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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날을 생각하며
10월 9일 한글날을 맞이하여 세종임금의 애민 정신을 되돌아 본다.
10월 9일 한글날을 맞이하여 세종임금의 애민 정신을 되돌아 본다.
 
 
 
서울 광화문 광장 의 세종대왕 동상
 
● 음소문자, 한글
▶현재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 문자를 두 부류로 나눈다면, 문자가 의미를 나타내는 표의문자表意文字’와 ‘문자가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문자表音文字’로 나눌 수 있다. 이중 표음문자는 문자가 나타내는 소리의 단위에 따라 음절문자音節文字와 음소문자音素文字로 구분된다.
▶표의문자로는 한자, 음절문자로는 일본 가나문자, 음소문자로는 로마자나 한글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흔히 한자와 같은 표의문자보다는 표음문자가 진화한 문자이고 사용하기도 쉽다고 한다. 근거는 단순하다. 표의문자는 문자 하나가 한 단어에 대응하기 때문에 속성상 문자의 수가 많을 수밖에 없지만, 소리 단위에 직접 대응하는 음절문자와 음소문자는 많은 수의 문자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음절의 수보다 음소의 수가 훨씬 적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로마자나 한글과 같은 음소문자는 현존하는 문자 중 가장 편리한 문자임이 분명하다.
▶한글의 우수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한글이 표음문자이자 음소문자임을 첫째로 강조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글 탄생의 배경도 그랬다. 당시의 문화 상황에서 표음문자는 절실히 필요했었고, 쉽고 편리한 문자를 고안하다보니 음소문자 한글을 만들게 된 것이다.
 
● 한글의 탄생
▶한자가 동아시아의 보편문자이던 시절, 선진 문화를 한자로 받아들이며,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은 자신들의 모어까지 한자로 표기했다. 그러나 표의문자인 한자로는 조사와 어미가 발달한 자신들의 모어를 제대로 표기할 수 없었다.
▶나라의 문화 수준이 높아질수록 새 문자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문화 수준이 높아질수록 국제적 교류도 활발해지는 법, 대국의 언어였던 중국어와 이를 표기한 한자를 제대로 익혀야만 했던 현실에서, 동아시아 왕국들은 정확한 한자음을 표기할 발음기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한글 창제 이전에 이미 여진족의 나라 금金, 몽고족의 나라 원元이 자신들의 말과 중국 한자음을 표기할 표음문자를 만든 것은 이 때문이었다. 세종은 이러한 국제적인 동향에 관심이 있었고, 숙고 끝에 조선 또한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소신을 지니게 되었다. 새로운 문자를 음소문자로 만들고, 그 음소문자를 이용해 중국 한자음 사전인 운서韻書를 번역하고, 한문으로 된 유교경전을 번역하고, 우리말 가사를 지었던 데에서, 세종의 생각과 기대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까지 보면 세종의 생각을 특별히 독창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음소문자를 만들겠다는 세종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금나라와 원나라의 왕과 그 왕의 명령으로 문자를 만든 학자들의 생각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종은 문자의 필요성을 인식한 왕이었으며, 그 자신이 뛰어난 언어학적 식견을 갖춘 창제자였다. 절대군주였기에 자신의 통치철학을 바탕으로 문자의 운용 계획을 세울 수 있었고, 뛰어난 언어학자였기에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최적의 문자를 만들 수 있었다. 유교철학을 기반으로 한 문명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세종의 생각이 한글이라는 글자 하나하나의 모양과 운용법에까지 고스란히 반영되어 세계 유일의 문자, 한글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니 한글의 특성과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한글 탄생의 역사적 배경과 언어학적 배경을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 모든 말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문자, 한글
▶세종이 음소문자를 만들되, 정밀한 음소문자를 만들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중국 한자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해서였다. 당시로서는 중국어를 정확하게 배우기 위해 그 표준발음사전인 운서韻書를 번역할 필요가 있었고, 운서를 번역하기 위해서는 한자음을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는 발음기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 전기에 중국어를 비롯한 외국어 교육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한글이 기여한 바가 컸다. 실제 한글 창제 후 중국어, 일본어, 몽고어, 만주어 등 외국어 교육서가 만들어졌고, 최세진과 같은 훌륭한 역관譯官이 나왔다. 이는 조선의 외교력이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정밀한 음소문자는 외국어 교육에만 도움이 된 것은 아니었다. 한글로 정확한 음과 훈을 기록한 한자 교육서가 출판됨으로써, 한문 교육 또한 획기적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한문 교육의 대중화와 질적 성장은 조선의 문화 역량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국제적 감각과 문화적 안목을 갖춘 세종의 문자정책이 있었기에, 15세기가 조선 문화의 황금기가 될 수 있었다.
 
● 동양철학의 정수精髓, 한글의 제자원리制字原理
▶세종이 정밀한 음소문자를 만드는 데에는 유교철학을 배경으로 한 언어관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훈민정음』(해례본)에서 밝힌 한글의 제자원리는 세종과 그를 도왔던 집현전 학사들의 철학관을 잘 보여준다. 아래의 인용문에는 한글의 제자원리가 유교철학의 우주관과 자연관에 기반했음이 잘 나타나 있다. “天地之化本一氣, 陰陽五行相始終, 物於兩間有形聲, 元本無二理數通, 正音制字尙其象, 因聲之每加劃…(천지의 탄생은 본디 하나의 기운으로부터 생겨나며, 음양과 오행이 서로서로 돌고 돌아, 만물이 둘 안에서 형체와 소리를 갖추었나니, 근원이란 본디 둘이 아니니 모두가 이 이치에 통한다, 정음의 글자 만듦도 그 꼴을 본떴는데, 소리가 거셈에 따라 그 때마다 획을 더했다.)”
 
▶우주만물은 다섯 가지 기본 원소의 운행으로 이루어진다는 오행五行의 원리를 따라 자음자를 만들고자 했기에,
‘ㄱ, ㄴ, ㅁ, ㅅ, ㅇ’ 다섯 글자를 기본 글자로 정해 ‘ㄱ→ㅋ, ㄴ→ㄷ→ㅌ→ㄹ, ㅁ→ㅂ→ㅍ, ㅅ→ㅈ→ㅊ, ㅇ→ㅎ’와 같이 가획加劃을 하는 원리를 찾을 수 있었고, 말소리의 이치를 말소리에서 찾았기에 발음기관을 형상화한 글자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우주와 인간 세계의 근원을 천지인天地人으로 보는 삼재三才의 원리를 따라 모음자를 만들고자 했기에,
‘ㆍ, ㅡ, ㅣ’ 세 글자를 기본 글자로 정할 수 있었고, 음양陰陽의 이치를 따라 ‘ㅏ, ㅓ, ㅗ, ㅜ’ 등처럼 기본 글자를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한글의 과학성과 한글의 체계성 모두 유교철학의 원리에서 비롯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문자학자 제프리 샘슨이 한글을 자질문자(feature system)라 한 것도 이러한 제자원리制字原理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ㅁ’이라는 기본 글자에서 가획(원글자에 획을 더함)한 ‘ㅂ, ㅍ’이 ‘입술소리’라는 자질을 공유하면서 소리 내는 방식이 다름을 형태로 보여주는 문자는 없었다. 세종의 탁월함은 유교철학의 원리를 문자의 창제에 적용하는 사고의 유연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 백성의 문자, 한글
▶세종은 계몽군주였다. 그는 한글을 중국 한자음을 표기할 문자로만 보지 않았다. 이상적인 유교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세종은 유교 철학에 기반하여 백성을 교화하려 했고, 교화의 수단으로 한글을 활용하였다. 한글 창제 이후 수많은 유교 경전이 한글로 번역된 것으로 한글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한글을 교화의 수단으로 생각하였으니, 새 문자는 무엇보다 배우기 쉬워야 했고 쓰기 쉬워야 했다. 배울 사람을 생각하여 글자를 고안한 결과 최초의 자질문자인 한글이 탄생하였다.
▶한글은 세종의 국제적 안목과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에 그의 천재적 상상력이 결합하여 탄생한 문자였다.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에게 문자를 내려주었다. 그런 점에서 한글 창제는 왕의 시혜였다. 이후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백성들에게 전할 바가 있거나 백성을 설득할 일이 있을 때 언문 교지를 내리곤 했다. 백성에게 알려야 할 바를 알려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백성의 문자를 활용해야 한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갑오개혁 이후 국가의 공문서는 한글을 본으로 하여 작성되었다. 정부는 ‘알려야 할 필요’를 넘어서서 ‘알려야 할 의무’를 자각했고 백성들은 ‘알 수 있게 된 데 대한 만족’을 넘어서서 ‘알아야 할 권리’를 주장하였다.
 
글·최경봉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사진·문화재청,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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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역사·전
• 근대광고 120년, 근대문화 흔적
• 한글날을 생각하며
• 신라 유물, 금관은 실제로 사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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