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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安船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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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무역선(新安貿易船)
【보고서】
(2018.07.10. 11:04) 
◈ 新安船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고려 忠肅王과 日本 僧侶 大智禪師의 만남-
목   차
[숨기기]
 

1. Ⅰ.머리말

1976년 전남 신안 증도면 방축리 앞바다에서 元代 貿易船이 發見된 지 벌써 40년이 되었다. 發掘 지역의 地名으로 新安船이라 불리는 이 배는 至治三年(1323년, 陰 6월) 中國 浙江省 寧波에서 日本 博多로 出港하여 濟州島 南端 航路로 航海하다가 暴風雨를 만나 돛이 부러지고 漂流를 한다. 慈恩島와 荏子島가 있는 海域에서 다시 突風을 만나 暗礁에 부딪쳐 沈沒한다. 신안선을 發掘한 도덕도 海域은 史蹟 274호로 指定되고, 증도 검산마을에 ‘해저유물발굴기념비’와 ‘신안해저유물 매장해역’이라는 표시가 서있다.1) 이 地域은 當時 高麗 靈光郡에 屬하고 倭寇들이 자주 出沒해 高麗 우왕 3년(1377년)부터 朝鮮 世宗 23년(1441년)까지 水軍營을 設置했다. 朝鮮王朝는 어염시수(魚鹽柴水)가 豐足하여 말목장과 王宮의 소나무 木材 生産地로 運營하였다. 慈恩島 斗峰山(363.8m)은 濟州島에서 陸地로 航海하는 사람들이 里程標로 여기는 섬으로, 日本은 1896년 水軍陣地로 이용하였다.
 
그동안 帆船 코리아나號와 요트로 新安船 沈沒 海域을 지나가면서, 新安船 船長과 船員들은 漂流시 어떻게 對處하고, 接岸할 埠頭가 없는 狀態에서 生存者들을 어떻게 上陸시겼는지 疑問을 가졌다. 또한 元나라에서 日本으로 歸國하는 留學僧들이 분명히 乘船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여 中國 西安, 杭州, 上海, 日本 長奇, 韓國 木浦, 新安 等을 訪問 조사하였다.
 
 

2. Ⅱ.신안 무역선의 성격

신안선2)은 길이 34m, 너비 6.6m, 260톤급 規模로 배의 용골과 下部 隔板 構造로 되어있다. 28톤이 넘는 800만개의 中國 銅錢, 2만점을 넘는 陶磁器類(靑磁, 白磁), 인도가 원산일 가능성3)이 높은 자단목(紫檀木)4), 인양된 청동추, 목간, 배의 제작기술, 선원들 용품 등으로 미루어볼 때 14世紀 元나라에서 만들어진 貿易船으로 推定된다. 650년 동안 깊이 20m 바다 속에 묻혀있어 保存狀態가 良好하며 右舷 쪽 길이 28.4m, 폭 11m 부분을 다시 살렸다. 左舷과 뱃머리 등 船體의 3분의2 가량은 潮流에 의해 遺失되는 바람에 선체 조각을 모두 引揚하지 못하고 선체를 4등분해 끌어올린 뱃조각은 용골 등 720편으로 再構成해 목포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展示하고 있다. 이는 大韓民國 最初의 水中發掘로, 水中考古學이 처음 誕生하기 契機가 되었다. 신안선 船體 홀수선 아래에는 暗礁에 스친 痕迹이 남아있다.
 
침몰선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강사(綱司)’라고 쓰여진 110점이 있는데 이는 배의 선장, 거상, 선단주와 선장을 겸한 인물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된 강수(綱首)이거나 사원의 승려에게 도첩을 발급하는 관청의 명칭이라 생각된다.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5)교수는 “綱司는 중국인이었을 可能性이 높다고 보았고, 강사라는 呼稱은 매우 중국적 名稱으로 ‘綱首’가 ‘綱司’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보았다. ‘동복사(東福寺)~공용(公用)’이라는 절 이름을 나타낸 목간 41점과 ‘거기궁(筥崎宮)’ ‘조적암(釣寂庵)’ 등의 목간이 출토되고 있어 욧카이치 야스히로(四日市康博)는 이 배를 ‘동복사조영료당선(東福寺造營料唐船)6)’으로 推定하였다.
 
1314년부터 1334년까지 20년 사이는 日·元貿易의 전성기로 많은 배의 往來가 있었다. 泉州에 市舶司를 두고, 寧波, 上海, 澉浦에도 設置하였다. 元代의 시박정책은 基本的으로 宋代의 制度를 踏襲한 것이지만 커다란 差異가 있었다. 新安船에 船積 금지품목인 銅錢과 銀器가 많이 적재된 것을 가지고 元의 公認된 輸出品으로서 원나라 政府의 認可를 받은 官營船이라는 主張과 日本에 금지품목인 銅錢이 大量으로 運搬된 것에 대해서는 “官營船이라는 證據가 없는 한 ‘密輸의 可能性7)’ 역시 전면 否認할 수는 없다.”라는 見解도 있다.
 
 

3. Ⅲ.沈船 新安船의 航路와 航海術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 김병근 學藝연구관은 新安船의 침몰지점의 位置, 歷史的인 항로의 루트, 선적유물 중 고려유물, 氣象여건 등을 綜合하여 ‘고려기항설8)’를 주장했다.
 
中國에서 17년 동안 체류했던 마르코폴로(1254~1324)는 『동방견문록』에서 중국 海洋商人들이 海上의 바람을 잘 이해하고 季節風을 활용해 원양 항해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고려 인종 1년(1123)에 송의 사신으로 고려에 파견된 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9)』에서 羅針盤 活用을 言及하고 있다. 中國 泉州에서 출항한 배들은 印度洋을 지나 아랍에 이르는 항해를 하였다고 記錄하였다. 當時 羅針盤은 유럽에 전해져 航海에 큰 영향 미쳤다. 宋朝의 해양선박은 밑이 뾰족한 용골선 構造가 特徵으로 바람과 파도를 이겨내는 能力이 아주 뛰어났고, 돌기식 용골이 있어 上下强度를 높여주었다. 용골은 搖動을 防止하는 설치기술로 宋元代 重量級 이상의 船舶은 大部分 多層판구조의 技術을 使用하였고 200~300名씩 태우고 고려 貿易港인 碧瀾渡를 찾아왔다. 中國 宋朝 市舶司에서는 自國 商人에게 ‘公憑10)’을 發給하고 初期부터 外國에 가는 自國 海商에게 ‘券’ 또는 ‘公憑’을 發給하였다.
 
元代에서는 船舶의 크기에 따라 大船의 경우 ‘公驗’, 小船의 경우에는 ‘公憑’을 發給하기도 하였다. 船舶들은 船名, 所有者, 運航責任者, 船員, 海商, 窓口港, 貨物, 航海를 記錄하고 提出했지만 新安船은 船舶에 관한 詳細한 資料가 아직껏 發見되지 않았다.
 
沈船에서 發掘된 船員들의 物件으로 韓·中·日 3國 出身 船員들이 함께 乘船했음을 알 수 있고, 新安船의 船員들은 地文航海, 天文航海, 羅盤航海에 能熟한 航海術11)이 뛰어나고 完全한 方位知識과 季節風, 海流 같은 海洋知識을 完備한 사람으로 選拔되었을 것으로 推測된다.
 
 

4. Ⅳ.고려 忠肅王과 日本 僧侶 大智禪師

『高麗史12)』, 『高麗史節要』에는 倭 船舶의 高麗 표류와 歸國에 관한 正確한 內容이 있다.
 
『고려사절요』 제24권/ 갑자 11년, 원 태정제(泰定帝) 원년, “왜선이 풍파에 표류하여 靈光郡에 이르렀는데, 모두 凡二百二十餘人이었다. 배를 갖추어서 돌려보냈다.”
 
忠肅王13) 10년(1323년, 6월)에는 倭寇가 群山島14)에 侵入하여 開京으로 가는 漕運船을 襲擊하여 조세미를 掠奪해가고, 楸子島에 侵入하여 老弱男女를 拉致해갔다.
 
大智禪師의 傳記인 『肥後国史料叢書』1巻에 의하면 日本 曹洞宗의 始祖 道元(1200~1253)의 六世法孫인 曹洞僧 大智15)(1290-1366)禪師는 日本 肥後國宇土郡(나가사키)에서 태어나 加鴐大乘寺에 들어가서 瑩山紹槿의 門下生이 되었고, 元에 가서 高僧을 두루 歷參했다. 돌아올 때에 배가 고려에서 難破했지만 살아서 歸國했고 晩年에 기꾸지(菊池)씨의 後援으로 肥後國의 玉名에 廣福寺를 짓고 肥後國의 高來郡 加津佐에 있는 水月庵에서 餘生을 보냈다고 한다.
 
『大智禅師偈頌』을 살펴보면 英宗16)이 불러서 本國 배에 타고가라 하셨다. 大智가 佛法에 따라 感謝의 뜻을 표했다. 닻을 올리고 半이 지났을 때 黑風을 만나 배가 흔들리고 돛이 기울어 배가 부서져서 목숨이 危殆로웠는데 高麗에 표착했다. 大智禪師는 朝鮮半島 沿岸에서 배가 難破한 뒤에 高麗 首都인 開京에 가서 忠肅王을 謁見하고 可憐하게 되었음을 아뢰는 偈頌을 올렸다. 그 때 王에게 올린 글에 “無知하게 歸家하는 길을 잘못 들어 虛無하게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라는 句節을 보면 當時 狀況이 아주 絶望的이었음을 알 수 있다. 高麗 忠肅王이 哀痛하게 여겨 배를 보내어 주어, 이에 닻을 올려 加州石川郡宮腰津17)에 다다를 수 있었으니 이것이 國朝正中元年18) (1324)년이다. 破船을 言及한 글로는 ⌜破船 때 高麗王에 올림⌟이라는 七言絶句가 있는데 후반 二句는 전술했지만 전반에 ⌜넓고 넓은 生死의 바다를 漂流하였는데, 오늘 아침 또 强風이 불어 被害를 보니⌟라는 句節이 있다. 에도시대의 ⌜日域洞上諸祖傳⌟을 除外하고는 모두가 破船을 言及하고 있다. ⌜延寶傳燈錄⌟, ⌜續扶桑禪林僧寶傳(1686年刊)⌟卷三大智傳과 亨保十二年刊인 ⌜日本洞上聯燈錄⌟卷二大智傳에는 ⌜돌아가려고 바다에 이르렀는데 風浪이 일어나 高麗로 바람에 불려가 배가 破船되어버렸다⌟고 되어있다.
 
⌜大智禪師傳⌟에는 ⌜기히 출발하여 半쯤 갔는데 石19)尤가 불어 배가 기울고 生命이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高麗로 떠내려갔다⌟로 되어 있다. 이것은 ⌜行錄幷序⌟의 表現과 거의 비슷한바 “黑風20)”을 “石尤”로 바꾸어 놓았다.
 
大智禪師는 全南 河東의 双磎大師를 親見하고 ⌜呈雙渓大師, 咫尺却成千里隔, 再來相見恐無期, 可憐一隻籠中鶴, 不放天涯自在飛」, 千里 멀리 해어져야 하니 또 다시 만나러 올 期約이 없구려! 라는 惜別의 詩를 남겼다. 康津 萬德山 白蓮社에서는 ⌜遊天冠山華嚴境」을 남기고, 慶尙道 尙州 四佛山21) 大乘寺를 방문하여 人跡과 멀리 떨어져 修行에 熱中하는 僧侶들의 모습을 詩로 읊었다. 佛日普照國師 知訥(1158~1210)이 創建한 麗水 興國寺 뒷산인 靈鷲山에 올라 진달래꽃을 보며 ⌜鷲尾看花」를 남겼다.
 
 

5. Ⅴ.맺음말

元나라 寧波 天童禪寺22)에서 10餘年 머물다 日本으로 歸國하던 留學僧 大智禪師는 乘船한 배가 航海 중에 黑風을 만나 高麗 沿岸으로 漂流한다. 大智禪師는 高麗의 淳昌 松吟菴, 長興 天冠寺, 河東 쌍계사, 麗水 靈鷲山 興國寺, 尙州 四佛山 大乘寺 等 寺刹을 巡訪한다. 이후 高麗 忠肅王을 禮訪하고 ⌜同破船時呈高麗王⌟이란 애절한 詩를 올린다.
 
高麗 忠肅王은 배를 갖추어서 1324년 8월 19일(陽)에 많은 漂流民들을 日本으로 歸國시킨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大智禅師偈頌』과 大智禪師의 傳記인 『肥後国史料叢書』1巻 등 여러 文獻에 詳細한 내용이 記錄되어 있다. 新安船에서 生存한 사람들의 記錄이 더 남아있을 可能性을 제시한다. 眞實된 歷史는 永遠히 남는다.
 
 

각주
 
1) 1975년 한 어부의 그물에 도자기가 걸려 올라오면서 시작된 신안 해저유물의 발굴(1976~1984)은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고, 증도라는 섬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통계 발표된 인양된 유물은 도자기 20,661점, 금속제품 729점, 석제품 43점, 동전류 28톤 18kg, 자단목 1,017개, 기타 574점과 침몰한 선체였다.
2) 신안침몰선 출수 기물 총고(叢考), 양즈수이(揚之水),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中國社會科學院 文學研究所), 『해양문화제』 제9호/2016
3) 문화재관리국, 1988, 「신안침몰선의 수종조사」 ,『신안해저유물(종합편)』 276쪽
4) 「신안선 적재 자단목의 고찰」, 김병근, 『해양문화제』 제6호/2013 37쪽
5) 村井章介「大智は新安沈船の乗客か」, 大智가 신안 침몰선에 타고 있었을까, 『日本歴史』694, 2006-03
掲載誌名 - 日本歴史 / 日本歴史学会 編, 掲載ページ 88~92
6) 「14세기 일본과 원(元)나라의 해상교역에서의 신안선(新安船)」 137쪽, The Sinan Shipwreck within the Framework of the Maritime Trade between Japan and China in the Fourteenth Century, 욧카이치 야스히로 四日市康博 ,일본 와세다대학 중앙유라시아역사문화연구소
7) 「14세기 일본과 원(元)나라의 해상교역에서의 신안선(新安船)」에 대한 토론문 186쪽
고은미 高銀美,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8) 「신안선의 항로와 침몰 원인」 425쪽, 김병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9)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송(宋), 서긍(徐兢). 고려 인종 1년(1123)에 송 휘종(宋徽宗)의 명에 따라 사신으로 파견되어 한 달 남짓 개성(開城)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내용을 편찬한 것이다.
10) 「宋代 各國 海商의 往來와 國籍 判別의 根據-특히 高麗海商의 活動과 關聯하여」, 金榮濟 (檀國大)
11) 「중국 전통선박의 항해술과 신앙」114p 林瀚·丁毓玲, 중국 복건성 천주해외교통사박물관
12) 『高麗史』,“고려시대 사료(권35>세가 권제35, 충숙왕(忠肅王) 11년(1324년 7월 29일(음) 계축(癸丑),
1324년 8월 19일(양)를 보면 “癸丑 倭舶飄風, 至靈光郡, 凡二百二十餘人, 具舟楫, 歸之.”
“계축 왜구의 선박이 풍랑으로 靈光君에 표류, 모두 220여 명이었다. 배를 마련하여 돌아가게 하였다.”
13) 忠肅王(1294년 7월 30일~1339년)은 제27대 高麗國王으로서 이름은 도(燾), 初名은 의효(宜孝)이며, 몽골식 이름은 아라트나시리[阿剌訥忒失里]이다. 충렬왕(忠烈王) 20년인 1294년에 忠宣王과 의비(懿妃)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충숙왕은 원에서 3년 머물다가 1324년 2월에 고려로 돌아왔다.
14) 『高麗史節要 卷之二十四 』忠肅王, [癸亥十年 元 至治三年]
○倭,掠會原漕船於群山島,又寇楸子等島,虜老弱男女,以去
15) 다이치(大智)禪師의 傳記, 『肥後国史料叢書』1巻
正和三年(1314), 師年二十四, 跨海入太元, 上名山, 訪明師, 遍覧日久, 經歴尤多. …寓者七年, 太元天子詔許還本國. 上偈云, 「万里北朝宣玉詔, 三山東海送歸舩, 皇恩至厚將何報, 一炷心香祝万年」歸泛渤澥, 遇悪風漂舩于高麗地. 時呈一偈云, 「曠却飄流生死海, 今朝更被業風吹, 無端失却歸家路, 空望扶桑日出時」王下諭留者三年. 呈雙渓大師, 「咫尺却成千里隔, 再來相見恐無期, 可憐一隻籠中鶴, 不放天涯自在飛」. 日本正中元年甲子(1324), 師年三十四而歸.
16) 元 英宗 碩德八剌, 1303년 2월 22일 ~ 1323년 9월 4일)은 원나라의 제5대 황제(재위: 1320년 ~ 1323년)이다. 원 영종의 묘호는 영종(英宗), 시호는 예성문효황제(睿聖文孝皇帝)이다.
17) 가나자와 시(金沢市 かなざわし)는 이시카와 현의 현청 소재지이다.
18) 歸國이 正中元年이었다는 것은 ⌜廣福寺文書⌟에 明記되어 있다.
19) 石尤飜動忽成災. 석우가 뒤집히면 문득 재난이 된다.
『元氏長慶集· 洞庭遭風詩』 江南七月間有大風, 甚於舶逴, 野人相傳孟婆發怒. 강남에서는 7월에 큰 바람이 있어서 큰 배조차 넘을 정도로 심하다. 촌사람들이 전하기를 맹노파가 화를 내는 것이라 한다.
《詞品》 설명: 손이(巽二)에서 손은 『주역(周易)』 중 팔괘 가운데 하나로 바람을 대표한다. “손은 나무가 되고 바람이 된다(巽, 爲木, 爲風).” 石尤는 『승암전집(升菴全集)』 권 57에 이르기를, “석우 바람은 거꾸로 부는 바람을 이끈다(石尤風, 打頭逆風也)”라고 했다. (문화콘텐츠닷컴,2002,한국콘텐츠진흥원)
20) 『해동역사』 제40권, 교빙지(交聘志)8, 해도(海道). 흑풍(黑風)을 만나면 천지가 깜깜해지고 파도가 하늘로 솟구치며 晝夜의 구분이 없다. 뱃사람들은 꼬불꼬불 돌아서 피해 간다. 『문헌통고(文獻通考)』
21) 『삼국유사』 권3 『사불산조』에 신라 진평왕 9년(587년) 커다란 비단 보자기에 싸인 사면석불이 功德峰(913m)중턱에 떨어졌는데, 四面에 佛像이 새겨진 四佛巖이었다.
22) 中國 영파시 동쪽 30km 지점의 太白山기슭에 있는 절이다. 西晋의 永康 원년(300년)에 僧 義興이 초당을 지은 것을 始初로 宋代에는 禪의 고승으로 알려진 雄智全覺, 長翁如淨, 密雲圓悟 등이 모여 參禪의 道場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曹洞宗 本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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