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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서(趙之瑞)의 자는 백부(伯符)요 호는 지족정(知足亭)이요 천성이 장 직한 사람이었다. 연산(燕山)이 동궁 적에 날마다 놀기만 하고 글을 읽지 않았다. 조지서가 시강원(侍講院) 보덕(輔德)이 되어 매양 진강할 때에 연산이 배우기를 싫어하므로 책을 앞에 던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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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 공부를 힘써 하지 않으면 신이 계달(啓達)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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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고 하였다. 그러므로 연산이 밉게 여겼다. 허침(許琛)은 조지서와 동관으로 부드러운 말로 순하게 하여 조용히 깨우쳐 드리므로 연산이 좋아하였다. 하루는 연산이 벽에다 크게 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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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서는 큰 소인이요 허침은 큰 성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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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장차 조지서는 신변이 심히 위험스러이 보았더니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매 연산이 그를 먼저 베고 그 집을 적몰(籍沒)하고 허침은 승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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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禍)가 일어난 정성근(鄭誠謹)과 함께 잡힘을 당하매 지서가 스스로 화를 면치 못할 줄 알고 안해 정씨에게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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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길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지니 조상의 신주(神主)는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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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한탄하였다. 정씨는 울며 죽기까지 자기가 보전하겠읍니다고 맹서 하였다. 지서가 죽으매 그 집을 적몰하였다. 정씨는 정포은(鄭圃隱)의 후손 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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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이미 이 지경이 되었으니 본가로 돌아와서 그 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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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였다. 그러나 정씨는 거절하여 망인(亡人)이 조선(祖先)의 신주를 부탁하므로 제가 승낙하였으니 어찌 중간에 저버리겠읍니까. 또 저의 거처할 집이 있으니 가서 의지하리라고 신주를 안고 그 집으로 가서 조석으로 제사드리다가 중사(中使) 온다 소식을 들으면 곧 신주를 안고 집 뒤 대 밭 〔竹林〕에 피하고 하여 3년에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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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한 후에 드디어 옛집을 회복하고 봉제사하기를 게을리 아니하니 일읍(一邑)이 칭찬하였다. 이우(李堣)가 진주(晋州)목사가 되어 그 사실을 자세히 알고 특진관(特進官)이 되어 계달(啓達)하니 그 가문에 포창하였다. 고려 충신이 후손으로 백부(伯符)에게 시집왔다가 죽기로써 맹서하고 두 마음을 품지 않아 부녀의 도리를 온전히 하였으니 과연 충신 문중에서 열녀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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