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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北京) 유리창(琉璃廠) # 라오쯔하오
【문화】
(2024.03.26. 09:27) 
◈ 전국 100년 이상 점포 1600개..베이징 류비쥐, 5백년간 야채절임 팔아
라오쯔하오(老字号)
중국 베이징 유리창 문화거리는 민국(民國, 1912~1949년 10월) 시기에 화평문(和平門)이 세워지고, 신화가(新華街)가 건설되었다. 유리창 문화거리에서 고서적, 서화, 골동품 등 많은 점포가 다양한 물품을 보유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필자는 가게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 가이드가 질문했더니 가이드는 140개의 오래된 전통 점포(라오쯔하오, 老字号)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라오쯔하오(老字号)
 
중국 베이징 유리창 문화거리는 민국(民國, 1912~1949년 10월) 시기에 화평문(和平門)이 세워지고, 신화가(新華街)가 건설되었다. 유리창 문화거리에서 고서적, 서화, 골동품 등 많은 점포가 다양한 물품을 보유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필자는 가게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 가이드가 질문했더니 가이드는 140개의 오래된 전통 점포(라오쯔하오, 老字号)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점포에는 유명한 서예가의 글씨가 많고, 공원 벽에도 많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
 
 
▲ 중화 라오쯔하오(사진:위키백과)
 
 
라오쯔하오는 오래된 전통 점포, 전통 상표, 전통 브랜드로 국가가 100년 이상 역사가 깊은 전통 점포에게 제공한 등록상표를 말한다. 1991년에 중국 상무부가 조사한 전국의 라오쯔하오는 약 1,600개였고, 그중에 중국 전통문화와 관계가 깊은 가게 430개를 인준했다.
 
2007년 베이징시 상무국과 베이징 首都財政貿易大學이 공동으로 베이징시의 300여 개 전통 점포를 조사하고 분석하여 67개 업체를 ‘中華老字號’로 공식 인증하였다. 그중 11개 업체는 중국 유명 브랜드 인증을 하였고, 51개는 북경시 유명 브랜드로, 36종은 北京市級 무형문화재로, 22종은 국가급 무형문화재 목록에 등록했다. 그중 萬泉堂, 융안탕(永安堂, 전통 약방), 便宜坊(오리구이) 등 3개 老字號는 6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졌고, 400년 이상은 8개, 260년 이상 점포는 20개로 나타났다.
 
베이징의 전통 점포를 연구한 한강우 교수는 “중국 상무부가 인증한 老字號는 평균 140년 역사를 자랑하는데, 老字號는 민족문화 영혼의 상징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 그리고 과학적 가치와 뛰어난 시장 가치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역사적 가치는 그것이 살아있는 역사의 화석이라는 것에서 구현된다. 약 600년 된 상호는 여러 시대의 흥망성쇠를 걸쳐오면서 사회 역사 변천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 전통 반찬가게 류비쥐(六必居, 1436년)(사진;바이두백과)
 
 
베이징 사람들이 좋아하는 라오쯔하오는 레스토랑으로 유명한 도일처(都一處), 오리구이 집으로 유명한 편의방(便宜坊), 1868년 톈진에서 만두로 가게를 열어 큰 부를 쌓은 거우부리(狗不理, 구불리), 1946년 설립한 만두 가게 혼돈후(餛飩候. 侯庭杰), 1864년 문을 열어 외국 수반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방문하는 북경오리 전문점 전취덕(全聚德, ), 1913년부터 의약품을 생산한 동인당(同仁堂), 1900년부터 차를 판매한 장일원(張一元) 등이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라오쯔하오 류비쥐(六必居)를 소개한다.
 
 
▲ 류비쥐(六必居) 장아찌(사진: 바이두백과)
 
 
베이징 류비쥐(六必居, 1436년)는 500년 가까이 야채 절임을 팔아왔는데 장사 원칙을 철저히 준수하기로 유명하다. “수수는 반드시 정연해야 하고, 누룩은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하며, 음식물은 정결해야 하고, 물은 향기로워야 하고, 그릇은 좋아야 한다.”라는 원칙을 꼭 지킨다.
 
문헌에는 명나라 세종 가정(嘉靖, 1522~1566) 9년 1530년에 중국 산시성 린펀(临汾)시 서사촌(西杜村) 출신인 자오춘런(赵存仁), 자오춘이(赵存义, 조존의), 자오춘례(赵存礼, 조존례) 조씨 삼형제가 생필품을 전문으로 하는 작은 가게를 차렸다. 가게 장소도 좋고, 영업 수완이 좋아 2개의 작은 매장에서 출발해 얼마 지나지 않아 4개로 늘렸다. 대부분의 중국 가게는 가게를 열 때 일곱 가지 상품 땔나무, 쌀, 기름, 소금, 소스, 식초, 차를 모두 취급했다.
 
【출처】 俗话说:“开门七件事:柴、米、油、盐、酱、醋、茶”。
 
 
그러나 조 씨 삼 형제의 작은 가게에서는 차(茶)를 팔지 않고 여섯 가지 상품만 팔아서 가게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류비쥐라고 불렀다. 가게에서는 처음에 술을 팔았지만, 다른 지방에서 가져온 복주(伏酒), 수수나 옥수수를 찐 증류쥬(蒸酒)를 팔았다. 특히 복주(伏酒)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알코올로 식욕을 증가시키며 소화를 돕고 인체에 쉽게 흡수되며 기와 혈액을 보충하고 미용 및 노화 방지 효과가 있어 매우 잘 팔렸다.
 
 
▲ 류비쥐(六必居) 수제 장아찌공장(手工酱菜厂)(사진:바이두백과)
 
 
류비쥐는 흑채소장, 팔보채장, 팔보과장, 오이장아찌, 감채장아찌, 감채소무 장아찌, 백설탕마늘 묽은 황채소스 등 12가지 소스가 가장 유명하다. 오늘날 육필거는 천원, 계형재 세 개의 유서 깊은 브랜드와 함께 북경육필거식품유한공사 산하의 브랜드이며, 왕치화, 육필거, 백옥, 용문, 금사자, 천원장원, 계형재 7개의 유서 깊은 브랜드가 있다. 류비쥐 장아찌는 재료 선택이 정교하고 제조가 엄격하며 가공 기술이 우수하고 색이 밝고 아삭하고 향긋하며 소스가 풍부하고 짠맛과 단맛이 적당하다. 류비쥐 장아찌의 원료는 모두 고정 생산지가 있어 류비쥐 장아찌의 품질을 보장한다.
 
六必居는 1900년 8국 연합군의 북경 침공 시 순식간에 가게 건물이 불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한 점원이 오직 편액만을 떼어내 교외에 있는 臨汾會館에 정성껏 보관하였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로 명나라 때 상인 여섯 명이 돈을 투자하여 六心居라는 간판을 걸고 장사를 시작했다. 하루는 가게에 자주 오는 젊은이 옌슝(嚴嵩, 1480~1567)에게 합당한 현판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옌슝은 편액을 다 쓴 후에 육심(六心)의 뜻이 좋지 않아 한 획을 더하여 류비쥐(六必居)라고 고쳤다. 이에 상인이 옌슝에게 글자에 한 획을 더한 이유를 물었다. 옌슝은 그 이유를 설명했다. 류비쥐는 작은 술집으로 술을 가져다 팔지 말고 힘들어도 자체적으로 술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六必은 양조 기술의 요점을 말하는 것이다. 술을 만들려면 서도필제(黍稻必齊)하고 국얼필실(麯櫱必實), 담치필결(湛熾必潔), 도자필량(陶瓷必良), 화후필득(火候必得), 수천필향(水泉必香) 해야 한다. 술을 만들 때 기장과 벼는 원료는 잘 익어야 하고, 누룩은 반드시 견실하고, 제작 과정은 깨끗하게, 술병 도자기는 깨끗해야 하고, 술의 세기는 적당해야 하며, 물은 반드시 향기로워야 한다는 뜻이다.
 
옌슝은 앞으로 六必居는 “다른 사람이 만든 술을 가져다 팔지 말고, 술을 제조해야 한다.”라고 강조해서 말했다. 1972년 일본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이 중국을 방문하여 주은래 총리와 담화를 나누던 중에 류비쥐(六必居) 가게가 아직 있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 2014년에 개관한 류비쥐(六必居)박물관 (사진;바이두백과)
 
 
류비쥐(六必居)박물관은 첸먼(前門) 양곡점가 3번지 류비쥐라오(六必居老)점에 건립했다. 박물관은 2007년에 점포의 문화재를 전시 기획하려고 자료를 수집해 2014년 12월 25일에 개관했다. 박물관은 1,853㎡의 부지에 '음식의 장수(食肴之将), '원원류장(源远流长), 열반중생(涅槃重生), 시대와 함께(与时俱进)의 4대 주제(单元)와 육필거노정(六必居老井), 전승자 공작실(传承人工作室), 연구실천구역(研学实践区)의 3대 체험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 류비쥐(六必居) 장류 명절 상품(사진;바이두백과)
 
 
중국의 오래된 라오쯔하오와 고유 브랜드는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깊은 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있고, 우수한 문화, 뛰어난 기술 및 양질의 서비스를 전승하고 있다. 21세기 기업 간의 무한한 경쟁은 브랜드와 문화 경쟁 단계로 격상되었으며, 상호의 가장 지속적인 매력은 중국 상호가 내포한 문화에서 비롯된다.
 
전통문화의 정수를 계승해 내려오는 동안 유서 깊은 상호는 시대적 특성을 가진 긍정적인 문화적 요소를 흡수하여 고대와 현대, 서양과 중국의 전통문화와 현대 문화의 균형 잡힌 결합을 이해하고 융합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명나라 재상 옌슝(嚴嵩)은 젊었을 때부터 류비쥐에서 만든 장아찌로 밥을 먹어야 소화도 잘되고, 하는 일이 잘 진척되어 항상 류비쥐 가게를 찾았다. 그래서 류비쥐에서 가장 좋은 황장, 춘장과 장아찌를 구해 수십 년 동안 황제에게 진상했다. 장아찌 가게주인은 정승 옌슝에게 상호의 글씨를 항상 받고 싶었으나 감히 그러지 못했다.
 
훗날 옌슝이 비리가 심해 탄핵이 되어 조정에 불려 왔을 때, 황제는 옌슝이 쓴 상호 중 ‘心’자에 한 획을 더하여 ‘必’로 고쳐서 내려보냈다. 이는 정승 엔슝의 죄를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징계한다는 뜻을 지녔다. 옌슝은 명나라 조정에서 대권을 장악한 후 20여 년간 국정을 독단으로 운영하며, 국경 수비를 아들에게 일임하여 아들이 근무를 해이하게 하여 적의 침입을 자주 발생시켰고, 뇌물을 자주 수뢰해 심한 사회 갈등을 일으켰다.
 
이에 명나라 가정제는 크게 분노하여 옌슝의 가산 중에 황금 30만 냥, 은 200만 냥을 압수하고, 외아들 엄세번은 참형에 처했다. 옌슝은 죽음을 면했으나 아들이 죽은 후 2년 후 87세로 병사(病死)한다.
 
 
▲ 역사극 《大明王朝 1566》(사진: 바이두백과)
 
 
중국 TV 드라마나 소설에서 류비쥐(六必居)는 아주 흥미롭고 재미난 이야기로 등장한다. 드라마는 가끔 역사적인 사실과 다르게 새로운 내용이 재미있게 추가되어 새롭게 창조된다. 《大明王朝 1566》에서 류비쥐(六心居) 가게의 유래가 나오고, 옌슝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역사극은 장리(张黎) 감독이 연출하고, 진보국(陈宝国), 황지충(黄志忠), 왕칭샹(王庆祥), 니대홍(倪大红), 축희연(祝希娟), 서광명(徐光明) 등이 출연한 46부작 대작 드라마이다.
 
 
▲ 역사극 《大明王朝 1566》(사진;바이두백과)
 
 
《大明王朝 1566》 드라마의 내용은 간신배 옌슝(严嵩)이 권력을 잡아 많은 신하를 거느리며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이때 이에 맞서 청렴한 관리 해서(海瑞, 1514~1587)가 등장하여 강력한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패하고 봉건적인 황권과 정승 옌슝의 권위에 도전한다.
 
TV 드라마는 2007년 1월 8일 후난(湖南) 위성 TV에서 처음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 내용 중에는 중국 봉건 역사상 가장 독특한 황제 주후양(朱厚熜, 陈宝国)이 등장한다. 황제는 20년 이상 도교 사원에 숨어 살면서 도사처럼 도를 닦지만, 항상 명나라 전체의 정치, 재정, 군사, 민생 권력을 확고히 장악했다.
 
옌슝은 명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20년 동안 내각의 수장을 맡아 전횡을 휘둘러 명나라 역사책에는 옌슝을 간신들의 우두머리로 불렀다. 그의 정치권력은 아주 촘촘하고 권력은 조정 관리들과 야당에 기울었지만, 말년에 재산이 모두 몰수되고 아들이 목이 잘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몸을 굳게 지키며 수명을 다했다.
 
 
▲ 해서(海瑞, 1514~1587)(사진: 바이두백과)
 
 
해서(海瑞, 1514~1587)는, 수백 년 동안 민간에서 널리 칭송되어 온 관리의 전범으로, 감히 황권에 도전하고, 황제를 질책하며, 감옥과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위는 낮지만, 감히 수천 년의 봉건 제도에 도전한 인물이다.
 
1566년에 호부운남사주사(戶部雲南司主事)가 되어 명 가정제가 미신과 무속에 빠져 조정에 폐단이 많다고 상소를 올려 늙고 병든 가정제를 자극했다. 이에 황제는 해서를 즉시 처벌하려고 했으나 주위 신하들이 말렸다. “해서는 이미 아내와 자식을 이별하고, 하인들을 모두 내보내고, 홀로 직접 관을 사서 죽기만 기다리는 사람입니다.”라고 고했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해서를 죽이지 못하고 옥에 가뒀다. 가정제가 1566년 12월에 죽고 황제 융경제(隆慶帝)가 즉위하자 해서는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해서는 강직하여 사람들은 그를 해청천(海靑天), 해필가(海筆架)로 불렸다. 청백리 해서는 수로를 준설하고, 수리 공사를 건설하고, 사익을 위해 뇌물을 받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고 탐관오리를 강제로 퇴거시켰다.
 
해서가 죽은 후 난징의 백성들은 海靑天의 사망 소식을 듣고 시장을 철시했다. 해서의 관을 실은 배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흰옷에 하얀 모자를 쓴 사람들이 강가 양안에 가득했고, 울음을 터뜨리는 추모객들이 백 리를 헤맸다고 전해온다.
 
【출처】 海瑞死后,南京的百姓得知消息后因此罢市。海瑞的灵枢用船运回家乡时,穿着白衣戴着白帽的人站满了两岸,祭奠哭拜的人百里不绝。
 
 
정승 옌슝은 붓글씨 서법이 아주 뛰어나 한림원(翰林院)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옌슝의 글씨는 현재 베이징에 10개의 편액이 남아 있고, 산하이관(山海關)의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산둥 곡부(曲阜)의 성부(聖府), 항주 서호 악비묘(岳飛廟)의 만강홍(滿江紅)이 모두 그의 글씨다.
 
 
▲ 산하이관(山海關)의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사진;바이두백과)
 
 
한편 산하이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현판은 길이가 5m, 높이 1.5m로 명대(明代) 서예가 소현(萧顯, 1431~1506)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서예가도 있다. 현판은 해서(楷書)로 필력이 웅장하고 힘차며 성루(城樓) 양식과 혼연일체가 되어 고금의 대작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一’ 한자는 붓을 잡아 글씨를 쓰던 사람이 먹물을 듬뿍 묻힌 붓을 허공에 던져 한 번에 점을 찍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베이징(北京) 유리창(琉璃廠) # 라오쯔하오
【문화】 궁인창의 독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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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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