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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 ◈
◇ 제4편: 열국의 쟁웅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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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1 장 열국의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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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列國의 연대의 正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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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조선이 무너지고 신수두님 ·신한·말한·불구래 등의 참람(僭濫)한 칭호를 일컫는 자가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열국 분립의 판국을 만들었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열국사(列國史)를 말하려면 전사(前史)에서 열국의 연대를 줄여버렸으므로 이제 그 연대부터 말 해야겠다. 어찌하여 열국의 연대가 줄어졌다 하는가? 먼저 고구려 연대가 줄어진 것부터 말하리라. 고구려가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21년,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신라 문무왕(文武王)8년(기원 668년)에 망하니 나라를 누리기를 도합 705년이라고 일반 역사가들이 적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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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구려가 망할 때에, 9 백년에 마치지 못한다(不及九百 年)." 라고 한 비기(秘記)가 유행했는데, 비기가 비록 요망한 글이라 하더라도 그 시대에 그 비기가 인심 동요의 도화선이 되었으니, 이때(문무왕 8년)에 고구려의 연조가 8 백 몇십년 되었음이 명백하므로, 본기(本紀)의 705년이 의문됨이 그 하나요, 고구려 본기로 보면 광개 토왕이 시조 추모왕(鄭후王)의 13 세손밖에 안 되는데 광개토왕의 비 문에, " 17 세손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에게 전하였다(傳之十七世孫 廣開土境平安好太王)." 고 한 문구에 의거하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의 13 세손이 아니라, 17 세손이다. 이같이 세대가 빠진 본기라, 그 705년 이라고 한 연조는 믿을 수 없음이 그 둘이요, 본기로써 상고하면 고구 려 건국이 위우거(衛右渠)가 멸망한 지 72년만이지마는, 북사(北史)고려전(高麗傳)에는 막래(莫來)가 서서 부여를 쳐 크게 깨뜨리고 이를 복속시켰는데, 한(漢)의 무제(武帝)가 조선을 토멸하고 사군(四郡)을 둘 때에 고구려를 현(縣)이라고 하였다. 막래는 해동역사(海東繹史)에, "모본(慕本)의 잘못인가? " 하였으나, 막래는 '무뢰'로 읽을 것이니, 우박[雹 ]이라는 뜻이고, 신(神)이라는 뜻이다. 대주류왕(大朱留王)의 이름 '무휼 (憮恤)'과 음이 같을 뿐더러, 본기에도 동부여를 정복한 이가 곧 대주류왕이니, 막래는 모본왕(幕本王)이 아니라 대주류왕일 것이요, 막래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뒤에 한나라 무제가 사군을 설치하였으니, 고구려 건국이 사군 설치보다 약 백 몇십년 전이 될 것이 의심없음이 그 셋이다. 고구려 당시의 비기(秘記)와 그 자손 제왕의 건립으로 된 비문이 먼저 분명히 증명하고, 비록 외국인이 전해 들은 기록이지마는 북사(北史)가또한 증명하니, 고구려 연대의 백 몇십년 줄어들었음이 더욱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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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암(安順庵 : 安鼎福)선생이 고구려 족자(族子)인 안승(安勝)을 봉한 신라 문무왕의 말에서, "햇수 거의 8 백년(年將八百年)"이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연조가 줄어 들었음을 일정하였으나, 실은 8 백을 9 백으로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대개 고구려의 연대를 줄인 뒤에 9 백을 8 백으로 고쳐 고구려의 향국(享國)이 705년이라는 위증을 만든 것이다. 어찌하여 고구려의 연대가 줄어들었는가? 이는 고대 건국의 선후(先後)로 국가의 지위를 다투는 풍기(風氣 : 鄒牟와 松讓이 서울 세운 앞뒤를 다툰 따위)가 있으므로, 신라가 그 건국이 고구려와 백제 보다 뒤짐을 부끄러이 여겨, 두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기록상의 세대 와 연조를 줄여 모두 신라 건국 이후의 나라로 만든 것이고, 동부여 · 북부여 등의 나라는 신라와 은혜나 원수가 없는 앞선 나라이지만 이미 고구려의 연조를 백 몇십년이나 줄였으니, 사실의 관계상 고구려 · 백제의 부조(父祖)뻘인 동부여의 연대와 고구려 ·백제의 형제뻘인 가라(加羅)·옥저(沃沮)등의 나라의 연대까지 줄여버린 것이다. 그래 서 이제 전사(前史)에 보인 고구려 건국 원년에서 백 몇십년을 넘어, 기원전 190년경의 전후 수십년 동안을 동부여 ·북부여와 고구려의 분립한 시기로 잡고, 그 이하 모든 나라도 같은 시기로 잡아 열국사(列 國史)를 서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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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열국의 강역(列國의 疆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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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의 연대만 줄였을 뿐 아니라, 그 강역도 거의 다 줄여서, 북쪽의 나라가 수천 리를 옮겨 남쪽으로 온 것이 한둘이 아니다. 강역은 또 어찌하여 줄여졌는가?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북쪽의 땅을 잃고, 그 북쪽의 옛 지명과 고적을 남쪽으로 옮김이 첫째 원인이 되고 고구려가 쇠약해져서 압록강 이북을 옛 땅으로 인정하지 못하여 전대(前代)의 지리를 기록할 때에 북쪽의 나라를 또한 남쪽으로옮긴 것이 많음이 둘째 원인이 되어, 조선의 지리 전고(典故)가 말할수 없이 뒤바뀌어, 비록 근세의 한구암(韓久庵 : 韓百謙)·안순암 등 여러 선유 의 수정을 거쳐서 얼마쯤 회복이 되었으나, 열국 시대의 지리는 그 퇴축(退縮)됨이 전과 마찬가지다. 이제 그 대략을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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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부여다. 신조선이 최초에 세 개의 부여로 나뉘었으니, 하나 는 북부여이다. 북부여는 아사달에 도읍하였다. 삼국지에 "현도의 북 쪽 천 리(玄0x08 graphic之北千里)"라 하였으니, 지금의 합이빈인데 선유들은 지금의 개원(開原)이라고 하였다. 또 하나는 동부여인데, 동부여는 갈사나(曷思那)에 도읍하였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동부여를 칠 때, '북벌(北伐)한다.' 고 하였으니 고구려의 동북 --지금의 훈춘(揮春)등지가 동부여인데, 선유들은 지금의 강릉(江陵)이라고 하였다. 다른 하나는 남부여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격파한 뒤에 동부여가 둘로 나누어져 하나는 옛 갈사나에 머물렀으니, 곧 남부여다. 동 부여는 오래지 않아 고구려에 투항하매, 국호가 없어지고 남부여는 문자왕(文姿王) 3년 (기원 494년)에 비로소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동부여 ·남부여는 곧 함흥인데, 선유들은 그 강역을 모를 뿐 아니라, 그 명칭조차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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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사군(四郡 이다. 위만(衛滿)이 동으로 건너온 패수가 위략 의 만반한(滿潘汗), 한서지리지의 요동군(選東郵)문번한(沈睡규), 곧 지금의 해성 ·개평 등지이니 헌우란(0x08 graphic )이 옳다. 한나라 무제(武帝)가 점령한 조선이 패수 부근, 위만의 옛 땅이니, 그가 설치한 사군만 삼조선의 국명과 지명을 가져다가 요동군 안에 가설한 것인 데, 선유들은 매양 사군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강원 ·함경 등 여러 도와 고구려의 서울인 지금의 만주 환인(桓仁)등지에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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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낙랑국(樂浪國)이다. 낙랑국은 한(漢)의 낙랑군(樂浪郡)과 각각 다른, 지금의 평양에 나라를 세운 것인데 선유들은 이를 혼동하였고, 그 밖에 고구려 ·백제의 초대의 서울과 신라·가라의 위치는 선유들의 수정한 것이 대략 틀림이 없으나, 주군(州那)혹은 전쟁을 한 지점의 위치는 거의 신라 경덕왕 이후에 옮겨다 설치한 지명을 그 대로 써서 착오가 생겼으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교정하여 열국사를 서술해 나가고지자 한다.
 
 

2. 제 2 장 列國의 分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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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東扶餘의 分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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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解夫婁(해부루)의 東遷(동천)과 解幕漱(해모수)의 일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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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와 두 동부여와 고구려의 네 나라는 신조선의 판도 안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신조선이 멸망하여 부여 왕조가 되고 부여가 다 시 나누어져서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부여는 곧 신조선의 별명이고 따로 부여라는 왕조가 없이 신조선으로 부터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이는 상고할 길이 없거니와, 신조선이 흉노 모돈(冒頓)에게 패한 때가 기원전 200년 경이요, 동 ·북부여의 분립도 또한 기원전 200년경 이니, 나중의 설이 혹 근사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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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前史)에 동 ·북부여가 분립한 사실을 기록하여,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다니며 기도하여 아들 낳기를 구하다가 곤연(鯤淵 : 鏡泊湖 경박호)에 이르러서는 왕이 탄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므로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돌을 뒤집으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는지라 왕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주신 내 아들이다." 하고 데려다 길러서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그 뒤 얼마만에 상(相)아란불(阿蘭弗)이 왕에게, "요사이 하늘이 저에게 내려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이 땅에는 장차내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게 하려고 하니, 너희들은 동해변의 가섭원(迦葉原)으로 가거라, 그 땅이 기름져 오곡이 잘 되느니라고 하더이다." 하고 서울을 옮기기를 청하므로, 왕이 그의 말을 쫓아 가섭원으로 천도하여,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고 고도(故都)에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募漱)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종자 백여 명은 흰 고니[白鳥]를 타고 웅심산(熊心山, 일명 阿斯山, 또 일명은 鹿山이니 지금 哈爾濱의 宗達山)에 내려와서, 채운(彩雲)이 머리 위에 뜨고 음악이 구름 속에서 울리기를 10 여일 만에, 해모수가 산 아래로 내려와, 새깃의 관을 쓰고 용광(龍光)의 칼을 차고,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므로 세상 사람들이 천제의 아들이라 일컬었다."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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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기록이 너무 신화적이라 믿을 수 없다." 고 하지마는, 어느 나라이고 고대의 신화시대가 있어 후세 역사가들이 그 신화속에 서 사실을 캐내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말이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하늘이 아란불에게 내려왔다.',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고 한 말들은 다 신화이지만, 해부루가 남의 집 사생아인 금와를 주워다가 태자를 삼았음도 사실이요, 해부루가 아란불의 신화에 의하여 천도를 단행한 것도 사실이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고 일컫고 고도(故都)에 웅거하였음도 사실이니, 통털어 말하면 우리 북부여의 분립은 역사상 빼지 못할 큰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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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우리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북부여인이나 동부여인이 부여의 계통을 서술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한갓 고구 려인이 그 시조 추모왕(鄒牟王)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 이므로 겨우 해부루 ·해모수 두 대왕이 동 ·북부여로 분립한 약사를 말했을 뿐이고, 그 이전의 부여 해부루의 내력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 하였음이 그 하나요, 또한 그나마 고구려인이 기록한 원문이 아니라 신라 말엽의 한학자인 불교승이 개찬(改撰)한 것이므로, 신가를 고구려의 이두문대로 '상가(相加)'라 쓰지 않고 한문의 뜻대로 상(相)이라 썼으며, '가시라'를 고구려 이두문대로 '갈사나(曷思那)'라 쓰지 않고 불경(佛經)의 명사에 맞추어 가섭원(加葉原)이라 써서 본래의 문자가 아님이 그 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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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제왕(帝王)은 제왕인 동시에 제사장(祭司長)이며, 당시의 장상(將相)은 장상인 동시에 무사(巫師)요, 복사(卜師)였으니, 해부루는 제사장 ---대단군의 직책을 세습한 사람이고 아란불은 강신술(降神術)을 가진 무사와 미래를 예언하는 복사의 직책을 겸한 상가(相加)였다. 대단군과 상가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지만, 신조선의 습관엔 내우외환 같은건 물론이요, 천재지변 같은 것도 그 허물이 대단군에게로 돌아간다(삼국지에 홍수와 가뭄이 고르지 못하고 오곡이 잘 익지 아니하면 곧 그 허물이 왕에게로 돌아가서 왕을 바꿔야 한다고 하고, 혹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 --水早不調 五穀不登 輒歸輒於 或 言當易 或言當殺)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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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시(天時)나 인사 (人事)에 불행이 있으면 대단군을 대단군으로 인정치 않고 내쫓았는데, 이때가 흉노 모돈과 전쟁을 치른지 오래지 않았으니, 아마 패전의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인민의 신망이 짧어져서 대단군의 지위를 보전할 수 없으므로 아란불과 모의해 갈사나 --지금의 훈춘 등지로 달아나서 새 나라를 세운 것이고, 해모수는 해부루 와 동족이며 고주몽(高朱蒙)의 아버지다. 삼국유사 왕력편(王歷篇)에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대개 해모수가 해부루의 동천(東遷)을 기회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대단군이라 스스로 일걷고 왕위를 도모한 것이고, 부여는 불 곧 도성(都城)혹은 도회를 일컬음이므로, 해부루가 동부여라 일컬으매, 해모수는 북부여라 일컬었을 것이니, 북부여라는 명칭이 역사에 빠졌으므로 최근 선유들이 두 가지를 구별 하기 위하여 비로소 왕 노릇한 부여를 북부여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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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南北曷思·南北 沃沮의 두 東扶餘의 분립(남북갈사·남북옥저의 두 동부여의 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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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루가 갈사나 --지금의 훈춘에 천도하여 동부여가 되었음을 앞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갈사나란 무엇인가? 우리 옛말에 숲을 '갓' 혹은 '가시'라 하였는데, 고대에 지금의 함경도와 만주 길림의 동북부와 소련 연해주의 남쪽 끝에 나무가 울창하여 수천 리 끝이 없는 대삼림의 바다를 이루고 있어 이 지역을 '가시라'라 일컬었으니, '가시라'란 삼림국(森林國)이라는 뜻이다. '가시라'를 이두문으로 갈사국(曷思國)·가슬라(加瑟羅)·가서라(迦西羅)·아서량(阿西良)등 으로 적는데,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지리지에 보인 것이고, 또 혹'가섭원기(迦葉原記)'라고도 하였으니, 이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삼국사(三國史)에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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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사에서는 '가시라'를 '옥저(沃沮)'라고 적었는데,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의하면 옥저는 '와지'의 번역이고, '와지'는 만주어의 숲이니, 예(濊)곧 읍루(輯婁)는 만주족의 선조요, 읍루가 당시 조선 열국 중 말[言]이 홀로 달라서 삼국지나 북사에 특기하였으니, 우리의 '가시라'를 예족(濊族)은 '와지'라 불렀으므로 지나인들은 예어를 번역하여 옥저라고 한 것이다. 두만강 이북을 북갈사(北曷思)라 일컫고, 이남을 남갈사(南曷思)라 일컬었는데, 북갈사는 곧 북옥저(北沃沮)요, 남갈사는 곧 남옥저(南沃沮)이니 지금의 함경도는 남옥저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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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에 남·북옥저를 다 땅이 기름지고 아름답다고 하였으나, 지금의 함경도는 메마른 땅이니, 혹 옛날과 지금의 토질이 달랐던 것이 아닌가한다. 두 '가시라'의 인민들이 순박하고 부지런하여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여자가 다 아름다우므로, 부여나 고구려의 호민(豪民)들이 이를 착취하여 어물과 농산물을 천 리 먼 길에 갖다 바치게 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다가 비첩(婢妾)을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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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루가 북 ' 가시라' --지금의 훈춘으로 옮겨가 동부여가 되어, 아들 금와를 거쳐 손자 대소(帶素)에 이르러 대소가 고구려 대주류왕(大朱留王)에게 패하여 죽고, 아우 모갑(某甲)과 종제(從弟)모을(某 乙)이 나라를 다투어 모을은 구도(舊都)에 웅거하여 북갈사(北曷思)혹은 남동부여(南東扶餘)라 하였는데, 그 자세한 것은 다음 장에서 말하려니와 지금까지의 학자들이, a)동부여가 나뉘어 북동 ·남동의 두 부여로 되었음을 모르고 한 개의 동부여만 기록하고, b)옥저가 곧 갈사(曷思)임을 모르고 옥저 이외에서 갈사를 찾으려 하고, c)북동 ·남 동의 두 갈사가 곧 남 ·북의 두 갈사(兩加瑟羅)요, 남북의 두 갈사가 곧 남북의 두 옥저임을 모르고 부여 ·갈사 ·옥저를 각각 다른 세 지방 으로 나누고, d)강릉(江陵)을 '가시라' --기슬나(加瑟那)라 함을 신라 경덕왕이 북쪽 땅을 잃은 뒤에 옮겨 설치한 고적인 줄을 모르고 드디어 기슬나가 동부여의 옛 서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리가 문란하고 사실이 흔란해져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거니와, 이제 갈사(曷思)·가슬(加瑟)·가섭(迦葉)이 이두문으로 다 같이 '가시라'임 을 알고, 대소의 아우 모갑과 그 종제 모을이 나뉘어 있는 두 '가시라'의 위치를 찾아서 두 '가시라'가 곧 남·북 옥저임을 알고,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올 때에 '남으로 달아났다(南奔).' 는 말과, 주류왕(朱留王)이 고구려에서 동부여를 칠 때에, '북쪽을 쳤다(北伐).' 는 말로써 북 '가시라'의 위치를 알아서 위와 같이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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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北扶餘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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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의 역사는 오직 해모수가 도읍을 세운 사실 이외에는 겨우 북부여의 별명인 황룡국(黃龍國)이 고구려 유류왕(備留王)본기에 한번 보이고는 다시 북부여에 대한 말이 우리 조선인의 붓끝으로 전해진 것이 없고, 만일 전해진 것이 있다 하면 다 지나사에서 초록한 것이다. 북부여의 서울은 '아스라' --부사량(扶斯樑)이니, 곧 대단군 왕검의 삼경(三京)-- 세 왕검성의 하나요, 지금의 소련령(領)우수리[烏蘇里]는 곧 '아스라'의 이름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그 본래의 땅은 지금의 합이빈이니, 망망한 수천 리의 평원으로 땅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 되고, 종횡으로 굴곡(屈曲)한 송(松 : 古名 아리라)이 있어 교통의 편의를 주고, 인민이 부지런하고 굳세며, 대주(大珠)·적옥(未玉)의 채굴과 그림 비단과 수놓은 비단의 직포와 여우 ·삵·원숭이 ·담비 등의 가죽을 외국에 수출하며, 성곽 ·궁설의 건축과, 창고 저축의 많음이 다 옛 서울의 문명을 자랑했다.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홍수 다스라는 법을 가르쳤다 운운하는 금간옥첩의 문자도 왕궁에 보관되어 있고, 신지(神志)라 일컫는 이두문의 역사류며, 풍월(風月)이라 일컫는 이두문의 시가집(詩歌集)도 대개 이 나라에 수집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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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모수 이후에 북부여는 예와 선비를 정복하여 한때 강국으로 일컬어 지다가 뒤에 예와 선비가 반(叛)하여 고구려로 돌아가자, 국세가 마침내 쇠약해져서 조선 열국의 패권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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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구려의 일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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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鄒牟王(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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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시조 추모(鄒牟 : 혹 朱蒙)는 천생으로 용맹과 힘과 활 쏘는 재주를 타고나서, 과부 소서노(召西奴)의 재산으로 영웅호걸을 불러 모아 교묘하게 왕검 이래의 신화를 이용하여, 하늘의 알에서 강생(降 生)하였다 자칭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안으로 열국의 신임을 받아 정신적으로 조선을 통일하고 밖으로 그의 기이한 행적의 이야기를 지나 각지에 퍼뜨려서 그 제왕과 인민들이 교주로 숭배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남해에 공을 세우고, 북산에 덕을 쌓았다(立功南海 積德北山).' 하는 찬사를 올렸고, 지나 2 천년 이래의 유일한 공자 반대자인 동한(東漢)의 학자 왕충(王充)이 그 사적을 기록함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면 기원전 58년이 출생한 해요, 기원전 37년이 그 즉위한 해이지만, 이는 줄어든 연대라 의거할 것이 못 되고, 추모(鄒牟)가 곧 해모수의 아들이니 기원전 200년 경 동 · 북부여가 분립하던 때가 출생한 때일 것이고, 위만과 같은 때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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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아리라[松花江]의 부근에 있는 장자(長者)가, 유화(柳花)· 훤화(萱花)·위화(葦花)의 세 딸을 두었는데, 다 절세의 미인이요, 유화가 더욱 아름다웠다. 북부여왕 해모수가 나와 다니다가 유화를 보고 놀라 사랑하여 야합해서 아이를 배었다. 그러나 이때 왕실은 호족과만 결혼하고 서민과는 결혼을 하지 아니했으므로 해모수가 그 뒤에 유화를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서민은 서민과만 결혼하는데, 남자가 반드시 여자의 부모에게 가서 폐백을 드리고 사위되기를 두 번, 세 번 간곡히 빌어서 그 부모의 허락을 얻어서 결혼하고 결혼한 뒤에는 남자가 여자의 부모를 위해, 그 집의 머슴이 되어 3년의 고역을 치르고야 딴 살림을 차려 자유로운 가정이 되었으므로 유화의 실행이 발각되매 그 부모가 크게 노하여 유화를 잡아 우발수(優渤水)에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어부가 그녀를 건져 동부여왕 해금와(解金輕)에게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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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와왕이 유화의 아름다운 자색을 사랑하여 후궁에 두어 첩을 삼았는데, 오래잖아 아이를 낳으니 곧 해모수와 야합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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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와왕이 유화를 힐문하니 유화가 이를, "해 그림자에 감응하여 낳은 천신(天神)의 아들이고, 자기가 아무 잘못을 범한 일이 없다." 고 했다. 금와왕이 그 말을 믿지 않고, 그 아이를 돼지에게 먹이려고 우리에 넣어도 보고 말에 밟혀 죽으라고 길에 내던져도 보고, 산짐승의 밥이 되라 하여 깊은 산속에 버려도 보았으나, 다 아무 소용이 없으므 로 이에 유화에게 거두어 기르기를 허락하였다. 그 아이가 자라니 그 또래에서 기운이 뛰어나고 활 잘 쏘기가 짝이 없으므로 이름을 추모(鄒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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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에는 추모를 주몽(朱蒙)이라 쓰고, 주몽은 부여 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컬은 것이라고 풀이하였으며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지금 만주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릴무얼[卓琳奔阿]'이라 하니, 주몽은 곧 '주릴무얼'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비문에는 주몽을 추모라 하였으며, 문무왕(文武王)의 조서(詔書)에는 '중모(中牟)'라 하고 '주몽'이라고 하지 않았다. 주몽이라 하였음은 지나사에 전해오는 것을 신라의 문사들이 그대로 써서 고구려 본기에 올리게 된 것인데 추모 · 중모는 '줌' 혹은 '주모'로 읽을 것이니, 이는 조선어요 주몽은 '주물'로 읽을 것이다. 이는 예어(濊語)-- 만주족 시대의 말로, 지나사의 주몽은 예어를 말한 것이니, 원류고에 말한 바가 이치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비문에 따라 추모(鄒牟)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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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와왕이 아들 7 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대소이다. 대소가 추모의 재주를 시기하여 왕에게 권하여 죽이려고 하였는데, 늘 유화의 주선으로 화를 면했다. 추모가 19살이 되자 대궐에서 기르는 말 먹이는 일을 맡아보았는데 말을 다 살찌고 튼튼하게 잘 먹였으나 오직 준마 하나를 골라 혀에 바늘을 꽂아놓아 말이 먹지 못해서 날로 여위어 졌다. 왕이 말들을 돌아보고는 추모의 말 잘 먹인 공을 칭찬하고, 그여윈 말을 상으로 주었다. 추모는 바늘을 뽑고 잘 길러서 신수두의 10월 대제(大祭)에 타고나가 사냥에 참여하였는데, 왕은 추모에게 겨우 화살 하나를 주었지마는, 추모는 말을 잘 달리고 활을 잘 쏘아 그가 쏘아 잡은 집승이 대소 7 형제가 잡은 것보다 몇 갑절이 더 많았다. 이 에 대소는 더욱 그를 시기하여 기어코 죽이려고 음모를 꾸였다. 추모가 이를 알고 예씨(禮氏)에게 장기들어 표면으로 가정생활에 안심하고 있음을 보이고 속으로는 은밀히 오이(烏伊)·마리(摩離)·협부(0x08 graphic父)세 사람과 공모하여 비밀히 어머니 유화에게 작별을 고하고 아내를 버리고는 도망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로 갔는데, 이때 추모의 나이 22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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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본부여에 이르니 이곳의 소서노(召西奴)라는 미인이 아버지 연타발(延陀渤)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서, 해부루왕의 서손(庶孫)우태(優台)의 아내가 되어 비류(沸流)·온조(溫祚)두 아들을 낳고 우태가 죽어 과부로 있었는데, 나이 37살이었다. 추모를 보자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였는데 추모는 그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 부분노(扶芬奴)등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나라를 경영하여, 흘승골(0x08 graphic升骨)의 산 위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가우리'라 하였다. '가우리'는 이두자(吏讀字)로 고구려(高句麗)라 쓰니, 중경(中京)또는 중국(中 國)이라는 뜻이었다.
 
37
졸본부여의 왕 송양(松讓)과 활쏘기를 겨루어 이를 꺾고 이어 부분노를 보내 그 무기고를 습격해서 빼앗아 마침내 그 나라를 항복받고, 부근의 예족(濊族)을 내쫓아 백성들의 폐해를 없앴으며, 오이(烏 伊)·부분노 등을 보내어 태백산(太白山)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 : 지점 미상)을 토멸하여 성읍(城邑)을 삼고, 부위염(扶慰0x08 graphic)을 보내어 동부여를 쳐서 '북가시라'의 일부분을 빼앗으니 <광개토왕비문에, "동 부여의 옛 것이 추모왕의 속민이 되었다(東扶餘 舊是 鄒牟王 屬民)"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킴인 듯 >, 이에 고구려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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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前史)에 왕왕 송양(松讓)을 나라 이름이라고 하였는데, 이상 국집(李相國集)동명왕편(東明王篇)에 인용한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상고해보면 비류왕 송양(沸流王松讓)이라고 하였으니, 비류는 곧 부여로 졸본부여를 일컬은 것이므로, 송양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졸본 부여왕의 이름이다. 또 추모가 졸본부여의 왕녀에게 장기들었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죽은 뒤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고 하였으나 졸본부여의 왕녀 곧 송양의 딸에게 장가 든 사람은 추모의 아들 유류(備留)요, 추모가 장가든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왕녀가 아니다. 추모왕을 본기(本紀)에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으나, 동명(東明)은 '한몽'으로 읽을 것이니, '한몽'이란신수두 대제(大祭)의 이름 이다. 추모왕을 신수두 대제에 존사(尊祀)하므로 한몽 --동명이라는 칭호를 올린 것이고, 성왕의 성(聖)은 '주무'의 의역(義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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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東扶餘와 고구려의 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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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왕 다음으로 아들 유류왕(儒留王)이 왕위를 잇고, 유류왕 다음 에 그 아들 대주류왕(大朱留王)이 왕위를 이었다. 유류는 본기의 유리명왕(琉璃明王)유리(類利)이니, 유류(儒留)·유리(琉璃)·유리(類 利)는 다 '누리'로 읽을 것으로 세(世)라는 뜻이고 명(明)이라는 뜻이 요, 대주류왕은 본기의 대무신왕 무휼( 大武神王無恤)이니, 무(武)· 주류(朱留)·무홀(無恤)은 다 '무뢰'로 읽을 것으로 우박[雹]의 뜻이고 신(神)의 뜻인데, 이제 유리(琉璃)와 명(明)은 시호로 쓰고, 유리(類利)는 왕의 이름을 쓰며, 무(武)와 신(神)은 시호로 쓰고, 무홀(無恤)은 이름으로 쓴 건 본기의 망령된 판단이다. 이제 여기서는 비문을 쫓아 유리(琉璃)를 유류(儒留)로, 대무신(大武神)을 대주류(大朱留)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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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류왕 때에 동부여가 강성하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왕(帶素王)은 왕위를 이어받자 고구려에게 신하 노릇하기를 요구하고 볼모[質子]를 보내라고 하여, 왕이 그대로 하려고 하다가 두 태자를 희생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태자는 도절(都切)인데, 유류왕이 동부여에 볼모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듣지 아니하자 왕이 크게 노했으므로 도절이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둘째 태자는 해명(解明)인데 그는 용맹이 뛰어났었다. 유류왕이 동부여의 침략을 두려워해 국내성(國內 城)-- 지금의 집안현(輯安縣)으로 서울을 옮기니, 해명이 이를 겁약(怯弱)한 일이라 하여 따라가지 아니하였다. 북부여왕 (北扶餘王 : 본보기의 黃龍國王)이 해명에게 강한 활을 보내어 그 힘을 시험해보려고 하자 해명이 그 자리에서 그 활을 당겨서 꺾어 북부여 사람의 힘 없음을 조롱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해명은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할 인물이라하여 처음에는 북부여에 보내서 북부여왕의 손을 빌려 죽이려고 하였으나, 북부여왕이 해명을 공경하고 사랑하여 후히 대접해서 돌려보냈다. 유류왕은 더욱 부끄럽고 분하게 여겨 해명에게 칼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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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태자의 죽음은 혹 대궐 안 처첩들의 질투가 원인이 되기도 하였 겠지마는 그것은 대개 동부여와의 외교상 관계에서 온 것이었으니, 유류왕이 동부여를 얼마나 두려워했던가를 가히 미루어 알 것이다. 동부여왕 대소가 여러 번 수만 명 대병을 일으켜서 고구려를치다가 다 성공치 못하였으나, 고구려는 몹시 피폐해져서 동부여왕 대소가 또 사자를 보내 조공을 하지 아니함을 꾸짖자, 유류왕은 두려워서 애걸하는 말로 사자에게 회답해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니까 왕자 주류(朱留 : 본기의 無恤)는 이때 아직 어렸으나, 죽은 해명의 기개가 있어 부왕이 비굴하게 구는 것을 부당하다 하고 스스로 거짓 부왕의 명이라 하여 동부여의 사자에게 금와가 말 먹이는 비천한 직책으로 추모왕을 천대하고, 대소가 추모왕을 죽이려 한 일들을 낱낱이 들어서 죄를 나무라고 동부여의 임금과 신하의 교만함을 꾸짖어서 사자를 쫓아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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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여 대소왕이 사자의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또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침노해왔다. 유류왕은 왕자 주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매우 노하였으나, 이제 노경(老境)에 있어 주류를 도절이나 해명처럼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나라의 병마(兵馬)를 모두 주류에게 내어 주어서 나가 싸우게 하였다. 주류는 생각하기를 동부여는 군사의 수효가 많고 고구려는 적으며 동부여는 마병(馬兵)이고 고구려는 보병(步兵)이니, 적은 보병으로 많은 마병과 들판에서 싸우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 하고, 동부여의 군사가 지나갈 학반령(鶴盤嶺)의 골짜기에 복병시켰다가 동부여의 군사를 돌격하니, 길이 험하고 좁아서 마병이 불편한지라 동부여의 군사가 모두 말을 버리고 산 위로 기어올라갔다. 주류가 군사를 몰아서 그 전군을 섬멸하고 많은 말을 빼앗으니, 동부여의 정예가 이 싸움에서 전멸하여 다시는 고구려와 겨루지 못하였다. 싸움이 지나니 주류를 봉하여 태자로 삼고, 겸하여 병마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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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大朱留王의 東扶餘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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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류왕이 학반령의 싸움에서 동부여를 크게 무찌르고 유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지 4년에 5 만의 군사로 북벌(北伐)의 싸움을 일으켜서 동부여를 쳐들어갔는데, 도중에 창을 잘 쓰는 마로(麻盧)와 칼을 잘 쓰는 괴유(怪由)를 얻어 앞잡이를 삼아서 '가시라'의 남쪽에 이르러 진구렁을 앞에 두고 진을 쳤다. 대소왕이 몸소 말을 타고 고구려의 진을 바로 침범하다가, 말굽이 진구렁에 빠지자 괴유가 칼을 들어 왕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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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왕이 죽었으나 동부여 사람들은 더욱 분발하여 대소왕의 원수 를 갚으려고 대주류왕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마로는 전사하고 괴유는 부상하여 고구려의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대주류왕은 여러번 포위를 뚫고나오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이레를 굶기에 이르 렀다. 그런데 마침 큰 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는 지라 대주류왕이 풀로 사람을 만들어 진 가운데 세워두고 나머지 군사 를 이끌고 사잇길로 도망하였다.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서는 전군 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으나, 들짐승을 잡아먹고 간 신히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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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싸움은 동부여가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대소왕이 죽고 태자가 없어서 대소왕의 여러 종형제가 왕위를 다투어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워 졌다. 계제(季弟)모갑(某甲)은 종자 백여 명과 함께 남가시라(南沃沮)로 나와 사냥하고 있는 해두왕(海頭王)을 습격해서 죽이고, 군사 를 모아 남가시라를 완전히 평정하니, 이는 남동부여(南東扶餘)이고, 종제 모을(某乙)은 고도(故都)에서 스스로 서니 이는 북동부여(北東扶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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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밖의 여러 아우들이 제각기 군사를 모아 모을을 쳤으므로 모을은 군사 1 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여 대주류왕은 마침 내 북동부여를 전부 토평하였고 국호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역사에 보인 갈사국은 곧 남동부여이고, 동부여는 곧 북동부여이며, 후한서, 삼국지 등의 옥저전(沃沮傳)에 보인 불내예(不耐濊)도 북동부여이고, 예전(濊傳)에 보인 불내예(不耐濊)는 남동부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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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大朱留王의 樂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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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崔氏)가 남낙랑을 차지하여, 낙랑왕(樂浪王)이라 일컬었음은 제 3 편 제 4 장에 말하였거니와, 그 끝의 임금 최이(崔理)의 대에 이르니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때였다. 최이는 고구려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미인 딸 하나를 미끼로 삼아 고구려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이때 갈사국(曷思國 : 남동부여)의 왕이 그 손녀를 대주류왕의 후궁으 로 바쳐서 아들을 낳았는데, 얼굴이 기묘하고 풍신이 썩 좋아 이름을 호동(好童)이라고 하였다. 호동이 외가인 남동부여에 가는 길에 낙랑국을 지나게 되었는데, 최이가 출행(出行)하다 그를 만나보고 놀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북국(北國)신왕(神王)의 아들 호동이 분명하구나." 하고, 드디어 호동을 데려다가 그 딸과 결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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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국의 무기고에 북과 나팔이 있는데, 소리가 멀리까지 잘 들리 므로 외적의 침입이 있으면 매양 이것을 울려 여러 속국의 군사를 불러서 적을 막았다. 호동이 그 아내 최녀(崔女)를 꾀어, "고구려가 낙랑을 침입하거든 그대가 그 북과 나팔을 없애버리시오." 하고 귀국하 여 대주류왕에게 권해서 낙랑을 쳤다. 최이가 북과 나팔을 울리려고 무기고에 들어가보니 북과 나팔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북과 나팔 소리가 나지 아니하니 속국이 구원을 오지 않았다. 최이는 그 딸의 소행임을 알고 딸을 죽인 뒤에 나가서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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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은 이런 큰 공을 세웠으나, 왕후가 적자(嫡子)의 지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대주류왕에게 호동이 자기를 강간하려 하였다고 참소하여, 호동은 자살하기에 이르렸다. 이에 아름다운 남녀 한 쌍의 말로가 다 같이 비극으로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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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대주류왕 즉위 4년 여름 4월에 대소의 아우가 갈사왕(曷思王 : 남동부여왕)이 되었음을 기록하였고, 즉 위 15년 여름 4월에 호동이 최이의 사위가 되었음을 기록하였으며, 그 해 11월에 호동이 왕후의 참소로 자살하였음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갈사왕이 있은 뒤에야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에게 장가 들 수 있고, 또 그런 뒤에야 갈사왕 손녀의 소생인 호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니, 설혹 대주류왕 4년, 남갈사 건국 원년 4월에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에게 장가 들어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이듬해 정월에 호동을 낳았다 할지라도, 15년에는 겨우 11살의 어린아이니, 11살 어린아이가 어찌 남의 남편이 되어 그 아내와 멸국(滅國)의 계획을 행할 수 있었으랴? 11살 난 어린아이가 어찌 적모(嫡母)강간의 참소로 부왕의 혐의를 받아 자살하기에 이르렀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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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여가 원래 북갈사에 도읍하였으니, 소위 갈사왕은 분립하기 전의 동부여를 가리킴이 아닌가하는 이도 있겠지마는 그러면 이는 대소 왕(帶素王)때가 되니, 대소왕이 그 딸을 대주류왕에게 준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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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신라 말에 고구려사의 연대를 줄이고 사실을 이리저리 옮겨 고쳤으므로 이같이 모순되는 기록이 생겼거니와, 대주류왕 20년이 또,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伐樂浪滅之).' 고 하였으니, 한 낙랑을 두 번 멸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 호동이 장가 들고 자살함이 다 20년의 일이 아닌가 한다. 이상에 말한 북부여 ·북동부여 ·고구려 세 나라는 다 신조선 옛 강토에서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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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제의 견국과 마한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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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召西奴 女大王의 백제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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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본기(百濟本紀)는 고구려 본기보다 더 심하게 문란하다. 백 몇십년의 감축은 물론이고, 그 시조와 시조의 출처까지 틀린다. 그 시조는 소서노 여대왕(召西奴女大王)이니 하북(河北)위례성(慰禮城)--지금의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그가 죽은 뒤에 비류(沸流)·온조(溫祚)두 아들이 분립하여 한 사람은 미추홀(彌鄒忽 : 지금의 仁川)에, 또 한사람은 하남(河南)위례홀(慰禮忽)에 도읍하여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는데, 본기에는 소서노를 쑥 빼고 그 편(篇)첫머리에 비류 ·온조의 미추홀과 하남 위례홀의 분립을 기록하고, 온조왕 13년에 하남 위례홀에 도읍하였음을 기록하였으니, 그러면 온조가 하남 위례홀에서 하남 위례홀로 천도한 것이 되니 어찌 우스갯소리가아니랴?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비류 ·온조의 아버지는 소서노의 전남편인 부여사람 우태(優台)이므로, 비류 ·온조의 성도 부여요, 근개루왕(近蓋婁王)도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스스로 인정하였는데, 본기에는 비류·온조를 추모(鄒牟)의 아들이라 하였음이 둘째 잘못 이다. 이제 이를 개정하여 백제 건국사를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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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가 우태의 아내로 비류·온조 두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다가, 추모왕에게 개가하여 재산을 기울여서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를 세우게 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추모왕이 그 때문에 소서노를 정궁(正宮)으로 대우하고, 비류·온조 두 아들을 친 자식같이 사랑하였는데, 유류(橋留)가 그 어머니 예씨(禮氏)와 함께 동부여에서 찾아오니, 예씨가 원후(元后)가 되고 소서노가 소후(小后)가 되었으며, 유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 ·온조 두 사람의 신분이 덤받이자식 됨이 드러났다. 그래서 비류와 온조가의논하여,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 하여 그 뜻을 소서노에게 고하고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청하여, 많은 금 ·은 ·주보(珠寶)를 나누어 가지고 비류 ·온조 두 아들과 오간(烏干)·마려(馬黎)등 18 사람을 데라고 낙랑국을 지나서 마한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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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으로 들어가니 이때의 마한 왕은 기준(箕準)의 자손이었다.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쪽 백 리의 땅 미추홀 --지 금의 인천과 하북 위례홀 --지금의 한양 등지를 얻어 소서노가 왕을 일컫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그런데 서북의 낙랑국 최씨가 압록강의 예족(濊族)과 손잡아 압박이 심하므로 소서노가 처음엔 낙랑국과 친하고 예족만 구축하다가 나중에 예족의 핍박이 낙랑국이 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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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하는 것임을 깨닫고, 성책을 쌓아 방어에 전력을 다했다. 백제 본기에 낙랑왕(樂浪王)이라 낙랑태수(樂浪太守)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백 몇십년의 연대를 줄인 뒤에 그 줄인 연대를 가지고 지나의 연대와 대조한 결과로 낙랑을 한군(漢郡)이라 하여 낙랑태 수라고 쓴 것이며, 예(濊)라 쓰지 않고 말갈(靺鞨)이라 썼는데, 이것은 신라 말엽에 예를 말갈이라고 한 당(唐)나라 사람의 글을 많이 보고 마침내 고기(古記)의 예를 모두 말갈로 고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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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召西奴가 죽은뒤 두아들의 分國과 그 흥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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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가 재위 l3년에 죽으니,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 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일 뿐 아니라, 곧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었다.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 · 온조 두 사람이 의논하여,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략해오는데 어머니 같은 성덕(聖德)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자리를 보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에 형제가 오간 · 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負兒岳)--지금 한양의 북악(北岳)에 올라가 서울될 만한 자리를 살폈는데, 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온조는 하남 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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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간 · 마려 등이 비류에게 간하기를, "하남 위례홀은 북은 한강을 지고, 남은 기름진 평야를 안고, 동은 높은 산을 끼고, 서는 큰 바다 를 둘러 천연의 지리가 이만한 곳이 없겠는데, 어찌하여 다른 데로 가려고 하십니까? "라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므로 하는 수 없이 형제가 땅과 인민을 둘로 나누어 비류는 미추홀로 가고, 온조는 하남 위레홀로 가니, 이에 백제가 나뉘어 동 · 서 두 백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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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에 기록된 온조의 13년은 곧 소서노의 연조요, 그 이듬해 14년 이 곧 온조의 원년이니, l3년으로 기록된 온조 천도의 조서는 비류와 충돌된 뒤에 온조 쪽의 인민에게 내린 조서이고, 14년 곧 온조 원년 의, "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分漢城民)." 고 한 것은 비류 · 온조 형제가 백성을 나누어 가지고 각기 자기 서울로 간 사실일 것이다. 미추홀은 '메주골'이요, 위례홀은 '오리골'(본래는 아리골)이다. 지금의 습속에 어느 동네이든지 흔히 동쪽에 오리골이 있고 서쪽에 메주골이 있는데 그뜻은 알 수 없으나, 그유래가 또한 오래다. 그런데 비류의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 많이 흩어져 달아났지마는, 온조의 하남 위례홀은 수토가 알맞고 오곡이 잘 되어 인민이 편안히 살아가므로 비류는 부끄러워서 병들어 죽고 그 신하와 인민은 다 온조에게로 오니, 이에 동 ·서 두 백제가 도로 하나로 합쳐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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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溫祚의 馬韓 襲滅(온조의 마한 습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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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마한의 봉토(封土)를 얻어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서노 이래로 공손히 신하의 예로써 마한을 대하여,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 나 노루를 마한에 대하여,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나 노루를 마한에 보내고 전쟁을 하여 얻은 포로를 마한에 보냈는데, 소서노가 죽은 뒤 에 온조가 서북쪽의 예와 낙랑의 방어를 핑계하여, 북의 패하 (浿河)---지금의 대동강으로부터 남으로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公 州)까지 백제의 국토로 정하여달라고 해서 마침내 그 허락을 얻고 그 뒤에 웅천에 가서 마한과 백제의 국경에 성책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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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왕의 모자가 처음 남으로 왔을 때에 발 디딜 땅이 없어 내가 서북 백 리 땅을 떼어주어 오늘날이 있게 된 것 인데, 이제 국력이 좀 튼튼해졌다고 우리의 강토를 눌러 성책을 쌓으 니, 어찌 의리있는 짓이냐?" 하고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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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는 짐짓 부끄러워하는 빛을 보이고 성책을 헐었으나, 좌우에게, "마한왕의 정치가 옳은 길을 잃어 나라의 형세가 자꾸 쇠약해지니, 이제 취하지 아니하면 남에게 돌아갈 것이다." 하고 오래지 않아 사냥한다 핑계하고 마한을 습격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그 50 여국을 다 토멸하고, 그 유민으로서 의병을 일으킨 주륵(周勒)의 온 집안을 다 목베어 죽이니, 온조의 잔학함이 또한 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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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箕準)이 남으로 달아나서 마한의 왕위를 차지하고 성을 한씨(韓氏)라 하여 자손에게 전해내려오다가 이에 이르러 망하니, 삼국지 에, "기준의 후예가 끊어져 없어지고 마한인이 다시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準後滅絶 馬韓人 復自立爲王)."라고 한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인데, 온조를 마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지나인이 매양 백제를 마한이라 일컬었기 때문이다. 온조는 고구려의 유류 (儒留)·대주류(大朱留)두 대왕과 같은 시대 이니, 온조 대왕 이후에 낙랑의 침략을 기록한 것이 없음은 대주류왕 이 이미 낙랑을 토멸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
 
 

3. 제 3 장 漢武帝의 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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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漢나라 군이 고구려에 패한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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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남북 여러 나라가 분립하는 판에 지나 한나라 무제(武帝)의 침략이 있었다. 이것은 다만 한때 정치상의 큰 사건일 뿐 아니라, 곧 조선 민족 문화의 소장(消長)에도 비상한 관계를 가진 큰사건이었다. 고대 동아시아에 불완전한 글자이나마 이두문을 써서 역사의 기록 과 정치의 제도를 가져 문화를 가졌다고 할 민족은 지나 이외에 오직 조선뿐이었는데, 당시에 조선이 강성하여 매양 지나를 침략하고 혹은 항거하였으며, 지나도 제(齊)·연(熊)·진(奏)이래로 조선에 대하여 방어하고 혹은 침략해왔음은 제 2 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우 잦았거니와, 진(奏)이 망하고 한(漢)이 일어나서는 북쪽 흉노의 침략에 시달림을 받아서 한나라 고조(高祖)가 흉노 모돈(冒頓)을 공격하다가 백등(白登 : 산서성 大同府부근)에서 크게 패하여 세폐(歲幣)를 바치고 황녀(皇女)를 모돈의 첩으로 바치는 등 굴욕적 조약을 맺고, 그 뒤에 그대로 시행하여 고조의 증손 무제(武帝)에 이르렀다. 무제는 야심이 만만한 제왕이라, 백년 태평한 끝에 나라가 부강해지자 흉노를 쳐서 선대의 수치를 씻는 동시에 조선에 대하여도 또한 이름없는 군사를 일으켜서 민족적 혈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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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제가 침입한 조선이 둘이니, 한서(漢書)식화지(食貨志 : 史記平準書도 같음)에, "무제가즉위하고 수년만에 팽오(彭吳)가 예맥조선(濊貊朝鮮)을 쳐서 창해(滄海)라는 군(郡)을 설치하였으니, 곧 연(燕)과 제(齊)지방이 크게 소란해졌다(武帝卽位數年 彭吳 穿濊貊 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間 騷然騷動)." 고 한 예맥조선이 그 하나 요, 사기 조선열전(朝鮮列傳)에, "누선장군(樓船將軍)양복(楊僕)--- 좌장군(左將軍)순체(筍체)마침내 조선을 평정하여 사군(四那)을 만들었다(樓船將軍楊僕 左將軍 筍체遂定朝鮮爲四郡)." 라고 한 조선이 또 하나이다. 뒤의 조선은 곧 조선열전으로 인하여 위씨(衛氏)의 조선인 것은 사람들이 다 알거니와, 앞의 조선은 식화지나 평준서에 이렇게 간단히 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고 다른 전기(傳記)에서는 다시 발견되지 아니하므로 종래의 사학가들이 이를 어떤 조선인지를 말한 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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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전자의 조선은 곧 동부여를 가리킨 것이니, 한무제가 위우거(衛右渠)를 토멸하기 전에 동부여를 저희 군현(郡縣)이라 하여 고구려와 9년 동안 혈전하다가 패하여 물러난 일이 있은 것으로 생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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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증거하는가? 후한서(後漢書), 예전(濊傳)에, "한나라 무제 원삭(元湖)원년에 예의 남려왕(南閭王)등이 모반하여, 우거가 28 만 호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와서 항복하여, 한나라에서는 그 땅을 창해군(滄海郡)으로 만들었다(漢武帝元朔元年 滅君南閭等叛 右案率 二十八萬口詣遼東降漢 以其地爲滄海郡)." 고 하였고, 한서 본기(本紀)에, "원삭 3년 봄에 창해군을 폐지하였다(元朔三年春罷滄海郡)." 고 하였으며, 사기 공손홍전(公孫弘傳)에는, "공손홍이 여러번 간하여 창해군을 폐지하고 오로지 삭방(朔方)만 받들게 하기를 청하여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弘數諫---願罷---滄海 而專奉朔方 --- 上乃許之)." 고 하였으니, 종래의 학자들이 위 세 가지 책과 앞에 말한 '식화지(食貨志)의 본문을 합쳐, '예맥조선은 예임금 남려의 나라로 지금의 강릉이니, 강릉이 당시 우거의 속국으로서 모반하고 한에 항복했으므로 한이 팽오를 보내어 항복을 받고 그 땅으로써 창해군을 삼았다가 그 뒤에 땅이 너무나 멀고 비용이 많이 듦으로 그 전쟁을 그만둔 것이다." 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이 단정이 잘못임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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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나사에 매양 동부여를 예(濊)로 그릇 기록하였음과, 남 ·북 두 동부여가 하나는 지금의 훈춘이요, 또 하나는 지금의 함흥임은 이미 본편 제 2 장에서 서술하였거니와, 동부여를 지금의 강릉이라 함은 신라가 그 동북계 1천여 리를 잃고 그 잃은 지방의 고적을 내지(內地)로 옮길 때에 동부여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겼음으로 하여 생긴 위설(僞說)이니, 예의 남려는 함흥의 동부여왕이요, 강릉의 임금이 아 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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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식화지(食貨志)의 본문에 명백히, "무제가 즉위한 지 수년에 팽오(彭吳)가 예맥조선을 쳤다."고 하였으니, 후한서에 기록된 창해군을 처음 설치한 해는 무제 즉위 13년인데, 13년을 수 년이라 할 수 없을 뿐더러, 한서 주부언열전(主父偃列傳)의 원광(元光)원년 엄안(嚴安)의 상소에, "지금 예주(濊州)를 공략하여 성읍(城邑)을 설치하고자 한다(今欲--- 略濊州 建治城邑)." 고 하였는데, 예주를 공략한다는 것은 곧 예맥조선 침략을 가리킨 것이요, 성읍을 설치하는 것은 창해의 설치 경영을 가리킨 것이며, 원광 원년, 곧 원삭 원년의 6년 전에 엄안이 예에 대한 침략과 창해군 설치를 간하였으니, 남려의 항복과 팽오의 교통이 벌써 원광 원년의 일이요, 그 6년 후인 원삭 원년의 일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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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원광 원년 창해군 설치의 해는 기원전 134년이요, 원삭 3년 창해군 폐지의 해는 기원전 126년이니, 그러면 한이 동부여를 침략하여 창해군을 만들려는 전쟁이 전후 9년 동안이나 걸쳤으니, 동부여가 만일 우거의 속국이라면 우거가 가서 구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일 돌아와 구원하였다고 하면 사기 조선왕 만전(滿傳)에 우거의 한에 대한 관계, 진번진국(眞番辰國)의 옹알(壅閼), 요동 동부도위(東部都慰)의 공격이며 살해 따위를 다 기록하고서 어찌 이보다 더 중대한 9년 전쟁 의 사실을 빼었으랴? 앞에서 말한 개정한 연대에 의하면 이때는 동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이니, 남려는 위씨(衛氏)의 속국이 아니라 고구려의 속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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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려가 고구려의 속국이라면 왜 고구려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는가? 남려는 대개 남동부여, 후한서와 삼국지의 예전(濊傳)에 기록된 불내예왕(不耐濊王)에게 시집 보낸 갈사왕이니, 그러면 남려는 대주류왕의 처조(妻祖)요, 대주류왕은 남려왕의 손자 사위요, 호동은 남려왕의 진외증손(眞外曾孫)이니, 말하자면 붙이가 가까운 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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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호동의 장인인 낙랑의 최이(崔理)도 토멸하는 판에 어찌 처 조와 진외증조를 알아보랴. 고구려의 동부여에 대한 압박이 심했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 남려가 지난날 아버지와 형의 원수로든지, 당장의 압박의 고통으로든지, 어찌 고구려에 대하여 보복할 생각 이 없었으랴. 이에 같은 고구려에 대해 원한을 가진 낙랑의 여러 소국 들과 연합해서 몰래 우거에게 내통하여 고구려를 배척하려 하였으나, 우거가 고구려보다 미약하여 고구려에 항거하지 못하므로, 남려는 우거를 버리고 한(漢)에 통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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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에 통하려면 부득이 위씨(衛氏)의 나라를 경유해야 하는 데, 우거는 동부여가 혹 위씨 나라의 비밀을 한에 누설하지나 않을까 하여 국경의 통과를 허락하지 아니했으므로, 사기 조선 왕만전(朝鮮 王滿傳)에는, "진번 옆의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들어가 뵈려고 하였으나 우거가 또 막아 통하지 못하였다(眞番旁衆國 欲上書入見天子 右渠又壅閼不通)."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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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번 옆의 여러 나라란 곧 동남부여와 남낙랑 등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남려는 마침내 바닷길로 한에 통하여 사정을 고하니, 야욕으로 가득 찬 한무제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치랴. 드디어 동부여를 장래의 창해군으로 예정하고, 팽오를 대장으로 삼아 연제(燕齊)-- 지금의 직예(直匠)·산동(山東)의 군사와 양식을 총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고구려와 싸워 남동부여와 남낙랑 여러 나라를 구원하다가 고구려의 대항이 뜻밖에 강하여 9년 동안 혈전을 계속하였는데, 한이 여러 번 패하여 창해군을 폐지한다는 말을 핑계로 삼아 군사를 거두어 전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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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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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9년 동안 두 나라 사이에 혈전이 있었으면 사마천이 어찌하여 사기 조선열전에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아니하였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중국을 위해 치욕을 숨기다(爲中國諱恥).' 하는 것이, 공구(孔丘)의 춘추(春秋)이래, 지나 역사가의 유일한 종지(宗旨)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삼국지 왕숙전(王蕭傳)에 의하면, "사마천이 사기에 경제(景帝)와 무제(武帝)의 잘잘못을 바로 썼더니, 무제가 이것을 보고 크게 노했으므로 효경본기(孝景本記)와 무제본기(武帝本記)를 삭제하였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그 뒤에 사마천은 부형(腐刑 : 남자를 去勢하는 형벌(宮刑)에 처해졌다."고 하였으니, 만일 한의 패전을 바로 썼더라면 부형은 고사하고 목이 달아나는 참형까지 당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사실이 빠졌음이 고의일 것이며, 평준서에 겨우 그 사실을 비추었으니, '팽오가 예맥조선을 멸망시켰다. '고 하여 마치 조선을 토멸한 듯이 쓴 것도 또한 꺼려함을 피한 것일 것이요,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식화지(食貨志)에는 그 사실이 너무 바르지 못함을 싫어 하여, 멸(滅)자를 천(穿)자로 고쳤으나, 그 전부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하였음은 사마천과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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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한무제와 싸운 이는 대주류왕, 곧 고구려 본기의 대무신왕( 大武神王)일 것이다. 그러나 본기에는 연대를 줄였기 때문에 한무제 와 같은 시대인 대주류왕이 한의 광무(光武)와 같은 시대가 되고, 지나사의 낙랑 기사와 맞추기 위해 대주류왕이 한에게 낙랑국을 빼앗 겼다는 거짓 기록을 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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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漢武帝의 衛氏 侵滅(한무제의 위씨 침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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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가 9년이라는 오랫동안의 혈전에 패해 물러가서 그 이후 17년 동안 조선의 여러 나라를 엿보지 못하였으나 그 마음에야 어찌 동방 침략을 잊고 있었으랴. 이에 위씨(衛氏)는 비록 조선 여러 나라 중 하나이나 그 왕조(王朝)가 원래 지나족 종자요, 그 장수와 재상들도 대개 한의 망명자의 자손들이었으므로 이들을 꾀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잠식하는 앞잡이를 만들려고 하는 중에, 더욱 위씨에게 길을 빌어 동부여를 구원하고 고구려를 치는 편의를 얻으려고 하여, 기원전 109년에 한무제는 사신 섭하(涉河)를 보내서 먼저 한과 동부여를 왕래하는 사절이 위씨국의 국경을 통과하는 것을 허가하여 달라고 우거를 한의 국위(國威)로 워협하고, 금백(金帛)의 이익으로 꾀었으나 우거가 완강하게 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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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하가 한무제의 비밀 명령에 의하여 귀국하는 길에 두 나라의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서 우거가 보낸 전송하는 사자 우거의 부왕(副王)을 쩔러 중이고 달아나, 한으로 돌아가서 한무제에게 조선국 대장을 죽였다고 큰소리를 하니, 한무제는 실상 딴 흉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가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도 않고 그 공으로 섭하를 요통 동부도위(東部都慰)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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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하가 임지(任地)에 이른지 오래지 아니하여, 우거가 전의 일(副王의 피살)을 분하게 여겨 군사를 일으켜서 섭하를 공격해 죽였다. 무제는 이것으로 구실을 삼아 좌장군(左將軍)순체(筍체)는 보병 5 만으로 요수(遙水)를 건너 패수로 향하고, 누선장군(樓船將軍)양복(楊僕)은 병선 군사 7 천으로 발해를 건너 열수(列水)로 들어가서 우거의 서울 왕검성(王儉城 : 조선 고대 세 왕검성의 하나)을 좌우에서 협격 (挾擊)하게 하였는데, 양복은 열구(列口)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크게 패하여 산중으로 도망하여 남은 군사를 거두어 자신을 보호하고, 순체는 패수를 건너려고 하였으나 위씨의 군사가 항거해 지켜서 여의치 못하였다. 한무제는 두 장수가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신 위산(衛山)을 보내, 금백(金帛)을 뿌려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이간시켰다. 위씨의 나라는 원래가 조선과 지나의 도둑들의 집단이었으므로 그 신하들은 위씨에 대한 충성보다 황금에 대한 욕심이 매우 치열하였고, 그들은 전쟁을 주장하고 화평을 주장하는 두 파로 갈려 서로 다투었는데, 한의 금백이 비밀히 뿌려지자 화평을 주장하는 파가 갑자기 강해져서 우거로 하여금 그 태자를 한의 군중(軍中)에 보내서 한의 장수에게 사죄하고 군량과 말을 바치기로 하는 조약을 맺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우거는, "태자는 호위병만을 데리고 패수를 건너가 한의 장수를 만나보게 하여라." 고 하였고, 한의 장수는, "태자가 1 만의 군 사로 패수를 건너오려면 무장을 갖추지 말고 오라." 고 하여 양편이 서로 버티어 교섭이 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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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돈과 비단이 효력을 나타내서 우거의 재상 노인(路人)· 한음(韓陰)· 삼(參)과 대장 왕겹(王겹)이 몰래 한에 내정을 알리고 전쟁에는 힘쓰지 아니하였으므로, 한의 장수 순체는 패수를 건너 왕검성의 서북쪽을 치고, 양복은 산에서 나와 왕검성의 동남쪽을 쳤다. 한 무제는 교섭이 결렬되자 위산(衛山)을 죄주어 참형에 처하고, 제남태수(濟南太守)공손수(公孫遂)로 사신을 삼아서 전권(全權)을 주어 두 장수를 감독하는 동시에, 더욱 많은 돈과 비단을 가지고 가서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매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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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순체와 양복이 항복하기를 다투어 서로 불화해지니, 공손수가 순체의 편을 들어 양복을 불러 순체의 군중에 가두고, 순체로 하여 금 양복의 군사를 합쳐 싸우게 하고, 한무제에게 돌아가 보고하였다. 무제는, "돈과 비단만 낭비하고 위씨 군신(君臣)의 항복을 받지 못 했다." 하고 크게 노하여 공손수를 처형하였다. 오래지 않아 한음 · 왕 겹 · 노인 등의 뇌물받은 일이 탄로되어 노인은 참형을 당하고, 한음 · 왕겹 두 사람은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삼(參)이 우거를 암살하고,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우거의 대신 성기(成己)가 삼을 치니, 우거의 왕자 장(長)이 삼에게 붙어 노인의 아들 최(最)와 힘을 합하여 성기를 죽이고 성문을 열어 항복해서 위씨가 이에 멸망하고 한무제는 그 땅을 나누어 진번 · 임둔 · 현도 · 낙랑의 네 군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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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사실은 오직 사기 조선열전에 의거할 뿐인데, 거기에는 한 이 돈과 비단을 위씨의 여러 신하들에게 뇌물한 기록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사마천이 무제 본기(無帝本紀)의 화(福 : 앞절에 보 임)로 부형(腐刑)을 당하고 동부여에 대한 한의 패전을 기록하지 못한 일이 있어, 바로 쓰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이 전쟁 에 패하고 뇌물로 성공한 사실이 글 가운데 뚜렷이 보이니, 이를테면, "위만은 병위(兵威)와 재물로 그 이웃 작은 고을을 침노하여 항복받아서 나라를 얻었다(滿 得以兵威財物 侵降其旁小邑)." 고 하여 위만이 병위와 재물 두 가지로 건국을 성취하였음을 기록한 것은 은근하 한무제가 위씨를 당당히 병력으로 멸하지 못하고 재물로 적을 매수하는 비열한 수단으로 성취하였음을 비웃고 꼬집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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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산을 보내 병위로써 우거를 타일렀다(遺衛山 因兵威 往諭右渠).' 고 하여 '병위' 두 자만 쓰고 '재물' 두 자는 빼었으나, 이때 순체와 양복은 이미 패전하고 후원병도 가지 아니하여서 병위가 도리어 우거의 군사보다 약한 때인데 무슨 병위가 있었으랴? 이는 곧 윗글의 '병위 ·재물' 넉 자를 이어받아, 위산이 가져간 것이 병위가 아니라 재물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고, 위산과 공손수가 다 까닭없이 처형되었음을 기록한 것은 한무제가 재물만 쓰고 성공치 못함에 노음을 표시한 것이고, 위씨가 멸망한 뒤에 순체와 양복이 하나는 침형당하고 하나는 파면되었는데, 봉후(封候)의 상을 받은 자는 도리어 위씨의 반역신인 노인(路人)의 아들 최와 왕겹 등 네 사람뿐이었으니, 이는 곧 위씨의 멸망이 한의 병력에 있지 않고 한의 재물을 받고 나라를 판 간신에게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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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漢四郡의 위치와 고구려의 對漢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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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씨가 망하매 한이 그 땅을 나누어 진번 ·임둔 ·현도 ·낙랑 네 군 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사군의 위치 문제는 삼한(三韓)연혁의 쟁론 에 못잖은 조선사상 큰 쟁론이 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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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반한 ·패수 ·왕검성 등 위씨의 근거지가 지금의 만주 해성 개평 동지(이는 제 2 편 제 2 장에 자세히 설명했음)일 뿐 아니라, 당시에 지금 의 개원(開原)이북은 북부여국 (北扶餘國)이고, 지금의 흥경(興京)이 동은 고구려이고, 지금의 압록강 이남은 낙랑국이고, 지금의 함경도 내지 강원도는 동부여국이었으니, 이상 네 나라 이외에서 한의 사군 을 찾아야 할 것이므로, 사군의 위치는 지금의 요동반도 안쪽에서 찾 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군의 위치에 대하여 이설(異說)이 백출(百出)함은 대개 다음에 열거한 몇 가지 원인에 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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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지명의 같고 다른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패수 ·낙랑 등은 다 '펴라'로읽을 것으로서, 지금의 대동강은 당시의 '펴라'라는 강이고, 지금의 평양은 당시의 '펴라'라는 서울이니, 강과 서울을 다 같이 '펴라'라고 한 것은 마치 지금의 청주(淸州)'까치내'라는 물 옆에 '까치내'라는 마을이 있는 것처럼 '펴라'라는 강 위에 있는 서울이므로 또한 '펴라'라고 한 것이요, 패수(浿水)의 ' 패(浿)는 '펴라'의 '펴'의 음을 취하고, 수(水)는 '펴라'의 '라'의 음 을 취하여 '펴라'로 읽은 것이다. 그 밖에 낙랑·평양 ·평나(平那)· 백아강(百牙岡)등도 다 '펴라'로 읽을 것이다. 그 해석은 여기서 생략하거니와, 한무제가 이미 위씨조선 곧 불조선을 토멸하여 요동군을 만들고는 가끔 신 · 말 두 조선의 지명을 가져다가 위씨조선의 옛 지명 을 대신하였으니, 지금의 해성(海城)헌우란의 본래 이름이 '알티'(혹 安地 혹 安市라 한 것)인데, 이것을 고쳐 패수라 하였고, 사기의 작자 사마천은 그 고친 지명에 의하여 사군(四郡)이전의 옛 일을 설하였으 므로, "한이 일어나 물러나서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漢興---退以浿水爲界)." 느니, "위만--- 동으로 달아나 새외(塞外)로 나가서 패수를 건넜다(滿---東走出塞 漢浿水)." 느니 하였으며, 진번(員畵)이 비록 신 · 불 두 조선을 합쳐 일컫는 것이지마는, 한은 이를 차지하여 고구려를 진번군으로 가정(假定 : 아래에 자세히 말함)하였다. 사기의, "처음에 전연(全燕)때 일찍이 진번조선을 약취(略取)하여 예속시 켰다(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고 하고, "위만이 잠시 진번조선을 복속시켰다(滿---稍役屬眞番朝鮮)." 고 한 진번조선은 신 · 불 두 조선을 가리킨 것이지마는, "진번 · 임둔이 다 와서 복속하였다(眞番臨屯 皆來服屬)." 고 하고, "진번의 이웃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하였다(眞番旁衆國 欲上書見天子)." 고 한 진번은 다 사군의 하나인 진번을 가려킨 것으로써, 또한 나중에 고친 지명에 의하여 고사(故事)를 설한 것이다. 마치 을지문덕 이후에 살수(薩水)의 명칭이 청천강(淸川江)이 되었으니, 을지문덕 당시에는 청천강이라는 이름이 없었지마는 우리가, "을지문덕이 청천강에서 수 (隨)나라 군사를 깨뜨렸다." 고 하는 따위와 같은 것인데, 종래의 학자들이 이를 모르고 사기의 패수와 진번 등을 사군 이전의 이름으로 아는 동시에, 헌우란 패수, 대동강 패수의 두 패수와 두 나라의 이름인 진번과 한 군(郡)의 이름인 진번의 두 진번을 혼동하여 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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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기록의 진위를 잘 분별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서 본기(本紀)무제(武帝)원봉(元封)3년 진번 · 임둔의 주(註)에 '무릉서(茂陵書)에 진번의 군치(郡治)삽현(삽縣)은 장안(長安)에서 7,640 리 임둔의 군치 동이현(東이縣)은 장안에서 6,138 리(茂陵書 眞番郡治 삽縣 去長安 七千六百四十里 - - -臨屯郡治 東이縣、 去長安 六千 一百 三十 八 里).' 라 했는데, 무릉서는 무릉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저작이라 하나, 사기 사마상여전에, "상여가 죽고 5년에야 천자가 비로 소 후토 (后土)를 제사지냈다(相如旣卒五歲 天子始祭后土)· " 하고,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원정(元鼎)4년 비로소 후토를 세웠다(元鼎四年---始立后土)·"고 하였는데, 원정 4년은 기원전 113년이요, 사마상여가 죽은 것은 그 5년 전인 원수(元狩)6년(기원전 117년)이니, 상여는 원봉(元封)3년(기원전 l08년)진번 · 임둔군을 설치한 해보다 10년 전에 이미 죽었으니, 10년 전에 이미 죽은 상여가 어찌 l0년 후의 두 군의 위치를 말할 수 있었으랴. 그러니 무릉서가 위서(僞書)인 동 시에 그 글 가운데 진번 · 임둔 운운한 것은 위증(鴻證)임이 의심없으 며, 또한 한서지리지에 요동군 군현지(郡縣志)이외에 따로 현도와 낙랑 두 군지(郡志)가 있으므로, 이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요동반도 이외에서 현도 · 낙랑 두 군의 존재를 생각하게 하지마는, 위략의 만 반한이 곧 한서지리지 요동군의 문 · 번한임과 사기의 패수가 곧 요동 군 번한현(番汗縣)의 패수 (浿水)임이 이미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지리지의 현도 · 낙랑 운운한 것은 후세 사람의 위증임이 의심없는데 종래의 학자들이 이것을 모르고 매양 한서 본기의 진번, 임둔의 주나 지리지의 낙랑· 현도 두 군지를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글로 그릇 믿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사군의 위치에 대한 고거(考據)가 비록 많으나, 하나도 그 정곡(正鵠)을 얻은 이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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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은 원래 땅 위에 구획을 그은 것이 아니고 종이 위에 그린 일종의 가정(假定)이니, 말하자면 고구려를 토멸하면 진번군을 만들리라, 북동부여 --- 북옥저 를 토멸하면 현도군을 만들리라, 남동부여 ---남옥저를 토멸하면 임둔군을 만들리라, 낙랑국을 토멸하면 낙랑군을 만들리라 하는 가정인 것이고, 실현된 것이 아니다. 한무제가 그 가정을 실현하기 위해 위의 여러 곳에 대하여 침략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낙랑과 두 동부여는 앞에 말한 것과 같이 고구려에 대한 오래된 원한이 있으므로 한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배척하려고 했을 것이고, 고구 려는 또 전번에 대주류왕이 승전한 기세로 한과 결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 전쟁이 대개 기원전 108년쯤, 곧 위씨가 멸망한 해에 비롯하 여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한이 패하여 사군 실현의 희망이 아주 끊어졌으므로 진번 · 임둔 두 군은 그 명칭을 폐지하고, 현 도 · 낙랑 두 군은 요동군 안에다 붙여서 설치함에 이르렀다. 한서 본기에는 진번군을 폐지했다고 하였을 뿐이고, 임둔군을 폐지했다는 말 은 없으나, 후한서 예전(滅傳)에, "소제(昭帝)가 진번 · 임둔을 폐지하여 낙랑 · 현도에 합쳤다(昭帝罷眞番臨屯 以井樂浪玄토)." 고 하였음을 보면, 임둔군도 진번군과 한때에 폐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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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예전에는 현도를 구려(句麗 : 한의 고구려현을 가리킨 것)로 옮겼다고 하였고, 삼국지 옥저전 (沃沮傳)에는 처음에 옥저로 현도성 을 삼았다가 뒤에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나 옥저전의 불내예왕(不耐歲王)은 북동부여와 남동부여의 왕을 가리킨 것이요, 예전의 불내예왕은 낙랑왕을 가리킨 것이니, 두 동부여와 낙랑국은 다 당시에 독립된 왕국이다. 그렇다면 현도성이 옥저, 곧 북동부여에서 요동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다만 북동부여로 현도를 만들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비로소 요동---지금의 봉천성성(奉天省城)에 현도군을 붙이기로 설치한 것이고, 낙랑군도 또한 동시에 붙이기로 설치하였을 것인데 그 위치는 확언할 수 없으나, 대개 지금의 해성(海城)등지일 것이다.
 
102
어찌하여 진번 · 엄둔을 폐지하는 동시에 현도 · 낙랑 두 군을 붙이기로 설치하였는가? 이는 다름 아니라, 곧 앞서 말한 낙랑국과 남동 부여국이 고구려를 몹시 원망하여 한이 패해 물러간 뒤에도 두 나라가, 오히려 한에 사자를 보내 몰래 통하고 상민(商民)이 왕래하여 물 자를 서로 사고 팔았으므로 한이 요동에 현도 · 낙랑 두 군을 붙이기로 설치하여 두 나라에 대한 교섭을 맡게 하고, 혹은 고구려와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에는 두 나라를 이용하였으니, 이것은 한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고, 고구려는 매양 두 나라의 한과 통하는 증적(證跡)을 알아내면 반드시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켰다. 이는 고구려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니, 수백년 동안 두 나라로 인하여, 고구려의 한에 대한 진취(進取)를 방해하였다. 이 책에서는 두 낙랑을 구별하기 위하여 낙랑국은 남낙랑(南樂浪)이라 하고 한의 요동 낙랑군은 북낙랑(北樂浪)이라 하거니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보인 낙랑국은 다 남낙랑을 가리킨 것인데, 종래의 학자들이 매양 요동에 있는 북낙랑은 모르고 남낙랑을 낙랑군이라 주장하는 동시에 삼국사기 의 낙랑국 낙랑왕은 곧 한군태수의 세력이 동방을 웅시(雄視)하여 그 형세가 한 나라 왕과 같으므로 나라 또는 왕이라 일컬었다고 단언(斷言)하였으나, 고구려 와 경계가 닿은 요동태수를 요동국왕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현도태수를 현도국왕이라 일컽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홀로 낙랑태수만 낙랑국 왕이라 일컬었으랴? 그것이 억설임이 의심없다.
 
103
이즘 일본인이 낙랑 고분에서 혹 한대(漢代)연호를 새긴 그릇을 발견하고 지금의 대동강 남쪽 기슭을 위씨의 옛 서울 곧 뒤의 낙랑의 군 치(郡治)라고 주장하지마는 이러한 그릇은 혹 남낙랑이 한과 교통할 때에 수입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구려가 한과의 싸움에 이겼을 때 노획한 것일 것이요, 이로써 지금의 대동강 연안이 낙랑 군치임을 단언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104
제4장 鷄立嶺(계립령)이남의 두 새나라
 
105
1.계립령 이남의 별천지
 
106
계립령은 지금의 조령(鳥領 : 새재)이다. 지금 문경읍(聞慶邑)의 북산(北山)을 계립령이라고 하지마는, 고대에는 조령의 이름이 '저릅 재 '이니, '저릅'은 삼(麻)의 옛 말이다. '저릅'을 이두자의 음으로는 '계립(鷄立)'이라 쓰고, 뜻으로는 '마목(麻木)'이라 쓰는 것이니 그러므로 조령이 곧 계립령이다.
 
107
계립령 이남은 지금 경상남북도의 총칭인데, 계립령의 일대로 지금의 충청북도를 막으며, 태백산(太白山 : 奉化의 태백산)으로 지금의 강원도를 막고, 지리산으로 지금의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막으며, 동과 남으로 바다를 둘러 따로 한 판국이 되었으므로 조선 열국(列國)의 당시에 네 부여(고구려도 혹 卒本扶餘라함)가분립한다, 고구려가 동부여를 정복한다, 또 낙랑을 정복한다, 위씨가 한에게 망하여 그 땅이 사군(四郡)이 된다, 백제가 마한을 토멸한다---하는 소란이 있었지만 영(領)이남은 그런 풍진(風塵)의 소식이 들리지 않아, 진한 · 변 한의 자치령 수십 나라가 그 비옥하고 아름다운 토지에 의거하여 벼 · 보리 · 기장 · 조 등의 농업과 누에치기 · 길쌈 등을 힘써서 곡식과 옷감들을 생산하고 철을 채취하여 북쪽 여러 나라에 공급하고, 변진(弁辰)은 음악을 좋아하여 변한슬(弁韓瑟 : 불한고)이란 것을 창작하여 문화가 매양 발달하였으나, 일찍이 북방의 유민으로 마한의 봉지(封 地)를 받았으므로 마한의 절제(節制)를 받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백제의 절제를 받았다. 그러나 그 절제는 소극적으로 a)'신수두'의 건설 과 b)'신한' 칭호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1)해마다 의 조알(朝謁)과 2)토산물의 진공(進貢)을 행할 뿐이었는데, 나중에 진한 자치부는 신라국(新羅國)이 되고, 변진 자치부는 여섯 가락(加羅)연맹국이 되어, 차차 백제에 반항하기에 이르렀다.
 
108
2.加羅(가라)여섯나라의 건설
 
109
지금의 경상남도 등지에 변진의 12 자치부가 설립되었음은 제 3 편 제4 장에 말하였거니와, 위의 각 자치부를 대개 '가라'라 일컬었다. '가라' 란 큰 소[大沼]의 뜻이니, 각 부가 각각 제방을 쌓아서 냇불을 막아 큰 소를 만들고, 그 부근에 자치부를 설치하여 그 부의 이름을 '가라'라 일컬은 것이었다. '가라'를 이두문으로 '가라(加羅)', '가락(駕洛)', '가야(加耶)', '구야(狗邪)', '가야(伽倻)' 등으로 썼으니, 야(耶)· 야 (邪)· 야(倻)등은 옛 음을 다 '라'로 읽은 것이고, '가라'를 혹 '관국(官國)'이라 썼으니, '관(官)'은 그 음의 초성 · 중성을 떼어 '가'로 읽고, '국(國)'은 그 뜻의 초성 · 중성을 떼어 '라'로 읽은 것이다. 기원 42년경에 각 가라의 자치부원(自治部員)· 아도간(我刀 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신귀간(神鬼干)· 오전간(五天干)등이 지금의 김해읍(金海邑)귀지봉(龜旨峰)위에 모여 대계(大계 : 계는 당시 自治會의 이름)를 베풀고, 김수로(金首露)6 형제를 추대하여 여섯 '가라'의 임금을 삼았다.
 
110
김수로는 제 1 가라, 곧 김해를 맡아 '신가라'라 일컬으니, '신'은 크다는 뜻이요, 첫째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신가라'는 전사(前史)에 금관국(金官國)이라 쓴 것이 옳은데, 가락(駕洛)혹은 구야(狗邪)라고 썼으니, 이 둘은 다 '가라'의 이두자이므로, 이로써 여섯 가라를 총칭 하는 것은 옳으나, 다만 '신가라'를 가리켜 일컬음은 옳지 않다.
 
111
둘째는 '밈라가라'니, 지금 고령(高靈)의 앞내를 막아 가라[大沼]를 만들고, 이두자로 '미마나(彌摩那)' 혹은 '임나(任那)'라 쓴 것으로 서, 여섯 가라 중 그 후손이 가장 강대하였으므로 전사에 대가라(大加羅)혹은 대가야(大加耶)라 기록하였다.
 
112
셋째는 '안라가라'이니, 지금 함안 (咸安)의 앞내를 막아 가라를 만 들고, 이두자로 '안라(安羅)', '아니라(阿尼羅)' 혹은 '아니량(阿尼良)'이라 기록한 것인데, 아니량이 나중에 와전하여 '아시라(阿尸羅)'가 되고 아시라가 다시 와전하여 '아라(阿羅)'가 되었다.
 
113
넷째는 '고링가라'이니, 지금의 함창(咸昌 : 尙州郡)으로 또한 앞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로 고령(古寧)이라 기록한 것인데, '고 링가라'가 와전하여 '공갈'이 되었으니 지금의 '공갈못[恭儉池] '이 그 자리이다. 여섯 가라 고적 중 오직 이것 하나가 전해져 그 물에는 연꽃 · 연잎이 오히려 수천년 전의 풍경을 말하는 듯하더니, 이조 광무(光武)시절에 총신(龍臣)이채연(李采淵)이 논을 만들려고, 그 둑을 헐어 아주 폐허가 되게 하였다.
 
114
다섯째는 '별뫼가라'이니, '별뫼가라'는 '별뫼'라는 산중에 만든 가라로서 지금의 성주(星州)다. 이두자로 '성산가라(星山加羅)' 혹은 '벽진가라(碧珍加羅)'로 기록한 것이다.
 
115
여섯째는 '구지가라'니, 지금 고성(固城)의 중도(中島)이다. 역시 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로 '고자가라(古資加羅)'라 기록할 것인데, 여섯 나라 중 가장 작은 나라이므로 또한 '소가야(小加耶)'라 일컬었다.
 
116
여섯 가라국이 처음에는 형제의 연맹국이었으나 나중에 연대가 내려갈수록 촌수가 멀어져, 각각 독립국이 되어 각자의 행동을 취하였는데, 삼국사기에 이미 육가라(六加羅)본기(本紀)를 빼고 오직 신라 본기와 열전(列專)에서 신라와 관계된 가라의 일만 기록한 가운데, '신가라'를 금관국이라 쓴 이외에는 그 밖의 다섯 가라를 거의 구별이 없이 모두 가야(加耶)라 써서 그 가야가 어느 가라를 가리킨 것인지 모르게 된 것이 많다. 이제 이 책에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구별하 여 쓰고, 여섯 가라의 연대도 삭감당한 듯하므로 신라의 앞에 기술하 였다.
 
117
3.新羅(신라)의 건국
 
118
종래의 학자들이 다, '신라사가 고구려 · 백제 두 국사보다 비교적 완전하다.' 고 하였으나, 이는 아주 모르는 말이다. 고구려사와 백제 사는 삭감이 많거니와, 신라사는 위찬(僞撰)이 많아서 사료로 근거 삼을 것이 매우 적으니, 이제 신라 건국사를 말함에 있어 이를 대강 논 술하려 한다.
 
119
신라의 제도는 6 부(部)3 성(姓)으로 조직되었는데, 신라 본기에 의거하면 6 부는 처음에 알천양산(閼川楊山)· 돌산고허(突山高墟)· 무산 대수(茂山大樹)· 자산진지(자山珍支)· 금산가리(金山加利)· 명활산 고야(明活山高耶)의 여섯 마을이었는데, 신라 건국 후 제 3 세 유리왕 9년(기원 32년)에 여섯 마을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주었다. 곧 알천양산은 양부(梁部)라 하고 성을 이(李)로 하였으며, 돌산고허는 사량부(沙梁部)라 하고 성을 최(崔)로 하였으며, 무산대수는 점량부(漸梁部 : 一名 弁梁部)라 하고 성을 손(孫)으로 하였으며, 자산진지는 본피 부(本彼部)라 하고 성을 정(鄭)으로 하였으며, 금산가라는 한기부(漢祇部)라 하고 성을 배(裵)로 하였으며, 금산가라는 한기부(習比部)라 하고 성을 설(薛)로 하였다고 한다.
 
120
3 성은 박(朴)· 석(昔)· 김(金)세 집이니, 처음에 고허촌장(高墟村長)소벌공(蘇代公)이, 양산(楊山)아래 나정(羅井)곁에 말이 꿇어앉아 우는 것을 바라보고 쫓아가보니, 말은 간 곳이 없고 큰 알 하나가 있으므로, 이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데려다가 기르고 성을 박이라고 하였는데, 그가 나온 큰 알이 박만하므로 '박'의 음을 딴 것 이라고 한다.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하였는데, 혁거세는 그 읽는 법과 뜻이 다 전하지 않는다. 나이 13살에 영특하고 숙성하므로 백성이 그를 높여 거서간(居西干)을 삼았다. 거서간은 그때의 말로 귀인(貴人)의 칭호라고 한다. 이것이 신라 건국 원년(기원전 57년)이고, 이이가 박씨의 시조이다.
 
121
신라의 동쪽에 왜국(倭國)이 있고, 왜국의 동북쪽 1 천 리에 다파나국(多婆那國)이 있는데, 그 국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에게 장가 들어 아이를 밴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으므로, 왕이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내다 버리라고 하니, 여자가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비단으로 싸고 금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그 금궤가 금관국의 해변에 이르니, 금관국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겨 가지지 아니하였는데, 진한의 아진포(阿珍浦)포구에 이르니 바닷가의 한 노파가 이를 건져냈다. 열고 보니까,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어 이 노파는 데려다가 길렀다. 이 때가 박혁거세 39년(기원전 19년)이었는데, 금궤에서 빠져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고 금궤가 와 닿을 때에 까치[鵲]가 따라오면서 울었으므로 작(鵲)자의 변을 따서 성을 석(昔)이라 하니, 석씨의 시조다.
 
122
석탈해(昔脫解)9년(기원 65년)에 금성(金城 : 신라의 서울, 곧 慶 州)서쪽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므로 대보 호공(瓠公)을 보내어 가보게 하였더니, 금빛 조그만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므로, 그 금궤를 가져다가 열어보니, 또 한 조그만 어린아이가 있으므로 데려다가 기르면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니 이는 김씨의 시조라 하였다.
 
123
궤에서 나왔다, 알에서 깨어났다 하는 신화는 그때 사람이 그 시조 의 출생을 신이(神異)하게 장식한 것이거니와, 다만 6 부 · 3 성의 사적 이 고대사의 원본이 아니고 후세 사람의 보태고 줄임이 많음은 가석한 일이다. 이를테면 조선 고사의 모든 인명 · 지명이 처음엔 우리말로 짓고 이두자로 기록하였는데, 그 뒤 한문화(漢文化)가 성행하면서 한자로 고쳐 만들었으니, 원래는 '메주골'이라 하고, '미추홀(彌鄒忽)' 혹은 '매초홀(買肖忽)'이라 쓰던 것을 나중엔 인천(仁川)이라 고친 따위인데, 이제 알천양산(閼天楊山)· 돌산고허(突山高墟)등 한자로 지은 여섯 마을의 이름이 6 부의 본 이름이고, 양부(梁部)· 사량부(沙梁 部)---등 이두자로 지은 6 부의 이름이 여섯 마을의 나중 이름이라 함이 어찌 앞뒤의 순서를 뒤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음이 그 하나다.
 
124
신라가 불경을 수입하기 전에는 모든 명사를 다만 이두자의 음이나 뜻을 맞추어 쓸 뿐이었는데, 불교가 성행한 뒤에 몇몇 괴벽한 중들이 비슷만 하면, 불경의 숙어에 맞추어 다른 이두자로 고쳐 만들었으니, 예를 들면 소지왕(炤智王)을 혹 비처왕(毘處主)이라 일컫는데, 소지 나 비처가 다 '비치 '로 읽은 것이지마는, 비처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소지는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요, 유리왕(圖理王)을 혹 세리지왕(世利智王)이라 일컫는데, 유리나 세리가 다 '누리 '로 읽은 것이 지마는, 유리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세리는 또한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이다. 탈해왕(脫解王)도 그 주에 일명 '토해(吐解)'라 하였는데, 탈해나 토해는 다 '타해' 혹 '토해'로 읽을 것이고, 그 뜻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당시의 속어로 된 명사임은 분명하니, 토해(吐解)는 본래 쓴 이두자이고, 탈해는 고쳐 만든 이두자로서, 불경에 해탈(解脫)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토해의 뜻을 탈(脫)로 고쳐 만든 것이다. 원래는 당시 속어의 음을 취한 것이고, 탈출(脫出)혹은 해출(解出)의 뜻이 없으니, 금궤에서 탈출하였으므로 탈해라 하였다고 함이 괴벽한 중들의 부회(附會)임을 단언할 수 있음이 그 둘이다.
 
125
3 성의 시조가 다 큰 알에서 나왔으니, 그 큰 알은 다 '박'만 할 것인데, 어찌하여 3 성의 시조가 다 같은 박씨가 되지 않고, 박씨 시조 이 외에 두 시조는 석씨와 김씨가 되었는가? 석 · 김 두 성이 다 금궤에서 나왔는데 어찌하여 같은 김씨가 되지 아니하고, 하나는 석씨, 하나 는 김씨가 되었는가? 석탈해(昔脫解)의 금궤에 까치가 따라와 울었으므로, 작(鵲)자의 변을 따서 석씨(昔氏)가 되었으며, 김알지(金斡智)가 올 때에 닭이 따라와 울었으니, 계(鷄)자변을 따서 해씨(采氏)가 되어야 옳겠는데 어찌하여 두 사람에게 다른 예를 써써 앞에서는 김씨가 되지 않고 석씨가 되었으며, 뒤에서는 해씨가 되지 않고 김씨가 되었는가? 신화라도 이같이 뒤섞여 조리가 없을 뿐더러 게다가 한자 파자장(破字匠)의 수작이 섞여서 이두문 시대의 실례와 많이 틀림이 그 셋이다.
 
126
초년(初年)에 초창(草創)한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변한이 나라로 들어와서 항복하였다.' 느니, '동옥저가 좋은 말 200 마리를 바쳤다.' 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북명인(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함은 더욱 황당한 말인듯하다. 왜냐하면 북명(北溟)은 '북가시라'--- 북동부여의 별명으로 지금의 만주 훈춘 등지이고, 고구려 대주류왕의 시위장사(待衛壯士)괴유(怪由)를 장사 지낸 곳인데, 이제 훈춘의 농부가 밭 가운데서 예왕의 도장을 얻어 수천 리를 걸어 경주 한 구석의 조그만 나라인 신라왕에게 바쳤다 함이 어찌 사실다운 말이랴? 이는 경덕왕(景德王)이 동부여 곧 북명 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긴 뒤에 조작한 황당한 말이니, 다른 것도 거의 믿을 가치가 적음이 그 넷이다.
 
127
신라가 여러 나라중에서 문화가 가장 늦게 발달하여 역사의 편찬이 겨우 그 건국 6 백년 후에야 비로소 억지로 북쪽 여러 나라의 신화를 모방하여 선대사(先代史)를 꾸였는데, 그나마도 궁예(弓裔)· 견훤(甄萱)등의 병화(兵火)에 다 타버리고, 고려의 문사들이 남산 · 북산의 검불을 주워다가 만든 것이므로, 신라 본기의 기록의 진위를 가려냄이 고구려 · 백제 두 나라 역사나 마찬가지인데, 역사가들이 흔히 신라사가 비교적 완벽된 것인 줄로 알아 그대로 믿었다.
 
128
나의 연구에 의하면, 신라는 진한 6 부의 총칭이 아니고, 6 부 중의 하나인 사량부이다. 신라나 사량은 다 '새라'로 읽을 것이요, '새라' 는 냇물 이름이니, '새라'의 위에 있으므로 '새라'라 일컬은 것이고 사량은 사훼(沙喙 : 진흥왕 비문에 보임)라고도 기록하였으며, 사훼는 '새불'이니 또한 '새라'위에 있는 '불' --들판이기 때문에 일컬은 이름이다. 본기에 신라의 처음 이름을 '서라벌(徐羅筏)'이라 하였으 나, 서라벌은 '새라불'로 읽을 것이니 또한 '새라'의 '불'이라는 뜻 이다. 시조 혁거세는 곧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의 양자이고, 고허촌은 곧 사량부이니, 소벌공의 '소벌(蘇伐)'은 또한 사훼와 같이 '새불'로도 읽을 것이므로 지명이고, 공(公)은 존칭이니, 새불 자치회(自 治會)의 회장이므로 '새불공'이라 한 것이다 말하자변 소벌공은 곧 고허촌장이라는 뜻인데, 마치 사람의 이름같이 씀은 역사가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새라 부장(部長)의 양자인 박혁거세가 6 부의 총왕(總王)이 되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새라'라 하고 이두자로 신라(新羅)· 사로(斯盧)· 사라(斯羅)· 서라(徐羅)등으로 쓴 것이다.
 
129
3 성의 박씨뿐 아니라, 석씨 · 김씨도 다 사량부의 귀인의 성이니, 3 성을 특별히 존숭하는 것은 또한 삼신설(三神說)에 의방(依倣)한 것이다. 본기 석탈해왕 9년(기원65년)에 비로소 김씨 시조인 영아(영兒)김알지를 주웠다고 하였으나, 파사왕(婆娑王)원년(기원 80년)에는 왕후 사성부인(史省夫人)김씨는 허루갈문왕(許婁曷文王 : 추존한 왕을 갈문왕이라 함)의 딸이라 하였으니, 그 나이를 따지면 허루(許婁)도 거의 알지의 아버지뻘되는 김씨인 것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박 · 석 · 김 3 성이 처음부터 사량부 안에 서로 연흔(聯婚)하는 거족(巨族)이었는데, 같이 의논한 끝에 6 부 전체를 가져 3 성이 서로 임금 노릇하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이에 진한 자치제의 판국이 변하여 세습 제왕의 나라가 됨에 이르렀다.
【원문】제4편: 열국의 쟁웅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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