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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病)이 낫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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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7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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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낫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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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童話[동화]」의 續篇[속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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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지 못한 몸이라, 업순이는 가을 새벽의 쌀쌀한 바깥 바람기가 소스라치게 싫어, 연해 어깨와 몸을 옴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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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록콜록 기침이 나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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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이, 하찮은 것 같더니(그도 원기가 쇠한 탓이겠지만) 들고 걷기에 무척 힘이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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훤하니 빈 공장 마당엔 이편짝 창고 앞으로, 간밤에 짐을 냈는지 펐는지 미처 쓸지 앉은 채 뽀오얗게 된서리가 앉은 새끼 토막이 낭자히 널려 있다. 그 차가운 서릿발이, 가뜩이나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듯 업순이는 얼른 외면을 한다. 외면하는 눈 바로는 저기만치 나란히 선 쌍굴뚝에서 시꺼먼 연기가 뭉클뭉클 소담스럽게 솟아올라, 불현듯 푸근한 공장 안이 생각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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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 공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업순이는 한량없이 언짢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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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나서, 얼마 동안 공장의 전속 의사한테 약도 먹고 하며 치료를 받았으나 좀처럼 차도가 없었다. 몸은 아프고, 몸이 아프니 집 생각은 여느때보다도 더 간절하고. 이래저래 집으로나 가보는 것밖에 없었다. 흔히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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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다 주느라고 같이 가는 공장 인사계의 ‘장선생님’은 황새처럼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장을 서서 정문을 향해 걸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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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은 허한데, 업순이는 만만치 않은 짐까지 한손에 들고 그 뒤를 따르자니 자꾸만 아랫도리가 휘뚝거리고 발길이 제대로 떼어지질 않았다. 팔은 사뭇 늘어나고. 누가 불끈 좀 들어다 주었으면 절을 열 번이라도 할 것 같았다. 이렇게 하고, 삼십 분이나 걷는 정거장까지 나갈 일이 그만 기가 질려 못하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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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 그뿐인가. 차에서 내려서 집에까지 가는 십리길은 어떻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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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어제쯤 아버지더러 이리로 좀 와주시라고 전보라도 칠 것을. 찻삯이야 돈은 얼마간 들더라도 차라리 그랬더라면 퍽 좋았을 것을. 어머니나 아버지는 언문도 모르는 이들이라지마는, 그렇기로 동네서 전보 한 장 보아 줄 사람이 없진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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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후회도 하면서, 넓은 마당을 다 지나, 마악 철문을 나서다가 문득 그제서야(무엇이 깨우쳐 준 듯) 주춤하고 고개를 돌이키며 휘이 한 바퀴 공장 울안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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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5호동(五號棟)의 이층에서 동무들이 서넛이나 한데 엉키어 열린 유리창으로 내다보고 있다가, 일시에 손수건이랑 손을 흔들어 준다. 그렇게 하고들, 기다리고 있었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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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그들은 저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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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순아 잘 가거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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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거라. 업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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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낫어가지구, 또 오너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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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소리소리 외치며 당부를 했을 것이건만, 작업중이라 반장이 알아듣고 쫓아와서 지청구를 할까 봐서 소리는 지르지 못하고. 안타까이 손수건이랑 손만 흔들어쌓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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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순이는 와락 목안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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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들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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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녜야 잘 있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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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외쳐지는 것을, 역시 동무들을 위해 조심이 되어, 꿀꺽 소리를 삼키고 손만 마주 흔들면서 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가득 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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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집으로 돌아가기로 작정이 된 닷새 전 그날부터 줄곧 그리고 어젯밤에도, 마지막 아까 식당에서도, 동무들과 그런 이야기를 하며 작별엣 말을 나눌 적마다 번번이 나오려고 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고 참고 하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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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고달픈 때나 더러는 재밌고 즐거운 때나, 항상 같이들 어우러져서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며, 함께 자고 함께 먹으며 하던 그 여러 동무들과 훌훌히 헤어지게 되고 보니, 그야 응당 섭섭한 노릇이었다. 일변 이러네저러네 해도 그새 벌써 일 년 넘겨 이태 가까이, 이곳 공장에서 하루같이 일을 하며, 몸을 담그고 지내오는 동안(가지가지 괴롭고 야속턴 말이야 이루 없는 것이지만 그런 반면) 잔정도 들 만큼 한 터이니, 연한 마음이겠다 일조에 떠나가기가 작히 또한 섭섭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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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지금 업순이는 그와 같은 단순한 인정 말고도, 오늘날 이곳을 그만두고 돌아가는 마당을 임하여, 따로이 마음 자못 답답할 곡절이 없지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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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스런 포부였으나마, 깜냥엔 크고 즐거운 희망이 있었다. 그것이, 세월은 절반도 더 보내고도 뜻한 바는 십분의 하나도 채 이루지 못했다. 부질없은 병만 얻어가지고. 그리하여 헛되이 이렇게 중도에 작파를 하고서 물러가고 말다께. 차마 애달프고 원통한 일이었다. 남이 누가 훼살이라도 논 짓인 듯, 그러나 얻다 대고 호소할 곳 없는 막막함이었다. 안타깝고 서러운 나머지, 눈물밖에 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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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주소로 그리워하며 가고 싶던 어머니 아버지한테요, 그래요 즐겨 돌아가는 노릇이니, 기쁨이 한편으로 솟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더우기 병이 아주 기울어서 몸져 눕기 전의 한동안, 그 죽기보다도 일이 하기 싫던 일. 그리하여 진절머리가 나는 이곳 공장을 그만두고, 마침내 편안하고 걱정 없는 우리 집으로 가는 날을 당했으니,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개운스럽고 마음이 뇌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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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이건 또 이것이었다. 하기 싫던 일과 심신의 지극한 고달픔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우리 집과 어머니 아버지의 알뜰한 품으로 달려가기가 비록 기쁘고 후련하여 좋다 할지라도, 동무들이며 직장과 서로 들었던 정은 역시 정이었다. 하물며, 뜻아니 병으로 말미암아 희망을 꺾이고서 속절없이 이렇게 추렷한 모양으로 그곳을 물러가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지워질 수 없는 한이요 미련이었다. 어떤 무엇으로도 수월힌 메꿀 수 없는 공허였다. 흡사 실연과도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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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순이는 눈물을 건사하지 못해, 강잉하여 고개를 돌리며 한 걸음 공장문을 나서는데, 이윽고 그때에 아침 해가 뜨는 것이 보였다. 질펀히 퍼져나간 먼 벌판 저 끝으로 아스라한 산봉우리에서 광채 없는 햇조각이 비죽이 비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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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솟는 것을 보고 업순이는 문득 ‘그날 아침……’ 적이 생각이 났다. 작년 여름, 이곳으로 떠나오던 그날 아침. 그때도 마악 저렇게 해가 뜨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퍽도 건강하고 명랑한 아침이었다. 싱싱한 여름의 아침해였었다. 저렇게 황량한 가을 아침의 빛 없이 쓸쓸한 해는 아니었다. 하물며 해를 대하는 업순이는, 마음이나 몸이나 그때와는 시방이 불썽 아니로 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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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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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엿이 먼동이 트면서, 엷은 안개가 땅 위에 내려앉아 조용히 흩어지기 시작하는 새벽이었다. 나뭇잎마다 번지르하게 이슬이 묻고, 풀 끝에는 이슬 방울이 영롱하게 맺히고, 마당도 이슬에 젖어 촉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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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가 서너 마리 지붕 말랑이에서 지저거리고. 둥주리에서 닭이 조바심을 치는가 하면, 도야지울에서는 도야지가 시장하다고 떼를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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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먼저 업순이가, 모기장 붙인 안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왔다. 자고 난 눈인가 싶지 않게 윤기 있고 맑은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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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에서는 아버지가 아직 잠이 들어 있었다. 업순이는 조심조심 비끼며 나오다가 말고, 문득 그대로 멈춰 서면서, 잠든 아버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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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넘어 센 머리털과, 머리보다 더 센 수염이 이날 아침따나 새삼스럽게 업순이는 눈에 뜨이는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가 밤새 이렇게 늙은 성만 싶어, 처음 보는 것같이 머리털이랑 수염이 다시금 들여다보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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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을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느라니까, 어렸을 때 제가 했다는 이야기 생각이 났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업순이 제가 어려서 일쑤 아버지가 자고 있는데로 엉금엉금 기어가서는 수염을 잡아 꺼들기. 아버지가 안아 줄 때도 자꾸만 수염만 잡아 나꾸고. 그럴라치면 아버지는, 허어 이놈의 딸년이 아범 수염을! …… 하면서 허겁스럽게 소리를 지르고 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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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순이는 그런 생각을 하던 끝에 불시로 시방 도로 그런 어린애기가 되어서, 그때처럼 저 수염을 좀 잡아당기며, 아버지한테 안기어 놀아보았으면, 그랬으면 무척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간 그만 우스워서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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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머리맡에는 곱게 삼은 짚신이 두 켤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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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까지 십 리나 걸어나가자면, 고무신은 아무래도 발이 아프니라. 그러면서 간밤에 마당에 앉아 공덕을 들여 삼고 있던 짚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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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을 보고 업순이는 그날 아침에 잠이 깬 뒤로 처음 비로소, 오늘이 그리로 떠나는 날인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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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가슴이 울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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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그렇지 않았고, 그저께도 그그저께도 그렇지 않았는데. 언짢은 것까지는 아니어도, 이상하게 가슴이 조금 울렁거리려고 했다. 어제나 그저께, 그그저께와 일반으로 몸이 두웅둥 뜨는 것처럼 기쁘듬하기는 하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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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방 밑에서는 네눈이가 꼬리를 홰애홰 치면서 웃고 섰다가, 업순이가 마당으로 내려오자, 요놈이 좋아라고 가로 뛰고 세로 뛰고 해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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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야지는 발자죽 소리부터 알아듣고는 끼익끽 지르던 소리를 그치고서, 꿀꿀꿀 알은체를 하고. 둥주리 문을 열어주기가 바쁘게 닭들은 앞을 다투어, 후르륵후르륵 뛰어내려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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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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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죽 뻗어올라간 소나무 줄기 틈으로 내다보이는 저 멀리 들팔 건너, 하늘과 땅이 맞닿은 끝에서 불그레하니 햇살이 퍼지면서, 인하여 시뻘건 햇덩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업순이는 그쪽을 바라보고 섰다가, 저도 모르게 듬씬 숨을 들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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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평화스럽고 유쾌한 아침이요, 그 뜨는 싱싱한 해였었다. 모두가 잘 손질을 한 듯, 살뜰하고 구김살 하나도 없는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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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순이는 그러고, 젖 배불리 먹고 나서 엎치락뒤치락 놀고 있는 애기처럼 아무 근심도 불안도 없이 편안하고 만족한 마음일 수 있는 ‘동화’의 세계요 그 아침이었었다.
 
51
그때의 업순이는 신체도 마음과 한가지로 충실했었다.
 
52
하기야 업순이는 그다지 실팍한 태생은 아니었다. 목이 길고 가늘고, 가슴이 좁고 눈이 크고, 살결이 무르고 식성이 고르지 않아 편식을 하고. 이런 소위 선병질(腺病質)의 체질이었다. 그런데다가, 공기 좋은 농촌에서 나서 농촌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가령 호흡기 계통의 질병에는 매우 저항력이 약한, 따라서 도회지의 공기가 적당치 못한 체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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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그렇다고서 무슨, 몸이 어디가 고장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실하지만 못할 뿐이지 병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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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피어날, 열일곱 살박이의 색시로 결코 빈약치 않은 몸집이었다. 얼굴에도 수족에도 고루 잘 살이 올라, 부얼부얼하니 차라리 탐스럽게 생겼다 할 편이었다. 혈색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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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 이렇게 마음도 신체도, 온전하고 흠결 없는 업순이었다. 그의 세계와 생활은 화려하거나 가멸치는 못할지언정 밝고 편안했었다. 야심과 비약이 없는 대신 이지러진 자리가 없고 착실했었다. 건강하기, 그리하여 그날 아침 동천에서 뜨고 있는 해와 같고, 앞날이 한갓 즐겁던 그 업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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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의 업순이는, 얼마나 가엾이도, 마음과 몸이 한가지로 바스러지고 말았음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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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은 야위고, 핏기는 밭아 핼쓱하고. 그렇게 핏기가 없고 야윈 얼굴이라, 본시도 크던 눈이, 눈만 한결 더 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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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참으로 볼 수 없게시리, 실내끼처럼 길고 가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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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 그리하여,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장구와 같은 앙상한 형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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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에서 물 한 동이를 허깨비 들 듯 들어 이곤 하던 기운은 죄다 어디로 가고, 과히 무겁지도 않은 가방 하나를 못 이겨서 하마 비척거리질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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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용, 열이 높고 진행이 급격한, 가령 티푸스 종류의 대병을 앓고 났거나 혹은 오랫동안 난치의 중병을 현재 앓고 누웠거나 한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그런 쇠약이었다.
 
62
그러나 업순이는 (적어도 업순이 스스로 생각엔) 그런 대병이나 중병을 앓는 일은 없었다. 차라리 병다운 병도 아니거니 싶은 만큼, 약간의 가벼운 증상이, 다만 꾸준히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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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초는 지난 오월 그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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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감기로 이틀인가 앓고 났는데, 그 뒤로부터 늘 오후가 되면 몸이 찌뿌듬하니 좋지가 않으면서 오삭오삭 춥고 했다. 밭은기침이 나고, 검누른 가래가 생하고. 도한이 심하여, 새벽에 잠이 깨서 보면, 요바닥이 축축하도록 젖었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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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나 채 나가지 않아서 그러나보다고 했으나,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해도 종시 그 대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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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일변 구미가 떨어져서 통히 밥이 먹히지 않았다. 그러고는 사족이 나른하여 맥이 없고,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자꾸만 눌 자리만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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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타는가 했다.
 
68
혹시, 체증이 생겼나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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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동무들 가운데 여럿이 그러하듯이 ‘수중다리’의 시초인가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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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 게 아니라, 반장 말대로, 물이 맞지 않는가 보다고 했다. 동무들도 대개 그런 의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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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럴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렇지 않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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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어째서, 처음은 아무렇지도 않다가, 열 달이나 지나서야 새 채비로 안 맞다니. 혹시 그런 수도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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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다리⎯각기는, 다리가 팅팅 붓고 하는데 도리어 마르질 않는가. 하기야 붓지 않고 마르는 각기도 있다곤 하지만, 다른 증세가 무얼로 보나 각기는 아니었다. 보아도, 숱한 각기 앓는 동무들 가운데 업순이 저처럼 몹시 지치는 아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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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가 없어서 밥이 먹히지 않을 따름이지, 위장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가슴이 거북하다거나 배가 아프다거나 한 줄은 몰랐다. 그러니 체증은 아니기가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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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는 여름을(여름이고 봄이고) 탄 적이 없었다. 한 것을, 시방 새삼스럽게 여름을 타고 말고 하다니, 모를 말이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여름을 타서 몸이 파리하고 원기가 없고 한 것하고는 역시 증세가 너무 과했다. 하물며 찬바람이 난 가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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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간 이렇게 극히 하찮은 몇 가지의 증상이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그 밖엔 몸이 어디가 한 군데라도 두드러지게 아프다거나 쑤시고 결린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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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굳이 아픈 곳을 찾아내란다면, 왼편 젖가슴 위가 속으로 죄끔 그저 이상하다고 할까. 하지만 벼룩이 문 것만도 못한 걸 아프단 말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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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디가 아프지도 않고. 오후면 오한이나 나고. 기침을 하고. 구미가 없어서 먹지를 못하고. 원기가 부치고. 이쯤 대수롭지 않은 증상인데, 그러나 몸은 놀라울 만큼 그리고 급속히 수척하여 갔다. 그러면서 그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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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업순이 자신이든지, 직장의 동무들이나 반장이든지, 또는 부모가 옆에 있어 그 부모든지, 누가 되었건 호흡계 계통의 질병에 대한 일반 상식적인 지식이나 혹은 경험을 가진 것이 있었다면 첩경 짐작을 했을지도 모른다.
 
80
경미하나마 폐에 동통이 있고 미열이 계속되면서, 기침과 담과 도한이 있고. 식욕이 없고. 그리고 전신적으로 심한 수척이 오고. 그런데 환자는 선병질의 체질로서 농촌에서 나서 농촌에서 자라다가 불시에 많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집단생활을 하는 도회지의 공장으로 왔었고.
 
81
이만하면 십중 팔구는, 그 경미한 동통이 있다는 부분을 중심으로 폐가, 상당히 진행된 결핵의 증상이기에 우선 충분한 재료일 수가 있는 것이었다.
 
82
그러나 업순이 자신은 물론,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도시에 그런 방면의 지식이랄지 경험이 있질 않았었다. 따라서 그것을 판단하거나 알아챌 바가 없었다.
 
83
오월달부터 그렇게 발병이 되어가지고, 시름시름하면서 아무려나 여름은 그런대로 넘겼다.
 
84
구월로 접어들면서는 자주 자리에 누웠다.
 
85
그러나, 그러면서도 하루고 이틀이고 누웠다간 또 일어나서 일을 했다. 그만 못 견디겠는 것을, 억지로 억지로 일어나서, 억지로 억지로 일을 했다. 돈 4백 원을, 어서어서 그 돈 4백 원을 모아야 하겠어서.
 
86
처음 겸 마지막으로 딸 하나를 낳았더니, 생긴 게 또 북슬북슬하대서 삼신님이 업을 점지해 주셨다고, 그래 업순이라고 이름을 지었었다.
 
87
업순이는 자라서, 나이 열일곱이었다. 그러니 옛날 세상 같았으면 벌써 시집을 갔을 테고, 웬만하면 그새 첫애기라도 낳았을 테지만, 아직 귀영머리를 딴 처녀였다. 그렇다고 어머니 아버지가 무슨 투철한 개화를 한 것도 아니요, 갈데없는 무식꾼이고 가난한 농투성이기는 하지만, 일찌감치 남의 집 민며느리라도 주자니, 무남독녀 외딸인걸 그럴 법이 없기도 하려니와, 더욱이 남의 집 민며느리란 팔자가 빠안히 들여다보이는 것인데, 차마 눈 멀뚱멀뚱 뜨고서 그 고생길로 몰아넣다께, 그건 생의도 못할 노릇이었다.
 
88
그러니, 그러구저러구 할 게 아니라, 에미 애비는 개명을 못했을망정 시쳇속으로 어디 네나 그 개명을 좀 해보라고(귀염삼아) 집안 사세 부치는 것도 상관 않고, 읍내의 보통학교에 들여보내서 여섯 해 동안 학교 공부를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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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막상 그렇게 학교 공부를 시켜놓고 보아도 이렇달 무슨 수는 없고, 촌 농투성이의 계집애 자식이었지 별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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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고 보니, 인제는 동네 떠꺼머리 총각이나마 데릴사위라도 정하잔즉 실없이 눈에 차지가 않고, 그렇다고 ‘자격자’를 골라서 혼인을 하잔즉 짜장 지체도 없으려니와 가랭이가 찢어지게 가난한 터수에 도무지 가량없는 소망이고 해서, 일이 대단 허무하고도 맹랑하게쯤 되었었다.
 
91
‘개명두 다 구격이 맞구서야 하는 법야!’
 
92
‘그렇다우!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면 죽는다구 안허우?’
 
93
가끔 두 내외가 마주 앉으면 어이가 없대서 막막히 뇌는 말이었다. 그러나 한갓 시속이 그렇고, 남들도 말만한 계집애 자식을 그냥 두어둔다고 숭하지 않는 것만 다행히, 한동안 그대로 저대로 두고 보아오기는 왔었다.
 
94
그러자 계제에 전주 감영의 비단 짜는 공장에서 사람이 내려와서, 구장을 앞장 세워 가지고 이 집 저 집, 계집아이 있는 집을 적간하고 다니면서, 직공을 뽑는 설레에 업순네도 얼른 응하고 나섰다.
 
95
업순이야 집에서도 더러 명주도 날아보고 했겠다 보냄직도 하고, 그래 그렇게 가서 있으면 월급이라더냐 일급이라더냐, 이십오 원이니 삼십 원이니 받고 한다니까, 한 이태만 모아도 제 시집갈 밑천은 존존할 터이었었다.
 
96
무서운 가뭄으로 큰 흉년이 든 바로 그 이듬해 여름이었다.
 
97
그러니, 흉년 끝에 집에다가 잡아 매두고 펀펀 굶기느니보다, 그런 데라도 보내서 제 목구멍 하나 얻어먹게 하는 것만 하더라도 또한 어디며.
 
98
이렇게 두루두루 하염직한 그리고 다행스런 거리여서, 선뜻 그렇게 작정을 한 노릇이었다.
 
99
하기야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더구나 과년한 계집애 자식인걸, 낯선 타관으로 혼자 떠나보내기가 부질없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짐짓
 
100
‘머 어떨라구!’
 
101
‘한 일이 년, 잠깐인걸……’
 
102
‘남들도 다 보내고 한다니, 쯧! ……’
 
103
이렇게 스스로 마음을 다독거림으로써 안심을 삼고 과단을 내지 않지 못할 만큼, 형편이 각다분한데다가 일변 계제가 좋고 무던했었다.
 
104
업순이 저도 좋아했다.
 
105
비단을 입어보지 못하는 촌 계집아이로, 가령 입지는 못할망정이라도 제 손으로 비단을 짠다는 것, 그것 한가지만 해도 업순이한테는 우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06
깨끗하고 눈같이 정한 하얀 비단. 눈이 부신 진자주 비단. 시원스런 초록 비단. 첫봄 머리의 개나리꽃같이 반가운 비단. 진달레꽃같이 이쁜 비단.
 
107
아주 작정이 되어, 그 이야기를 어머니 아버지한테 듣고 나서부터 업순이는 날마다 그런 여러 가지 좋은 비단을, 피륙으로 혹은 말라논 옷감으로 다루고 있는 꿈 아닌 꿈을 얼마나 즐기고 했던고.
 
108
이런 꿈도 즐거웠거니와, 그러나 업순이는 현실적으로 ‘산술’이 대단히 착실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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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여섯 달 동안 견습을 마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한 달에 적어도 이십오원씩은 벌이가 된다고 하니 25원에서 기숙사 밥값 7원 50전을 제하면 17원 50전이 남아. 그 17원 50전에서 2원 50전만 용돈을 쓰고 5원은 집으로 보내고 나머지 10원은 꼬박꼬박 저금을 한다. 그렇게 하기를 3년만 두고 한다치면 통 360원. 래 있으면 일급이 차차로 오른다니까 3년 동안에 4백 원은 되렷다. 그 4백 원이 차거들랑 그땔라컨 한목 죄다 찾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와서는 아버지는 큰소를 한 바리 사 드리고. 어머니는 양돝 걸구(암놈) 한 마리를 사 드리고. 집안 빚을 갚아 드리고. 그러고서 한 백 원 남는 걸로는 시집갈 밑천을 하고. 대체 시집이란 게 무엇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고, 당장 그다지 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 하기는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노오 그런 걱정이요 또 남들도 다 가는 시집이요 하니, 나도 가기는 가야 할 테고. 그러니 그 끈터리로 그 마련도 하는 것이 마땅하고, 또 그 밖에야 집안 형세가 달리는 변통이 없고.
 
110
이렇듯이 업순이는 예산과 포부가 자못 알뜰스러웠었다. 깊기로도 영감처럼 의젓한 궁량이었다. 그리고 그 성취를 그는 믿었었다.
 
111
지극히 겸손하고도 솔직한 설계였다. 결코 분에 넘치거나 부당한 욕심이 아니었다. 어디까지고 떳떳할지언정 조금치도 억지와 무리가 없었다. 따라서 성취될 수가 있는 것이고, 응당히 성취되어야 할 것이었다. 성취를 믿어도, 그러므로 공상은 아니었다.
 
112
진실로, 가장 이 세상에서 몰인정한 사람일지라도, 몹쓸 악인일지라도, 업순이의 요만 겸손하고 가난한 ‘야심’을 가져다 트집을 잡아 시비를 하며 방해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설가라고 하는 천하에 잔인하고도 악착스럽고도 박절하고도 냉혹하고도, 가지가지로 그 죄 많은 사람은 말고서는……)
 
 
113
업순이의 목적한 바 4백 원 저축의 삼개년 계획은 처음만은 그래도 순조로이 진행되는 성하기도 했었다.
 
114
지나간 이월까지에 무사히 견습을 마치고, 삼월부터는 옹근 직공으로 옹근 일급을 받았다. 하루 85전씩.
 
115
삼월 한 달에 스무아흐레 동안 일을 했고, 수입이 도합 24원 65전이었다.
 
116
그 24원 65전 수입의 지출 내역은 다음과 같았다.
 
117
① 7원 75전……………………………………기숙사 식비
118
② 25전…………………………………………의무저금.
119
③ 10원…………………………………………저금.
120
④ 5원 …………………………………………집에 보내고.
121
⑤ 1원 65전……………………………………잡비.
 
122
다음 달인 사월에도, 수입 총액과 지출 가운데 다른 항목에 약간의 변동은 있었으나, 10원을 저금한 것과 5원을 집으로 보낸 것에는 다름이 없었다.
 
123
유월에는 일급이 5전이 올랐다. 생일처럼 퍽도 기뻤고, 10원에 1원을 더하여 11원을 저금할 수가 있었다.
 
124
저금은 처음에 마음 먹었던 대로 다달이 10원씩 늘어가고. 일찌감치 승급이 되어, 단 1원이라도 더 저금을 하고. 병은, 병이 나기는 났었지만 아직 병답지도 않아 심상히 여겼을 뿐 아니라 그다지 부대끼는 줄도 몰랐고. 해서, 아무튼 유월까지는 일이 순조로운 셈이었다.
 
125
칠월, 팔월 그리고 구월까지도 억지를 써가며, 앓으며 말며 일을 감당해냈었다. 그러면서 저금도 41원 52원으로, 52원이 62원으로, 62원이 72원으로, 이렇게 달마다 10원 혹은 11원씩이 불어갔었다. 앓느라고 빠지는 날이 생기고 하여 수입은 그만큼 줄었지만, 그 대신 잡비를 덜 쓰고서 여일히 저금은 10원을 채우곤 했었다.
 
126
순전한 강단이었다. 몸에 대해서는 무서운 자살행위였었다.
 
127
‘일을 해야지!’
 
128
‘어서 바삐 4백 원을 채워야지!’
 
129
‘아프다고 누워만 있으면 어떡하자구!’
 
130
‘벌진 못하고 기숙사 밥값만 축내서야, 제주말 제 갈기 갉아먹기지!’
 
131
‘일을 해서, 벌이를 해야지!’
 
132
이렇듯 저를 채찍질하며, 이를 악물고 직장엘 나갔다. 죽기보다도 일이 하기가 싫었으나, 그래도 매달려선 놓지 않았다. 방금 쓰러지려고 하는 것을 그래도 참고 견디었다. 그런 때에는『콩쥐 팥쥐』 이야기가 생각이 나고, 괜히 설움이 북받치기도 했다.
 
133
강단과 억지도 그러나 한정이 있었다.
 
134
시월 후보름부터는 아주 몸져 눕고 말았다. 그러면서 몸은, 그제는 영영 아주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135
‘내일은 좀 일어나 보려니……’
 
136
그 다음날 또
 
137
‘내일은 부디 일어나려니……’
 
138
또 그 다음날
 
139
‘내일은 기어코 일어나려니……’
 
140
연방 이렇게 내일은, 내일은 하는 동안에 시월 하반의 보름이 건듯 넘어갔다. 그러고는 계속하여, 동지달 선보름을 종시 꼼짝 못하고 병석에서 보내며, 마침내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141
그새 이틀 걸러큼씩 공장 전속의 병원엘 나가 증세를 보이며 줄곧 약을 타다 먹고 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끝끝내 효험이 없었다.
 
142
한 달 장간이나 약을 먹고 치료를 해도 아무런 동정이 보이지 않는데야, 다시 한번 생각할 문제였다.
 
143
‘언제까지든, 예서 이렇게 하고 누워 있을 것인가? 어떡하자고……’
 
144
도저히 부질없은 노릇이었다.
 
145
이때에 비로소, 누르고 눌렀던, 집 가고 싶은 생각이, 기회를 타서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쳐 올랐다.
 
146
그러면서도 선뜻
 
147
‘집으로 가자!’
 
148
하는 결단은 나지지 않았다. 가고도 싶고 가지 말고도 싶고, 반반이었다.
 
149
드디어 닷새 전.
 
150
마침 아버지한테서 편지도 오고 한 날이었다. 몸이 편치 않아서 며칠째 누워 있다고만 간단히 기별을 했었는데, 곧 되집어 성화 같은 걱정의 회답이 왔었다. 객지에서 병이 나서 앓고 누웠다니 될 말이냐고. 즉시 집으로 돌아와 조섭을 하도록 하라고. 이 편지 끝에 소식이 없으면, 더 기다리지 않고 데리러 가겠노라고.
 
151
업순이는 일부러 병원엘 나와서, 의사더러 집으로나 가서 있어 보면 어떨 거냐고 물어보았다.
 
152
“응! ……”
 
153
의사는 얼른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대답이었다.
 
154
“그게 좋겠지!”
 
155
그러고는 조금만에 다시
 
156
“집으루 가서 있두룩 하라구!”
 
157
“집이 가 있으면, 쉬 나술까요?”
 
158
“으음……”
 
159
의사는 모호히 침음을 하는 듯하다가, 이내 선선히
 
160
“낫구말구…… 집이 촌이지?”
 
161
“얘애.”
 
162
“촌은 공기두 좋구 하니깐……”
 
163
“약을 먹어야 안 히여요?”
 
164
“약두 약이지만. 으음, 좋은 음식을 먹구…… 고기 같은 거. 또오 계란이랑, 또오 우유? 우윤 촌엔 없을 테니깐. 그리구 저어, 간율 사다 두구서 매일 먹으라구. 간유……”
 
165
“간유, 요?”
 
166
“간유라구 양약국에서 파는 거 있어. 그거허구, 약두 몇 가지 적어 주께시니…… 그리구 참, 운동을 하지 말구, 편안히 누었구, 응?”
 
167
“밤낮 누었어라유?”
 
168
“응!”
 
169
“………”
 
170
“어때? 집이 과히 어렵지나 않은가?”
 
171
“안 어려먼사 무엇허러 이런 공장으루! ……”
 
172
“으음! ……”
 
173
“병은 그런디 무슨 병이대라우?”
 
174
그동안 누차 묻던 말이었다. 그럴 적마다 의사의 대답은 신신치가 못했었다. 그리고 이날도 역시
 
175
“머 거저, 몸이 약해서……”
 
176
“병은 없는디라우?”
 
177
“허허! 세상에 사람 치고 병이 한 가지두 없는 사람이 있나?”
 
178
환자를 임상(臨床)하여, 번연히 이런 싱거운 말로써 곤경을 얼버무려 넘기지 않지 못하는 의사 된 입장도 매우 동정스런 것이 아닐 수 없었다.
 
179
업순이는 그리하여, 종시 제 병이 어떠한 내력인지를 알지 못하고 말았다. 오히려 다행일는지 모른다. 적어도, 더한 불행은 아닐는지도 모른다.
 
180
업순이는 저금을, 공장에서 해준 의무저금까지 죄다 찾은 것이 73원하고 80전었다.
 
181
동지달치 보름 동안 밥값을 그중에서 물어야 했다.
 
182
어머니와 아버지와 그리고 제 몫으로, 이것저것 해서 한 10원어치 옷감을 끊었다. 돈을 생각하면 차마 아까와서 못하겠어도, 늘 마음에 있던 것이라, 또 당장 요긴도 하여, 메어때리고 그렇게 했다.
 
183
어머니를 위해, 6원 20전이나 하는 목도리를 샀다. 새까만 윤이 치르르한 우단으로 만든 겨울 목도린데, 그것이 초가을부터 매점에 내걸렸을 때
 
184
‘저걸, 어머니를 하나 사다 드렸으면!’
 
185
‘얼마나 뜨듯해서 좋을까! 퍽도 기뻐하실걸!’
 
186
이렇게 생각 간절하던 그 목도리였다. 그 뒤로 혹시 매점엘 나가면, 으례 그리로 눈이 가며, 같은 생각이 나던 그 목도리였다.
 
187
이왕이니 저도 하나 사서 둘렀으면 하고, 몇번 망설이다간 그만두었다.
 
188
그보다는, 어머니 모가치를 사고 나니, 아버지가 섭섭했다. 샤쓰를 그래서, 5원 40전짜리로 웃도리 하나를 샀다.
 
189
그러고는, 도망하듯 얼른 매점을 나와버렸다. 어쩌면 그렇게도 사고싶은 것이 많은지. 새빨간 털샤쓰도 사고 싶었다. 동무 아이들은 거지반 사서, 벌써 입고 다니는 위아랫 매기가 한데 달린 새빨간 털샤쓰였다. 값은 자그마치 9원 80전.
 
190
크림도 한 병 사고 싶었다. 크림은 못 사더라도 비누라도 두어 개 사가지고 갔으면 싶었다.
 
191
크림이나 비누 같은 것은 쓰잘데없는 호사감이라지만, 목 긴 양말이라도 새걸 한 켤레 사 신고 갔으면 싶었다.
 
192
양말은 그러나, 인젠 집으로 가면 버선을 신을 텐데 새걸 사면 무얼 할까마는, 이쁘장스런 거울이, 그건 하나 샀으면 꼭 좋겠었다.
 
193
빗도 한 개 사고 싶었다.
 
194
파아란 알을 박은 반지도 사고 싶었다. 머리에 꽂는 핀도 사고 싶었다.
 
195
모두, 사고픈 대로 사자면, 수중에 있는 돈을 죄다 쓰고도 모자랄 것 같았다. 무서웠다. 얼른, 그래서 도망하듯 나와버리고 말았다.
 
196
그러나 꼭 한 가지, 정말 못 잊히는 건 그 가방이었다.
 
197
진짜 가죽은 아니라도 가죽처럼 생기고, 빛깔이 파르스름하니 이쁜 가방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고, 중길로 마침 알맞은.
 
198
동무 아이들은, 첫달 월급을 받기가 무섭게, 너도 나도 저마다 그 가방을 하나씩들 사서 가졌다. 사서 두어두고는 손그릇으로 쓰고 했다. 업순이는 그것이 하도 내켜 못했다. 집에다 가져다 놓았으면 더욱 재밌고 보배로울 것 같았다. 무어 의걸이나 자개장을 놓고 쓰는 것처럼 좋고 자랑스럴 것 같았다.
 
199
월급을 탈 적마다 곧 매점으로 가서 사고 싶었다. 그러나 저금을 걸러서는 안될 일이어서, 인제 집으로 돌아갈 때나 부디 사가지고 가려니 했었다.
 
200
그렇지 않아도 푸달진 돈이 스실사실 졸아드는 것이 가슴이 아파서 단념을 하고 매점으로부터 얼른 나와버리긴 했으나, 눈에 자꾸만 밟히고 차마 걸음이 걸어지질 않았다.
 
201
주춤주춤하다가 매점으로 되들어갔다. 지금 사지 못하면, 앞으로야 돈을 가지고 쓸 일도, 대처엘 올 일도 없는 것, 그러니 눈 질끈 감고 사자. 이런 강단이었다.
 
202
그러나 막상 물건 앞에 서서는, 만져보고, 또 만져보고 할 뿐, 와락 치켜 들지를 못했다.
 
203
매점 사람이 그 눈치를 채고는 빈들빈들 웃으면서
 
204
“하나 사지 그래?”
 
205
하고 충동이를 놓는 것이었다.
 
206
“값이 하두 많어서!”
 
207
“많긴 무어가 많아? 그게 스도꾸가 돼서 그렇지, 새루 시이레하자믄 십 원두 넹겨 먹어요! 물건두 그만 못하구……”
 
208
“………”
 
209
“못하나마나, 인전 물건이 없는걸! 주문한 지가 두 달이 돼두 오질 안해요…… 아마 만들질 않나바!”
 
210
물건이 없단 소리는 정녕코 업순이에게 위협이 되었다. 마침내 9원 20전의 대을 던져, 그 굉장한 가방을 사고라야 말았다. 주먹이 뭉떵 들어갔으나 기쁨도 어지간했다.
 
211
그 가방에다가, 아버지의 웃도리 샤쓰 한벌과 어머니의 목도리 하나와, 한 십원어치 옷감과, 그리고 그새 입던 헌옷가지를 넣어가지고, 업순이는 시방 집으로 돌아가는 참이었다.
 
212
돈은 그럭저럭 한 것이 삼십 원도 더 썼다. 십원짜리 넉 장을 싸고 싸서, 속치마 끈에 단단히 옹쳐맸다. 따로이 잔돈이 이삼십 전 남았을 뿐이었다.
 
213
그러나 십 원 한 장을 다시 헐어야 했다. 차표를 사야 하고. 또 과자라도 조금하고, 고기는 부디 한 근 사서 들고 들어가야 하고. 그렇게 하고 나면 이 원 각수는 또 없어지고, 돈은 도통해서 사십 원도 채 남지 못한다.
 
214
결국, 업순이가 애초에 마음 먹었던 사백원의 십분지 일도 차지 못하는 돈이다. 돈 액수가 십분지 일은 된대서, 계획이 십분지 일이나마 성취가 된 것은 아니다. 있으나마나한 돈이요, 희망은 그러므로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215
그러고서, 일년 반 동안 그야말로 목구멍을 얻어먹은 것이 있고, 올 삼월부터 구월까지 다달이 오원씩 송금한 것이 있고. 하고는, 그 주체스런 사십 원 미만의 돈과 눈속임의 트렁크 하나와, 메리야쓰 샤쓰 웃도리 한 벌과, 무명 빌로도 목도리 하나와, 인조견 등속의 옷감 몇 벌과 이렇게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던 것이다. 미련과 낙망으로 통곡이라도 하고 싶게 안타깝고 어둔 마음을 안고서 말이다.
 
216
참으로 업순이가 지금, 제 병이 어떠한 병인 줄을 안다면. 소위 사형을 선고받았음이나 다름없다는 그런 끔찍한 병인 줄을 안다면. 현대 의학의 가장 정수를 다하고, 돈을 얼마든지 들이고 해도, 열에 둘이나 셋이 살아나기가 어렵다고 하는 그런 무서운 병인 줄을 안다면.
 
217
약간 슬프고 마음이 어둡고가 무어랴. 사뭇 기절을 않으리.
 
218
누가 밥 먹은 것이 속이 거북하다고 하면, 사관 깨도 놓아주고. 대빼침으로 종기도 꾹꾹 찌르고서 시꺼먼 고약에다가 불그름한 약가루를 뿌려서 붙여주고. 천연스럽게 맥을 짚어보고는, 몇 첩씩 약도 쓰고. 한다치면 일쑤 낫기도 하고. 그러나 못 낫기도 일쑤 못 낫고. 그래서 삼분의 용하단 소리와 칠분의 시원찮단 소리를 섞어 들으며 아무려나 의원 노릇을 하느라고 하는, 소위 무면허 의생인, 김생원 혹은 박생원이 웬만한 촌락인다치면 무당과 점장이와 상여집 등으로 더불어 으례껏 하나씩은 있는 법이다.
 
219
그런 한 사람의, 등 너머 강생원을 모셔다가, 마악 시방 업순이의 진맥을 하고 난 참이었다. 업순이가 집으로 온 지 사흘째 되는 아침의 첫 새벽이고, 맥은 자고 나서 기동하기 전에 보아야 하는(이건 정말) 법이기 때문이었다.
 
220
이보다 앞서, 지난 밤 업순아버지가 강생원을 청하러 갔을 때, 증세가 이러저러하고 이러저러하다는 이야기를 자세히 했던 건 물론이다.
 
221
업순어머니는 내외를 하느라고 웃방으로 피해 가서 귀만 기울이고 있고. 업순아버지는 넌지시 웃목으로, 무릎을 깍짓손 껴서 안고 앉았고.
 
222
진맥이 끝나자 업순이는 바시시 일어나서, 조심스럽게 모로 빗밋이 돌아앉고.
 
223
강생원은 업순이게서 물러나더니, 업순아버지를 건너다보면서, 썩 수월히
 
224
“수토불복이여!”
 
225
그러고는 이어서 주를 낸다.
 
226
“물이 안 맞었어! 물이……”
 
227
“워너니 나두 짐작으 그런 것 같업디다! 그런 것 같이여!”
 
228
업순아버지는 연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껄이었다.
 
229
“거, 전주란 땅이 자고로 물이 고약허거던!”
 
230
“궈녀니 보냈다 싶어서, 발등을 찍구 싶구만이라우! …… 게, 그런디이…… 저녁때먼 오한이 나구, 지침을 허구, 그것두 그 빌미꺼라우?”
 
231
“그건 강기가 쇤 것이 그대루 굳어서 그러지!”
 
232
그러면서 강생원은 업순이를 돌려다보고 묻는다.
 
233
“너, 강기 않은 뒤루 그맀담서?”
 
234
“얘애.”
 
235
“거 부아! 강기를 까땍 실섭하면 그러기 쉰 법이여!”
 
236
“담두 승힜넝갑디다? 외약쪽 가슴께가 좀 절리다구 허는 것이……”
 
237
“담이 승허구말구!”
 
238
“식은땀 허구!”
 
239
“그야 원기가 허탈허닝개, 그럴밖으 있다구?”
 
240
“그나저나, 강생원만 믿으니, 잘 좀 서둘러 주시야겄구만이라우?”
 
241
“으응! 글랑 염려 마러! 속 다아 빠안이 아는 증세닝개……”
 
242
“질질 오래 끌지나 않겄어라우?”
 
243
“하루 이틀에 완구헐 수야 있으꼬마는, 쉬 차도가 있지! …… 우선 강기 쇤 걸 풀어주면서, 한편으루 수토불복 다스릴 약이나 한 서너 제 위한허구 쓰먼……”
 
244
“말씀만 들어두 휩씬 맘이 뇌너만이라우! …… 솥단지를 팔어서라두, 히여보넌디까장은 히여볼랑개, 그럼 강생원도, 부디 좀……”
 
245
“내야 범연헐 이치가 있다구?”
 
246
“오널이라두 그럼, 약을 마련히여 주어기라우? 한꺼번이넌 못 대두, 한 제 씩이라두……”
 
247
“그렇게 히여!”
 
248
“을매나 들겄지라우?”
 
249
“한 제에 한 그저, 십오 원만 멕히면……”
 
 
250
이윽고 강생원을 배웅하러 나갔던 업순아버지가 주머니끈을 매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업순어머니도 그새 아랫방으로 내려왔고.
 
251
“너, 당추 인재넌, 그년으디 갈 생각 말어라?”
 
252
업순아버지는, 자화(自火)를 못 삭여, 약간 역정스럽게 딸더러 준절히 이른다.
 
253
그 말에 업순어머니는 딸을 대신하여 싸고 돌 듯
 
254
“그렇잖어두, 다시넌 안 간다우!”
 
255
“그러구, 이 시안, 약이나 먹으면서, 몸 소성히여 각구, 내년 봄으 시집이나 가그라!”
 
256
업순이는 시집이란 소리에, 처녀답게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수그려뜨린다.
 
257
“작년 가슬으 농사가 그리두 잘 되구, 올두 나락이 멫 섬 밀리구 그리서, 네가 다달이 보낸 돈은 한푼도 손두 안 대구, 잘 두었다!”
 
258
“………”
 
259
“그놈허구, 이번으 네가 각구 온 놈허구 허먼, 약값은 될 테닝개……”
 
260
“………”
 
261
“그러구, 따루 도야지 한 마리 멕이넌 것허구, 나락 슥 섬 밀린 것허구, 통허먼 백 원 요량은 되닝개…… 쯧! 백 원 가지먼 그렁저렁 혼인 치룰 테지!”
 
262
“………”
 
263
“그러닝개, 머 널랑 집안 걱정 헐라 말구서, 약 정성디려 먹구? ……”
 
264
“………”
 
265
“응?”
 
266
“얘애.”
 
267
“그리서, 어서 병 낫어각구, 천하 읎어두 내년 봄을랑 시집을 가게 히야지…… 아 나이 벌써 내년이면 열아홉 아니여? 스무 살 넘두룩 있을라간디?”
 
268
업순이는 앉아서 고옴곰 속으로 생각이다.
 
269
참, 아버지 말씀따나, 시집이나 가는 거라고. 병이 낫거든, 인제는 시집이나 가는 거라고.
【원문】병(病)이 낫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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