 실로 적다고는 해도 직접 광주에 가서 교역을 행했던 사실을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이 기사가 전하고 있는 점에서 중시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298쪽).
34
註) 627 초본(抄本)에는 “神太郞”이라고 하였고, 지본에는 “神一郞”이라고 하였다. 후자에 따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298쪽).
 
 

 
 

6월 10일 (음)

36
- 노산으로 떠날 채비를 하다
 
37
十日。便船往[崆-工+牛]山修書狀。付送金珍等處。報消息特令相待。其後却擬向[崆-工+牛]山渡海。排比路粮。楚州劉惣管每事勾當。前惣管薜詮。及登州張大使。舍弟張從彥。及孃皆送路。
 
 
38
[6월] 10일, 노산으로 가는 배편이 있어 편지를 써서 김진 등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소식을 알리고 특별히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 뒤 다시註 628 노산으로 되돌아가 바다를 건널 생각으로 여행용 식량을 준비하였다. 초주의 유총관이 모든 일을 맡아주었다. 전 총관인 설전과 등주 장대사의 아우 장종언(張從彦) 그리고 그 어머니註 629 등 모두가 배웅하였다.
 
 
39
註) 628 원문에 “却”이라고 하였다. 구어체적 용법에서는 한 번 정한 일에 대해 다시 다른 일을 하는 경우에 사용하며, 그런데, 그러나 등의 의미이다. 혹은 “其後却”은 “其却後”로서 후에 다시, 또다시 라는 말로도 쓰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299쪽).
40
註) 629 원문에 “孃”이라고 하였다. 양양(孃孃)이라고도 하며, 아양(阿孃)의 줄임말일 것이다. 구어로 어머니라는 뜻이다. 라이샤워는 딸이라고 하였으나, 여기서는 채택하지 않는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299쪽).
 
 

 
 

6월 18일 (음)

42
- 왕가창의 배를 타고 출발하다
 
43
十八日晚際。乘楚州新羅坊王可昌船。三更後([□@考]後恐發字)
 
 
44
[6월] 18일, 저녁 무렵 초주 신라방註 630 왕가창(王可昌)의 배를 타고 자정이 넘어註 631 출발하였다.
 
 
45
註) 630 회창 5년 7월 3일조 참조(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299쪽).
46
註) 631 원문에 삼경(三更)이라고 하였다. 자각(子刻, 夜半)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299쪽).
 
 

 
 

6월 19일 (음)

48
- 입추이다
 
49
十九日立秋(始喫同舟飯)
 
 
50
[6월] 19일, 입추註 632이다.처음으로 이 배에서 밥을 먹었다.
 
 
51
註) 632 하지에서 46일이 지나면 입추가 된다. 平岡武夫 편 《唐代の曆》에 따르면 대중 원년(847) 5월 2일(병인)이 하지였으므로, 18일(신해)가 46일째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책에는 8월 4일(정유)가 입추로 되어 있어 이로부터 역산하면 19일(임자)가 46일에 해당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300쪽).
 
 

 
 

6월 26일 (음)

53
- 승가점에 도착하다
 
54
廿六日到[崆-工+牛]山南桝家店。訪金珍船。其船已往登州赤山浦訖。見留書云。專在赤山相待。既如此。不免向乳山趁逐彼船。
 
 
55
[6월] 26일, 노산 남쪽의 승가점(枅家店)에 이르러 김진의 배를 찾았으나 그 배는 이미 등주의 적산포로 떠나고 없었다. 남겨놓은 편지를 보니
 
56
“적산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57
라 하였다. 일이 이미 이와 같이 되었으니 유산을 향하여 그의 배를 뒤쫓아갈註 633 수 밖에 없었다.
 
 
58
註) 633 원문에 “趁逐”이라고 하였다. “趁”의 음은 ‘신’이다. 초본(抄本)에는 그 속자로 썼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301쪽).
 
 

 
 

6월 27일 (음)

60
- 유산을 향해 떠나다
 
61
廿七日修書付崔家船。報楚州劉惣管訖。更雇船主王可昌船。望乳山去。
 
 
62
[6월] 27일, 편지를 써서 최씨의 배편에 부쳐 초주의 유총관에게 사정을 알렸다. 다시 선주인 왕가창의 배를 빌려 유산을 바라보며 떠났다.
 
 

 
 

6월 28일 (음)

64
- 전횡도에 도착해 바람을 기다리다
 
65
廿八日發。到由([□@考]由恐田字)橫嶋。无風信。經十五日發不得。
 
 
66
[6월] 28일, 출발하여 전횡도(田橫島)註 634에 도착했으나 바람이 일정하게 불지 않아 보름이 지났어도 떠날 수가 없었다.
 
 
67
註) 634 초본(抄本)에는 “由橫”이라고 썼으나, 전횡으로 고친다. 즉묵현성의 동쪽 노산(勞山)의 동북쪽에 위치했다. 《독사방여기요》 권36 즉묵현조에 “(田橫島) 縣東北 百里海中 去岸二十五里 中可居千餘家 … 志云 縣東南濱海 列島環伺 其可居者 曰靑 曰福 曰管 曰白馬 曰香花 曰田橫 曰顔武 而田橫島方三十餘里 尤平廣可畊 且由岸抵島 多礁石 不可直達”이라고 하였다. 전횡(?-기원전 202)은 제나라 전씨의 일족으로, 한신이 제나라를 파하였을 때 스스로 일어나 제왕이라고 칭하고 해도에 거하였으며, 후에 한나라에 출사한 것을 수치로 여겨 자살했다고 전한다(《사기》 권94) 전횡이 근거했다는 전설은 해주 동해현의 전횡도(小鬲山)에도 있는데 이 두 설은 모두 《태평환우기》 등에 보인다. 그러나 즉묵 해변의 전횡도가 지리적으로 보면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四卷, 鈴木學術財團, 1969, 302쪽).
【원문】입당구법순례행기(84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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