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생(周生)의 이름은 회(檜), 자는 직경, 호는 매천(直卿)이며, 촉(蜀)나라 사람이다. 원래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전당(錢塘)에서 살아왔으나, 그의 부친이 촉주(蜀州)의 별가(別駕) 벼슬을 하게 되어 그때부터 그의 집은 촉 땅이었다.
3
주생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총기가 있어서 남들로부터 천재라는 이름을 들었으며 특히 시를 잘하였다. 나이 십팔 세에 태학생(太學生)이 되어 친구들의 우러러 보는 바가 되었고, 자신도 자기의 재주와 학문이 보통이 아니라고 자부하곤 하였다.
4
그러나 웬일인지 태학에 재학하기 수년에 이르건만, 끝내 과거 시험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
6
“사람의 세상살이가 마치 티끌의 약한 풀에 깃들고 있는 것과도 같을 뿐인데, 어찌하여 사람은 공명(功名)에만 급급해서 자기를 잃어버려야 할 것인가.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입신양명만을 생각하고 있는 내 청춘이 아까울 뿐이다.”
7
주생은 홀연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자유로운 강호 유람에 뜻을 두었다. 돈 상자를 엎어 재산을 헤아려 보니 십만 냥이었다. 그 중 절반으로 우선 자그만 배 한 척을 샀다. 그 다음 나머지 절반으로 장사가 될 만한 물건을 사, 양자강과 동정호를 오가며 잡화 장사를 시작하였다.
8
이렇게 해서 주생은 아침에는 오(吳) 땅, 저녁에는 초(楚) 땅으로 유유자적하며 옮겨 다녔다. 물건을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하였으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갔고, 닥치는 대로 노를 저었으며, 또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유람하며 서서히 흘러가기도 하였다. 이런 삶은 저 하늘의 뜬구름과도 같았다.
9
어느 날 주생은 악양성(岳陽城) 밖에 배를 매어 놓고, 전부터 친근하게 지내던 나생(羅生)이라는 친구를 찾았다. 나생 또한 주생에 못지않은 재주 있는 선비였다. 나생은 주생을 보자 반가워하여, 술을 사서 대접하고, 옛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놀다 주생은 술에 취해 버렸고, 만취하여 배에 돌아왔을 때에는 벌써 날은 어두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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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 달빛은 밤 강물을 고요하게 수놓기 시작하였다. 주생이 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에는 그의 자그만 배는 물 가운데 둥둥 떠서 저 혼자 가는 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절간의 종소리는 은은하게 들려오고, 새벽이 되자 달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뽀얀 새벽안개가 양쪽 강 언덕을 덮고, 그 사이로 거뭇한 땅과 나무와 산과 때때로 집들도 눈에 보이었다. 차차 달빛도 흐려져서 안개 너머로 흐릿한 무지개를 이루었고, 안개는 마치 자그만 분가루를 뿌린 것처럼 흐르고 있었다.
11
어딘가 물으니 전당(錢塘)이라고 했다. 주생은 전신의 냉기를 느끼며 물가로 배를 대어갔다. 주생은 전당에서 고향을 떠올렸다. 더구나 새벽의 분위기가 기분이 돋우어, 강호를 유람하는 선비는 흥에 취해 시 한 수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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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陽城外倚蘭槳 악양성 밖 목란배 돗대에 잠깐 기대었다가
13
一夜風吹入醉鄕 하룻밤 바람에 흘러 취한 채로 고향에 들어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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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宇數聲春月曉 새벽녘 두견새 우는 소리에 봄달이 밝고,
15
忽驚身已在錢塘 문득 놀라 깨어보니 몸은 이미 전당에 와 있었네.
16
전당의 물가에 배를 대었을 때에는, 시야를 가리던 안개도 걷혀 대기가 명랑했고, 아침 태양은 찬란하게 대지를 비치기 시작하였다. 주생은 육지에 올라 이곳의 옛 친구들을 찾아보았다.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나 볼 수 없게 된 옛 친구들이 많아, 슬픔이 주생을 잡고 놓지 않았다.
17
주생은 감상을 이겨내지 못해 시를 읊으며 옛 땅을 거닐었다. 무엇 하나 그냥 보아 넘기기 어려웠고, 특히 기억이 사무친 곳에서는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18
이러다 주생은 우연히 길가에서 기생 배도(俳桃)를 만났다. 주생과는 어릴 때 같이 자란 소꿉동무였다. 이제는 재색을 겸비한 아름다운 기생이 되어, 전당에서는 이 미녀를 배랑(俳娘)이라 부르고 있었다.
19
배도는 옛 소꿉동무를 만나자, 감격하여 주생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둘 모두 어렸을 때의 정이 그대로 되살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끝이 없이 옛 이야기를 나누던 주생은 잠시 말을 멎고, 성급하게 시 한 수를 읊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20
天涯芳草幾霑衣 하늘가 타향에서 밤이슬과 얼마나 지냈던가.
21
萬里歸來事事非 만 리 길에서 고향에 돌아오니 모든 것이 변했는데.
22
依舊杜秋聲價在 두추(杜秋)의 아름다움은 예나 다름없고
23
小樓珠箔捲斜暉 작은 누각의 구슬주렴처럼 석양에서 빛나누나.
24
배도는 시를 읽고 기뻐 마지않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25
“군자의 재주가 이렇게도 훌륭하여 사람들에게 떨어질 바가 아닌데도, 어찌해서 물 위에 뜬 부평초(浮萍草)나 바람에 나부끼는 쑥대나, 하늘에 뜬구름과도 같이 정처 없이 떠다니나이까?”
26
그리고 잠시 후 주생을 말끄러미 지켜보며, 연민하며 묻기를,
29
“아직이오. 강호의 길손이 여자를 얻어 무엇하리요.”
30
“제 소원이니, 군자는 이제부터 배로 돌아가지 마시옵고, 그저 제 집에만 머물러 계십시오. 그러면 제가 군자를 위하여 좋은 요조숙녀를 배필로 구해 드리리다.”
31
배도는 주생에게 은근히 마음을 둔 터였다. 주생도 배도의 아름다운 자태에 은근히 도취되어 있었다.
32
“배랑의 말은 고마우나, 내 어찌 바라리오.”
34
날이 저물어 방 안이 어둑어둑해지자 배도는 시비를 시켜 주생을 별실로 인도해 편히 쉬게 했다. 주생은 편안하게 자리에 누워 사방의 벽을 둘러보다가 절구(絶句)가 씌어 있는 한 벽에서 멈추었다. 시는 생소한 것이어서 주생은 그 글을 자세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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琵琶莫奏相思曲 비파로 상사곡(相思曲)일랑은 타지 마오.
36
曲到高時更斷魂 가락이 높아지면 애간장 끊어지는 것을.
37
花影滿簾人寂寂 꽃 그림자 주렴에 가득해도 외로움에
38
春來消却幾黃昏 한 많은 봄날 밤 보내기 그 몇 번이었던고.
39
글에 감동한 주생은 누가 쓴 것이냐고 시비에게 물었다. 시비는 배랑 아씨가 썼다고 대답하였다.
40
주생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뒤척였다. 이미 배도의 곱디고운 자태에 흠뻑 취해 있었던 데다 그녀의 시를 읽으니 한층 더 정이 쏠렸고, 마치 경호(鏡湖)를 유람하는 배에 앉은 듯이 상념은 제멋대로 유람하게 되었다. 배도의 글에 답하여 시를 한 수 지어 보고 싶었으나, 그것도 너무나 결렬하게 흥분되어 글이 되지 아니하였다. 밤은 깊어 가고 달빛이 창문으로 찾아 들었고, 꽃 그림자는 운치를 도와 주생의 마음을 더욱 유혹하였다.
41
그 때 홀연 웬 인마(人馬)의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주생은 모든 신경을 그리로 모아 엿들으려 했으나, 아무리 해도 분명히 알 수 없었고, 그 인마의 소리는 없어져 버렸다. 매우 의심쩍었었지만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42
문득 주생은 배도의 방이 그리 멀지 않음을 깨달았다. 불이 사창으로 불빛이 환히 비쳐 나왔다. 몰래 다가가 주생은 대담하게 사창을 슬며시 젖히고 들여다보았다. 배도는 홀로 앉아 글을 짓고 있었다. 채운전(彩雲牋)을 펴 놓고 접련화(蝶戀花)란 사(詞)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전첩(前疊)만 지었을 뿐, 후첩은 아직 짓지 못한 듯하였다.
44
“빈 노래를 이 길손이 채워도 좋으리까?”
45
그러자 배도는 놀란 듯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하지만 일부러 놀란 척하는 것 같았다.
46
“이게 무슨 망령이시오. 이 깊은 밤에 손이 들어올 데가 못되거늘, 어서 정해 드린 방으로 돌아가사이다.”
47
“길손이 본래부터 미친 것이 아니건만, 주인 아가씨가 길손을 미치게 한 것이오.”
48
배도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 주생으로 하여금 노래를 완성하게 했다.
49
小院深深春意鬧 깊고 깊은 별당에 춘정이 흐드러지니
51
寶鴨香烟裊 오리 향로의 연기, 향기도 높구나.
52
窓裏玉人愁欲老 창 안의 고운 여인 시름으로 늙어가니
53
遙遙斷夢迷花草 꿈마저 잃고 하염없이 뜨락을 서성이네.
54
誤入蓬萊十二島 봉래산 열 두 섬의 선경에 잘못 들어 온 이,
56
却得尋芳草 물러서다가 꽃밭으로 들어오게 되었네.
57
睡覺忽聞枝上鳥 잠깨니 가지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
58
綠簾無影朱欄曉 주렴 그림자도 사라지고 붉은 난간에 날이 밝았구나.
59
주생이 시를 다 짓자 배도의 두 뺨이 볼그레하게 붉어졌다. 주생은 보일 듯 말듯 떨리는 베도의 하얀 손을 덥석 잡았다. 거기에 방해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배도는 주생의 손을 밀쳐내고, 밖으로 나가 주안을 차려 들여왔다.
60
배도는 옷차림도 단정하게 앉아 약옥강(藥玉舡) 술잔에다 서하주(瑞霞酒)를 따라 권하였다. 하지만 주생은 술 생각이 전혀 없어 아무리 권해도 사양했다.
61
배도는 주생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처연히 말했다.
62
“제 선조는 대대로 영귀를 누려온 명문대가였습니다. 하지만, 천주(泉州)의 시박사(市舶司)의 벼슬에 있던 조부가 죄를 지어 천한 백성이 된 때부터는 가세가 기울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그뿐 아니라, 제가 조실부모하고 남의 손에서 자라나 오늘에 이르렀기에, 비록 절조(節操) 견고하고 결백하게 되고자 하였으나, 기생에 적을 둔 몸으로 어찌 그것을 바라오리까? 홀로 한가한 곳에 있을 때마다, 꽃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때가 없었고, 달을 대하여는 절망하지 않는 때가 없었습니다. 이제 군자를 뵈오니, 풍채가 뛰어나고 거동이 활달하며 재주가 만인을 뛰어넘으니, 제 비록 못난 주제이오나 침석(枕席)에 어른을 모시고 길이 건즐(巾櫛)을 받들까 하나이다. 다만 바라거니와 낭군은 이후로 입신양명하시어 빨리 영귀(榮貴)를 누리실 때, 이 못난 저를 기생의 적에서 빼 주시와 선조의 이름을 보중하게 하시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나이다. 그러면 그 후 낭군이 아무리 저을 버리고 돌아보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으리이다.”
63
배도의 눈에서는 벌써부터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배도의 말이 끝났을 때, 주생은 배도를 끌어당겨 그 허리를 꼭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자기의 소매를 잡아 눈과 뺨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64
“그 일은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오. 그대가 말하지 않더라도 내 어찌 무정할 수 있으리요.”
65
그러자 배도는 눈물을 거두고 안색을 달리하여 말했다.
66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여야불상(女也不詳)이라도 사이기행(士貳其行)이라 아니하였나이까. 그리고 또 군자는 이익(李益)과 곽소옥(藿小玉) 이야기를 듣지 아니하셨나이까? 낭군이 첩을 버리지 않으실진대, 바라거니와 언약을 하여지이다.”
67
하고 눈물을 뚝 끊고 즉시 일어서서 필묵을 갖추고, 좋은 노호(魯縞)를 한 자 가량 떼어다가 주생의 앞에 펼쳐 놓았다.
68
주생은 즉석에서 붓을 잡자 척척 내리갈겨 갔다.
73
쓰기를 마치자 배도는 글을 정성껏 봉해서 치마 품에 깊이 간직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고당부(高唐賦)를 읊으며 밤을 새워 즐거움을 나누었다. 그것은 김생(金生)과 취취(翠翠)며 위랑(魏郞)과 빙빙(娉娉)의 재미에 견줄 바 아니었다.
74
다음 날, 주생은 비로소 어젯밤에 들었던 사람 소리와 말 울음소리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76
“여기서 멀지 않은 물가에 붉은 대문을 한 저택이 있는데, 거기가 바로 돌아가신 노승상 댁입니다. 승상께선 이미 돌아가시고, 그 부인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아들과 딸 하나만을 데리고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아직 아들딸을 성사도 시키지 않고 날마다 노래하며 춤추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답니다. 지난밤에도 사람과 말을 보내어 저를 불렀으나 제가 낭군님 때문에 병을 핑계 대고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77
그 날도 해가 질 무렵, 승상 부인이 다시 사람과 말을 보내어 배도를 부르러 왔거늘 배도는 또 다시 거절할 수가 없어 이들을 따라 나섰다.
78
주생은 문밖까지 배도를 전송하며 신신당부하였다.
80
배도가 말을 타고 가는데, 사람은 난새처럼 가볍고 말은 나는 용처럼 빨라 꽃과 버들가지 사이를 스치며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다가 주생은 불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옷을 주워 입고 배도의 뒤를 따라 나섰다.
81
용금문(湧金門)을 나와서 왼편으로 돌아 수홍교(垂虹橋)에 이르니 과연 구름과 맞닿을 정도로 거대한 저택이 보였다. 주생은 속으로 여기가 바로 배도가 말했던, 붉은 대문의 물가에 서있는 저택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집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 우뚝 솟아 있었다. 이따금 음악이 그칠 때마다 그 안에서 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집밖에까지 들려왔다.
82
주생은 다리 위를 이리저리 맴돌다가 감회를 이기지 못하고 고풍시(古風詩) 한 수를 지어 기둥에 적어 두었다.
83
柳外平湖湖上樓 버들숲 너머 잔잔한 호수위로 누각이 걸려 있고,
84
朱甍碧瓦照靑春 붉은 용마루 푸른 기와엔 푸른 봄빛이 비치도다.
85
香風吹送笑語聲 웃음소리 말소리 싱그런 향기 타고 들려오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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隔花不見樓中人 꽃에 가리워져 누각의 사람은 볼 수가 없네.
87
却羨花間雙燕子 꽃 속을 드나드는 한 쌍의 제비 부럽기만 하여라.
88
任情飛入朱簾裏 붉은 기둥, 주렴 안을 마음대로 드나드네.
89
徘徊未忍踏歸路 이리저리 맴돌아도 차마 발길 돌리지 못하는데,
90
落照纖波添客思 낙조 실은 잔잔한 물결 나그네 시름 더하누나.
91
주생이 방황하는 사이 어느덧 석양은 점점 붉게 물들고 저녁놀은 푸르게 엉기며 어둠이 밀려 왔다. 이 무렵, 한 무리의 여자들이 붉은 대문에서 말을 타고 나왔는데, 금 안장과 옥 재갈의 광채가 휘황하게 빛났다. 주생은 저 일행 속에 배도가 있으려니 생각하고는 길가 빈 헛간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는 십여 명이 다 지나가도록 살펴보았으나, 일행 속에 배도는 보이지 않았다.
92
주생은 정말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면서 다리 위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날은 이미 저물어 소와 말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이에 주생은 집안으로 들어가 찾기로 하고, 곧장 그 붉은 대문 안으로 들어갔으나. 이상하게도 사람이라곤 얼씬거리지 않았다. 누각 아래까지 가 보았으나 역시 사람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주생은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이미 달은 희미해지고 날은 밝아오려는데 누각의 북쪽에 연못이 보이고 그 위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 있었다.
93
그런데 그 꽃밭 사이로 길이 구불구불하게 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살금살금 걸어가 보니, 꽃밭이 끝나는 곳에 집이 한 채 있었다. 주생이 계단을 따라 서쪽으로 수십 보쯤 가니 길이 꺾어지고 멀리 포도 넝쿨 우거진 아래 또 한 채의 집이 보였다. 규모는 작으나 아담했고, 반 쯤 열려진 사창으로 촛불이 높이 타오르고 있었다. 촛불 그림자 밑으로는 붉은 치마, 푸른 소매 옷을 입은 여인이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94
주생이 몸을 숨긴 채 다가가 숨을 죽이며 몰래 엿보았다. 금빛 병풍이며 비단요가 황홀하게 빛나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승상 부인이 자색 비단옷을 입고 백옥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나이는 오십 줄이나 보였는데 조용히 뒤돌아보는데 모습에는 여유가 있었으며 옛날의 예쁜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95
그 옆에는 열 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앉아 있었는데 머리채는 곱게 뒤로 땋아 내렸고, 얼굴을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소녀의 맑은 눈이 살짝 옆을 흘기는 모습은 마치 가을날에 흐르는 맑은 물결 위에 가을빛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방그레 웃을 때면 붉은 볼에 애교가 넘치는 것이, 정녕 봄꽃이 아침 이슬을 함빡 머금은 듯했다.
96
이들 사이에 앉아 있는 배도는 그들에 비한다면 봉황과 까마귀, 구슬과 조약돌의 격이었다. 주생의 넋은 구름 밖으로 날아가고 마음은 허공에 붕 떠서 맴돌아, 지금이라도 당장 미친 듯이 소리치며 뛰어 들어가 껴안고 싶은 충동이 몇 차례나 일어나는 것을 억지로 참고 지켜보았다.
97
방안에서는 술이 한 순배 돌고 난 뒤, 배도가 자리에서 물러나 인사를 하고는 돌아가려 했다. 부인이 끝까지 만류했으나 배도는 끝내 돌아가기를 청했다.
99
“평소에 이런 일이 없더니만 어찌하여 이리도 서두르는가. 어디서 정든 사람과 만날 약속이라도 있단 말인가?”
101
“마님께서 물으시니, 어찌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102
하고는 주생과 인연을 맺은 내력을 자세히 아뢰었다. 승상 부인이 미처 말하기도 전에, 소녀가 빙그레 웃으며 배도를 흘겨보며 말했다.
103
“왜 진작 말하지 않고. 하마터면 하룻밤 즐거운 만남을 놓칠 뻔했군요.”
104
부인도 역시 크게 웃으며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105
주생은 재빨리 그 집을 빠져나와 한 발 앞서 배도의 집에 다다랐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코까지 드르렁 골며 자는 체했다.
106
배도는 이내 뒤따라 왔다. 주생이 누워 자는 것을 보고는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107
“낭군님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계시옵니까?”
109
夢入瑤臺彩雲裏 꿈결에 요대의 오색구름 속에서
110
九華帳裏夢仙娥 비단 휘장 안의 선아(仙娥)를 꿈꾸었네.
113
주생은 말로는 대답할 수 없어 다시 시로써 응답했다.
114
覺來却喜仙娥在 꿈 깨어보니 기쁘게도 선아가 예 있구나.
115
奈此滿堂花月何 여기 방안 가득한 꽃 같은 달을 어찌할꼬.
117
“그대가 내 선아(仙娥)가 아니겠소?”
118
하니, 이에 배도도 불쾌함이 누그러져 웃으며 답하기를,
119
“그렇다면 낭군님은 저의 선랑(仙郞)이 되는군요.”
120
이로부터는 서로를 선아, 선랑으로 부르게 되었다. 주생이 배도에게 늦게 온 사연을 물으니, 배도가 대답하기를,
121
“잔치가 파한 후, 다른 기생들은 다 돌아가게 하였더니 다만 소첩만을 머물게 하옵고, 따로 소저 선화(仙花)의 거처에 다시 작은 주안을 베푸시어 이리 늦었나이다.”
122
주생은 그제야 승상의 딸 이름을 알게 되었다. 또 자신도 모르게 흥미가 끌려서 한 마디 두 마디씩 선화에 대해 유도해 묻기 시작하였다.
124
“선화의 자는 방경(芳卿)이고 나이는 올해 열다섯인데. 용모가 빼어나 세속 사람 같지 않으며, 사곡(詞曲)을 잘 지을 뿐만 아니라 자수도 잘 놓아 저 같은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내지요. 어제는 풍입송사(風入松詞)의 노래에 맞춰 거문고를 뜯고자 했는데, 제가 음률을 안다고 하여 머물게 하고는 그 곡을 노래하게 했던 것입니다.”
128
玉窓花暖日遲遲 옥창에 꽃 피고 봄날은 더디기만 한데
129
院靜簾垂 고요한 집 안에는 주렴을 드렸도다.
130
沙頭彩鴨依斜照 모래가의 예쁜 오리 석양을 즐기고,
131
羨一雙對浴春池 짝지어 봄 못에서 멱 감으니 부럽기만 하구나.
132
柳外輕烟漠 버들 숲 안개는 가벼이 엉겼고,
133
烟中細柳綠線 휘늘어진 가지마다 안개 속에서 간들거리네.
134
美人睡起倚欄時 고운님은 잠깨어 난간에 기댔는데,
135
翠斂愁眉 얼굴 가득 수심이 가득하구나.
136
燕雛解語鶯聲老 제비 새끼 재잘거릴 때 꾀꼬리는 늙어가네,
137
恨韶華夢裏都衰 아까운 이내 청춘 꿈속에 시드는 한을,
138
把琵琶輕弄 비파 끌어안고 가볍게 튕기니,
139
曲中幽怨誰知 노래 속의 깊은 원망을 누가 알아주리.
140
배도는 한 구절도 빼지 않고 외어 보였다. 주생은 한 구절 한 구절 따라 외며 지은 사람에 끌려 들어가고 있었지만 짐짓 말하기를,
141
“이 노래에는 규방의 춘회(春懷)가 남김없이 드러나 있구려. 하지만 소약란(蘇若蘭) 정도의 뛰어난 경지에는 이르기는 힘들 것 같소. 또 내 선아가 꽃을 다듬고 옥을 깎는 재주만은 제 아무리 재덕이 높은 선화라 하더라도 당하지 못하리라.”
142
그러나 주생은 선화를 본 후로 배도에 대한 정이 점점 엷어만 갔다. 배도와 함께 할 때 억지로 웃음도 짓고 즐거운 체했으나, 마음엔 오직 선화 생각뿐이었다.
143
주생이 뜻을 이룰 기회가 온 듯하였다. 배도는 노 승상 댁에 자주 드나들다가 주생에 대한 글재주를 자랑하였기에, 승상 부중은 물론 전당에서 그의 이름을 모를 사람은 없을 정도였고, 부인 모녀의 존경은 더구나 특별하게 깊었다.
144
하루는 승상 부인이 어린 아들 국영(國英)을 불러 말하였다.
145
“네 나이 열두 살이라. 그런데도 아직 글을 배우지 못하고 있은즉, 후일이 염려되도다. 들으니 배도의 남편 주생이 학문과 도덕이 높은 선비라 하니, 네 가서 스승으로 모시고 배움을 청함이 좋으리라.”
146
부인의 명이 매우 엄한지라 국영은 감히 어길 수 없었다. 그날로 책을 옆에 끼고 주생의 앞으로 나아가 사정을 고하고 배우기를 청했다. 주생은 마음속으로 이제는 되었구나 하고 은근히 기뻐하면서도 겉치레로 거듭 사양하다가 마지못한 채하며 배움을 허락했다.
147
그러던 어느 날, 주생은 배도가 출타한 틈을 타 국영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148
“네가 여기로 오가면서 글을 배우는 것이 번거롭지 않느냐? 네 집에 빈 방이라도 있다면 내가 너의 집으로 옮겨가 가르치는 것이 좋을 듯싶구나. 너는 왕래하는 불편을 덜 것이요, 나는 너를 가르치는데 전력을 다할 수 있어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149
그러자 국영은 넙죽 절을 하면서 말하였다.,
151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 부인께 말씀드려 그날로 주생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다.
152
배도는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주생이 짐을 꾸리고 있는 지라 몹시 놀라며 말했다.
153
“아마도 선랑께서는 딴 마음이 있으신가 보군요. 왜 저를 버리시고 다른 곳으로 가십니까?”
154
“내 듣건대 승상 댁에는 삼만 권의 장서가 있다하오. 부인은 선공(先公)의 유품이라 함부로 내고 들이는 것을 싫어한다 하오. 그래서 그 집에 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책들을 읽어보려는 욕심으로 그러는 게오.”
155
“낭군이 학문에 힘쓰시는 것이야 저의 복입니다. 일개 아녀자가 어찌 막을 수 있으리오.”
157
그리하여 주생은 승상 댁으로 옮겨 갔다. 낮에는 국영과 같이 있었고, 저녁이면 집안의 문이란 문이 빈틈없이 빗장을 걸려 있었으므로 뜻을 이룰 기회는 전혀 없는 듯하였다. 선화를 보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158
주생이 갖은 궁리를 다하는 동안,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문득 주생은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159
‘본래 내가 이 집에 온 것은 선화를 어찌해 보고자 하였던 것인데, 이 봄이 다가도록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사람이 산다면 얼마를 산다고 황하의 물이 맑아지기만을 기다리겠는가. 차라리 어둔 밤에 담을 넘어 선화 방으로 뛰어드는 게 낫겠다. 다행히 일이 이루어지면 귀한 몸이 될 것이요, 실패한다 해도 죽기 밖에 더 하랴.’
160
이 날 저녁에는 마침 달이 없었다. 주생은 어려 겹의 담을 뛰어넘어 선화의 처소 앞에 이르렀다. 구부러진 큰 기둥이 있었고, 돌아드는 복도마다 주렴과 휘장이 겹겹이 드리워져 있었다.
161
주생은 한참 동안이나 동정을 살폈으나 다른 인적이 없었고 오직 선화 혼자만이 촛불을 밝히고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주생은 기둥사이에 바짝 엎드려 가만히 듣고 있었다. 선화는 악곡을 다 연주하고 나서는 이어서 소자첨(蘇子瞻)의 하신랑사(賀新郞詞)를 낮은 목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162
簾外誰來推繡戶 주렴 밖에 누가 비단 창을 두드리실까.
163
枉敎人夢斷瑤臺曲 선경에서 노래 듣는 꿈을 깨뜨리고 말았네.
164
又却是風敲竹 아, 이제 보니 바람이 대나무 두드리는 소리였네.
165
이것을 듣자, 주생은 주렴 밖에서 작은 소리로 화답하여 읊었다.
166
莫言風動竹 바람이 대나무를 친다 마오.
167
直是玉人來 정말로 그리운 사람 온 것을.
168
선화는 뜻밖의 소리에 놀란 나머지 이내 촛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어 누워 자는 척하고 있었다. 주생은 서슴없이 주렴을 젖히고 방안으로 들어와 선화의 잠자리에 파고들었다. 선화는 나이가 어린데다가 몸이 허약하여 남녀의 정사를 잘 견뎌내지를 못했다.
169
그러나 부드러운 애무에도 버들가지처럼 허리를 꺾으며, 조그만 입은 버들눈처럼 꽃잎처럼 교태롭게 벌어지고, 소리 내어 흐느끼다가도 낮게 속삭이기도 하며, 희미한 미소를 흘리다가도 짧은 신음을 토하기도 했다. 꿀벌이 꽃의 꿀을 찾아 쪼듯이 나비가 꽃가루를 빨아먹듯이, 그렇게 봄밤이 다 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주생의 온 몸과 마음은 한없이 무르녹았다.
170
문득 창밖의 나뭇가지에 앉은 꾀꼬리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나니 어느새 새벽의 안개가 뽀얗게 천지를 덮고 있었다. 주생은 깜짝 놀라 옷가지를 챙겨 입고 방을 급히 나갔다. 집과 연못은 고요했다. 선화는 주생을 배웅하고 방문을 닫으며 말했다.
171
“이제 가신 후로는 다시는 오지 마셔요. 이 비밀이 새어나간다면, 님의 목숨이 걱정됩니다.”
172
주생은 기가 꽉 막히고 목이 메어 급히 뒤돌아 달려들며 말했다.
173
“이제 겨우 좋은 인연을 이루었거늘 어찌 이렇게도 박대를 하는 거요?”
175
“아까 말은 농담입니다. 너무 노여워 마시고 저녁이 되면 다시 만나시지요.”
176
하고 선화는 밝아오는 하늘을 가리키며 안타까이 재촉하였다.
180
선화는 주생을 보내고 방으로 들어오자 ‘조하문효앵(早夏聞曉鶯)’이란 시를 지어 창밖에 걸었는데 이러했다.
181
漠漠輕陰雨後天 비가 내린 후 하늘은 막막하고 흐리기만 한데,
182
綠楊如畵草如姻 풀밭은 담요같고 푸른 버들은 그림을 이루었네.
183
春愁不逐春歸去 봄날의 수심은 봄을 따라 가지 않고,
184
又逐曉鶯來枕邊 새벽 꾀꼬리를 따라 베갯머리로 날아드네.
185
다음날 저녁이 되자 주생은 또 선화를 찾아갔다. 달 없는 밤, 담을 몇 개 뛰어넘었다. 선화의 거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담가의 나무그늘 아래에서 희미하게 신발 끄는 소리가 났다. 누구에게 들켰나 싶어 달아나려는데, 신을 끌던 사람이 청매실을 던져 돌아서려던 주생의 등을 맞혔다. 주생은 피할 곳도 없어 이제 죽었구나 하고 당황해 하면서도 되는대로 대숲 속에 납작 엎드렸다.
186
그런데 신 끌던 사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187
“주랑, 놀라지 마십시오. 그대의 앵앵(鶯鶯, 꾀꼬리)이 여기 있습니다.”
188
그제야 주생은 선화가 한 짓인 줄 알고 일어서서 선화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189
“왜 이렇게도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거요?”
190
하니, 선화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기를,
191
“제가 어찌 감히 낭군님을 놀라게 하였겠습니까. 낭군님께서 지레 겁을 먹었을 뿐입니다.”
193
“향을 훔치고 구슬을 도둑질하는데, 어찌 겁이 나지 않겠소.”
194
하고는 손을 마주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주생은 창문 위에 걸린 시구를 보았다.
195
마지막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196
“아름다운 선화가 무슨 근심이 있어 이런 시를 지었소?”
198
“여자의 몸이란 게 수심과 함께 태어나는지라, 만나지 못했을 때는 서로 만나기를 원하고, 만나면 서로 헤어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러니 어찌 여자의 몸으로서 근심이 없겠습니까. 하물며 낭군님은 절단지기(折檀之譏)를 어겼고, 저는 행로지욕(行露之辱)을 받았습니다. 불행히도 하루아침에 우리 정사의 자취가 발각된다면 친척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동리 사람들은 천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우리가 손을 잡고 해로하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의 일은 구름 속에 든 달과 잎사귀 속에 숨은 꽃과도 같아. 설사 한때는 즐겁다 할지라도, 그것이 오래가지 못할 테니 그 때는 어찌하겠습니까.”
199
선화는 말을 마치더니 원망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며 흐느꼈다.
200
주생은 선화의 눈물을 훔쳐 주며 위로해 말했다.
201
“대장부가 어찌 아녀자 하나를 얻지 못하겠소. 내 나중에 중매의 절차를 밟아 예법대로 그대를 맞이할 것이니 너무 걱정을 마오.”
202
이에 선화는 눈물을 거두며 고마워하며,
203
“낭군님의 말씀대로만 될 것 같으면, 아직 어린 이 몸이 비록 집안을 다스림에는 모자람이 있겠지만, 나물 캐어 정성껏 제사를 받드는 일만은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204
하고는 선화는 향합을 열더니 조그만 화장 거울을 꺼내어 둘로 깨뜨리고는, 한쪽은 자기가 갖고 다른 한쪽은 주생에게 주며,
205
“나중에 진실로 동방화촉(洞房華燭)의 밤을 기다렸다가, 그 날 밤에 다시 하나로 합치겠습니다.”
206
하고 또한 흰 비단 부채를 주면서 말하기를,
207
“이 두 물건은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제 마음의 간곡함을 나타내는 것이옵니다. 이 몸의 소원이니, 이 몸을 이 세상 끝까지 함께 할 아내로 생각하신다면 가을밤의 원한을 끼치지 않도록 해 주시고, 항아(姮娥)가 그림자를 잃을지라도 꼭 밝은 달빛을 어여삐 여겨 아껴 주십시오.”
208
이후로 그들은 밤이면 만나고 새벽이면 헤어졌는데 하룻밤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209
그러던 어느 날, 주생은 오랫동안 배도를 만나지 않았음을 생각하고 그녀가 이상히 여길까 두려웠다. 주생은 잠시 집에 다녀온다는 핑계로 배도에게로 갔다가 선화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밤사이 선화는 기다리다 못해 주생의 방에까지 갔다.
210
선화는 주생이 쓰던 향낭 주머니를 풀어보다가 시 두어 폭을 발견했다. 선화는 배도의 필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내 알아보았기에 치미는 화와 질투심을 억제치 못하였다.
211
선화는 책상 위의 붓을 들어 배도의 시를 까맣게 지워버리고는, 그 밑에다 ‘안아미(眼兒眉)의 노래’를 하나 지어 푸른 비단에 써서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 나가 버렸는데, 노래의 내용은 이러했다.
212
窓外疏影明復流 창밖 성긴 그림자 다시 밝게 흐르고,
213
斜月在高樓 조각달은 높은 누각 위에 떠 있네.
215
滿堂梧影 오동나무 그림자 집안 가득하니
216
夜靜人愁 적막한 밤은 시름에 젖게 하네.
217
此時蕩子無消息 지금 방탕한 님은 소식조차 없으니,
221
坐數更籌 앉아서 산가지만 헤아리고 또 헤아리네.
222
이튿날이 되자 주생이 돌아왔다. 선화는 질투하거나 원망스런 얼굴을 보이지도 않았고 또 주머니를 끌러 본 것도 말하지 않았기에, 주생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게 하지 않았다. 주생도 또한 이런 일을 몰랐기에, 낮에는 국영을 가르치고, 밤이면 예의 담을 몇 개씩 넘었다.
223
하루인가는 승상 부인이 주생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술을 대접하기로 하고, 배도마저 불러왔다. 부인은 주생의 가르침을 칭찬하고 또한 아들 글 가르치는데 수고를 한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손수 술을 따라 배도로 하여금 주생에게 잔을 권하게 했다.
224
이날 밤 주생이 술에 취해 정신없이 곯아떨어지자, 배도는 혼자 무료한지라 주생의 향낭을 우연히 열어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글이 먹으로 지워진 것을 보았다. 마음은 자못 언짢았고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아래 적어놓은 ‘안아미의 노래’를 보고는 선화의 필적이라는 것을 이내 알아보았다. 그뿐 아니라 이것으로 모든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225
배도는 크게 화가 나서 노래를 적은 비단조각을 소매 속에 감춘 다음 주머니를 전처럼 싸매 두고는 앉은 채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226
다음 날, 주생이 술에서 깨어나자 배도는 차분하게 물었다.
227
“낭군께서 이곳에서 무작정 묵으면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229
“국영이의 공부가 아직 다 끝나지 않은 때문이지 별 이유가 있겠소.”
231
“흥, 그렇겠지요. 처의 동생을 가르치는 것이니 정성을 다해 가르쳐야겠지요.”
234
배도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그럴수록 주생은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방바닥만 응시했다. 이에 배도는 그 노래를 적은 비단조각을 꺼내 주생의 면전에 던지며 말했다.
235
“이것이 담을 뛰어 들어가 남녀가 서로 놀아나는 것이요, 담 구멍을 통해 서로 들여다보며 희희낙락하는 것이 어찌 군자가 할 짓입니까? 지금 곧장 들어가 부인께 말씀 드리렵니다.”
237
주생은 황망히 그녀를 붙잡아 앉히고 사실대로 자백하고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히 빌면서 말하였다.
238
“선화는 나는 이미 백년해로를 굳게 언약한 사이인데, 어찌 차마 죽을 곳으로 몰아넣을 수 있겠소.”
240
“그러면 지금 바로 저와 같이 돌아갑시다. 그렇지 않으면 낭군님이 저와의 언약을 어긴 바에야 제가 무어라고 맹세를 지킬 것이오리까.”
242
주생은 어쩔 수 없이 부인에게 다른 핑계를 대고는 배도의 집으로 돌아갔다.
243
배도는 선화와의 관계를 알고 난 다음부터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는 주생을 선랑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주생은 자나 깨나 오로지 선화만을 생각하느라 몸은 나날이 여위어 갔다. 끝내는 병을 칭하고는 자리에 눕고 말았다.
244
그리고 스무 날이 흘렀을 무렵. 급작스레 국영이 병으로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이에 주생은 제물을 갖추고 영구 앞에 나아가 향을 사르고 전(奠)을 올렸다.
245
선화 역시 주생과 이별한 후 상사의 병이 깊어 일어나는 것도 시녀의 손을 빌어야 했다. 문득 아우의 장례에 주생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났다. 엷게 화장하고 흰 옷을 입고 주렴 안에 홀로 서서 전을 올리는 주생을 지켜보았다. 주생도 영전에 제를 마치고 나오다가 멀리 있는 선화를 발견하였다. 눈길로나마 마음을 보내면서 머리를 숙이고 머뭇거리다가 다시 보니, 선화는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246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 다시 몇 달이 지나갔다. 이번에는 배도마저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했다. 베도는 숨을 거두면서, 주생의 무릎을 베고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말했다.
247
“저는 하찮은 출신으로 소나무 그늘 덕분으로 살아오다가 아름다운 청춘이 다 피기도 전에 시들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제 낭군님과 영원히 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비단 옷이며 피리며 거문고도 소용이 없어 이제 끝을 맺습니다. 낭군님과 해로하고자 했던 지난날의 소원도 이미 어그러지고 말았으니, 다만 이 몸이 바라옵기는 죽은 후에라도 낭군님께선 선화를 취하여 배필로 삼으시옵소서. 그리고 내 죽은 뒤 시신은 낭군님이 오가는 길가에라도 묻어 주신다면 저는 죽었을지라도 살아 있는 것처럼 여기고, 편안히 눈을 감겠습니다.”
248
배도는 말을 마치자말자 기절하더니 한참 만에 다시 깨어나 주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249
“주랑이여. 부디 몸을 소중히 하소서. 몸을 소중히 하소서.”
250
이 말을 연이어 몇 번하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251
주생은 크게 통곡하고는 배도의 유언대로 시신을 호산(湖山)의 길가에다 고이 묻어 주었으니 제문은 다음과 같다.
252
모월 오일에 매천거사(梅川居士)는 초황(蕉黃)과 여단(荔丹)을 제물을 올리고 배랑의 혼백을 위로하여 제를 올리노라.
253
꽃처럼 아름답고 달처럼 아리따웠던 그대는, 배우지 않아도 절로 춤을 추는 장대(章臺)의 버들인 양, 춤 솜씨는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와 같았고, 눈물 머금은 붉은 얼굴의 고운 자태는 골짜기의 그윽한 난초를 가져 온 듯 하였노라.
254
회문시(回文詩)에 있어서는 소약란(蘇若蘭)이 홀로 뛰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았으며, 사(詞)에 있어서도 가운화(賈蕓華)조차 명성을 다투기 어려웠노라. 이름은 비록 기적에 들었어도 그 뜻만은 그윽했고 정절을 지켰도다.
255
여기 주 아무개가 외로운 부평초같은 신세로 바람에 날리는 버들 솜처럼, 방탕한 마음을 갖고 그대를 유혹하여 서로 사랑하여 길이 잊지 않기로 기약까지 두었구나. 교교한 달밤에 굳은 맹세할 적에는 창문엔 구름이 가리었고 화원에는 봄빛이 화창했도다. 그 사이에 함께 좋은 술을 마시며 노래하기가 그 몇 번이었던가.
256
아아, 슬프도다. 때 가고 일 지나 지극한 즐거움이 슬픔을 자아낼 줄 그 뉘라서 알았으리오. 비취(翡翠) 이불이 따뜻해지기도 전에 원앙의 단꿈이 먼저 깨어졌구나. 즐거움은 구름같이 사라지고 은정(恩情)은 비같이 흩어져 비단치마 바라보니 색은 이미 변했도다. 옥패(玉佩)에는 소리가 나지 않고, 한 조각 노호(魯縞)만이 아직도 향기롭구나. 붉은 거문고 줄과 그대의 푸른 저고리만이 은상 위에 헛되이 버려져 있고, 남교(藍橋)의 옛집은 홍랑(紅娘)에게 내맡겼도다.
257
오호라, 가인(佳人)은 얻기 어렵고 덕음(德音)은 잊기 어렵도다. 옥 같은 맑은 자태, 꽃다운 고운 맵시가 눈에 선하도다. 하늘과 땅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니 망망한 이 한을 어이하며, 타향에서 짝을 잃고 그 누굴 믿을 손가.
258
이제 노를 저어 온 길을 되돌아가려하나 호수와 바다는 넓고 험하며 세월은 덧없이 흐르기만 할 것이니, 천만리 머나먼 길을 외로운 조각배가 가고 간들 무엇을 의지하랴. 뒷날 그대의 넋 앞에 와 울겠다고 기약하기는 어렵도다. 산에는 사라진 구름이 다시 돌아오고, 강물은 밀렸다가 썰물 되어 오지만 한번 간 그대는 다시 오지 못하누나. 내 이제 그대를 마지막 하직하며 술로써 제사 지내고 글로써 이내 정을 나타내도다. 바람결에 부쳐 영결하노니, 그대의 혼이여 부디 흠향(歆饗)하시라.
259
주생은 제사를 마치고는 두 시비와 이별하며 말했다.
260
“너희들은 집을 잘 간수하여라. 내 후일 성공해 돌아오면 다시 너희들을 돌봐 주마.”
261
“저희들은 주인아씨를 어머니 같이 우러러 받들었고, 아씨도 저희를 자식같이 사랑해 주시었습니다. 이제 저희가 박복하여 아씨를 일찍 여의었으니, 오직 믿고 슬픔을 달랠 길은 서방님 뿐이온데, 이제 서방님마저 가신다니 저희들은 누구를 의지하고 사오리까.”
262
하고는 시비들은 더욱 섧게 울었다. 주생은 재삼 시비들을 달래고는 눈물을 뿌리며 배에 올랐다. 그러나 차마 노를 저을 수가 없었다.
263
이날 밤 주생은 수홍교 밑에서 묵으며 멀리 선화의 집을 바라보니 은촛대의 불빛만이 숲 속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주생은 이제 좋은 시절은 이미 다 지나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만날 인연이 끊어졌음을 슬퍼하며 ‘장상사(長相思)’의 한 구절을 읊었다.
264
花滿烟 柳滿烟 꽃밭에도 자욱한 안개 버들 숲에도 자욱한 안개
265
音信初憑春色傳 비로소 봄 내음이 전해지는데,
266
綠簾深處眠 늘어진 버들 숲 깊은 곳에서 날을 새며.
267
好因緣 惡因緣 좋은 인연인지 모진 인연인지,
268
曉院銀缸已惘然 새벽녘 님의 방 불빛만 넋 잃고 바라보다,
269
歸帆雲水邊 돌아가는 뱃길에 구름은 물 끝으로 흘러가네.
270
주생은 날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번에 떠나고 나면 선화를 영영 이별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머물자니 배도도 가고 국영도 또한 죽었으니 의지할 데라곤 없었다. 백 갈래로 생각해 보았으나 한 가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벌써 날은 훤히 밝아왔다. 주생은 하는 수없이 노를 저어 물길을 떠났다. 선화의 집이며 배도의 묘는 점점 아득해졌고, 산굽이를 돌아 강이 굽어진 곳에 이르니 홀연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271
주생의 외가 쪽에 장씨 노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호주(湖州)의 갑부였을 뿐만 아니라 친척과도 화목하기로도 이름나 있었다. 주생은 그리로 찾아가 의지하기로 했다. 장 노인 집에서는 주생을 지극하게 대접했다. 주생은 비록 몸은 편안하였으나, 선화를 생각하는 정은 갈수록 더해만 가고 잠 못 이루고 몸을 뒤척거리는 사이에 세월은 흘러 다시 봄을 맞았다. 이 해가 바로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이었다.
272
장 노인은 주생이 나날이 여위어 가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겨 까닭을 물었다. 주생은 감히 감추지 못하고 사실대로 아뢰었다.
274
“네 마음에 맺힌 한이 있었다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내 안사람과 노 승상과는 동성이어서 대대로 긴밀히 지냈느니라. 내 너를 위해 힘써보겠으니 염려하지 마라.”
275
하고는 다음 날, 장 노인은 부인을 시켜 편지를 써, 늙은 하인을 전당으로 보내 혼인을 의논했다.
276
한편 전당의 선화 역시 주생과 이별한 후 날이면 날마다 자리에 누워있어 나날이 여위어만 갔다. 승상 부인도 선화가 주생을 사모하다 얻은 병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뜻을 이루어 주려해도, 주생은 벌써 떠나 가버린 후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갑작스런 노부인의 편지를 받고는 온 집안이 놀라며 기뻐했다. 선화도 누워 있다가 억지로 일어나서 머리도 빗고 세수도 하며 몸단장을 하는 등 옛날처럼 회복되어 갔다. 이에 혼인날을 그 해 9월로 잡았다.
277
주생은 날마다 포구로 나가 심부름나간 늙은 종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흐레가 되던 날이었다. 그 늙은 종이 돌아와 정혼의 뜻을 전하고 더욱이 선화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주생은 급히 편지를 뜯어보니 분향냄새가 그윽한데 편지지에는 눈물 자국이 이리저리 번져있었다. 그는 선화의 애원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278
박복한 몸 선화는 목욕재계하고 주랑께 올리옵니다. 이 몸이 본래 약질인지라 깊은 규방에서 몸을 다스리고 있사옵니다.
279
늘 꽃다운 시절 수이 감을 근심했고, 피어나는 욕정에 운우(雲雨)의 정을 품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스스로 한숨을 쉬다가도 사람을 만나면 부끄러움 일어나지만, 길가의 버들가지를 보면 욕정이 꽃 피듯 일어나고, 나뭇가지의 꾀꼬리 소리를 들으면 또한 새벽의 욕망에 몽롱해지곤 했었습니다.
280
그 어느 날 고운 나비가 소식을 전하며 산새가 길을 이끌고, 동쪽 하늘의 달이 낭군님을 문까지 이끌어주어 낭군님께서 담을 넘어 오셨는데, 제가 어찌 몸을 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선약(仙藥)을 달이려고 하계에 내려와 일은 마쳤지만 옥경(玉京)에 올라가지 못해 거울을 둘로 나누어 한가지로 영원한 맹세를 했던 것입니다.
281
그러던 것이 호사다마하여 호시절을 다 놓치고 말았습니다. 마음만은 사랑하기 그지없으나 몸은 점점 여위어짐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낭군님이 한번 가신 뒤 봄은 다시 왔으나 소식이 없어, 이화(梨花)에 비 내리고 황혼 빛이 문을 비추어 잠 못 이뤄 전전하옵고, 낭군님 생각으로 자꾸만 여위어질 뿐입니다. 비단 장막은 낭군님이 없어 주야로 쓸쓸하옵고, 촛불을 밝힐 일 없으니 저녁으로 방안은 침침할 따름입니다.
282
하룻밤에 몸 망치고 백년의 정을 품으매 이미 시들어져 가는 몸이지만 낭군님만을 생각합니다. 밤이면 달을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낭군님 생각으로 간장은 녹아나고 만나고 싶은 마음 간절하기 그지없으나 갈 수 없는 신세이옵니다. 만약 이미 이런 일이 있을 줄을 알았던들 살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월로(月老)가 소식을 보내오매 가일(佳日)이 기다려지오나 홀로 있으니 초조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병은 나날이 깊어져 꽃 같은 얼굴은 광채가 사라지고 구름 같은 머리에는 빛이 없어졌습니다. 이후 낭군님이 저를 본다 할지라도 다시는 전처럼 은정이 솟지 않을 것입니다.
283
이제 와서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사오나, 다만 품고 있는 정성을 다하지 못한 채 문득 아침 이슬과 같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멀고 먼 황천길을 가는 넋이 한이 무궁할 것이 두렵습니다. 이제는 아침에 낭군을 뵈옵고 저의 기구한 정을 호소나 할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원이 없겠나이다. 산천은 첩첩하여 먼 구름 밑에 떨어져 있는 거리를 편지 전할 사람이 빈번히 다닐 수도 없는 일이옵니다.
284
이제 멀리 목을 빼어 바라보니 뼈는 녹고 넋은 날 뿐입니다. 호주의 땅은 기후가 좋지 못하여 질병이 많습니다. 낭군님은 자중하시어 부디 몸조심하옵소서. 끝으로 이 정겨운 편지에 할 말을 다하지 못한 것은 돌아가는 기러기에 부탁하여 보내겠습니다.」
286
편지를 읽고 난 주생은 꿈꾸다 깨어난 것만 같고, 술에 취했다 정신이 난 것만 같았다. 슬프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그러나 오는 구월을 손꼽아 보니 아직도 아득했다.
287
그래서 결혼할 날짜를 좀 더 앞당겨 줄 것을 장 노인께 요청하여 하인을 다시 전당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에 주생은 선화의 편지에 화답하는 글을 썼다.
289
삼생(三生)의 인연이 깊어 천릿길에서 온 편지를 받았소. 사물을 보고 사람을 생각하니 어찌 한 때인들 잊을 수 있으리오.
290
지난날 나는 그대의 집에 뛰어들었소. 몸을 경림(瓊林)에 의탁하였다가 춘심이 발동하여 애정을 금하지 못하고 꽃 속에서 맹약하고 달 아래 인연을 맺었소. 그때는 외람되게도 많은 은정을 입고 굳은 맹세를 하였소.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서는 깊은 은혜를 갚을 도리가 없다고 여겼소.
291
인간의 호사에 대한 조물주의 시샘으로 하룻밤의 이별이 해를 넘겨 원한이 되었소. 이렇게 될 줄 어찌 알았으리오. 피차 멀리 떨어진 데다 산천이 가로막혔으니, 하늘가에서 무한히 슬퍼하는 이 몸은 오(吳)나라 구름 속에서 우는 기러기요, 초(楚)나라의 산골짜기에서 우는 원숭이 같은 신세가 되었소. 이제 친척의 집에서 홀로 잠을 자니, 외롭고 쓸쓸하여 목석이 아니고는 어찌 섧지 않으리오.
292
아, 아름다운 그대여. 이별한 후의 이 심정은 그대만이 알 수 있으리라. 옛사람은 하루를 못 만나면 삼 년과도 같다 했은 즉, 이것으로 미룬다면 구십 년이나 되오. 만약 천고마비의 가을날에 나가서 가일을 정한다면, 차라리 황산(荒山)에 시들어진 풀 속에서 나를 찾는 것만 못하리다.
293
정을 다 담지 못하고 말을 다하지 못했는데 편지지에 엎드린 채 목이 메어 눈물이 나니 더 할 말을 모르겠소.」
294
주생은 이렇게 편지를 써놓고는 미처 부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조선이 왜적의 침략을 받고 매우 다급하게 천자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295
황제는 조선이 지극히 중국을 섬기므로 불가불 구원을 해야 했고, 또 조선이 무너지면 압록강 서부지방은 편안한 날이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항차 한 왕실의 존망이 달려 있기에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에게 군대를 통솔하여 적을 무찌르도록 어명이 내렸다.
296
이때 행인사행인(行人司行人)인 설번(薛藩)이 조선에서 돌아와 황제께 아뢰기를,
297
“북쪽 사람들은 오랑캐를 잘 방어하고 남쪽 사람들은 왜적을 잘 방어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전쟁은 남쪽 병사들이 아니면 안되겠습니다.”
298
이에 황제는 호남(湖南)과 절강(浙江)의 여러 고을에서 다급하게 병사를 징발하였다.
299
이 때 유격장군 모씨가 본래부터 주생을 잘 알던 지라, 주생을 불러 서기(書記)의 임무를 맡겼다. 주생은 한사코 사양을 했으나 장군이 들어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서기의 임무를 맡았다. 주생이 조선에 와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에 올라 고풍 칠언시를 지었는데, 그 전편은 잃어버리고 다만 결구는 다음과 같았다.
300
愁來更上江上樓 근심으로 떠나와 강가의 누각에 다시 오르니,
301
樓外靑山多幾許 누각 너머 푸른 산들은 몇 겹이나 되는고?
302
也能遮我望鄕眼 산들이 고향 바라보는 내 눈이야 가릴지라도,
303
不能隔斷愁來路 근심으로 떠나온 고향 길은 끊을 수 없으리.
304
이듬해 계사년(癸巳年) 봄이었다. 명군은 왜적을 대파하여 경상도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주생은 밤낮으로 선화를 생각하여 마침내 병이 중해졌다. 군대를 따라 남하하지 못하고 개성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305
나는 마침 일이 있어 개성에 갔다가 객사에서 우연히 주생을 만났게 되었는데, 말은 서로 통하지 않았지만 글로써 서로 마음을 통할 수가 있었다. 주생은 내가 글을 안다고 해서 나를 매우 극진하게 대우하였는데, 내가 병이 나게 된 까닭을 묻자 주생은 대답은 피한 채 추연한 얼굴로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 날은 마침 비가 내려 나는 주생과 함께 등불을 밝히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306
이때 주생이 답사행(踏沙行) 한 수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307
隻影無憑 외로운 그림자 의지할 곳 없으니,
308
離懷難吐 이별의 아픔 하소연할 수도 없네,
309
歸鴻暗暗連江樹 돌아가는 기러기 강가 숲은 벌써 어두워져오니.
310
旅窓殘燭已驚心 여관 희미한 등불에도 이미 마음은 섬뜩하건만,
311
可堪更廳黃昏雨 다시 황혼에 내리는 빗소리를 어찌 감당하리오.
314
玉樓珠箔今何許 옥루의 구슬주렴은 어디쯤에 있는고?
315
孤踪願作水上萍 외로운 이 몸 물위의 부평초처럼 흘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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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夜流向吳江去 하룻밤 사이 오강에 닿을 수만 있다면.
317
나는 이 사곡(詞曲)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재삼 읽어가다가 가사 속에 담긴 사연을 헤아려내자, 주생은 이에 감히 속이지 못하고 앞에 얘기한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이야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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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다른 사람들에게는 얘기하지 마시기를 바랄 뿐이라.”
320
나는 그의 아름다운 시와 노래와 더불어 그들의 기이한 만남에 탄식하고 그들의 아름다운 기약이 서글프기만 하였다. 그래서 물러나와 붓을 잡고 이처럼 이야기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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