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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구, 조선 무과 과목으로 로열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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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1. 19:07) 
◈ 격구, 조선 무과 과목으로 로열 스포츠
●격구擊毬, 무관이 되려면 반드시 익혀야 했다
 
 
 
 
●격구擊毬, 무관이 되려면 반드시 익혀야 했다
 
조선시대에 공식적으로 무관 즉 장교가 되려면 과거시험 중 무과武科를 보는 것이 가장 빨랐다. 물론 음서蔭敍나 천거薦擧라 하여 소위 ‘줄이나 배경’을 가지고 무관에 등용되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당당히 무과시험에 합격한 무과급제자와는 격이 다른 대우를 받았다. 이는 당상관이라는 최고의 품계는 오직 과거시험이라는 정규시험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과시험의 최종시험인 전시殿試의 마지막 시험과목이 바로 격구였다. 따라서 격구를 못하면 장원급제는 고사하고 무관으로 등용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격구는 쉽게 설명하면, 말을 타고 펼치는 공놀이의 일종으로 ‘장시杖匙’라는 끝이 숟가락처럼 생긴 채로 공을 퍼 담아 골대에 집어넣는 기병용 특수 무예이자 조선시대 최고의 스포츠였다.
 
●왜? 공놀이가 최고의 무예였을까?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첫 번째로 직면한 군사적 문제가 바로 북방의 여진족과의 마찰이었다. 당시 여진족은 보병이라는 병종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오직 기동력이 우수한 기병으로 모든 부대를 구성하여 쉼 없이 조선의 국경을 침범하고 국경 근처의 백성들을 괴롭혔다.
 
따라서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조선은 기병이라는 병종을 최우선적으로 육성해야만 했다. 요즘으로 치면 사이버 테러 및 전쟁이 급부상하고 있기에 군에서도 발 빠르게 사이버 사령부를 만들고 사이버 군사를 집중 육성하는 방식이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기병의 무예 즉, 마상무예는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騎射와 창으로 공격하는 기창騎槍이었다. 그런데 전투는 한 개인이 단독으로 펼치는 것이 아니라 조를 이루고 부대가 함께 싸우는 단체전이었기에 격구는 다른 무예보다도 팀플레이 훈련에 가장 좋은 무예였다.
 
격구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었는데, 먼저 한명이 일정한 코스를 따라 다양한 자세를 취하며 말을 달리며 공을 골대에 넣는 방식이 있고, 두 번째로 팀을 나눠 공을 서로 빼앗아 가며 구문에 넣는 방식이 있었다. 바로 두 번째 방식의 경기형 격구가 전술훈련에 많은 도움을 줬었다.
 
 
 
 
●격구, 사치성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다
 
조선시대에 격구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우수한 말과 안장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지위를 뽐내기 위하여 격구에 사용하는 말에 온갖 치장이 더해지면서 격구가 과소비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격구용 안장에 온갖 귀금속을 화려하게 수놓고, 그것도 모자라 최고급 비단으로 말을 치장해서 안장 가격이 일반 서민의 집 10채 가격을 넘어갈 정도여서 사회문제로 비화되기까지 하였다.
 
이런 문제로 인하여 임금이 직접 주관하는 어전회의에서 격구가 너무 사치스러워서 문제가 되니 아예 없애버리자는 의견이 대두될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임금이었던 세종世宗은 그러한 의견에 대하여 ‘무예를 익히는 데에 격구만한 것이 없다’라고 단언하며 격구를 무과시험의 정식 종목으로 천명하기도 하였다.
 
세종이 그토록 격구에 대해서 아낌없는 관심과 지지를 보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 실제로 기병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전투마를 다루고 전술훈련에 도움을 받았던 것이 격구였다. 서로 조를 나눠 공을 서로 다투며 일어나는 수많은 상황은 전투에서도 활용할 만큼 실전적인 움직임이 많아서였다.
 
그 두 번째 이유는 세종의 정치적인 의도다. 세종 때에는 조선개국의 기틀을 확립했던 시기로 조선의 정통성을 격구를 통해서 알리고자 했던 정치적인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선대왕들이 가장 활발하게 익힌 무예가 격구였으며, 조선 개국의 가장 큰 에너지가 기병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격구를 무과시험 종목으로 편입시키고, 최종시험인 전시의 마지막 과목으로 배정한 것은 새롭게 무관이 될 무사들에게 선대왕들의 위업을 세상에 알리고 각인시킬 수 있는 최고의 종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전기 국왕의 종친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격구경기를 치르며 우애를 다지는 것을 상례로 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관람객이 열광하는 최고의 군사 스포츠
격구에는 다양한 자세가 있었다. 공을 채에 퍼 올리기 위하여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장시에 담은 후에 원심력을 이용하여 공이 채에서 떨어지지 않게 크게 채를 휘두르는 광경은 그 자체로 묘기에 가까웠다. 거기에 상대편 기병을 따돌리며 공을 떠올리는 자세가 더해지면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 경기를 능가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래서 격구시합이 펼쳐지는 공간에는 늘 수많은 사람들이 담장을 이뤄 구경을 할 정도로 조선 최고의 군사 스포츠로 각광을 받았다. 여기에 격구 경기를 하는 사람의 쇼맨쉽이 더 해지면 그 야말로 잔치판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대표적으로 태조 이성계의 격구실력은 요즘으로 치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축구 스타 박지성을 능가할 정도의 뛰어난 기마술과 격구실력을 갖췄기에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격구를 바탕으로 중앙정계에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심지어 조선의 개국을 찬양하는 노래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44장에도 태조 이성계의 놀라운 격구실력이 노래가사로 담겨 있을 정도였다.
 
●격구, 서양의 폴로보다 우수하다
우리에게 상표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폴로(Polo)’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전통 마상스포츠로 아직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실제로 영국의 경우는 프로 폴로선수가 있고,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프로팀이 만들어져 대항전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폴로는 사용하는 도구가 일종의 망치형태로 공을 때리는 것을 핵심자세로 하고 있다. 그래서 한번 공을 치고 쫓아가서 공을 또 다시 치는 방식의 경기가 진행된다.
 
반면 격구는 공을 치는 것은 물론이고, 끝이 숟가락처럼 생겨 공을 거기에 퍼 담아 이리저리 휘두르는 것이 가능하기에 폴로보다 훨씬 어렵고 화려한 기술을 담고 있다. 필자도 격구 경기를 직접하고 있지만, 단 10분만 말을 타고 격구 경기를 하면 온 신체가 녹초가 될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자세로 가득하다.
 
조선시대에 격구가 최고의 군사무예로 인정받은 결정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섬세한 기마술연마와 즐기면서 훈련할 수 있는 매력 때문이었다. 비록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화약무기가 대거 전장에 등장하면서 격구가 무과시험 과목에서 제외되기는 하였지만, 격구는 여전히 조선 기병을 대표하는 군사무예였다. 아쉽게 사라져 버려 이제는 박물관이나 문헌 속에만 존재하는 격구가 하루 빨리 복원 및 전파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스포츠로 발전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글. 최형국 (역사학 박사, 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 사진. 한국전통무예연구소, 규장각도서, 한국마사회 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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