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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은 숙종(肅宗)대왕 때의 명사(名士)로 문장 재화(才華)가 당시 명류를 압도할 만하여 대제학까지 되어 숙종께도 큰 제우(際遇)를 받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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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문장가인 만치 지조와 주벽이 남달랐다. 지조가 특별하기로 같은 서인(西人)의 소장(少壯)으로 당시 온 세상이 추앙하는 대로(大老)인 우암(尤庵)의 김익훈(金益勳)을 편든 것을 배척하였으며 주벽이 욱심하므로 스스로 삼가 단솔히 굴어 아무 위의(威儀)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평교간에는 누구나 감히 오공을 만홀히 보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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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 오월 장마를 만나 길이 질적질적 하니까 서파는 길가 마른 데로 골라 디디고 가는데 어떤 소년 귀인이 말을 타고 가다가 존장(尊長)인 서파를 만나서 마상에서 인사만 하고 내리기가 어려워서 주저주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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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땅도 질고 하니 내릴 것 무엇 있나 어서 그냥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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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그 소년은 미안합니다는 표시만 하고 그만 말탄 채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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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젊은이가 낮에 한 일을 저녁에 부친께 고하는 풍습이었으므로 그 소년의 부친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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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큰일났다. 내일 아침에 서파 어른댁에 가서 석고대죄(石藁大罪)를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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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년의 생각은 불복(不服)한 점이 없지 않으나 부명(父命)이므로 할 수없이 그 이튿날 아침에 서파 앞에 석고대죄를 하니 서파는 발바닥으로 뛰어나와 붙들어 올리고 천만의 일이라고 좋은 말로 일러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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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친은 그 이튿날 또 보냈으나 역시 붙들어 올리고 좋게 보내므로 그 이튿날 또 보냈다. 그 날은 서파가 못 본 체하더니 호령을 하되 나는 내 인사로 내리지 말라 하였으나 네 인사야 그럴 수 있느냐 다시 그러지 말 아라하고 그냥 보냈다. 그때 가서야 그 부친의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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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이는 그 소년의 잘못됨을 깊이 깨닫게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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