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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주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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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2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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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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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실이가 친구 최명애의 집에 몸을 기탁하고 있다가 하마터면 명애의 남편과 이상한 사이가 될 뻔하고, 그 집에서 뛰쳐나와서 문학청년 김유봉이 묵고 있는 패밀리 호텔을 숙소로 한 다음 한동안은 연실에게 있어서는 과연 즐거운 세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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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김유봉의 연애하는 태도가 격에 맞았다. 아직껏 김연실이라는 한개 여성을 두고 그 위를 통과한 여러 남성이 첫째로는 열다섯 살 난 해에 그에게 국어를 가르쳐주던 측량쟁이에서 시작하여 농학생 이 모며 그 밖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모두 평범한 연애였다. 연실이가 읽은 많은 소설 가운데 나오는 그런 달콤하고 시적인 연애는 불행이 아직 경험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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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 문학자로 자임하고, 문학과 연애는 불가분의 것으로 믿고 있는 연실이에게는 그럼 평범한 연애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문학자인 이상은 연애는 해야하겠고, 다른 신통한 상대자는 나서지 않아서 부득불 불만족하나마 그 연애로 참아온 것이지, 결코 만족할 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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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감이 김유봉으로 비로소 만족하게 해결이 된 것이었다. 달밤의 산보, 꽃 아래서의 속살거림, 공손히 바치는 꽃다발, 무수한 ‘아아’와 ‘어어’의 감탄사, 그 가운데서 미소로써 그를 굽어보는 자기를 생각할 때는 연실이는 만족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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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에워싸고 모여드는 청년들도 연실이를 만족하게 하였다. 청년들이라 하는 것이 죄다 명애의 집에 드나드는 그 무리였지만, 연실이가 명애의 집에 있을 동안은 명애가 여왕이요, 연실이는 한 배빈에 지나지 못하였는데 호텔에서는 연실이가 유일한 여왕이요 중심 인물이며 뭇 청년은 그를 호위하는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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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으로 돌아올 때에 그가 품었던 커다란 포부 - 첫째로는 연애를 죄악으로 아는 우매한 조선 사람의 사상을 타파하고(연실이는 이것이 문화의 제일보요, 여성해방의 실체라 믿었다), 둘째로는 연애의 실체문인 문학을 건설하고, 셋째로는 이리하여서 조선 여자의 수준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리려는 이 대이상은 착착 진전되는 듯이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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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운데서 때때로 그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하고 초조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즉, 자기 자신의 지식 정도에 대한 의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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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청년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논쟁하는 이야기가 연실이에게는 알아듣지 못할 말이 퍽이나 많았다. 토론의 내용, 토론의 의의, 토론의 주지만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아니, 주지, 내용에 대해서는 태반이 모를 것뿐이었지만, 심지어 그들이 토론하는 이야기의 말귀도 알 수 없는 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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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야기 가운데 어떤 것을 무슨 형용사로 알고 듣고 있노라면 사람의 이름인 수도 있고, 낯선 말을 누구의 이름인 줄 알고 듣고 있노라면 나중에 그것이 무슨 주의의 외국 말인 수도 있고…… 요컨대 이 나라 말 저 나라 말이며, 학술상의 술어며 고유명사를 막 섞어가면서 토론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연실이에게는 거지반이 알아듣기 힘든 것이었다. 같은 선각자로서 더욱이 만록총중의 일점홍으로 이 그룹의 중심이 되는 연실이라, 그 입장으로도 침묵만 지킬 수가 없거니와, 그의 자존심으로 때때로 말을 끼여보고 싶고, 더욱이 뭇 청년들은 연실이에게 듣기기 위하여 더 애써서 토론을 하는지라, 자연히 연실이는 말을 참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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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처음 몇 번은 참견을 해보았다. 참견하였다가 덧없이 움추러든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공연한 맞장구를 치다가 머쓱해진 적도 적지 않았다. 연실이 자신도 무료해서 딴 말로 돌리고 했지만 그들도 민망해서 좌석이 싱겁게 되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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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을 누차 겪은 뒤부터 연실이는 퍽 주의해서 그들이 연실이 모르는 토론들을 할 때에는 연실이는 편물을 한다든가 독서를 한다든가 그런 시늉을 해서 개입할 기회를 피하고 하였지만 마음으로는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망신스럽다는 일 자체도 불안하거니와 조선의 여류 문학가요 선구자로 자신하고 있는 자기가 그렇듯 모를 일이 많다는 점이 불안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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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한 가운데서 김유봉과의 공동 생활의 1년이 지났다. 1년이 지나고는 김유봉과 갈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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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었다. 그게 1년간 쌓이고 쌓인 여러 가지의 원인이 합하여서 연실이와 김유봉이 갈라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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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생활을 시작하여 석 달 넉 달은 그야말로 꿀과 같고 꿈과 같은 살림이 계속되었다. 유봉은 문학청년다운 온갖 재롱과 아첨에 애무를 연실이에게 퍼부었다. 영화에서 본 바, 또는 소설에서 읽은 바 온갖 서양식 연애 재롱과 연애 방법을 다하여 연실이를 애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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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대하여 연실이도 또한 자기 아는 바 온갖 서양식 연애 기술을 다하여 유봉이에게 갚았다. 서양식 걸음걸이와 서양식 몸가짐과 서양식 표정 태도 등을 배우느라고 주의도 많이 하고 애도 퍽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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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김 선생님. 보다 더 행복되게 보다 더 아름답게 우리들의 라이프를 전개시키기 위해서 베스트를 다합시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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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연실 씨. 현재에도 우리는 행복스럽거니와, 더 큰 행복을 향해서 매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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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참. 저는 김 선생님을 만난 것이 사막에 해매던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난 것 이상으로 환희의 절정이에요. 암흑에서 길을 잃고 갈 바를 모른던 사람에게 천(天)의 일각(一角)에서 한 줄기 성화(聖火)가 비쳐서 길을 인도하는 것과 같아서 가슴이 환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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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하늘에 명멸하는 무수한 별이여. 그대 어찌타 꺼질 줄을 모르나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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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김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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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없고 불도 없는 캄캄한 노대에서 주고받는 속살거림은 과시 서양식이고, 서양식인지라 연애다운 연애이고, 연애다운 연애인지라 문학미가 충일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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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활이 두 달, 석 달, 넉 달이 계속되었다. 그러고는 차차 틈 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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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이에게 있어서는 연실이의 무학과 무식이 차차 눈에 뜨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연애에 달뜬 동안은 그런 흉들이 모두 눈에 안 뜨이거나 혹은 뜨일지라도 흠으로 보이지 않거나 했던 것이, 차차 일자가 지나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서 인제는 현저히 보인 모양이었다. 가장 평범한 이야기 하나 변변히 알아듣지 못하여 동문서답이 태반이어니와, 연실이가 가장 문학적 회화를 하노라고 많은 형용사와 조사와 감탄사를 끼워가지고 아름다운 청과 곡조로 하소연하는 미언여구가 또한 본뜻과는 적지 않게 거리가 있는 것으로서 여류문학가라는 것은 꿈에도 욕심내지 못할 얕은 정도였다. 연애에 취하였을 때는 눈에 안 뜨이던 이런 흠이 차차 냄새가 나면서 나날이 더 현저하게 눈에 거슬리며, 그뿐더러 심상히 보자면 흠잡지 않을 것까지 흠으로 보이고 수효도 늘어가는 한편 흠의 정도도 크게 보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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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모르고 지내고, 그 뒤는 실수쯤으로 가볍게 보고, 또 그 뒤는 간간 고쳐주었고, 또 그 뒤는 핀잔을 주던 것이, 마지막에는 흠잡히지 않을 일까지도 흠을 잡아 핀잔을 주고 무식하다 매도하고, 일부러 큰 소리로 웃어주어서 망신을 시키게까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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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유봉이는 연실이에게 인젠 흥미를 잃었기 때문에 흠이 눈에 뜨이고 대수롭지 않은 흠이 아주 크게 보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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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이의 심정이 이렇게 변함과 같은 보조로 연실이의 심경도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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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이의 태도가 차차 불학무식한 사람과 같아갔다. 처음에는 아주 귀공자다. 이 단아하고 우미하던 유봉이가 날이 갈수록 차차 조야하고 황포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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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여왕을 보호하는 기사와 같던 태도는 차차 사라져 없어지고 조야한 본성이 드러나면서부터는 그의 도량까지도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연실이에게 대해서 문학을 토론하기를 차차 피하였다. 이것은 토론한댔자 연실이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말하자면 연실이의 실력이 발견된 탓도 있겠지만 연실이가 알아들을 만한 이야기도 저희들끼리만 토론하였지 연실이에게 향하는 일이 줄어갔다. 물론 문화적 연애의 가지가지의 재료도 점점 적어지고 시도 없어지고, 달도 몰라가고 별도 몰라가고 꽃도 몰라가고…… 연실이가 ‘문학적 감동’으로 알고 있는 기분이며 정서는 물에 씻기는 듯이 줄어들었다. 이 비문학적인 유봉이에게 대하여 연실이가 차차 소원하게 되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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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넉 달이 지나고 반년, 열 달이 지나면서부터는 서로 기괴한 사이가 되어서, 극도의 증오와 극도의 배척심을 품고 서로 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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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한자리에서 잔다.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한다. 그러나 한 번 미소도 없이, 한 가닥의 ‘자연 찬송사’ 도 없이 한 마디의 시도 없이 제각기 제 감정 제 꿈으로 날을 보낸다. 그리고 이튿날도 또 같은 프로그램이 반복되는 뿐이었다. 문학으로 서로 얽혀지고 사랑으로 얽혀졌던 그들에게서 문학의 수준의 균형을 잃고 사랑에 공명점을 잃었으니(애당초부터 사랑이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웃음이 있을 까닭이 없고 기쁨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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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인하고 나다니는 일도 없어졌다. 유봉이의 친구들이 모여서 연실이를 중심에 두고 문학론들을 지껄이던 일도 지금은 전과 달라져서 연실이는 따로 젖혀놓고 저희들끼리만 지껄였다. 그렇지 않으면 연실이만 호텔에 남겨두고 저희들끼리 밖으로 나갔다. 연실이가 명애의 집에서 뛰쳐나와 유봉이와 함께 패밀리 호텔에 기류한 처음 한동안은 명애의 살롱에 모이던 그룹이 패밀리 호텔을 집합소로 삼고 거기서들 놀았다. 그러던 것도, 연실이와 유봉이의 사이가 식어갈 때는 차차 다른 곳으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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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이는 차차 문학과 떨어졌다. 선구자라는 긍지에도 꽤 흔들림이 생겼다. 문학을 호흡하고 문학을 음식하려는 것이 연실이의 이상이요 희망이어늘 결과는 그 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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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호텔에서 이런 대중 잡지 못한 생활의 1년을 보낸 뒤에 그 생활의 파국이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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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이랬자 그 이른 방법은 너무도 싱거웠다. 다툼하다 못해 언쟁 한 마디도 없이 사실로는 연실이는 그것이 유봉과의 이별인 줄도 모르고 이 국면을 맞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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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유봉은 갑자기 고향 평양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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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언제쯤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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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이는 이렇게 물었다. 인젠 존경사도 서로 약해버리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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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한 1주일 걸릴까, 한 반 삭 걸릴까? 혹은 반년이 될지두 모르구……. 혼자 있기 무서운가? 무서우면 장정이나 하나 시침시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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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인지 진정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요처로 쓰라고 몇 백원 집어주고 짐은 말짱히 꾸려가지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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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다녀오면 무슨 짐이 그리 많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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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시시콜콜히 제 물건은 다 꺼내어 싸므로 이렇게 연실이가 물으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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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가져오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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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곤 하나도 남김 없이 싸가지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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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이는 거기 무슨 의심을 두지 않았다. 며칠을 다녀오려는지, 그동안 오래간만에 좀 홀로 지내는 자유를 향락하고 싶었다. 정거장에나 나가봐야 할 것이나 유봉이가 한사코 말리므로 그것 좋다하고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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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는데 그로부터 나흘 뒤 오정쯤 J라는 사람이 호텔로 찾아왔다. J는 어느 민간 신문 기자였다. 성격은 좋게 말하자면 호협 남자요 나쁘게 말하자면 뻔뻔한 사람이었다. 현재는 연실이가 유봉이와 남이 아니고 유봉이는 시골 간 줄 알면서 찾아왔으니 미루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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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사(召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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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부터 괴상하였다. 연실이는 영문 몰라 번히 쳐다보았다. J는 모자도 쓴 채로 의자 걸상 다 버리고 침대에 덜컥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편안한 듯이 두어 번 들썩들썩 춤을 추어보고는 지팡이로 침대보를 두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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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숙이구 여관이구 어서 하나 정해야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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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머리를 기울이고 연실이를 들여다 본다. 여전히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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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텔은 하루 방세 4원, 식사까지 하면 칠팔 원 이상이 걸릴 테니 어떻게 방침을 대야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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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모를 말. J는 비로소 유쾌한 듯이 한번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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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긴상, 시바이(연극)는 그만두고, 내 양천대소할 만한 뉴스를 하나 긴상께 알리지. 다른 게 아니라 유봉이가 시골 갔다는 건 일장 시바이구, 녀석 ○○동에다가 오보록하니 신접살림 꾸려놓구 소꿉질 살림에 정신 빠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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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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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이는 가볍게 대답하였다. 대포를 잘 놓는 J라 거짓말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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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이가 믿건 말건, J는 여전히 연실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제 말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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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 로맨스 유출유기(愈出愈奇)해서 미금앙천대소(未禁仰天大笑)니 소꿉살림의 마담이 누군가 하면 전 Y전문학교 문과 교수 고창범 씨의 영부인 최명애 여사,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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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재미나는걸요. 신문 기사는커녕 소설 재료도 될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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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산보나 나갑시다. 구더기 나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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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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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아프지요? 두통에는 산보가 제일 약입니다. 자,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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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이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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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아파 못 나가겠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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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종일 누워 있으니 다리도 저리리다. 운동을 해서 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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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는 바람에 연실이는 하릴없이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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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는 연실이를 끌고 걸어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적잖은 길을 걸었다. 그리고 어떤 골목 앞에까지 이르러서 J는 걸음을 느리게 하며 연실이를 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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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도적놈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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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지팡이를 들어서 그 앞집의 문패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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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이는 지팡이 끝을 따라 눈을 들었다. 새로 이사 온 집인 양하여 거기는 문패 달렸던 자리만 희게 남고 그 대신 명함이 한 장 붙어있었다. 보니, ‘김유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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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이는 거기서 넘어지지도 않고 비틀거리지도 않고 호텔까지 돌아옴에 누구에게 부축받은 기억도 없고, 자동차나 인력거를 탄 기억도 없고, 요컨대 평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돌아왔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돌아온 행보며 노순이며 길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해서는 하나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다. J와 함께 돌아왔는데 그 기억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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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이를 잃은 것이 아깝지도 않았고 헤어지게 된 것이 서럽지도 않았다. 냉정히 생각하자면 인젠 냄새나던 처지라 도리어 시원한 편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가볍게, 마치 헌신 버리듯 버려진 것이 분하였다. 자기가 헌신같이 버려졌으면 자기는 유봉이를 걸레같이 버렸다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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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호텔에서 나왔다. 새로 적당한 주인을 잡기까지 며칠을 자기의 주인집에 있으라는 J의 권고를 따라서 짐을 임시 J의 하숙에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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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관념에는 전연 불감증인 연실이는 J와의 동서(同棲)생활도 그저 그렇고 그럴 것이라고 꺼려지지도 않는 대신 달갑지도 않았다. 다만 문학적 생활(연애를 하고 달을 찬송하고 별을 노래하며 꽃을 사랑하는)에서 꽤 멀리 떨어진 것이 매우 섭섭하였다. 다시 그 생활에 들어갈 기회를 포착하기에 마음을 썼다. J는 문학미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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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물레바퀴는 쉼 없이 돌아간다. 한눈팔기만 하면 한 걸음, 절룩하기만 하면 시대는 그 위를 용서 없이 타고 넘어서 정신 차릴 때는 벌써 까마득한 앞에 달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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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이가 패밀리 호텔에서 유봉이와 연애에 골몰한 1년을 지내고 다시 인간 세계에 나와서 둘러볼 때는(그사이가 단 1년의 짧은 기간이나마) 조선의 사회도 적지 않게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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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의 수효가 놀랍게 많아졌다. 한 10여 일 J의 하숙에 몸을 기탁하고 있다가 성밖 어떤 조용한 늙은 과부의 집에 방 하나를 얻고 자리를 잡자 유명무명의 문사들이 유숙하여 연실이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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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날, 그날도 사오 명의 청년 문학도들이 연실이의 살롱(그들은 이 집 마루를 살롱이라 불렀다)에 모여서 잡담들을 하던 끝에, 그 가운데 안경쓰고 얼굴 창백한 친구가 연실이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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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연(그들은 이렇게 연실이를 부른다), 여류 문사 친목회를 조직 해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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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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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이는 얼굴에 썩 점잖은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그 표정은 근일 거울과 의논해가면서 수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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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어디 사람이 있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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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만록총중의 일점홍으로 연실이 자기밖에는 여류 문사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 연실이의 의향에 창백한 청년이 반대의 뜻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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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많진 못하지만 몇 분 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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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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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최명애 씨라구 모르세요? 전 고창범 씨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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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기는 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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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는 아나 최명애가 문사라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연실이는 의아하여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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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쓴 게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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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마……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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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곁의 뚱뚱한 친구들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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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군, 최명애 씨가 언젠가 ○○○에 뭘 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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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아, 아니야, ○○○이 아니구 ○○○창간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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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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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그래. ‘고향 부로(父老)들은 삼성(三省)하라’는 제목으로 아마 서너 페이지 넉넉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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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두 생각나눈. (다른 청년이 끼여들었다) 조리정연하게 명문이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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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선각자구말구, 여자층의 지도자지. 또 친목횔 하자면 또 있습니다. 송안나 씨라구, 글 쓴 건 못 봤지만 아주 옹변가구 활발하지. 또 있습니다. ○○○씨, ○○○씨…… 대여섯 분은 넉넉히 될 걸요. 우선 그 몇 분만으로 조작하구 차차 더 입회시키면 여남은은 남게 되리다. 그만했으면 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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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세요. 미스 연이 주창하셔서 여류 문사 친목회를 조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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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이는 솔깃하게 들었다. 첫 순간은 최명애 등등에게 작품이 없이 어찌 문사라고 하랴누 생각도 들었으나 그렇게 따지자면 자기도 이렇다 할 작품이 없기는 일반이었다. 자기에게 작품이 없는 것은 그런 시간이나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문사가 아니기 때문은 아니다. 언제든 찬스만 있으면 작품은 얼마든지 나올 것이다…… 연실이는 이렇게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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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명애며 그 밖의 지금 말썽된 사람들도, 기위 연애를 이해하고 연애를 사랑하고 자유로운 환경과 새로운 지식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이니 문사회의 회원 될 자격은 넉넉하리다. 좀 꺼리는 바는 최명애를 만나기가 열적은 점과 그보다도 명애를 만나려면 또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유봉이를 대하기가 뭣한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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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연, 꼭 조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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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올시다. 누구가 조직하면 난 회원이나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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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될 말씀입니까? 가장 화형이 되실 분이 뒤에 숨어서야 됩니까? 꼭 선두에 나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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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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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치 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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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밤은 연실이는 많은 공상 때문에 얼른 잠이 못 들었다. 연실이에게는 쉽잖은 경험이었다. 한창 처녀 시절에도 그다지 공상의 세계를 모르고 지낸 그였지만 이 저녁은 공상이 일어났다. 생활 환경 때문에 한동안 문학계에서 떠나 있다가 다시 그 길로 돌아가렴에 임해서 자기의 전도에 다시금 비치는 찬연한 광휘에 현혹되어 잠이 잘 못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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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뒤에 여류 문사의 친목회가 조직되고, 제1회 회장으로는 송안나가 뽑혔다. 멤버는 전부 과거의 동경 유학생이고 법률이 보호하는 남편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환경이 지극히 자유로운 사람들로서 나이는 스물다섯을 전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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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집합 일자며 장소도 특별히 없고 몇 사람이 우연히 모이면 서로 찾아가서 모이게 되고, 모이면 남자 문사들을 찾아가지고 산보를 간다든가 식사를 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 회의 행사였고, 이 회원의 단 한 가지의 특징은 서로 의논해가면서 빛깔 같은 옷을 입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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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 첫 회합에서 오래간만에 명애를 만난 연실이는 열적은 것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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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님(유봉)도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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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물어보았다. 여기 대하여 명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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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몹시 보고 싶어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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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픽 웃어버렸다. 그리고 이것으로서, 이 두 여인의 사이에 막혔던 막은 단숨에 없어져버렸다. 둘의 교제는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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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인생이라 하는 것을 커다란 키에 담아가지고 끊임없이 키질을 한다. 그 키질로써 가라지, 죽데기, 껍질, 먼지 등은 날려버리고 알맹이만 따로 추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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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급격히 수입된 신문화의 선풍과, 그때 때를 같이하여 전개된 대경기의 덕택으로 족하였던 가라지며 죽데기는 이 키질에 모두 정리되었다. 세계적으로 이르렀던 대경기의 반동으로 전세계는 전고미문의 불경기 시대를 현출하였다. 큰 회사 큰 재벌들이 푹푹 넘어지고 파산자가 온 세상에 충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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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기는 자숙을 낳는다. 한때 경기에 생겨났던 부박한 세태와 경표한 풍조는 한꺼번에 쓸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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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 조선문학도 이 영향을 크게 받았다. 금전의 여유가 있어서 자연 출판계가 흥성하였고, 그 덕에 어중이떠중이가 모두 주판을 던지고 마치를 던지고 붓대를 잡았는데, 한풀 꺾인 다음에 그들은 다시 예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에 하나가 겨우 이 키질에도 자기의 명맥을 보존하였지 나머지의 대부분은 좀 우(優)하다는 신문기자로, 그에 버금한 자는 광고 문안자로, 또 그 아래로는 과거 대경기 시대에 몇 번 제 이름이 활자화해본 것을 연줄로 억지로 그냥 매달려 있는 사람으로…… 이렇듯 그냥 붓대를 잡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각기 제 재분에 따라서 새 직업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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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운데서 연실이는 ‘여류 문사’라는 특별한 지위의 덕으로 그냥 문사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기는 하였다. 조선에서 가장 처음의 여류문사로 연실이의 이름은 하도 크게 알려 있었기 때문에 한 개의 작품 행동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리 통에도 그냥 남아있기는 하였다.
 
123
그러나 경제상의 압박은 피할 수가 없었다. 연실이는 아직껏 경제 곤란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 언제 누구가 어디서 주는지는 자기로도 기억이 흐리지만 언제든 주머니에 여유가 있었다. 주머니에 여유가 있는 외에 또 필요한 물건은 어디서 언제 생기는지, 늘 저절로 부족을 모를 만치 준비되어 있었다. 물질상의 곤란이라는 것이 존재한 줄조차 모르고 살아왔다.
 
124
이러다가 갑자기 생전 처음으로 경제 곤란이라는 것에 직면하니 어찌해야 될지 전혀 도리가 생각나지를 않았다. 온갖 사물에 대해서 지극히 감수성이 둔한 연실이요, 현실의 경제 곤란에 직면해서는 갈팡질팡하였다. 경기 좋은 시절에는 그 살롱에는 늘 청년들이 우글우글하였고 경제 곤란을 모르고 지냈는데, 불경기 선풍이 불자 살롱이 차차 적막해갔고 동시에 연실이의 주머니도 가벼워갔다. 간간 2원, 3원, 5원 등 생기기는 하였지만 요런 부스럭돈으로는 생활비가 되지를 않았다.
 
125
주인집의 하숙비를 한 달은 잊어버린 체하고 그저 넘겼다. 매일 대문을 드나들 때마다 채근받는 것 같아서 간이 조막만하게 되고 하였다.
 
126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만에 종내 채근을 받았다.
 
127
빚 채근이 평생 처음인 연실이는 저녁때 드리마 하고 그냥 나왔다.
 
128
저녁때라고 돈이 생길 까닭이 없었다. 저녁때까지 이 동무 저 동무네 집에 일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저녁때도 하숙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고 어떤 동무네 집에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은 역시 갈 데가 없어서 식전 새벽에 명애네 집을 찾아갔다. 명애는 유봉이와 갈려서 다른 사람과 동서하는 때였다.
 
129
꼭두새벽에 침침한 얼굴로 찾아오는 연실이를 명애는 놀라면서 반갑게 맞았다.
 
130
“웬일인가? 자, 건넌방으로 들어가세.”
 
131
겨우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132
“안녕하세요?”
 
133
“응, 안녕할세만 연실이는 진새벽에 웬일이야?”
 
134
연실이는 씩 웃었다. 적당한 대답이 없었다.
 
135
연실이가 자기의 가슴에 품은 근심을 명애에게 하소연한 것은, 점심때도 거진 되어서 명애의 남편(?)이 외출을 한 뒤였다.
 
136
“에이, 바보야.”
 
137
연실이의 하소연을 듣고 명애는 명랑한 웃음을 한 가닥 웃은 뒤에 이렇게 내던졌다.
 
138
“상판대기 빤질하구 나이두 아직 젊었것다, 이 좋은 세상에서 돈 걱정을 한담? 죽어 불여(不如)라, 이생(爾生) 하(何)쓰리오?”
 
139
“그럼 어떡허우?”
 
140
“그만 지혜도 안 나나? 녀석들 가운데 그중 어수룩해 보이는 녀석하구 단 둘이서 있을 기회를 타서 한번 장태식(長太息)을 하는 게지. 우리 천사여, 왜 한숨을 짓는 겐가? 아아 선생님, 인간엔 왜 이다지 고초가 많사외까? 무슨 고초외까, 우리 천사여? 말씀드릴 바가 아니외다. 꼭 말씀……. 아니……. 꼭……. 아니……. 두세 번 사양을 하다가 마지못해 한숨의 곡절을 설명하게나. 거기 주머니를 벌리지 않는 녀석은 따귀를 갈길 겔세.”
 
141
연실이는 탄식하였다.
 
142
“그래도 염치에…….”
 
143
“염치? 뒤집어씌울 땐 언제구 점잔 뽑을 땐 언젠가? 말이나 말아라, 상놈에 자식 같으니.”
 
144
남의 감정을 생각지 않고 함부로 내던지는 농담에 저절로 찌푸려지려는 눈살을 감추려고 연실이는 외면을 하였다.
 
145
물론 명애에게서 무슨 해결을 얻자고 찾은 바는 아니었다. 갈 곳도 없고 하도 클클해서 왔던 바였다. 왔다가 말말결에(가슴에 뭉쳤던 근이라) 저절로 터져나온 것이었다.
 
146
놀랍게 짧은 가을 해가 서편 하늘에 춤을 출 때에 연실이는 명애의 집을 나섰다.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나서기는 하였지만 갈 곳이 없었다. 앞이 딱하였다. 다른 단련은 퍽이나 경험했지만 빚 단련은 처음 겪은 것이라 집으로 돌아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엊저녁에 갚으마 한 것을 오늘도 빈손으로 들어갔다가 주인 노파에게 채근받으면 뭐라 대답할까. 황혼에서 어둠으로…… 각각으로 변하는 하늘 아래서 연실이는 지향 없이 헤매고 있었다. 또 누구의 집을 찾아가서 이 밤을 보낼까. 혹은 눈 딱 감고 집으로 돌아갈까. 이렇게 해매다가 저편 길모퉁이에, 전당국 간판이 있는 것을 보고, 부끄럼을 무릅쓰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147
팔목에 찼던 시계를 20원에 잡혀서 비로소 길게 숨을 내쉬고 주인집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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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49
시계를 잡혀서 간신히 눈앞의 불은 껐다. 그러나 사람이 삶을 경영하는 동안은 언제까지든 의식의 종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라, 한 개의 불을 껐다고 문제가 아주 해소되는 것이 아니었다. 연실이의 소유물이 차차 줄어가기 시작하였다.
 
150
처음에는 값지고 경편한 물건이 차례로 없어졌다. 그러나 나중에는 물건을 선택할 처지가 못 되었다. 육중하고 값 안 나가는 물건, 내놓기 싫은 기념품까지도 차례도 나갔다.
 
151
전당국 출입이 처음에는 부끄럽기도 했고 남의 눈을 피하느라고 돌림길도해보았지만, 차차 어느덧 비위가 생기고 값을 다루는 재간까지도 체득하였다.
 
152
명애는 ‘녀석의 주머니에서 돈을 따내라’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명애며 안나며 그 밖 이전 여류 문사회의 멤버 또는 같은 성질의 여인들이 모두 그 수단으로 삶을 경영한다.
 
153
그러나 연실이는 그러기가 좀 어려웠다.
 
154
차마 용기가 안 났다. 예전 여류 문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도 용감스럽게 그렇게도 비위 좋게 능동적으로 정복적으로 남자에게 접근하였지만 금전과 의식을 위해서는 그럴 용기가 당초에 나지 않았다. 저편 쪽에서 요구해오면 피하거나 사양할 연실이가 아니었지만 이쪽에서 능동적으로 나갈 용기는 없었다.
 
155
그런데 저편 쪽에서는 연실이에게 대해서만은 선착수를 피하려는 눈치가 분명하였다. 그 연유는 연실이가 너무도 유명하기 때문이었다. 실정에 있어서는 명애나 안나나 그 무리들의 방종한 행위가 연실이보다 훨씬 더 심했지만, 인간으로서 연실이가 더 유명했기 때문에 소문이 더 널리 퍼지고 많이 퍼지고, 에누리가 붙고 덤이 붙고 하여, 소문으로만으로는 연실이에게 걸려들었다가는 큰코를 다치게 되는 듯이 알려졌으므로 상종하기를 피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156
무서워까지는 않는 사람일지라도 연실이가 하도 유명한 여인이라 그와 사귀었다가는 소문이 높아질 것을 꺼려서 피하였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또 ‘유명한 김연실’이에게 마음을 두었다가 방을 맞을까 보아 마음도 안 두었다. 이런 관계들로 연실이는 피동적 입장에 서기는 어려운 처지였다.
 
157
능동적으로 자기가 못 나서고 피동적으로는 부르는 사람이 없으니 이 길로는 단념할밖에는 없었다.
 
158
어찌어찌해서 만나게 되는 사람도 하루이틀에 끝이지 오래 계속 되는 사람이 없었다.
 
159
연실이의 생활은 차차 참담해갔다. 전당 잡힐 물건도 인젠 다 잡혀먹고, 어찌어찌하다가 요행 얻어 만나는 이성 친구는 오래 계속 되어주는 사람이 없고, 그의 친구들도 모두 옛날 경기 좋은 세월과 달라서 자기네의 경제 문제 해결에도 허덕이는 판이니 거기 덧붙을 수도 없고…… 풀 죽은 치마에 굵은 양말, 검정 고무신, 헝클어진 머리칼…… 전당질 생활 1년 뒤에 그의 모양은 초라하기 짝이 없이 되고, 그 위에 근심과 영양불량으로 안색까지 초췌하고 야위어서 딴 사람같이 되었다. 물론 하숙 생활을 그만두고 밤껍질만한 셋방 하나를 얻고 자취 생활을 한 지도 오래였으며, 주머니의 시재 결핍으로써 굶은 끼니도 적지 않았다.
 
160
본시부터도 몽상과 공상을 그다지 모르고 지냈지만 생활고에 부대끼면서부터는 그런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요 주머니를 털고는 그 뒤는 무엇으로 먹고 무엇으로 사나…… 딱 눈앞에 닥쳐 있는 이 문제는 다른 생각(근심까지도)을 할 겨를을 주지를 않았다.
 
161
문학? 문학을 박차버린 지는 벌써 오래다.
 
162
자신을 잃은 것이었다. 옛날 자기를 에워싼 청년들과 자기 자신 사이에 지식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그만한 차이는 있어도 될 것이다…… 이만치 생각하고 불안 가운데서도 스스로 위로하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그의 그릇된 생각이었다. 조선 여류 문사 제1기생인 연실이며 최명애, 송안나, 누구, 누구, 이 사람들이 밟은 전철을 경계 삼아 출발한 제2기생의 걸음걸이는 훨씬 견실하였다.
 
163
견실한 것이 더 문학적인지 혹은 방종한 것이 더 문학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견실하니만치 더 이지적이요 이지적이니만치 더 현실적이요 굳세고 믿음성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164
제1기생들이 ‘작품 없는 문학 생활’에 골몰한 동안 제2기생들은 영영 공공 습작에 정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다.
 
165
연애도 잃어버리고 문학도 박차버린 연실이는 굶주림을 면하기 위하여 갖은 애를 썼다.
 
166
그러나 잡힐 물건도 인젠 동이 났고, 연애 수입은 몇 푼 되지도 않거니와 대중도 할 수 없고, 장차는 굶거나 동냥을 하거나 둘 가운데 하나의 길밖에는 남지를 않게 되었다.
 
167
어느 편을 취하나.
 
168
굶을 수도 없다. 동냥도 차마 못하겠다. 남은 길은 둘밖에 없는데 둘 다 취할 수가 없었다. 그 밖에는 인생의 최후의 길, ‘죽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169
이 막다른 골에서 연실이는 비로소 고향 평양에는 부모와 동생이 있다는 일이 생각났다. 음신조차 끓기기 10년이 가까우면 혹은 그들 중에는 작고한 사람도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다야 작고하였으랴. 남보다는 그래도 혈기가 나을 것이다.
 
170
며칠 뒤 연실이는 간신히 차비를 마련해가지고 평양으로 내려갔다.
 
 
171
7
 
172
연실이는 평양에서 열흘도 못 있고 도로 서울로 올라왔다. 평양에는 아버지, 계모, 다 작고하고, 오라비동생(이복)도 하나만이 아내를 얻어가지고 순사를 다니고 있었다.
 
173
연실이가 행색이라도 좀 나았으면 그래도 좀 대접이 달랐을지도 모르나, 간신히 거지나 면한 듯한 꾀죄죄한 꼴로 들어서고 보니 다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174
진실로 불쾌하였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면 도리어 나을 것이다. 제 손아랫사람에게 마치 거지 같은 대접을 받으면서 간신히 열흘을 참다가 도로 서울로 올라왔다. 이튿날로 곧 돌아서고 싶었으나 불행히 차비가 없어서 못 떠나고 있다가 길가에서 옛날 동무를 만나서 염치를 무릅쓰고 동냥하여 차비를 마련해가지고, 떠나노라는 말도 않고 나와버렸다. 평양에 내려갔던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175
동무에게 10원을 꾸어서 차비를 쓰고 오륙 원 남은 것을 신주와 같이 귀중히 품고 경성에 다시 발을 내려놓을 때는 눈앞이 아득하였다.
 
176
어찌하랴.
 
177
그 옛날 커다란 포부와 희망을 품고 동경에서 이곳으로 돌아올 때는 얼마나 희망과 기쁨으로 가슴이 뛰었던고.
 
178
그 뒤 수년간을 조선 유일의 여류 문학자로 이 땅을 활보할 때에 이 땅은 얼마나 아리땁고 향기로웠던고.
 
179
겨우 수삼 년의 일이다.
 
180
같은 땅, 같은 사람이다. 그렇거늘…….
 
181
천만의 발이 활기 있게 걸음을 재촉하는 길바닥을 풀이 없이 걸었다.
 
182
안잠이라도 자리라. 밥데기라도 되리라. 동냥만은 결코 안 하리라. 더욱이 동기네 집의 신세는 안 지리라.
 
183
그사이 열흘 오라비네 집에 있으면서 연실이는 쓴 일 단 일 마다 하지 않고 다하였다. 남의 집에서 그만치 시중해주었으면 치사받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 그렇거늘 동생네 집에서는 해준 일에는 공이 없고 받은 신세는 자세가 된다. 그만큼 속을 쓰고 마음을 쓰고 몸을 쓰면 왜 배가 고프고 옷이 남루하랴. 내 배를 내가 채우리라. 내 몸을 내가 장식하리라.
 
184
동생네 집 열흘에서 갖은 수모 다 받은 연실이는 다시 상경해서 하인 자리를 해서라도 독립하여 살고자 굳게 결심하였다.
 
185
우선 셋방 하나를 얻어서 몸 둘 곳을 장만하고, 그 뒤 직업(음악 개인교수나 국어 교수쯤의 좀 고등한 직업에서 안잠자기, 찻집 등의 낮은 직업에 이르기까지 피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을 구하려고 차표를 역부에게 주고 그 뒤는 오륙 원의 돈과 몸에 걸친 남루 한 벌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조촐한 몸을 백만 장안으로 끼여들었다.
 
186
집세가 헐한 ○○정 근처로 찾아갔다. ‘복덕방’이라는 휘장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들치고 들어서면서 주인을 찾았다.
 
187
매달 한 3원짜리 사글셋방 하나를…… 이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몹시 서툴렀다. 복덕방 주인은 쉰 내외쯤 되는 중노인이었다. 그는 이 하이칼라 같기도 하고 초라하기도 한 젊은 여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동저고리 바람으로 나섰다.
 
188
연실이는 집주릅의 뒤를 따라서 묵묵히 걸었다. 가면서 생각하였다. 중개인이 몹시 낯익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하였다.
 
189
“방은 한 달에 3원이지만 석 달 월세를 깔아야 합니다.”
 
190
중개인은 이런 말을 하였다. 그러나 웬 까닭인지 중개인의 뒷모습에 몹시 흥미를 일으키고 그것이 누군지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욕구 때문에 그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였다.
 
191
방은 보았다.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도 똑똑히 안 보았다.
 
192
그날 밤, 이 초라한 행색을 쉴 곳도 없어서 경성역 대합실에서 밤을 보내다가, 연실이는 문득 아까 그 중개인의 정체를 알아냈다.
 
193
지금부터 10여 년 전 연실이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측량쟁이, 열다섯 살 나는 소녀 연실이에게 처음 ‘이성’을 알게 한 사나이…… 그 인물의 10년 후의 모양이었다.
 
194
연실이는 미소하였다. 노엽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반갑지도 않았다. 웬일인지 미소가 저절로 떠오를 뿐이었다.
 
195
“두마라나이 모노테수 응아 도우조(별 재미없는 것입니다만 아무튼) …….”
 
196
그때 그가 가르치던 괴상야릇한 발음을 입속으로 한번 외어보고 작은 소리까지 내어서 웃었다.
 
197
이튿날 다시 그 복덕방을 찾아가서 그를 보고,
 
198
“나 몰라보세요?”
 
199
하고 물어보았다.
 
200
“왜 몰라, 김연실이지.”
 
201
그는 태연히 대답하였다.
 
202
“언제 알아보았수?”
 
203
“어제 진작 알아봤지.”
 
204
“그럼 왜 모른 체했어요?”
 
205
“아는 체하면 뭘 하오?”
 
206
딴은 그렇다.
 
207
“그래 벌이는 어떠세요?”
 
208
“그저 굶지나 않지.”
 
209
“댁은 어디세요?”
 
210
“홀아비도 집이 있나.”
 
211
“가엾어라.”
 
212
“임자는 왜 혼자서 집을 얻소? 소박맞았나요?”
 
213
“과부도 소박맞나요?”
 
214
“과부라? 가엾어라.”
 
215
그날도 그만치 해두고 집은 얻는다 안 얻는다 말없이 또 갈렸다.
 
216
또 그 이튿날 연실이는 또 갔다. 그날 이런 말이 있었다.
 
217
“과부 홀아비…… 한 쌍이로구먼.”
 
218
“그렇구려.”
 
219
“아주 한 쌍 되면 어떨까?”
 
220
“것두 무방이지요.”
 
221
이리하여 여기서는 한 쌍의 원앙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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