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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의태자 (麻衣太子) ◈
◇ 제15장. 포석정(鮑石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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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이광수(李光洙)
1
진호가 죽은 것을 진헌은 크게 노하여 곧 아들 금강(金剛)에게 군사 일만을 주어 곰의나루(熊津)까지 치게 하였다. 곰의나루는 본래 신라 땅이던 것이 연전에 고려로 가 붙은 것이다. 금강이 곰의나루를 들이칠 때에 거기 있던 고려 군사와 관인을 모조리 죽일새 그중에 신라 왕이 고려 왕에게 보내는 사신을 붙드니, 그는 고려로 가는 길에 곰의나루에서 묵던 사람이다. 금강은 사신을 붙들어 몸에 지닌 신라 왕의 국서와 김성의 편지를 빼앗고 그 국서와 함께 그를 증거로 진헌에게로 압송하였다.
 
2
김성의 편지에는 신라 조정에서 아직도 진헌의 편을 드는 이가 있으니, 그는 곧 시중 유렴과 대아손 김부다. 더구나 김부의 아들 김충이 불측한 뜻을 품고 감히 고려왕을 모욕하니, 이제 이 세사람을 없이하며, 아주 후환을 끊은 뒤에 대사를 도모하리라는 말이 있고, 왕의 국서에는,
 
3
『甄萱違盟擧兵天必不祐若大王奮一〇之威甄萱必自破矣(진헌이 맹약을 어기고 싸움을 일으키니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아니할 것이라. 만일 대왕이 한번 북을 치사 위엄을 떨치시면 진헌이 반드시 피하리이다)』
 
4
하는 구절이 있었다.
 
5
이 국서를 받아 본 진헌은 더욱 진노하였다. 그는 잡혀 온 신라 사신을 앞에 꿇리고,
 
6
『분명히 너희 왕이 이 글을 보내더냐?』
 
7
하고 물었다.
 
8
사신은 황겁하여 다만 고개만 숙였다.
 
9
진헌은 다시 진호의 죽은데 대하여 사신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나 혁편으로 등을 갈기고 둥근 몽둥이로 주리를 틀어 몸에 유혈이 낭자하게 하고, 까무러치기를 여러 번 하다가 마침내 김성이 자객을 보내어 진호를 죽인 뜻을 바로 말하였다.
 
10
이 말을 들을 때에 진헌은 복받치어 오르는 분노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11
진헌은 다시 진호의 죽은데 대하여 사신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나 혁편으로 등을 갈기고 둥근 몽둥이로 주리를 틀어 몸에 유혈이 낭자하게 하고, 까무러치기를 여러 번 하다가 마침내 김성이 자객을 보내어 진호를 죽인 뜻을 바로 말하였다.
 
12
이 말을 들을 때에 진헌은 복받치어 오르는 분노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13
진헌은 사신을 아직 죽이지 말고 옥에 내려 가두라 하고 아들 신검(神劍)·용검(龍劍)과 문무 제신을 분려 신라 왕의 국서와 김성의 편지를 보이고,
 
14
『신라 왕의 좌익이 관영하여 옛날의 맹세를 저버리고 자객을 보내어 짐의 부마 진호를 죽이고, 이제 또 왕건을 달래어 짐을 법하게 하니 진실로 불공 대천지수라. 짐이 이제 전군을 들어 먼저 신라를 쳐, 무신 무도한 왕을 내 칼로 베고, 그런 후에 오랑캐 왕건을 잡은 후 칼을 평양의 다락에 걸고 말을 패강의 물에 먹이기를 맹세하노니, 경들은 짐의 뜻을 본받아 충용을 다하라.』
 
15
하였다.
 
16
백관은 일제히 절하여 왕의 뜻을 쫓기를 맹세하고 곧 온 나라에 있는 군사를 몰아 신라를 엄살하되 감히 반항하는 자여든 일호 사정 두지 말고 죽이라 하고, 또 수군을 동해로 돌려 동편의 빈 틈을 타 고울부를 지나 바로 서울로 엄살할 것을 명하고,
 
17
『서울에 들거든 거기 있는 금, 은, 보화와 젊은 여자는 취하는 자에게 주리라.』
 
18
하였다.
 
19
그런 뒤에 진헌은 이전 시라의 고울부 장군이던 양문(良文)을 불러 고울부로서 서울에 들어 갈 길을 묻고 거기 앞길을 인도하기를 명하였다.
 
20
양문은 왕건에게 들어 가 붙으려다가 왕건이,
 
21
『고울부는 서울에 핍근한 곳이니 아직 물러가 있으라.』
 
22
고, 물리침을 당하고 일변 창피하고 일변 왕건을 원망하여 진헌에게 여러 번 죽을 변을 당하고, 마침내 김성에게 쫓기어 진헌의 밑에 와 분풀이할 기회를 기다리던 터이라 진헌의 말에 응성하여,
 
23
『신이 십년을 고울부에 있었사오니, 고울부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대로 소로를 말할 것 없이 손바닥에 꿰어 들었사오며, 신이 대왕의 하늘 같은 성은을 입사옵다가 이제 중하게 쓰실을 받사오니 비록 재주 없사오나 충성을 다하여 견마 지도를 사양치 아니하리라.』
 
24
하였다.
 
25
진헌의 전략은 이러하였다. 곰의나루를 점령한 금강의 군사로 고려를 경유하여 신라와 고려와의 교통을 끊고, 숯고개(炭峴)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서부 국경을 침략하여 신라 군사의 힘을 그리로 집중케 한 뒤에 동해변이 빈 틈을 타서 해로로 고울부에 상륙하여 대번에 서울을 들이치자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이 거느린 북부 군사와, 신검이 거느린 신라 서편 군사더러는 깊이 신라의 내부에는 들어 가지 말고 일일 진퇴하면서 신라 군사를 끌어 내기에만 힘을 쓰고, 마침 가을이니 들에 익은 곡식을 베어 신라의 양식이 끊어지게 하기로 하고, 진헌은 몸소 일만의 정병을 끌고 영산강을 흘러 내려 동해로 가마메(釜山)를 지나고 울부에 오르기로 하였다.
 
26
이때에 신라에서는 진헌의 군사가 서편 국경으로 구석구석이 뚫고 들어와 일변 들에 익은 곡식을 베어 가고 일변 젊은 부녀와 장정을 사로잡아 가고 골과 마을에 불을 놓고 설레는 것을 보고, 창황 망조하여 전국에 남아 있는 군사에게 녹쓴 무기를 주어 서편 구경을 지키기에 힘을 쓰며, 거의 날마다 사신을 고려로 보내어 구원하는 군사를 속히 보내기를 왕건에게 청하였으나 더러는 금강의 군사에게 붙들리고 더러는 동쪽으로 돌아 무사히 고려에 갔으나 왕건은
 
27
『吾非畏萱俟惡盈而自犟耳(내가 진헌을 두려워함이 아니라, 진헌이 죄악 관영하여 스스로 거꾸러지기를 기다리노라)』
 
28
하는 말로 신라의 청에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29
이에 김성은 최후의 결심으로 시중 유렴과 대아손 김부와 그 아버지 늙은 효종과 그 아들 김충과 및 평소에 왕건으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무리를 잡아 가두고 그 뜻을 왕건에게 말하여 왕건의 호의를 사기로 하였다.
 
30
이때에 김충은 이런 일이 잇을 줄을 미리 짐작하고 은밀히 각처로 사람을 보내어 전국에 흩어진 동지를 모아 이 기회에 김성의 힘을 꺽어 버리기를 꾀하였다.
 
31
김성도 김충을 꺼려 정면으로 충돌하기를 피하였다. 염탐하는 자의 말을 듣건대, 김충의 무리는 그 수효를 알 수 없고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처에 널려 있으며, 또 이번에는 진헌의 군사를 끌어 들인 것도 김충의 계책이라 하고, 김부는 왕위를 엿보아 김충을 시켜 그리함이라고 하였다.
 
32
이에 김성은 왕께 이러한 말을 아뢰고 만일 이 무리를 진작 없이하지 아니하며 고려의 후환을 받을 근심이 있을뿐더러 난시를 타서 무슨 불측한 일을 할는지 모른다 하였다.
 
33
왕은 효종과 유렴을 믿고 또 비록 어진 사람이나 김충을 보고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역모를 하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하였으나 워낙 마음이 약한 왕은 김성의 말을 아니라고 물리칠 수도 없어,
 
34
『국사를 의논할 일이 있으니, 효종과 심 부와 김충과 유렴을 부르라. 짐이 몸소 말하여 보리라.』
 
35
하였다.
 
36
김성은 왕의 이 말을 다행하게 여겨 칙사를 보내어 효종과 유렴에게 소명(召命)을 전하였다.
 
37
그때는 벌써 날이 이미 늦었다. 효종은 계하에 내려 칙사를 맞고 곧 아들과 손자를 불렀다.
 
38
『위로서 곧 들라 하오시니 차비하여라.』
 
39
하고 효종은 곧 입궐할 차비를 명하였다. 김부도 왕명과 부명을 거스리지 못하여 마음에는 다소간 꺼림이 있건마는 입궐 차비를 명하였다.
 
40
오직 김충이 나서서 조부의 앞에 읍하고,
 
41
『이 부르심이 반드시 김성의 흉계인 듯하오니 깊이 생각하시옵소서.』
 
42
하고 아뢰었다.
 
43
『위로서 부르시거든 무슨 생각을 하리. 차비하여라.』
 
44
하고 효종은 김충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45
효종이 아니 듣는 것을 보고도, 김충은 한번 더 조부의 앞에 읍하고,
 
46
『이렇게 날이 이미 늦었거늘 소명을 내리심은 반드시 무슨 좋지 못한 연유가 있는 듯하오니 아직 청병하시옵고 하회를 기다리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만일 지금 들어 가시다가 김성의 술책에 빠지시면 무슨 변이 있을까 두려워하옵니다. 지금 김성이 우리 집과 시중 유렴의 집을 없이하여, 왕건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하오니 깊이 생각하시옵소서.』
 
47
하고 간곡히 아뢰었다.
 
48
그러나 효종은 급급히 조복을 갈아 입으며,
 
49
『임금이 부르시거든 두 말이 없는 법이니라. 네 이름으로 충성충 자를 준 것은 충신이 되라 함이니, 충신의 몸은 임금께 바친 것이라. 죽이시고 살리심이 오직 임금께 달렸나니라. 어서 차비하라!』
 
50
하고 엄명하였다.
 
51
김충은 하릴없이 자기 방에 물러나와 두껍쇠를 불러,
 
52
『내 지금 입궐하거니와, 아마 집에 돌아 오기 어려우니 집 일을 네게 맡기노라. 또 이 길로 유렴 시중 댁에 달려 가 무근 일이 있는가 알아 보고 만일 김술이 그 집을 범하거든 네가 알아 막고, 만일 유렴 시중도 집에 못 돌아 오거든 계영아기를 도와 무슨 일이 없도록 하라.』
 
53
하고 곧 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54
『만일 정보(廷輔)나리 오시거든 이것을 드리라.』
 
55
하여 분부하고, 조복을 갈아 입고 안으로 들어 가 어머니에게 하직하고 인사를 하였다.
 
56
『지금 입궐하오면 십상 팔구는 다시 집에 돌아 오지 못할 듯하오니, 만사를 두껍쇠가 여쭙는 대로 하시되, 만일 어디로 몸을 피하시게 되옵기든 유렴 시중의 딸 계영 아기도 데리고 가시옵소서. 유렴 시중도 아마 오늘 입궐 할 듯하옵고 입궐하오면 다시 나오지 못할 듯하오니, 그리되오면 김술은 상필 계영아기를 엄습하올 것인즉 충신의 의로운 딸을 어머니께서 돌아 보아 주시옵소서.』
 
57
하였다.
 
58
어머니의 백화부인(白華夫人)은 아들의 말을 듣고 놀래었다. 그러나 우는 낯에 씩씩한 기운을 띄우고,
 
59
『고래로 속아 죽은 충신이 몇몇 인고 충신은 속으되, 속이지 아니하나니라. 충신은 임금을 믿고 사람을 믿다니, 임금의 부르심에 의심을 가지는 것은 충신답지 아니한일이니라. 위로 나라에 큰일이 있어 부르시니 가라. 충신은 집을 잊나니 집을 걱정하지 말라. 계영아기는 네 부탁대로 하려니와, 충신의 딸이 제 몸을 지킬 줄 모르랴. 뫼시고 다녀 오라.』
 
60
하고 울음을 참으려고 입을 꼭 다물고 눈을 감는다. 백화부인이 감는 눈에서 눈물 방울이 흘러 나온다.
 
61
김충도 소매로 눈물을 씻고 차마 어머니의 낯을 바라 뒤론,ㄴ 몸에 병이 생겨 다시 생산을 못하였고, 아버지 김부는 몸에 병이 생겨 다시 생산을 못하였고, 아버지 김부는 색을 좋아하여 많은 첩을 들이고 내었다.
 
62
그리하나 백화부인은 일찍 남편 김부를 원망하는 말이 없을 뿐더러 원망하는 빛도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방에 외로이 앉아 염불로 세월을 보내었다.
 
63
『어서 가라.』
 
64
하고 백화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차마 일어나지 못하는 아들을 향하여 높은 소리로,
 
65
『대장부 무슨 문물인고!』
 
66
하고 책망하였다.
 
67
김충은 일어나 백화부인께 절하고 물러나왔다.
 
68
효종과 김부와 김충이 수레 셋에 갈라 타고 입궐할 때에는 벌써 해가서 악을 넘고 싸늘한 늦은 가을 바람이 불어 왔다. 시중댁 대문 밖에는 많은 비복들이 까닭은 모르나 상전댁에 무슨 길하지 못한 일이 있는 듯하여 수레가 아니 보일 때까지 바라보고 수레가 아니 보이게 된 뒤에도 문밖에서서 서로 바라보고 언짢은 빛을 보였다.
 
69
두껍쇠가 깁 충의 명령대로 유렴 시중 집에 갔을때에 는 벌써 밤에 들었었다. 남교 조그마한 촌락에는 등잔불이 반짝가릴 뿐이요, 죽은 듯이 고요한데 두껍쇠의 말 발굽 소리에 놀란 개들만 대문 구멍으로 머리를 내아 밀고 콩콩 짖는다.
 
70
『별일은 없는 모양이로군.』
 
71
하고 두껍쇠는 안심한 듯이 혼자 중얼거리며 말에서 내려 말을 길가의 나무에 매고 곧 동내 맨뒤 끝에 있는 시중 집으로 향하였다. 대문 밖에는 시중 집 하인 사오인이 댓돌에 걸터앉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두껍쇠가 오는 것을 보고 모두 일어나며,
 
72
『어허, 두껍쇠 아닌가? 나는 누구라고……』
 
73
하고 반가와한다. 그들은 얼마 전 두껍쇠 덕에 한밥 잘 얻어 먹은 것을 잊지 못하는 까닭이다.
 
74
두껍쇠는 그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75
『대감마마 계신가?』
 
76
하고 물었다.
 
77
『대감마마 입궐하신 줄 모르는가? 의로써 돕시라 하시와, 저녁 진지도 반만 잡수시고 들어 가시었다네.』
 
78
하고 한 하인이 말하면 다른 하인 하나가,
 
79
『아떠 우리 대감마마 아마 상대등이나 서불한으로 들어 가시나보데. 그리기나 하길래 이 밤에 입시하라 아니하시겠나?』
 
80
하고 또 다른 하인 하나가,
 
81
『그야말로 우리 댁 대감마마 상대등만 되시오면 우리네 도 한번 흥청거릴 게다. 그놈을 김성 서불한 집 그 종놈들 다 목이 하늘 높은 줄을 알려라.』
 
82
하고 팔을 뽐내고 좋아라고 웃는다.
 
83
두껍쇠는 이 하인들이 영문도 모르고 기뻐하는 것이 기가 막히나 그런 눈치는 보이지도 아니하고,
 
84
『아! 이 사람들아, 안에 들어 가서 마님께와 아기씨께 두껍쇠가 우리 댁 나리마님의 전갈을 받아 가지고 왔읍니다 아뢰오.』
 
85
하였다.
 
86
『응 전갈이야? 임자네 댁 나리마님이 우리 댁 아가씨에게 장신이 다 빠져나보다. 작히 좋을까. 우리 댁 아가씨 시집만 가시면 우리네도 한 밥 먹는 판이로구나.』
 
87
하고 어슬렁어슬렁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88
『그런데 대관절 웬일이야, 들아 가신지가 벌써 보리밥 세 솥 지을 때는 되었는대 어찌하여 아직 아무 소식이 없을까?』
 
89
하고, 늙은 하인이 하나가 유렴 시중을 위하여 근심되는 모양이다.
 
90
『아따 글랑 걱정 마오. 하늘이 아시는 우리 댁 대감마마시다. 설마 무슨 일 있을라고.』
 
91
하고 다른 하인이 말을 막는다.
 
92
처음 말하던 늙은 하인이 길게 한숨을 쉬며,
 
93
『무사만 하였으면 작히 좋겠나마는 통쇠놈의 말도 있는데 김성서불한 이 우리 댁 대감마마를 얼마나 무서워 하는지 아나……』
 
94
하고, 발자취를 엿듣는 듯이 앞길을 향하고 귀를 기울이다가,
 
95
『아직도 아니 돌아 오는걸, 마님께서 곰바위놈더러 무사히 입궐하신 여부를 알고는 곧 오라 하시었거든!』
 
96
하고 염려를 놓지 통쇠는 모양이다. 통쇠란 것은 서불한 집 작은 사랑 하인으로 김술의 심복이다. 그 놈이 어는 주석에서 유령 집 하인들과 말다툼을 하다가,
 
97
『어, 이놈들 며칠만 기다려 봐라!』
 
98
하고 무슨 뜻이 있는 듯이 장담한 일이 있다. 퉁쇠는 계영아기의 시비 시월에게 마음을 두고 유렴 집 하인들을 만나기만 하면 시월이로 하여 말다툼을 하고 이따금 때리고 차고 하기도 하던 터이다.
 
99
그래도 두껍쇠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안에 들어 갔던 하인이 돌아 나오기만 기다리고 별이 총총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인들은 유렴 시중이 서불한이 되느니 상대등이 되느니 상대등이 되느니 그리만 되면 어느 집 어느 놈에게는 어떠한 앙갚음을 하고 퉁쇠놈은 어떤 모양으로 흠씬 때려 주고 그리만 되면 버들골에를 가더라도 당할 놈이 없을 것을 떠들고 웃는다.
 
100
이윽고 두껍쇠는 안으로 불려 들어 갔다. 부인과 계영아기는 불의에 시중이 소명(召命)을 받을 것을 보고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여 회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차에, 두껍쇠가 왔단 말을 듣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흉한 소문이 있는 듯하여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껍쇠는 대청 앞에 가서 허리를 굽혀 문안을 사뢰고 김충이 자기를 보내더란 말과 효종 시중과 김부 대아손과 김충 대내마도 급거히 부르심을 받아 입궐하였다는 말과, 김충 대내마가 들어 갈 때에 다시 돌아 오기 어려움을 말하고, 이것은 필시 김성 서불한의 조작이니 유렴 시중도 입궐하였을 듯한즉, 유렴 시중 댁에 무슨 일이 있든지 두껍쇠더러 받들어 드리라고 하더란 말을 전하였다.
 
101
두껍쇠의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들을 때마다 시중 부인과 계영아기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일 유렴 시중이 진실로 김성의 손에 붙들렸다 하면, 아들도 없는 모녀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 갈까? 더구나 김술의 야료의 어떻게 견디어 낼까?
 
102
김성은 세 번이나 시중 유렴에게 계영아기와 김술과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첫번과 둘쨋번은 . 계영이 아직 나이 이런 것과 슬하에 딸 하나밖에 없으니 아직 내어 놓을 수가 없다는 뜻으로 사절하였으나, 세째번에 김술이 또 사람을 보내어 만일 허혼을 하면 이어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후환을 면치 못하리라는 위협을 할 때에 유렴 시중은 노발이 지관하며,
 
103
『유렴의 눈이 감기기 전에 딸을 김성의 자식에게는 주지 않으리라고 일러라.』
 
104
하고 소리를 쳐 돌려 보내었다.
 
105
그러한 지 사흘 만에 오늘 일이 있는 것을 생각하매, 시중 부인은 더욱 근심이 되었다.
 
106
『내가 무어라더냐? 아예 허혼을 하였더면 좋을 것을 너무도 고집하시다가 이 변을 당하는구나.』
 
107
하고 계영아기를 돌아 보았다. 시중 부인은 시중을 보고 누누이 김성의 청혼을 허하기를 주장하였다. 부인의 생각에는 일국의 정권을 손에 쥐고 흔드는 김성 집과 싸우는 것이 이롭지 못함을 아는 까닭에, 그 집과 인척 관계를 지어 일가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108
그러나 시중은 부인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
 
109
『유렴이 죽을지언정 내 혈육을 김성의 자식에게 주어 누명을 천재 후에 끼치지 아니하리라.』
 
110
하고 고집하였던 것이다.
 
111
부인은 계영을 향하여,
 
112
『악아, 김성 서불한이 만일 네 혼인 거절한 것을 원혐으로 여길진댄, 필시 내일이라도 다시 말이 잇을 듯싶으니, 그때에는 내가 너를 허락하리라.』
 
113
하였다.
 
114
계영은 이윽히 묵묵하다가,
 
115
『나는 죽을지언정, 김성의 집에 몸을 허하기를 원치 아니하옵거니와, 만일 내가 김성 집에 허혼하여 아버지를 벗어나시게 한다 하면, 어머님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116
하고 울었다.
 
117
이때에 후원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시녀 소리 들린다. 부인은 까마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118
『이 어인 밤 까마귄고?』
 
119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대청 . 정면에 놓인 커다란 옥등잔가에 가을 벌레들이 모여 든다.
 
120
계영은 두껍쇠를 보고,
 
121
『김충 대내마께 뵈올 도리가 있을까?』
 
122
하고 물었다.
 
123
두껍쇠는 허리를 굽히며,
 
124
『만일 아가씨께서 보내실 말씀이 있사옵거든 소인이 아무리 하여서라도 전하겠읍니다.』
 
125
하였다.
 
126
계영은 한참 주저하다가,
 
127
『계영은 시중 유렴의 딸입니다고 여쭈어라. 그 말 밖에 무슨 말을 전하랴.』
 
128
하고 다시고개를 돌려 눈물을 감춘다, 두껍쇠는 이 말 한 마디에 계영의 뜻을 알았다,
 
129
『소인이 무엇을 아리까마는 무슨 어려운 일이 있사옵거든 불러 주시오면 견마 지역을 사양치 아니하겠나이다.』
 
130
하고 다시 부인과 계영아기에게 절하고 물러나오려 하였다.
 
131
부인은 계영의 말이 마땅치 못한 듯이,
 
132
『응, 응.』
 
133
하고 방으로 들어 가 버린다.
 
134
그때에 계영이 나가려는 두껍쇠를 다시 불러 왼손 무명지에 꼈던 남산옥(南山玉) 가락지를 빼어 조그마한 합에 넣어 주며,
 
135
『이것을 대내마께 드리라. 생전에 다시 뵈옵지 못하더라도 이것이 내 뜻이라고 사뢰라.』
 
136
하였다.
 
137
두껍쇠가 물러나간 뒤에 계영은 홀로 기둥에 기대어 섰다. 하얀 달이 벌써 수풀 위로 올라 오는 것이 보이고 동산 벌레 소리는 달빛을 맞아 더욱 요란한 듯하였다.
 
138
계영은 아버지의 말을 생각하였다. 김충은 충의의 정 기상이 없으니, 반드시 망명의 신세가 되리라고 시중은 이 연유로 사랑하는 딸 계영을 김충에게 허락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계영은 이렇게 아버지께 사뢰었다.
 
139
『변화한 영웅 기상보다도 충의 정신이 여아의 원하는 바로소이다.』
 
140
그때에 시중은 눈을 들어 계영을 보고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시중이 보기에 자기의 딸의 얼굴에도 번화한 기상이 적고 지나치게 맑은 기운이 있는 것을 본 까닭이다. 「인연이라 하면 어찌하랴」하고 단념하여 버린 것이다. 늙은 시중의 눈에는 딸의 장래가 여러 가지로 비치는 것이다.
 
141
마음 같에서는 사랑하는 오딸을 번화한 영우의 짝을 지어 일생을 즐겁게 영화롭게 살아 가게 하고 싶거니와, 세상이 말세를 당하니 충의지사는 모두 불우의 처지에 있는 세상에 들날리는 사람은 모두 김율 김술 따위다. 내 딸을 누구에게 위탁하게 할까? 이것이 아버지로의 늙은 시중의 나라를 근심하는 여가에 쉴 새없는 근심이었다.
 
142
두껍쇠는 계영아기의 전하는 말과 가락지를 받아 가지고, 집 일이 걱정이 되어 대문을 뛰어 나와 길가 나무에 매었던 말을 끌러 타고 채찍을 들어 서울로 향하고 몰았다.
 
143
주인의 일이 급한지라, 시비 시월도 잠깐 지나가는 낯을 보았을 뿐이요, 말 한 마디 붙여 보지 못하였다.
 
144
두껍쇠가 달 아래 말을 몰아 포석정 앞에 다다랐을 때에 앞에서 일대인마가 휘몰아 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밤중에 어떤 인마가 어디로 갈까?
 
145
옳다, 김술이다 시중이 없는 틈을 타서 계영아기를 데리려 가는 것이다.
 
146
하고 두껍쇠는 말 머리를 돌려 포석정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가만히 엿보았다.
 
147
이윽고 말 탄 사람 이십여 명이 바람같이 앞으로 지나가고 그 뒤에는 발 늘인 수레가 따라 간다.
 
148
이것은 분명히 계영아기를 담아 가려는 것이다.
 
149
두껍쇠는,
 
150
『응, 이놈이?』
 
151
하고 주먹을 부르쥐고 입을 다물었다. 풀 잎사귀를 뜯고 있는 말 머리를 들어 인마의 뒤를 따라 나섰다.
 
152
이때에 시중의 집에서는 궐내에서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을 굼굼히 여겨 사람을 서울로 보내기로 하였다.
 
153
시주 집 사자가 집 앞에서 얼마를 나오지 아니하여 김술이 보내 인마를 만났다.
 
154
『그 누고?』
 
155
하고, 앞선 사람이 물을 때에 시중 집 사자는 궐내에서 나오는 사람으로만 알고,
 
156
『남교 시중 댁 청직이요.』
 
157
하였다.
 
158
그 말에 앞선 사람은,
 
159
『이놈을 묶어라.』
 
160
하고 호령을 하였다.
 
161
대궐로 들어 가는 유렴 시중 집 사자를 잔뜩 결박을 지어 말 꼬리에 달고, 김술이 보낸 장사 패들은 잠들어 고요한 동네로 달려들었다. 개들은 잠들어 놀래어 짖고 백성들도 놀라서 문 틈으로 바라보다가 달빛에 번쩍거리는 칼빛을 보고 문을 닫아 걸고 이불 속에 들어 박혔다.
 
162
『진헌이 온 것이 아닌가?』
 
163
하고 방안에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164
진헌이라는 생각이 나자, 부녀들은 젖먹이를 안고 떨고 분노들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말 발굽 소리가 시중 집 앞으로 들어 간 뒤로는 잠잠한 것을 보고, 백성들은 입사하였던 시중이 돌아 나오는가 하고 마음을 놓았다.
 
165
이때에 시중 부인과 계영은 두껍쇠를 돌려 보내고 안심이 되지 않아 청직이를 서울로 보내고 회보를 기다리던 차에, 대문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므로 분명 시중이 돌아 온 줄만 알고 계하에 내려 중문까지 마주 나와 시월을 시켜 문 계하에 내려 중문까지 마주 나와 시월을 시켜 문 빗장을 열게 하였으나, 기다리던 시중은 아니 들어 오고 난데 없는 호반 서너 사람이 성큼 뛰어 들어오며 부인께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이 모양을 보고 계영은 얼른 몸을 피하여 대청에 올라 몸을 숨졌다.
 
166
부인 앞에 허리를 굽힌 호반은 다시 한번 허리를 굽히며,
 
167
『소인들은 대장군 김술마마 댁에서 왔사오며 대장군 마마께옵서 이 밤으로 아가씨를 모시어 오라 하옵니다.』
 
168
하였다.
 
169
부인은 깜짝 놀라 한걸음을 뒤로 물러서서 또렷또렷 한소리로,
 
170
『내 집을 어디로 알고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냐? 내 딸이 창녀가 아니어든 밤으로 데려 오라 함이 무슨 말이냐? 이봐라 네 이놈을 다 모조리 끌어 내어라.』
 
171
하고 치를 떨었다.
 
172
이 말에 호반들은 껄껄 웃으며,
 
173
『시중 유렴마마도 높으시려니와, 서불한 김성마마를 어찌 당하오리까? 소인네를 끌어 내라 하시어도 하늘 아래 소인네들 당할 사람이 나지 아니하였사오니, 시중마마께옵서 무사히 댁에 돌아 오시기를 바라시옵거든 아가씨를 내어 주시옵소서. 우선 서불한 댁으로 모시어 간 뒤에 다시 예를 갖추어 친영 절차를 하옵신다 하옵니다.』
 
174
하고 부인의 대답도 , 듣기 전에 중문을 내다보며 깨어진 쇠북 소리 같은 목소리로,
 
175
『들으라! 일로 사정 볼 것 없이 아가씨를 내어 모시라. 거행 등한하면 너희놈들 목이 없으니 그리 알라.』
 
176
하였다. 중문 밖에 있던 호반들은 시중 집 지키는 호반과 하인들을 모두 결박지어 놓고 기다리다가 우루루 달러든다.
 
177
부인은 대청 보석 위에 두 팔을 벌리고 서며,
 
178
『내 목숨이 붙어 잇기까지 아무도 내 딸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리라. 너희들 돌아가 서불한마마께 아뢰이되, 날이 밝기를 기다려 청혼하심이 마땅합니다 하여라.』
 
179
하였다.
 
180
계영은 후원 별당으로 시월을 불러,
 
181
『시월아, 나는 이제 죽으리라. 나 죽은 후에 너는 어마마마를 모시라. 내 몸을 김술에게 주어 아바마마 이를 아시면 반드시 살아 계시지 아니하리라. 이몸을 개 같은 도적에게 주어 가명을 더럽게 할진댄, 차라리 내 칼로 내 목숨을 끊어 버리리라.』
 
182
하였다. 계영의 손에는 비수가 들렸다.
 
183
시월은 울며 계영의 팔을 붙들었다.
 
184
『가벼이 마옵소사. 대감마마 덕이 높으시거든 설마 하늘이 돌아 보시지 아니하리까? 때는 늦지 아니하오니 참으시고 가벼이 마옵소서.』
 
185
하였다.
 
186
이때에 김술의 사람들은 부인을 밀어 넘어뜨리고 신신은 발로 이 방 저 방으로 두루 찾으며 한 떼가 후원으로 뛰어 들어온다.
 
187
후원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에 계영은 자기의 팔에 매어 다린 시월을 보고,
 
188
『나를 붙들지 마라. 네가 내 몸이 더렵혀지기를 원치아니하거든 내 팔을 놓아 나로 하여금 깨끗한 혼이 되게 하라.』
 
189
하였다.
 
190
시월은 사람들의 발자취가 점점 가까와지는 것을 보고,
 
191
『만류하지 아니하리이다. 아가씨 깨끗하신 몸에 더러운 손이 닿지 않게 하리이다. 아가씨 돌아 가시옵거든 소녀도 그 칼로 뒤를 따르리이다.』
 
192
하고 잡았던 팔을 놓았다. 그리하는 시월의 얼굴에는 자고 맑은 빛이 보이고 옥둥잔불 빛에 눈물에 젖은 두 눈이 푸른 구슬 모양으로 반짝거렸다.
 
193
계영이 바야흐로 칼을 들어 자결하려 할 때에 밖에서,
 
194
『이놈들아, 두껍쇠의 몽둥이를 아느냐?』
 
195
하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두껍쇠란 말에 시월은,
 
196
『아가씨 두껍쇠! 두껍쇠!』
 
197
하고 창문을 열었다. 달빛에 두껍쇠의 몽둥이가 번뜻거리는 것이 보이고 칼을 빼어 든 사람들의 그림자가 이리 쫓기는 양이 보였다.
 
198
계영은 그것을 바라보다가 시월의 어깨에 손을 걸고 몸이 쓰러지며,
 
199
『고마워라 고마워라』
 
200
하고 기색하여 버렸다.
 
201
두껍쇠는 삼십명 김술의 사람을 반이나 때려 엎드리고 반이나 때려 내어쫓고 마당에 기절하여 쑤러진 시중 부인을 안아 방에 들여 누이고 나중에는 후원 별당으로 돌아 갔다.
 
202
이때에는 계영아기는 정신 없이 드러눕고 시월은,
 
203
『아가씨, 아가씨!』
 
204
하고 게영을 흔들어 깨우려 하였다. 그러다가 두껍쇠가 오는 것을 보고 시월은 너무 억하여 그의 팔에 매어 달리며,
 
205
『고마워라 고마워라. 조금만 늦었더면 아가씨는 돌아 가셨을 것을!』
 
206
하였다.
 
207
두껍쇠의 얼굴은 불고 눈에서는 불길이 일고 숨은 씨근거려 불을 토하는 듯하다. 두껍쇠는 팔에 매어 달린 시월의 얼굴을 이윽히 보더니 손을 들어 시월의 뜨거운 뺨을 만졌다.
 
208
계영이 정신을 일어나 부인에게로 뛰어 갔다. 부인은 계영의 손을 잡고,
 
209
『대감이 아니 돌아 오시니 우리 모녀는 어찌하면 좋을까? 오늘 욕은 면하였거니와, 내일 일은 어찌할까?』
 
210
하고 한탄하였다.
 
211
계영은 두껍쇠의 말대로 이 밤으로 효종 시중 댁으로 옮아 가기를 권하였다.
 
212
거기는 두껍쇠가 잇고 또 김충 대내마의 친한 장사가 있으니 아직 화를 면할 것이요, 만일 거기서도 견디기 어렵다 하면 몸을 피하여 어느 집에 들어 가 화를 면할 것을 말하였다.
 
213
부인은 시중의 고집으로 서불한 집과 혼인하기를 거절하여 이 변을 당한다고 무수히 원망하나 그래도 이 욕을 당하고는 다시 그 집에 딸을 주어 화친을 빌 도리도 없으니, 아직 두껍쇠에게 몸을 의탁할 길 밖에 없다 하여 계영의 말을 좇았다.
 
214
그날 밤으로 두껍쇠는 유렴 시중 부인돠 계영아기를 수레에 태우고 떨고 있는 유렴 집 하인들에게 무기를 들어 옹위하게 하고 자기놈 말을 타고 수십 보나 앞서서 앞길을 잡았다. 포석정 모퉁이에서와 계림 앞에 두어 번이나 아까 왔던 무리의 습격을 당하였으나 다 싸와 물리치고 기나긴 늦은 가을 밤이 거의 다하여 오경 쇠북이 백만 장안에 울어날 때에 두껍쇠는 유렴 시중 부인과 계영아기를 모시고 김충 집으로 들어 왔다.
 
215
김충 집에서도 입궐한 후로 이내 돌아 오지 아니하므로 밤새도록 등잔불을 끄지 않고 근심하다가 유렴 시중 집 가족을 마나 서로 붙들고 통곡하였다.
 
216
고울부에 유진한 진헌이 군사가 오늘 들어 온다 내일 들어 온다 내일 들어 온다 할 때에 조정에서는 고려로 보낸 청명 사신이 돌아오기 고대하였다.
 
217
김성은 시중 유렴과 효종을 잡아 가두고 그 뜻을 들어 왕건에게 보고하고 지금 진헌의 군사가 고울부에 유진하여 서울을 엿보니 시작이 급한지라, 이때를 놓치면 후회막급할 것을 누눈이 말하고 만일 이번에 구원병을 보내어 도와 주면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아무러한 일이라도 할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국보(國寶)로 내려 오는 금과 옥으로 된 왕관과 진평 대왕(眞平大王)이 띠시던 금과 옥으로 만든 띠를 예물로 보내었다.
 
218
이것은 대대로 나라의 보물로 소중하게 보관하던 것이다. 그것을 왕건에게 보내려고 할 때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219
『그러면 고울부에 온 진헌의 군사를 어찌하랴?』
 
220
하여 그 말은 서지 못하였다.
 
221
『나라는 망하였다.』
 
222
하고 늙은 조신들이 이 말을 듣고 울었다.
 
223
그러나 사신을 보낸 지 한 달이나 되도록 회보가 없어 김성은 밤에 잠도 이루지 못하고 거의 하루에 하나씩 새 사람을 뒤 따라 보내었다. 나중에는 유렴과 효종의 머리를 보내려고도 하였으나 그것은 구원병이 서울에 들어온 때에 할 것이 도리어 왕건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리라 하였다.
 
224
그러다가 동짓달 초하룻날 김율이 돌아 왔다. 천신 만고로 고려의 구원병을 얻어 가지고 왔다고 김성에게 회보하였다. 고려의 구원병을 사흘 안에 서울에 오리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웅진성에 진헌의 군사가 웅거하기 때문에 거기를 피하여 댓재로 돌아 오는 까닭이라고 한다.
 
225
『고려에서 구원병이 온다.』
 
226
는 말에 조정에서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진헌의 군사가 들어 온다고 하면 피난을 할 양으로 경보를 묶어 놓고 밤잠도 잘 못 자던 귀족들과 대관들도 적이 안심하였다.
 
227
왕도 김율의 공을 장하게 여겨 손수 김율의 손을 잡고
 
228
『나라를 구한 것은 경이로다.』
 
229
하고 칭찬하였다.
 
230
김성은 사람을 놓아 고려의 청병이 일간에 올 터이니 백성들은 염려 말라고 소문을 들리고 김율이 데리고 온 고려 사신을 위하여 포석정에 큰 잔치를 베풀기로 하였다.
 
231
이날에 장안은 큰 자치라고 야단이 났다. 이 잔치 구경을 한다고 남녀노유는 이른 새벽부터 동짓날 찬 바람에 부들부들 떨며 포석정을 향하고 나갔다.
 
232
포석정에는 차일이 펄렁거리고 깃발이 날리고 햇발이 퍼질 때부터 기생과 광대와 음률 잘하는 이, 춤 추는 이, 그림 잘 그리는 이, 익살 잘 피우는 이, 대체 장안에 재주 있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라는고는 모두 포석정으로 모여 드는 듯하였다.
 
233
그 후 얼마를 지나서 귀족들과 대관들의 수레가 모여 들었다. 날은 좀 차나 청명하여 하늘에 구름 한점 없고 바람도 깃발을 겨우 흔들만 할 뿐이었다.
 
234
오정때나 되어 거동이 대궐을 떠났다. 연 앞에는 유량하게 음악이 울고 수없는 깃발이 날고 창검이 번쩍거렸다. 근년에 와서는 나라의 일이 많으므로 왕이 거동을 하시더라도 이렇게 굉장한 일은 없었다.
 
235
왕의 바로 뒤에 서불한 김성이 따르고 그 뒤에 고려 사자가 따랐다. 그 뒤에는 귀한 사람들이 따르고 부인들과 아기씨들도 발 드리운 수레를 타고 따랐다.
 
236
장안에는 태평이 하늘에서 떨어진 듯하였다. 백성들까지도 오랫 동안 찌푸렸던 얼굴에 화색이 돌고 고려의 고마움을 칭송하는 말이 이 입 저 입에서 나왔다.
 
237
왕의 연은 첨성대 앞을 지나 계림 앞에서 첨배하고 탄탄 대로 포석정으로 간다.
 
238
『상감마마!』
 
239
하는 소리가 나자, 포석정 안에 먼저 모였던 사람들은 동구 밖으로 밀려 나갔다. 깃발과 창검이 유난히 멀리서부터 번쩍거리고 길가에 늘어 섰던 백성은 두어 걸음씩 길 아래로 내려 서서 엎드렸다. 어린 아이들까지도 길 아래 엎디어 눈만 들어 소리 없이 지나가는 왕의 연을 우러러 보았다.
 
240
왕은 앞뒤에 세 봉우리 있는 금관을 썼는데 관에 박힌 수없는 옥이 왕의 머리가 흔들리는 대로 번쩍번쩍 오색 빛을 낸다. 왕과 왕후의 연은 열 사람씩 여섯 줄로 육십명이 메고 뒤에 따른 비번과 대관들은 말 메운 수레를 탔는데 서불안의 수레는 말이 다섯이요, 고려 사신의 수레와 김술의 수레는 말이 셋이요, 그 밖에는 혹은 말이 둘이요, 혹은 말이 하나요, 관등을 따라 말이 다르며 수레의 빛과 제도도 다르고 부인들이 탄 수레에도 남편의 관등을 따라 다르고 아기들이 탄 수레는 다 외 말이요 늘인 발 빛이 분홍이었다.
 
241
왕과 왕후의 연이 포석정 동구에 이를 때에 좌우에 벌려 섰던 사람들은
 
242
「상감마마 만세 만세!」를 몇 번인지 모르게 목을 길게 빼어 불렀다.
 
243
왕은 용안에 약간 웃음을 띄우고 연에서 연에서 내려 꽃 같은 시녀들의 부액을 받아 가만가만히 황토만 깔린 길로 걸음을 옮겼다. 포석정 안에서는 유랑한 풍악 소리와 길게 뽑는 만수악(萬壽樂)의 노래가 일어난다.
 
244
『어아이 우리 상감마마 만세나 살아지이다 만세 나 살아지이다 나라에 일이 없고 백성이 배 불러 격양가 부르오니 어 아 우리 상감마마 만세만세나 사옵소서.』
 
245
왕은 아직 사십이 넘지 못하였다. 얼굴이 옥같이 희고 아랫턱에 수염이 조금 나고 키는 작은 편이나 날씬한 맛이 있었다. 왕후는 왕과 나이 같으나 아직 스무 살이 넘을락말락한 듯이 젊고 아름답고 비빈(妃嬪)들도 모두 하늘에서 내려 온 이들과 같이 꽃답고 속된 기운이 없었다.
 
246
왕의 걸음이 포석정에 가까울수록 풍악은 더욱 높아지고 어디서 일어나는지 모르는 「만세 만만세!」 소리는 먼곳에서 울려 오는 소리와 같이 한가로이 울려 왔다.
 
247
왕이 옥좌에 앉으신 뒤에 오늘 잔치에 모든 종친 외친 대관들은 다시 들어 와 하나씩 국하며 왕께 하례함을 올렸다.
 
248
사십 간 폭이나 되는 큰방에는 오색이 찬란한 회문석을 깔고 정면에 옥좌가 있고 우편에 왕후가 앉고 차례로 왕의 총애를 받는 비빈이 비단 보료 위에 늘어 앉고 그 앞으로 서불한 고려 사신, 이 모양으로 가장 높고 귀하 신하들이 열을 지어 앉았다.
 
249
해가 하늘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어지게 된 때에는 술도 취하고 배도 불러 흥이 높을 대로 높아 북을 찢어져라 거문고 줄은 끊어져라 젓대는 터져라 하고 불고 소매는 떨어져라고 춤을 추었다.
 
250
취안이 몽롱하게 되매, 젊은 귀인들은 혹은 은밀한 후궁(後宮) 방에서, 혹은 잎 떨어진 나무 그늘에서 젊고 꽃다운 아기들을 따라 희롱하였다.
 
251
아기들도 술에 붉은 얼굴이 더욱 붉어 젊은 귀인들이 따르는 것을 피하는 듯하면서도 맞아 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이리하여 포석정 넓은 별궁 안에는 술 취하고 홍에 겨운 남녀들의 추파와 정담 판이 되었다.
 
252
고려 사신도 북망 무변으로 천년 묵은 신라 문화에 무르녹고 아름다운 술과 음식과 풍악과 미인에 취하여 거의 체면을 잃도록 풀어져 버리고 왕도 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말로 환락에 취하여 있었다.
 
253
날이 다하면 밤새도록 놀 양으로 초와 솔깡과 기름까지 준비하고 음식 여투는 곳에서는 십수명 사람들이 눈 코 뜰 새 없이 밤새도록 먹을 음식을 차리기에 바빴다.
 
254
옥좌 앞에서는 술도 이미 취하고 풍악도 지리하여 다만 한 사람이 하나씩 미희를 끼고 은밀히 음란한 이야기만 소근거리고 있었다.
 
255
원림에 돌아 가는 까마귀 소리도 그치고 추운 바람이 잎 떨어진 나뭇가지를 흔들어 이따금 창을 흔들었다.
 
256
여기 저기서는 술 취하여 어음이 분명치 아니한 노래가 한 마디 두 마디 끝을 맺지 못하고 들려 왔다.
 
257
김성과 김율과 고겨 사신은 왕의 옆실에 모여 하나씩 미희를 끼고 비스듬히 누워 있고 곁에 놓인 술상에는 안주는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술잔만 비는 대로 꽃 같은 시녀가 병을 안고 들어 와 다시 채웠다.
 
258
이 모양으로 환락의 세월은 소리 없이 흘러 끝이 없을 뜻하였다. 나라 일이야 어찌되거나 환락한 좋은 것이었다.
 
259
김성은 그래도 아주 취해 버리지 못하고 취담을 하는 주에도 여러 가지 새앆을 하였다. 고려 청병이 들어 오는 날에 유렴과 효종 삼 조손을 종로에서 베어 고려를 기쁘게 할까? 그렇지 아니하면 진헌을 물리치고 개선하는 날까지 그대로 두었다가 고려 군이 돌아 갈 때에 고려 왕에게 보내는 선물로 네 사람의 목을 벨까? 그래서 네 머리를 젓을 담아 왕건에게 선물로 보낼까? 어찌하였으나 모든 일이 자기의 뜻대로 된 것이 기뻤다.
 
260
밤은 점점 깊었다. 그러나 환락에 취한 무리는 돌아 갈 줄을 모르고 사람들은 술과 환락에 취하여 취하여 졸기도 하였다.
 
261
이때에 금군 도독(禁軍都督)이 창황히 김성의 방 앞에 와서 뵈옵기를 청하였다.
 
262
시녀가 들어 와,
 
263
『서불한마마 긴급한 일이 있다 하와 금군 도독 대령이시오.』
 
264
하고 아뢰었다.
 
265
김성은 졸던 눈을 뜨며,
 
266
『내일 마을로 오라 하라. 이 깊은 밤에 일이 무슨 일이랴, 술이나 먹으라 하라.』
 
267
하였다.
 
268
시녀가 나와 그 뜻을 전하니 금군 도독이 발을 구르며,
 
269
『시방 진헌의 군사가 물 밀듯 들어 와 벌써 고함 소리 이곳에 들리니, 곧 상감마마 뫼시고 피신하소서 하여라.』
 
270
한다.
 
271
시녀는 깜짝 놀라 김성이 있는 방으로 들어 오며,
 
272
『진헌이 진헌이 진헌이.』
 
273
하고 말이 나오지 아니한다.
 
274
김율이 깜짝 놀라며,
 
275
『무엇이? 무엇이?』
 
276
하고 벌떡 일어난다.
 
277
시녀는 겨우 정신을 진정하여,
 
278
『진헌의 군사가 물 밀듯 들어 온다 하옵고, 곧 상감마마 뫼시옵고 피난하소서 하옵니다.』
 
279
하고 말도 끝나기 전에 시녀는 밖으로 뛰어 나가 버린다.
 
280
시불한은 눈을 번히 떠서 고려 사신을 보며,
 
281
『진헌이가 와? 술이나 한잔 먹으라지.』
 
282
하고 믿지 아니한 모양을 보인다.
 
283
이때에 먼 고함 소리 들린다.
 
284
금군 도독이,
 
285
『아이, 어이하리.』
 
286
하고 매어 달리는 시녀들을 뿌리치고 김성 있는 데로 뛰어 들어온다.
 
287
『경각에 달렸소. 상감마마 뫼시고 피난하시오!』
 
288
하고 소리를 친다.
 
289
또 먼 고함 소리 들린다.
 
290
그제야 김성이 일어나려 하나 늙은 몸에 술이 취하여 다리가 서지를 아니한다.
 
291
김율과 고려 사신이 일어나 비슬비슬 뛰어 나간다.
 
292
금군 도독은 발길로 김성과 김율을 걷어 차고,
 
293
『죽일 놈들! 상감마마는 두고 너희만 달아나느냐?』
 
294
하고 왕의 방문을 연다.
 
295
김성은 금군 도독의 발길에 채여 문밖으로 뛰어 나갔다가 밖에서 고함 소리가 점점 높아지는 것은 듣고 황겁하여 다시 발을 돌려 왕이 계신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296
금군 도둑이 왕의 방문을 열 때에는 왕은 한 귀비의 무릎을 베개로 하고 또 한 귀비의 무릎 위에 발을 얹고 다른 두 귀비의 무릎 위에 한손 씩을 올려 놓고 잠이 들었고 왕후도 그 곁에 시녀들이 돌아 앉은 새에 누워서 늙은 궁녀의 옛 이야기를 들어 가며 반은 졸고 반은 깨어 있었다.
 
297
이때에 금군 도독이 문을 열치고 들어 가,
 
298
『폐하! 진헌의 군사가 지척에 임하였나이다. 문을 지키던 군사들도 다 칼을 버리고 도망하였사오니 어서 피하시옵소서.』
 
299
하였다.
 
300
『무어? 무어?』
 
301
『진헌이? 진헌이?』
 
302
하고 귀비들과 시녀들은 두 손으로 머리를 안고 일어나 떨었다.
 
303
왕후도,
 
304
『진헌이 온단 말이냐? 설마 진헌이 온단 말이냐?』
 
305
하고 뛰어 일어났다.
 
306
이때에 또 고함 소리 들리고 남창으로 화살 하나가 날아 들어 와 떨고 섰는 한 귀비의 가슴에 꽂히어 귀비는「악!」하고 붉은 피를 쏟고 거꾸러진다.
 
307
그때에야 왕이 눈을 깨어,
 
308
『무엇을 이리 설레느냐?』
 
309
하고 팔을 들어 한 귀비의 목을 안고 다시 잠이 들려 한다.
 
310
이때에 김성이 뛰어 들어와 쓰러지며,
 
311
『폐하! 폐하! 인제는 마지막이옵니다.』
 
312
하고 방바닥에 쓰러진다.
 
313
바깥에서는,
 
314
『사람 살려라! 사람 살려라!』
 
315
하고 우짖고 뛰는 여자들의 소리가 들린다. 그들도 모두 몽롱하던 환락의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316
금군 도독은 참다 못하여 왕의 팔을 잡아 일으키어 한 팔로 두리쳐 업고, 왕후의 손목을 잡아 끌고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317
문밖은 캄캄한 어둠이다. 그 어두운 밤 속에 늙은이 젊은이 남자와 여자들은 울고 떨어지고 서로 붙들고 넘어지고 밟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빙글빙글 술래잡기를 하였다.
 
318
금군 도독은 왕을 업고 큰문으로 나오려 하였으나 큰 문 앞에 벌써 횃불이 비치는 것을 보고 발을 돌려 수풀 사이를 지나 남별궁 넘어가는 등성이에 올라 섰다.
 
319
등성이에 왕과 오아후를 쉬게 하고 포석정을 굽어 보니 벌써 한손에 횃불들고 한손에 칼을 든 진헌의 군사가 달려들어 사나이는 닥치는 대로 죽이고, 계집이면 닥치는 대로 겁간하며 구석구석이 왕을 찾는 모양이다.
 
320
왕과 왕후는 말도 못하고 덜덜 떨기만 하고 간신히 뒤를 따라 온 비만 사오 인과 시녀 사오인은 왕과 왕후의 옷에 매어 달려 소리도 못 내고 울었다.
 
321
지옥의 형벌을 받던 무리들까지 오글오글 끓는 포석정에서,
 
322
『의를 저바리는 신랑 왕아, 나오라!』
 
323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324
이때에 김성이 관도 다 잃어 버리고 손과 얼굴에 피투성이가 되어 왕이 계신 곳으로 기어 올라 오는 것이 별빛에 희미하게 보인다. 그 뒤에도 하나씩 둘씩 기어 올라 와서는 왕과 왕후의 앞에 쓰러져 버리고 만다.
 
325
금군 도독은 다시 왕의 앞에 팔을 내어 밀며,
 
326
『폐하! 이곳에 오래 머무시면 화단을 면치 못하시리나 어서 가사이다. 보시옵소서, 저 횃불이 이리로 오나이다.』
 
327
하였다.
 
328
그러나 왕은 일어나려 하지 않고,
 
329
『가면 어디로 가랴? 경은 왕후나 피하게 하라. 나는 이곳에서 진헌을 만나리라.』
 
330
금군 도독은 왕의 앞에 꿇어 엎드려,
 
331
『그런 생각을 마시옵소서. 폐하의 적자 중에 아직도 충의지사 적지 아니하오니 일시 화를 피하시와 후일을 보시옵소서.』
 
332
하였다.
 
333
『충의지사 누군고?』
 
334
하고 왕은 고개를 숙였다.
 
335
『대내마 김충의 무리는 모두 일당백하는 충의지사라 반드시 폐하를 위하여 적군을 물리리라 하나이다.』
 
336
하고 어서 이곳을 떠나기를 재촉하였다.
 
337
『대내마 김충이 아직 살았을까?』
 
338
하고 김성을 돌아 보았다.
 
339
김성은 이마를 땅에 조아리고,
 
340
『아직 죽이지는 아노고 옥에 가두어 두었나이다.』
 
341
하였다.
 
342
왕은 길게 한숨을 쉬고 왕후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343
『무슨 면목으로 김충을 보리?』
 
344
하고 금군 도독이 인도하는 대로 허둥지둥 어두운 산을 내려 간다.
 
345
일생에 발로 흙을 밟아 본 일이 없는 귀인들이라 걸음걸음 무릎을 끌며 엎더지며 자빠지며 그러면서도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겨우 언덕을 내려섰을 때에 벌써 아까 있던 산마루터기에 횃불이 보이고,
 
346
『왕아, 나서라.』
 
347
하고 무엄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348
『우리는 어디로 가는고?』
 
349
하고 왕은 땅에 앉으며 물었다.
 
350
이때에 계림으로 향하는 큰길에도 벌써 횃불이 보인다.
 
351
『이제는 아직 남별궁으로 피할 수 밖에 없사옵니다.』
 
352
하고 금군 도독은 손으로 남별궁 있는 곳을 가리키었다.
 
353
왕은 다시 일어나 금군 도독에게 손을 끌리어 걸음을 옮겼다.
 
354
남별궁예는 문 지키는 군사 사오인이 화롯불 가에 서있다가 어두운 그늘에 사람 한떼가 오는 것을 보고,
 
355
『거 누고?』
 
356
하고 소리를 질렀다.
 
357
그러할 때에 금순 도독이 왕과 왕후를 이끌고 군사들 앞에 다다라 화롯불 빛에 나서게 되매, 군사들은 깜짝 놀라 창을 들어 왕을 맞고 문을 열었다.
 
358
왕은 창 든 군사의 낯을 대하기도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고 문 안으로 들어 가 버리고 만다. 그 뒤로 김성이 피투성이사 되어 가 버리고 만다.
 
359
금군 도독은 다시 문밖으로 나와,
 
360
『누가 와서 묻든지 상감마마께옵서는 아까 환궁하옵시었다고 하여라.』
 
361
하고는 들어 가 버렸다.
 
362
군사는 영문도 모르고 눈이 둥글하여,
 
363
『웬일인가? 누가 모반을 하였나?』
 
364
『어쩌면 상감마마께옵서 버선발로 저렇게 창황하신가?』
 
365
『서불한은 모두 피투성이가 되었어.』
 
366
『저 횃불이 환궁하는 횃불로만 여겼더니…….』
 
367
하고 근심스러운 듯이 사방을 돌아 본다.
 
368
마루터기에 잇던 횃불은 무엇을 찾는 모양으로 여러 길로 갈려서 점점 가까와 오고 계림 길에 오던 횃불도 세갈래로 갈려서 살같이 서울을 향하고 달려들어 간다.
 
369
왕은 별궁예 들어 가 어두운 방에서 왕후를 붙들고 울었다. 비빈들과 궁녀들도 입을 막고 울었다.
 
370
횃불을 남별궁을 에워 쌌다. 진헌의 군사에게 죽기를 면한 남녀의 무리는 옷이 찢기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둘씩 셋씩 남별궁 문 앞에 와서는 문 지키는 군사더러,
 
371
『상감마마 어디로 가셨느냐?』
 
372
하고 물었다.
 
373
『아까 이 앞을 지나시와 환궁하시었소.』
 
374
하고 문을 지키는 군사는 시킨 대로 대답하였다.
 
375
『어이하리 어이하리?』
 
376
하고 벌벌 떨고 사방을 돌아 보며 어둠 속으로 다리를 끌고 숨어 버렸다.
 
377
망대에 올라 가 사방을 바라보면 금군 도독은 사방으로 횃불이 남별궁을 에워 싸고 모여 드는 것을 보고 왕이 계신 방으로 뛰어 내려와,
 
378
『폐하, 진헌이 당도하였사오니 이제는 더할 길이 없사온고 신은 문에 나가 혼자 진헌을 막으려 하오니 살아서 다시 용안을 뵈올 길이 없사올까 하나이다.』
 
379
하고 왕과 왕후의 앞에 절하고 물러 나간다.
 
380
금군 도독이 나가는 것을 보고 왕은 김성을 돌아 보며,
 
381
『서불한 이 일을 어찌하려는고?』
 
382
하고 눈물을 흘린다. 왕후도 소매로 낮을 가리고 우니 비빈들과 궁녀들도 일제히 소매로 낯을 가리고 운다.
 
383
김성이 고개를 들어 잠깐 왕을 우러러 보고 다시 고개를 숙이어,
 
384
『이제는 진헌에게 항복하여 아직 위급한 것을 면하고 고려 구원병이 이른 뒤에 서서히 진헌을 물리칠 길을 도모하심이 상책인 줄로 아뢰나이다.』
 
385
하였다.
 
386
왕은 고개를 흔들더니 언성을 높여,
 
387
『불 켜라! 간신 김성이 물러나라! 내 이곳에 앉아 진헌을 맞으리라. 천년 종사를 내 목숨이 있고는 도적의 앞에 항복하지 않으리라. 누구나 살기를 원하는 자는 가라! 나를 홀로 이곳에 있게 하라.』
 
388
하였다.
 
389
궁녀들은 네 구석에 있는 초에 불을 켰다. 방안은 환하게 밝은데 사람들의 얼굴은 눈물에 젖었다.
 
390
김성은 방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왕은 궁녀를 시켜 김성을 밖으로 밀어 내어라 하였다. 왕은 궁녀들은 김성을 끌어 문밖으로 밀어 내쫓았다.
 
391
왕은 좌우를 돌아 보며,
 
392
『너희들은 다 물러가 진헌에게 목숨을 빌라!』
 
393
하였다.
 
394
그러나 비빈 궁녀는 하나도 몸을 움직이는 이가 없이 죽더라도 왕과 같이 할 뜻을 표하였다.
 
395
이때에 진헌이 몸소 일대 병마를 거느리고 남별궁예 다다랐다. 문에는 금군 도독이 십여 인의 문 지키는 군사를 데리고 길을 막으며,
 
396
『어디라고 무엄하게 말을 타느냐?』
 
397
하고 진헌을 노려 보았다.
 
398
진헌이 한번 칼을 들매, 뒤 따르던 군사들이 일제히 금군 도독을 에워싸고 엄살을 하였다. 금군 도독은 칼을 들어 십여 명 진헌의 군사를 베었으나 마침내 칼에 맞아 거꾸러지었다. 그러나 피를 흘리면서도 다시 일어나 두 팔을 벌리고 문을 막아 섰다. 그 무서운 모양에 진헌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마침내 금군 도독은,
 
399
『네 이 문안에 한 발만 들여 놓으면 내가 죽어 귀신이 되어 네게 원수를 갚으리라.』
 
400
하고 그만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401
진헌은 군사를 시켜 금군 도독의 시체를 끌어 내게 하고 문으로 들어갔다.
 
402
이때에 왕과 왕후는 옷깃을 바르고 촛불에 대하여 단정히 앉고 비빈 궁녀들도 모두 죽을 결심을 하고 눈물을 거두고 단정히 벽에 기대어 앉았다. 문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되 태연하였다.
 
403
진헌은 이 방 저 방 두루 찾다가 마침내 후궁예 불이 켜 있는 것을 보고 그리로 달려 들어 갔다.
 
404
그때에 보석 밑에 엎드렸던 김성이 두 팔을 합창하여 들고 꿇어 앉아,
 
405
『후백제 대왕마마! 살려 주소서.』
 
406
하였다.
 
407
진헌은 김성을 바라보며,
 
408
『네가 무엇이냐?』
 
409
하고 소리를 질렀다.
 
410
『신은 신라 서불한 김성이오나 이로부터 대왕께 충성을 다하겠사오니 살려 주소서.』
 
411
하였다.
 
412
진헌은 김성이란 말을 듣고 곧 칼을 들어 김성을 치려 하였다. 그러나 김성은 진헌의 칼이 내려 오기 전에 벌써,
 
413
『대왕마마 살려 줍소서.』
 
414
하고 땅에 엎드려 버렸다.
 
415
이것을 보고 진헌은 칼을 도로 쳐들며,
 
416
『어허, 못난 놈이로구나. 하마터면 내 칼을 더럽힐 뻔 하였다. 네 목숨을 아직 살려 주거니와, 너희 왕을 불러 내라.』
 
417
하였다.
 
418
김성은 차마 왕을 부를 수도 없어 그저 머리만 들었다 놓았다 하였다.
 
419
이때에 왕이 영창을 얼떠리며,
 
420
『내 여기 있으니 진헌은 들라!』
 
421
하고 소리를 쳤다.
 
422
진헌이 선뜻 계상에 올라 서며,
 
423
『오 네더랴, 오늘 잘 만났도다.』
 
424
하고 뒤 따르는 군사를 돌아 보며,
 
425
『들어가 신라 왕을 결박하라! 결박하되 아직 목숨을랑 건드리지 말라. 내 죽이기 전에 몇 가지 보일 것이 있노라.』
 
426
하였다.
 
427
진헌의 군사는 왕의 방으로 달려들어 곧 왕을 범하려 하였다.
 
428
이때에 왕후가 일어나 두 팔을 벌리고 왕을 가려 서며,
 
429
『너희 무지한 오랑캐 무엄하게 어디를 범하느냐? 물러라, 너희 괴수 진헌더러 목을 늘이고 들라 하여라.』
 
430
하고 손에 들었던 왕의 칼을 뽑아 들었다.
 
431
진헌이 밖에서 왕후의 모양을 보고,
 
432
『어허. 아름다운지고, 오늘 밤엔 부인과 백년 가약을 맺으리라.』
 
433
하고 껄껄 웃을 때에 왕후는 칼을 들어 진헌을 향하고 던지었다.
 
434
그러나 진헌은 몸을 비켜 칼을 피하고 달려 들어 왕후를 껴안아 무릎 위에 놓고 왕을 보고 웃으며,
 
435
『내 올 때에는 네 목숨을 취하려 하였더니, 이제 의외의 선물을 받았도다. 네 죽으매 비빈은 쓸데 없을 것이니 내 맡아 사랑하리라. 마음 놓고 눈을 감으라.』
 
436
하였다.
 
437
이때에 벌써 진헌의 군사는 달려들어 왕의 두 팔을 붙들어진 진헌의 앞에 꿇렸다.
 
438
진헌은 손으로 왕후의 등을 쓸어 만지며,
 
439
『네 나를 몇 번이나 속였던고? 몇 번이나 배반하였던고? 내 너를 도우려 하였거든 네 왕건에게 사자를 보내어 나를 비방하고 나를 치기를 꾀하였 도다. 내 마땅히 주먹을 들어 미쁨 없는 네 골을 바술 것이로되 네 신라의 왕인 것을 대접하여 이 칼을 주니 손수 네 목숨을 끊으라. 만일 그러할 용맹조차 없거든 내 군사로 하여금 돕게 하리라.』
 
440
하고 왕후가 진헌을 향하여 던지었던 칼을 주워 오라 하여 손수 왕의 앞에 내어 던지었다.
 
441
왕은 말없이 손을 내어 밀어 진헌이 던지는 칼을 집었다. 칼을 들고 진헌을 보고 진헌의 무릎 위에 안기어 기절한 왕후를 보고 돌아 선 비빈을 보고 장차 칼을 들어 칼 끝을 가슴에 대려 할 때에,
 
442
『폐하! 폐하!』
 
443
하고 김성이 뛰어 들어와 왕의 팔을 잡으며,
 
444
『폐하! 이것이 다 신의 죄오니 원컨대 폐하는 그 칼을 드시와 먼저 신의 죄 많은 머리를 베이소서.』
 
445
하였다.
 
446
그러나 왕은,
 
447
『물러나라. 삼생에 다시 내 눈에 보이지 말지어다!』
 
448
하고 김성을 뿌리치고 날카로운 칼끝을 왼편 가슴 젖 밑에 대고 우는 비빈과 궁녀를 돌아 보며,
 
449
『잘 있거라!』
 
450
한마디를 남기고는 몸을 앞으로 굽혔다. 붉은 피가 방바닥에 쏟아지고 왕의 몸은 모로 엎더지었다.
 
451
비빈과 궁녀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머리를 뜯어 풀고 왕의 옷자락에 매어 달려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다.
 
452
유렴과 효종과 김부와 김충과 네 사람은 추운 옥 속에서 죽을 날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 김충의 집에는 유렴 부인과 계영아기가 우거하여 있고 여러 번 김술의 무리에 습격을 당하였으나, 두껍쇠의 몽둥이로 때려 물렸다.
 
453
포석정 큰 잔치가 있는 날 김술은 잔치에도 참례하지 아니하고 밤이 깊기를 기다려 다시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김충의 집을 에워 싸고 사방으로 불을 놓았다. 두껍쇠는 문객을 데리고 혼자 죽을 용기를 다 내어 대적하였으나, 중과 부적할 줄을 알고 가족을 끌고 뒷문으로 나가 문을 지키던 김술의 무리를 때려 죽이고 그날 밤에 어두운 것을 이용하여 좁은 골목을 돌아 멀리 백률사로 피하여 버렸다.
 
454
백률사(栢栗寺)는 김충 집이 대대로 다니든 절이기 때문에 주장 노승은 단가(檀家)의 어려움을 보고 분연히 나와 맞아 으슥한 방에 숨기고 두껍쇠만 얼른 머리를 깎고 중의 옷을 입고 대문 밖으로 향한 방에 숨어서 따라오는 이가 있는가 하고 귀를 기울였다.
 
455
『이 잔치가 끝나면 모두 내어 목을 베어 고려로 보낸다던데?』
 
456
하고 유렴 부인은 울며 김성의 청혼을 물리친 것을 수없이 원망하였다.
 
457
그러나 김충의 어머니 되는 백화 부인은 염불을 외우며 태연하고 계영아기는 아버지의 김충을 생각하여 얼굴이 쏙 빠져 버리고 정신 없이 한 곳에만 바라보고 있었다.
 
458
백률사 중에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공연히 헛기침을 하고는 창을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김충의 집에 붙은 불은 사방 민가에 번지어 화광이 충전하였다. 대체 장안이 우수수하는 것은 불 때문으로만 알고 있었다.
 
459
그리고 김술의 무리가 따라 오지 않은 것만 다행으로 여겼다.
 
460
그러나 장안은 물 끓듯하였다. 모두 처음에는 큰길에 휘황한 횃불에 문밖으로 바삐 지나가는 말 발굽 소리가 포석정 잔치가 파하고 돌아 오는 것으로 만 알았으나, 그것이 무인지경 같이 스치어 들어 오는 진헌의 군사인 줄을 알고 또 겨우 목숨을 주워 가지고 포석정을 빠져 나온 사람의 입에서 오늘 밤 포석정에 생긴 일을 듣고 또 왕이 간 곳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진헌의 군사가 사나이면 닥치는 대로 죽이고 계집이면 닥치는 대로 겁탈한다는 말을 듣고, 백성들은 아내와 딸을 끌고 지동 지서로 좁은 골목을 찾지 못하여 울고 헤매었다. 문을 열었다 닫은 소리, 산을 끄는 소리, 아이 어른이 울고 부르짖는 소리, 영문도 모르고 짖어대는 개 소리, 화광에 놀래어 부르 짖는 온갖 짐승의 소리, 신라 천년에 이처럼 큰 난리는 껶지 못하였다.
 
461
진헌의 군사들은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아니하니 큼직한 짐이면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가 세간을 뒤지어 값가는 물건이면 빼앗고, 얼굴이 어여쁘고 당년한 여자면 말에 싣고 달아났다. 백만 장안에 이 액을 면한 집이 몇 집이나 될까? 다행이 진헌의 군사의 눈에 띄지 아니하고 서울을 빠져난 사람들은 산으로 들로 향방도 없이 헤매었다.
 
462
진헌의 군사는 버들골에도 달려들고 향나무 골도 내놓지 아니하였다.
 
463
김충이 정 들인 난영은 진헌의 군사가 몰아 와서 젊은 부녀는 모조리 잡아 간다는 말을 듣고 어미더러,
 
464
『딸은 이 길로 김충 대내맛 댁으로 가려 하나이다. 이 몸이 이미 대내맛댁 사람이니 죽기 전에 그 댁 문안에 발이나 들여 놓고, 대부인마마께 뵈온 후에 그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어머님은 늙으시오니 여기 계신들 설마 어떠하리.』
 
465
하고 김충 집에 심부름 다니던 아이놈의 옷을 입어 머슴으로 차리고 그 아이놈을 따라 으슥한 골목을 가리이 김충 집을 향하였다. 헤매는 사람들의 틈을 뚫고 천신 만고로 분황사(芬皇寺) 길에 다다랐을 때에는 벌써 온 동네는 불바다가 되고 말았었다.
 
466
『놈아! 어디가 대내맛 댁이냐?』
 
467
하고 난영은 아이놈에게 물었다.
 
468
아이놈은 아직도 다 쓰러지지 안하고 불길에 싸인 대문을 가리키며,
 
469
『아씨 저기 저 대문이 대내맛 댓 대문이요.』
 
470
하였다.
 
471
난영은 도리와 서까래가 온토 불에 싸이고 지붕 기왓장 밑으로서 혀끝 같은 불길이 남설남설 내뿜는 김충 집 대문을 이윽히 바라보더니 아이놈을 보고,
 
472
『네 만일 살아 남고 대내마도 살아 남으시거든, 내가 대내맛 댁 대문 안에서 죽더라고 아뢰어라. 설마 하늘이 계시거든 대내마야 버라시랴.』
 
473
하고 합창하고 세 번,
 
474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475
을 부른 뒤에 나는 듯이 김충 집 대문 불길 속으로 달려 들어 갔다.
 
476
불길이 난영의 머리와 옷에 달려 한번 환하게 난영의 뒷모양이 보이고는 아주 불길에 싸여 버리고 말았다.
 
477
후세에 이곳을 열녀문이라고 부른 것은 난영을 두고 이른 말이요, 난영이 타 죽은 자리에는 열녀 정문과 「난영 낭자사(蘭英娘子祠)」라는 것이 있는 것이 이 까닭이다. 지금도 그 자리를 파면 난영의 피 묻는 흙이 나온다. 옛 노인의 말에 충신과 열녀의 흘린 피는 지하 삼천 척을 뚫고 들어 간다고 한다.
 
478
날이 새었다. 불도 꺼지었다.
 
479
서울 방방 곡곡에는 대행대왕(代行大王)이 남별궁예서 돌아 가신 것과, 왕후는 대행대왕을 따라 자결하신 것과, 대아손 김부가 새로 왕위에 오르신 것을 백성들에게 고하는 방목이 붙었다.
 
480
그리고 진헌의 군사는 밤새도록 약탈한 금은 보화와 삼천 삼백명이라는 신라의 젊은 여자와 금장이·은장이·대장장이·석수장이·대목·소목·산학 박사(算學博士), 역 박사(歷博士), 의 박사(醫博士)·오경박사(五經博士) 같은 장색과 학자를 오천여 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삼십리에 뻗은 긴 행렬을 지어 북을 치고 피리와 소라를 불며 깃발을 날리며 태종 무열왕능(太宗武烈王陵)의 비석을 깨뜨리고 서악재(西岳峴)를 넘어 금척능(金尺陵)을 지나 달구벌(達之火————— 지금의 大邱)로 향하였다. 사흘 안에 고려 군사가 온다 하였으니 그것을 중로에서 맛아 깨뜨리려 함이다.
 
481
진헌이 서울에서 물려간 뒤에 새 왕은 남멸궁예 내어 버린 경애왕(景哀王)의 신체를 대궐로 옮겨다 침전에 모시고 몸소 수상(受喪)하여 통곡하고 전국에 국상을 하였다.
 
482
경애왕이 진헌의 손에 어떤 모양으로 돌아 가신 것을 들은 백성들은 통곡하고 슬퍼하여 날마다 대궐 문 앞에 망곡하는 무리가 끊이지 아니하였다. 왕으로 경애왕은 백성들에게 그다지 사모함을 받지 못하였거니와, 그 왕이 진헌의 손에 참혹한 욕과 변을 당한 것을 알 때에 백성들은 이를 갈고 슬퍼하였다. 그 표로 백성들을 부모상을 당한 것과 같이 모두 소복을 입고 인산날까지 철시하고 살생과 가무를 일체 아니하였다.
 
483
새 왕은 대행대왕의 반전에서 밤을 새워 애통하고 음식까지 폐한 것을 신하들이 권하여 겨우 미음과 죽을 잡수시게 하였다.
 
484
포석정 변에 각처로 유리하였던 살아 남은 대관들과 백성들도 하나씩 둘씩 돌아 들었다.
 
485
그러나 목숨이 살아 돌아 와 본즉, 혹은 집이 불에 타고, 혹은 아내와 딸이 진헌의 군사에게 붙들려 가고, 혹은 아들이 죽고, 혹은 아버지가 죽고, 가장 즙물은 산락하고 값가는 것은 다 없이지고 말았다.
 
486
대궐 앞에 와서 이마로 땅을 조아리며 목을 놓아 통곡 하는 것만은 다만 대행 대왕의 불행하게 돌아 가심을 슬퍼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천년 고국이 진헌 같은 오랑캐에게 욕을 당하는 것이며, 또 제 각각 제 시세를 운 것이었다.
 
487
왕은 인산이 끝나기까지는 가족도 대하지 아니하였다. 경애왕이 승하하신 지 열흘 만에 왕건에게서 조상하는 사자가 왔다. 왕건의 조상하는 말은 극히 간곡하고 측달하였다. 그래서 평소에 왕건을 좋게 여기지 아니하던 왕과 유렴 시중도 왕건의 국서를 읽고 더욱 슬피 울었다. 더구나 신라에 오던 구원병이 곰의나루에서 진헌의 군사를 만나 오천 병마가 천명도 못 남고 다 죽어 버린 뒤인 것을 생각할 때에 왕건의 국서는 더욱 신라 조정에 감격을 준 것이다.
【원문】제15장. 포석정(鮑石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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