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고재완의 지식창고 문화재·역사·전
문화재·역사·전
2014년
  2014년 9월
2014년 9월 29일
근대사의 전쟁 유품
2014년 9월 28일
2014년 9월 26일
2014년 9월 25일
2014년 9월 14일
2014년 9월 9일
2014년 9월 6일
about 문화재·역사·전
내서재
추천 : 0
(2019.11.21. 19:07) 
◈ 근대사의 전쟁 유품
국군의 날을 맞이하여 근대사의 전쟁 유품을 알아봅니다.
10월1일
국군의 날을 맞이하여 근대사의 전쟁 유품을 알아봅니다.
 
 
 
● 전쟁의 상처 문화재로 기억되다
 
▶근대는‘문명’과‘야만’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인들은 한국 근대사를‘문명의 시대로 기억하기 보다는 제국주의 침략을 받고 지배당한‘야만의 시대'로 기억한다. 한국근대는 제국주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싸운 민족운동의 시기 즉 독립전쟁의 시기이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한국인들은 이제 야만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얽혀 분단시대가 시작되었다. 근대가 끝이 나고 현대사로 전환하는 시기에 한국인들은 한국전쟁이라는'야만'을 다시 경험하게 된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한국근대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노일전쟁, 1895년 시작되어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진 의병전쟁, 일제 강점기의 독립전쟁, 그리고 한국전쟁 까지 모두 7번의 전쟁이 한반도에서 펼쳐졌다.
 
▶문화재청은 한국 근대 군사문화재 7점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①한국전쟁 개전 초 대한해협 전투에서 북한 수송선을 격침시킨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PC-701)의 마스트,
②최초의 공군기인 ‘L-4 연락기
③창군 초기 육군을 상징하는 ‘대한민국 육군기
④광복군 군복’
⑤근대사가 시작되는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조선 군인들이 방탄복으로 착용한 면갑'綿甲’
⑥일본 식민지 지배에 맞서 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 휘하의‘김도현이 사용하던 창의검倡義劍
⑦"휴전협정 조인 시 사용된 책상이다.
 
 
 
 
● 등록 군사 문화재에 대하여
 
▶진해에 있는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하면 오른편으로 해사 반도海士 半島가 보인다. 해사 반도에는 1949년 10월 17일 해군 장병의 헌금으로 미국에서 구입한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마스트가 있다. 함포를 갖춘 600톤급 전투함인 백두산 함은 한국전쟁 개전 초 대한해협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많은 작전에 참여하였다. 1959년 퇴역하였으나, 해군의 상징적인 전투함이기에 마스트가 해사 반도에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개전 3일 만에 서울이 인민군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등 전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자, 공군은 연락기인 ‘L-4 연락기’도 출격시켰다. 그런데 ‘L-4 연락기’는 폭격장치가 없어 조종사 뒷좌석에 앉은 관측사가 폭탄을 가슴에 안고 출격하여 폭탄을 투하하였다. ‘L-4 연락기’는 1948년 공군의 전신인 육군항공대가 최초로 도입한 항공기이다. 당시 미군으로부터 10대를 도입하였으나 현재 공군사관학교에 유일하게 1대가 남아 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무장병력에 의한 투쟁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 펼쳐졌다. 그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 휘하에 있던 광복군 군복이 1972년 서울시청 내 금고에 서 발견되어 육군사관학교에 기증되었다. 지금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광복군 군복이다.
 
▶1866년 문호개방을 요구하며 조선에 나타난 프랑스 함대는 강화도를 침략하였으나,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군대에 패하고 철수하였다. 병인양요를 겪은 대원군이 면포가 총알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면으로 된 방탄복인 ‘면갑’을 개발하였다. 대포군에게 ‘면갑’을 입히고 한 여름에 훈련을 시켰는데 군인은 훈련 중 코피를 쏟았다고 한다. ‘면갑’이 너무 무겁고 더웠기 때문이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은 ‘면갑’을 착용하고 전투에 임했으나 미군에 크게 패하였다. 조선군이 전통적인 무기를 사용한데 반해 미군은 근대과학무기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면갑’도 미군의 칼로부터 조선군인을 지켜 주었으나, 총탄은 관통하여 실전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을 노골적으로 침략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전쟁이 전개되었다. 안동지역 의병장 김도현은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1907년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수감되었고, 풀려난 후 교육 사업에 힘쓰다가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고향에 은거하였다.
 
그리고 1914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자살한다. 아마도 김도현은 국권상실이라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나 부친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도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친을 모시다가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로서는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자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도현은 사회 지도자로서 충과 효라는 당시대 사회 윤리를 몸으로 실천한 인물이었다. 의병장 김도현은 의병 전쟁 시 사용하였던 ‘창의검倡義劍을 유품으로 남겼다. 창의검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그러면서도 단아하고 날카로워 김도현 의병장의 성품을 나타내 주는 듯하다
 
▶한국 근대사 시기에 일어난 전쟁 중 가장 야만적인 전쟁은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고, 민간인 200여만 명을 포함하여 450여만 명의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이다. 이 참혹한 전쟁을 끝내기 위한 회담은 1951년 7월 개성에서 시작되었으나 협상은 2년간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이날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쌍방 회담 수석대표인 유엔군의 해리슨제독과 조선인민군의 남일 중장이 협정문에 서명하고, 남일은 평양에 가서 김일성과 펑더화이彭德懷의 서명을 받았다. 해리슨 제독은 문산 극장에 대기 중인 클라크 대장에게 가서 서명을 받았다. 클라크 대장은 유엔군 참전국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이로써 휴전협정은 발효되어 이날 22시를 기하여 쌍방 간의 전투는 ‘중단’되었다. 당시 클라크 대장이 서명할 때 사용한 책상이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글·강진갑 역사문화콘텐츠연구소장,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사진제공·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 원문보기
문화재·역사·전
• 커피의 추억, 덕수궁 정관헌
• 근대사의 전쟁 유품
• 2014 사직대제, 중요무형문화재 제111호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로그인 후 구독 가능
구독자수 : 0
▣ 정보 :
미정의 (보통)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 참조정보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