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궁인창의 지식창고 궁인창의 논문모음
궁인창의 논문모음
2023년 11월
2023년 11월 19일
2022년 11월
2022년 11월 30일
2022년 11월 25일
만덕 할머니, 금강산에 오르다
2022년 8월
2022년 8월 5일
2017년 4월
2017년 4월 12일
2016년 6월
2016년 6월 3일
about 궁인창의 논문모음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내서재
추천 : 0
금강산(金剛山) 김만덕(金萬德) # 제주김만덕기념관
【문화】
(2023.11.19. 19:10) 
◈ 만덕 할머니, 금강산에 오르다
【기고】《은광연세》 7호 (제주김만덕기념관) (2022년 12월) / 정조 임금은 “제주 기녀 만덕을 한양으로 올라오게 하라. 내가 친히 그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라고 의정부에 명했다.
만덕 할머니, 금강산에 오르다
궁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정조 임금은 “제주 기녀 만덕을 한양으로 올라오게 하라. 내가 친히 그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라고 의정부에 명했다. 제주 김만덕의 육지 출륙 소원은 개혁 군주 정조에 의해 쾌히 받아들여졌다.1) 정조는 만덕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의 각 군현과 역(驛)에서 숙식과 편의 제공을 받도록 명했다. 만덕은 1796년 병진년 7월 28일 제주 화북포구에서 제주 목사와 친척들의 환송을 받으며 배에 올랐다. 그때 나이가 이미 환갑을 앞두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멩심허영 갔당 옵서!”라며 배웅을 하였다. 만덕 할머니가 탄 배는 중선으로 격군을 포함해 30~50명이 탑승했던 것으로 보인다.2) 돛단배는 좋은 바람을 만나면 아침에 제주에서 출발하여 한없이 넓고 푸른 남해 큰 바다를 건너서 10시간쯤 지나 저녁나절에 마량이나 강진읍 남포에 도착했다. 제주 여성이 월해금법(越海禁法)3)이후 바다를 건넌 것은 167년 만에 처음이었다.
 
 
만덕은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여러 고장을 둘러보고 화성행궁4)도 구경한다. 정조는 지리적 위치가 좋은 화성을 상업 도시로 만들려고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상점도 만들어 주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농사지을 수 있도록 넓은 농장과 저수지도 곳곳에 만들었다. 만덕은 나이가 많아 제주에서 배를 타고 무려 4개월이 지나 가장 추운 때인 11월 24일5) 한양에 도착한다. 임금이 계시는 도성에 도착하여 사람들에게 채제공6) 대감의 집을 물어서 찾아간다. 채제공은 고생스럽게 도착한 만덕 일행을 반겨주고, 먼 길의 수고로움을 격려한다. 만덕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고 대궐에 기별하여 만덕의 한양 도착을 정조에게 아뢰었다.
 
왕은 선혜청(宣惠廳)에 명하여 식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 속에서 여성의 몸으로 상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부를 이루었고 굶주리는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은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걸림돌이 많았다. 기녀를 대궐에 들이는 일이 궁중 법도에 어긋난다고 사헌부에서 글을 올려 조정은 의론이 분분했다. 조정에서 논의 끝에 만덕을 내의원 의녀의 최고 직책인 반수(班首)로 명했다. 만덕은 전례에 따라 대궐로 들어가 여러 궁에 문안을 드리고 의녀로서 시중을 들었다. 만덕에게 내려진 내의원 의녀 반수는 명예직이지만 최고의 벼슬에 오른 셈이다.
 
정조는 궁궐에서 효의왕후7)와 함께 만덕을 만났다. 왕이 전교하기를, “네가 일개 여자로서 의로운 기운을 발휘하여 굶주린 백성 천여 명을 구제했으니 참으로 기특하다.”라고 말하자. 만덕은 “망극하옵니다.”하고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정조가 묻는다. “제주도의 조석파가 어떠했는가?” “제가 산에서 보았는데 마치 거대한 산이 섬을 덮치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광경은 생전 처음 보았습니다.” “낮이었는가?” “한밤중이었습니다.” “그럼. 미리 알고 산으로 피했느냐?” “사전에 땅이 울리는 느낌을 받아, 먼 바다에서 지진이 일어난 조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노인들에게 들은 일이 있습니다.” “제주의 참상이 어떠했느냐?” “집들이 모두 쓸려가고 농작물은 모두 소금에 절인 것 같았습니다. 모두가 썩어서 수확할 곡식이 없었습니다.” 임금을 만난 만덕은 육지에서 오는 배들이 들어오는 건입포 입구에 작은 점포를 차려 외지 상인들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고, 제주의 특산물인 말총, 미역, 전복, 표고버섯, 양태, 우황, 약초, 녹용, 귤 등을 수집하였다가 육지 상인들에게 공급하여 큰 재물을 모았다고 고하고, 제주에 4년간 큰 가뭄8)이 들어 아사자가 17,963명이나 발생하여 모두가 죽게 된 이야기를 사실대로 말을 고변했다. 정조는 만덕의 소원인 금강산을 찾아가는 연유를 다시 물었다. “네 소원이 금강산에 오르는 것이라고 했는데 정녕 그러하냐?” “예.” 만덕은 숨김없이 “예로부터 사람이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야 한다고 하옵니다.”하고 말하였다. 정조는 “내 너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만덕은 나이가 많다. 산을 오르는 것이 여의찮을 테니 금강산의 승려들에게 가마를 메고 안내하도록 하라. 지금은 매우 추우니 날씨가 따뜻할 때 금강산 여행을 다녀오라.” 하교하고 상으로 많은 물건을 하사하였다.
 
 
정조는 조선의 왕 중에서 식목을 강조하며 나무 심기를 강력하게 추진한 군주이다. 비록 정조는 금강산을 가보지 못했지만, 선왕들이 금강산에 있는 사찰에 시주를 올린 것을 문헌으로 알고 있었다.
 
금강산 안에는 유점사, 신계사(神溪寺), 장안사, 표훈사(表訓寺), 정양사(正陽寺), 보덕굴, 마하연(摩訶衍), 도솔암(兜率庵), 장경암(長慶庵), 지장암, 관음암, 안양암 등 크고 작은 108개의 절이 있는데 큰 사찰은 대부분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 신라 진덕왕 때에는 네 곳의 영지(靈地)가 있어 나라에서 큰일을 결정할 때 이 영지에 모여 의논하면 그 일이 꼭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네 영지 중의 하나가 금강산 영지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금강산의 법기보살에게 경배하는 목각탱(木刻幀)이 고려 후기에 제작되는 등 원 제국 간섭기에도 금강산은 보살의 상주처로 더욱 주목받았다. 고려 우왕 때 정몽주를 따라 일본에서 건너온 사신인 승려 천우(天祐)는 공민왕에게 금강산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기도 하였다. 금강산의 여러 사찰 중에서 표훈사는 금강산의 담무갈보살이 동북편
 
세조가 나이 어린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뒤 피부병으로 고생하다가 1466년(세조 12) 2월에 금강산 온정리 행궁을 수축하고, 3월 16일부터 윤삼월 28일간에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금강산 순행에 올랐다. 당시 순행 길은 양주, 파주, 철원, 김화, 금성을 거쳐 장안사, 정양사, 표훈사를 방문하고 행궁에 머물다가 유점사를 찾고 내려와 행궁에 머물렀다. 세조는 순행 중 3월 21일에는 장안사에 들렀다가 정양사를 거쳐 표훈사로 가서 간경도감에 명하여 수륙회(水陸會)를 설하게 하고 호조에 명하여 쌀 3백석, 찹쌀 10석, 깨 20석을 금강산 안의 여러 절에 나누어주었다. 세조는 간성, 낙산사, 강릉, 상원사, 원주, 지평을 거쳐 도성으로 돌아왔다.
 
 
만덕은 금강산에 관한 시를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1396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表箋文)9)에 불손한 글귀가 있다고 트집을 하며 해명과 사죄를 겸한 사신을 보내라고 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정도전을 보내려다 1389년에 고려의 사신으로 가서 주원장을 만난 적이 있었던 양촌(陽村) 권근(權近)을 사신으로 보낸다. 명나라 태조는 권근을 보고는 특별히 우대하며, 그의 시재를 시험하고자 조선의 명승지 시를 지어 바치도록 하니 권근이 〈금강산〉 칠언율시를 지어 명나라 태조를 감동하게 했다.
 
 
雪立亭亭千萬峰 (설립정정천만봉)
海雲開出玉芙蓉 (해운개출옥부용)
神光蕩蕩滄溟闊 (신광탕탕창명활)
淑氣蜿蜒造化鐘 (숙기완연조화종)
突兀崗巒臨鳥道 (돌올강만임조도)
淸幽洞壑秘仙蹤 (청유동학비선종)
東遊便欲陵高頂 (동유변욕능고정)
俯仰鴻濛一盪胸 (부앙홍몽일탕흉)
 
눈 속에 천만 봉우리 우뚝우뚝 솟았고
바다 구름 걷히니 옥 같은 부용(태양)이 드러나네
신비한 광명 햇빛 넘실대니 푸른 바다 드넓고
맑은 기운 완연하니 조화 부림 많구나.
뾰족한 산봉우리 사이로 험한 길이 이어졌고
맑고 깊은 골짜기에 신선들의 자취뿐이네
동국에 놀러 와 높은 봉우리에 올라 보소
천지를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가슴을 한번 씻고 싶네.
 
 
만덕은 심오한 불교 교리는 모르지만 육지에서 제주로 오는 승려들을 통해 대장경의 내용과 금강산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조선은 유교를 신봉하는 국가이지만 당시 명나라에서 판매와 보급을 위해 제작된 〈가흥대장경〉이 조선에 많이 유입되었다. 1681년(숙종 7)에 전남 임자도앞바다에서 중국 무역선이 난파돼 표착하였다.10)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중에는 바다가 지닌 8개 공덕에 대한 경전이 있다.11) 불교 수행자들은 바다의 8개 공덕이 담긴 경전을 존중했다. 만덕은 제주도에 오는 선비들과 교유해 금강산의 글들을 소상히 알아 도성에서 선비들과 교유할 때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이 금강산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11세기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12)도 금강산을 예찬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태종의 처신을 못 마땅히 여겨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났다.13) 1404년 9월 21일에 태종이 여러 신하와 정사를 논하면서,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기만 하면 반드시 금강산을 보려 하니, 무슨 까닭이오? 속담에 중국인이 이르기를, ‘고려국에 태어나서 직접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는데, 그래서 그러는 것이오?”하고 물으셨다.14) 이에 하륜(河倫)이 “금강산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말이 대장경에 실려 있는 까닭으로 그러한가 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른 신하들은 금강산은 영험한 산으로 신라의 화랑도 금강산을 순례하였고 이후 고려왕조를 거쳐 조선의 선비들에게도 이어져 내려왔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심신 수양뿐 아니라 유교 공부를 위해 금강산을 경쟁하듯 찾았다. 선비들은 산이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큰 요소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흐르는 물을 ‘시간의 흐름’이라는 철학적 이치로 해석했다. 산과 물을 어진 자와 지혜로운 자의 속성으로 이해하여 유학자들은 산과 물을 살피면서 자연의 운행 질서를 이해하고, 관물찰기(觀物察己)를 통해 자신을 수양하려 하였다. 김시습은 8차례나 금강산을 다녀왔다.
 
겸재 정선15)은 후원자인 김창흡16)의 제5차 금강산 여행에 동행하여 1711년 금강산을 처음 만나 금강산을 화폭에 담았다. 조선의 화가들은 중국 산수화를 본떠서 가본 적도 없는 풍경을 상상으로 그렸는데, 정선은 우리 강산을 직접 답사한 뒤 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 직접 눈으로 본 모습을 그대로 그렸기 때문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고 부른다. 김창흡은 정선의 스승이 되어 성리학과 시, 문장을 직접 가르쳐주었다. 김창흡은 58세에 금강산에 올라 시를 썼다.
 
 
빈 암자 찾아와 고요함을 배우네,
홀로 누워 선방의 문을 닫았다.
조용한 정원, 물통에 샘물 떨어지고
처마에 부는 바람, 떡갈잎이 날린다.
 
멍하게 있을 뿐, 누구와 벗하겠는가?
담담한 마음뿐 돌아가고 싶지 않네.
길에서 만났네,
시 짓는 스님들 솔잎차로 배고픔을 달래주는구나.
 
 
금강산을 6번이나 찾았던 김창흡이 “최고의 시는 명산대천에서 나온다.”고 말을 하자 서울 장안에 소문이 크게 나 많은 선비들이 잇따라 금강산을 찾았다. 정선은 영조 임금의 총애를 받은 도화서 화가로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1734년(영조 10) 정선이 59세에 그린 금강전도는 내금강의 실경을 수묵담채로 그렸으며 크기는 가로 94.5㎝, 세로 30.8㎝이다.
 
정선은 1747년 72세에 이르러 금강산 사생 여행을 떠나 36세에 그린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21폭을 다시 제작한다. 김창흡은 정선의 그림을 높이 평가했고, 당시 문인들은 정선 그림에 김창흡 시를 덧붙인 작품을 최고로 여겼다.
 
 
정조를 알현하고 나온 이후 만덕은 도성의 여러 선비들을 만나 교유하며 제주도 한라산의 아름다움과 태풍 및 흉년의 참상을 “무사 경 고람쑤꽈?”하고 제주도 사투리로 말했다.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이 만덕을 적극 도와주자 장안에 소문이 나돌았다. 만덕은 채제공에게 깊은 감화를 받았다.17) 채제공은 만덕과 발을 두고 대화하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를 은연중 가르쳤다. “네 말이 가상하다. 한양에 머무는 동안 자주 내 집에 들어와 탐라 이야기를 하여라. 내가 네 전기를 지을 것이다.” 이후 만덕은 영상 집을 방문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은 선비들이 제주의 독특한 풍속을 알고 싶어 자주 물어오면, 만덕은 물을 길러가는 물 허벅과 항아리, 옥돔국, 테우, 방물장수, 5일장, 제주 관기, 선정을 베푼 제주목사 등 아는 대로 모두 이야기하였다. 1443년 12월 제주 목사로 부임한 기건(奇虔)은 잠녀들이 바다에 들어가 힘들게 전복 따기 하는 모습을 보고는 2년간 목사로 있으면서 전복을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고, 전염병과 괴질이 도는 제주에서 부모가 죽으면 구덩이나 언덕에 버리는 풍속을 교화시켜 예절을 갖추어 목관에 부모를 장사 지내도록 지도하였고, 부녀자들의 외출할 때 나올(羅兀)을 창안해 머리덮개로 이용하게 하였다고 말했다.만덕은 숙소에 머물면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금강산을 다녀온 선비들의 유람록과 산수유기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만덕은 제주도에서 객주를 운영하면서 귀양 온 선비들이나 한라산을 보러 온 선비들을 통해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귀가 아프도록 많이 들었다.
 
당시 금강산 여행은 정보 수집도 어렵고, 여행 경비가 엄청나고, 동행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또한 말이나 나귀를 빌려서 타고 가고, 식량을 지니고 다녀야 해서 하인이 여러 명 따라갔다. 선비들은 여러 사람의 유산기를 묶어 와유록(臥遊錄)이라 이름 짓고 돌려보고, 가난한 선비들은 집에 누워서 책과 그림을 통해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다음 해 1월에는 여주와 화성 행궁을 채제공과 함께 다녀오고 정조를 알현했다.
 
 
어느덧 한양에 머문 지 반년이 지나 만덕은 1797년 3월에 많은 선비들의 환송을 받으며 금강산 유람에 오른다. 만덕의 금강산 출발이 장안에 퍼지자. 장안의 선비들이 모두 그녀를 칭송하였다. 장안의 유명한 기생 홍도는 그녀의 덕행에 감탄하여 먼 길을 떠나는 만덕을 위해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
 
 
女醫行首耽羅妓  행수(行首) 의녀는 탐라의 기생이라
萬里層溟不畏風  만 리 길 높은 파도도 겁내지 않았네
又向金剛山裡去  이제 금강산으로 길을향해 떠나니
香名留在敎坊中  꽃 같은 이름 교방(敎坊)에 남기네
 
 
만덕을 가마에 태우고 가는 금강산 방문단은 조선시대 6대로 중에 2대로인 경흥로18)를 거쳐 금강산으로 향했다. 경흥로는 한양에서 김화를 거쳐 함흥과 북청을 지나 두만강까지 가는 도로이다. 만덕은 한양 관문인 누원점에 들러 시장 상인들을 만났다. 누원점은 원도봉산 회룡사가 있는 지역의 상점으로 교역이 무척 번창했다. 이곳의 상인들은 동북에서 한양으로 오는 어물을 매점하여 어물전에 넘기지 않고 행상인에게 직접 팔아 많은 이익을 남겼다. 칠패, 이현 상인들이 지방산물이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의정부 다락원에 일종의 지점을 차려 놓고 건어물과 곡물을 매점매석하므로 육의전 상인들이 상품 구입에 곤혹을 치렀다. 손도강19)이라는 사람은 난전의 우두머리로 다락원에 사는 상인들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조달받아 원산에 가서 어선 전체를 매점하거나, 의정부, 포천 등지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한양으로 들어오는 어물을 몽땅 사재기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만덕 일행은 의정부를 지나 축석령에 올랐다. 이 길은 천보산 고갯길로 정조가 광릉을 참배하러 다녔던 높은 고개이다. 만덕은 포천 송우리를 지나 영평에서 머물렀다. 영평은 백제 및 고구려의 양골현(梁骨縣) 지역으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 동음 현이라 부르다가 고려에서는 영흥 현으로 개칭되었다. 1394년 이성계가 자기 고향을 영흥 부로 이름을 지으면서 영흥 현을 다시 영평 현이라 불렀는데, 현재 포천시 영중면, 이동면, 일동면, 창수면 지역이다. 영평에서 하루를 푹 쉬고 다음 날 금화까지 빠르게 이동하여 저녁에 관아에 머물렀다. 만덕은 금화에 머물 때 동네 사람들로부터 몽골에 잡혀갔다 돌아온 사람 이야기와 법성스님 표류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이 이야기는 김수증20)이 채록한 이야기다.
 
금화 사람 김승경은 1625년(인조 3)에 태어나 1637년 병자호란 때 15세 나이에 몽골군의 포로가 되어 차하르(察哈尔) 몽골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차하르 전사가 되어 외몽골과 전투에 참여했다. 부족장이 조선에서 잡아 온 여자를 내려주어 혼인하고 2남 1녀를 낳고 살았다. 1654년에 아내와 딸이 죽어 인생의 허망함을 느꼈다. 20년간 몽골인으로 살았지만, 밤하늘에 은하수를 보다가 죽기 전에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1663년 10월에 사냥한다고 핑계를 대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에 올라타 해가 뜨는 곳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한 달이 지나 말이 지쳐서 더 이상 가지 않으려 하자 말을 버리고 걸어서 12월에 간신히 심양에 도착했다. 도중에 조선에서 끌려온 사람들을 만나 말을 얻었다. 말을 타고 가던 중에 조선에서 끌려온 사람들을 만나 동행하여 1664년 3월 심양을 떠나 5월에 조선 땅 의주부 창성(昌城)에 도달하고 8월에 금성에 도착했다. 어릴 적에 고향을 떠나 아주 가물가물했지만, 기억을 더듬어 부모의 집을 찾아가니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아들을 전혀 몰라봤다. 형제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버지는 한참 지나서 크게 성장한 아들을 알아보고는 서로 붙들고 밤새 통곡했다. 만덕의 선행은 전국에 널리 소문이 나서 금강산으로 가는 곳곳마다 주민들이 나와 환영을 해주었다. 관에서 숙소를 제공받고 양식을 제공받았지만 만덕은 먼 길에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왕이 말을 내려주었지만 선비처럼 말을 계속 탈 수가 없어 종종 가마를 타고 갔다. 금강산 가는 길은 고려시대에도 활발하게 사람들이 왕래하여 큰길에 역과 원, 관아, 절 등이 있어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관료들은 역이나 관아를 많이 이용하고, 승려들은 인근 절을 찾고, 상인들은 주막에서 머물렀지만, 금강산에서는 모두 절에서 잤다. 금강산으로 가면서 준비한 음식은 쌀과 반찬, 술, 곡식 가루, 말린 고기, 떡, 과일 등이었다. 만덕은 금강산 가는 길에 가마꾼들을 종종 격려하고, 쉬지 않고 금강산을 공부했다. 만덕은 단발령을 거쳐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금강산은 강원도 회양군과 통천군, 고성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계절마다 금강산이 보여주는 풍경이 각각 달라 봄에는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이라 불렀다. 눈이 내렸을 땐 설봉산(雪峰山), 묏부리가 서릿발 같다고 상악산(霜嶽山), 신선이 산다고 하여 선산(仙山) 등으로도 불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 개골, 열반, 풍악, 기달(怾怛)의 다섯 가지 이름을 들고 있다. 봄에는 온 산이 새싹과 꽃에 뒤덮이므로 금강이라 하고, 여름에는 봉우리와 계곡에 녹음이 깔리므로 봉래라 하고, 가을에는 일만 이천 봉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풍악이라 하고, 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지고 나면 암석만이 앙상한 뼈처럼 드러나므로 개골이라고 한다.
 
금강산 입구에 도착한 만덕은 승려들을 만나 감사의 절부터 하였다. 승려들이 맨 가마에 올라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유점사, 보덕굴 등의 사찰을 방문하고 절마다 절하고 시주를 한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명승인 만폭동, 명연, 은선대, 삼일포 등을 차례로 방문한다.
 
금강산을 찾은 만덕은 1만 2000봉에 놀라 하염없이 절을 하며 나라가 잘 살고 제주도 가 태풍과 흉년이 없기를 기도했다.21) 조선 중기 이후에 금강산을 유람하는 데는 가마의 일종인 남여(藍輿)를 사용했다. 승려들은 선비들을 산에 안내하며 남여를 메는 일을 담당하였는데, 점차 금강산을 찾는 선비들이 많아져 힘들었다. 금강산에 들어와 취사는 동행한 종이나 승려가 맡았다. 금강산에서는 사찰별로 일정한 구역을 정해 남녀를 나누어 메고, 일정한 장소에서 서로 교대하였다. 사찰에 넉넉하게 시주하는 선비들도 있었지만 무례하게 승려들을 차별하여 점차 절을 떠나는 승려가 늘어나 나중에는 절이 텅텅 비어있는 일도 생겼다.
 
 
만덕은 이곡22)이 1349년 가을에 금강산을 보고 적은 《동유기》를 여러 번 읽었다. 이곡은 천마령(天磨嶺)을 넘어 금강산 배점(拜岾)을 거쳐 내금강에서 시작하여 외금강에까지 탐승했다. 만덕은 채제공이 일러준 성현(成俔)의 《동행기》와 남효온23)의 《금강산기》도 읽어 보았다. 숙종 때 김창협의 《동유기》는 일기체로 된 금강산 기행문이다. 전 노정을 몇 개의 단락으로 갈라서 서술하고 있다. 그 노정의 단락은 경성, 회양, 장안사, 표훈사 등 모두 12개로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내금강에서 시작하여 외금강으로 빠져 통천의 총석정을 보고, 다시 추지령(楸地嶺, 645m)을 넘어 서울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금강산을 찾는 선비들은 여행에 붓, 벼루, 먹, 종이 등을 지참하고 시상이 떠오르면 글을 남기고 시를 지을 때 참고하기 위한 시통(詩筒)을 지녔다. 종이는 시를 쓰기 편리하도록 미리 잘라서 책으로 묶어서 가지고 다녔고, 시통은 한시의 운두(韻頭)를 얇은 대나무 조각에 써넣은 조그마한 통이었다. 선비들은 금강산에서 친구와의 만남을 기뻐하고 또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시를 남겼고, 산행을 안내하고 숙식을 제공해 준 승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시문을 지어 주는 경우도 많았다. 승려들은 유명한 선비에게 시를 부탁해서 보관하였다가 사찰을 방문하는 다른 선비에게 보여주며 자랑하기도 하였다.
 
 
만덕은 금강산에서 지은이가 미상인 한글로 된 《금강산유상록(金剛山遊上錄)》을 달달 외었다. “천하에 유명한 산 서른여섯 중에 셋은 조선에 있는데 영주, 방장, 봉래산이다. 영주는 한라산, 방장은 지리산, 봉래는 금강산이다. 병자 춘삼월 이십 사일에 서너 명이 금강산을 찾아 떠났다. 철원·김화를 지나 관동에서 제일 높은 영인 단발령에 이르니 금강산이 구름같이 벌여 있다. 산의 입구에 있는 큰 절인 장안사에 들러서 푸른 산색과 절을 두루 구경하고, 서산·사명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는 백화암을 살펴본 뒤, 길을 떠났다. 표훈사를 거쳐 정양사에 이르니 층층이 쌓인 바위와 절벽, 깊은 골짜기와 수많은 산봉우리에 녹음이 우거져 있다. 홀성루에 올라서 보니 일만 이천 봉이 창을 세운 듯 옥을 깎은 듯 벌여 있다. 금강문을 지나 만폭동을 향하니 반석 위에 글이 있는데, ‘봉래풍악이요 원하동천’이라고 쓰여 있다. 금강산이 사시(四時)로 변하여, 봄에는 봉래, 여름에는 금강, 가을에는 풍악, 겨울에는 개골산이니, 사계절 중에 봄과 가을의 경치가 가장 좋기 때문에 이렇게 썼다. 전후좌우에 폭포 소리가 요란하여, 귀가 먹먹하고 눈이 현란한데 이것이 팔담이다. 팔담은 흑룡담, 비파담, 벽파담 등 모두 이름이 있고, 이 물이 흘러서 만폭동이 되었다. 위에는 보덕암이 공중에 달린 듯 높이 있다. 마하연을 찾아가니 층층이 쌓여 있는 바위는 천년을 누리는 돌부처요, 불조는 속세에서 온 사람을 조롱하니, 극락세계 아니면 신성스러운 산이다. 동구에 이르니 정쇄암 암자가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고, 세상 티끌이 전혀 없으니 금강산 복판이다. 세조가 머리를 깎은 후 이 절로 공부하러 올 때 세조는 속세의 임금이니 이곳에 올 수 없다고 공중에서 소리가 났다는 곳으로, 성인만이 살 수 있을 곳 같다. 절에서 낙파라는 노승을 만났다. 그는 원래 동래 사람이며 금강에 와 중이 된 뒤, 사십 년간 동구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팔십구 세에도 근력이 정정하다. 백운대로 향하니 모든 산은 다 아래로 보이고, 하늘이 머리 위에 멀지 않은 듯하다. 상쾌한 마음이 학을 타고 백운간에서 왕래하는 듯하다.
 
금강수라는 물은 마시면 마음이 깨끗하고, 정신이 상쾌하고 깨끗하여 오랫동안 마시면 환골탈태한다고 한다. 묘길상을 찾아가니 십여 길 절벽에 석가여래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영원동으로 가는 길에 황천강이 있다. 또 그 위에 연경대가 있고, 아래에는 흙사굴과 금사굴이 있는데, 음침하다. 한 욕심 많은 부자가 갇혀 있다고 전해 온다. 영원암에 이르니 안산 시왕봉이 붓을 꽂은 듯하고, 봉봉이 이름이 있으며 가지런하고 단엄하여 지부 십대왕이 벌려 선 임금의 행렬 같다. 금강산에서 가장 깊은 태을암을 들른 뒤에 유점사로 향하다가 만경동에 다다르니 층층 암벽이 다 폭포수다. 유점사에 이르니 금강 내외산 중에 제일 명승이고, 번화한 큰 사찰이다. 능인보전을 바라보니 전각도 번화하고 기구도 찬란하다. 채색한 나무 등걸 가지마다 오십삼불을 차례로 앉혔으니, 오십삼불은 본래 서녘 월시국 부처가 그 나라 임금과 금강산 구경을 왔던 공덕으로 월시왕 사당을 짓고, 화상을 두어 지금껏 기리는 것이다.
 
법화당 흥성암을 본 뒤 다시 능인보전에 와서 인목왕후 친필과 오색주렴을 보고 신계사로 향하였다. 신계사에서 만세루에 올라보고, 다시 산천의 경치를 구경한 뒤에 이튿날 구룡연을 찾았다. 연주폭포는 경치가 비할 데 없이 빼어나고 은하수가 드리운 듯하며 무지개가 백 리 길에 비끼는 듯하다. 비룡폭포, 무봉폭포는 기운이 금강산에 자욱하고 위에는 팔담이 있어 물이 흘러 구룡연이 되었다. 신령한 기운이 가득한 보광암에 들르고 마타암을 지나 신계사로 돌아왔다.
 
이튿날 만물초에 도착하니 층층한 돌, 솟아난 바위가 세상 만물의 모양이다. 금강문을 지나니 천지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어 신선이 거처하는 곳 같다. 일만 기둥이 하늘을 받들고, 일천 암석이 공중을 괴어, 선관(仙官)이 학을 타고 옥경(玉京) 주에서 조회하는 모양이다. 금강산 구경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니, 선계를 하직하고 다시 인간 속세로 돌아오는 느낌이다.
 
아무리 거짓을 잘 하는 자라도 많고 많은 경치를 모두 말하기 어려우니, 과연 천하의 괴이하고 경치가 빼어난 명산이다. 사월 십육일 집으로 돌아와 그리운 집안 식구를 만나, 극락세계가 멀리 구할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것이라 하니, 모두 옳다 하고 웃지 않는 이가 없다.”
 
만덕은 눈만 뜨면 천자문을 외우듯이 《금강산유상록》을 소리를 내어 읽었다.
 
 
경전에는 동북방 청량산 다음에 해중금강산(海中金剛山)을 열거하고 거기에 법기보살24)이 거처하며 12,000여 명의 권속을 거느리고 지금도 설법한다고 하였다. 그 설법의 내용은 주로 반야에 관한 설법이라고 한다. 법기보살에 대한 신앙은 8세기 전반에 의상의 제자인 표훈 등에 의해서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표훈은 법기보살이 상주하고 있다는 법기봉을 뒤로 하고 표훈사를 창건하였다. 본당을 반야보전이라고 하고 법기보살의 장륙상을 주존불로 안치하였다. 특히 이 불상은 법당 정면에 모신 것이 아니라 동쪽을 향하여 안치시켰다. 이는 법기보살이 향하는 위치를 경에 준하여 배치한 것이다. 또, 법당의 이름을 반야보전이라 한 것은 법기보살이 항상 반야의 법문을 설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기보살에 대한 신앙은 표훈사 뒤쪽 5리쯤에 있는 정양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려 태조가 이곳에 올라왔을 때 법기보살이 현신하여 석상(石上)에서 방광을 하였고, 이에 감격한 태조 왕건이 정양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이 절의 본전도 반야전이고 표훈사와 마찬가지로 법기보살을 주존으로 봉안하였다. 또 금강산 법기봉 밑에는 합장하고 고개를 숙인 모습의 자연석이 있다. 이것을 상제보살(常啼菩薩)이라 한다. 《화엄경》에서 법기보살을 좇아 7일 7야 동안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반야의 법문을 듣는다는 보살이다. 또, 이 법기봉을 마주보는 곳에 혈망봉(穴望峯)이 있고, 그 상부에는 큰 구멍이 뚫려 하늘을 마주 하는듯한 형상의 바위가 있다. 이를 여래의 대법안장(大法眼藏)이라고 부르는데, 법기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이 법안을 따로이 갖추고서 광명을 나타내어 유연자(有緣者)로 하여금 묘각을 증득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가운데 금강산이라는 곳에 법기보살이 상주하고 있음을 설한 《화엄경》의 이야기는 신라인에게 있어서는 큰 자부심이었다.
 
특히 신라에서는 불국토 신앙이 꽃피고 있었다. 화엄의 교리에 의해서 정착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 법기보살에 대한 신앙은 신라 불국토설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고대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군신이자 폭풍의 신 인드라는 번개를 내리는 강력한 무기 바즈라(Vajra)를 지니고 있는데, ‘바즈라’가 바로 금강석이다.
 
사실 금강석은 다이아몬드로서 그것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아미다스(amidas)에서 파생되었다. 모든 쇠붙이 가운데 가장 단단하고 견고하여 모든 것을 깰 수가 있지만 그 자신은 다른 무엇에도 부서지지 않는 것이 바로 금강이다. 불교에서는 금강석으로 번뇌와 무명을 퇴치한다. 바로 아무리 두터운 번뇌의 무리도 단칼에 쓸어버리는 지혜의 상징인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을 또한 《능단금강경(能斷金剛經)》이라 했다. 금강과 같은 굳세고 날카로운 지혜로 번뇌의 덤불을 베어 없애 밝은 저 피안의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다. 이렇듯 금강이란 이름은 초기 반야계 경전을 대표하는 《금강경》의 그 금강에서 나온 것으로, 반야의 속성인 굳셈(堅), 날카로움(利), 밝음(明)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일진대, 법기보살은 그 반야의 법을 일으키는 보살임에 틀림없다. 금강산 대가람으로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유점사, 신계사 등이 천년의 법등을 지켜 왔으며, 크고 작은 사찰이 108개나 있었다고 하며, 불교와 관련된 산봉우리도 많아 지장봉(1,381m), 석가봉(946m), 세존봉(1,122m), 관음봉(453m), 천불산(654m), 대자봉(362m), 미륵봉, 칠보대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만덕은 사찰에 머물며 큰 스님이 설명하는 불교 이야기를 가슴속에 하나씩 담아나갔다. “불교 경전에는 법기보살이 1만 2천 권속을 거느리고 금강산에 머문다고 적혀있다. 또 금강산에는 8만 9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백제 무왕 시기(600년)에 관륵(觀勒)이란 스님이 왕사였던 융운(隆運)스님 등과 함께 금강산 도솔봉 중턱에 수행정 진을 위해 창건했다는 암자 ‘팔방 구암(八房九庵)’에서 따온 것이다.” 경전에는 세상에는 여덟 가지 금강이 있는데 7금강은 모두 바다 속에 있고 단 하나가 해동에 출현했다고 전해진다. 《화엄경》에서 말한 금강산이 정형화되고 체계화되어 세간이 일반화된 것은 고려 말 14세기부터였다. 이때부터 금강산을 향한 불교도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고 불교의 고승 대덕의 수행처로 활용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해금강은 7금강을 상징하는 것이다.
 
《화엄경》은 고타마 붓다가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설이라는 설이 있다. 일부 불교학자들은 《화엄경》은 대승불교의 경전이라 부처님이 직접 법을 설하지 않고 보살들이 삼매에 들어 있다가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받아서 대신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 보살들이 법을 설하는 구조라고 설명한다. 신라의 의상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화엄종을 배워 와서 화엄종을 창시하였다.
 
《화엄경》의 본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으로 크고 바르고 넓은 진리와 연꽃처럼 높은 공덕을 뜻한다.이 화엄경에 보면 금강산에 머무는 법기보살이 나오는데 바로 우리나라의 금강산에 있으면서 항상 설법하고 있다는 보살이다. 금강산이 법기보살의 주처였다는 믿음이 언제부터 이 땅에 이식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불교의 최고 경전인 80권 본 《화엄경》에는 금강산이 법기보살의 주처로 밝히고 있다.
 
80 화엄의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서는 방위별로 산명을 열거하고 예로부터 여러 보살들이 머물러 살았음을 상기하고 있으며, 현재 어느 보살이 권속 얼마를 거느리고 어느 산에서 설법하고 있다는 것이 그 주요 내용이다.
 
불교도들은 중국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계시고, 인도의 보타락가산에는 관세음보살이 머물고, 금강산에는 법기보살이 계신다고 생각했다. 고려 신종 2년(1199)에 건립된 ‘발연사 진표율사장골탑비에는 화엄경의 내용을 적어 법기보살이라고 적었다. 충렬왕 33년(1307)에 제작한 불화에는 고려 태조가 금강산에서 법기보살에게 예경하는 불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원나라 황실에서는 금강산에 있는 모든 절에 시주하고 향로를 올리고 예배를 하였다.원에 귀화한 인도의 고승 지공(指空) 화상이 고려 금강산법기보살도량(金剛山法起菩薩道場)에 참가하였을 때, 고려 충숙왕이 지공에게 설법을 요청하자 이 책을 내놓고 설법하였다고 한다. 경은 나무에 새겨서 닥종이에 찍은 것으로, 3권이 하나의 책으로 묶였다. 크기는 세로 26.1㎝, 가로 19.2㎝이다. 고려 우왕 12년(1386)에 쓴 이색의 간행기록을 통해 1353년에 강금강(姜金剛)이 간행한 것을 고려에서 다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예안군 우공(禹公)이 옮겨 새기려다가 완성하지 못한 것을 성암사(聖庵寺)의 시주로 1386년 5월에 완성하여 간행한 것이다. 조선 성종 때 일본의 승려가 외교사절로 왔다가 금강산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간청하자, 조정에서는 찬반이 양립하였다.
 
 
만덕은 금강산의 사찰 중에 제일 큰 절인 유점사에 도착하여 부처님께 큰 절을 올렸다. 유점사는 산내 암자를 60여 개나 거느린 사찰로 마당에는 높은 9층 석탑이 있는데 돌 빛이 푸르렀다. 유점사는 신라 유리왕 23년에 창건되어 53불(佛)의 연기(緣起)와 관련된 창건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1408년(태종 8)에는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이 태종에게 아뢰어 백금 2만 냥을 얻어서 건물 3,000칸을 중건하였다.
 
1466년에 세조가 유점사에 왔다가 승려 학열(學悅)에게 중건을 명하여 거찰이 되었고 법당을 능인전이라 하고, 절 앞 계류를 가로질러 세워진 산영루(山映樓)도 이 때 지어졌다. 정인지가 짓고 정난종(鄭蘭宗)이 쓴 대종기(大鐘記)가 남아있다. 1595년(선조 28)에는 유정이 인목대비가 하사한 내탕금(內帑金)으로 사찰을 중건하였다. 1636년(인조 14) 화재로 소실된 뒤 곧 중건하였고, 1703년(숙종 29)에는 백금 2,000냥으로 중창하였으며, 1759년(영조 35) 불에 타자 북한치영(北漢緇營)의 승병대장 보감(寶鑑)이 와서 10년의 공사 끝에 중건하였다. 승려 돈징(頓澄)이 만덕을 반갑게 맞이해 주고 사찰의 내부를 안내해 주었다. 당시 유점사에는 150여 명의 수도승이 머물러 기도했고 일하는 사람만 300여 명이 기거할 만큼 큰 사찰이었다. 능인전(能仁殿) 전각 안에는 53 금동불과 각향목(刻香木) 상천축산(象天竺山)이 있어 만덕은 높고 화려한 건물과 향기에 놀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만덕은 수월당, 연화사, 제일선원, 반룡당(盤龍堂), 의화당(義化堂), 서래각(西來閣) 등 6전(殿) 3당(堂) 3루(樓)를 모두 돌아보았다. 주지는 저녁을 먹고 나서 차를 대접하면서 왕명으로 먼 길을 온 만덕에게 지공의 친필인 《보살계첩(菩薩戒牒)》과 보물을 특별히 보여주었다. 보살 계첩은 가로 약 7㎝, 세로 약 10㎝ 크기의 감색 장지에 금니(金泥)로 쓴 것을 책으로 묶은 귀중한 문화재로 만덕은 계첩을 보는 순간 환희심이 일어났다.
 
만덕은 세조가 하사한 자개를 가지고 앵무새의 부리 모양으로 만든 술잔인 앵무배(鸚鵡杯)와 호박잔, 지공대사가 인도에서 가지고 와 만들었다는 패엽경(貝葉經), 인목대비가 불경을 필사한 사경, 정명공주(貞明公主)가 쓴 불경, 신라 남해왕이 하사했다고 전해지는 향로와 비취옥배, 고려 말 나옹선사의 가사 장삼 등은 누대에 걸쳐 칭송받을 보물 등을 천천히 감상했다. 만덕은 유점사의 고승이었던 유정(惟政), 송월대사(松月大師), 기암당(奇巖堂) 법견(法堅), 춘파당(春波堂) 쌍언(雙彦), 풍악당(楓嶽堂)의 일화를 듣고 승탑과 비를 참배했다. 유점사에는 정조 22년(1798년) 이후 역대 주지 명단을 보관하고 있다.
 
만덕은 유점사에 짐을 풀고는 산내 암자를 순례했다. 도솔암은 유점사 북쪽 2㎞ 지점에 있는 암자로, 1535년(중종 30)에 금강산 승려인 성희(性熙)가 창건, 요사와 극락전을 짓고 불상 7구를 봉안하였다. 불화25)는 모두 당나라의 화가 오도자(吳道子)26)의 그림이라고 한다. 오도자는 배를 타고 백제 땅 강진 무위사에서 마흔 아홉 날을 자지 않고 천 분의 부처를 그리고 금강산에 입산했다. 유물로는 삼족동로(三足銅爐)와 고동병(古銅甁)이 있다.
 
장안사는 내금강의 거찰로 신라 진흥왕 때인 551년 고구려의 승려 혜량조사가 창건했다.27) 진표는 773년에 장안사를 중창했다. 고려 광종 때인 970년에 절이 불에 타 사찰 전체가 소실된 것을 성종 원년인 982년에 회정선사(懷正禪師)가 사찰을 중건하였다. 굉변대사(宏卞大師)가 담무갈 보살에게 장안사를 중흥할 것을 맹세하고 불전을 수리하고 빈관(賓館)과 승방을 완성해 가던 중 비용이 부족해지자, 원나라 연경으로 건너갔다. 이 일은 곧바로 기황후(奇皇后, 1315~1369)에게 알려졌다. 고려국 출신으로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가 된 기씨는 황제와 황태자를 위하고 고려의 중흥을 위해 장안사를 크게 중창하기로 마음을 먹고 고려 충혜왕 때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를 보내 지원한다. 이때 중건된 건물은 대웅보전, 사성전(四聖殿), 명부전, 신선루, 수정각(水亭閣) 등과 여러 요사들이다. 1346년에 중국 원나라 순제는 황후가 왕자를 낳자, 황제와 왕자의 수명장수를 빌고자 장안사에 높이가 2.2m이며, 직경 1.35m, 무게는 1.67t 종을 시주했다. 만덕은 장안사에서 기복종(祈福鐘)의 맑은 종소리를 듣고 깊은 환희심에 빠졌다. 원 순제와 기황후는 절을 중창하며 은으로 쓴 대장경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원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고려에 파견된 자정원사(資正院使) 강금강(姜金鋼), 장고부사(座藏庫副使), 신예(辛裔) 등 원나라 장인들은 장안사에서 종을 주조했다. 1459년 세조가 동방 순방을 나왔다가 사찰에 머물며 토지를 하사했다. 1791년(정조 15) 순찰사 윤사국(尹師國)이 5,000관의 전(錢)을 내어 어향각(御香閣), 적묵당(寂默堂), 설선당(說禪堂), 장경암, 영원암 등을 중수했다.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율사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발연사를 창건하고 7년을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었다. 진표는 흉년으로 굶주린 이재민들을 적극 돕고 사찰의 불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장안사에서 동쪽의 지장봉 쪽으로 뻗어 있는 백탑동과 수렴동 계곡에는 높이 70m에 너비 10m의 거울처럼 매끈한 암벽인 명경대를 비롯하여, 황천담, 옥경대, 옥초대, 반야대, 수렴폭포, 망군대, 영원암 등이 있다. 또한 다보탑이라고 불리는 50m 높이의 천연 석탑도 남아 있다. 외금강은 비로봉에서 북쪽으로 옥녀봉, 상등봉, 온정령(溫井嶺, 858m), 오봉산을 잇는 산능선과 남동쪽으로 채하봉을 이루고 뻗은 산줄기 사이에 자리잡은 문주봉( 906m), 수정봉(773m), 세존봉, 신선들이 모여든다는 집선봉(集仙峰, 1,351m) 등 아름다운 산봉우리와 곳곳의 깊은 계곡이 장엄하고 기세찬 산악미를 보여주는 곳이다.
 
기암괴석이 온갖 모양을 다 갖춘 만물상의 여러 봉우리와 톱니 모양의 빼어난 봉탑(峰塔)을 이룬 관음연봉은 온정천이 침식한 한하계(寒霞溪)와 함께 장관을 이루고 있다. 신계천이 침식한 구룡연 계곡에는 금강문, 옥류동, 연주담, 비봉폭포와 연주폭포, 구룡폭포, 비사문(飛沙門), 상팔담(上八潭)이 계곡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만덕은 선녀와 나무꾼 전설의 배경인 상팔담에 오르고자 기다렸으나 산에 비가 내려 조금 실망했다. 다음 날 날씨가 좋아지자 승려들과 상팔담으로 향해 걸었다. 안개가 걷히자 8개의 맑은 웅덩이가 보였다. 호수에서 떨어져 흐른 물이 높이 74m, 너비 4m로 흘러 구룡폭포가 되고 다시 옥류동 계곡을 지나 먼 동해 먼 바다로 나간다. 구룡폭포 아래에는 깊이 13m의 구룡연이 있다. 구룡폭포는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이다. 만덕은 외금강 지역의 바위산으로 유명한 금강산을 대표하는 만물상을 바라보면서 또 한 번 넋이 빠진다. 만물상의 본래 이름은 만물초(萬物草)였다. 만물초는 조물주가 이 세상을 창조할 때 금강산을 초(草)를 잡아 만들었다는 뜻이다. 금강산의 산악미가 돋보이는 만물상은 온정천 상류의 한하계 골짜기, 만상계, 온정령의 명승 구역으로 깎아지른 층암절벽과 천태만상을 나타내는 기암괴석들로 특이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만덕은 힘들지만 용기를 내어 만상정, 삼선암, 칠층암, 절부암, 안심대, 하늘문, 천선대, 망양대에 이르는 힘든 길을 걸었다. 만덕은 천선대에 오르면서 하늘 문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기어서 갔는데 너무 힘들어 법기보살님 명호를 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만덕은 하늘 문에 이르러 파란 하늘을 보면서 금강산의 오묘함을 찬탄했다. 금강산에 오르면서 승려들은 ”배가 고프면 이 산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구경할 수 없습니다. 떡도 드시고 감자도 드시고 물도 충분하게 드십시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고 말했다. 만덕은 만물상을 보고는 비탈길이 없는 편안한 하산길인 동석동 쪽으로 걸었다. 이 길에는 기암괴석이 즐비한 선하동과 미인송 군락지, 영춘대 등 금강산의 숨겨진 또 다른 아름다움과 멋을 간직한 볼거리들이 만났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법당에 다녀온 후에는 승려들을 따라 사자목과 전망이 좋은 습경대, 귀면암을 보고는 유선암 주변의 오만물상(奧萬物相) 쪽에 있는 연주폭포와 이단폭포를 구경했다.
 
비로봉으로 가는 날은 사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른 날보다 더욱 분주하고 활기가 넘쳤다. 산이 높고 멀기도 하지만 함께 가는 인원이 많아 가져가야할 음식도 많아 마치 소풍을 떠나는 행렬처럼 보였다. 승려들도 비로봉에 올라가 본 사람이 많지 않아 만덕 보살이 비로봉을 찾을 때 함께 가려고 나섰다. 비로봉은 금강산의 주봉으로 동해의 푸른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만덕은 넓은 비로고원에서 누운 잣나무, 누운 향나무, 누운 측백나무, 만병초 등 고산식물을 보면서 바람이 세서 한라산에 바짝 엎드린 나무들을 생각했다. 아래로 소비로봉이 보이고 금사다리 은사다리로 불리는 절경을 끼고 있어 정말 장관이었다. 승려들은 정상에서 만덕에게 산의 방향과 산에 얽힌 많은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덕은 금강산에서 나이 많은 포수를 만나 짐승에 대하여 물으니 포수는 산에 동물이 아주 많다고 대답했다. 금강산에는 사향노루, 곰, 산양이 많고 2백 종의 조류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남한에서 출발하는 금강산 관광이 잠시 중단되었지만, 북쪽 안내원들은 비로봉에 오르면 신나서 설명했다. “북쪽으로 영랑봉(1,601m), 옥녀봉(1,424m), 상등봉(1,227m), 오봉산(1,264m) 등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월출봉(1,580m), 일출봉(1,552m), 차일봉(遮日峰, 1,529m), 미륵봉(1,538m), 전망이 좋은 백마봉(1,510m), 호룡봉(虎龍峰, 1,403m), 국사봉(1,385m) 등이 보인다. 이들이 형성한 분수계를 경계로 하여 서쪽은 내금강, 동쪽은 외금강으로 구분한다. 내금강에는 북한강의 상류인 동금강천과 금강천이 흐르고 외금강에는 고성 남강 및 그 지류인 온정천 등이 흐른다. 이들 하천이 태백산맥의 분수계를 향하여 활발한 두부침식(頭部侵蝕)을 진행하여 이른바 일만 이천 봉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비로봉, 영랑봉, 채하봉(彩霞峰, 1,588m) 일대에는 태백산맥이 융기하기 전의 원지형으로 비교적 평평한 고위평탄면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금강산의 모습은 약 1천만 년 전인 신생대 제3기 중신세 이후 진행된 경동성 요곡운동(傾動性撓曲運動)으로 형성되었다. 암석은 흑운모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대부분으로 오랜 세월 동안의 풍화와 침식으로 온갖 천태만상의 기암괴석과 함께 수많은 골짜기마다 노암(露巖)의 수직 절벽, 암대(巖臺), 폭포, 분류(奔流), 심담(深潭)을 형성해 놓았다. 내금강을 흐르는 북한강 상류의 하천들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나, 외금강의 하천들은 길이가 짧고 경사가 매우 급하여 침식력이 더 크므로 산세의 험한 정도나 골짜기의 깊은 정도에 있어서 외금강 쪽이 훨씬 뛰어나고 지역적 범위도 넓다.” 시인 묵객들은 “내금강은 온자우아(蘊藉優雅)하여 여성적이고, 외금강은 웅건수특(雄健秀特)하여 남성적이다.”고 비교한다. 금강산의 동쪽 해안에는 수원단(水源端)으로부터 구선봉에 이르기까지 입구가 모래로 막힌 아름다운 호수와 기암이 어울린 해금강이 있다.
 
 
만덕을 태운 가마가 장안사를 거쳐서 표훈사에 도착했다. 표훈사는 670년에 표훈이 창건하였다. 이곳에 원나라 영종이 세운 비가 있는데, 영종이 그의 태후·태자와 함께 보시를 하였던 곳이다. 1457년에 세조가 보수하여 그 규모가 일신되었다.
 
 
정양사에는 헐성루(歇惺樓)가 있어 여기에 올라가면 뭇 산봉우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가 있다. 이 절의 육면전(六面殿) 안에는 석구약사상(石軀藥師像)이 안치되어 있고 사면 벽에는 천왕신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보덕굴은 만폭동 안에 있는 암자로 규모는 크지 아니하나 특이한 구조로 해서 금강산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암자는 절벽의 일부를 뚫어 거기에 널쪽을 걸치고, 이 널쪽이 떨어지지 않게 밑에서 구리 기둥으로 받친 다음 그 위에 지은 것이다. 구리 기둥만으로는 암자가 지탱되지 않으므로 암자 위쪽 암석에 구멍을 파고 쇠말뚝을 박아 쇠사슬로 암자와 연결시켜 놓았다. 정동(鄭同)이라는 중국 사신이 금강산 구경을 왔다가 보덕굴을 보고 참 불계(佛界)가 바로 여기라 하고, 죽어 다시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 길이 이 불계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만덕은 아름다운 금강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세정봉 쪽으로 향했으나 산속의 날씨가 흐려 산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고 하여 승려들이 권유하는 대로 가까운 절을 찾아갔다.
 
내금강 쪽의 배점이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내금강의 천봉만학(天峯萬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이 배점에 오른 사람은 막대를 놓고 삼가 금강산의 산봉들을 향하여 절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데서 연유한 지명이다. 금강산은 하늘로 솟은 봉들이 수려하기 때문에 풍겨주는 영기(靈氣)가 있고, 그 신령스러운 기운은 산의 영기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영기로서 더 높은 상태로 변하고 승화(昇華)하여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마하연은 신라 시대에 승려 의상이 창건하고, 월송대사가 중건한 절이다. 묘길상은 마하연에서 동쪽으로 계류를 따라 내무재령(內霧在嶺, 1,275m) 쪽으로 약 1㎞ 지점에 있다. 거대한 암벽의 마애불은 만폭동 골짜기의 높이 40m 벼랑에 새긴 고려시대의 마애불로 묘길상은 높이 15m, 너비 9.4m이며, 얼굴은 높이 3.1m, 너비 2.6m이고 눈의 길이는 1m, 귀의 길이 1.5m, 손의 길이 3m, 발의 길이 3.2m의 결가부좌한 미륵보살이다. 부처의 웃고 있는 얼굴, 긴 눈썹, 가늘게 뜬 실눈, 이마의 백호(白毫), 유달리 길게 드리워진 큰 귀, 통통한 볼, 짧은 목, 앞가슴을 드러내고 두 어깨에 걸친 옷의 주름 등을 바라보면서 만덕은 이제야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많은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묘길상을 꼭 보고 와야 한다고 말한 뜻을 그때야 알게 되었다. 비로소 부처님 염화시중의 미소를 알게 되었다. 만덕은 금강산의 바위, 건물 벽, 기둥에서 선비들의 글씨를 많이 보았다. 바위에 정으로 글자를 새기는 유명한 각자승(刻字僧)이 있어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남길 수가 있었다. 명승지에 자신의 이름이나 시를 쓰는 제명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선왕조에 들어와 매우 성행했다.
 
그중 내금강 만폭동 바위에 크게 새긴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초서 글씨 연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 유명하여 “만폭동 경관의 값이 천 냥이라면, 그중의 오백 냥은 양사언의 이 글씨 값이다.”이라는 말이 전할 정도였다. 글씨의 크기로는 외금강 구룡폭 절벽에 새겨져 있는 ‘미륵불(彌勒佛)’이라는 글씨가 으뜸이다.
 
 
한 승려가 산에 오르면서 만덕에게 안민영(安玟英)의 시조를 들려주었다.
 
 
“금강 일만 이천 봉이 눈 아니면 옥이로다,
헐성루 올라가니 천상인 되었다.
아마도 서부진화부득(書不盡畫不得)은 금강인가 하노라.”
 
 
만덕은 금강산에 들어가 기이한 경치를 두루 탐방하고 사찰을 만나면 반드시 부처님에게 절을 하고 승려들에게 시주하고 기도를 올렸다. 금강산에 들어온 지 여러 날이 되자. 주변에 있는 나무들이 너무 좋아 절에 있는 부목에게 나무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절에서 나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금강산의 광대한 처녀림을 이룬 곳도 알려주고, 약 710종의 식물을 하나씩 들려주었다. 부목은 금강산의 나무로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의 침엽수와 단풍나무, 벚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등의 활엽수를 거들었다. 표고가 높은 산마루에는 누운잣나무, 누운측백나무, 만병초, 들쭉나무 등도 있다고 설명했다. 만덕이 꽃에 대하여 질문하니 부목은 금강산에는 금강초롱을 비롯하여 금강봄맞이꽃, 금강국수나무, 만리화 등 특산 고산식물을 술술 막힘없이 말하였다.
 
신계사는 금강산 4대 사찰로 외금강 쪽에 있다. 만덕은 온정리를 지나 관음봉과 문필봉 사이에 있는 극락 고개를 넘어 신계사를 참배했다. 창건은 519년(법흥왕 6)에 보운조사가 개산했다. 653년에 김유신이 신라 왕실의 기도를 올렸다. 지소(智炤)는 무열왕 김춘추의 셋째 딸로 김유신과 혼인했다. 682년에 김유신의 처 지소부인이 왕비에게 청을 올려 사찰을 중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신계사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깊은 관계가 있는 도량으로 자소는 김유신이 죽은 후 10년이 지나 비구니로 출가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생을 마쳤다.
 
1789년(정조 13)에 조정에서 큰 시주를 하여 전각을 짓고 사도세자의 천복(天福) 도량으로 삼았다. 천복은 천국에서 오는 천상의 기쁨이라는 뜻으로 아주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
 
만덕은 절에서 큰 병풍을 보았다. 금강팔경도는 금강산 중에서도 이름난 명소풍경을 선택하여 각 폭 병풍체로 꾸며진 병풍이다. 절의 주지가 화가들이 왔을 때 잘 대접하고 작품을 하나 얻은 것을 자랑스럽게 전시했다. 관동팔경도와 같이 8개 명소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단발령, 만물초, 만폭동, 해금강, 총석정, 구룡연, 옥류동, 명경대, 은선대, 묘길상, 보덕굴, 정양사, 비로봉, 마하연 등을 병풍에 담았다.
 
금강산도 병풍의 화풍상은 정통화체, 민화체, 판화체의 세 가지로 분류된다. 정선은 금강산도의 대표적 작가로 중국류의 상상적 산수화 기법에서 탈피하여 우리나라의 실경을 화제로 삼아 새로운 진경산수화를 창작하여 18세기 화단의 선봉자가 되었다. 그는 금강산도 창작에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속필수정체(速筆水晶體)의 골선준법(骨線齧法)은 하나의 새로운 산수화법을 이루었고, 후세에 많은 화가들이 그것을 본받았다. 정선은 금강산 전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금강산의 구석구석을 사생해 왔다. 금강십경도나 십이경도의 병풍을 많이 그렸는데, 때로는 20여 척의 거대한 화폭에 일만 이천봉 전부를 배치하여 금강전도를 그렸다. 김홍도, 최북, 이인문(李寅文) 등 산수화가들도 금강산도의 명작들을 남겼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오월 단오 때 금강산을 부채에 그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금강산에는머루·다래 등의 산과일, 고비, 도라지, 족두리풀, 송이버섯, 검정버섯, 봇나무혹버섯, 두릅, 더덕, 도라지, 오미자, 삼지구엽초, 솔꽃가루 등의 산나물과 약초가 많았다. 승려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많은 양의 꿀을 채취하여 이를 솔가루와 혼합하여 환으로 만들어 먹었다. 그렇게 대비해야 겨울 추위에도 공동 수도 생활을 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만덕은 산에 오를 때마다 환을 지급받았다.
 
사찰의 공양주들은 참선을 오래 하는 스님들을 위해면역력이 높고 피로를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버섯요리를 개발하여 매일 공양을 올렸다. 금강산에서 따는 버섯은 특히 허리 아픔과 노화 방지에 특효가 있어 나이가 많은 고령의 승려들에게 많이 제공하였다. 만덕은 절밥을 먹으며 밥이 맛이 좋고 공양간의 보살들이 고마워 자주 공양간을 출입했다. 지금은 사찰음식, 발우(鉢盂)공양, 산사 음식 등 여러 이름으로도 불리지만 예전에는 그냥 공양이라고 불렀다. 높여 부르는 말로 향적(香積)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유마경의 「향적불품(香積佛品)」에 나오는 말로 진리를 깨닫는 법열을 음식에 비유한 것이다.
 
사리불이 점심시간이 되어 여기 모인 보살들에게 무엇을 드릴까 하고 속으로 고민하자, 유마힐이 이제까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음식을 만들어 드리겠노라며 신통력으로 향적 여래가 계시는 중향성(衆香城)의 전경을 보여주며 향적 여래가 베푼 향반(香飯)의 묘용을 보여주었다.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 가운데 “개심대(開心臺) 고텨 올나 중향성 바라보며 만이천봉을 역력히 혀여니 봉마다 쳐 잇고 긋마다 서린 긔운 거든 조티 마나 조커든 디 마나…….”라고 서술한 것이 금강산을 묘사한 내용의 일부이다. 《증일아함경》 「마왕품」에 보면 부처님께서 바라촌에 이르러 탁발을 하려하자 마왕 파순28)이 방해하여 탁발이 어려워졌다. 이에 부처님께서 4가지 세간식(世間食)과 선식(禪食), 원식(願食), 염식(念食), 해탈식(解脱食), 희식(喜食)의 5가지 출세간식(出世間食)을 거론하며 참된 수행과 진리를 깨닫는 기쁨을 설하신 바가 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지은 「대숭복사비명병서(大嵩福寺碑銘竝序)」에는 불사에 크게 기여한 김원량의 공덕을 칭송하며 “이로부터 종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지고, 발우에는 향적반이 가득 담기게 되었다”고 하였다.29) 절에서 공양간이나 식당에 향적이란 명칭을 쓰기도 하였는데,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 17권을 보면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를 방문하여 “서쪽 월랑의 대청을 ‘향적’이라 한다.”고 기록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세모승(細毛僧)’이란 시에서 “문수의 제호가 바로 이게 아니던가(文殊醍醐即此否) 향적의 반공도 보다 나을 것이 없네(香積飯供無過之)”라며 냉채의 맛있음을 향적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만덕은 고성을 거쳐 삼일포에서 배를 타고 바다에 나아가 총석정을 둘러보았다. 총석정은 주상절리가 무수히 발달한 기반암이 바닷물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것이며, 삼일포는 사주에 의하여 이루어진 석호로서 넓이가 0.79㎢인 아름다운 호수이다. 총석정과 삼일포의 빼어난 경관은 예로부터 관동팔경에 손꼽혔다. 호수 가운데 있는 와우도와 사선정터, 무선대, 단서암 등은 호수 경관을 돋우어주며, 장군대, 봉래대, 연화암, 연화대, 몽천(夢泉) 등의 명소가 있다. 삼일포에서 약 4㎞ 동쪽의 남강 하구를 중심으로 펼쳐진 해금강에는 송도, 불암 등의 섬과 사공바위, 칠성바위, 입석 등의 해식애와 해식암초가 장관이다. 특히, 금강산에서 본 만물상을 바다에서 다시 보게 된다는 느낌을 주는 해만물상은 수정같이 맑은 물 밑으로 물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갖가지 수중 만물상이 계속된다. 이곳의 배바위, 사공바위, 동자바위, 서적바위, 사자바위, 고양이바위, 잉어바위는 정말 아름답다. 만덕은 통천 총석정과 삼일포를 보는 내내 “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가마꾼에게 털어놓았다.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도 멀지만 만덕은 마음이 평안했다.
 
만덕은 마의태자30)의 슬픈 전설이 깃든 금강산을 돌아보고 한양으로 돌아오면서 지난 한달 가량의 금강산의 긴 노정을 회상했다. 금강산은 비로봉을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뻗은 산맥능봉선(山脈稜峰線)과 비로봉에서 동쪽으로 뻗은 선에 의하여 나눌 수 있는데, 서쪽이 내금강, 동북쪽 부분이 외금강, 동남쪽 부분이 신금강이며 동쪽 해안이 해금강이다. 내금강은 능허봉(凌虛峰, 1,456m), 영랑봉, 비로봉, 월출봉, 일출봉, 내무재령, 차일봉, 백마봉 등으로 연결되며, 촛대봉(1,148m), 중향성(1,396m), 지장봉, 시왕봉(1,147m), 백운대(1,105m) 등 천 미터가 넘는 산이 60개나 있고, 20여 개의 전망대와 30여 개의 기암괴석, 8개의 금강문을 두루 보았다. 가파르고 높이 솟은 봉우리 사이로 만폭동, 백천동, 태상동, 구성동골짜기가 있는데, 비로봉 북서쪽의 구성동 골짜기에는 가막소, 봉의대, 사자관, 조양폭포(朝陽瀑布) 등 명소가 있다. 조양폭포는 금강산 4대 폭포인 구룡폭포, 십이폭포, 비봉폭포와 같이 멋진 폭포로 너비 3m에 높이 31m의 2단 폭포이다.
 
금강산 사찰 순례는 장안사로부터 동금강천을 거슬러 오르면서 표훈사와 금강문을 지나면 약 2㎞ 규모의 만폭동이 시작된다. 이곳에는 분설담, 흑룡담, 벽하담, 진주담, 구담, 선담, 화룡담 등의 만폭 팔담이 있다. 이곳을 지나면 사자바위, 마하연암, 묘길상, 사선교가 나오며, 백운대에서는 중향성과 만폭동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온정령은 외금강의 산악미와 온정천의 계곡 풍경, 동해와 해금강의 원경, 내금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수정봉에는 금강산 최대의 아치형 천연 석교가 있으며 이곳에서 수정도 많이 나온다. 신금강은 내금강의 동남쪽, 외금강의 남쪽 부분으로서, 은선대, 칠보대, 십이폭포, 직류폭포, 채하폭포, 바리소, 무지개다리, 송림굴, 송림사, 소연소, 구룡소, 선담(船潭), 유점사, 반야암 등의 명소가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 십이폭포는 높은 벼랑을 열두 번이나 꺾어서 떨어지는 너비 4m, 높이 289m의 놀라운 폭포로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폭포이다. 전반적으로 전나무와 소나무 등의 울창한 원시림이 돋보이며, 53불의 전설을 가진 유점사는 미륵골의 초입이 된다. 성문동 계곡(聲聞洞溪谷)이라는 송림사 골짜기에 바로 십이폭의 비경이 숨어 있다. 해금강은 금강산이 동해로 뻗은 명승으로, 통천의 총석정을 포함하고 삼일포와 해만물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해식지형이다.
 
금강산에는 만물상을 비롯하여 구룡폭포, 무봉폭포(舞鳳瀑布), 비봉폭포, 수렴폭포, 옥류동, 만폭동 등의 수많은 폭포와 담수, 그리고 망군대(望軍臺), 명경대, 귀면암(鬼面巖), 삼선암, 마석암(磨石巖), 육선암, 칠보대, 은선대 등의 하늘로 뻗은 기암망대가 발길 닿는 곳마다 훌륭한 경관을 이루고 있어 짧은 기간이었지만 만덕은 왕명 덕분으로 승려들이 메는 가마를 타고 손쉽게 금강산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장안사, 신계사, 표훈사의 맛있는 절밥과 공양간의 공양주들이 준 누룽지를 떠올리며, 승려들이 선물로 손에 쥐어준 염주를 돌리며 조선왕조 국왕의 만수무강과 스님들이 성불하시기를 내내 기원했다.
 
 
강원도 고성을 출발한 지 10여 일 만에 도성에 도착한 만덕은 내의원에 들어가서 벼슬을 내놓고 제주도로 돌아가려는 귀향의 뜻을 알렸다. 이에 정조는 만덕을 격려하고 상을 내렸다. 만덕이 제주로 떠난다는 소문에 만덕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만덕의 숙소로 몰려왔다. 만덕은 출발에 앞서 채제공에게 “이 몸이 다시는 상공의 얼굴을 우러러볼 수가 없겠습니다.” 하며 작별 인사를 하고 울먹였다. 채제공이 타이르면서 “진시황과 한 무제가 모두 해외에 삼신산이 있다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한라산을 영주산(瀛洲山) 금강산을 봉래산(蓬萊山)이라고 한다. 그대는 탐라에서 자라 백록담의 물을 떠 마시고 이제 금강산도 두루 구경하였으니 이는 천하에 남자들도 못 한 일을 하였다. 이제 작별에 임하여 어린애처럼 울고 나약한 태도를 보이느냐? 그 몸가짐이 마땅하지 못하구나.” 하면서 만덕의 등을 두드려 주며 먼 길을 떠나는 만덕에게 《만덕전》31)을 주었다. 만덕전은 생활이 몹시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지경에 빠진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각박한 세상인심에 따뜻한 훈계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때가 정조 21년 하짓날이었고, 채제공의 나이는 78세였다. 만덕은 도성의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마포나루에서 작은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했다.
 
제주도에 흉년이 들고 민심이 흉흉할 때, 배를 구해 육지에서 곡식을 구해 와 굶주리는 이웃의 목숨을 구한 만덕 할머니를 우리는 영원토록 기억해야 한다.
 
 

 
주)
 
 
1) 정조 20년(1796년) 11월 25일 병인 1번째 기사에 “제주의 기녀 만덕(萬德, 1739~1812)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제주 목사가 보고하였다. 이에 상을 주려고 하였으나 만덕은 사양하였다. 바다를 건너 상경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이에 정조가 허락하고, 연로의 고을들은 양식을 지급하게 하였다.”는 구휼(救恤) 내용이 있다.
「丙寅 濟州妓萬德, 散施貨財, 賑活饑民, 牧使啓聞。 將施賞, 萬德辭, 願涉海上京, 轉見金剛山, 許之, 使沿邑給糧。」 【태백산 사고본】, 『정조실록(正祖實錄)』 45권,
2) 김상헌이 1600년 기록한 〈남사록〉에는 해남을 통해 제주도로 들어갈 때 일행은 38명이었다. 이증(李增, 1628-1686)이 1679년(숙종 5년) 9월 16일 제주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러 가면서 탄 배에는 53명이 승선했다.
3) 1629년 제정된 월해금법(越海禁法)으로 육지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과거 응시자, 공물 운반자, 공적인 업무 수행자에 한정하였다. 제주 사람은 200년이 지나서 1834년부터 자유롭게 육지를 왕래했다.
4)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화산에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하였다. 화성행궁은 1794년(정조 18) 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9월 초에 마친다. 정약용이 거중기를 만들고, 주민들에게 임금을 주고, 공사 책임제 등을 시행하여 예상보다 국가재정을 많이 절약했다.
5) 양력으로는 1796년 12월 22일(목)이다.
6)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영조 후반 시대와 정조 시대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최측근 인사 중의 한 사람이며, 정약용, 이가환 등의 정치적 후견자였다. 사도세자의 스승이었다.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번옹(樊翁),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7)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金氏, 1754~ 1821)는 정조의 왕비로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시호와 존호는 장휘예경자수효의왕후(莊徽睿敬慈粹孝懿王后)이다. 
8) 1792년부터 1795년까지 흉년이 계속되어 구호 곡물 1만1천 석을 보내지만, 수송 선단 12척 중 5척이 침몰했다. 김만덕이 육지에서 쌀을 구해 500여 석을 바쳐 제주목사 이우현은 조정에 보고한다. 전 제주 현감 고한록(高漢祿)이 300석, 장교 홍삼필(洪三弼)과 유학 양성범(梁聖範)이 100석을 냈다.
9) 태조실록 10권, 태조 5년 7월 19일 甲戌 1번째 기사 / 표문과 전문 지은 권근·정탁 등을 남경으로 보내며 시말을 주달한 글. 「還。 判司譯院事李乙修爲管押使, 管送撰表箋人藝文春秋館學士權近、右承旨鄭擢、當該啓稟校正人敬興府舍人盧仁度於京師。 以漢城尹河崙爲啓稟使, 具奏于帝曰: 洪武二十九年六月十一日, 欽差尙寶司丞牛牛等官至, 準禮部咨, 欽奉聖旨節該: “前者進正旦表箋文內, 輕薄戲侮, 著將撰文者發來, 止送撰箋者至, 其撰表人鄭道傳、鄭擢 , 至今不見送到。 今再差牛牛等...」
10) 1681년 6월, 일본으로 가던 중국 상선이 태풍을 만나 전라도 임자도(荏子島)에 표착하였다. 그 배에는 명나라 말기부터 약 100여 년에 걸쳐 간행된 기흥대장경(嘉興大藏經)이 가득 실려 있었다. 표류선에 실려 있던 불화 1천여 권과 여러 물품들은 나주 관아에서 수습하여 왕실로 보냈지만, 인근 해안가에 흩어져 있던 불화 木函(나무상자)들은 근처 승려들이 수습하고 그 일부는 복각하였다. 당시 가흥대장경을 수집했던 백암성총(栢庵性聰)은 1686~1700년에 7종 154권을 복각하여 낙안 징광사(澄光寺)에 목판을 보관하였고, 성파성능(桂坡性能)은 1695년에 지리산 쌍계사에서 1종 40권을 복각하였다. 복각한 대장경은 일본으로 수출돼 〈황벽대장경〉으로 복각되기도 했다.
11) 후한(後漢) 때 축법란(竺法蘭)이 번역한《불설해팔덕경(佛說海八德經)》
12) 소식(蘇軾, 1037~1101)은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라는 말을 남겼다.
13) 태종 1년(1401) 윤삼월11∼15일 사이에 태조가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14) 《태종실록》권8. 태종 4년 9월 기미에 왕이 하륜·이거이(李居易)·성석린(成石璘)·조준(趙浚)·이무(李茂)·이서(李舒) 등과 정사를 의논하다가 금강산을 신하들에게 묻는다.
15) 정선(鄭敾, 1676~1759), 화가 정선은 1676년 한양 북악산 서남쪽 기슭에서 양반집 맏아들로 태어났다.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집이 가난해서 이웃에 살던 안동 김씨 집안의 김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연, 창립 6형제가 큰 도움을 주었다.
16) 김창흡(金昌翕, 1653 ~ 172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학자이며 시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시호는 문강(文康). 한성 출신으로 좌의정 김상헌의 증손이며 영의정 김수항의 셋째 아들이다.
17) 화가 이명기가 1789년 그린 채제공의 초상에 그의 온화한 성품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18)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에 ‘성동북저경흥로제이(京城東北抵慶興路第二)’로 명칭이 있다. 한양, 수유리, 누원점(樓院店), 축석령, 송우점, 파발막, 양문역, 김화, 금성, 창도역, 회양, 철령, 고산역, 안변, 함흥, 북청, 길주, 명천, 회령, 온성, 경원, 경흥, 서수라까지 이어지는 긴 도로이다.
19) 《永登浦區誌》,손도강(孫道康)은삼전도(三田渡)의 거상이다. 1991年 2月 20日 發行. 各廛記事, 天卷, 正丑(純祖5년(1805)) 8월 條에도 기록이 남아있다.
20) 김수증의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 할아버지는 김상헌(金尙憲)이다. 젊어서부터 산수를 좋아하여 금강산 등 여러 곳을 유람한 뒤 기행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곡운집》이 있다.
21) 조선에서 가장 번창했던 시기가 영조, 정조 때이지만, 당시의 기후와 전염병 발생은 최악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743년(영조 19년)에는 6만 명이 죽고, 1750년(영조 26년)에는 9월에만 67,890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1799년(정조 23년)에 12만 8천 명이 병으로 사망했다. 또 1699년(숙종 25)의 호구조사에서 전국인구는 577만 2천 3백 명으로 6년 전에 비해 141만 6천 2백 74명이나 줄어들었다. 이는 대부분이 심한 기근과 전염병 때문이었다.
22) 이곡(李穀, 1298~1351)은 《동유기(東遊記)》를 저술했다.
23)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은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저술했다.
24) 산스크리트 이름 Dharmodgata. 신화엄경 권45 금강산에 사는 보살이라고 한다. 법희보살, 법기보살, 보기보살, 법상보살, 법용보살, 담무갈보살이다. 「據新華嚴經卷四十五諸菩薩住處品載,此尊為住於金剛山之菩薩。又作法喜菩薩、法基菩薩、寶基菩薩、法尚菩薩、法勇菩薩。亦即舊華嚴經與道行般若經所說之曇無竭菩薩。」
25) 극락전의 순금미타회(純金彌陀會), 서방구품회(西方九品會), 지지천장지장삼보살진(持地天藏地藏三菩薩眞)·천선신부이십사중(天仙神部二十四衆)·어람보살수묵진(魚藍菩薩水墨眞) 등이 있다.
26) 오도자(686~760)는 중국 당나라 현종 때의 화가이다. 卷二 「論顧陸張吳用筆」에서 ‘國祖 吳道玄’으로 불리며 古今의 독보적 경지를 터득한 畵聖으로 불리며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았다. 北宋의 곽약허(郭若虛)도 <圖畵見聞誌> 卷一「論古今優劣」에서 “吳道子의 작품은 萬世의 법이 되었고 화성(畵聖)이라고 불린다.”고 칭송하였다.
27)《북한사찰연구》 155쪽, 사찰문화연구원 편저, 1993년 발간.
28) 마왕파순(魔王波旬)은 욕계 제6천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임금이며, 천마파순(天魔波旬)이라고도 표현하며 항상 권속과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정법을 방해하는 마왕이다.
29) 조선 후기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 《석전잡설(釋典雜說)》에는 향적반(香積飯)은 밥을 지칭하고, 향적주(香積廚)는 부엌을 이름 한다고 하였다.
30) 신라의 마지막 국왕인 제56대 경순왕 김부와 죽방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왕자이다.  마로 된 옷을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불렀다.
31)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樊巖集)》 55권에 만덕전이라는 제목으로 만덕의 행적이 기록되었다.
금강산(金剛山) 김만덕(金萬德) # 제주김만덕기념관
【문화】 궁인창의 논문모음
• 21세기의 효와 요양병원
• 만덕 할머니, 금강산에 오르다
• 국제수로기구(IHO) 디지털 해도(S-130) 전환에 따른 장보고해 명명의 필요성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로그인 후 구독 가능
구독자수 : 0
▣ 정보 :
문화 (보통)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소유
◈ 참조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 참조정보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