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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1. 19:07) 
◈ 근대광고 120년, 근대문화 흔적
●고백告白으로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광고
 
 
●고백告白으로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광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은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된 《한성순보》이다. 개화파 인사들의 주도로 정부기관인 박문국에서 발간한 이 신문에는 광고가 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신문 기사에 ‘광고’라는 낱말이 처음 등장했다. 즉, 1883년 11월 20일자 제3호에 회사설會社說이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 기사에서 회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회사를 설립하고자 하는 자는 세상 사람들에게 광고하여 동지同志를 얻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이 광고를 하여 소비자들에게 제품을 파는 것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회사를 설립할 때 자본을 투자할 동지를 얻는 데 광고를 이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한성순보》는 일 년 남짓 발간되다가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습격을 받으면서 폐간되었다. 이 후 박문국에서는 1886년 1월 25일자로 순보대신 주간으로 《한성주보》를 창간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근대광고는 바로 이 《한성주보》 1886년 2월 22일자 제4호에 실린 ‘세창양행’ 광고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목과 내용이 모두 한문으로 된 이 광고는 당시 개항기 조선의 대외 교역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창양행’은 우리나라의 기업이 아닌 독일계 무역상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광고는 독일 무역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세창양행 광고의 제목과 내용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특히 오늘날 광고의 헤드라인과 같은 제목은 ‘덕상세창양행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덕상德商’은 독일의 상사라는 뜻이고, ‘고백告白’은 광고라는 뜻이다. 당시만 해도 상업을 천시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되어 ‘광고’라 하지 않고 ‘고백’ 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광고의 내용은 세창양행이 우리나라에서 사려는 물품(동물가죽, 담배 등)과 팔려는 물품(서양직물, 시계 등)을 나열하고 모든 귀한 손님들과 선비나 상인에게 염가로 팔겠으며, 어린이나 노인이 온다고 해도 속이지 않겠다는 것들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히 대할 것이고, 정직한 상거래를 할 것이며 세창양행의 상표를 확인하고 물건을 산다면 잘못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세창양행의 신용과 상표를 소비자들에게 널리 알리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면교환체제米綿交換體制’로 대변되는 당시의 무역이 그러했듯이 세창양행은 광고를 통해 농업생산물을 싼 값으로 사가는 대신에 각종 공산품들을 수입하여 비싼 값으로 팔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광고는 이러한 교역을 확대하려는 독일계 무역회사의 영업광고였던 것이다.
 
 
 
 
●독립신문부터 광고가 정기적으로 실려
우리나라에서 광고가 정기적으로 게재되고 또 신문이 실제로 광고를 이해하고 많이 이용하게 된 것은 《독립신문》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다음 해인 건양원년建陽元年 즉, 1896년 4월 7일 당시 34세의 의사출신인 서재필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와 창간했다. 오늘날 신문의 날이 4월 7일인 것은 《독립신문》 창간 날짜에 맞춘 것이다.
 
《한성주보》에 광고를 실었던 독일 무역상 세창양행은 《독립신문》에도 지속적으로 광고를 실었다. 세창양행은 1897년 2월 18일자에 스마트라산 석유광고를 실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광고에 그림을 사용했다. 제중원도 일러스트레이션을 활용한 광고를 실었는데 미국에서 수입한 학질약 금계랍(키니네)과 회충산에 태극기를 그려 넣었다. 세창양행은 태극기 도안을 사용했다. 세창양행의 금계랍 광고에는 장수의 상징인 학과 거북의 도안을 사용했다.
 
《독립신문》 광고 가운데 가장 큰 대형 광고는 1899년 7월 12일자 한 페이지 광고면의 3분의 2를 차지한 양담배 히어로(Hero)광고였다. 오늘에도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외제 담배가 100여 년 전부터 신문에 대형광고를 시작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날 자 광고에는 개리양행의 자전거 광고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수입한 자전거와 축음기(유성기) 등을 판매한다는 광고가 실렸는데 당시 자전거와 축음기는 오늘날의 자가용보다도 더 희귀한 신분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독립신문》은 상업광고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높이는데 기여했지만, 그에 따른 비판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일반적인 광고반대론은 접어두더라도 ‘정치적 독립을 추구한다’며 간행된 《독립신문》의 광고주가 대부분 외국계 상인과 회사였기 때문이다. 《독립신문》에 실린 외국계 광고들이 결과적으로 대외경제 종속을 가속화시킨다는 점이 비판의 요지였다.
 
광무 2년 즉, 1898년에 들어서면서부터 민간신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협성회회보》, 《매일신문》, 《경성신문》, 《일일신문》, 《뎨국신문》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구한말 최대의 광고 품목은 의약품이었다. 의약품 광고는 일제시대를 거쳐 전파광고가 발달한 1970년대까지 가장 광고를 많이 한 품목이었다. 국내 최초의 일간지였던 《매일신문》에는 광고가 많이 실리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제약광고가 있었다.
 
“이틀거리 학질에 유명이 신효한 보화단이라 하는 약을 철물교 아래 남편 첫 골목 들어서서 위생관이라고 괘패한 집에서 발매하고 다른 병에 쓰는 약도 만이 있사오니 사방에 병 있는 이들은 찾아오시오.”
당시의 신문 문장들이 길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광고 카피도 역시 긴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또한 1899년도 《뎨국신문》에도 다음과 같은 의약품 광고가 있었다.
 
“인천항 룡골 개풍국에 신효한 안약이 있는데 노인이라도 항상 시험한 즉 어둡던 눈도 다시 밝고, 소년이 항상 시험한 즉 눈이 늙지 않고, 또 예맥도 벗어지고 안채가 나고 눈물도 흐르지 아니 하오니 사방 첨군자(여러 점잖은 사람)는 사다가 시험하오.”
 
광고에는 과장이 있는 법이지만 이 의약광고도 노인의 어둡던 눈이 다시 밝아진다는 부분은 과장된 것으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1899년 황성신문이 창간되면서 광고 카피에도 한자가 많이 사용되었고, 새로운 기법의 광고도 등장했다. 1902년 8월 20일자 《뎨국신문》에는 양잿물보다 수입 표백제가 우수하다는 내용을 소비자를 동원하여 선전하는 광고기법을 사용했으며, 1907년 6월 12일자 《만세보》에 실린 일본의 염색약 광고에는 두 부인이 ‘용표’와 ‘꽃표’의 염색약이 좋다는 뜻으로 대화하는 만화기법의 그림을 사용하기도 했다.
 
●일제시대 의약품 광고가 활개쳐
식민지 시기에도 신문광고에 가장 많이 등장한 상품은 의약품이었다. 산간벽지에까지 일본인의 약 광고 전단이 붙을 정도로 약품광고가 성한 가운데, 신문광고 역시 전체의 8할이 매약賣藥광고라고 할 정도였다. 약품 가운데서도 특히 ‘화류병약’ 즉 성병약의 광고가 너무 많아, 일각에서는 ‘외국 사람이 보면 조선인은 모두 화류병자라고 할 일, 광고료도 귀하지만 민족의 체면은 더 귀하다’며 신문사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밖에 근대적,도회적 소비생활을 대표하는 물건들, 즉 화장품, 비누, 서적, 담배, 치약, 맥주, 구두, 양복 등의 광고가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소비사회의 꽃이라는 ‘광고’의 본성에 적합한 상품이었으며, 물건 그 자체의 사용가치와 더불어 문화, 이미지, 욕망의 매개체라 할만 했다. 또한 당시 여성용 담배로 애용되었던 궐련초 광고에 여성을 등장시키기도 했는데, 이를 통해 여염집 아낙을 논외로 한다 해도, 이 광고가 누구를 주 대상으로 삼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보다 능동적이고 분명하게 사회적 지위상승에 대한 여성의 욕구를 이용한 광고들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가 ‘대동아 공영권 구현’을 외치며 대아시아 침략을 강화하던 1940년대로 접어들자 광고의 분위기 역시 일변했다. 부드러운 거품으로 소비적 낭만을 상징했던 맥주조차 ‘일본을 맹주로 한 아시아의 융성’이라는 전쟁의 구호로 포장되었다. 그나마도 1940년에는 한글신문들이 모두 폐간 당하면서, 식민지 체제에서 피어났던 광고라는 꽃은 일제의 총력전 체제 속으로 시들어 버리고 말았다.
 
글ㅣ사진· 김봉철 조선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사진· 나남출판〈한국광고사, 신인섭·서범석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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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