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3 ~ 1583]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면앙정(俛仰亭) 또는 기촌(企村)이며, 시호는 숙정(肅定)이다.
151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547년에 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개성부 유수를 지냈다. 1550년에 이조 참판으로 있을 때 죄인의 자식을 등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귀양살이를 했다.
구파의 사림(士林)으로 이황(李滉) 등 신진사류(士類)와 대립하였다. 1569년(선조 2)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가 치사(致仕)했다.
늘그막에 벼슬에서 물러나 담양에 석림 정사
면앙정을 지어 놓고, 독서와 시조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담양(潭陽)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로 시조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기촌집》 《면앙집》이 있고, 작품으로 「
면앙정가」가 전한다.
1533년(중종 28) 41세의 송순은
김안로가 권력을 휘두르자 낙향하여 면앙정을 세운 뒤 '면앙정삼언가(俛仰亭三言歌)'를 지어 부르고, '면앙정'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는 면앙정에서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읊으면서 4년 동안을 지냈다.
송순은 학식이 뛰어나고 덕이 많아서 면앙정에는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1503~1557),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1504~1547),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1525∼1597),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1533~1601),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 등 당대 최고의 문인, 석학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시와 노래를 지으면서 호남 제일의 면앙정가단을 형성하고, 누정문학(樓亭文學)의 꽃을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