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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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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1.9~
신채호
1
天喜堂詩話[천희당시화]
 
 
2
1. 詩[시]의 能力[능력]
 
3
호두장군(虎頭將軍) 최영(崔瑩) 씨가 누차 중국·일본 등 외구(外寇)를 모조리 죽여 물리치고 그 백전백승의 남은 위엄을 베풀어 대병(大兵)으로 요양(遼陽)·심양(瀋陽)에 쳐들어가 고구려 옛땅을 회복하려고 하다가 시운(時運)이 불행하여 큰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죽음을 당하였으니, 지금까지 장군의 일을 말하는 이가 강개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지난번에 한 친구가 장군의 시(詩) 2수를 써서 보내주었는데, 그 말이 장결(莊潔)하고 그 어조가 격렬하고 그 뜻이 웅혼(雄渾)하여 족히 장군의 인격을 상상할 수 있었다.
 
 
4
그 첫째 수는
 
5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6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7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8
그 둘째 수는
 
9
눈맞아 휘었노라 굽은 솔 웃지 마라.
10
춘풍에 핀 꽃이 매양에 고울소냐.
11
풍표표(風飃飃) 설분분(雪紛紛)할 제 네야 나를 부르리라.
 
 
12
성음(聲音)의 도가 사람을 감동시킴이 깊도다. 왕년에 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 등이 그 정권(政權)을 이미 잃고 심화가 울적한 가운데 소일하기 위하여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용산(龍山) 강정(江亭)에 짝지어 갔는데, 때는 가을 낙엽이 정히 누렇고 둘러싼 산이 쓸쓸하고 석양이 강물에 거꾸로 비치어 유리 세계를 만드니 뜻을 잃은 자의 감회를 돕는 것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뚝섬〔纛島[독도]〕 날탕패 몇명을 불러서 노래 한 곡을 부르게 하니 그 노래에 말하기를
 
13
처자 죽은 귀신은 도령의 방으로 몰아넣고
14
도령 죽은 귀신은 처자의 방으로 몰아넣고
15
우리 죽은 귀신은 민충정(閔忠正)대감 넋을 따라라.
 
 
16
하였더라. 박제순이 이를 듣더니 추연히 무릎을 치며 말하기를 “인생은 누구나 한번 죽음이 없으리요마는 저와 같이 죽을 곳을 얻은 자가 능히 몇 사람인가?” 하고 손에 잡은 술잔을 던져버렸다고 하였으니, 슬프다, 저 박씨가 만일 5조약 이전에 이런 노래를 일찍이 들었다면 민충정의 넋을 따랐을까.(1909.11.9)
 
 
17
시(詩)란 것은 국민 언어의 정화(精華)다. 그러므로 강무(强武)한 국민은 그 시부터 강무하며, 문약(文弱)한 국민은 그 시부터 문약하니, 일국의 성쇠와 치란(治亂)은 대개 그 국시(國詩)에서 증험할 수 있을 것이요, 또 그 나라의 문약을 돌이켜 강무케 하고자 할진대 불가불 그 문약한 국시부터 개량할 것이다. 내가 근세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시가(詩歌)를 살펴 보건대 태반이 유미음탕(流靡淫蕩)하여 풍속의 부패만 빚어낼 뿐이니, 세도(世道)에 관심을 두는 자가 시급히 그 개량을 꾀함이 옳으며, 또 그 가운데서 특히 민속(民俗)에 유익할 만한 시가를 수집하여 시세계의 국수(國粹)를 보전함이 옳을 것이지만, 다만 고대 역사가 남아 있지 못하여 삼국시대의 진정하고 강무한 시가를 얻어보기 어려우니 애석하도다.
 
18
지난번에 우강(雩岡)이 『풍요속선(風謠續選)』 1권을 보내준바 이를 펴본 즉 우리나라 조선조 이래 제왕(帝王)·장상(將相)·명유(名儒)·달사(達士)의 시가가 실려 있었다. 그 이름이 이와 같이 속선(續選)인즉 그 전편(前篇)이 반드시 있을 것이며, 이 시편이 또 역시 조선조 초엽으로부터 시작되었은즉 그 전편은 반드시 삼국·고려 시대를 수록하였을 것이니, 그런즉 그 가운데 혹시 바보 온달(溫達)·을지문덕(乙支文德) 등의 ‘출군가(出軍歌)’도 실려 있을 것이며, 또 혹은 「양산가(陽山歌)」(신라인이 명장 歆運[흠운]의 戰死[전사]를 위로한 노래 ― 原註[원주]) 「회소가(會蘇歌)」(신라인의 勸農歌[권농가] ― 原註[원주]) 등도 실려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만일 나온다면 우리나라 시세계에 한 큰 기념이 될뿐더러 또 고대사의 빠진 글을 보충할 것이 매우 많을 것이니, 어찌 나의 몽매간에 갈망하는 바가 아니리요마는 우강가(雩岡家)에 남아 있는 것은 다만 이 속편뿐이라 하며, 또 기타 장서가들은 대개 일반 서적을 충주(忠州) 자린고비의 돈과 쌀을 인색하게 아낌과 같이 하니 어느 곳에서 이것을 얻어보리요.
 
19
이제 우리나라 사람더러 묻기를 “우리나라 시(詩)가 어느 때에 시작되었느냐?” 하면, 혹은 “유리왕(瑠璃王)의 「황조가(黃鳥歌)」가 그것이다” 하며, 혹은 “을지문덕의 「유우중문시(遺于仲文詩)」가 그것이다” 하는데, 이것은 다 한시(漢詩)요 국시(國詩)가 아니다. 5백년래 문학가 책상 위에 단지 한시만 쌓여 ‘마상한식(馬上寒食)’‘도중모춘(途中暮春)’이 어린아이들의 초등소학(初等小學)이 되며, ‘낙성일별(洛城一別)’‘호기장구(胡騎長驅)’가 글방의 전문 교과가 되고, 우리나라 시에 이르러서는 대울타리 가에 내버려둔 지 몇백년이니, 아아, 이 또한 국수(國粹) 쇠락이 한 원인인 것이다.
 
20
(1909.11.11)
 
 

 
 
21
내가 보는 바로는 우리나라 시 가운데 그 유전(流傳)이 가장 오랜 것을 들라면, 고승(高僧) 요의(了義)가 국문을 처음 만들고 불교를 찬미한 진언(眞言)이 이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범시(梵詩)를 음역(音譯)한 것이라 우리나라 시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고 그 다음은 최영·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가 될 것이다. 최영의 시는 앞에서 이미 기록하였으니 이제 정몽주 시의 전편(全篇)을 기록한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22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다시 죽어
23
백골은 진토 되고 넋이야 있든 없든
24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25
고대에는 임금으로 국가의 중심점을 삼은 까닭으로 최영·정몽주의 「단심가」가 그 종장(終章)에는 모두 “님 향한 일편단심”이란 말로 끝맺었으니 ‘님’은 임금을 일컬음이다.
 
26
(1909.11.12)
 
 

 
 
27
한시(漢詩)는 한문(漢文)과 함께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하나의 문학을 이룩한 것이다. 기성(箕聖:箕子[기자])이 가르침을 전할 때에 반드시 은(殷)나라·주(周)나라에서 사용하던 풍(風)·아(雅)·송(頌) 등으로 나라 사람들을 가르친 일이 있을 것이지만 고사(古史)에 증거할 만한 것이 없으며, 혹은 「맥수가(麥秀歌)」를 기자가 지은 것이라 하나 이것은 장유(長維)가 ‘미자시(微子詩)’로 분명히 변정(辨正)한 것이라 다시 의심을 둘여지가 없으니, 우리나라의 한시 비조(鼻祖)는 부득이 유리왕의 「황조가」로 삼을 것이나 그 시의 뜻이 자기 부부간의 헤어진 감회를 서술함에 지나지 않으니 족히 일컬을 만한 것이 없고, 그후에 을지문덕이 평양성 아래서 전쟁으로 분망한 때에 5언 1수를 지어 우중문을 기롱하였으니, 그 진중에 임해서도 한아(閑雅)한 풍도를 족히 상상해 볼 수 있으나 장군의 시요 시인의 시가 아니며, 또 한때 적을 꾀어들이는 말이라 정에 따른 진솔한 뜻을 지은 것이 아니니 족히 풍영(風詠)할 바가 없고, 그후에 허다한 시학사(詩學士)가 배출하였으나 모두 이백(李白)·두보(杜甫)·한유(韓愈)·소식(蘇軾)의 뱉어 놓은 찌꺼기를 주워 전쟁의 일을 비관하고 구구한 안일을 노래하여 사대주의만 고취할 뿐이요, 능히 안광을 크게 가져 우리나라 상무적(尙武的) 정신을 발휘한 자가 없으니, 아아, 외국어·외국문에게 국혼(國魂)을 빼앗길 마력이 과연 같은가. 내가 고려 및 조선조 1천여년간 한시가(漢詩家)의 인물을 하나하나 세어보매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일컫되 우리나라에 유전하는 한시는 남이(南怡)의 시“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豆滿江波飮馬無[두만강파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1수와 최영의 시 “三尺劍頭安社稷[삼척검두안사직], 一條鞭未整乾坤[일조편미정건곤].”1구만 남겨두고 그 나머지는 일체 불살라버리고자 하노니, 아아, 이 말이 비록 과격한 듯하나 또한 모름지기 뜻있는 자가 같이 인정할 것이 아닌가. 비록 그러나 저 천여년래 한시가가 골머리를 썩이며 피를 흘리며 곤궁하고 쓸쓸하게 보낸 생애로 그 죽은 뒤 성명 석자를 전하고자 하던 자가 오늘날 땅속에서 이 말을 들으면 이빨을 부러뜨리고 슬피 울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28
(1909.11.13)
 
 

 
 
29
지난번에 김윤식(金允植) 씨가 전 통감(統監) 유임을 청원하려고 일본에 건너갔더니 그들 가운데 한시가들이 김을 부사산(富士山) 아래로 맞이하여 대접하자 김이 그 산으로 제목을 삼고 시 한 수를 이루었는데
 
 
30
怪怪奇奇摠不同[괴괴기기총불동], 化工於此技應窮[화공어차기응궁].
31
森沈劍戟皆兵氣[삼침검극개병기], 羅列兒孫盡父風[라열아손진부풍].
 
 
32
이라 운운하였다. 아아, 그의 외국 숭배하는 비열한 품성이 어찌 이와 같은가. 외국 인물을 숭배할 뿐 아니라 외국 산천까지 숭배하였도다. 아아!
 
33
(1909.11.14)
 
 

 
 
34
시가(詩家)는 사람의 감정을 기쁘고 화합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하나니, 마땅히 국자(國字)를 많이 쓰고 국어로 구를 이루어 부인과 어린아이도 한번 읽어 다 깨우치도록 주의하여야 국민 지식 보급에 효력이 있을 것인데, 이즈음의 각 학교 교가를 들은즉 한자를 마구 섞어 씀이 매우 많아 부르는 학생이 그 뜻을 깨닫지 못하며, 듣는 행인들이 그 말뜻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어떤 보탬이 있으리요. 이는 역시 교육계의 결점이라 말할 수 있다. 한 친구가 일찍 그가 지은 「애국음(愛國吟)」「장부음(丈夫吟)」 각 1수를 나에게 외어 들려주었는데 국어를 주로 하고 한자는 보조로 넣었으며, 노파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를 아껴서 기록한다. 「애국음」은 다음과 같다.
 
 
35
제몸은 사랑컨만
36
나라 사랑 왜 못하노.
37
국가 강토 없어지면
38
몸둘 곳이 어디메뇨.
39
차라리 몸은 죽더라도
40
이 나라는.
 
 
41
「장부음」은 다음과 같다.
 
 
42
장검(長劍)을 높이 들고
43
우주간에 배회하니
44
만고흥망은 흉중(胷中)에 역력하고
45
육대부주(六大部洲)는 안중(眼中)에 회회(恢恢)하다.
46
아마도 장부의 득의추(得意秋)는
47
이 때인 듯.
 
48
(1909.11.16)
 
 

 
 
49
제국신문에 일찍이 국자운(國字韻:날발갈, 닝징싱 등 ― 原註[원주])을 내걸고 국문 7자시를 현상모집하였는데, 이 7자시도 혹은 일종 새 국시체가 될까. 그렇지 않다. 옳지 않다. 영국시는 영국시의 음절이 저절로 있으며, 러시아시는 러시아시의 음절이 저절로 있으며, 기타 각국의 시가 모두 그러니, 만일 갑국의 시로 을국의 음절을 본뜨면 이것은 학의 무릎을 물오리의 다리로 바꾸며, 개꼬리를 누런 수달피로 이음이니 그 어느 것이 잘되고 어느 것이 모자라며,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쁜 것은 고사하고 상태의 유가 어찌 우습지 아니하리요, 시험삼아 이 국문 7자시를 한번 읽어보라. 그 껄끄럽고 어려움이 과연 어떠한가. 또 당당히 독립한 국시가 저절로 있거늘 하필 중국의 율체(律體)를 의지 모방하여 용종기구(龍鐘崎嶇)의 모습을 만들 것인가. 또 혹은 요즈음 각 학교에서 일본 음절을 본떠서 11자 노래를 만드는 자가 더러 있으니 이 또한 국문 7자시를 짓는 유인 것이다. 나도 일찍이 어느 학교 학생의 부탁을 받아 이 11자 노래를 지어 주었는데, 이후에 이의 잘못을 깨달았으나 지나간 일이라 다시 어쩔 수 없는데, 만일 그 학교 학생이 나에게 다시 지어달라 하면 내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이를 사양하지 않겠다.
 
50
(1909.11.17)
 
 

 
 
51
갑오 동학(東學)의 여러 괴수는 모두 한때 요귀에 지나지 않으나 홀로 저 고부(古阜) 수요자(首擾者) 전봉준(全琫準)은 혁명가의 정신이 넉넉히 있고 병략(兵略)이 귀신같이 빨라 저 일본인의 숭배를 크게 받는 이였다. 전봉준이 일을 벌이던 때에 한 노래가 호남에 유행하였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52
새야 새야 팔왕(八王:‘全[전]’자 破字[파자] ― 原註[원주])새야
53
네가 어이 나왔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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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잎 댓잎 포릇포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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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봄철인가 나왔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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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白雪)이 폴폴 흩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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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건너 창송녹죽(蒼松綠竹)이 날 속였다.
 
 
58
아아, 전봉준의 재략으로 만일 조금 뒤에 출현하여 세계의 풍조를 관찰하고 시기(時機)를 이용하였다면 뒷날에 그 볼 만한 성취가 반드시 있었음은 상론가(尙論家)가 함께 인정할 바이니, 이 노래가 과연 명백히 도파(道破)하였다. 알지 못하겠다, 그 작자가 어떤 사람인가?
 
59
(1909.11.18)
 
 

 
 
60
손님이 한시 몇수를 가지고 나에게 보이는데 구절마다 새로운 명사(名詞)를 참입(參入)하여 지은 것이다. 그 가운데 “滿壑芳菲平等秀[만학방비평등수], 闃林禽鳥自由鳴[격림금조자유명].”이라 말한 1연을 가리켜 “이두 구는 동국 시계(東國詩界) 혁명(革命)이라 일컬을 만한 것이다” 하고 기쁘게 만족한 빛이 있거늘, 내가 “그대의 마음씀이 대단히 고심한 것이다마는 이것으로 중국 시계의 혁명이라 함은 옳거니와 우리나라 시계의 혁명이라 말함은 옳지 않으니, 대개 “우리나라 시가 무엇인가?”하면, “우리말·우리글·우리 소리로 지은 것이 이것이다.”“우리나라 시의 혁명가가 누구냐?” 하면 “우리나라 시 가운데 새 수안(手眼)을 방(放)하는 자가 이것이다”할 것이거늘, 이제 그대가 한자시를 짓고 눈어둡게 자신하여 “내가 우리나라 시계의 혁명가라”하니, 또한 역시 어리석은 망발이 아닌가.
 
61
(1909.11.20)
 
 

 
 
62
그대가 만일 시계(時界)의 혁명자가 되고자 할진대 저 아라랑(阿羅郞)·영변동대(寧邊東臺) 등 국가계(國歌界)에 향하여 그 완고 고루함을 개혁하고 신사상을 수입할 것이다. 이와 같이 되어야 부녀가 모두 그대의 시를 읽으며, 아이들이 모두 그대의 시를 외워 전국의 감정과 풍속이 타파되어야 그대가 시계의 혁명가 시조가 되려니와 구차히 한자시를 받들어 이로써 우리나라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려다가는 비록 셰익스피어의 신필(神筆)을 휘두를지라도 이것은 몇몇 사람이 한가롭게 읊는 것에 이바지할 뿐이니, 왜냐하면 곧 그것이 우리말·우리글로 조직한 우리나라 시가 아닌 까닭이니, 그대의 마음씀은 대단하다마는 그 계책이 실로 잘못이다“한대, 손님이 부질없이 있다가 오랜만에 물러나며 ”선생의 말이 그럴듯하다“하더라.(1909.11.21)
 
 
63
저 무지몽매한 청년들이 가끔 크게 외쳐 말하기를 “우리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시이다”하니, 아아, 그 생각지 못함이 어찌 이에 이르렀나. 이제 잠깐 지극히 쉬운 이치로 깨우치리니, 대저 우리들이 기쁨이 있으면 기뻐하지 않으려 한들 그렇게 되며, 노여움이 있으면 분하여 소리치지 않으려 한들 그렇게 되며, 슬프고 원망스러움이 있으면 쓸쓸히 눈물 흘리지 않으려한들 그렇게 되며, 고통이 있으면 신음소리를 미친 듯이 내지 않으려 한들 그럴 수 있겠는가.
 
64
무릇 시란 것은 곧 이 기뻐함, 분한 소리, 쓸쓸히 눈물 흘림, 신음 소리를 미친 듯이 내는 등의 정경의 모습을 모아 이룬 문언(文言)이니, 시를 폐하고자 하면 이는 국민의 목구멍을 막아 두뇌를 깨뜨림이니, 이것이 어찌 옳으며, 이것이 어찌 옳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항상 말하되 “시가 융성하면 나라도 역시 융성하며, 시가 쇠퇴하면 나라도 역시 쇠퇴하며, 시가 살아 있으면 나라도 역시 살아 있으며, 시가 망하면 나라도 역시 망한다”고 하였다.
 
65
혹은 말하기를, 그러면 조선조 5백년래에 유명한 시인은 전대보다 많았으나 그 국민은 전대에 미치지 못하여 임진년(1592)에 왜(倭)에게 조선8도가 어지러웠으며, 병자년(1636)에 오랑캐에게 경성이 떨어져 “天心錯莫臨江水[천심착막임강수], 廟算凄凉對落暉[묘산처량대락휘].”의 구에 군신의 피눈물만 뿌렸으며, “回思丙子年間事[회사병자년간사], 幾斷王孫塞外魂[기단왕손새외혼].”의 말이 후인의 유한(遺恨)만 잉태하였으니, 시의 공(功)이 어디에 있는가. 아아. 조선조 이래로 과연 시학(詩學)이 풍성하였으며, 시학이 풍성한 뒤에 과연 국치(國恥)가 자주 찾아왔으니, 그대가 시를 꾸짖음이 역시 마땅하다마는, 다만 그대가 시의 어떤 것임을 알지 못하고 시를 망녕되게 논하는구나.
 
66
(1909.11.23)
 
 

 
 
67
2. 詩道[시도]와 國家[국가]의 관계
 
 
68
지금 내가 우선 시의 능력을 설명하고 그 다음 시도(詩道)와 국가의 관계를 자세히 논하려 하니, 그대는 또한 두뇌를 냉정히하고 이를 들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막연히 한가히 앉아 김종서(金宗瑞)의 「삭풍가(朔風歌)」인
 
 
69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70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 짚고 서서
71
쉬파람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72
를 낭랑히 읊으매 홀연 간담이 커지며, 쓸쓸하여 피곤히 누웠다가 남이 장군의 「장검곡(長劍曲)」인
 
 
73
장검을 빼어 들고 백두(白頭)에 올라 보니
74
대동천지에 성진(腥塵)이 잠겼어라.
75
언제나 남북풍진을 헤쳐볼까 하노라.
 
 
76
를 호쾌하게 읽으매 갑자기 머리털이 곧추서며, 침울 울적하다가 ‘어와 저 백구’1장을 느리게 외우매 심신이 온화하며, 정답고 한가하다가 ‘자규야 울지 마라’1구를 작게 외우매 감개스런 눈물이 남몰래 흐르니, 시가 인정(人情)을 감발(感發)하는 것이 이와 같이 불가사의의 능력이 있는 것이다.
 
77
이러므로 그 시가 굳세고 씩씩하면 전국이 굳세고 씩씩할 것이며, 그 시가 음탕하면 전국이 음탕해질 것이며, 그 시가 웅건(雄建)하면 전국이 웅건해질 것이며, 그 시가 유약(柔弱)하면 전국이 유약해질 것이며, 기타 용감하고 사납고 미쳐 날뛰고 날래고 떨치고 곱고 졸렬하며, 혹은 선악과 미추(美醜)가 시가(詩歌)의 지배력을 받지 않음이 없는 것인데, 모름지기 생각해 보건대 우리나라에 유행하는 시가 과연 어떠한 시인가.
 
78
(1909.11.24)
 
 

 
 
79
국시(國詩)로 말하면, “남훈전(南薰殿) 달 밝은데 팔원팔개(八元八愷) 거느리시고” 한 한가하고 담박한 시뿐이며, “말없는 청산 태도 없는 유수(流水)”란 방광(放狂)의 시뿐이며, “말은 가자고 네 굽을 땅땅 치는데 님은 잡고 낙루(落淚)한다”한 음탕의 시뿐이며,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한 염세퇴영(厭世退嬰)의 시뿐이요, 또 몇백년 이래로 한시가 일반 사회에 성행하였으나 역시 모두 이와 같은 말과 이와 같은 뜻뿐이 아닌가.
 
80
떨어진 꽃과 꽃다운 풀은 그 심경(心境)이며, 곤궁을 탄식하고 비천함을 슬퍼하는 것은 그 취지(趣旨)며, 술을 대하면 마땅히 노래가 있고, 인생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 정회(情懷)이며, 무가내하(無可奈何)·불여귀거(不如歸去)는 그 보통의 용어요, 이 밖에는 다른 경지가 없으며 이 밖에는 다른 정취가 없으니, 이것으로 반드시 사회의 공덕을 도야(陶冶)할 수는 없으며, 이것으로 반드시 군국민(軍國民)의 감정을 제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81
공자(孔子)가 “禮云禮云[례운례운] 玉帛云乎哉[옥백운호재] 樂云樂云[락운락운] 鐘鼓云乎哉[종고운호재]아” 하셨으니, 시운시운(詩云詩云)이며, 과연 이와 같은 시를 말함인가. 아아, 외면적으로 시가 우리나라에 왕성하지는 못하다 할 것이나 내용을 헤아리면 우리나라의 시가 망한 지 이미 오래다 할 것이다. 시가 망하였는데 국민의 사상이 무슨 연유로 고상하며, 국민의 정신이 무슨 연유로 결합하리요. 그러므로 우리나라 오늘날 현상은 저들 시가 아닌 시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었다 함도 또한 옳도다. 간절히 바라노니, 오늘날 국가 앞길을 유의하는 지사(志士)여, 부득이 시도(詩道)를 진흥함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82
(1909.11.25)
 
 

 
 
83
진택(震澤) 신광하(申光河) 씨는 과시(科詩)로 이름난 사람이지만, 그러나 기실은 씨가 과시를 잘할 뿐 아니라 한문과 한시에 더욱 뛰어나며, 또 시만 뛰어날 뿐 아니라 곧 그 뛰어난 기기(奇氣)가 일세의 뛰어난 사람이라 일컬을 수 있다. 성품이 여행을 즐겨하여 전국의 산과 강을 찾아보며, 그 노년에는 북쪽으로 노닐어 백두산(白頭山)에 올라서 “兩岸蒼崖三百里[양안창애삼백리], 女眞黃葉落朝鮮[여진황엽락조선].”의 구를 읊고, 이미 돌아와 조정에다 대고 군사를 길러 압록강 서쪽을 병탄(倂呑)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그때 사람들이 모두 미친 선비로 지목하여 그 말을 쓰지 않았으니, 뒤에 나온 지사는 같이 우려할 바로다. 아아, 씨를 어찌 5백년 쓸쓸하고 오활하고 괴이한 시인과 같이 일컬을 것인가.
 
 
84
남원 녹초(南園綠草) 봄 백채(白寀)는
85
밤이슬 오기만 기다리고,
86
우리 창생(蒼生) 만백성은
87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 도로 오시기만 기다린다.
 
88
이는 대원군(大院君)이 청국에 잡혀갔을 때에 각지에서 유행하던 향가(鄕歌)니, 당시 인심이 대원군에게 매달렸음은 가히 추상(推想)할 바이다. 대원군이 비록 날래고 사나움이 지나쳐 더러 나라를 잘못 다스린 일을 한 것이 많으나 능히 용감히 결단하고 능히 굳세게 쳐서 폐정(弊政)을 제거함이 한둘이 아니어서 백여년래 정치계의 첫손가락을 꼽을 것이니, 우리 백성들이 이와 같이 제창하고 사모함이 역시 당연하도다.
 
89
(1909.11.26)
 
 

 
 
90
홍경래(洪景來)가 10여세에 고을 서당에 나아가 유학(遊學)하더니, 하루는 그 스승이 높은 난간에 걸터앉았거늘 홍경래가 손으로 밀치는지라 스승이 크게 놀라 돌아다본즉 홍경래가 웃으며 “시세(時勢)가 하도 좋아 배반 하기가 옳지 않은 때문입니다” 하더라. 그 어린 나이에 지은 과시(科詩)의 제목에 「송형가(送荊軻)」 1구가 인간에 흘러 전하는 것에 “秋風易水壯士拳[추풍역수장사권], 白日阿房秦皇頭[백일아방진황두].”라 하였으니, 그 시가 바로 그 사람과 매우 닮았도다.
 
91
고대에는 유현(儒賢) 장자(長者)가 모두 국시와 향가를 즐겨 전중(典重) 활발한 저작물이 많았으며, 또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에 벗들이 모이는 때에 더러 장가(長歌)와 단가(短歌)로 흥겹게 보내는 그 풍류를 상상할 수 있는데, 요 근래 100여년 동안은 이러한 것이 단지 방탕한 남자와 음탕한 기녀의 차지일 뿐이요, 만일 상류사회 수신에 길든 선비는 국시 한 구를 능히 짓지 못하며 향가 한 구절을 제대로 읊지 못하므로, 시가는 더욱더 음탕한 곳에 떨어지고 선비는 더욱더 즐겁고 쾌활한 길이 끊어지니, 국민의 쇠약하고 무너지는 까닭이 비록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것도 또한 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이제 선현의 단가 몇절을 기록한다.
 
 
92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시
 
93
뇌정(雷霆)이 파산(破山)하나 농자(聾者)는 못 듣나니
94
백일(百日)이 중천(中天)하여도 고자(瞽者)는 못 보나니
95
우리는 이목총명(耳目聰明) 남자로 농고(聾瞽)같지 말으리라.
 
 
96
김유기(金裕器) 시
 
97
춘풍도리화(春風桃李花)들아 고운 빛을 자랑 마라.
98
장송녹죽(長松綠竹)을 세한(歲寒)에 보려무나
99
정정(亭亭)코 낙락(落落)한 절(節)을 고칠 줄이 있으랴.
 
 
100
윤선도(尹善道) 시에
 
101
송간석실(松間石室)에 가서 효월(曉月)을 보려 하니
102
공산낙엽(空山落葉)에 길을 어이 찾아가리.
103
어디서 백운이 좇아오니 여라의(女蘿衣)가 무거워라.
 
 
104
서하(西河) 선생 임춘(林椿)은 전주(前朝)의 대시인이다. 몽고란 후에 국치를 씻고자 하여 국내에 분주히 다니면서 시조ㆍ잡가ㆍ한시 등을 지어 고달프게 한 몽당붓으로 국혼(國魂)을 부르짖으며 백성의 기운을 불러일으켰으나 시세가 불리하여 마침내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여 분개함을 품고 길에서 늙어죽으매 지금까지 논하는 자가 그의 뜻을 슬퍼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죽은 뒤에 남긴 소리를 이은 자가 없고, 또 그 문집이 병화(兵火)에 없어져 한장도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였으니, 아아, 어찌 애달프지 않은가. 내가 일찍이 선생을 이태리 시인 단떼에 비교하였으나 그러나 단떼는 그 한자루 붓끝으로 능히 마찌니를 산출하여 옛 로마의 영광을 만회하였거늘, 선생은 죽은 뒤 6,7백년에 나라는 옛날과 같이 약하고 백성은 옛날과 같이 열등하니 선생이 바야흐로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105
내가 『동문선(東文選)』 및 『동시선(東詩選)』을 읽어보니, 서하 임선생의 시문 게재된 것이 더러 있으나 그 시가 평평하여 기력이 끊어지고 없을 뿐더러 또 한 자 한 구도 백성과 나라의 근심에 미친 것이 없어 역사에서 일컬은 선생의 남은 자취와 비교하니 기미(氣味)가 한 터럭만큼도 가깝지 않았다. 이로써 매양 이에 대해 의심을 두었었는데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읽은즉, 이것은 조선조 숙종 때에 청도(淸道)의 중 아무개가 석굴(石窟) 속에서 발견한 것이라 하였다. 아아, 이것이 어찌 선생의 시일 것인가. 그 사람이 가짜로 만든 것이 틀림없도다. 그러나 선생이 진짜로 지은 시는 이제까지 나타난 곳이 없고 단지 『우산문초(于山文抄)』에 선생의 글 한 수가 실렸는데 그 가운데 1절에 일컫기를 “國無大小係于民[국무대소계우민], 時無利鈍係于才[시무리둔계우재], 苟能導民外勇[구능도민외용], 養才有法何畏乎[양재유법하외호], 强敵可畏乎[ 강적가외호], 劉徹楊廣忽必烈[류철양광홀필렬]이리요.”하였더라.
 
106
그 말을 잡아서 미루어 보건대, 이것은 선생의 글인 것이 틀림없도다. 그러나 선생의 충분의열(忠憤義烈)이 저와 같건만 그 후세에 전해진 것이 이 한 수뿐이니 탄식할 수밖에. 비록 그러나 우리나라 노예문학의 사회에서 이 한 수만이라도 얻은 것이 또한 천행인 것이다.
 
107
(1909.12.3)
 
 

 
 
108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은 시인(詩人)의 지위를 낮추 보아서 이것이 풍속 교화와 관계가 없으며, 정교(政敎)에 관계가 없고 단지 누런 촌구석 문중에서 벌레나 개구리가 우는 한개의 세상 밖에 버린 물건으로 알고 있으니, 아아, 이것은 대단히 잘못 안 것이다.
 
109
대시인이 곧 큰 영웅이며, 대시인이 곧 큰 위인이며, 대시인이 곧 역사상의 한 거물(巨物)이다.
 
110
그러므로 아구마(亞寇馬)ㆍ도연명(陶淵明)의 무리가 비록 산림에 살아 발자취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나 그 지은 바 시집이 일세를 풍미하며 인심을 지배하기에 이르니, 대저 변사(辯士)의 혀와 협사(俠士)의 칼과 정객의 수완과 시인의 붓끝이 그 효용의 느리고 빠름은 다르나 세계를 도야(陶冶)하는 능력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대종교가가 종교를 포교함에 있어 우선 시가에 종사하여 이로써 인심을 고치는 것이니, 삼국시대 불교도의 향가와 중국 육조시대 달마(達摩)ㆍ혜능(慧能)의 할구(喝句)와 구약성경 중의 시가가 모두 시이니, 시의 공능과 효용을 이에 알 수 있을 것이다.
 
111
(1909.12.4)
 
 
112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 1909.11.9∼12.4>
【원문】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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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申采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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