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덕(호: 화담)과 황진이의 특이한 만남
황진이는 놀이에만 빠졌던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경서를 배우기도 했다.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바로 인간 평등을 외친 사상가였으니 이를 배웠을 것 아닌가?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은 또 『송도인물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죽거든 비단이나 관을 쓰지 말고 옛 동문 밖 물가 모래밭에 시체를 내버려서 개미와 땅강아지, 여우와 살쾡이가 내 살을 뜯어 먹어 세상 여자들로 하여금 나를 거울삼도록 해주시오.’ 그녀는 스승 서경덕이 죽은 뒤, 거지 차림을 하고 스승이 찾아다녔던 금강산 태백산 지리산을 돌아보면서 스승의 체취를 맡았다. 이처럼 애절하고 두터운 스승과 제자 관계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달과 허균의 두터운 이해
●평생 뜻을 같이한 박지원과 그 제자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많은 제자를 둔 것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그는 고향 광주를 떠나 운종가 탑골 언저리에서 살았다. 그는 술을 좋아해서 종로의 상인들과 어울려 피막골의 주점에서 술잔을 스스럼 없이 기울였다. 이런 자리에 탑골 뒤편에 사는 이덕무를 비롯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이서구 등 제자들이 어울렸다.
이들은 청년 문사로 거의 서자들이었는데 정조의 배려로 창덕궁에 있는 규장각의 검서로 발탁되어 근무하다가 틈만 나면 박지원을 찾아와서 고담준론을 벌였던 것이다. 특히 서자로 청년문사인 박제가가 자주 찾아 문장을 논하고 이용후생의 학문을 물었다. 곧 청나라의 실질 있는 문물을 재워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이론이다. 박지원이 청의 수도 북경에 다녀와서 명저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저술했을 때 이들 제자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는 비판의 말도 서슴없이 나왔다. 박지원은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박지원은 가난해서 제자들을 도울 재물이 없었고 되레 술을 얻어 마셨다.
이들 제자들은 당시에도 주옥같은 많은 시문을 남겼고 훗날에는 박제가의 『북학의』와 같은 이용후생의 학문을 담은 책도 저술했다. 특히 박지원은 여느 경우와는 달리 당파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뜻을 같이한 것만으로도 제자를 삼았다.
●외로운 처지의 정약용과 황상
글·사진. 이이화 (역사학자) 사진.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연합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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