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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영 (經營) ◈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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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김남천
1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끝이 없이 뻗어 나간 것 같은 붉은 벽돌의 높직한 담장에 위압을 느끼듯 하면서, 불광이 흐릿한 굳이 닫힌 출입구 앞에서, 최무경이는 벌써 한 시간 동안이나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너무 일찍이 찾아왔었다. 그러나 다른데서, 언제라고 꼭 작정이 없는 시간이 오기를 멍청하니 보내고 있을 수는 없어서, 그는 해가 그믈그믈할 때 아파트의 구내 식당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는 곧 영천행의 전차를 잡아타고 예까지 쫓아와서, 이렇게 혼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내왕도 드문 언덕이었으나, 그가 와서 기다리고 있는 한 시간 남짓한 동안엔, 오늘 검사굴에서 간단한 취조를 마치고 새로이 이 곳에 입소하는 피의자의 패거리와, 공판정이나 예심정에 취조를 받으러 나갔던 피고들을 태운 자동차가, 두세 차례나 이 커다란 문을 드나들었고, 낮일을 여태까지 보고 늦게야 집으로 돌아가는 간수들도 작은 문을 열고는 안으로부터 꾸부정하니 허리를 꾸부리고 불쑥 양복 입은 몸뚱어리를 나타내곤 하였다. 이럴 때마다 문 열고 닫는 소리는 깜짝깜짝 무경의 신경을 때리고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 년 가까이 차입을 하느라고 드나든 관계로 그 중에는 안면이나 어렴풋이 있는 간수도 있었으나, 문 밖에서 만나면 그들은 언제나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나치곤 하였다.
 
2
밖으로부터 들어갈 사람이 다 끝났으니까, 인제 안으로부터 석방되는 사람이 나올 시간도 되었을 게다, 혹시 오시형이를 석방하라는 검사와 예심 판사의 영장을 아까 재판소에서 돌아오던 간수 부장의 커다란 가방이 가지고 들어간 것이나 아닌가, 지금쯤은 오랫동안 친숙해진 미결감의 한 방에서 영장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올 준비에 바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이런 공상에 취하였다가, 덜카당 하고 문에서 쇠 여는 소리가 나면 그는 깜짝 놀라서 그편으로 쫓아가 보곤 하였으나 그 때마다 문으로 나타나는 것은, 간수거나 사식집 사환 아이거나, 그런 사람들이어서 그는 번번히 속아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3
아홉 시가 넘어서 한참이 되니까 부탁하였던 자동차도 왔다. 자동차가 세가 나는 요즘 같은 때에 오랜 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미안해서, 그는 자동차에서 내려서,
 
4
"아직 시간이 멀었읍니까?"
 
5
하는 운전사에게로 가까이 가며,
 
6
"인제 얼추 시간이 되었을 거야요. 미터를 돌려서 시간을 계산해 주세요. 바쁘신데 자꾸 무리를 여쭈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머, 딱이 정한 시간이 아니니까 따루 도리가 있어야죠. 대개 아홉 시 가량이면 나올 수 있다니까 인제 얼마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7
자꾸만 시계를 불에다 비추어 보면서 운전사에게 미안의 변명을 늘어놓아 보는 것이었다. 아파트에서 특약하고 쓰는 곳이 어서 안면이 있는 운전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운전대에 올라가선 카드를 들고 연필로 무엇을 끄적거려 보고 앉았다. 미터의 시계가 짤각거리다가 딸깍 하고 십 전씩 넘어서는 소리가 조용한 가운데서 무경의 초조한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십 분이 넘고 이십 분이 되어도 아무러한 소식이 없었다. 이러다가 오늘도 또 헛물을 켜는 것이나 아닌가――그렇게 생각하면 꼭 그럴 것만 같이 생각되어 그는 더욱더 초조하게 바지바지 타는 심정을 누를 길이 없었으나,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저만큼 전차길 있는 데까지 뛰어내려가서 변호사한테 다시 전화를 걸어 보고 싶은 조바심까지 생겨나는 것을 인내성 있게 안타까이 참아 보고 있는 것이다.
 
8
그러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어떤 양복 입은 신사가 하나 휘우청휘우청 올라오고 있었다. 맥고자를 벗어 들고 조끼 입지 않은 가슴을 부채질하면서 자동차의 옆을 지나다가 가벼운 양장으로 몸을 꾸민 무경이를 발견한즉, 그 곳으로 가까이 오면서,
 
9
"당신 누구요?"
 
10
하고 퉁면스럽게 물었다. 미처 대답할 말이 없어서 멍청하니 서 있으려니,
 
11
"당신 이름이 무언가 말요?"
 
12
하고 신사는 다시 제 물음을 설명하였다.
 
13
"최무경이에요."
 
14
"최무경? 누구 나오는 걸 기대리구 있소?"
 
15
"네. 오시형이란 사람이 보석으로 나온다구 마중 왔읍니다."
 
16
신사는 수첩을 꺼내 들고 불빛 밑으로 무경이를 오라고 하였다.
 
17
"나는 서대문 경찰서 고등계에 있는 사람인데 성함이 누구라구 했지요?"
 
18
그리고는 무경이가 말하는 대로를 수첩에다 옮겨서 썼다.
 
19
"주소는 화동정……× 십 오 번지."
 
20
그렇게 나직이 흥얼거리다가,
 
21
"오시형이가 당신의 무엇이 됩니까?"
 
22
하고 말한다. 무경이는 돌연한 물음에 잠시 말문이 막힐 듯이 되었으나 이내,
 
23
"약혼한 사람입니다."
 
24
하고 대답한다. 그러니까 형사는 한참 묵묵히 붓방아를 찧고 있다가,
 
25
"나이엔노쯔마(내연의 처)와는 그럼 다른 셈이죠?"
 
26
하고 물었더니, 대답도 별로 기다리지 않고 무어라고 수첩에 기록하고 있었으나,
 
27
"연령은요?"
 
28
하고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29
"스물 넷입니다."
 
30
"그럼, 오시형이가 나오면 이 주소에 있게 되는가요?"
 
31
삐끔히 무경의 낯을 건너다본다.
 
32
"아니올시다. 죽첨정에 있는 야마도 아파트 삼층 삼백 이십삼 호실에 있게 되겠읍니다. 바루 경찰서에서 마주 바라다뵈이는……"
 
33
그러나 형사는 연필을 든 채 머리를 끼우뚱하고 있다가 다시 무경이를 쳐다본다. 어째서 거처할 곳이 그리로 되는가를 채 이해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무경이는,
 
34
"아직 예식을 올리지 않았다구 조선 풍속에 따라 그 때까지 아파트에 드는 겁니다."
 
35
하고 설명을 첨부하였다.
 
36
"그럼, 이 아파트에는 아무도 같이 있지 않는 거지요?"
 
37
"네."
 
38
"그럼 좀 곤란한데요. 이렇게 되면 당신이 책임 있는 신원의 책임자가 되기가 힘들게 됩니다. 물론 자기가 저지른 사건에 대해서 개전(改悛)의 빛이 확실히 나타났으니까 재판소에서두 보석 같은 걸 허가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일단 형무소 밖으로 나오면 책임은 그 시가부터 경찰에게로 옮겨지는 거니까요. 만약에 행방이라도 자세치 않아지는 경우가 생기면 큰일이 아니여요? 똑똑한 인수자가 없으면 경찰서에서 당분간 신원을 보호해 줘야 합니다. 주소나 다른 당신을 믿고 미가라(身柄)를 석방하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형식상이로래두……"
 
39
"제가 낮에는 거기서 사무를 보고 있읍니다."
 
40
하고 무경이는 다시금 생기는 난관을 넘어서려고 열심한 태도로 말해 본다.
 
41
"그런게야 무슨 조건이 될 수 있읍니까?"
 
42
하고 미소를 띄우더니 잠시, 어떻게 하나? 하는 자세로 머리를 끼우뚱하고 생각한다.
 
43
"못처럼 재판소에서 허락해서 세상에 나오는 분이고, 또 몸도 몸이려니와 그만큼 판사나 검사도 인격을 신용하고 석방하는 것이니까, 나오는 날로 불쾌스럽게 다시 유치장 잠을 재운다든가 해서야 피차에 유쾌하지 못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건 법측상 위법이지만 내일 안으루 아파트의 책임자라든가, 누구, 한 주소에 사는 분을 보증인으로 정해서 알려 주시오. 그렇게 한다면 오늘 밤으루 최 선생을 신용하고 그대로 데려내다가 맡겨 버릴 터이니까요. 내일 아침에 보고서를 작성해서 주임께 바쳐야 하니까 그 전에 알려 주십쇼."
 
44
"아이, 고맙습니다. 내일 아침에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읍니다."
 
45
하고, 마치 이 형사가 오시형이를 석방해 주는 권리를 가진 거나처럼 무경이는 그에게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표하여 보였다.
 
46
"그럼, 잠간 동안 기대리십쇼. 대개 준비하구 있을 테니까 인제 들어가서 곧 데리고 나오죠."
 
47
하고 수첩을 접어 넣고 문 있는 대로 걸어가는 뒤에서, 무경이는 다시 공손히 머리를 수그리었다.
 
48
형사는 문지기 간수에게 안내를 구하고, 문이 열려서 이내 안으로 사라졌다.
 
49
"인제 곧 나온답니다. 경찰서에서 오질 않아서 이렇게 늦었던가 봐요. 너무 기대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50
무경은 다시 운전사에게로 와서 사례의 말을 건넸다.
 
51
이러구러 한 십여 분이 지난 뒤에 형사와 함께 양손에 짐을 들고서 휘뚤거리며 시형이가 문 밖에 나타났다. 짐이 많아서 문 안에 섰던 간수가 몇 차례씩 내보내 주는 것을 시형이는 허리를 꾸부리고 받아서 옮겨 놓고 있다. 무경이와 운전사는 그 편으로 쫓아갔다. 운전사는 무거운 책 꾸러미를 양 손에 들고 그것을 자동차로 날랐으나, 무경은 손으로 짐을 거들 생각도 미처 못하고 그 곳에 서 있는 오시형이를 잠시 멍청하니 바라보고 있다. 시형이도 흐릿한 불광 밑으로 잠시 무경을 건너다 보았으나, 이내 형사를 향하여,
 
52
"그럼, 그렇게 하죠."
 
53
하고 말하였다. 그러니까 형사는,
 
54
"최 선생, 틀림없도록 해 주시오. 난 그럼 여기서 갑니다."
 
55
하고 무경이 쪽만 바라보며 맥고자를 잠깐 들었다 놓고 그 곳으로부터 언덕 밑을 향하여 사라져 없어졌다.
 
56
짐을 차에다 옮겨 싣고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시형이는 흥분을 고스란히 숨기고 가만히,
 
57
"아, 저 불 봐라 !"
 
58
하고만 말하였다. 차가 움직이었다. 무경이도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서 덤덤한 채 앉았다가,
 
59
"불이 그렇게 신기해요?"
 
60
하고 웃는 표정으로 시형을 쳐다본다. 사내는 눈을 떨어뜨려 옆에 앉은 애인의 눈길을 받아서 비로소 오래간만에 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으나,
 
61
"그럼."
 
62
하고 대답하곤, 이내 낯을 돌리고, 이어서 궁둥이께를 음칠거리면서 자리를 도사리고 창 밖에 지나치는 거리의 풍경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다.
 
63
무경은 나직이 숨을 짚으며 앞을 바라본다. 왼편 옆구리에는 안에서 보던 책들이 어깨에 닿도록 쌓여 있다. 창고에서 풍기는 냄새가 옷 보퉁이와 책과, 그리고 시형이의 몸에서까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흥분이 가슴 속으로 가라앉고 안심과 만족이 포근히 떠오르는 것을 그는 향락하듯이 느끼고 있다. 이윽고 차는 커다란 아파트의 앞에 와서 멎었다.
 
64
강 영감이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차 소리를 듣고 나와서 짐을 옮겨 주었다. 그러나 승강기도 없는 수면 시간에, 짐을 삼층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여간만 거추장스러운 일이 아니어서 그들은 강 영감의 생각대로 짐을 일단 사무실로 들여 놓았다가 내일 아침에 끌어올리기로 하였다.
 
65
자동차가 돌아간 뒤에 무경이는 오시형이를 강 영감에게 소개하고, 그를 삼층 아파트의 한 칸으로 안내하였다. 오래간만에 걷는 걸음이라고, 생각처럼은 쇠약한 것 같지 않았으나, 후뚤거리는 다리가 못 미더워 무경은 시형에게 높직한 층층계를 올라가는 동안 자기의 어깨와 팔을 빌려 주었다. 삼층의 마지막 계단을 돌아 올라가면서,
 
66
"제칠 천국 같으네."
 
67
하고 무경이가 웃는 것을, 시형은 그저 벌씬하니 감회가 깊은 미소로 대하였고, 복도를 돌아서 어떤 방 앞에 마주 섰을 때, 잠시 동안 쭈루루니 나란히 하여 있는 문들로 하여 지금 다녀 나온 구치감을 연상하는 듯하다가,
 
68
"가만, 내 문을 열께."
 
69
사내의 어깨 밑에서 빠져 나와서 쇠를 열고 잠갔던 문을 젖혔을 때,
 
70
"이런 좋은 방을 다 준비했어."
 
71
하고 판장 문의 핸들께를 한 손으로 붙들고 의지하듯이 서 있었다.
 
72
"인제 불 켤께요."
 
73
무경은 가볍게 뛰어들어가서 바람벽에 설비된 스위치를 켰다. 천정에서 드리운 불과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은 스탠드의 불이 일시에 켜져서 크지 않은 방 안은 구석구석까지 대번에 시형의 두 눈 속에 들어왔다.
 
74
시형은 잠시 동안 방 안과 장식된 도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제 발을 굽어 보며,
 
75
"이년 전에 벗어 놓은 구두를 맨발에 신었더니 발에 곰팽이가 묻었는걸."
 
76
하고 쪼그라진 구두 속에서 발을 뽑았다.
 
77
"가만 계세요. 내 걸레 갖다 드릴께."
 
78
먼저 방 안에 들어가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시형이가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무경은 취사장께로 나서 낡은 타올에 물을 축여 들고 와서 발을 닦아 주었다.
 
79
그리고는 신장에서 슬리퍼를 내놓고,
 
80
"이걸 신구……"
 
81
모시 적삼에 베 고의를 입은 사내를 이끌듯이 해서 침대에다 앉히면서,
 
82
"어때요? 비둘기 장처럼 또 좁은 방으루 모시는 건 안됐지만 무경이가 한 주일이나 걸려서 준비한 거래누."
 
83
하고 응석을 섞어서 제 두 손을 사내의 무릎 위에 얹는 것이다. 오시형은 무릎 위에 놓은 손을 잡아서 만지면서,
 
84
"무경 씨껜 너무 수골 시키구 욕을 뵈서 어떻거나."
 
85
하고 나직이 감격을 넣어서 말하였다.
 
86
"별소릴 다아."
 
87
그렇게 말하면서, 그 대에 사내가 힘있게 쥐어 주는 손을 저도 꼭 쥐어 보고는, 두 손을 쏙 뽑아서 호들갑스럽게 두어 발자국 물러나선,
 
88
"내가 뭐, 그런 소릴 듣겠다누."
 
89
하고 일부러 샐쭉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떠오른 칭찬에 대한 만족은 자긍은, 무엇을 쫓아가다가 놓쳐 버린 때처럼 손 둘 곳을 모르고 멍청하니 쳐다보고 있는 젊은 사내의 눈에는 적지않이 교태를 띤 것으로 느껴졌다. 시형은 아무 말도 입밖에 내지 못하고 가슴 속으론 우심한 갈증을 의식하면서 무경의 눈만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바라보던 시형의 눈이 입술로, 그리고 턱 밑으로 떨어져서 가슴패기로 이동할 때, 무경은 영리하게 사내의 마음을 낚아채듯이 발딱 몸을 옮겨서 방 가운데 놓은 탁자 뒤로 돌아가며,
 
90
"이게 무슨 꽃인지 아시죠? 제가 봄부터 여름내나 손수 길른 거에요."
 
91
코를 꽃 속으로 묻고 발름발름 향기를 맡듯 하다가, 시형이가 나직이 한숨을 짚은 뒤,
 
92
"수국이지, 내가 그걸 모를라구."
 
93
하고 대답하였을 때, 다시 낯을 들면서,
 
94
"아니, 수국을 다 아시네. 상당하신데."
 
95
사내가 픽 하고 웃으면서,
 
96
"그럼, 그것두 모를라구. 빨간 잉크를 부으면 빨개지구 푸른 물감을 쏟으면 파래지구 헌다는 걸……"
 
97
하고 침상에 앉은 채로 말을 받을 때엔,
 
98
"아아주, 그런 식물학두 경제학에 있는감 !"
 
99
무경은 기쁨이 온몸을 붙든 때처럼 다시 책상 옆으로 가면서,
 
100
"이 테이블에선 편지 쓰구 공부하구, 저기선 세수하구 양치하구, 또 저기에단 책을 쭈루루니 꽂아 놓구……"
 
101
양복장 있는 데로 가서는 잠옷 한 벌을 꺼내어 침상 위에 놓는다.
 
102
"웬 돈이 있어 이렇게 호사를 하구 치레를 했어."
 
103
시형은 무경의 애정에 대하여 감격하는 기쁜 마음을 그러한 핀잔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이 더 무경의 마음에 드는지,
 
104
"피."
 
105
하고 그는 침대에 앉으면서,
 
106
"아아주 주인인 체 하시네. 허긴 인제 주인이지 머. 어머니두 금년부턴 진심으루 허락하셨으니께……인제 또 평양 댁의 허락이 있어야지만……"
 
107
또다시 시무룩해지다가 시형의 왼팔의 제 어깨에 감기니까,
 
108
"평양 댁에서두 잘 말하면 허락하실 테지. 그렇죠?"
 
109
하고 낯을 들어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110
"글쎄. 그 안에 있는 동안 아직 아버지 친필룬 한 번두 편지가 온 일이 없었구, 또 무언가 그 전 그러든 약혼 이얘기두 그러허구 있는 모양이니깐……그러나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수. 나를 그 속에 있는 동안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먹여 살린게 무경 씨구, 또 그 속에서 이렇게 나를 살려 내온 게 우리 무경인데……"
 
111
시형은 감격조로 말하였다. 그리고 안았던 팔을 그래도 꽉 지리싸면서 뜨거운 입김을 무경의 얼굴에 퍼부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감격 속에 휩쓸리듯이 취하여 버리면서도, 무경은 사내에게 입술만을 주고는 꽉 붙드는 두 팔뚝의 억센 포옹에서 빠져 나왔다.
 
112
감정과 정서에 주리었던 사내는 미칠 듯한 어조로,
 
113
"왜? 왜 도망해? 내가 미덥지가 못해서 그리우?"
 
114
하고 침상에서 쫓아 일어났다. 무경은 시형의 감정과 신경의 상태에 깜짝 놀라면서, 그러나 열심스러운 낯으로,
 
115
"일어나지 마세요. 일어나면 전 가겠어요. 다시 거기 앉으세요."
 
116
명령하듯 외친다. 이러한 기세에 질리어서 사내는 주춤하니 선 채 잠시 동안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태도였다. 시형은 다시 침상에 걸터앉는다. 흥분된 제 가슴의 불길을 끄려는지 낯을 슬며시 외면하다.
 
117
무경은 시형의 낯에 수치심의 색조가 떠오르는 것까지 보고는 그 이상 더 사내의 태도를 지키고 앉았을 수가 없어서 창문께로 몸을 피하였다. 그의 가슴도 달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리만큼 한없이 뛰고 있었다. 맞은편 캄캄한 언덕의 주택지에는 불빛이 빤짝거린다. 하늘에도 까만 호리존 위에 뿌려 놓은 듯한 별들. 마포로 가는 작은 전차가 레일을 째면서 언덕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 굽어 보인다. 산뜻한 밤 공기에 낯을 쏘이면서 천천히 가슴의 동계를 세어 본다.
 
118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온당하다. 건강도 건강이려니와, 결혼식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이 이상 감정의 닻줄을 늦추어서는 아니 된다――
 
119
어느 새에 땀이 났었는지, 브라우스의 속 갈피를 스치는 바람에 등이 차갑다. 어떤 가볍지 않은 의무를 단행한 때처럼 그는 달콤한 자위 속에 안겨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높은 삼층의 들창으로부터 하늘과 길과 언덕을 바라보고 싶은 심리였다. 그런데 등 뒤에서,
 
120
"몇 시나 되었을까. 이 년 동안이나 시간을 모르구 지냈는데 밖에 나오니까 어느 새 시간이 알구 싶어지는 군 그래."
 
121
하는 느직느직한 오시형의 소리. 깜짝 놀라듯이 제정신을 차리며 무경은 몸을 돌렸다. 시형의 다정스런 미소.
 
122
무경은 금시에 두 눈을 반짝거리며 핸드백이 놓인 테이블로 쫓아간다. 백을 들고 와선 시형의 앞에 마주 서며,
 
123
"내, 무어 드릴려는지 아세요?"
 
124
하고 입술과 눈이 함께 생글생글 웃으려는 걸 꼭 참고 있다.
 
125
"거, 알 수 있나."
 
126
하고 능청맞게 대답하니까,
 
127
"피, 것두 몰라."
 
128
그리고는 백을 열고 크롬 껍질의 묵직한 회중 시계를 꺼내서 기다란 쇠사슬의 한 끝을 쥐고 대룽대룽 쳐들어 보이고,
 
129
"이거 ! 이걸 제가 이 년 동안이나 갖구 다녔세요."
 
130
침판을 들여다보고는,
 
131
"아유, 열 한 시 반, 이렇게 늦었어 !"
 
132
그러나 시형은, 학생 시대부터 졸업한 뒤 여기, 증권 회사 조사부에 취직한 후에까지 언제나 몸에 붙이고 다녀서, 그것을 꺼내 볼 적마다,
 
133
"아유, 무겁지두 않은감 !"
 
134
하고 무경이가 놀려 먹던 것을 생각하고, 지금 소리를 내어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이윽고 무경이가 두 발을 모으고,
 
135
"그 동안 덕택에 지각도 안 하고 착한 사람이 되었읍니다. 인제 관리인으로부터 소유자에게."
 
136
시계를 두 손으로 치켜 들고 꾸뻑 인사를 한다. 시형이가 건네 주는 물건을 기쁜 웃음과 함께 받으니까,
 
137
"보관료는 톡톡히 내셔야 해요."
 
138
하고 또 다시 웃음조로 다짐을 받고, 핸드백을 챙긴 뒤에 갈 차비를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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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 일르게 들릴께요. 허긴 시계가 없어져서 지각할런지두 모르지만……이내 불 끄구 푸욱 쉬이세요."
 
140
그러나 시형은 시계를 놓고 뒤따라 일어섰다. 잊어버린 것을 채근하려는 듯한 성급한 표정이다. 구두를 신고 섰는 무경의 곁으로 쫓아올 때, 무경은 그러나 그러한 것에는 일부러 신경이 미치지 못하는 척, 이내 도어를 열고 복도로 빠져 나오면서 손가락을 제 입술에 대어 키스를 건넬 뿐, 이미 가라앉은 두 사람의 가슴에 다시금 불을 지르려 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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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해진 아파트를 나와서 안전 지대 위에 섰다. 전차를 기다리며, 삼층, 오시형이가 들어 있는 방을 쳐다보니 불이 꺼졌었다. 무경은 안심한 마음을 품고 돌아갈 수가 있을 것 같았다.
 
142
――아침 일찍이 짐을 올려다가 방을 정돈해 주고, 의사를 불러다가 건강 진단을 시키고, 어머니와도 정식으로 대면시키는 기회를 만들고, 옳지, 신원 보증인으로 아파트의 주인을 교섭해서 경찰서로 알릴 일이 무엇보다도 바쁘고……
 
143
안국동에서 전차를 버리고 그는 그러한 생각에 잠겨서 집을 향하여 걸었다. 길에는 사람의 내왕조차 드물다. 그는 집이 가까운 것을 느낀 뒤에야 비로소 젊은 여자가 거리를 걷는 시간으로선 지나치게 늦은 시각인 걸 생각하고 걸음 재게 놀리며 골목 어귀를 휙 돌았다. 그 때에 어떤 신사와 마주칠 뻔하고, 그는 깜짝 놀라 비켜 섰다. 노타이 셔츠에 회색 양복을 입고 파나마를 쓴 뚱뚱한 신사――그는 잠시 손을 모자 차양에다 대고 실례의 인사를 표하고는 무경의 옆을 돌아 큰거리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무경은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신사가 섰던 곳에 신사의 환영을 붙들어 세워 놓고, 가슴이 받는 충격을 가라앉히기에 애를 쓰는 것이다.
 
144
골목 안에는 물론 저희 집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무나문 집이나 남아 쭈루루니 문패가 달려 있다. 지금 골목을 나간 신사가 어느 집 대문으로부터 나온 사람인지, 혹시 집을 찾으려 골목 안에 들어왔다가 헛물을 켜고 돌아가는 사람이지, 그것은 모두 무경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무경은 첫눈에 그 신사가 자기 집 대문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착각을 받았고, 그리고 지금 그 신사는 하곡이라는 아호를 가진 부채의 주인공은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붙들려져 있는 것이다.
 
145
무경의 가슴은 다시 무거운 압력 속에서 불쾌스런 동계를 시작하였다. 대문이 저만큼 보인다. 문은 닫혀 있고, 문등은 띠꾼하게 요강덩이처럼 달려 있고……언제나 즐거움을 가지고 드나들던 이 대문이 어쩐지 께름직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그쪽을 향하여 걷지 않을 순 없었다.
 
146
대문을 미니까 달랑달랑하는 종소리를 내면서 제대로 열려졌다. 식모가 나왔다. 자던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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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지금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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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은 대답지 않고 대청으로 올라서서 어머니 방을 건너다 보았다. 자리에 누웠다가 일어난다. 아무 구석을 맡아 보아도 사람이 다녀 나간 기척이 없어서 그는 비로소 의심에 붙들렸던 가슴을 가라앉힌다. 그러나 제가 쓸데없는 억측에 붙들렸던 만큼 제 마음에 대하여 염증과 혐오감이 따르는 것은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149
"지금 오니?"
 
150
하고 어머니는 푸른 등을 끄고 촉수가 강한 전등으로 실내를 밝힌다.
 
151
"네."
 
152
나직이 무경은 대답할 뿐. 그러나 대청 한복판에 유쾌하지 못한 심화를 품고 서 있은 채 그는 움직이지 못한다.
 
153
"그래, 오늘은 나왔니?"
 
154
"네."
 
155
"응, 참 잘 됐다. 그래 얼굴이 과히 못 되진 않었든?"
 
156
어머니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잠옷도 입지 않고 얇다란 속옷만 입었다. 무경은 머리가 흥클러진 어머니의 살을 처음으로 보기나 한 듯이, 안방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캄캄한 제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머니가 또다시 무엇이라고 묻는 소리가 들려 왔으나, 캄캄한 암흑 속에 떠오m는 것은, 여자로서의 살의 냄새를 잃지 않은, 군살(贅肉)이 목과, 배와, 허벅다리에 알맞게 오르기 시작하는, 어머니의 육체뿐, 만복한 식욕이 지방이 많은 음식물을 대했을 때처럼, 늑찌한 군침이 입 안에 돌고 비위가 불쑥 목구멍을 치밀어 오르는 것을 무경은 참을 수가 없었다.
【원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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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1940년 [발표]
 
  사실주의(寫實主義) [분류]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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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 참조
김남천의 장편소설 (1940)
연작소설
경영(經營), 【원문】맥(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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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5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