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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글 사용은?
2014년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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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1. 19:07) 
◈ 조선시대 한글 사용은?
●과거 시험 과목이었던 『훈민정음』
 
 
●과거 시험 과목이었던 『훈민정음』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들고 나서 새 문자가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사대부를 비롯한 지배 계층에서도 통용되기를 바랐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취재取才 때는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험해 뽑게 하되, 비록 의리義理는 통하지 못하더라도 능히 합자合字하는 사람을 뽑게 하라. -조선왕조실록 세종 28년(1446년) 12월 26일-
 
세종은 『훈민정음』을 간행하고 난 뒤 일련의 정책을 펼쳐 새 문자 보급에 박차를 가한다. 위의 실록 기록은 하급 관리인 서리를 선발하는 시험에서 『훈민정음』을 익힌 사람을 뽑으라는 세종의 명을 싣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세조 때에는 문과의 초장 시험에 『훈민정음』이 반영되고, 세조 10년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과정에 『훈민정음』을 과목으로 포함하자는 건의가 나온다. 세종과 세조 시대에 과거 시험과목으로 채택될 만큼 위상이 높았던 언문 1)은 그 후 유생들과 관리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 나간다.
 
이렇듯 언문이 성행하자 숙종대에 이르러 남구만 같은 학자가 언문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그의 상소에 따르면 문과에 응시하는 유생들 중에 어려서부터 언문으로 글을 익혀 읽기 위주의 공부만 하다가 정작 과거에 오르면 한문 편지 한 장을 쓰지 못하는 유생들이 많다고 비판하고 있다. 언문 때문에 한문 실력이 낮아졌다고 상소할 만큼 언문이 유생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언문으로 교서를 내린 왕, 선조
그러나 조선에서 대부분의 공식 문자 생활은 한문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중에 선조는 왕으로서 공식 문서인 교서에 언문을 사용한 왕으로 주목을 끈다. 교서敎書는 국왕의 명령을 담은 문서로서 보통 신하가 글을 지어 올리면 왕이 검토하여 완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물론 한문으로 작성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데 선조는 왜 언문으로 교서를 지어 반포했을까?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왜군이 7백 여 척의 배를 앞세워 부산포로 쳐들어온다. 미처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던 조선은 왜군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파죽지세로 몰려드는 왜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속속들이 관군이 무너졌다는 패보가 전해오는 중에 한 가닥 희망은 백성과 천민들이 뭉친 의병의 활약이었다.
 
그런 환란 중에 선조는 전국에 교서를 붙이게 한다. “언서諺書로 방문을 많이 써서 송언신에게 보내어 민간을 효유하게 하라. 듣건대 유성룡이 어떤 중과 함께 북도北道에 가서 정탐한다 하니, 또한 언서를 보내어 효유하게 하라. -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8월 19일-
 
선조가 언서로 방을 써서 민간에 유포하도록 한 것은 백성들을 달래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전쟁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유쾌한 용도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언문이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의 상당수가 언문을 알고 있었다는 점 또한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발발했으니 훈민정음 창제 후 150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 사이에 언문은 일반 백성에게 중요한 소통의 도구로 자리잡고 있었다.
 
●철저한 언문 사용자, 왕실여성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부터 조선의 왕들은 언문을 일상에서 쓰고 읽을 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처럼 언문을 공식 문서에 사용한 경우는 드물지만 비공식적인 언어생활에서 언문은 왕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문자였다.
 
무엇보다도 왕실여성들과 소통을 하기 위한 필요때문이었다. 왕실여성이라 함은 위로는 대왕대비, 왕대비, 아래로는 중전을 비롯하여 여러 비들과 자녀들을 아우른다. 왕실여성들은 대부분의 문자생활에서 철저하게 언문을 사용하였다.
 
왕실여성들은 사적인 일에는 물론이고 수렴첨정과 같은 공적인 일을 하는 경우에도 철저하게 언문을 사용하였다. 대왕대비가 수렴첨정을 하는 경우, 발 안에서 언문 교서를 내리면 여러 신하들이 이를 받들어보고, 그것을 다시 한문으로 번역한 뒤 공식 문서로 반포하였다. 한자가 공식문자이던 당시 상황에서 언문 교서를 다시 한자로 번역해야 하는 일은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 짐작되는 것은 왕이나 사대부 신하들이 왕대비와 소통을 할 수 있을 만큼 언문으로 쓰인 글을 모두 이해하고 쓸 줄 알았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들은 공식 문자생활에서 여전히 한문을 선택하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중 문자생활을 한 사대부 사대부 남자들이 공식적인 문자 생활에서 한문을 쓰고 비공식적인 문자생활로는 언문을 사용하는 이중 문자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들은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한자와 언문을 선택적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내용 중에는 사대부들의 언문 생활을 짐작하게 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첩의 죄과를 덮어주기 위하여 언문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건을 조작하려고 하다가 들통이 난 유인홍 사건<조선왕조실록 연산 2년(1496년) 윤 3월 14일>, 연산군의 기녀 모집에 선발되지 않도록 자신의 첩에게 꾸미지 말라는 당부의 언문 편지를 썼다가 발각이 되어 참형을 당한 한곤이라는 선비 사건<조선왕조실록 연산 11년(1505년) 5월 24일>이 있다. 그 외에도 사대부들이 관계된 사건의 중심부에는 남녀 사이에 오간 언문 편지가 단서가 된 경우들이 많다. 우리는 그 사건들에서 언문이 사대부의 삶에 얼마나 보편적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언문으로 상소를 올리게 된 백성들
조선시대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일차적으로 각 고을의 관찰사에게 고하고 거기서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사헌부에 고하고 그러고도 원통함이 남으면 신문고를 올려 왕에게 직접 고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문서로 작성할 능력이 없으므로, 억울함을 전달하는 방법은 여전히 막막하였다. 언문이 보급되자 문자 생활이 가능하게 된 백성들 중에는 직접 서장을 작성하여 상언하는 백성들이 생기게 되었다.
 
어느 가난한 참판의 아내가 가난에 못 이겨 언문으로 상언을 하여 그 처지를 구제받은 이야기가 있고<조선왕조실록 숙종 25년 (1699년) 4월 3일>, 직계 자손이 끊겨 제사를 지내기 어렵게 된 늙은 부인이 제사를 다른 자손에게 옮겨주도록 상언하는 이야기<조선왕조실록 영조 19년(1743년) 2월 5일>, 소박을 맞고 쫓겨 난 여인이 시아버지의 상례에 참여했다가 집안 남자들로부터 크게 모욕을 당하여 목숨을 끊으면서 남긴 억울함을 호소한 이야기<조선왕조실록, 숙종27년(1701년) 4월 25일> 등. 언문이 백성들의 소통 수단으로 삶의 곳곳에서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한글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훈민정음, 언문, 한글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지만, 우리 문자로서 그 가치를 확인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문자는 사람들의 삶에서 돌고 돌아야 살아남는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선조들의 삶에는 계층을 망라하고 한글이 그 애환을 같이 하고 있다. 선조들의 애환을 담아내던 한글이 오늘은 우리의 삶을 싣고 있는 것이다.
 
글 · 정주리 동서울대학교 교양과 교수,『조선언문실록』공동저자
사진 ·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오죽헌 시립박물관
 

 
※ 원문보기
문화재·역사·전
• 잡상(雜像), 그리고 궁궐
• 조선시대 한글 사용은?
• 언로 言路, 군주와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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