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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영 (經營) ◈
◇ 3 ◇
카탈로그   목차 (총 : 3권)     이전 3권 ▶마지막
1940
김남천
1
이르게 나온다고 약속은 하였지만, 이러구러 집을 나온 것은 여느 때나 다름 없는 오전 아홉 시였다. 세탁해 두었던 시형의 여름 양복과 내의를 싸서 구두약과 함께 옆구리에 끼고 아파트에 이른 것은 반 시간이 넘어서였다. 잠시 사무실에 들렸다가 시형의 방으로 올라가 보니, 그는 잠옷 바람으로 강 영감이 급사와 함께 날라다 준 것이라고 책을 풀어서 서가에 꽂고 있었다.
 
2
"제가 차입하지 않은 것두 많은가 보."
 
3
하고 무경은 그의 뒤에 가서 본다.
 
4
"어머니가 가끔 부쳐 준 걸루 그 안에서 구입해 보았으니까……"
 
5
그리고는 마침 농이를 풀다가 맨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암파 문고를 툭툭 먼지를 털어서 보이며,
 
6
"그 안에서 읽은 것 중 내가 가장 감격한 책이 이게요."
 
7
하고 허리를 폈다. 무경은 아무 말도 아니하고 책을 바아 들었드나.
 
8
"아침을 잡소서야지. 그리구 내의허구 양복을 가져왔으니까 이걸루 바꾸어 입으시구, 인제 의사를 청해다 진찰을 받으시구, 그러면 어머니두 보러 나오실 거니께……"
 
9
"아침은 강 영감이 안내해서 식당에 내려가 먹었구, 어머닌 내가 찾아가 뵈어야지."
 
10
"으응, 인제 나오신댔는데……"
 
11
보꾸러미를 탁자 위에 놓은 뒤에야 의자에 손을 짚고 서서 무경은 시형이가 준 책을 보았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辨明)>, <크리톤>이란 책이었다. 무경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들었을 뿐으로, 책의 내용은 알지 못하므로, 그대로 표지와 서문 같은 것을 들춰 보고 있는데 오시형은 잠옷 채로 침상에 앉아서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12
"소크라테스의 사정이 나의 그 때 환경과 비슷한 탓이라구두 말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글의 내용에서 오는 감명은 그런 것과는 달리, 나의 환경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하는 데 있는 것 같기두 해. 읽고 나서 나의 정신이 나의 환경으로 다시 돌아오면, 오히려 소크라테스의 그 훌륭한 태도는 나의 경우에는 직선적으로 통하지 않는 것 같애서 불쾌한 느낌까지 주었으니까……"
 
13
물론 무경에게는 이해되진 않는 독백이었다. 무어라고 대꾸할까를 몰라 멍청하고 서 있으려니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옷 보통이를 끌렀다.
 
14
"허 허――오래간만에 만나는 그리운 양복이로구나."
 
15
하고 그는 감개무량하게 나프탈린 냄새가 풍기는 양복을 펼쳐 안았다. 그것을 잠시 보고 있다가 무경은 경찰서에 신원 보증인을 통지한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파트의 주인은 이 집에 살지 않으므로, 대개 언제나 이 아파트에서 잠자리를 갖는 강 영감에게 부탁하여 보증인이 되어 달랬다. 그것을 경찰서에 알린 뒤에 다시 그는 오시형의 방으로 올라왔다.
 
16
시형은 셔츠 밑에 양복 바지를 입고 다시 서가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경은 신원 보증인에 대해서 결정한 대로를 알리고 구두약을 가져다가 꼬드라진 꺼먼 구두를 닦기 시작하였다.
 
17
"그래, 그 안에서 그 책을 다 읽었수?"
 
18
하고 솔질을 하면서 무경이가 묻는다.
 
19
"어째 ! 절반이나. 대부분이 불허가니까……"
 
20
"불허가?"
 
21
하고 깜짝 놀라기나 한 듯이 무경은 구두 닦던 손을 멈칫하니 붙이고 시형이 편을 본다.
 
22
"경제 방면 서적은 전부가 불허가지."
 
23
그렇게 대답하면서 시형은 다시 일어나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24
"그러나 생각해 본면 다행이야. 경제학에 관한 서적을 읽었다면 생각을 돌려 볼 길이 없었을런지 모르니까. 그런 의미에서 경제학은 나에게 있어서는 변통성 없는 완고한 학문인지두 모르지. 이렇게 무경 씨 얼굴을 명랑한 여름날 아침에 다시 볼 수 있는 건 철학의 덕분인 것이 사실이니까."
 
25
시형의 말하는 투는 보통 대화조가 아니고 어딘가 연설 같은 느낌을 주는 어조였다.
 
26
"경제학과 철학과의 차이가 있을라구요. 학문이야 같을 텐데……"
 
27
하고 무경은 제 의견을 나직이 말해 보았으나 시형은 그러한 것에 개의치는 않고 다시 제 생각을 펼쳐 보았다.
 
28
"내 자신이 서 있던 세계사관(世界史觀)뿐 아니라, 통틀어 구라파적인 세계사가들이 발판으로 했던 사관은 세계 일원론(世界一元論)이라구두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경우에 동양 세계는 서양 세계와 이념(理念)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 세계는 대체루 세계사의 전사(前史)와 같은 취급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었죠. 종교사관이나 정신사관뿐 아니라 유물사관의 입장도 이러한 전제로부터 출발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동야이란 하등의 역사적 세계도 아니었고 그저 편의적으로 부르는 하나의 지리적 개념(地理的槪念)에 불과했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세계 일원론적인 입장을 떠나서, 역사적 세계는 각각 고유한 세계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있고 증명할 수도 있지 않은가. 현대의 세계사의 성립을 이러한 각도에서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가졌던 세계사관에 대해서 중대한 번성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
 
29
물론 남이 말하는데 구두를 닦고 있을 수도 없어서, 그대로 귀를 기울이고는 있으나 무경으로선 시형의 하는 말을 어떻다고 생각할 준비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삐끔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형은 혼자서 저 자신에게 타이르기나 하듯이 창문을 바라보며 이야기에 열을 올려 제 이론을 전개해 보고 있었다.
 
30
"가령 동양이라든가 서양이라든가 하는 개념두 로마의 세계에서 성립된 것이고, 또 고대니, 중세니, 근세니 하는 특수한 시대 구분두 근세의 구라파 사학에서 성립된 구분이니까, 이런 것에서 떠나서 동양과 동양 세계를 다원 사관의 입장에서 새로이
 
31
반성하구 성립시킬 필요가 있지 않은가. 이것은 동양인의 학문적인 사명입니다. 동양인 학도가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의무입니다. "
 
32
그는 말을 뚝 끊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께로 가서 오래간만에 맛보는 흥분을 고요히 식히고 있다. 무경은 구두를 신장 안에 넣고 약과 솔을 치운 뒤에 수도에 손을 씻었다.
 
33
"의사를 부르지요. 너무 흥분하셔두 몸에 좋지 않을 텐데요……"
 
34
하고 말하니까 시형은 몸을 돌리고 소리 나는 편을 향하였다. 그러나 무경의 물음에 대답하려 하지 않고 그는 창백해진 낯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35
"독일이 파란, 노르웨이, 덴마크를 무찌르고 화란, 백의이을 정복하고 불란서를 항복시켰다는 건 결코 작은 사실이 아니니까. 이러한 세계사의 변동에 제휴해서 동양인두 동양인다운 자각이 있어야 할 거야. "
 
36
그리고는 침대로 가서 뭄을 눕히었다.
 
37
무경은 무어라고 말할까를 몰랐다. 본시부터 오시형이가 어떠한 사상을 가지든 그것에 간섭할 생각이나 준비는 저에게는 없다고 생각하여 왔다. 그에게는 오직 안에 있는 사람을 건강한 채로 하루라도 이르게 구하여 내는 것만이 임무라고 생각키어졌었다. 그리니까 지금 오시형의 열의 있는 독백을 들어도 그것에 관하여 이렇다할 의견을 건네려 하진 않았다.
 
38
그러고 있는데 도어에 노크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가 들어왔다.
 
39
시형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양복 윗저고리를 두리고 무릎을 꺽어 절을 하였다.
 
40
"그만두시게. 고단한데 안 허믄 어떤가. 그래, 그 안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었나. 어데 몸이 과히 말짼 데나 없나."
 
41
"네. 건강은 아무렇지두 않은 모양입니다. 밖에 계신 분들께 너무 폐를 끼치구 근심을 시켜서 되려……"
 
42
"온 별말을 다 허시지. 이러니저리니 해도 안에서 고생하는 사람에게다 대겠나."
 
43
무경은 바륵바륵 웃으면서 어머니와 시형의 옆에 서 있다가,
 
44
"어머니, 그게 뭐유?"
 
45
하고 손에 들은 것을 물어 본다.
 
46
"이거 말이냐? 지금 한약국에 들려서 약을 한 제 지어 갖구 오는 길이다. 건강이 아무렇지 않다구 해두 그대루 두어서야 쓰겠니. 몸을 보허구 그래야지. 그리고 아침은 일러서 헐 수 없다 쳐두 저녁일랑은 집에 와서 먹게 하구, 약두 여기 가스 불이 있다군 하지만 그걸루 어데 대릴 수 있겠니. 다리가 처음은 고단하겠지만 내일부터래두 집에 와서 약을 자시구 끼니두 별건 없지만 집에서 자시게 해야지……남의 눈두 있구 해서 한 집에 있진 못하지만 운동삼아서……그렇지 않니, 무경아?"
 
47
시형이가 황송한 낯으로 사양의 말을 건네려 하는데 무경은 이내 어머니의 말을 받아서,
 
48
"참, 그렇게 하시지. 아침두 전 일러서 시간에 대어 먹지만 오 선생님은 어머님이랑 같이 좀 늦게 잡숫게 하시지. 그리구 거기서 책이래두 보시면서 노시다가 점심 잡숫구, 약 잡숫구, 저녁 잡숫구 밤에만 여기 와서 주무시지……그렇게 합시다. 며칠은 다리가 아퍼서 걸어 다니시기 힘들 테니까 오늘은 그저요 근방에나 조꼼씩 걸어 보시구……"
 
49
저희들끼리 사귄 사이라고 불만해했고, 그 다음은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꺼려했고, 그가 법망에 걸려 들어간 때에는 더욱더 완고하게 무경의 생각을 탓하였다. 그러나 다른 일로는 어머니의 성미에 거역한 적이 없는 무경이도 이것만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차입을 대기 위하여 처음으로 직업 전선에 나서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얼마간 모녀 새에는 의까지 상하였었다. 그러나 무경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밥과 옷은 여전히 집에서 얻어 먹고 입고, 제가 버는 봉급으론 오시형을 위하여 책과 밥을 차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를 이 년――드디어 어머니는 딸의 열성에 탄복한 것이다.
 
50
어쨌든 어머니의 오늘의 태도를 무경은 감동된 낯으로 바라 보았다. 이러한 날이 꼭 찾아올 것을 믿기는 하였지마는 그 동안 제가 겪은 곤욕이 큰 만큼, 지금 눈앞에 그러한 장면을 친히 경험하고 있으면, 그이 가슴 속엔 찌릿한 전류가 흐르도록 기쁨은 감격을 자아내는 것이다.
 
51
"오정에 너 나올 수 있건 어데서 같이들 점심이래두 먹자. 요 근방엔 어데 식당 같은 게 없니?"
 
52
어머니는 시형의 방을 나가면서 딸에게 말하였다. 무경이도 문지방에 선 채,
 
53
"이 부근에야 무어 벤벤한게 있나요. 종로나 본정으루 나가야지. 그럼 내 자동차루던가 전차루던가 모시구 나가께, 어데서 시간 약속하구 기다리시구료."
 
54
그래서 결국 본정 입구에 잇는 양식당으로 시간을 정하고 그들은 방을 나갔다. 방을 나갈 때 시형은 종이 조각에 적은 것을 주면서,
 
55
"전보 한 장 급사 시켜서 쳐 주시오. 집에, 나왔다는 소기이나 알려야죠."
 
56
하고 무경에게 말하였다. 무경은 어머니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57
"틈 나는 대루 박 의사를 좀 와 달랠까요? 그렇잖으면 데리구 나가서 뵈이든지."
 
58
딸이 어머니에게 의사의 진찰을 상의하니까,
 
59
"사정을 아니까 와 달래두 오실 거다."
 
60
하고 어머니는 대답하였다.
 
61
일이 밀려서 다섯 시를 칠 때까지 잡념에 머리를 쓰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무경은 점심을 먹고 돌아와서는 오시형이를 삼층으로 데려다주고 줄곧 사무에 골돌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이 끝나고 다른 일로 손을 옮길 때마다, 자꾸만 어머니의 약속이 머리를 스치군 하는 것은 어떻게 뿌리쳐 버릴 수도 없었다. 일이 바빠서 이내 머리를 털어 버리고 장부 정리와 숫자 계산에 정신을 묻었지마는 다섯 시를 치는 소리에 장부를 접고 고개를 들면 다시 어머니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62
유쾌하고도 가벼운 흥분 속에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시형이를 앞세워 놓은 뒤에서 어머니는 무경에게 나직이 귀뜸하듯이 말하였던 것이다.
 
63
"너, 오늘 몇 시에 나올 수 있니?"
 
64
"네 시면 나오지만 일이 좀 밀려서 다섯 시나 넘어야 퇴근 할거에요."
 
65
"그럼, 다섯 시 반까지 경성 호텔루 좀 나오너라. 이야기할 것두 있구……"
 
66
"혼자서?"
 
67
"응, 너 혼자만 나오너라."
 
68
이야기는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섯 시 치는 소리를 듣고 장부를 접어 꽂은 뒤에도, 어머니의 이야기란 것을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호텔로 나오라는 것일까. 저녁이나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하자는 뜻인 건 추측할 수 있지마는, 점심에 외식을 하였는데 다시 또 저녁을 사 준다는 것도 이상하고, 단 둘이 언제나 집에서 만나 조용히 이야기 할 수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장소를 밖으로 잡은 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오시형이와의 결혼에 대해서 무슨 색다른 이야기라든가 의논이 있는 것일까. 도무지 어인 영문인 걸 상상할 수가 없었다.
 
69
"밖에 일이 있어서 나가는데 저녁은 오늘까지만 이 식당에서 잡수세요. 양식보다두 저녁 정식을 화식을 잘 하니까 화식 정식으로 잡수세요. 내 일곱 시나 여덟 시경에 들리께……"
 
70
시형에겐 그렇게 말해 놓고 무경은 아파트를 나와 전차를 탔다. 호텔에 이르니까 로비에 어머니 혼자 앉아 있었다. 무경은 그의 앞에 가서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힐끗 어머니의 표정을 엿보면서 의자에 앉았다.
 
71
"오신 데 오래유?"
 
72
하고 물으면서 다시 어머니의 낯빛을 살피니까, 시계를 쳐다보고는,
 
73
"응, 조금 지냈다."
 
74
그리고는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식당으로 들어가잔 말도 없이 그래도 낯을 좀 외면하고 멍청하니 유리창을 바라보고 앉았는 것이다. 어려운 말을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이 항용 가지는, 자리 잡히지 않은 태도였다. 얼굴엔 무표정을 의장하지만 속에는 여러 가지 궁리가 오락가락하고 초조한 조바심까지 문풍지처럼 바람에 떨고 있는 것이다.
 
75
무경이는 질식할 듯한 시간을 오래 끌고 나가기가 안타까워졌다. 무슨 어렵고 놀라운 이야기라도 쏟아져 나오기를 기다리는 긴장된 자세가 오랫동안 계속해 나아가면 신경은 피곤에 시달려서 관자놀이께가 쑤시는 것 같은 착각까지 느껴진다. 그는 드디어 결심한 듯이 낯을 들고,
 
76
"무슨 말인지 어서 하시구려."
 
77
하고 어머니를 쳐다본다.
 
78
"응?"
 
79
하고 낯을 돌렸으나, 다시,
 
80
"응, 인제 좀 있다가……"
 
81
그리고는 무경의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초리를 피하여 낯을 외면한다. 그러나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어머니는 결심의 표정으로 낯빛이 해쓱해진 얼굴을 다시금 무경에게로 돌리면서,
 
82
"이야기랄 건 별로 없구, 어째피 네게 알려야 할 일도 있구……그래서 오늘 누굴 네게 소개 할랸다."
 
83
하고 더듬더듬 말하였다. 이야기를 끝마치고 난 어머니의 얼굴에 흥분 탓인지 혹은 부끄러움 때문인지 붉은 혈조가 볼편과 눈가상에 엷게 떠오른 것같이 보여졌다. 이야기한 것을 따지자면 내용은 분명치 않았으나, 그런 것을 천착해 볼 겨를도 없이, 어머니의 태도와 표정에서 무경이는 대번에 사건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딱이 제 머릿속에 깊이 의식하지는 못했을 때에, 유리 밖으로 층계를 올라오고 있는 한 사람의 신사를 발견한 어머니는 두 눈은 벌써 당황의 빛이 농후해진 표정 속에서 적이 침착성을 잃고 있는 것처럼 무경에겐 느껴졌다.
 
84
아래층 클로크에 모자와 단장을 맡겼는지, 맨머리 바람에 바른손으로 단장 들던 버릇으로 부채를 약간 치켜서 들고 흰 양복 입은 신사는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까이 왔다. 기품 있게 갈라 재운 머리는 짧게 다듬은 수염과 함께 희끈희끈 흰 것이 섞여 있었다. 무경은 얼른 그의 부채를 보았다.
 
85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오십을 넘어 얼마가 되었을 점잖은 사내는,
 
86
"오래 기다리셨지요."
 
87
하고 미소를 띄어 어머니께 인사한 뒤에 다시,
 
88
"아, 이 분이 무경 양이시군. 이야기론 늘 들었었지만 여태 뵈온 적이 없었군요. 난 정일수(鄭一洙)라구 합네다. 바쁜데 나오시라구들 해서……"
 
89
하고 무경을 바라보았다. 무경은 지금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사태와 입장을 얼겁결에 의식하면서 굳어진 몸 자세대로 고래만 약간 수그려 보인다. 그러니까 정일수 씨는 옆에 와 섰는 보이게게,
 
90
"준비가 되었지요?"
 
91
하고 물은 뒤,
 
92
"자, 그럼, 저리루들 들어가시지."
 
93
무경과 어머니에게 뜰 안을 가리키었다.
 
94
따로 떨어진 방 안에서 그들은 광동 요리를 먹었다. 일이 고되지나 않는가, 아파느란 것도 새로 생긴 경영 형태지만 요즘 주택난과 하숙난이 심하니까 상당히 수요성을 띠겠다든가, 야마도 아파트엔 방이 얼마나 되는데 그것이 전부 꼭 찼는가, 하는 등속의 이야기로부터, 건축난, 주택난에 대해서 말이 옮아가고, 그러는 동안에 저녁이 끝났다. 그러한 정일수 씨의 말에는 어머니가 가끔 대꾸를 하였을 뿐, 무경은 묻는 말이나 마지못해 나직이 대답하는 정도로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먹는 것이 끝나니까 정일수 씨는 시간 약속이 있다고 먼저 나가고 모녀간만이 잠시 더 방 안에 남아 있었다. 무경은 음식도 많이 먹지 않았으나, 단 둘이 계속되어도 혼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별로 이야기를 건네려 하진 않았다――물론 어젯 밤 집 앞에서 부딪칠 뻔하였던 그 신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정일수 씨가 하곡이라는 아호를 가진, 산수 그린 부채의 주인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점잖고 단정하고 기품이 있는 신사의 얼굴을 께림찍하게 생각하여 보기는 이것이 처음이라고 그는 막연히 제 심리를 뒤적여 보고 앉아 있다. 어머니는 혼잣말 하듯이 뜨즉뜨즉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95
"네겐 너무 돌연스레 된 일이 돼서 서먹서먹하구 어인 셈판인 걸 모를 께다. 그러나 벌써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이야기다. 내가 세브란스에 있을 때니께 십 년이나 되지 않니. 그 때 부텀 여태껏 사람을 다릴 놓아서 말을 붙이구, 또 스스로 대면해서 말하는 걸 나는 십 년을 여일하게 거절해 왔었다. 사람이나 그 집 내력이야 무어 하나 탓할 게 없는 분이지만 내가 널 두구 새삼스레 무슨 결혼을 하겠니……그랬더니 어쩐 셈판인걸 나두 모르겠다. 너희들 사일 허락하구 나니 마음이 갑째기 탁 풀려 버리는구나……자식들이 있다지만 다 장성해서 시집 보낼 덴 시집 보내구 아들은 세간까지 내서 딴 살림을 배포해주었단다……나이두 인저 사십을 넘으니께 어찌된 일인지 늙은 몸을 의탁하구야 살아갈 것만 같구나. 어쭙잖게 생각지 말구 에미 하는 짓을 웃구 쓰려쳐 버려라. 너희들 예식이나 올려 주군 천천히 어떻게 채비를 대일까 헌다만……"
 
96
어머니는 죄 지은 사람처럼 딸의 눈치를 살펴 가며 간단히 그렇게 말하였다. 무경은 여태껏 제가 품고 있던 생각이 다른 감정으로 뒤바뀌는 것을 경험하고 묵묵히 앉아 있다. 눈시울이 따가워서 손수건으로 그것을 묻혀 내었다. 마흔 둘 ! 아직도 어머니는 젊다.
 
97
――나는 왜 좀더 이르게 어머니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못하였을까. 딸 하나만으로 젊은 어머니가 행복될 수 있으려고 얼마나 많은 무리(無理)가 그 곳에 감행되었을까. 그렇던 나마저 어머니의 옆을 떠나면서 어째서 나는 어머니의 행복에 대해선 터럭만큼도 생각함이 없었을까. 스물에 홀몸이 되셔서 나 하나만을 위하여 청춘을 불사르고 화려한 꿈을 짓밟아 버린 어머니가 아니냐. 이제 무슨 염치에 나는 어머니에 대해서 심술이나 투정을 부리려고 하는 것일까. 어머니도 나머지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셔야 한다.
 
98
――무경은 눈물을 숨기지 않고 낯을 들어 어머니를 건너다보았다. 젊은 시절의 사진처럼 어머니의 얼굴엔 아름다운 살결이 아지랑이에 싸여 있는 것 같이 눈물어린 누에는 비치어졌다.
 
99
"엄마 !"
 
100
하고 소리를 내어서 무경은 어머니의 무릎에 낯을 묻었다.
 
101
아제 좀 지나치게 걸었더니 발바닥이 솔고 다리가 아프다고 시형은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는 이내 침대에 누워서 잡지와 신간 서적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내일부터나 화동 집으로 약과 밥을 먹으러 가겠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102
무경이는 사무실에서 입금 전표를 정리하면서, 어떤 기회에 어머니와 정일수 씨와의 결혼 이야기를 시형에게 전달할 것인가 하고 가끔 생각에 잠겨 보굿 한다. 펜을 전표 위에 세운 채 가만히 생각해 본다. 이치로 따져 보거나, 여태껏의 어머니의 생애를 생각해 보거나, 무경으로 앉아 응당히 기뻐하고 찬성해 드릴 일임에 틀림없었으나, 하루 지내 놓고 어머니가 없는 곳에서 문뜩 생각이 그 곳에 미치면, 가슴이 뚱하고는 지긋이 심장을 압박하는 가슴의 동계가 마음을 한없이 설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누를 수 없는 심술이 두 눈에 심지를 꽂아 놓는 것이다.
 
103
'내가 왜 이럴까. 어머니와 나와의 평화하고 행복된 생활을 먼저 파괴하고 나선 것은 내가 아닌가. 어머니의 고백에 의하면 어머니는 십 년 동안 나와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정일수 씨에게 고집을 세웠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서 무엇을 했나. 기독교의 신앙과 풍속 가운데서 안온한 생활을 이어 나가려는 어머니의 마음을 슬프게 교란시킨 것은 내가 아닌가. 기독교율에 의탁해서 젊은 정렬을 희생하고 속세적인 행복에서 자기를 결리시킨 뒤, 그 가운데서 성실한 생활을 설계해 보려던 어머니에게 있어, 딸이, 단 하나의 딸이 예수교의 교율을 거역했다는 것은 얼마나 타격적이고도 슬픈 일이었을까. 어머니의 결혼이 만약 유쾌치 못한 성사라면, 그것의 원인을 이룬 것은 다른 사람 아닌 내가 아닌가?'
 
104
이렇게 수없이 자기 자신을 탓하면서, 이러한 생각을 고스란히 그대로 그에게 들려 주면, 처음에는 놀라고 수상쩍게 생각할는지 모를 시형이도, 마지에는 모든 것을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그는 일시 유쾌한 상상을 머리에 그려 보게 되기도 한다.
 
105
――우리 결혼식이 있은 위엔 또 한 쌍의 신랑 신부의 혼례식이 있을 텐데, 그게 누굴는지 아세요? 그게 바로 우리 엄마라나, 하고 말하면 아마 오시형이는 깜짝 놀라 경동을 할 것이다. 생각하면 우습기도 해서 그는 혼자 발씬하니 웃고 다시 장부를 들친다.
 
106
"허허어. 생각하면 생각하쑤록 기쁜 일이렸다."
 
107
하고 멋모르는 강 영감은 시형이가 출감한 것에다 둘러 붙여서 무경이의 웃음을 놀리려 들었다. 그 때에 시계가 열 한 시를 쳤다. 그것이 다 치는 동안을 기다려서 무경은 등을 돌리고,
 
108
"제가 무엇 때문에 웃는 줄이나 아시구 그러세요."
 
109
하고 말하였으나, 들어온 때문에, 강 영감도 무경이도 함께 이야기를 중단하고 그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110
신사는 아파트의 현관을 들어서서 그대로 위층으로 뻗어 올라간 층계를 잠시 바라보듯 하였으나, 이내 사무실 쪽으로 낯을 돌리고 가까이 오면서,
 
111
"이 아파트에 오시형이라는 사람 있읍니까?"
 
112
하고 밭게 앉는 강 영감에게 물었다.
 
113
"네, 삼칭 삼백 이십 삼 호실에 계십니다. 삼칭에 올라가셔서 그저 이십 삼 호실만 찾으시면 되겠읍니다."
 
114
하고 무경이가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사무적으로 대답하였다. 신사는 홀낏 무경의 낯을 건너다보았으나, 이내 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하듯 하고, 막연히 사무실의 구멍을 향해서 사의를 표하듯 모자 끝에 손에 댄 뒤, 흰 단장 끝으로 복도의 바닥을 짚어서 위의를 갖춘 뒤에 알맞추 비대한 몸을 층계 위로 옮겨 놓았다. 무경은 첫눈에 오십을 넘었을까 말까 한 이 시낫의 풍채에서 평양서 부회 의원과, 상업 회의소에 공직을 가지고 있다는 오시형의 아버지를 간파하였다. 그럴수록 신사의 태도에는 자기에 대한 어떤 모멸감이 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털어 버릴 수는 없었다. 무경은 그의 찾아옴이 너무 돌연스럽고, 그이 태도에서 오는 위압과 모멸감이 너무 몸에 부치늘 것 같아서 의자에 앚을 염도 못 하고 멍청하니 그 곳에 서 있었다.
 
115
"오 선생의 춘부장 되는 양반이신가?"
 
116
하고 묻는 강 영감에게 무어라고 대답해 주어야 할 것인가 당황했으나,
 
117
"그런가 봐요."
 
118
하고 새파랗게 질린 채 나직이 대답해 줄 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자기네들의 사정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상세한 집안 내용까지는 모르고 있는 강 영감이었다. 무경과 시형과의 관계를 평양 있는 그의 아버지는 인정치 않으려고 하던 것, 그는 그대로 도지사를 지냈다는 지명 있는 명사의 딸과 약혼설을 진척시키고 있던 것――이러한 미묘한 사정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강 영감이다. 그러니까 시형의 아버지의 방문과 그의 태도에서 받는 충격에 대해서 그는 아무것도 이해할 길이 없을 것이다.
 
119
무경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다시 펜을 들었으나 머리를 사무에 묻을 수는 없었다.
 
120
이 년 동안 친필로는 편지도 안 하였다던 아버지가 전보를 받고 아들을 찾아왔다. 물론 부자간의 정의로 당연한 일임에 틀림은 없으나, 사상과 여러 가지 가정 문제로 의견을 달리 하던 부자가 오늘 이 년 만에 만나서 다시 아름답지 못한 충돌이나 거듭하지 않을 것인가. 그 동안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제가 가졌던 생각과 태도와 고집에 대해서 반성하는 곳도 양보하는 곳도 생겼을 것이다. 아버지는 과연 아들의 결혼 문제를 순순히 허락할 만한 준비를 가지고 올라온 것일까. 불안과 궁금증과 초조와 공포심과 의혹이 뒤섞이고 합치고 엇갈려서 무경은 고래를 푹 수그린 채 정신 없는 사무를 보고 앉아 있다.
 
121
한 삼십 분 만에 시형의 아버지는 층계를 내려왔다. 그러나 단장도 모자도 두고 잠시 다니러 나오는 모양이었다. 얼른 눈을 유리창 밖으로 돌렸으나 그의 태도와 무표정한 얼굴로부터는 아무러한 암시도 받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척이 된 모양같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맨머리 바람으로 어디를 나가는 것일까. 그는 나갔다가 한 십 분 만에 다시 돌아와서 역시 사무실 쪽은 보고 못 본 척, 무표정한 얼굴에 위엄기만을 나타내고 층계를 올라가 버렸다. 무경은 어디다가 발을 붙이고 공상의 줄을 뻗어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다시 한 이십 분 만에 자전거 탄 양복장이가 샘플을 보꾸러미에 싸 가지고 아파트를 들어와서 꾸뻑 인사를 하고 위층으로 올라가려 하였다.
 
122
"어디로 가십니까?"
 
123
하고 강 영감이 소리를 치니까, 양복점원은 멈칫하고 층계에 한 발을 올려 놓은 채 이편을 바라보며,
 
124
"삼층 이십 삼 호실입니다."
 
125
하고 말하였다. 이편에서 별로 말이 없으니 점원은 그대로 위층을 향하여 올라가 버렸다. 열 두 시의 사이렌이 울었다. 양복장이는 주문을 받았는지 인사성 있게 웃어 보이면서 사무실을 지나 밖으로 나간다. 그러나 그와 엇바뀌듯이 하여 이번에는 구둣방에서 찾아왔다. 자전거 뒤에다 커다란 트렁크를 두 개나 싣고 온 양화점원은 모자를 벗고 공손히 사무실 앞에서 안내를 구하였다. 강 영감은 신이 나서 대답하였다. 양화점원이 올라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무경이 쪽을 돌아 보면서,
 
126
"아버지가 오시드니 양복 짓구 구두 사구 한 벌 미끈히 채려 내세우실 모양이군."
 
127
하고 반갑게 웃었다. 무경은 펜대를 든 채,
 
128
"그런가 봅니다."
 
129
하고만 대답한다. 그는 지금 속으로 적지않이 불안스런 사태를 한 갈피 한 갈피 분석해 보듯이 뒤적여 보고 앉았는 것이다.
 
130
――아까 시형의 아버지가 맨머리 바람으로 밖에 나갔던 것은 양복점과 양화점을 부르러 갔던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상점을 부르기 위하여 그는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전화를 걸러 밖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는 어째서 일부러 전화를 걸러 밖으로 나갔던 것일까. 사무실 전화를 쓰지 않고 일부러 밖으로 나간 것은 무슨 때문일까.
 
131
여기까지 생각해 보고는 무경은 잠시 멈칫하니 물러선다.
 
132
――나를 피하기 위하여, 나의 낯을 대하기가 싫어서 나 있는 사무실의 전화를 쓰지 않기 위해서, 그는 밖으로 딴 전화를 찾아 나갔던 것임에 틀림없다. !
 
133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시형의 아버지가 무경을 모욕하는 것으로 된다. 무경과 시경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된다.
 
134
그래서 무경은 생각을 딴 데로 돌려 보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형의 아버지가 밖으로 나갔던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무경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인가.
 
135
――정식으로 대면이 있기 전에 며느리 될 사람을 이런 처소에서 만나는 것을 꺼리는 지도 모르지. 직업이 나쁜 것은 아니나 역시 그들의 습관으로 보아 이러한 처소에서 며느리 될 여자와 낯을 대한다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일일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는 일부러 사무실 쪽을 못 본 척, 무경의 존재를 무시하려고 앴는 것인지도 모르지.
 
136
한참 만에 구둣방 점원도 나가고, 또 얼마 뒤엔 오시형의 아버지도, 이번엔 모자와 단장을 쓰고 들고 시형의 방으로부터 내려와서 밖으로 나갔다. 시형은 그의 아버지가 나간 뒤 십 분이나 지나서야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사무실에 얼굴을 나타내었다.
 
137
"아버지가 오셨어 !"
 
138
그렇게 말하고는,
 
139
"이거 구두두 한 컬레 얻어 신었는걸 ! 이게 온 오십 오 원이라니 !"
 
140
번쩍 다리를 들어서 보이었다.
 
141
"어제 전보를 보시구 오신 게로군요."
 
142
하고 천연스럽게 무경이도 대꾸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143
"아침 차에 내리셨답니다."
 
144
"그럼 어데 여관에 들으셨게?"
 
145
"저, 무언가, 비전옥에 !"
 
146
무경은 앞서서 사무실을 나와서 식당으로 갔다. 점심을 주문해 놓고 두 사람은 뻐끔히 마주 쳐다보았다. 묻고 싶은 사연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무경은 그것을 토설하기가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났다.
 
147
"아버지가 종내 꺽이었지. 아무 말씀 없이, 몸이 과히 상한데나 없니 하구 물으시던데……"
 
148
하고 벌쭉벌쭉 웃어서, 무경이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무경은 제 질문을 꾹 눌러서 억제하며 다시 시형의 말을 기다리려는 자세를 취한다.
 
149
"부자간의 정이란 우스운 건가 봐."
 
150
하고 시형은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151
"이 년 동안이나 편지 한 장 없으시던 분이 나왔다니까 그날루 쫓아오신 걸 보면."
 
152
무경은 그러한 말에도 별로 대꾸하지 않았다. 주문한 점심이 와서 두 사람은 덤덤히 식사를 마치었다. 다 먹고 나서 차를 마시며 시형은 다시,
 
153
"아버지가 시굴루 내려가자는군 그래."
 
154
하고 무경의 낯을 건너다보았다. 무경은 그 때에 가슴이 뚱하고 물러앉는 것 같은 충격을 경험하였으나 애써 낯색을 흥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입데 가져가던 찻종만 그대로 들고 있었다.
 
155
"몸두 쇠약했는데 서울 있어 가지구야 치료가 되겠니, 집에 가서 몸이나 좀 추세거던 어데 온천에래두 가서 정양을 해야지, 그리군 또 재판소에서두 이런 데서 주소두 일정치 않고 옛날 친구래두 내왕이 있구 그러면 앞으루 예심 종결이 공판에두 지장이 생기지 않겠느냐구……"
 
156
아버지의 말을 옮기듯 하고는 찻종으로 눈을 가리며 훌쩍 차를 마셨다.
 
157
무경은 마음이 좀 진정되는 것을 느꼈으나 시형의 말에 대해서 무어라고 대꾸할 만한 기력은 생기지 않았다. 그들은 식당을 나왔다. 테이블을 돌아 나오려고 할 때에 무경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고 잠시 탁자 언저리를 붙든 채 서 있다가 간신히 시신경(視神經)에 힘을 주면서 시형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158
복도에 나와서는 곧바로 층층계를 향하여 걸었다. '제칠 천국' 같다고 하던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면서 무경은 덤덤히 생각에 잠긴다. 아파트에 들어와서 침대에 걸터앉은 시형의 낯을 보고야 무경은 의자에 앉으면서,
 
159
"도횐 공기도 나쁘구 그런데, 갈 데만 있으믄야 조용한 데루 가셔야죠. 그리구 재판소에서두 역시 서울서 빈둥거리는 것보다는 가정이 있는 곳으루 가 계시는 걸 좋아할 거에요."
 
160
하고 비로소 명랑한 어조로 말하였다. 시형은 힐끗 무경의 웃는 낯을 건너다보았으나, 그의 심정을 모를 마치 둔감도 아니란 듯이 침대에 눕더니,
 
161
"옛날과는 모든 것이 다른 것 같애. 인제 사상범이 드무니께 옛날 영웅 심리를 향락하면서 징역을 살던 기분두 없어진 것 같다구 그 안에서 어느 친구가 말하더니……달이 철창에 새파랗게 걸려 있는 밤, 바람 소리나, 풀벌레 소리나 들으면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엔 고독과 적막이 뼈에 사모치는 것처럼 쓰리구…… "
 
162
그렇게 가느다랗게 독백처럼 말하고 있었다. 무경은 돌아서서 창 밖을 바라보는 척하면서 수건으로 가만히 눈을 닦았다.
 
163
그렇게 하고 그렇게 하고 사흘째 되는 날이다. 한 달을 두고 가물던 날씨가 물쿠고 무덥고 그러더니 드디어 장마가 시작되었다. 비가 내리다간 그치고 그쳤다간 또 맥없이 내리고 하는 오후에, 오시형은 저희 아버지를 따라 평야으로 떠났다. 종내 그들은 무경이를 정식으로 알려고도 소개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나, 무경은 그런 것에 개의하지 않고 정거장까지 나가서 시형의 떠나는 것을 보았다.
 
164
정거장을 나와서, 아주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떠나 보낸 것 같은 슬픈 심회를 가슴에 지니고 비 내리는 전차에 올라탔다. 후줄구니 젖어서 물이 흐르는 우장 외투를 그대로 입은 채 그는 사무실에도 들리지 않고 곧바로 시형이가 들었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165
새 양복과 바꾸어 입은 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간 세탁 한 낡은 시형의 양복이 침대 위에 뒹굴고 있었다. 신장으로 여니까 무경이가 손수 닦았던 꼬드라진 낡은 구두도 초라하게 들어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수구의 화분――며칠째 물을 못 먹고 그것은 희끄므레하게 말라들고 있었다. 다시 물감을 부처도 빨개질 것 같지도 파래질 것 같지도 않게 시들어 버리고 있었다.
 
166
――시형이를 위하여 얻었던 방이었다. 시형이를 맞기 위해서 저금 통장을 빈텅이를 맨들면서 장식해 보았던 방이었다. 그는 인저 가 버리고 여기엔 없다.
 
167
――시형이를 위하여 나섰던 직업 전선이었다. 시형의 차입을 대기 위해서 선택하였던 직업이었다. 시형이도 나오고 인제 직업도 목적을 잃어버렸다.
 
168
무경은 가만히 앉아서 빗발이 유리창 위에 미끄러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회색빛의 멍한 하늘이 얼룩덜룩하게 얼룩이 져서 보인다.
 
169
――어머니에겐 정일수 씨가 생기고, 인저 나는 어머니에게도 필요치 않은 딸이 되었다.
 
170
울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제 몸에서 빈 껍질만 남겨 두고 모든 오장과 육부가 몽땅 빠져 나가는 경우가 있었으면 하고 막연히 그런 경지를 생각해 보고 있었다.
 
171
그런데 똑똑 노크 소리가 나고 급사가 문을 열었다.
 
172
"주인님이 나오셔서 장부 좀 보시잡니다."
 
173
급사의 말에 그는 정신을 차려 몸을 일으킨다. 그는 문에 쇠를 잠그고 층계를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점점 제 다리에 기운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174
(방도, 직업도, 이제 나 자신을 위하여 가져야겠다 !)
 
175
그런 생각이 사무실을 들어설 때에 그의 마음 속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원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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