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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역사강화(朝鮮歷史講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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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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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歷史講話[조선역사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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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次[목차]
 
3
一[일], 歷史[역사]의 始初[시초]
4
二[이], 壇君[단군]의 建國[건국]
5
三[삼], 「개아지」朝鮮[조선]
6
四[사], 民族的[민족적] 自覺[자각]
7
五[오], 樂浪[낙랑] 漢郡[한군]驅逐[구축]
8
六[육], 高句麗[고구려]의 興起[흥기]
9
七[칠], 三國[삼국]의 鼎立[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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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팔], 高句麗[고구려]의 霸業[패업]의 始初[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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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일], 歷史[역사]의 始初[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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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事[만사] 萬物[만물]이 생겨난 때가 있고, 變遷[변천]해 온 來歷[내력]이 있읍니다. 世界[세계]의 형편은 잠시도 쉬지 않고 연방 달라지는데, 달라진 새 형편에 맞는 자는 부지가 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없어지는 것이니, 시방 우리 眼前[안전]에 있는 어수선한 事物[사물]이 총히 이치를 인하여 하나로부터 여럿이 되고, 어설피 된 것으로부터 톡톡해진 것들입니다. 맨 처음 한 가지이던 것이 자꾸 생겨나는 새 형편에 응하여 하나 또 하나 늘어가는 중에 이렇게 야단스러운 世界[세계]가 벌어졌읍니다. 現象[현상]을 進化[진화]라 하고 進化[진화]의 자취를 歷史[역사]라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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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사는 世界[세계]는 地球[지구]라 하는 것이니, 본디 저 太陽[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또한 불덩어리더니 차차 식어서 시방과 같이 되고 얼마만에 生命[생명]의 씨가 생기고, 이것이 오랜 歲月[세월]에 자라고 늘어서 虫충] ‧魚[어] ‧禽[금]‧獸[수]로 차차 變遷[변천]해 나가다가 맨 나중에「사람」이란 種類[종류]가 생기니, 사람은 실로 萬物[만물]의 靈長[영장]입니다. 사람도 처음에는 다른 動物[동물]과 별로 틀릴 것이 없더니, 腦[뇌]가 發達[발달]하면서 知慧[지혜]가 늘어서 그릇과 연장을 만들어 體力[체력] 以上[이상]의 能力[능력]을 發揮[발휘]하고 言語[언어]와 宗敎[종교]를 만들어, 나와 남이 힘을 합하여 차차 모든 動物[동물]보다 優越[우월]한 生活[생활]을 하니, 이러한 經驗[경험]이 쌓이어서 生活[생활]이 向上[향상]해진 자취를 文化[문화]라 합니다. 歷史[역사]는 무엇에든지 다 있는 것이로되, 進化[진화]의 꼭대기는 人類[인류]요, 人類[인류] 生活[생활]의 고갱이는 文化[문화] 發達[발달]하던 來歷[내력]을 意味[의미]하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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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類[인류]는 맨 처음 아시아의 西南方[서남방]에서 생겨났읍니다. 오래도록 그 근처에서 살다가 씨가 퍼지는 대로 이리저리 흩어지기 비롯하고 皮膚[피부]와 骨格[골격]이 각기 그 地方[지방] 風土[풍토]에 맞추어 틀려지니 人類[인류]의 差別[차별]이 이래서 생겨났읍니다. 그중에 東方[동방]으로 찢겨 나온 一派[일파]는 살빛이 누르고 머리 털이 검은「몽골」人種[인종]이란 것이 되고, 이것이 東方[동방]의 넓은 땅으로 이리저리 몰리는 동안에 다시 여러 가닥과 여러 덩어리에 나누이니, 우리 朝鮮[조선] 사람도 그중의 한 끄덩이로 한 五[오]천년 전쯤부터 먼 西方[서방]으로서 東[동]으로 東[동]으로 해 뜨는 곳을 바라고 옮아온 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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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人類[인류]의 生活[생활]은 무엇으로든지 다 심히 幼稚[유치]하였읍니다. 人類[인류] 文化[문화]의 밑천이 된 器具[기구]도 당초에는 나뭇개비나 뼈다귀 조각이나 돌맹이 같은 것을 利用[이용]할 뿐이다가, 차차 단단한 돌을 다듬어서 여러 가지 소용을 하니 이적은 石器時代[석기시대]라 합니다. 갖은 연장을 만들기에는 불편한 것이 많다가 쇠붙이를 알고 이것으로 器具[기구]를 만들어 쓰기를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물러서 다루기 쉬운 靑銅[청동]을 쓰니 이적을 靑銅時代[청동시대] 라 하고, 마침내 단단하여 편리한 黑鐵[흑철]을 쓰니 이적을 鐵器時代[철기시대]라 하여 시방까지도 人類[인류]의 文化[문화]는 鐵器時代[철기시대]에 들어 있읍니다. 또 生活[생활]의 資料[자료]도 生果[생과]나 저절로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음으로부터 차차 사냥을 하게되고, 다시 山禽[산금] 野獸[야수]를 길들여서 기르고 새끼 받을 줄을 알고, 마지막 땅을 갈고 곡식을 부쳐서 그 열음을 쌓아 두고 먹을 줄을 알게 되니, 이것을 차례로 狩獵時代[수렵시대] ‧牧畜時代[목축시대] ‧農業時代[농업시대]라 하여 人類[인류]의 經濟發達[경제발달]의 三階段[삼계단]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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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만 할 적은 말할 것도 없고, 牧畜時代[목축시대]에도 水草[수초]를 따라 옮아 다니므로 보잘 것 없더니, 農業[농업]을 시작한 뒤에야 一定[일정]한 土地[토지]에 들어붙어 살아서 市邑[시읍]도 생기고 邦國[방국]도 이루어지고 法制[법제]도 마련되어서, 人類[인류] 文學[문학]가 비로소 줄달음질로 進步[진보]하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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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이], 壇君[단군]의 建國[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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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부터 五[오]천 년쯤 전에「한」사람이라 일컫는 이가 白頭山[백두산]과 黑龍山[흑룡산] 사이의 이르는 곳마다 덩어리 덩어리 지어서 많이 살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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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전하는 말에 그네의 祖上[조상]되시는 桓雄天王[환웅천왕]은 본디 ▣▣▣▣▣▣▣▣▣▣ 人間[인간]을 다스리기 위하여 三千[삼천] 眷屬[권속]을 데리시고 太白山[태백산]으로 내려오시어서, 농사하는 법과 병 고치는 법과 선악 가리는 법과 길흉 고르는 법을 가르치시고, 또 ▣▣▣▣▣▣▣▣▣▣▣▣▣ 어▣▣▣▣▣▣▣▣▣▣▣▣▣▣▣ 뒤에 도로 天國[천국]으로 돌아기시니, 자갸들은 통히 그 子孫[자손]이매 「한」사람이라 한 것 입니다. 「한」사람은 天民[천민]이란 뜻이요, 또 古語[고어]에 天神[천신]을 「박」이라 하므로, 天神[천신]의 子孫[자손]이라 하여 一[일]에 「박」사람이라고도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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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雄天王[환웅천왕] ▣▣▣ 壇君[단군]이시니, 비로소 나라를 세워 朝鮮[조선]이라 하시고 임금이 되사 王儉[왕검]이라 일컬었읍니다. 朝鮮[조선]은 처음 開化[개화]하여 가장 文明[문명]하였다는 뜻이니, 다른 民衆[민중]에 비하여 進步[진보]의 큼을 나타낸 이름입니다. 太白山[태백산]이 祖上[조상]께서 하늘로서 내려오신 곳이라 하여 天山[천산]으로 높이니「太白[태백]」은 古語[고어]에 大神[대신]이란 뜻이며, 도읍을 이 산 밑에 두어 하느님의 뜻대로 人間[인간]을 다스리시니, 天道[천도]는 淸淨[청정]이라 하여 가장 힘쓰심이 온 세상이나 한 사람이나, 몸으로나 마음으로나 깨끗하여 얼이 없음이었읍니다. 그리하여 더러운 것을 가까이하지 아니하는 것과 죄를짓지 아니하는 것과 병에 걸리지 아니하도록 미리미리 지도하시고, 이미 생긴 것은 고쳐 주시는 것이 壇君王儉[단군왕검]의 맡으신 일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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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들의 모이어 사는 곳을「불」이라 하니 「불」은 開拓[개척]된 땅이라 합입니다. 山谷[산곡]이고 水谷[수곡]이고, 살 만한 곳에는 「한」사람의 불이 골고루 퍼져 있고 다 각기 어른이 있어 거느려 가나, 어떠한 어른이든지 종당은 다 壇君[단군]께 매였으니, 대개 壇君[단군]은 ▣▣▣▣▣▣ 하느님 섬기는 最高[최고] 權威[권위]를 가졌는데, 그때의 법이 이 權威[권위]를 나누어 가지지 아니하면 어른 노릇을 할 수 없으므로, 아무라도 壇君[단군]의 도읍은「서불」이라 하니, 으뜸되는 불 곧 首都[수도]란 뜻이요, 또「박재」라 하니 神城[신성]이란 뜻이라, 太白山[태백산] 밑 松花江[송화강] 골짜기에 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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壇君時代[단군시대]는 더 아득한 옛날로부터 비롯되었지마는, 後世[후세]에는 西曆[서력] 紀元前[기원전] 二三三三[이삼삼삼]년으로써 公用[공용] 紀元[기원]을 삼았읍니다. 그 시절에는 농사나 잘 짓고 하는님이나 정성으로 섬기는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특별한 事蹟[사적]의 전하는 것은 없었읍니다. 다만 여기저기서 發見[발견]되는 遺物[유물]로써 그네들이 石器[석기] 使用[사용]하던 人民[인민]이요, 또 狩獵[수렵] ‧牧畜[목축]과 한가지 農業[농업]을 힘쓴 줄을 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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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삼], 「개아지」朝鮮[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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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의 分布[분포]는 歲月[세월]과 한가지로 넓어졌읍니다. 太白山[태백산]을 끼고 東側[동측]으로는 咸鏡道[함경도]와, 西側[서측]으로는 平安道[평안도]를 좇아서 두 갈래로 朝鮮[조선] 半島[반도]로 들어오면서 여기저기 그네의「불」이 생겼는데「불」이 뒤에 訛[와]하여 夫餘[부여]가 되었읍니다. 처음에는 대개 山谷[산곡]을 의지하여 생기더니 農業上[농업상]의 必要[필요]로 인하여 차차 水流[수류]를 따라 江域[강역]으로 내려오고, 그중 大水[대수]와 平野[평야]를 가진 자가 富力[부력]과 한가지 威權[위권]을 늘리어서 附近[부근]의 작은「불」을 兼倂[겸병]하여 큰 勢力[세력]을 이루니, 紀元後[기원후] 一[일]천 년경까지 무릇 다섯 군데의 大夫餘[대부여]를 보게 되었읍니다. 太白山[태백산] 밑으로서 松花江[송화강] 流域[유역](시방 長春平野[장춘평야])으로 나온 壇君[단군] 子孫[자손] 解夫婁[해부루]의 北夫餘[북부여]와, 鴨綠江[압록강]流域[유역]에 생긴 卒本夫餘[졸본부여]와, 豆滿江[두만강] 流域[유역]의 東夫餘[동부여]와, 大同江[대동강] 流域[유역]에 생긴 王儉夫餘[왕검부여]와, 漢江[한강]流域[유역]에 생긴 南夫餘[남부여] 다섯입니다. 이 모든 夫餘[부여]에서 王族[왕족]은 다 解[해]의 姓[성]을 쓰니「日族[일족]」이란 뜻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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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夫餘[북부여]는 壇君[단군]의 子孫[자손]이 옮은 것이니, 解氏[해씨]의 宗統[종통]으로 王號[왕호]를 夫婁[부루]라고 일컬어 依然[의연]히 모든 「불」의 宗主[종주]가 되니, 차차 여러 異民族[이민족]에게 부대끼어서 기를 잘 펴지 못하는 동안에 가장 좋은 地利[지리]를 차지한 大同江邊[대동강변]의 王儉夫餘[왕검부여]가 특히 큰 發展[발전]을 이루어, 解氏[해씨]의 宗統[종통]과 朝鮮[조선]의 國號[국호]를 옮기어 가지고 王號[왕호]를「개아지」라 하니, 이것이 紀元[기원] 一○四八[일십사팔]년의 일입니다. 國制[국제]가 整齊[정제]하고 土地[토지]가 平衍[평연]하고 또 强隣[강린]의 逼近[핍근]한 것이 없어 살기가 좋으며, 四方[사방]의 백성이 이리로 모여들고, 멀리는 支那[지나]의 避難民[피난민]들이 水陸[수륙] 兩路[양로]로 歸化[귀화]하는 者[자]가 날로 늘며, 따라서 先進[선진]한 文化[문화]가 輸入[수입]되어 國運[국운]이 날로 昌盛[창성]하니, 그 中心[중심]인 王儉城[왕검성]은 시방 平壤[평양] 근처입니다. 이「개아지」곧 日字[일자]란 國語[국어]를, 當時[당시]에 와서 客官[객관] 노릇하던 支那人[지나인]들이 저희 나라 古傳[고전]에 있는 箕子[기자]에 附會[부회]하여, 뒤에 이 王朝[왕조]를 箕子朝鮮[기자조선]이라고 일컫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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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아지」朝鮮[조선]은 안으로 禮讓[예양]의 俗[속]을 닦고, 밖으로 支那[지나]의 文化[문화]를 吸收[흡수]하면서 오랜 동안은 太平[태평]을 누리더니, 四[사] 一[일] 世[세] 準王[준왕]의 때에 이르러 漢[한]으로부터 亡命[망명]하여 歸化[귀화]한 衛滿[위만]이 저의 데리고 온 黨與[당여]와 域內[역내]에 있는 저희 同族[동족]을 糾合[규합]하여 가지고 不意[불의]에 叛逆[반역]을 일으키니, 王[왕]이 制伏[제복]하지 못하고 드디어 海路[해로]로 南下[남하]하여 金剛山[금강산] 곧 錦江[금강] 流域[유역]에 새 나라를 배포하고 시방 益山[익산]에 도읍을 정하고 韓王[한왕]이라고 일컬었읍니다. 이것이 紀元[기원] 二二四○[이이사십년]의 일입니다. 漢江[한강]으로 부터 以北[이북]을 朝鮮[조선]이라 할 때에 그 以南[이남]을 韓[한]이라 하여, 또한 無數[무수]한 「불」이 흩어져 있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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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조선]의 故地[고지]에는 衛滿[위만]이 王朝[왕조]를 세우고 威力[위력]으로써 統治[통치]를 하나, 舊民[구민]의 抗爭[항쟁]이 끊이지 아니하다가 그 손자 右渠[우거]의 때에 이르러 舊民[구민]의 頭領[두령]이 漢[한]의 本國[본국]과 通謀[통모]하여 紀元[기원] 二三三六[이삼삼육]년에 드디어 衛氏[위씨]를 넘어뜨렸읍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漢[한]이 억지로 樂浪[낙랑] ‧臨屯[임둔] ‧玄莵[현토] ‧眞番[진번]의 四郡[사군]을 두어, 光復[광복]을 꾀하던 舊民[구민]에게는 그 식이 장식이 되니, 그네의 反抗運動[반항운동]은 더욱 熾盛[치성]을 더하여, 불과 二○[이십]년 동안에 臨屯[임둔] ‧眞番[진번]兩軍[양군]을 罷[파]하고, 咸鏡道[함경도]의 一部[일부]와 平安道[평안도]의 北部[북부]에 두었던 玄莵郡[현토군]을 療東[요동]으로 옮기어 가지고, 漢人[한인]의 勢力[세력]이 깊은 뿌리를 박은 平安道[평안도] 南部[남부]와 黃海道[황해도]와 京畿道[경기도] 一部[일부]에 있던 樂浪郡[낙랑군]만이 한참 동안 存續[존속]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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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사], 民族的[민족적] 自覺[자각]의 始初[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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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끼리만 살 때에는 집안 싸움도 없지 아니하였지요마는, 집으로 치면 안대청 같은 大同江[대동강] 流域[유역]이 더부살이의 보금자리가 됨에는 民族的[민족적]의 새 精神[정신]이 나지 아니하지 못하였읍니다. 樂浪[낙랑]의 漢人[한인] 勢力[세력]이 뿌리를 깊이 박을수록 利害[이해]가 서로 排置[배치]하는 이 異民族[이민족]을 내어모든 것이 아무것보다 앞서는 일임을 깨닫고, 이를 위하여 前震人[전진인] 對[대] 支那人[지나인]의 共同[공동] 動作[동작]이 생기게 되었읍니다. 樂浪郡[낙랑군]을 둘러싸고 여기저기서 지레질을 하던 族屬[족속]을 살피면 대강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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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郡[낙랑군]의 南[남]에는 漢江[한강] 流域[유역]으로부터 半島[반도]의 南半島[남반도]에 韓[한]으로 統稱[통칭]하는 一大[일대] 聯邦[연방]이 있었읍니다 . 韓[한]은 三大部[삼대부]에 나뉘었으니, 西[서]으로 시방의 京畿[경기] 一部[일부]와 忠靑[충청] ‧全羅[전라]의 全部[전부]를 차지한 것은 馬韓[마한]이라 하여, 많은 때에는 五四[오사]「불」이 聯立[연립]하고, 東[동]으로 慶尙北道[경상북도]와 南道[남도]의 一部[일부]를 차지한 것은 辰韓[진한]이라 하여, 六[육]「불」로부터 十二[십이]「불」에까지 分化[분화]하고, 慶尙南道[경상남도]의 大部[대부]를 차지한 것은 弁韓[변한]이라하여, 또한 十二國[십이국]의 聯立[연립]으로 이루어, 合[합]하여 七八[칠팔] 小國[소국]에 達[달]하는 적이 있고, 이밖에 조금조금한 別邑[별읍]이 여기저기 있읍니다. 古史[고사]를 보건대, 그 나라들이 大者[대자]는 萬餘號[만여호]라 하니 시방 一郡[일군]쯤 되는 것이요, 小者[소자]는 千七百戶[천칠백호]라 하니 시방 一大洞[일대동]밖에 아니 됨을 알 것입니다.「불」마다「干[간]」이라는 軍長[군장]이 있어 백성을 거느리고, 部[부]마다 「居西干[거서간]」이라는 王[왕]이 있어 域內[역내]의 모든 干[간]을 거느리고,馬韓[마한]에 總王[총왕]이 있어 三韓[삼한]을 統轄[통할]하였는데, 王族[왕족]은 어디든지 馬韓人[마한인]의 씨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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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낙랑]의 東[동]과 辰韓[진한]의 北[북], 시방 江原道[강원도]의 땅에는 濊[예](濊貊[예맥])가 있고, 예의 北[북], 시방 咸鏡道[함경도]의 北[북]에는 沃沮[옥저]가 있어 다 여러 邑落[읍락]의 聯立[연립]으로 나라를 이루었으니, 三老[삼로]라는 軍長[군장]이 있어 백성을 거느리었으며, 沃沮[옥저]는 처음 東西[동서] 兩部[양부]에 나뉘었다가 뒤에 西部[서부]는 없어지고 東部[동부]가 다시 南北[남북] 兩部[양부]로 갈리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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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浪[낙랑]의 北[북]과 沃沮[옥저]의 東[동], 대강 시방 平安北道[평안북도]와 鴨綠江[압록강] 건너에 걸치 어서는 高句麗[고구려]가 있었으니, 또한 許多[허다]한「불」의 聯合[연합]으로서 뒤에 五部[오부]로 統合[통합]되고, 部[부]마다「加[가]」란 軍長[군장]이 있고, 모든 加[가]의 上[상]에「古鄒加[고추가]」란 總王[총왕]이 있어 온 部族[부족]을 統一[통일]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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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고구려]는 大山[대산] 深谷[심곡]의 중에 處[처]하여 農利[농리]가 적고, 또 四方[사방]에 强大[강대]한 異部族[이부족]을 데리고 있어, 좀처럼 서둘러서는 自立自活[자립자활]이 어려운 事情[사정]이니, 그러므로 일찍부터 社會[사회]의 結束[결속]에 힘쓰고 또 크게 武力[무력]을 길러서 와서 붙어 文物[문물]과 勢力[세력]이 불시에 增加[증가]하고, 正[정]히 이때 한 二○[이십]년 전에 高朱蒙[고주몽]이라 하는 偉人[위인]이 五部[오부]의 하나인 卒本部[졸본부]에서 나서, 더욱 牢固[뇌고]한 統一的[통일적] 國制[국제]를 세우고, 大勢[대세]를 利用[이용]하여 크게 國運[국운]의 隆昌[융창]을 이루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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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고구려]가 좁은 골짜기에서 벗어나서 民生[민생]을 넉넉하게 하고 國威[국위]를 빛내려 하면, 먼저 앞으로 漢人[한인]의 東進[동진]하는 밀물같은 勢頭[세두]를 꺽고, 뒤로는 半島[반도]의 內腫病[내종병] 같은 漢人[한인]의 보금자리를 엎질러 버리어야 하겠으므로, 朱蒙[주몽]의 活動[활동]은 오로지 이 方面[방면]으로 集注[집주]되었는데, 이는 正[정]히 震域[진역] 모든 民部[민부]의 共通[공통]한 欲求[욕구]이므로, 濊[예]와 韓[한]을 아울러 民族的[민족적] 大同團結[대동단결]의 아래에서 漢[한]의 邊郡[변군] 政略[정략]과 樂浪[낙랑]의 蠶食運動[잠식운동]을 恒時[항시] 繼續[계속]하여 큰 功績[공적]을 나타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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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고구려]의 北[북]에는 松花江[송화강] 流域[유역]을 中心[중심]으로 하여 北扶餘[북부여]의 大國[대국]이 있어 半島[반도]의 일에는 상관없이 기름진 땅과 많은 物産[물산]으로써 오랜 전부터 富榮[부영]을 누리고, 그 東[동]에는 豆滿江[두만강] 北[북]으로부터 沿海州[연해주]에 걸치어서 挹婁[읍루]라는 未開[미개] 部族[부족]이 있어, 先進[선진]한 여러 나라에 半[반] 奴隸的[노예적] 生活[생활]을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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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오], 樂浪[낙랑] 漢郡[한군]驅逐[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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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고구려]가 先頭[선두]가 된 한 全衆人[전중인]의 共同[공동] 動作[동작]은 크게 效果[효과]를 나타내어, 漢[한]의 玄菟郡[현토군]은 연방 西[서]으로 쫓기어 가고, 樂浪郡[낙랑군]은 요모조모 갉아 뜯기어, 地域[지역]이 날마다 줄고, 또 뻔하게 그 遼東郡[요동군]을 進擊[진격]하여, 漢人[한인] 새로운 進出[진출]은 새로에 舊歲力[구세력]의 維持[유지]도 심히 안슬프게 되었읍니다. 東明聖帝[동명성제](朱蒙[주몽])의 崩後[붕후]에는 太祖王[태조왕](宮[궁]) ‧新大王[신대왕](伯固[백고]) ‧故國天王[고국천왕](男武[남무]) 같은 英主[영주]와, 明臨答夫[명림답부] ‧乙巴素[을파소]같은 賢相[현상]의 아래에 이 大方枕[대방침]이 依然[의연]히 繼續[계속]되고, 努力[노력]이 成功[성공]으로 갚아짐에 재미가 붙으매, 聯合[연합] 包圍[포위]의 攻擊[공격]은 더욱 巧妙[교묘]하게 行[행]하여 갔읍니다.
 
38
紀元[기원] 二[이]천 五[오]백 년경쯤에 이르러서는 高句麗[고구려] 其他[기타]의 壓迫[압박]이 더욱 審[심]하여, 樂浪郡[낙랑군]의 漢人[한인]들이 四方[사방]으로 離散[이산]하며, 支那[지나] 本國[본국]에서는 樂浪[낙랑]의 南[남], 시방 京畿[경기] 西部[서부]에 帶方[대방]이란 新郡[신군]을 베풀어 그 頹勢[퇴세]를 挽留[만류]하려 하였으나, 기울어 가는 판이라 이도 찐덥지 못하고, 그 후 未幾[미기]에 一線[일선]만큼 남았던 鴨綠江[압록강] 下流[하류]의 交通路[교통로]조차 高句麗[고구려]로 沒入[몰입]되어, 樂浪[낙랑] ‧帶方[대방]과 支那[지나] 本土[본토] 사이의 連絡[연락]은 海上[해상]으로 건너다닐 밖에 없이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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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안에 支那[지나]에서는 漢[한]이 亡[망]하고 魏[위] ‧吳[오] ‧蜀[촉]의 三國時代[삼국시대]가 되었는데, 高句麗[고구려]에는 東川王[동천왕](憂位居[우위거])이 나서 더욱 猛烈[맹렬]한 形勢[형세]로써 魏[위]의 邊軍[변군]을 攻別[공별]하니, 魏[위]에서도 견디다 못하여 二五七七[이오칠칠]년 (西紀[서기]二四四[이사사])에 그 幽州刺史[유주자사] 毌丘儉[관구검]이 大軍[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一勝[일승] 一負[일부]가 있고, 돌아간 뒤에 이듬해 다시 侵入[침입]하였읍니다. 魏軍[위군]은 오랜 戰亂[전란]에 여러 가지 새로운 戰術[전술]을 쓰는데, 高句麗[고구려]는 兵馬[병마]만 强[강]하였지 戰術[전술]이 舊套[구투]였으므로, 마침내 大敗[대패]하여 都邑[도읍]이던 丸都城[환도성]은 焚掠[분략]을 當[당]하고, 王[왕]은 沃沮[옥저]로 逃亡[도망]까지 하다가, 密友[밀우] ‧紐由[뉴유] 兩人[양인]의 精忠大勇[정충대용]을 힘입어 敵軍[적군]을 쫓고 故鄕[고향]을 恢復[회복]하니, 이는 實[실]로 時勢[시세]에 뒤진 탓으로 高句麗[고구려]가 立國[입국] 以來[이래]에 처음 羞辱[수욕]을 當[당]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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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의 失敗[실패]가 高句麗人[고구려인]에게 反省[반성]을 주어, 國策[국책]을 變[변]하여 北守南進[북수남진]의 길을 取[취]하게 하니, 이 結果[결과]로 沃沮[옥저]와 濊貊[예맥]의 一部[일부]가 먼저 高句麗[고구려]의 屬領[속령]이 되고, 樂浪[낙랑]도 날마다 疆域[강역]이 줄어들었읍니다. 高句麗[고구려] 하나만 하여도 견디기 어려운 참에, 二[이]천 五[오]백 년頃[경]으로부터 馬韓[마한]의 一國[일국]이던 百濟[백제]가 漸次[점차]로 고개를 치어들어, 附近[부근]의 小國[소국]을 아우르고 都[도]를 漢山[한산] (시방 廣州[광주])에 定[정]하고, 大方郡[대방군]을 北[북]으로 壓迫[압박]하기 비롯하였읍니다. 가뜩이나 금난 지가 오랜 저네의 二郡[이군]이 이렇게 腹背[복배]로 新興[신흥] 勢力[세력]을 받으매 兩[양]편으로가서 시방 黃海道[황해도] 境內[경내]로 오그라들다가 二六四六[이육사육]년(西紀[서기] 三三[삼삼])에는 樂浪[낙랑]은 高句麗[고구려]에게, 帶方[대방]은 百濟[백제]에게 쫓겨나서, 四[사]백 년간 궁둥이를 놓던 異民族[이민족]의 더부살이 郡縣[군현]의 이름과 실상이 깨끗하게 域內[역내]에서 없어지었읍니다 (이때 支那[지나]에는 三國[삼국]이 없어지고 晋[진]이 天下[천하]를 차지하였읍니다). 東方[동방]의 利權[이권]을 保持[보지]하기 위하여 支那[지나] 歷代[역대]의 王朝[왕조]가 꽤 압바틔기도 하고, 또 震域[진역]의 民邦[민방]이 제각기 서둘러서는 다 저네의 敵[적]이 아니지마는 能[능]히 그네의 오래고 큰 根據[근거]를 뽑아버린 것은, 오로지 오랫동안의 堅忍[견인]과 各方面[각방면]의 一段[일단] 協力[협력]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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半島[반도]의 服裝[복장]에 오랫동안 漢[한]의 郡縣[군현]이 들어와 있는 것은 여러 가지 重大[중대]한 影響[영향]이 있은 일입니다. 이때에 民族[민족]이라는 생각이 들고, 또 이네를 몰아내느라고 社會的[사회적] 結束力[결속력]이 부쩍 늘었고, 작은「불」들이 漸次[점차]로 큰「나라」로 發達[발달]하고, 또 이네들의 接觸[접촉]을 말미암아서 先進[선진] 文化[문화]를 輸入[수입]하여 모든 實力[실력]이 크게 向上[향상]하였으니 말하면 저네들 때문에 차린 精神[정신]과 저네들에게 배운 재주로써 저네들을 몰아낸 것이며, 또 이렇게 저네의 郡縣[군현]을 몰아낸 結果[결과]로 民族的[민족적] 覺醒[각성]이 그대로 國家的[국가적] 統一運動[통일운동]으로 化[화]할 기틀을 얻으니, 진실로 이 四[사]백년 동안 震域[진역]의 社會的[사회적] 發達上[발달상]에 있어서 퍽 重大[중대]한 한 時期[시기]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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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육], 高句麗[고구려]의 興起[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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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고구려]가 樂浪[낙랑]의 地[지]를 빼앗아 가질 때에, 그 덜 미인 樂水[요수] 저쪽에는 東胡[동호]의一族[일족]인 鮮卑[선비]가 꽤 强大[강대]한 勢力[세력]을 發揮[발휘]하니, 이 때문에 高句麗[고구려]의 發展[발전]이 樂水[요수] 以西[이서]를 나아가지 못하고, 더욱 故國原王[고국원왕] 十二[십이]년(西紀[서기] 三四二[삼사이]년)에 鮮卑[선비]의 一部[일부]로 遼西[요서]에 燕國[연국]을 세운 慕容氏[모용씨]에게 大敗[대패]를 當[당]한 뒤에는, 西方[서방]의 뜻을 아주 버리다시피 하고, 그 銳氣[예기]를 오로지 南方[남방]으로 向[향]하여 쏟았읍니다. 東邊[동변]의 沃沮[옥저] ‧濊貊[예맥]은 본디 民物[민물]의 系統[계통]도 同一[동일]하고 勢力[세력]도 대단하지 아니하매 高句麗人[고구려인]의 鋒鏑[봉적]이 向[향]하는 바에는 아뭄 어려움 없이 휩쓸려 들어갔지마는, 다만 西邊[서변]의 漢江[한강] 流域[유역]에는 馬韓[마한]을 統一[통일]해 가진 百濟[백제]의 新興[신흥] 勢力[세력]이 있어 만만히 휘어들지 아니하매, 兩雄[양웅]의 衝突[충돌]이 시방 臨津江[임진강] 附近[부근]의 地[지]에서 演出[연출]하지 아니하지 못하였읍니다. 正[정]히 이때에 辰韓[진한]의 十二國[십이국]이 新羅[신라]에 統一[통일]되고, 弁韓[변한]의 大部[대부]까지를 兼倂[겸병]하여, 다시 一勢力[일세력]을 이루어 또한 北方[북방]의 經略[경략]을 行[행]하니 이 三勢力[삼세력]의 交會點[교회점]인 漢江[한강] 流域[유역]은 이뒤 수백 년간 歷史[역사]의 中心[중심]을 이루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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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三國[삼국]이 鼎立[정립]하여 半島[반도]에서 角逐[각축]하게 된 것은 대략 二[이]천 七[칠]백년경으로부터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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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國原王[고국원왕]은 北方[북방]에서 잃은 바를 南方[남방]에서 恢復[회복]하려고 燥急[조급]히 굴어, 三九[삼구]년과 그 이듬이듬해에 거푸 大軍[대군]으로써 黃海道[황해도] ‧京畿道[경기도]의 北[북]에서 百濟[백제]를 壓迫[압박]하였으나, 두 번 다 失敗[실패]하고, 나중 싸움에는 百濟[백제]의 近肖古王軍[근초고왕군]에게 平壤城[평양성]까지 쫓겨와서 拒戰[거전]하다가, 필경 그 流矢[유시]에 맞아 돌아가니, 이로부터 麗[여] ‧濟[제] 兩國[양국]이 다시 和同[화동]할 수 없는 원수를 이루었읍니다. 이뒤 少獸林[소수림] ‧古國壤[고국양] 兩王[양왕] 二○[이십]여 년의 동안은 南北[남북]에서 받은 瘡痍[창이]를 낫우기 위하여 오로지 文化政策[문화정책]을 取[취]하고, 燕[연]을 대신하여 支那[지나]의 北方[북방]을 차지한 秦[진]하고도 好意[호의]로써 사귀어, 그 文物[문물]을 굉장히 輸入[수입]하여 實力[실력]의 養成[양성]을 힘쓰니, 佛法[불법]의 東來[동래]와, 太學[태학]의 設立[설립]과, 律令[율령]의 頒布[반포]는 도무지 이동안의 일이요, 이러한 努力[노력]은 금시에 高句麗[고구려]의 威光[위광]을 놀랄 만큼 增大[증대]하여 놓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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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고구려]의 國力[국력]이 한참 充實[충실]하고 民志[민지]가 한껏 緊張[긴장]하였을 때에, 이를 活用[활용]하는 偉人[위인]이 나왔으니, 談德王[담덕왕]이 그이입니다. 王[왕]은 智略[지략]과 武勇[무용]이 絶倫[절륜]하여, 紀元[기원] 二七二四[이칠이사]년(西紀[서기] 二九一[이구일])에 十八歲[십팔세]로 王位[왕위]에 올라서 三九歲[삼구세]에 昇遐[승하]하기까지, 무릇 二三[이삼]년 동안에 四方[사방]을 攻略[공략]하여 曠前[광전]한 大功業[대공업]을 세웠다. 먼저 힘을 南方[남방] 經略[경략]에 오로지하여, 해마다 百濟[백제]와 싸워서 그 땅을 蠶食[잠식]하여 빼앗고, 더욱 榮樂[영락] 五[오]년(西紀[서기] 三九五[삼구오]년)에는 臨津江[임진강] 近處[근처]의 싸움에 百濟[백제]를 大破[대파]하여, 前後[전후] 合[합] 五八城[오팔성] 七百村[칠백촌]을 百濟[백제]에게 取[취]하고, 南境[남경]을 江華[강화] ‧楊洲[양주] ‧永平[영평]의 線[선]에까지 내키었는데, 百濟[백제]는 倭[왜]의 힘을 빌어 그 危難[위난]을 늦추려 하고, 倭[왜]는 百濟[백제]를 도와서 그 壓迫[압박]을 免[면]하려 하여 濟[제] ‧倭[왜]의 聯合[연합]이 成立[성립]하였으나, 아울러 王[왕]에게 潰敗[궤패]하고, 또 新羅[신라]는 도리어 高句麗[고구려]를 連結[연결]하여 倭[왜]를 拒斥[거척]하다가, 한때 倭軍[왜군]의 侵擾[침요]를 입었으나, 또한 王[왕]의 軍[군]에게 擊壤[격양]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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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高句麗[고구려]와 新羅[신라]와의 國境[국경]은 太白山[태백산]으로 부터 三陟[삼척] 以北[이북]에 뻗친 금이었읍니다. 南方[남방]의 걱정이 없어진 뒤에는 다시 西北[서북]으로 말굽을 돌리어서 그동안 後燕[후연]에게 도둑맞았던 新城[신성] ‧南蘇[남소] 等地[등지]를 恢復[회복]하고, 다시 앞으로 攻略[공략]을 行[행]하여 玄菟현토](이때에는 奉天[봉천]) ‧遼東[요동](療陽[요양]) 등을 빼앗고, 땅을 療下[요하] 건너, 시방 廣寧[광영] 附近[부근]에까지 넓히어서, 이때까지 물려 지내던 원통을 시원히 풀었읍니다. 王[왕] 一代[일대] 攻破[공파]한 것이 무릇 城[성]이 六四[육사]로 村[촌]이 一[일]천 四[사] 백이니, 王[왕]의 가는 바에는 草木[초목]도 시그러지는 形便[형편]이었읍니다. 王[왕]의 峯後[봉후]에 그 功業[공업]을 嘆美[탄미]하여「廣開土境[광개토경] ‧平安[평안] ‧好太王[호태왕]」이란 尊號[존호]로써 일컫고, 또 혹 王[왕]의 年號[연호]를 因[인]하여「永樂大王[영락대왕]」이라고 尊稱[존칭]도 하니, 그 陵[릉]과 큰 紀蹟碑[기적비]가 시방 楚山[초산] 鴨綠江[압록강]의 對岸[대안]인 支那[지나] 奉天省[봉천성] 輯安縣[집안현] 通衢[통구]란 곳에 있읍니다. 通衢[통구]는 高句麗[고구려] 當時[당시]의 都城[도성]인 丸都[환도]의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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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開土王[광개토왕]의 子[자]는 長壽王[장수왕]이니 在位[재위] 七九[칠구]년의 間[간](紀元[기원] 二七四六[이칠사육] ~ 二八二四[이팔이사, 西紀[서기] 四一三[사일삼~ 四九一[사구일])에 父業[부업]을 이어서 高句麗[고구려]의 伯業[백업]을 完成[완성]하였읍니다. 이때에 支那[지나]는 이른바 五胡十六國[오호십육국]의 북새를 치르고 南北[남북] 兩朝[양조]에 統一[통일]되어 北方[북방]에는 後魏[후위]가 섰었는데, 王[왕]은 魏[위]하고 和好[화호] 關係[관계]를 맺고 더욱 南方[남방]의 經營[경영]에 힘을 오로지할 새, 十五[십오]년에는 都[도]를 平壤[평양]으로 옮기어 그 發展[발전]을 便利[편리]케 하여 걸음걸음 南[남]으로 進取[진취]하기에 힘썼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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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백제]는 毋論[무론]이요 高句麗[고구려]에 服屬[복속]하였던 新羅[신라]도 그 壓力[압력]의 逼切[핍절]하여짐을 견디다 못하여, 高句麗[고구려]의 平壤[평양] 遷都[천도] 후 七[칠]년 만에 드디어 濟[제] ‧羅[나]의 聯合[연합]이 成立[성립]하여 그 南下[남하]의 勢[세]를 막았으나, 王[왕]의 五二[오이]년인 紀元[기원] 二七九七[이칠구칠]년(西紀[서기] 四六四[사육사])에는 東[동]으로 新羅[신라]를 쳐서 찔끔하게 하고, 六三[육삼]년(西紀[서기] 四七五[사칠오])에는 南[남]으로 百濟[백제]를 親征[친정]하여 그 國都[국도]인 漢城[한성](廣州[광주])을 빼앗고 그 王[왕] 盖鹵[개로]를 잡아서 죽이고, 그 나라가 南[남]으로 쫓겨 가니, 이때로부터 高句麗[고구려]의 南疆[남강]이 牙山灣[아산만]으로부터 俗離山[속리산]의 北[북]으로 하여 太白山脈[태백산맥]을 끼고 三陟[삼척]까지 이르는 동안에 達[달]하고, 또 北[북]에서는 廣開土[광개토] ‧長壽[장수] 兩王[양왕]의 間[간]에 松花江[송화강] 저쪽 夫餘[부여]의 땅을 거의 다 아울러서, 드디어 震域[진역]에서 空前[공전]한 大版圖[대판도]를 이루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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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結果[결과]로 高句麗[고구려]는 漢江[한강] 方面[방면]의 漢城[한성]과, 大同江[대동강] 方面[방면]의 平壤[평양]과, 鴨綠江[압록강] 方面[방면]의 國內城[국내성]을 三京[삼경]이라 이름하여 國運[국운]의 隆盛[융성]을 자랑하였으며, 百濟[백제]는 蓋鹵王[개로왕]의 子[자]인 文周王[문주왕]이 都[도]를 雄鎭[웅진](公州[공주])으로 옮기어서 다시 기운을 펴지 못하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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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칠], 三國[삼국]의 鼎立[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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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삼국]의 中[중]에 建國[건국]이 가장 오랜 者[자]는 高句麗[고구려]요, 百濟[백제]가 그 다음이요, 新羅[신라]가 가장 뒤지니, 新羅[신라]가 나라다운 나라가 되기는 實[실]로 高句麗[고구려]보다 三[삼]백 년 以上[이상] 뒤지어서위 일이요, 新羅[신라]의 나온 뒤에도 弁韓[변한]은 한참 동안 小[소]「불」의 分立[분립]한 채로 있고, 다시 二[이]백년 以上[이상]을 지낸 뒤에야 新羅[신라]에게로 倂合[병합]되었읍니다. 이 모든 나라는 본디부터 同一[동일]한 宗族[종족]임은 勿論[물론]이요, 分立[분립]한 지도 오래고 또 中間[중간]에 支那人[지나인] 漢[한]의 郡縣[군현]이 끼여 있었건마는 言語[언어]에도 대단한 差別[차별]이 생기지 안니하였고, 法俗[법속]도 風土[풍토]의 다른 분수로 보아서는 差異[차이]가 그리 없은 셈이었읍니다. 더욱 언제 어디서든지 一致[일치]하여 變[변]하지 아니한 者[자]는 「하누님」(곧「밝은님」)을 信仰[신앙]하는 宗敎[종교]와, 자갸네의 國祖[국조]가 天帝者[천제자]로서 降世[강세]하여 人間[인간]의 推戴[추대]를 받았다는 建國史談[건국사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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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傳[전]하는 여러 나라의 배포하던 이야기는 아래와 같읍니다. 처음 北夫餘[북부여]의 金蛙王[금와왕] 時節[시절]에 天帝[천제]의 子[자]인 解募漱[해모수]가 雄心山上[웅심산상]에 내려와서 河伯[하백]이 女[여]인 柳花[유화]와 婚姻[혼인]하여 一子[일자]를 낳으니, 骨表[골표]가 英奇[영기]하고 어리어서 弓矢[궁시]를 自作[자작]하여 쏘매 百發百中[백발백중]하니, 夫餘[부여]의 俗[속]이 활 잘 쏘는 이를 鄒牟[추모](朱蒙[주몽])라 하므로, 因[인]하여서 이름을 지었읍니다. 王[왕]의 宮中[궁중]에 收養[수양]되더니, 원체 온갖 技能[기능]이 出衆[출중]하므로, 王[왕]의 諸子[제자]의 猜忌[시기]한 바 되어 容納[용납]하지 못하고, 벗 세 사람과 한가지 淹遞水[엄체수]를 건너서 卒本川[졸본천]의 流域[유역]에 이르러, 본디 있던 松讓王[송양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세워 高句麗[고구려]라이름하고 高[고]로써 姓[성]을 삼았으니, 이것은 紀元[기원] 二三九七[이삼구칠]년(西紀前[서기전 三七[삼칠]])의 일어나 前[전] 王都[왕도]인 松讓[송양]의 創立[창립]은 이보다 훨씬 앞서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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鄒牟[추모]가 松讓王[송양왕]의 딸을 장가들어서 沸流[비류] ‧溫祚[온조] 兄弟[형제]를 낳았더니, 鄒牟[추모]가 夫餘[부여]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太子[태자] 되매 서로 和同[화동]되지를 못하고, 近臣[근신] 一[일]○人[인]과 百姓[백성]을 데리고 南[남]으로 馬韓[마한] 北方[북방]의 땅에 내려와서, 兄[형]은 彌鄒忽[미추홀](시방 仁川[인천])에 나라를 세웠다가 오래지 않아 땅에 없어지고, 溫祚[온조] 는 漢水[한수]의 南[남]인 慰禮城[위례성]에 나라를 세웠다가 兄[형]의 臣民[신민]을 합하여 國號[국호] 百濟[백제]라 하고, 그 보이 夫餘[부여]에 나왔으므로 夫餘[부여]로써 姓[성]을 삼으니, 이것이 紀元[기원] 二三一六[이삼일육]년 (西紀前[서기전] 十八[십팔]의 일이라 하나, 百濟[백제]의 제법한 나라가 되기는 이보다 훨씬 뒤서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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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신라]는 옛날 朝鮮[조선]의 流民[유민]이 馬韓[마한] 西方[서방]의 땅으로 들어가서 辰韓[진한]으 一地方[일지방]에서 六部[육부]에 나누어 지내는 것이러니, 뒤에 陽山[양산]의 밑에서 赫居世[혁거세]라 하는 天降[천강]한 小兒[소아]를 얻어서 推戴[추대]하여 軍長[군장]을 삼고, 六部[육부]를 合[합]하여 一國[일국]을 만들고, 國號[국호]를 新羅[신라]라 하니 이는 朴氏[박씨]의 祖[조]이며, 뒤에 正明國[정명국](天國[천국]의 義[의])으로 부터 脫解[탈해]라 하는 이 와서 智慧[지혜]가 出衆[출중]하매 돌리어서 王位[왕위]를 맡으시니 이는 昔氏[석씨]의 祖[조]이며, 脫解王[탈해왕]의 時節[시절]에 國都[국도]의 西[서]인 始林[시림]에 金櫝금독]이 天[천]으로서 내려오고, 小兒[소아]가 그 속으로서 나와서 金氏[김씨]의 祖[조]가 되었다가, 그 六世孫[육세손]인 味鄒[미추]로부터 朴[박] ‧昔[석]兩氏[양씨]와 한가지 王位[왕위]를 돌리어 맡게 되니, 이렇게 新羅[신라]의 王位[왕위]는 다 天[천]으로 내려왔다는 三姓[삼성]이 돌려 가면서 英特[영특]한 이를 올려 세우는 법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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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신라]이 國都[국도]는 처음부터 시방 慶州地[경주지]에 있어「섭울」이라 일컫고, 또 金城[금성], 鷄林[계림]이란 別名[별명]을 가지었으니「섭울」은 시방「서울」이란 말의 根本[근본]이요, 鷄林[계림]은 뒤에 新羅[신라]의 別名[별명]이 된 것입니다. 赫居世[혁거세]의 建國[건국]은 紀元[기원] 二二七七[이이칠칠]년(西紀前[서기전] 五七[오칠])의 일이라 하나 분명히 辰韓[진한]을 統一[통일]하여 나라 꼴이 되기는 紀元[기원] 二[이]천 六[육]백 년경에 金氏[김씨]가 임금 노릇하기 비롯한 무렵 부터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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弁韓[변한]은 一[일]에 加羅[가라](혹 駕洛[가락] ‧伽倻[가야])라고 하여 數十[수십]의 小部[소부]에 나누이고, 그중에 六伽倻[육가야]가 좀 컸으며, 또 그중에는 金官[금관](시방 金海[김해])이 가장 勢力[세력]을 가지어서 大加羅[대가라]라고 일컬었읍니다. 加羅[가라]는 본디 九部[구부]의 聯合[연합]으로 지내더니, 그 部長[부장]들이 龜旨山[구지산]에 모이어서 天主[천주]께 禮拜[예배]하다가, 天降[천강]한 育兒[육아]를 얻어 길러서 그중 큰 이를 大加羅[대가라]의 임검으로 떠받드니 이가 首露王[수로왕]이라 하는 이요, 또한 金[김]으로써 姓[성]을 삼았으며, 나머지 五人[오인]이 나누어 五加羅[오가라]의 임검이 되니, 이것이 紀元[기원] 二三七五[이삼칠오]년(서기 四二[사이])의 일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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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팔], 高句麗[고구려]의 霸業[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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支那人[지나인]의 侵入[침입]으로 因[인]하여 民族[민족]이란 것을 알고, 다른 民族[민족]에 대하여 내 民族[민족]의 自主[자주]를 確保[확보]해야 할 것을 깨달아, 오랫도안의 大同[대동]으로한 努力[노력]이 마침내 뿌리 깊은 남의 勢力[세력]을 몰아내었읍니다. 한번 생긴 民族觀念[민족관념]은 마침내 分立[분립]으로서 統一[통일]로 傾向[경향]하기를 마지아니하여, 前震人[전진인]이 一國[일국]을 目標[목표]로 온갖 거치적거리는 것을 排除[배제]하려는 局面[국면]을 만들어 내니, 이 三國[삼국]의 葛藤[갈등]은 실상 오래 따로 놀아서 各異[각이]하게 된 事情[사정]을 없이해버리고, 하루 바삐 民族的[민족적] 統一[통일]으 實現[실현]하려 하는 大勢[대세]로서 나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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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方[북방]에서는 鮮卑[선비]의 後[후]가 契丹[거란]이 되고, 挹婁[읍루]의 後[후]가 靺鞨[말갈]이 괴고, 契丹[거란]의 西[서]에는 突厥[돌궐]이 있고, 靺鞨[말갈]이 北[북]에는 室韋[실위]가 있어 將棊장기]튀김으로 壓迫[압박]을 더하여 오고, 西方[서방]에는 五胡[오호]의 侵入[침입]에 대하여 부쩍 民族的[민족적] 半撥力[반발력]을 發揮[발휘]하기 시작한 支那人[지나인]이 南方[남방]의 勢力[세력]을 뭉치어서 北方[북방]의 勢力[세력]을 쫓아내밀 양으로 北朝[북조] 魏[위]에 대한 南朝[남조] 宋[송]이 되고, 北方[북방]의 齊[제] ‧周[주]에 대한 南方[남방]의 南齊[남제] ‧梁[양] ‧陳[진]이 되고, 마침내 隨[수]를 因[인]하여 中原[중원]이 다시 支那人[지나인]의 손에 統一[통일]되고, 唐[당]이 그를 成立[성립]하여 지나支那思想[지나사상]의 처음보는 强盛[강성]한 時代[시대]를 만들어서, 그 壓力[압력]이 또한 東[동]으로 미쳐 오고, 南方[남방]에서 半島[반도]로서 南進[남진]한 夫餘[부여] 移住民[이주민]이 南海[남해]로서 流入[유입]한 種族[종족]을 合[합]하여, 오랫도안 部落的[부락적] 生活[생활]을 하면서 文化[문화]와 物質[물질]을 韓土[한토]에 얻다가 지내던「예」가 차차 耶馬臺[야마대]의 손에 統一[통일]한 國家[국가]가 成立[성립]하기 비롯하여 업신여기지 못한 形勢[형세]를 보이니, 이러한 外部[외부]의 形勢[형세]는 內部[내부]의 覺省[각성]을 도와서 全[전] 震人[진인]의 統一的[통일적] 國家[국가]의 出現[출현]을 급급히 재촉하게 되고, 따라 三國[삼국]의 결고틂은 나날이 猛烈[맹렬]을 더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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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은 異民族[이민족]에게 둘리어 있어 가장 많이 성가심을 받은 者[자]가 高句麗[고구려]니, 그러므로 가장 깊은 民族的[민족적] 自立[자립]을 힘쓴 것이 그이입니다. 新羅[신라]는 倭[왜]로 더불어 接觸[접촉]이 많고, 또 그네의 長成[장성]함을 따라서 葛藤[갈등]도 점점 甚[심]하여지매, 그 民族感[민족감]도 자못 深刻[심각]한 것이 있었으나, 立國[입국]이 가장 뒤지어서 아직 뻗을 기운이 없으므로, 高句麗[고구려]와 倭[왜]를 겨끔내기로 利用[이용]하여, 오로지 外交[외교]의 재주를 맏을 밖에 없는 故[고]로, 그 自主的[자주적] 力量[역량]이 얼만큼 薄弱[박약]을 免[면]치 못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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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백제]는 당초에는 南方[남방] 勢力[세력]의 代表的[대표적] 地位[지위]를 가지고 大方郡[대방군] 方面[방면]의 支那勢[지나세]를 驅逐[구축]하는 禿鋒[독봉]이 되었으나, 두터이 自然[자연]의 恩寵[은총]이 두터워서 生活[생활]이 安易[안이]하므로 意氣[의기]가 풀죽기 쉽고, 또 切逼[절핍]하게 異民族[이민족]의 귀찮음을 겪음이 적으므로 民族的[민족적] 自覺[자각]이 좀 鈍[둔]한 편인데다가, 高句麗[고구려]와 新羅[신라]의 壓力[압력]이 海上[해상]으로 더하는 대로 倭[왜]는 百濟[백제]를 힘입어 이를 늦추려드는데, 百濟[백제]는 新羅[신라]의 發達[발달]을 따라서 北[북]의 高句麗[고구려] 밖에, 다시 東[동]으로 新羅[신라]의 새 侵逼[침핍]을 당하매 倭[왜]로 더불어 通好[통호]하기를 사양하지 아니하여, 그에게 文敎[문교]를 주는 대신 그의 武力[무력]을 빌기로 하니, 이것이 한때 그에게 便利[편리]도 하였지마는, 남을 믿는 結果[결과]가 마침내 저를 쭈그러지게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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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보다 남을 기대려 한 百濟[백제]가 가장 먼저 自主的[자주적] 無能者[무능자]가 되고, 新羅[신라]도 實力[실력]보다 外交[외교]를 힘쓰는 동안에는 國力[국력]의 發展[발전]이 보잘 것 없는데, 高句麗[고구려]는 이중에 있어서 形勢[형세]가 어떻게 變移[변이]하든지 絶對自助[절대자조]의 國是[국시]를 確立[확립]하여, 外部[외부]의 壓力[압력]이 더하여지면 그대로 自主心[자주심]을 가다듬고, 또 그 精神[정신]에 相應[상응]하는 實力[실력]의 養成[양성]에 힘써, 마침내 確乎不拔[확호불발]하고 卓然特出[탁연특출]한 地步[지보]를 占有[점유]하니, 三國[삼국]의 幷立[병립]한 동안의 前半[전반]으 개 依然[의연]한 自助[자조]로써 震域[진역]에 霸業[패업]을 세워 가진 高句麗人[고구려인]의 판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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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九二八年[일구이팔年년] 月刊[월간] 한빛 一[일] ‧二月[이월]~ 四[사] ‧五月[오월] 倂合號[병합호]>
【원문】조선역사강화(朝鮮歷史講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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