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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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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문화재·역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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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1. 19:07) 
◈ 임금의 밥상
임금의 밥상을 수라상 [水刺床]이라 합니다. 수라상(水刺床)은 고려 말과 조선시대의 궁중 음식에서 왕에게 올리던 밥상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수라'라는 말은 고려 원종때 전해진 몽골어로, 음식을 뜻하는 '슐라'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차례에 걸쳐서 받았으며, 아침 수라는 오전 10시경, 저녁 수라는 오후 5시경에 들었습니다.
임금의 밥상을 수라상 [水刺床]이라 합니다. 수라상(水刺床)은 고려 말과 조선시대의 궁중 음식에서 왕에게 올리던 밥상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수라'라는 말은 고려 원종때 전해진 몽골어로, 음식을 뜻하는 '슐라'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차례에 걸쳐서 받았으며, 아침 수라는 오전 10시경, 저녁 수라는 오후 5시경에 들었습니다.
 
수라상
[水刺床]
 
 
 
▶ 수라상의 반찬은 12가지로 정해져 있고, 내용은 계절에 따라 바뀐다. 수라상은 왕과 왕비가 같은 온돌방에서 각각 받는데, 동편에 왕, 서편에 왕비가 앉는다. 겸상은 없고 시중드는 수라상궁도 각각 3명씩 대령하며, 원반(元盤:수라상)과 곁반·책상반 등 3개의 상이 들어온다
 
▶ 수라상은 12첩 반상차림으로 원반과 곁반, 책상반의 3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반에는 흰수라, 곽탕 (미역국), 조치 (찌개), 찜 (선), 전골, 김치, 장과 함께 12가지 반찬을 놓았으며, 곁반에는 팥수라, 곰탕, 별식 육회, 별식 수란, 찻주발, 차관, 은공기 3개, 은접시 3개, 책상반에는 전골, 장국, 고기, 참기름, 계란, 각색채소 등을 놓았다. 12첩은 더운구이 (육류, 어류)와 찬구이 (김, 더덕, 채소), 전유어, 편육, 숙채, 생채, 조리개 (조림), 젓갈, 장과 (장아찌), 마른찬 (자반, 튀각), 별찬, 생회 또는 숙회로 구성되었다.
 
▶ 흰수라와 곽탕, 팥수라와 곰탕을 각각 원반과 곁반에 따로 올려서 먹고 싶은 수라와 탕을 고를 수 있게 하였다. 조치는 젓국 조치와 토장 조치 2가지를 준비하였으며, 육류는 찜, 채소류는 선으로 올리고, 전골의 경우는 화로와 전골틀을 함께 두어 책상반에 준비해둔 고기와 채소, 양념을 즉석에서 조리하여 지찬하였다. 김치류는 송송이와 젓국지, 동치미를 놓았으며, 장에는 청장과 초장, 초고추장을 올렸다.
 
\na-;▼ 국가가 어려울 때 減膳(감선;음식 가짓수를 줄임)을 몸소 실천한 영조와 정조의 밥상
 
 
 
왕은 일상의 식사에 대한 예법이 존재하였음에도 자신의 인생관, 시대적 상황, 기호성 등에 따라서 사치스럽게 산해진미(山海珍味)를 즐기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특별한 경우 검소하고 소박함을 몸소 시범하는 현명한 사례도 있었다.
 
왕들의 일상식에서 나타나는 표현을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보통의 식사를 상선(常膳), 법선(法膳)), 식사시간에 따른 조수라(朝水刺), 주수라, 석수라, 어반(御飯), 어선(御膳), 주선(廚膳)등으로 다양하게 했다.
 
또 음식을 올리고 내리고 살피는 행위를 식선(食膳), 음선(飮膳), 진선(進膳: 왕에게 수라상을 바치고 왕이 어선을 드시는 일), 감선(監膳: 수라상의 음식과 식기구들을 미리 검사하는 일),시선(視膳: 왕이 대비의 수라상을, 왕비나 왕세자가 임금의 수라상을 손수 보살피고 수발드는 일) 로 나타난다.
 
실제로 실록에 왕의 식사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말은 감선(減膳)으로, 왕들은 백성들의 살림살이, 천재지변 등이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면 자신의 부덕함을 탓하며 백성의 어려움을 위로하는 수단으로 음식 가짓수를 줄이는 것으로 모범을 보여주었다. 육선(肉饍)을 금하고 소선(素膳)을 통해 절제와 검소를 몸소 실천하는데, 보통은 3일에서 5일 정도를 감선하는 기간으로 정했다. 감선(減膳)의 이유로는 검박(검소하고 소박함) 실천 외에도 한재, 수재, 천둥, 난리, 상중이나 제사에도 음식이나 식사의 수를 줄였다.
 
그렇지만 감선의 기간이 길어지면 신하들은 왕의 건강을 염려하여 감선했던 수라상에서 고기를 포함한 음식수를 평소대로 돌리는 즉 복선(復膳)하기를 간절히 원하기도 했다. 근신하다가 다시 육선을 하는 일을 개소(開素)한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왕들의 감선들을 모아 보면, “가뭄이 매우 심한 때 각전의 낮수라에는 어육을 없애고 단지 수반(水飯,물말이 밥)또는 수요반(水澆飯 물에 삶은 밥)만 올리게 하라”며 승정원에서 전교하는 예가 태종·세종·성종·순조대에 보인다.
 
▶감선을 몸소 실천한 영조와 정조
유난히 고기음식을 싫어해 감선 시에 고기음식을 엄격히 금했던 왕은 영조로, “오늘은 선의왕후 제삿날인데 아침 어선에 육찬이 올려져 눈이 침침하여 분별 못하고 먹다가 알아차리고 토했다”는 기록이 있다. 감선을 가장 많이 행한 왕도 영조인데 재위 기간이 가장 길기도 했지만, 89차례나 시행한 감선의 다른 의미에는 권력의 사이에서 신하들을 경고하려는 의도가 있었고, 정치적으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감선을 넘어 아예 굶는 행위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자신의 몸을 잘 섭생하며 오래 살 수 있게 관리한 왕도 영조인데, 식사시간도 정확히 지키고 소식을 했다고 한다. 식성도 까다로워 나이가 들수록 미각이 떨어져 간간한 굴비와 톡 쏘는 갓김치, 매콤한 고추장이 입맛을 당긴다며 쌀밥보다는 보리밥을 즐기면서 비린내가 나는 회와 생선은 꺼렸다.
 
한편 『한중록』에 의하면 정조는 “아침, 저녁 수라 두 끼만 식사하고, 물고기는 매우 싫어했으며 찬품 서너 그릇에 더하지 아니하시고 작은 접시에 많이 담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다. 정조가 신도시 화성 건설을 펼친 내용이 수록된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덕을 보여주는 왕으로 음식 사치를 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회갑잔치와 군대를 위문하는 데는 소를 잡지만 10마리 이내로 하며, 궁중잔치에선 쇠고기를 쓰지 말 것, 군인들의 식사에서도 쇠고기 산적은 하지 말 것, 행차가 쉬는 곳에서 찬품을 높게 차리지 말 것, 그리고 자신이 직접 수라간에 들어가 조사를 하겠으며 지나치면 벌 하겠다고 했다.
 
본인의 수라상에서도 실제 검약이 나타나는데,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수라상에는 15그릇이 올랐지만 정조 본인의 수라상에는 7그릇을 넘지 않도록 명했다. 홍반·냉이탕·저포초 등이 수라에 올랐고, 구이로는 금린어·은어·세갈비구이, 자반으로는 담염민어·반건대구·육장·황육다식·생치편포, 그리고 붕어찜·교침채·장 등이 올랐다.
 
사람의 식성은 자기 체질에 따라 다르고, 생활환경에 따라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왕들은 백성의 어려운 생활을 음식상에서도 알아차려 주어야 하고, 반듯한 왕으로 보여야하는 엄정한 법도 안에서 생활했음을 상기해 본다면, 과연 왕의 밥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최고의 맛 궁중음식이었을까 하는 또 다른 생각이 든다.
 
글 한복려(중요무형문화재 조선왕조궁중음식 기능 보유자) 사진 궁중음식연구원
 

 
※ 원문보기
【연결】임금의 밥상
문화재·역사·전
• 안동 하회탈, 한국 문화재의 상징
• 임금의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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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