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하고 싶던 말-하고 싶으면서도 못 하던 말을, 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진실로 시원한 일이다.
4
△ 지난 옛날(악몽시절이었다) 역사소설이나, 사담(史譚)을 쓰고저, 역사 책을 뒤지노라면, 모두가 눈에 거슬리는 소리뿐이었다. 한적(漢籍)을 보면 한적에는 지나인(支那人)의 존대심 때문에, 동이(東夷)인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을 내려깍은 기록, 왜적(倭籍)을 보면 왜적 또한 무호동중(無虎洞中) 의삵모양으로, 자기만을 추켜올린 기록, 한적(韓籍)을 보면 한적 역시 제 조국보다 지나를 더 추앙하는 곡필(曲筆) 기록.
5
△ 이러한 아래서 자라나는 우리의 자제들은, 자연히 스스로 자기를 경멸하고, 남을 숭배하는 노예관념이 생기게 될 것이다.
6
△ 기자(箕子) · 신공황후(神功皇后) · 천조대신(天照大神) · 성동명(聖東明)은 모르지만, 자서여(子胥餘)며 신공녀(神功女)는 아는 우리의 가련한 부로(父老)와 자제. 을지문덕의 위대는 모르지만 이세민(李世民)의 강용(强勇)은 아는 우리의 가련한 형제들.
7
△ 조선(祖先)을 알리지 않으려는, 일본인의 40년의 교육정신은, 오늘날의 이런 병신의 조선.
8
△ 통일된 한 개의 이야기는 아니라, 조각조각, 시재 머리에 생각나는 대로,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순서없이 계통없이 쓴 글이지만, 우리 겨레의 사람으로는 누구나 알아야 할- 알지 못하면 안될 이야기다.
9
△ 줄기를 잡아서 계통 있게, 사서(史書)로, 꾸미었으면 좋겠지만 최근 신변이 공총(倥傯)하여, 초고 그대로 상재케 됨은 유감이나, 좌우간 하고 싶으면서도 못하던 말의 일부분이라도 하고 보니, 속이 좀 시원하다. 독자도 읽은 뒤에 좀 시원한 느낌을 얻어 주면 그 이상 만족이 더 없겠다.
11
1. 高句麗[고구려]-壇君[단군]겨레의 統師[통사]
12
단군의 일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고려승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가 현존한 최고의 것이다. 거기는, 魏書云[위서 운], 乃往二天載[내왕이천재], 有壇君王儉[유단군왕검], 立都阿斯達[입도 아사달], 開國號朝鮮[개국호조선], 云云[운운]’ 이라 되어 있다. 그러나 ‘위서운(魏書云)’이라 한 위서가 현존치 않다는 이유로, 일본인은 단군을 부인한다. 그러나 천 년 전 기록인 「삼국유사」가 ‘위서에 그런 기록이 있다’고 명언하고 「삼국유사」의 찬자 일연(撰者 一然)이 무슨 단군설을 창출해 낼 의도나 필요성이 있을 사람이면 여니와 불연한 이상은 「삼국유사」의 ‘위서운’의 기록을 의심할 필요가 없고, 그를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무슨 다른 의도거나 야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해도 실수가 아닐 것이다. 단군 건국이 당고(唐高) 즉위 50년이라 하였다.
13
그 뒤 단군은 어국(御國) 1,500년, 주무왕(周武王) 즉위 기묘에, 주에서 기자를 조선 왕으로 봉하기 때문에, 즉 다시 말하자면 한족의 침략에 단군은 밀리어 장당경(藏唐京)으로 가셨다가 다시 처음을 만든 것이다.
14
△ 고사서를 펴 볼 때마다 문득문득 가슴에 엉기던 분만(憤懣)- 일본인이 휘지 비지(諱之秘之) 하여 (일본인에게까지도)감추려던 일본 사상(史上) 비밀, 혹은 우리의 지나 숭배의 선유(先儒)들이 곡필했던 선사(先史)- 생각나는 대로 틈틈이 몇 줄씩 적던 것 가운데서, 삼국 이전 것만 추려 내니, 그것이 즉 이 책이다.
15
△ 탈고하고 나서 또 우연히 일연의 「삼국유사」를 폈다. 대목대목을 골라 읽기는 그 번수를 다 따질 수 없고, ‘통독’하기도 6~7회째다. 그 회수가 많아짐을 따라서, 이 책의 고마움은 더 늘어간다.
16
△ 일연의 이 저술만 없었더면, 우리는, 성조(聖祖) 단군을 어디서 찾고, 어디서 알랴. 성조 단군을 모르고는, 우리가 한 겨레라는 것을 어떻게 알랴.
17
△ 발달사학적으로 따지자면, 분명히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는 옛날, 한 갈래에서 갈린 것이라는 필연적의 결론은, 얻을 수가 있다. 그러나 누구를 시조로 한, 어떤 갈래였는지는- 여기 대한 해답은, 오직 이 「삼국유사」가 있을 뿐이다. 해답해 주어 가로되 ‘본시, 단군이라는 성인이 계셨느니라’ 고.
18
△ 일본인 학자들은 자기네의 좁으러운 주관으로, 단군을 부인하여 놓고(단군을 인정하고서야 비로소 해명될) 고대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발전 사실(史實)의 해답을 못 얻어, 쩔쩔매었다. 단군시대를 부인하고 보니, 고구려는 만주의 선조가 되고, 삼한만이 조선의 선조가 된다. ‘만주’와 ‘한(韓)’이 어떻게 오늘날 ‘조선’이란 한 덩어리가 되었는가, 일본인 학자들은 여기서 딜렘마에 봉착하여 쩔쩔맨 것이다.
19
△ 「삼국유사」의 불용의(不用意)한 단 몇 줄의 기록만 없었더면, 우리 또한 꼭 일본인과 같은 의문에 봉착했을 것이다. 발달사학적 필연의 결론으로, 삼국 이전, 삼한 이전에 이 겨레는 본래 한 갈래였으리라는 추론만은 얻을 지나, 누구에게서 또는 언제, 어떠한 갈래가 갈리어서, 남쪽으로 내려와 서는 삼한이 되고, 중부에는 지나종이 끼고, 북쪽에 주저앉은 자는 부여, 혹 고리(槀離)가 되었었다는 것이야, 상상만으로는 얻지 못할 해답이다.
20
△ 일본인의 조선에 대한 사설(史設)은, 꼬투머리의 조군(祖君)을 부인 하고서 시작된 것이라, 근본부터 틀리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일본은 신국(神國)이라는 교육방침과, 식민지인인 조선인에게 대한 지도방침 등이 아울러서, 우리의 자제들은 전연 우리의 역사를 모른다. 게다가 부로들 역시, 유교의 노예 사상 아래서 생겨난 조선 역사(일본의 한국통감부 시절에 편수된)를 알뿐, ‘기자 없는 조선’은 알지 못한다.
21
△ 단군겨레의 조선, 우리의 조선을 단편적으로 말한 것이 이 책이다.
23
그런데 일본인이며 일부인은 단군 어국 1,500년이란 것을 황당무계하다 하여, 이로써 단군을 부인하려 한다.
24
이것은 단군을 한 분이라 보는 착각에서 생겨나는 잘못된 해석이요, 처음 아사달에 건국하신 단군은 ‘왕검(王儉)’이요, 마지막 동명제(東明帝) 고주몽에게 전위(傳位)하신 당군은 ‘해모수(解慕漱)’다. 즉 ‘단군’은 이 겨레의 성주(聖主)라는 대칭(代稱)이다.
25
글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일이라, 단군이 합계 몇 분이며 몇 대인지는 상고 할 바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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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明[동명], 壇君之子[단군지자]라 한 고기(古記)가 있고, 「삼국유사」에,
27
‘天帝降干訖升骨城[천제강간흘승골성], (略[략]), 自稱解慕漱[자칭 해모수]. 生子名扶婁[생자명부루]’라 한 것이 있고, 역시 「삼국유사」에, ‘壇君記云[단군기운], 君(壇君) 與西河河伯之女要親[군(단군) 여서하하백지여요친]. 生子名扶婁[생자명 부루]’라 한 것 등으로 보아서, 해모수, 즉 단군이요, 또한 ‘천제(天帝)’이다. 즉 단군을 옛날 기록에는 천제라고 불러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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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도 또 천제 해모수의 아들이란 것은, 당년 온 동방에 퍼졌던 유명한 전설인 모양으로 한토(漢土)에도 많이 유포되고 있던 듯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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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아사달서 시작된 배달민족이, 차차 서는 요(遼), 동은 바다, 북은 극지(極地), 남은 반도까지 - 즉 요 이동의 전 동방(全東邦)에 번식되고, 불함 문화(不咸文化) 겨레를 무어 나갔으니, 2천 년의 세월은 소비했을 것이며 단군 - 왕검에서 해모수까지 몇 대인지는 모르겠지만 단군 세월은 계속 되어, 고구려 동명에게 뒤를 물린 것이다.
30
우주생명의 근원인 ‘해(解)’와 인조광명(人造光明)의 근원인 ‘불(扶餘[부여])’ 은, 이 종족의 거룩한 신앙과 전설의 대상이다. 그리고 해며 불의 소산물인 ‘밝’‘배’‘백’‘발’(광명)이며, ‘해’‘한’(大[대], 崇[숭], 天[천]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韓[한], 澣[한] 등 한자를 붙인다) 등은 즐겨서 자기를 과장하기 위하여 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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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시조 동명은 단군의 후계자로서, (동명의 성도 解氏[해씨]다) 그의 탄생 신화는 전 동방의 신앙으로 되어, 동명 후 천여 년인 고려 중엽인 이규보(李奎報)의 ‘이상국집 동명왕편(李相國集 東明王篇)’을 보자면, ‘世多說東明王神異之事[세다설동명왕신이지사], 雖愚夫騃婦[수우부애부], 亦頗能設其事[역파능설기사] 云云[운운]’ 하여 1천 년 후까지, 국계(國系)를 달리한 고려 때까지,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하였으니, 동방인의 신으로, 꽤 존숭되던 모양이요, 더우기 고구려인은 찍하면 고구려 800년간을 내내, ‘天帝之子[천제지자] 河伯之甥[하백지생], 東明聖帝[동명성제]의 나라의 백성 이노라’ 고 뽐냈으며 동방에는 동명을 본떠서 난생(卵生)이라고 한 임금이 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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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모두 단군겨레라는 서로 공통된 신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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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어떤 사람은, 신라의 건국이 고구려보다 앞서지 않았느냐, 앞선 자가 어찌 뒤선 자를 본뜨랴고 할는지 모르지만, 신라가 먼저 건국된 듯이 「삼국사기」에 쓰인 것은 「삼국사기」의 찬자인 신라 후인 김부식의 붓 농락 때문에 생긴 착각이지, (몇 해 앞섰는지는 지금 상고할 수 없으나) 여기 참고 할 것은 한서 「북사(北史)」에 한소제(漢昭帝)가 고구려 왕(제3대 무신 왕인 듯)에게 의책(衣幘, 조복(朝服), 고취(鼓吹) 등을 ‘하사’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한소제는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보다 약 50년 전인이다. 고구려의 건국이 먼저라는 것은 사가(史家)의 일치된 견해며, 온갖 정세로 보아도 앞섰을 것이며, 당나라 시어사 가언충(賈言忠)의 ‘高句麗秘記云[고구려비기운], 高句麗不及九百年[고구려불급구백년], 八十大將亡之[팔십대장망지], 高氏自漢有國[고씨자한유국], 今九百年[금구백년], 勣(征麗將)年八十矣[적(정려장)년팔십의]. 云云[운운]’ 이란 것으로 보아도 「삼국사기」가 말하는 바의 705년과는 엉뚱히 달라서 「삼국사기」에는 실제보다 근 200년이, 축감되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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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이 단군을 묵살하고, 고구려를 경원한 정사(正史)를 남기고 또, 구 삼국사기며 고기(古記), 김부식 「삼국사기」 이전의 모든 사기(史記)는 인멸되고, 게다가 유학 수입은 침략자 기자를 도리어 조선 왕으로 추대 하는 위에, 일본인의 건국선후 경쟁 등 가지가지의 까닭 때문에, 우리는 하마터면 우리의 거룩하신 옛 어른들을 잃을 뻔하였다.
35
이렇듯 고구려는, 단군겨레인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에서 가장 먼저 건국 하였다. 그리고 우선 송양(松讓)의 나라(비류), 금와(金蛙)의 나라(부여) 등의 단군겨레의 나라들을 흡수하고, 옥저(沃沮), 예(濊), 숙신(肅愼) 등을 예하에 넣으며, 한족에게 한때 횡령당했던 현토 낙랑 등지를 복멸하고, 꾸준히 요동으로의 진출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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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기 이 단군겨레의 성창을 꺼리는 한민족이 대동단결하여, 수나라의 한족 통일의 대세력으로 배달종족 복멸을 목표로 한 대공격이며, 그 뒤를 계승한 당나라의 내침을 격퇴하여, 배달겨레의 이름을 천하에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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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800년의 역사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영원토록 자랑할 우리의 자랑거리다.
38
그런지라, 고구려 시조 탄생신화에 관한 전설은, 백제며 신라에까지 썩 후년에 이르도록 이야기거리가 된 것이다.
39
고구려 800년간에 지나민족의 나라들과의 관계를 약기해 보자면, 김부식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년대는 실제보다 얼마 뒤라 하지만 얼마나 뒤로 되었는지 따질 수 없으니, 「삼국사기」를 좇는다 할지라도, 고구려 시조 동명이 졸본 땅에 건국한 것은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이다.
40
지나는 주실(周室) 때부터, 내내, 혹은 수백, 심지어 천여의 제후국으로 부스러져서, 동족상잔의 역사를 계속하다가, 진(秦) 때에 시황이 비로소 통일 하여 일개국을 이룩하고, 그 아들의 대까지를 간신히 누리고는, 한 고조의 발흥으로, 진은 없어지고 한의 세상이 되었다.
41
지나족은 본시 자기네가 인류의 대종으로 자인하고 있는데, 동쪽의 단군 겨레의 나라이 내내 지나족과 별립(別立)하여 자기(단군겨레) 독특의 문화를 가지고, 딴 살림을 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지나족의 눈에는 늘 가시 〔荆[형] 〕 로 보였다. 그 ‘가시’도 손 안에 집어넣어 지나 천자의 호령 아래 사는 나라로 만들고 싶은 것은 사전시대(史前時代)부터의 지나족의 희망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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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기네부터 일국으로 통일을 못 하였으니 딴 데를 볼 겨를이 없었다. 지나족이 통일되어, 내분만 없어지면, 제일 먼저 단군족 정복의 손을 벋칠 것이다.
43
이러한 적을 서방에 두고, 동명이 천제(단군)의 아들로서, 동방에 고구려 국을 이룩하였다.
44
건국 제3년에 비류국(沸流國)을 흡수하고, 7년에 행인국(荇人國), 12년 에북옥저, 이렇듯 점점 넓히어 나갔다.
45
이리하여 동명 어우(東明御宇)를 지내고, 그 아들 유리왕 때, 지나에는 왕망(王莽)이 일어나서 ‘한’을 멸하고 ‘신(新)’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왕망은 ‘지나족은 인류의 종주’라는 생각만 가지고, 멋도 모르고, 고구려를 호령하여 보려고, 벌호(伐胡)의 전쟁에 고구려에게 출병 조력 하기를 명하였다가 고구려에게 거절을 당하고, 분김에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국호를 깎았다.
46
이 왕망이 열댓 해 지나천자 노릇을 하다가 유현(劉玄)이 대신하여 23년 천자 노릇, 그러고 한의 광무제가 일어, 후한(後漢)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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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고구려는 주변 소국들을 차례로 흡수 혹은 소탕하고, 그 예봉은 오직 지나족의 단군기지에 들어와 있는 자에게 향하여, 낙랑, 현도 등을 모두 내 품안에 회수하고, 멀리 북평(北平) 태원(太原) 등지까지 원정의 손이 벋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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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밉고 괘씸한 고구려가 멀리 한족의 본토 성내(城內)까지 손을 붙이니, 그들의 고구려에 대한 증오감은 나날이 높아갔다. 그러나 국력이 모자라니, 분하여도 어쩔 수는 없었다. 고구려가 연해연방 그 새 지나인에게 잃었던 국토를 회수해 들어가자니, 지방지방의 국부적 다툼은 늘 있었겠지만 ‘고구려와 후한’의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은 한(漢)쪽에서 꺼리고 피해 오던 것이다.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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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후한도 선 지 140~150년, 영제(靈帝)의 시절- 고구려는 신대왕 어우(御宇)에, 후한도, 인제는 기초도 잡히고 보니, 무엇보다도 고구려를 그냥 방임할 수 없었다. 드디어 원정의 대군을 떠나보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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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필마불반(疋馬不反)’이라는 한군(漢軍)의 참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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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한은 약 10여 년 다시 힘을 길러, 고국천왕 6년에 또 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역시, ‘참수산적(斬首山積)’이라는 한군의 대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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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후한은, 그 본국까지 뿌리가 흔들려서, 군웅이 봉기하고 종내, 나라가 넘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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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 넘어지매, 그새 늘, 나라이 안돈되지 못하여 전전긍긍한 생활을 해오던 한인들은 종내 제 나라를 믿을 수 없어, 낙토인 고구려로, 몇천 명 몇만 명씩 집단이 되어 넘어와서 투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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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을 넘어뜨리고 선 것이 조씨(曹氏)의 위(魏)나라요, 조씨가 위를 세우매, 촉(蜀)도, 오(吳)도, 제각기 딴 나라로 분립을 하여, 통일지나는 다시 삼국으로 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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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지경을 접한 자는 위였다. 촉과 오라는 대적을 갖고 있는 위는, 정책상 내내 고구려와 친선관계를 계속하였다. 고구려 역시 구태여 적을 늘릴 필요가 없어서, 단군 고토 요동지방 회수운동은 그냥 계속했지만, 위와의 친선관계는 유지하여, 남지나의 오나라에서, 동방대국인 고구려의 환심을 사고자 보낸 친선사절을 잡아 죽여 위에 보내는 등 위와의 친교는 계속 코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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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나 삼국시대도 50~60년으로 끝나고, 진(晋)이 생겼다가, 진도 몇 해를 유지하지 못하고, 남방으로 쫓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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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소위 남북조로- 다시 부스러져서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으로, 지나는 무수한 군소국으로 부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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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 이렇듯 난장판이 되어 있을 동안은 고구려는 진실로 태평 무사하였다. 남방의 백제와 신라는 싸움의 상대는 되지 못하는 나라이요, 지나는 100조각으로 부서져서, 자기 유지도 어려운 처지이니, 멀리 고구려를 엿볼생념도 못낼 뿐 아니라, 이때의 고구려는 국제상 특이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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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때부터의 불함 문화는, 다른 민족의 침략 등으로 중단되어 보지 않고, 게다가, 지나 계통의 망명인으로부터 흡수한 문화까지 아울러 동화 발전 시켜서 고구려 문화는 인류의 위에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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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무력적으로는 전 지나족의 총합력인 한의 내침에도 꼼짝 안한 강한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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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토에 현재 생겨 있는 십백의 군소국가는 호족(胡族)도 있고 지나족도 있는데, 바로 엊그제 생긴 국가요, 언제 없어질는지 짐작할 수 없는 얼치기 국가다. 그새에 만들어 보려고 공작만 하다가 쓰러진 국가도 수두룩 하거니와 입도(立都)하다가 쓰러진 국가며, 백료(百僚)까지 짜고 국가노라고 호령까지 하다가 쓰러진 국가가 부지기수다. 그러니만치, 현재 제법 국가 노라 고국 가로서의 체재를 다 갖춘 자도,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것이요, 남〔他〕만이 그리 아는 것이 아니요, 당사(當事)한 자기 스스로도, 자기가 과연 ‘국가’ 인지, 언제까지나 버틸 수 있으려는지, 누구누구가 자기를 국가로 인정 해 주는지 내 품아래 있는 백성들이나마 국가로 여기어 주기는 하는지모두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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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때에, 고구려국이 자기네를 국가로 인정하고 상대해 주기만 하면, 이렇듯 튼튼하고 마음놓이는 일이 없다. 고구려가 인정해 주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뻐젓하게 천하에 향하여 국가노라고 버티고 호령할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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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해서는 자기(한토에 입국한 군주)가 고구려 왕을 봉작(封爵)을 하여 고구려 왕이 거절치 않고 받으면, 이는 즉 고구려 왕이 자기(한 토에 입국한 군주)를 천자로 인정하여 주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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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를 보면 고구려가 광무제 8년에 조공(朝貢)하고 한의 신국(臣國)이 되었다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한인의 존대성이 낳은 과장적 허설로서 고구려만한 대국이 조공을 하고 신국이 되면 한제는 으례히 고구려 왕에게 ‘무슨무슨 대장군, 무슨 공(公) 고구려 왕’이라고 봉작을 하는 것이어늘, 작봉 기록은 없이 조공 운운은 단지 고구려가 친선코자 보낸 사신을 조공사라고 과장 기록한 것이다. 광무제 8년경은 고구려가 한령(漢領) 낙랑의 태수 최리(崔理)를 없이 하고 낙랑을 복멸하는 한창 그 시절로서, 한제에게 비굴 조공할 까닭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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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썩 뒤, 고국원왕(故國原王) 때에 한의 연왕 황이 갑자기 고구려를 들이쳐 국도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키고 왕을 도망케 하고 귀연(歸燕) 하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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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우리(燕[연])의 전격에 한때 패하고 모두 피했으나 우리가 물러가면 반드시 뒤를 쫓으리니, 그것을 막기 위하여 왕부의 능을 파고 왕부의 시(尸)를 가지고, 또 왕모를 생금(生擒)해 가자.’ 하여, 왕릉을 파고 미천왕의 시와 왕모 주씨를 전리품으로 노획해, 가지고 돌아갔다. 여기서 왕은 할 수가 없어서 왕제를 연에 보내서, 조공하고 칭신하고 도적맞은 귀보(부시와 생모)를 도로 찾아 왔다. 이것이 고구려 로서의 처음의 타민족에게의 조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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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연은 복멸되고 고구려의 지족(支族) 고운 모용씨(高雲 慕容氏)가 연왕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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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를 잃고 생모를 잃는 등의 사건은 있었지만, 그래도 천 조각으로 부스러진 지나족은 인제는 걱정거리가 되지 않으므로, 고구려는 장수왕 때에 도읍을 북방에서 남방 평양으로 옮겼다. 그때는 지나는 사분팔렬이 되어 그 부스러기마다 임금이 있고, 제각기 제가 진주(眞主)요 타는 잠주(潜主)라고 하며 이러기 때문에 고구려 같은 대국의 ‘인정’이 만조(萬釣)의 무게를 갖는 형편으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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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에, 북위로부터 사절이 고구려로 와서, 고구려 장수왕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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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督遼海諸軍事[도독료해제군사], 征東將軍[정동장군], 領護東夷中郎將 [령호동이중랑장], 遼東郡開國公[료동군개국공], 高句麗王[고구려왕]’이라는 작호를 정(呈)하였다. 위로서는 커다란 시금석이었다. 고구려왕이 이 작호를 받아주기만 하면, 자기는 천하에 뻐젓한 천자다. 송, 후연(後燕) 등 인국(隣國)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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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근 30년쯤 뒤, 송에서도 장수왕께 대하여, ‘車騎將軍[차기장군], 開府儀同三司[개부의동삼사]’의 작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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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지나의 군소 신국의 주인에게서 고구려 왕께 대한 봉작 경쟁이 시작 되었다. 한지(漢地)에 누구가 새로 나라를 이룩하면, 가장 먼저 고구려왕께 작호(爵號)를 보내는 것이 그 행사였다. 고구려와 한토 왕래에는 지리상 위 땅을 먼저 밟게 되는 관계상, 남방의 신황제가 등극하면서 첫 정사로 고구려 왕을 봉작하는 그 사신이 흔히 도중 위에게 잡혀, 위제(魏帝)의 질투를 일으켜 문제된 일도 여러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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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이 이렇듯 차차 누구의 봉작이고 간에 받으니, 그 봉작도 점점 권위를 잃었다. 고구려 왕이 몸소 한번 몸을 움직여서, 어느 제에게 폐현(陛見)을 해주면 얼마나 기꺼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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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평화의 몇 백 년(단지 자국 문화발전만에 전력할 수 있는)이 지낸 뒤에, 한토는 수의 문제의 힘으로 통일이 되었다. 고구려 평원왕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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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처음 한동안은 고구려는 여전히 관심치 않았다. 몇 해나 가리, 이만한 배짱으로 또 부스러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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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상과 달리, 나날이 국기(國基)가 튼튼히 자리잡혀 들어가는 것을 보고, 고구려는 그새 문화에만 향하였던 눈을 국방으로도 돌려, 그새 감추었던 고구려혼의 재기를 전국민에게 요청하였다.
78
평원왕 승하하고 영양왕 제9년에, 왕은 지나인의 적개심(고구려에 대한) 의그 정도를 측정해 보고자 분족(分族)인 말갈인 만여를 친솔(親率)하고 요서 지방을 좀 건드려 보았다. 수도 그새 통일하노라고 쓴 그 피곤도 인젠 삭아서, 고구려 원정의 속준비를 하고 있던 차이라, 한왕량(漢王諒- 장수) 을시 켜서,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향하게 하였다. 한서에는 ‘軍中發疫[군중발역] 餽轉不繼[궤전불계] 乏食[핍식] 又[우] 遭風舡多漂沒[조풍강다표몰], 乃返師[내반사], 死者十中八九[사자십중팔구]’라 하여 참패한 까닭은 불가항력으로 돌리려 했지만, 그러면 고구려병은 30만 대적(大賊)이 왔는데도 모르고 잠자고 있었다는 말인가.
79
이때에 백제는 뒷길로 사신을 수에 보내서, ‘신국(臣國)이 도도(導道)를 하리다’ 고 자청했다가 도로혀 수제(隋帝)에게 꾸짖기였다.
80
수는 문제 때도 고구려 왕의 몸소 내조를 요청하다가 창피만 당하고, 뒤이은 양제(煬帝)도 같은 요청을 하였으니, 한족에게 있어서는 고구려 왕이 몸을 굽혀 한번 내조해 주는 것이 평생의 원이었다.
81
문제 하세(下世)하고 양제 서서, 이 양제와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의 살수에서의 승부는 1천 년 뒤 오늘날까지 우리 겨레의 자랑으로 구전되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양제의 이끈 군사가, 113만 3,800인- 호왈(號曰) 200만 이었다. 치군(輜軍)까지 합하면 400만이었다. 그것이 을지성자의 손에 잔멸되어 무사히 요동을 지나 귀국한 자 겨우 2,700명뿐. 후일 당 태종이며 지나 종족이 뼈에 새겨두고 하는 말, ‘요동 대원(大原) 어느 곳이라 우리 자제의 피와 뼈 안 묻힌 곳이 없다’ 는 말은 추호도 과장없는 말이다. 한족 400만의 피와 뼈….
82
이만치 되었으면 지기지기하고 진저리나겠지만, 하도 일이 엄청나게 되었는지라, 이성을 수습치 못하고 반광란이 된 양제는 이듬해 또다시 패여(敗餘)의 잔졸(殘卒)이며 새 군정(軍丁)(隋書[수서]에는 丁男[정남] 10만 이라하였다)을 수습해 가지고 또 고구려로 왔다. 그러나 전 지나족의 정예도 잔멸시킨 고구려라, 이급조군 따위는 문제도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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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악에 받친 광란의 수제는 또 그 이듬해에 군사를 불렀다. 그러나 소민들은 벌써 帝命도 잘 좇지 않아, 간신히 모음 약간의 장졸을 데리고 또 떠났으나, 이미 전 지나인이 수실(隋室)에서 마음이 떠나서, 흐지부지 또 돌아가고 말았다.
84
그런데 이 네 번의 참패는 수실의 실력을 근본적으로 꺾어서, 바람만 불어도 넘어질 형편으로 되었다.
85
민의 귀의를 잃고 실력까지 잃은 수실이라 자연히 넘어지려 할 때에 한 새 ‘천자 되어 보려는 힘’이 생겨서 수실을 넘어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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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수실에 대신하여 당실(唐室)이 지나의 주인이 되었다.
87
고구려가 수의 대군을 북에 받고 사투할 때에, 남쪽에서는 신라가 고구려 땅 500리를 횡취하였었다. 불난 곳의 도적 셈이었다.
88
수나라이 넘어지고 당나라이 서서 첫 황제 고조(高祖)는 아직 튼튼히 자리 잡히지 못한 당으로서, 전성 고구려를 건드리기 무서워서 소극적 정책을 썼는데, 이 정책을 꺼리어서, 태종 이세민은 자신 천자의 위에 올라서, 곧 ‘정려(征麗)’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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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 처음 정려의 말을 꺼낼 때 전 지나민족은 하도 많은 자제를 요동에 잃었는지라 일제히 반대하였다. 보수욕(報讐慾)도 컸거니와 ‘겁’이 더 앞섰다. 그러나 요동평원에 흘린 지나인의 피의 복수를 굳게 결심한 태종은, 많은 이유를 들어서 자기와 수씨(隋氏)와는 다르다고 역설하고, 반강제적으로 눌러서 드디어 출사에는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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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과에 있어서는 태종으로 하여금 ‘아아, 위징(魏徵)이 있더면 동방의 소추(小醜)에게 이 욕을 보지 않았을것을.’ 하는 탄성과, 고구려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의 살에 눈깔 하나를 잃은 것과, 이끌고 왔던 대군의 전멸이라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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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천자의 체면도 있고 하여, 고구려 재상 연개소문에게 장하다고 궁복(弓服)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당연히 있어야 할 고맙다는 사례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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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다음해, 당은 또 고구려를 치러 갔었지만 또 헛길이었다. 「한서」에도 「삼국사기」에도 얼마나한 병력으로 왔었으며 어떤 정도의 패배인지 상세한 기록은 않고, 다만 공없이 돌아왔다 한 뿐이지만 태종의 결의를 알고 복수심을 아는 자는 역시 결코 소군은 아닐 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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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듬해 또 갔다가 또 참패 귀국하였다. 이때에 태종의 탄식과 결의 ‘朕困弊[진곤폐], 議明年發三十萬衆[의명년발삼십만중], 一擧滅之[일거멸지]’ 금년도 또 졌지만 명년에는 30만군을 이끌고 가서, 단숨에 넘어뜨리겠다는 그 큰 결의를 품은 채, 이듬해에 태종은 그만 하세하였다. 의 ‘知足不辱[지족불욕], 知止不殆[지지불태], 陛下威名功德旣云足矣[폐하위명공덕기운족의] 拓地開疆亦可止矣[척지개강역가지의] 略[략] 鄕使高句麗違失臣節[향사고구려위실신절], 誅之可也[주지가야], 侵擾百姓[침요백성] 滅之可也[멸지가야] 他日能爲中國患[타일능위중국환], 除之可也[제지가야]. 今無此三條而坐煩中國[금무차삼조이좌번중국], 內爲前代雪耻[내위전대설치], 外爲新羅報讐[외위신라보수], 何耶[하야]’ 사공 현령(司空玄齡) 이 병중을 무릅쓰고, 태종에게 여상(如上)히 간했거늘 듣지 않고 창피를 거듭하다가 하세한 것이었다. 그 유언으로 정려를 일단중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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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 ‘外爲新羅之報讐[외위신라지보수]’라 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고구려가 북에 수의 내구(來寇)를 맞아 사투할 때에 신라는, 고구려가 남쪽을 돌볼 경황이 없는 것을 기화로, 고구려의 남쪽 지방 500리를 신라소 유로 집어삼켰다. 수가 망하고 고구려가 한때 숨을 돌릴 때에, 신라에게 잃었던 땅을 차차 회수하여 들어갔다. 북에는 아직 한종인 당이 호시탐탐히 고구려를 엿보고 있으며 전 병력은 그냥 북에 멈추어 두어야 할 형편이라, 남쪽 실지(失地)는 지방장(地方將)을 시켜서 조금씩 조금씩 회수하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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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백제는 또 동쪽에서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았다.
96
신라는 일이 급하게 되매 자기네가 고구려에 대하여 한 일은 깜빡 잊고,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로 구원을 청하러 달려갔다. 백제를 물리쳐 달라고.
97
고구려에서는 김춘추를 잡아 가두고, 너희가 훔친 500리 땅을 반환하면 백제를 물리쳐주마는 조건을 내었다.
98
김춘추는 간신히 고구려를 탈출하여, 이번은 다시 당나라로 가서, 고구려의 횡포를 호소하였다. 보수해 주기를 탄원했다. 이것이 이르는 바 ‘新羅之報讐[신라지복수]’ 다.
99
당나라는 신라의 말을 듣고 보니, 고구려 남쪽 국방은 약국 신라로도 500 리의 땅을 훔칠 수 있을 만치 허수로운 모양이다. 그래서 사농승상(司農丞相) 현장(玄裝)을 고구려에 파견하여 그 허실을 엿보게 하였던 바, 북방은 모르지만 남쪽은 허수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고구려를 어쩔 수 없지만 신라를 끼고 남북에서 치면 고구려도 꺾을 듯 싶어, 급속하게 신라와 당의 접근은 되어갔다.
100
이리하여 신라와 당은 연합하여, 아니 신라는 당에게 조종되어 둘이 합하여 지나족 만년의 협위요 혹을 멸한 것이다. 신라는 지나족의 대국시(大國是)에 협조한 것이다.
101
혹자 가로되, 신라는 진한(辰韓)의 후요, 진한은 또는 진한(秦韓) 이라고도 하여 진의 망인의 모임이라, 따라서 지나족이라 하니, 그러면 신라는 진인(秦人)을 위하여 원수를 갚었는가.
102
고구려 망한 원인에는 고구려 재상 연씨문(淵氏門) 내의 내홍도 있지만 한겨레의 반역 - 두 가지가 다 순전히 스스로 내포된 결함이었다.
104
삼한 이전을 ‘사전시대(史前時代)’라 하여 내버리려는 일본 학자는, 따라서 그 옛날 단군겨레가 전 동방에 점거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부인하고 ‘북방에는 부여(후에 고구려) 중부에는 한령(기씨와 위만과 전한 등) 이요, 남부는 삼한(마, 진, 변한)인 시절’부터 비로소 인정하느니만치, 고구려 왕자 고온조(高溫祚)가 북방에서부터 중부 한령을 지내서 마한에 와서 백제국을 세웠다는 점을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지만 단군겨레라는 것을 인정 하는우리 로서는 추호도 이상한 점이 없거니와.
105
고구려 시조 동명의 아들 고온조가 부명에 따라서, 고국을 떠나서 적령(敵領)까지도 넘어서 마한 땅에 내려와서 백제국을 세웠는지라, 근본목표가 지나인에게 횡령되었던 반도 중부지대를 회복하여, 북방 아버지의 나라와 직접 상접(相接)하는 데 있었다.
106
건국초에는 무론 이 국시로, 한령인 낙랑에 대하여, 고구려는 북쪽에서, 백제는 남쪽에서 공격하여, 드디어 낙랑을 복멸하고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국경이 접하였다.
107
백제는 고구려를 조국으로 섬기고, 백제 왕의 성씨도 부여씨라 일컫고, 동명 묘(廟)를 세워서 늘 제사하고, 이렇듯 처음 동안은 고구려의 지국(支國)인 듯한 감이 있었다. 이것을 자랑으로도 여겼다.
108
그러나 마한 54국이 한꺼번에 백제 왕의 날개 아래 든 것이 아니요, 처음은 위례성과 그 근처 일대만이 겨우 백제령이었다. 그 뒤 낙랑을 복멸하고 고구려와 접경이 되니, 국경선에서는 자연히 충돌이 생기고 아이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고, 차차 양국간에도 분쟁이 생기게 되었다.
109
게다가 백제의 토민(土民)은 잡종이어서, 위만에게 쫓겨온 기준(箕準)의 백성도 있고, 왜종(倭種)도 있고 하여, 통일된 민족이 못 되었다. 지나인의 기록에 ‘百濟多作[백제다작]’, 왜인의 기록에 ‘百濟叛服無雙[백제반복무쌍]’ 또는 지금까지도 그 지방인의 지방성을 이룩하고 있는 특성(표리 부동)은 이러한 원인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110
그런 민족성이니만치 강직한 고구려성과는 맞지 않았을 것이나, 고구려는 백제를 남같이 보지 않는 관계상, 국경 근처의 소충돌은 늘 있지만 그리고 고구려의 실력으로는 일거에 백제를 둘러엎기는 여반장이지만, 이렁저렁 그대로 지내왔다.
111
그런데 고구려 고국원왕 39년, 고구려에서는 백제와 또 싸웠는데, 그대 고구려는 그 싸움에 패하였다. 여기서 승리의 맛을 본 백제는 이태 뒤 고구려 고국원왕 41년, 백제 근초고왕 26년, 다시 싸움을 돋우어, 이 싸움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은 불행히 유시(流矢)에 맞아 승하하였다.
112
그 뒤 백제는 진(晋-지나이다)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하며 신국 되기를자 원했는데, 한적의 그때 기록을 보면, ‘百濟[백제] 上表自通云[상표자통운], 臣與高麗源出夫餘[신여고려원출부여], 先世之時篤崇舊款[선세지시독숭구관], 其祖釗輕廢隣好[기조쇠경폐인호], 凌踐臣境[릉천신경], 臣祖須[신조수], 整旅電邁[정려전매], 梟斬釗首 [효참쇠수], 自爾以來莫敢南顧[자이이래막감남고] 云云[운운]’ 하여 승리를 자랑하였다.
113
그런데 이 고구려 왕을 전사케 한 사실은 고구려의 분노를 사서, 고구려로 하여금 백제에게 차차 중압을 가하여 백제 개로왕 21년 고구려 장수왕 63년에 장수왕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로 와서, 백제 왕을 잡아 군문에 목 베고, 백제 서울 근처의 지역을 모두 고구려에서 빼앗았다.
114
그런데 그 전에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의 점강(漸强)에 은근히 겁이 나서(현재 남조〔晋[진]〕과 군신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북조-위(위는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고구려와 친선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다)-에 사신을 보내서, ‘若天慈曲矜[약천자곡금], 速遣一將[속견일장], 來救臣國[래구신국], 當奉送鄙女[당봉송비여], 執掃後宮[집소후궁], 拜遣子弟[배견자제], 牧圉外廐[목어외구], 尺壤匹矣[척양필의], 不敢自有[필감자유]’라 하여, ‘신의 나라를 도와주시면 신의 딸을 후궁으로 바치고, 자제를 마부로 바치리다’고 아첨하고 이어서, ‘高句麗不義逆詐[고구려불의역사], 南通劉氏[남통류씨], 北約蠕蠕[북약연연], 共相啓齒[공상계치], 謀凌王略[모릉왕략], 今若不取[금약부취], 將貽後悔[장이후회]’라 이간까지 붙여보려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고구려와 친선관계를 맺고 있는 위가 이맛 이간책에 빠질 까닭이 없었다. 또한, ‘臣(百濟王 自稱)西界海中[신(백제왕 자칭)서계해중], 見尸十餘[견시십여], 拜得衣器鞍勒[배득의기안륵], 視之非高麗之物[시지비고려지물], 後聞乃是王人[후문내시왕인](漢人[한인] 이라는 뜻)來降臣國[내강신국], 長蛇隔路[장사격로], 以阻于海[이조우해], 今上所得鞍[금상소득안], 一以爲實矯[일이위실교], 云云[운운]’ 하여 참소와 이간과 애원을 아울러한 데 대하여, 위에서는, ‘의좋게 지내거라. 인으로 지키는데, 원수가 어디 있으랴. 네가 보낸 안구는 중국 물건이 아니더라.’ 하여 피해 버렸다. 백제는 다시 말갈과 짜고 또 위에게 빌어 보았으나 위는 책망해 물리치고 도로혀 이 전후 사실을 고구려에게 알려 주었다.
115
이듬해의 장수왕(고구려)의 백제 정벌은 오직 30년 전 일(고국원왕이 유시에 맞아 승하한 일)의 복수만이 아니라, 이번의 행사에 대한 응징을 겸 했을것이다.
116
여기서 일본인은 「일본서기」에 기록하여 말하기를 ‘雄略天皇二十一年[웅략천황이십일년], 春三月[춘삼월], 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천황문백제위고려소파], 以久麻那利[이구마나리](筆者注[필자주] 곰내- 固麻城[고마성]- 態津[태진]- 公州[공주]) 賜汶洲王[사문주왕](筆者注[필자주] 文周王[문주왕]) 救興其國(略)[구흥기국(략)] 實賴於天皇[실뢰어천황](日本[일본]) 更造其國[경조기국] 云[운]’ 「일본서기」를 보면 이때뿐 아니라, 백제는 늘 왜황의 비호 아래서 나라를 유지한 듯이 되어 있는데, 이때의 공주(公州)뿐 아니라, 뒷날의 부여(백제 서울)도 천황이 백제에게 ‘하사’하여 그리로 서울을 옮기게 하였지, 이하 사가 없었더면 백제는 치경(置京)할 곳이 없어서 망방(亡邦) 했으리라는 것이다.
117
후항(後項)에 말하겠거니와, 그 당년까지는 왜가 선주민 중의 가장 큰 덩어리 였으며, 따라서 왜의 세력범위 아래 있던 남조선 일부지역에 (서울과 임금을 한꺼번에 잃은) 백제의 관민이 졸려 오니까, 그때 반도에서는 차차 퇴각의 길을 밟던 왜가, 자리를 비고 물러간 것을 이렇듯 체재 좋게 꾸민것 일게다.
118
대체 「일본서기」를 꾸민 사관(史官)은 대개가 백제의 예(裔)로서, 왜에 투화한 사람들이다. 그 계통이 본시 왜계(倭系)인지 한계(漢系) 인지는, 알수 없지만 조국 백제에 대하여 고약한 기록만 한 것으로 보아서, 단군 겨레의 혈통은 결코 아니다. 오늘날까지 표리부동한 일부 민족성을 드리우고 있는, 타 혈통계의 인종일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百濟[백제], 失禮於貴國[실례어귀국](왜를 가르키는 말이다)’ 운운의 기록이 진실로 많이 나온다. 백제는 왜에게 문화를 전수하고 대상(代償)으로 무력의 원조는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해안선(남)까지 국경을 넓혀 내려가려면 선주민 왜와는 늘 티각태각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무력원조를 간간 하는 왜에게서는 재세가 또한 자심하였다.
119
고구려와는 서로 임금을 죽인 만치 불구대천의 원수다. 백제는 신라와 친선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120
꼭 백제와 입장이 같고, 국력은 더 미약하고, 왜와는 더 가까이 있는 신라라, 제라간에는 대(對)고구려의 공수동맹(攻守同盟)이 맺어졌다. 그러나 무슨 의리나 은정관계가 아니라, 순전히 서로 이기적의 동맹이라 백제는 기회 있을 때마다 동맹국인 신라를 침노하기도 게을지 않았다.
121
동방에서는 이렇게 지낼 때에 한성에서는 지나인은 늘 동방(고구려)의 발흥을 꺼리면서도 자기네가 단결이 못되어, 내버려 두었었는데, 수가 생기면서 한족 몇억의 대동단결에 성공하고 곧 그 예봉을 동이(東夷)에게로 돌렸다. 동방 단군 성역수호의 중책을 띤 고구려는, 수의 문제와 뒤이은 양제의 전 지나의 힘을 집중한 200만 대군을 맞아 민족사활의 분기점에서 사투할 때에, 백제는 몰래 사자를 수에 보내, 길 향도하기를 자원했다.
122
이때는 수제는 하도 참담한 전패에 넋잃고 있을 때에 고구려에서는 수제가 가긍하고 민망하여, 수제를 위로하는 뜻으로 영양왕과 을지 대신이 의논하고 수제에게 사신을 보내서, ‘폐하 멀리 이 분토(糞土)까지 오셨다가 재미를 못보시고 돌아가서 황공 하옵니다.’ 는 뜻의 글을 보냈다.
123
이때에, 백제에서 길 향도하겠다는 사신이 온 것이다. 사신은 뒷길로 당경(唐京)에 와서, ‘폐하 다시 폭려(暴麗)를 치시면 신국은 남쪽에서 도우리이다.’ 는 뜻을 아뢰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공포가 아직 그냥 남은 양제는, ‘고구려가 이처럼 사죄를 하니(즉 분토 운운의 글) 사죄하는 양국(良國)을 가해하는 것은 군자가 아니라.’
125
수는 전국력을 기울여 네 번을 고구려를 치다가 마지막에는 기운이 진하여 스스로 넘어졌다.
126
당나라이 대신으로 서서, 한족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고자 또다시 온 국력을 모아 고구려를 치고 또 치고 연해 침노하였다.
127
수와의 싸움에서 수를 넘어뜨리기는 하였지만 스스로도 중상을 입어, 꽤 쇠진한 고구려는 여기 또다시 당의 새 힘에 배달종족 옹호를 위하여 감연히 일어서게 되었다.
128
당의 대군도 잔멸시키기를 여러번, 그 내내를 백제는 혹은 당에 붙는 듯 혹은 고구려를 돕는 듯- 그러면서도 내실은 연해연방 신라의 변지(邊地) 약탈에 힘을 기울였다. 한때 무었던 신라와의 동맹은 인젠 깨뜨렸다.
129
백제는 이렇듯 온갖 수단을 다하여 방명(邦命)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그 뒤 당군과 신라군의 연합한 힘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당은 고구려의 조력을 견제 하기 위하여 契芯何力[계심하력]을 시켜 일변 고구려를 견제하며 남쪽에서는 백제를 멸한 것이다) 꺾어졌다.
130
김부식 「삼국사기」에 의지하면 678년간 나라이 유지된 것이다.
131
백제를 병력으로 멸한 자는 한족인 당과 및 배달족인 신라 - 그러나 서로 다른 겨레가 된 지 700년이나 지난 뒤라, 같은 겨레라는 것도 서로 모르고, 당은 단지 한족 철천의 원수인 부여족으로- 신라는 단지 그 새 늘 성화 시키던 원수로- 이리하여 배달겨레의 하나는 없어졌다.
133
이 땅의 고대사(「삼국사기」「삼국유사」)가 다 신라 후인(後人)의 손으로 된 관계상 고사(古史)는 신라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134
시조는 역시 난생(卵生)인 박혁거세다.
135
그런데 처음 건국할 때의 국토는 상상키 어렵도록 작은 것으로 아마 50~60 리 정도였던 모양이요, 고런 작은 국가 가운데 하나인 ‘서라벌’부락이 다른 우국(友國)중에서 출람(出藍)하여 마지막에는 대신라까지 이룩한 것이다.
136
좌우간 지금의 대구며 울산지방도 ‘서라벌’에서는 여러 나라를 지나서야 갈 수 있었던 모양이다. 전쟁을 하려는데 전국에서 장정 스물 몇 명을 낼 수가 없어서 전쟁을 못했다는- 요런 국가군(國家群)이다. 처음의 ‘서라벌’에는 해안 따위는 없었다.
137
여기 왜의 신공왕비의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일본서기」의 연대는 일본인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는 만큼 신공(神功)이 한사(韓史)의 어느 왕의 때에 해당하는지, 설이 각이하여 신라 파사왕(婆娑王) 때부터 기림왕(基臨王) 때까지, 계 11왕, 230여 년간의 한사(韓史)에서 ‘왜적 내침’이란 것이 있는 그 매번을 모두 갖다 맞춘다. 이 학자는 기림왕 때라 하면, 다른 학자는 첨해왕(沾解王) 때라, 또 다른 학자는 조분왕(助賁王) 때라 각인 각 이설이다.
138
그러나, 「일본서기」에 신공녀 출정이 10월에 시작하여 12월에 끝났다 했는데, 불행히도 그 날짜에 해당한 내침은 한사에는 없다. 게다가 왕환(往還) 이 단 두 달 새니, 상륙할 시간은 전혀 없었고, 「일본서기」에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이 나와서 항복했다’고 기록은 되어 있는데, 그것이 누구인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을 파사매금에 맞추는 것은 일본 학자들이 스스로 부인한 바요 한사에도 파사 때에는 왜구 내침 기록이 없으며 연대로 100여 년이 틀리(파사가 신공보다 100여 년 전인이다)는 위에, 파사는 초창 기(둘째 昔氏[석씨]왕이다)의 임금이라 그때의 ‘서라벌’영역은 겨우 지금의 경주 일원을 벗지 못했겠으므로, ‘上陸深入[상륙심입]’ 관계 등으로 또한 신공에게 갖다 대기 힘들다.
139
그러나 그런 억지문제 다 집어치고, 어떤 한토(韓土) 해변에 와서 해변 토민 부락을 약간 약탈하고 갔다 할지라도, 신공녀는 20 내외의 소녀로 80 척 선대를 인솔하고 한토까지 다녀간 것만으로도 일대 여걸의 칭호를 붙일 수 있겠거늘, 공연한 일에 머리 썩이며 고심하는 일본 학자들도 가련타 아니 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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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간 신라는 박, 석, 김(朴昔金) 3성이 번갈아 왕으로 되다가 뒤에 김씨 혼자만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왕권 김씨 독점시대에 이르면서야 나라의 기초도 아주 서고 ‘서라벌’‘계림’등에서 ‘신라’로 확정하고 군소 우방을 점차 흡수하여 나라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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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 약간 흥미있는 일은, 백제는 근초고왕대에 진(晋)에 조공 하고진에게서 ‘진동장군 낙랑태수’의 작호를 받았는데(成安[성안] 2년 이다) 왜는 송문(宋文)에 원가(元嘉) 자칭 ‘使得節都督倭[사득절도독왜] 百濟[백제] 新羅[신라] 任那[임나] 秦韓[진한] 慕韓[모한] 六國者軍事[육국자군사] 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 倭國王[왜국왕]’ 이라 하며 이렇게 봉작해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결과는 ‘안동장군 왜국왕’에 책된 뿐이었다.
142
그러나 왜왕은 책봉됐건 안됐건, 자기는 그 행세(게다가 가라 1국을 더 넣어서 7국 군사도독)를 하였다. 그러매 제(帝)는 그 7국에서 백제 하나를 깎아 내고, 다른 6국의 군사도독이노라는 것을 용인해 주었다. 즉 백제만은 한실에서 직접 책봉을 받은 나라이니, 왜의 아랑곳할 바이 아니라느 ㄴ 뜻이다.
143
왜는 신라의 군사도독으로는 인정을 받은 것이다. 즉 신라는 이렇듯 한족 국가에게 존재조차 인정을 못 받았다. 왜에게도 수모받기 여지없어서, 왜의 요구에 인질로 왕자를 왜에 보내서, 박제상의 미담을 천추에 남긴 것도 국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144
김춘추며 김유신 등 위인이 생겨난 선덕여왕 때에도 처음은 역시 미약 하여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 등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구원병을 청하러 김춘추가 고구려로 갔다. 이것은 신라로서는 일이 급하니 그런 고려까지 못 했겠지만 그보다 조금 앞서, 고구려가 수 양제의 전 지나통합대군을 맞아 종족 생사의 사투를 할 때에 고구려가 뒤를 돌볼 여가가 없는 이 기회에 신라는 고구려의 땅, 500여 리를 절취한 일이 있다. 아무리 지금 백제에게 성 빼앗긴 것이 분할지라도 내 한 일을 생각하면 고구려에는 염치에 못갈 것이어늘 거진 이성을 잃었기에 더우기 왕의 지친 김춘추가 몸소 고구려까지 갔던 것이다.
145
고구려에서는 좋은 기회라고, 김춘추를 잡아 가두고, 전날 강탈한 500 리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146
조선에 전하는 유명한 이야기- 용왕의 딸이 병들었는데, 토끼의 간을 먹어야 낫는다 한다. 거북이 그 큰 사명을 띠고 계교를 베풀어 토끼를 잡아 왔다.
147
죽게 된 토끼는 계교로써 거북을 속이고 사혈(死穴)을 벗어났다. 죽음을 면하는 데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어느 고구려의 지자에게 이 힌트를 얻은 춘추는, 고구려 조야(朝野)를 속이고 사혈을 벗어났다.
148
이번에는 다시 구원을 청하러 당나라로 갔다.
149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철천의 한을 품고 꼭 고구려를 멸해야 속이 피겠는데, 100만 200만의 대군을 누차 고구려에 보냈지만 그 매번을 참패 전멸의 역사만 거듭하던 터이라, 동이의 하나인 신라가 궁한 사정을 할 때에, 약간의 은혜를 베풀어 신라를 끼기로 하였다.
150
이리하여 합작된 신라와 당나라는, 그 합한 힘으로 우선 백제를 없이하고, 다시 고구려까지 멸하였다. 고구려는 불행히 그때 재상 연씨(淵氏) 가문에 형제 분쟁이 있어서 이 때문에 온 국력을 적에게 부웃지 못하고 그만 쓰러졌다.
151
본시부터 단군겨레라는 관념이 희박하던 신라는 한 사사로운 원혐으로 외국의 힘을 빌어, 자기 겨레 둘을 꺾은 것이다.
152
고사(古史)를 보자면, 한족의 진(秦)이 망하매 진인(秦人)이 많이 한지(韓地)로 망명해 왔다. 마한이 진인에게 땅을 베어주어 살게 하였는데 그것 이진한(秦韓)- 와전되어 진한(辰韓)이라 한다고 했는데 신라가 진한 땅에서 생겼으매 지나 계통의 피도 꽤 섞이어 있을 것이다. 왜와 가까운 땅이라, 선주종(先主種)인 왜의 피도 꽤 섞이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만치 ‘배달’ 정신은 가장 미약하던 나라이다.
153
그러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신화가 벌써 ‘배달’겨레의 것이요, 차조(次祖) 김알지 역시 그러하고- 난생설과 말(박혁거세의 백마징조, 해부루의 所乘馬[소승마]) 황금연 (금와왕의 金色 蛙形[금색와형], 김알지의 황금 궤)(가라 시조 수로왕도 같다)의 인연 등- 모든 점으로 ‘배달’겨레임에 틀림이 없다.
154
고구려와 신라가 국가적이 서로 다르고 국경이 상접하였으니, 국경선 분쟁은 늘 있었을 것이나 종족과 종족의 투쟁이 있을 때는 고구려는 2천 리의 길을 머다하지 않고 달려와서 신라를 보호하고 외적을 물리쳐 주고 하였다.
155
그 고구려가 북쪽에서 종족 결사전을 할 때에, 남쪽에서는 이를 호기회라 하여 고구려 땅 500리를 절취하였다. 같은 겨레라는 점은 둘째 두고라도, 유교 정신으로 든 무사도(화랑도)로든 용서치 못할 일이다.
156
그러고도 그 뒤 백제에게 침략을 받게 되매, 재래의 관습대로 고구려에 보호를 청하러 갔다. 그때에 만약 고구려에서 신라의 그 괘씸한 행사(대적을 맞아 사투하느라고 다른 데 돌볼 경황이 없는 때 남방 500리를 훔쳐 간)를 생각치 않고 신라의 소청대로 조력을 해주었더면, 신라와 당나라의 결합은 생기지 않고 말았을 것이로되 고구려야 또한 어찌 그 원혐 잊을 수 있으랴.
157
김유신은 신라 1천 년의 가장 빼난 영웅이었다. 그러나 ‘배달’ 겨레라는 큰 눈은 끝끝내 떠보지 못한- 말하자면 지방적 영웅이었다.
158
‘김부식「삼국사기」고구려편’맨끝에 찬자(撰者)의 견해가 있는데 가로되, ‘値隋唐之一統[치수당지일통], 而猶拒詔命以不順[이유거조명이부순], 囚王人於士室[수왕인어사실], 其頑然不畏如此[기완연불외여차], 故屢致問罪之師[고루치문죄지사], 云云[운운]’ 하였다. 즉 고구려가 강성하여, 수와 당이 한족을 통일한 뒤에도 한천자(漢天子)의 명령에 좇지 않고 천자의 사신을 토실에 가두는 등, 이렇듯 완명 무쌍하여, 문죄하는 정벌도 여러번 받았다는 것이다.
159
새삼스러이 김부식의 ‘완연불외(頑然不畏)’를 책하여 무얼 하리오마는, 신라인의 당년의 공통된 사상이 이러했을 것이다. 배달겨레 발상지에서 떠나기 2천 리요, 발상시에서 흐르기 3천 년이요, 한이며 왜의 피가 적지 않게 섞인 신라이니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160
도리어 일본인의 기록이 볼 점이 있으니, 가로되
161
‘중세 이후, 한인은 늘 대륙(지나)에 제압되어 이로써 효순청명(效順聽命), 북주(지나)에게 복종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알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렇지 않아 엄연한 불패독립의 한 왕국이었다. 한, 왜 이래 대륙 궤멸하여, 우역(禹域- 지나) 파잔(破殘)의 날에, 조선 부여 요동 등 경외의 땅, 누가이를 수습하고 백성을 보호하고 땅을 유지하여, 그 우역의 소란을 대안의 불로 구경하며, 백성들이 밭갈고 베짜는 조업(祖業)에 안형(安亨)할 수 있게 하였는가. 진실로 동방의 일웅국 고구려다. 수, 당이 새로 일어, 대병으로 위협하지만, 역전(力戰)해 이를 물리치는- 마땅히 처할 길이다.
162
양제와 태종은 스스로 교(驕)하여 스스로 패했다. 이 스스로 패한 허물을 소국(고구려)에게 씌워 이를 종내 멸했으나, 고구려는 제 할 일을 다 하였다.’ 운운(대의)
163
한종은 신라와 병력(併力)하여 고구려를 멸한 뒤에 고구려의 재기를 겁내 어, 고구려의 망인을 사면으로 흩고 고구려의 땅을 쑥밭을 만들었다. 자고로 전쟁에 져서 나라이 망하면, 그 망국의 치자는 없어지나, 토민은 그냥 남고, 전승자가 새 치자가 되는 것이어늘, 당은 고구려에 대하여 그러하지 않고 토민까지도 사방으로 흩어버리고, 모든 성은 쑥밭을 만들어 버렸다. 그만치 고구려를 무서워하고 미워하던 것이다. 전승 동 사자(戰勝同事者) 로 발언권을 가진 신라 역시 머리를 돌리고 전혀 관계치 않으려 하였다.
164
신라는 당의 힘을 빌어, 같은 겨레의 두 우국(友國)을 엎기는 했으나, 영토도 더 는 것이 없고(서쪽으로 백제의 옛터가 조금 신라의 왕권하에 들었다가 그것이나마 후백제 견훤이 일어서며 도로 백제령이 되었고, 북쪽으로는 대님형으로 조금 더 생겼다가 궁예에게 도로 앗겼다) 북쪽 담이 없는 허전한 세월을 좀더 보내다가, 고구려 후인 왕건이 ‘배달’겨레의 나라 ‘고려’ 를 세우는 바람에 거기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165
신라 1천 년- 진한 땅 한 구석의 조그만 부락에서 일어, 이웃 동료부락 가운데 출람하여 신라국으로까지 오르기는 하였으나 김춘추 김유신- 즉 선덕 초기까지도 여전한 미약국이었다.
166
당나라와의 연결에 성공하여,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칠 때에도 황산 싸움에서 신라는 백제의 몇십 배되는 병력을 가지고도 몇십 분의 일 되는 백제와 네 번 부딪쳐서 네 번을 다 도로혀 참패하였다.
167
그러나 그 새 교육으로 배양한 애국사상과 화랑도 정신을 이 긴박한 아침에 군중에 환기시켜서 결국의 승리를 얻었다.
168
예술(노래, 춤)에 의지한 ‘애국사상 주입’과 화랑으로서의 무사도 고취 등 국민개조에 큰 노력으로 단시일 새에 신라를 개건(改建)한 김춘추와 김유신의 힘은 경탄할 바이지만, 그것을 계승한 좋은 후계자를 못 가졌기 때문에, 이 양김(兩金) 합작시대를 지나서는 다시 수그러져 들어갔다. 즉, 그 양 김 합작의 수십 년간 만으로써, 신라는 상하 1천 년에 이름을 그냥 남긴것이다.
169
다만 천재(千載) 후인 오늘날까지도 그냥 아까운 것은 그들(양김)이 좀더 널리 ‘배달’겨레라는 것을 알았더면 하는 점이다. 변한 땅인 가락(駕洛)의 왕손 김유신이, 신라에 들어 신라의 충신 신라의 영웅이 되었으니, 한 걸음 더 나가서, 단군종족의 수호자로 발전하였더면 유신(庾信) 자신이나 우리 민족이나 얼마나 더 좋았으랴.
170
사람에게 영(靈)이나 혼(魂)이 있다 하면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영은, 단군과 동명 두 영전에 가슴을 치며 불초 불효한 후손을 사죄할 것이다.
171
고구려와 신라- 언어가 서로 같고 풍습이 같고(巫[무]며 사당이며 제사를 즐겨 한다) 신앙이 같고(하늘, 해, 별, 산천)- 이러한 같은 겨레를 멸하고자, 전혀 계통이 다른 이민족을 불러들인 당년의 신라 위정가의 실태는, 우리 로서는, 도저히 분노를 금할 수 없다.
172
신라와 한족(隋[수]건 唐[당]이건)이 연합해서 남과 북에서 협공했기에 말이지 그렇지만 않았더면 고구려는 끄떡도 없었고, 도리어 수가 제가 부서져 나갔으며, 수를 계승한 당나라도 고조로부터 태종 고종 3대에 걸치어 근 50년 간 전 지나족의 총합력(總合力)으로, 무수한 내침을 하였으나, 신라가 남쪽에서 협력을 하고서야 비로소 고구려를 멸하였으니, 고구려의 실력을 가히 알지며, 신라(新羅)의 내응(內應 즉 逆族[역족])만 없이 고구려 사직이 그냥 계속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면- 소위 가정사(假定辭)를 붙이자면 끝이 없지만, 이런 가정사를 붙여 보자면 진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173
그런데 여기 좀 부언할 말은, 「신당서(新唐書)」는 한족의 기록이니 고구려 복멸을 당의 힘인 듯 기록하는 것이 당연하나, 「삼국사기」의 찬자 로서 조그만치라도 ‘배달’겨레라는 것에 생각이 간 사람이었더면, 고구려 복멸에 대하여 좀 다른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신라의 범과(犯過)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174
즉 고구려는 신라와 당의 무력에 의지해서만 넘어진 것이 아니다. 고구려 재상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 형제간의 다툼이 심하여, 국내의 힘이 벌써 꺾어졌기에 넘어졌지 그런 내부 알력만 없었더면, 신라와 당의 합친 세력 일지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175
4. 隋[수]와 唐[당]의 來侵史[내침사]
176
한족의 나라이 생기고 배달족의 나라이 생긴 이래, 한족은 그 독특한 존대성 때문에 까닭없이 배달족을 미워하였다. 배달족이 다른 만족(蠻族)들 같이 비문화족이요 따라서 한족을 성천자(聖天子)의 예(裔)로 맹신(盲信) 하여주었으면 문제 없을 것이로되, 배달족은 그 독특한 불함 문화(不咸文化)를 가지고 한족에 대항하며 굴하지 않는 데서, 존대성인 한족에게 증오를 사고, 적개심을 품게 한 것이었다.
177
그러나 한족은 자기네가 스스로 한 덩어리로 단합하지 못하여 배달족을 노려보기만 하고 손대지 못하고 있었다.
178
그러다가 수가 한족을 통일하면서, 단 한 개의 힘이 되니, 그 힘은 곧 배달족 격멸로 향하게 된 것이다.
179
수가 처음 한왕량(漢王諒)을 시켜서 고구려를 30만 대군으로 치다가, 돌아 간 데 대해서는 다만 ‘군중에 병이 생기고 또한 배가 풍랑에 많이 엎어져서 회군(回軍)했는데, 죽은 자가 십중팔구’라 했을 뿐 상세한 기록은 없으니 알 수 없지만, 30만 대군이 왔다가 ‘사자 십팔구’로 돌아간 것은 단지, 풍랑과 병만으로 돌릴 수 없고, 고구려 역시,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을것이니, 참패한 것이 분명하고,
180
영양왕(嬰陽王) 23년의 그 유명한 살수전(薩水戰)이 있은 침략 때에는, 수양제의 군은, 좌군이 계 12군으로 열두 가닥의 길로, 우군도 12군으로 열두 가닥의 길로, 총합 24군 113만 3,800 장졸이 스물네 가닥의 길로, 평양에서 모두 집합하기로 하고 수경(隋京)을 떠났다.
181
차례로 떠나는 것이 40일이 걸렸다 하며, 기치창검이 천리를 벋혀, 미증유의 출사지성(出師之盛)이라 수서(隋書)에 기록되었으니, 과연 전대미문의 장관 이었을 것이요, 인류사상 과거에 보지 못한 대동원이었을 것이다. 30만 병으로 시험하여 보아서, 고구려는 이만한 100만이 넘는 동원이 아니고는 어쩔 수 없음을 측정하고서 한 일이다. 그리고 양제가 호령할 수 있는 전 지나의 총집결일 것이다. 더우기 전투원이 110여 만이요 궤운자(餽運者)가 배라 하니, 합계 300~400만의 동원이다.
182
전쟁의 병사라기보다 오히려 민족 대이동에 흡사한 내침에 대하여, 고구려는 대신 을지문덕 지휘 아래 청야(淸野)- 즉 연변은 싹 쓸어서 티끌 하나 없이 하고, 온 국민은 성 안에 잠겨버리고, 성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성내에는 양곡이 충분하고, 성은 견고하다. 적(賊)이 와서 아무리 쳐도, 성은 부서지지 않고 따라서 항복하는 성은 없다.
183
이 반향없는 성에 대하여 헛공격만 한참 하다가 단념하고, 적이 집합 목표 지인 평양으로 향하여 떠나면, 성문은 홀연히 열리며 고구려 군이 달려 나와서, 전군(殿軍)을 엄습하고 양곡을 빼앗고 한다.
184
연변을 청야하였으매, 현지에서는 식량을 노획할 수 없고, 본국서부터 가져오던 양곡도 이렇듯 차차 빼앗기고- 고구려 땅에 심입(深入)하면 심입하느니만치, 근심은 늘어가고, 항복받은 성은 하나도 없고, 장차 결과가 어떻게 될지, 그저 눈감고 진군할 뿐이었다. 제명(帝命)이니….
185
이 대군이 목적지 가까이 온 때, 고구려 대신 을지공은 적에게, ‘新策究天文[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라고 좋은 말로 타일러서 물러가기를 종용하였다. 이것은 뒷날, 당의 태종에게 사공현령(司空玄齡)이 병상에서 한, ‘知足不辱[지족불욕], 知止不殆[지지불태], 陛下威名功德旣云足矣[폐하위명공덕기운족의]’ 란 것과 꼭 같은 말로서 그저 물러가면 곱게 보내주마는 약속이나 일반이다.
186
그러나 이 좋은 조언을 듣지 않고 그냥 버티다가, 역사 이래 전무한 참패를 하고 쫓겨간 것이다. 그래도 「수서」에는 ‘분환(奔還)’이라 하지 않고 ‘반사(班師)’라 했다. 그리고 도원수 우문술(宇文述) 등 패장(敗將) 의 벼슬을 깎고 상서 유사룡(尙書 劉士龍) 등을 참했다.
187
이듬해에 우문술 등의 벼슬을 다시 주고, 정남(丁男) 10만을 모아서 또다시 고구려를 엄습하러 갔다. 갔다가, 현감(玄感) 등의 반란에 겸하여 병부시랑 곡사정(斛斯政)이 고구려로 달아나 투신하기 때문에 ‘반사(班師)’ 했다. 「수서」는 기록하여, 순전히 자신 사정으로 자의 회군한 듯이 되어 있지만, 이것은 무론 지나식의 은휘적(隱諱的) 기록일 것이고,
188
그 해 10월에, 수제는 또 백료(百寮)를 모으고, 고구려 칠 일을 의논하 매, ‘數日無敢言者[수일무감언자]’라 하여, 신하들이 어이없어, 맥맥히 며칠간을 아무 말도 못하였다 한다. 광인이 아니고서야, 그만치 혼이 난- 게다가, 그 새의 경험으로도, 수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고구려를, 더우기 정예장정은 다 요동에 잃고, 껍데기만의 수로써 또 어쩔 생념이 어찌 될까.
189
그러나 수가 넘어지느냐 고구려를 넘어뜨리느냐, 악에 받친 수제는 제권(帝權)으로 억압하여 또 출사하였다. 이 때에, ‘(隋書[수서])(略[략]) 高麗遣使請降[고려견사청강], 上[상](隋書[수서]) 大悅[대열]’ ‘(金富軾 三國史記[김부식 삼국사기]) 王[왕](고구려) 懼遣使乞降[구견사걸강]’ 즉 고구려가 겁나서 항복하기를 청했다 한다. 아직껏 내내 쾌승해 온 고구려가, 더우기 지금 한창 내란이 일어 생명이 조석에 있는 수에게 항복 하기를 청했다 한다. 한인(漢人)이라도 이 말을 믿을 자 있으랴. 수인(隋人)의 기록은 혹은 그의 존대성으로 그런 맹랑한 소리를 쓸 것이로되, 우리의 겨레에서 그런 소리를 쓰려면 손목이 부러지지 않던가.
190
수는 내란이 일어서 종내 사직도 전복되고, 이당(李唐)이 지나의 주인이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영양왕 승하하고 영류왕(營留王)이 등극하였다. 당나라에는 고조.
191
당 고조는 고구려 왕께, 한토에 있는 고구려인과 고구려에 있는 한인을 교환 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고구려에 있는 패잔수군(敗殘隋軍-포로가 되어 종 노릇하고 있는) 만여(萬餘)를 돌려주고, 고구려인 재당자(在唐者)를 받아오고, 또한 도사〔老子學者[노자학자]〕를 몇 사람을 고빙해다가 그 강(講)을 들었다. 이 때에 당 고조는 좌우에게
192
"명실은 상부하여야 하는 것인데, 고구려 왕은 수의 신(臣)이라 하나 종내 수제(隋帝)의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이래서야 무엇이 신하냐. 짐도 품안의 백성이 인젠 안돈되었으니 구태어 싫다는 고구려 왕을 신으로 하잘 것이 무엇이냐."
193
는 의견(즉 고구려와는 아주 결연치 말고 살면 어떠냐는)을 내었다가 배구온언박(裵矩溫彦博)에게
194
"요동은 본시 기자의 터로서 위진 때에 내봉(內封)이 되었읍니다. 중국과 이족(夷族)은 마치 해와 열성(列星)같아 마땅히 높고 낮은 구별이 있어야합니다."
195
고 반대받았는데, 이 사상이야말로, 지나족으로 하여금 고구려인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따라서 고구려는 마땅히 지나인에게 머리 숙여야 한다는 그 근거가 되는 사상이다.
196
당은 또, 사마 장손사(司馬 長孫師)를 보내서 수의 고구려 땅에서 전사한 100만 망령을 제사하게 하고 고구려가 세운 바 고구려 전승을 기념하는 경관(京觀)을 헐어버렸다.
197
이로서 당도 분명 고구려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는 점을 깨달은 고구려는, 부여 땅에서 바다까지 1천여 리의 장성을 쌓아 장차의 적의 내구(來寇)에 방비 했다.
198
당에는 고조 하세하고 태종 이세민이가 황위에 오르고, 고구려는 일대 영웅 연개소문이 재상의 자리에 앉았다.
199
그런데, 고구려로서는, 불난 데 도적 같은 신라에게 약탈당한 500리의 땅을, 계속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회수해 들어갔는데, 신라는 자력으로는 그것(훔친 땅)을 유지할 수가 없어 연해 당나라에 구원을 졸라대었다.
201
"고구려는 본시 겨우 4군(四郡)인 소국이다. 짐이 요동으로 대군을 보내치면, 나라를 기울여 이를 막을 터인데, 이때 주사(舟師)를 바닷길로 평양으로 보내, 수륙 함께 치면, 고구려 따위는 볼 것 없겠지만, 지금 산동(山東)이 조락하여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짐 차마 민로(民勞)를 못 보겠다. 그러니까, 거란, 말갈을 고구려에 보내서, 좀 뒤흔들면 어떨까."
202
는 의견을 내었다가, 장손 무기(無妓)에게,
203
"고구려는 재상 연개소문이 포악하여 오래잖아 세력이 죽을 터이오니 그 때 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204
고구려를 무서워하는지라, 그저 피하기 위주하는 이 의견에 좇기로 하고, 그 대신 우선 현장(玄裝)을 사신으로 고구려에 보내서, 신라 정토(征討)를 멈추기를 부탁하기로 하였다.
205
그러나, 태종의 친신(親臣) 현장을 맞은 고구려 연개소문은, 현장의 소청을 단연 거절하였다.
206
"연전에 우리가 수적(隋賊)을 맞아 싸우느라고 남방을 돌볼 경황이 없을 때, 신라는 그 기회에 우리 땅 500리를 훔쳤소. 지금 거진 도로 회수 했지만, 아직도 약간 더 찾아야겠소. 내 땅만 다 찾고는 신라 땅은 단 1척도 손대지 않을 터이니 안심하오."
207
그러나 현장의 참 목표는 신라 문제 따위가 아니라, 고구려 경비의 허실을 엿보는 데 있었다. 현장은 자기의 탐지한 대로 태종에게 보고하였다.
208
이리하여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나라의 부로(父老) 들을 모으고, 또는 재상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면, 한결같이 ‘醜類善守[추류선수], 難政[난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수) 몇억만 중(億萬衆)을 굴복시킨 당종(唐宗)의 의기로, 고구려 따위는 우습게 여겼다. 어떤 소서(小捿)에서, ‘高麗傾國來[고려경국래], 一麾而破[일휘이파], 天賛我也[천찬아야]’라 한 것을 보면 만장(萬丈)한 그의 기개를 알 수 있다.
209
당 태종의 내침기(來侵記)는 「신당서」에 마치 소설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 태종이 전쟁에 능하다는 말하자면 칭찬록이요, 김부식 삼국사기는 그것을 고대로 베낀 것이라, 신빙하기 어렵고 신빙한다 할지라도, 몇 개 성에 대한 공략기일 따름이요, 도리어 언외문자(言外文字)를 찾아보고, 방고(傍考) 하자면, 요동 안시성에서, ‘勅諸將擊之[칙제장격지], 三日不下[삼일불하], 有詔班師[유조반사](略[략]) 酋長[추장](安市城主[안시성주]) 登城再拜[등성재배], 帝嘉基善守[제가기선수], 賜絹百匹云[사견백필운]’ 하였으니, 사흘을 공격하다가 함락되지 않으므로, 회군(당으로)하였다 하니, 100만 대병을 이끌고 원정을 와서 연전연승하다가 안시성 싸움에서 사흘 공격해 함락 안된다고 그냥 귀국한다는 것이 벌써 말이 안 되고 안시(安市)까지 오는 동안에 무수한 곤란과 패와 손실을 보고 안시성에서는 더 무서운 일을 겪어서, 더 꿈질거리다가는 큰일날 조짐이 있었기에, 초지(初志)를 단념하고 차마 돌아설 수 없는 발을 돌렸다고 보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공격하다가 쫓겨가는 적제(敵帝)를 안시성주가 등성배송(登城拜送) 했다는 것은, 지나인의 존대성의 산물이요, 「삼국사기」에도 그리 기록한 것은 매족유(賣族儒)의 망필(妄筆)일 것이다.
210
여기서 크게 참고되는 글이 있으니, 즉 지나인의 소설로서, 그 소설의 덕에 우리는 안시성주가 양(楊 혹왈 梁)만춘이란 사람인 것을 알았고, 태종 이양(楊) 성주의 쏜 소궁(小弓)에 한 눈을 잃어 애꾸눈이 된 것(고려 문호 牧隱 李穡[목은] [이색]의 시에도, 태종 失眼[실안]을 吊[적]한 것이 있다)을 알았고, 이로써 단 사흘 공격하다가, 창황히 퇴주(退走)한 까닭을 알았다.
211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은 또한, ‘太宗望之[태종망지] 有懼色[유구색]’을 말하고 이어서, ‘六軍[육군](唐[당] 의) 爲高句麗所乘[위고구려소승], 殆將不振[태장불진], 候者告英公之麾黑旗被圍[후자고영공지휘흑기피위] 帝大恐[제대공]’을 말하여 「신당서」와는 전연 반대의 사실을 알려준다.
212
당 태종은 ‘나는 수씨와 다르다. 고구려 따위는 태양 전의 초로(草露) 다’ 고 큰소리치며 갔다가 불소한 손실과 일안멸(一眼滅)의 쓴맛을 보고 ‘반사(班師)’ 하여 다시는 수씨 비웃을 용기도 잃고, 이듬해 그래도 또 우진 달(牛進達), 이적(李勣) 등을 시켜 침벌하였다. 또 그 이듬해도 또 같은 일을 하였다. 그러나 어떤 싸움을 하고, 승부가 어떠하였는지, ‘衝火而歸[충화이귀]’라 하였으니, 몇 군데 불이나 놓고 분환한 모양이다.
213
‘少發則威不振[소발칙위불진], 多發則人不安[다발칙인불안], 是天下疲于轉戌[시천하피우전술] 云云[운운]’
214
이로 보아서, 천자의 위신상 소병(小兵)을 보낼 수도 없고, 대병(大兵)은 인젠 없기도 하거니와 보내기 어렵고, 큰 두통거리던 모양이다. 이에 2만, 3만씩을 연해 보내서, 소위‘게릴라’전을 하여 고구려로 하여금 농사를 못 짓고 피곤하게 하려고 정책을 바꾸었다. 그리고 수병이 없는 고구려를 침공 함에 수전을 하려고, 많은 배를 만들기를 명하였다. 그러다가 당 태종은 많은 한과 욕망을 품은 채 하세하였다. 고구려에도 재상 연개소문을 별세 하고 그 아들이 뒤이어, 아들들의 분쟁이 차차 커갔다.
215
고구려에 이런 내홍이 있어서, 아들들이 제각기 군사를 가지고 형제상잔이 극도에 달한 때, 당나라는 신라를 손에 넣고 수(隋) 2대, 당(唐) 3대, 계 5 제(計五帝)의 숙망(宿望)을 이루어, 고구려를 꺾은 것이다.
216
당 태종-「정관정요(貞觀政要)」며, 「제범(帝範)」을 찬술시켜 제도(帝道)를 알리고 대성인이라는 일컬음을 듣느니만치, 당 태종은 비범한 임금이요 제왕중의 최고 인격자였다. 그 당 태종도 고구려에 대해서는 끝끝내 이성을 못차리고, 덮어놓고 정벌하고저, 자기 역량과 고구려 역량의 측정 비교까지 큰 오산을 하여, 생시에도 ‘소추(小醜)’에게 한 눈을 잃고, 사후에는 비웃음을 천재(千載) 후까지 남기고, 한족 100만을 요동에 죽였다.
217
당 태종 같은 위인으로도 그렇듯 고구려를 미워하였다. 아니, 당 태종 이기에 남보다 더 미워했을 것이다.
218
고구려와 한족 국가는 양존(兩存)치 못할 것을 누구보다도 똑똑히 알고, 양존하려면 한족이 고구려에게 굴하여 지내지 않을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한족의 나라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고구려를 복멸해야 할 필요를 알고, 고구려 복멸을 제(帝) 1대의 유일이요 최대의 사명으로 여기고, 그 사업에 일생을 바친 것이다.
219
수가 넘어진 것을 보았고, 당 태종 자신도 큰코를 다친 경력이 있는지라, 고구려의 실력은 몰랐을 까닭이 없다.
220
그러나 몇억이라는 무서운 숫자의 국민과, 또는 여름에도 얼음 어는 북쪽과 겨울에도 꽃피는 남쪽을 가진 광대한 국가라는 그 경악할 ‘대(大)’를 분할하여, 계속적으로 ‘게릴라’전을 하여 고구려를 피곤해 넘어지게 하려는 전략으로, 희생(당초부터 희생은 각오한 일이다)의 막대함을 불고하고 초지를 굽히지 않고, 최고의 목적을 달한 것이다.
221
‘이름이 천하를 덮고, 공이 사해에 넘치거늘, 무얼하려 폐하 동방의 소이(小夷)를 쫓다가 욕을 스스로 사나이까.’
222
이런 따위의 간(諫)은 전혀 무의미할 것이다. 제(帝) 스스로의 이름이나 공을 사려고 하는 노릇이 아니요, 요순(堯舜)의 예(裔)의 만년지계를 위하여 하는 일이다.
223
고구려는 이 당 태종의 한족 옹호의 결의에, 배달족을 대표하여 대항 하다가, 연씨문 내의 내분과 배달족 신라의 배족(背族)행위의 삼방 포위(三方包圍)에 그만 넘어진 것이다.
224
무력적으로도 이러했거니와, 이 종족(특히 신라가 最甚[최심]했다)의 새에 지나 계통의 학문이 잠입되어, 이 학문의 중독으로 민족조(民族祖) 보다도 유사(儒師)를 존경하고, 자기를 소화(小華)라 자랑하고, 침략괴(侵略魁) 기자를 국조라 숭봉하고, 진조(眞祖) 단군을 소홀히 (심지어 부인)하며, 편사자(編史者)는 자기 겨레의 하나이 꺾이는 것을 ‘천벌(天罰)’이라 하며.
225
종교는 아편이라 한다. 유교는 한낱 학문이지 종교는 아니면서도, 그 미치는 영향은 종교와 다름이 없다. 유교의 학문적 교양보다, 유교의 교주 숭앙의 노예성과, 게다가 유교 창시국 및 그 종족 절대 존배(尊拜)의 망국성을 우리 국민성으로 포섭한 사람들은, 고구려 멸망에 ‘만세’를 불렀으리라. 한인 보다도 더 큰 소리로-.
228
‘한이며 고구려도, 건국초에는 글자며 역일(曆日)이 없었다. 박혁거세 건국을 한 선제 오봉(漢 宣帝五鳳) 원년 등이란 것은 후일에 꾸며낸 말이다’
229
운운하여 마치 자기나라 일반으로 여기나, 이는 악의의 곡필이지, 몰라 서하는 소리도 아니다.
230
신라는 진인(秦人)의 모듬으로 된 나라이요, 백제는 기준(箕準)의 터를 물려 받은 나라라니, 건국 전부터 한자가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요, 고구려는 지나 영토와 땅이 맞붙었고, 지나의 망명인이 끊임없이 건너와 귀화한 부여의 뒤니, 무론 한자가 꽤 보급되었을 것이며, 더우기 그 국호로 보아,
231
지나인은 지나인의 나라 아닌 타민족의 나라에 대해서는, 발음만 비슷한 고약한 글자를 붙여서 그 나라 국호로 해 주었으니, 만약 고구려며 백제며 신라도, 각각 자기네가 그런 우미(優美)한 글자로써 국호를 삼기 전에 지나와 교제가 있었다 하면, 발음만 따서 ‘调蟬[조선]’ ‘孤狗驪[고구려]’ ‘狛罪[박죄]’ ‘蟋螺[실라]’라든, 무슨 열악 글자로 붙이지, ‘朝鮮[조선]’ ‘高句麗[고구려]’ ‘百濟[백제]’ ‘新羅[신라]’ 등 우려(優麗)한 글자로는 안 쓸 것이다. 그런데, 지나인과 교섭이 생기기 전에, 벌써 각각 제나라를 제 뜻에 맞는 한자로 붙여 두었기 때문에, 지나인은 할 수 없이 그대로 습용한 것일 것이다. -이 점만으로도, 삼국은 건국 전부터 한자가 사용 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232
이전에도 배달민족이, 자기 민족 혹은 국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쓴 한자를, 혹은 ‘壇君[단군]’ 혹은 ‘王儉[왕검]’ 혹은 ‘朝鮮[조선]’ ‘韓[한]’ ‘辰[진]’ 무엇 무엇, 그다지 고약한 글자는 없는 것이, 즉 한자가 고대부터 이 민족에게 사용되었다는 증거이다.
233
그 대시니 순전히 이 민족의 지방어로써 조직되었던 관명(官名)등은, 지나인이 그 발음에 유사한 고약한 한자를 골라 붙였으니, 고구려의 부족을 ‘絶奴部[절노부], 順奴部[순노부], 消奴部[소노부], 등등’이며, 일일히 들출 것이 없이, 모두 고약한 글자로 붙였다.
234
타민족은 ‘倭奴[왜노]’‘犬戎[견융]’‘凶奴[흉노]’며, 유구(流求)는 流鬼[유귀](新唐書[신당서])라는 등- 진실로, 지나인은 마음씨 곱지 못한 인종이다.
235
6. 扶餘 系統[부여 계통]의 百濟 始祖[백제 시조]
236
일본의 이름 있는 역사가요, 백제 연구가라고 하는 ‘금서룡(金西龍)’이며 그 밖, 일본 학자들이 두고두고 머리를 기울이는 일이 있다. 즉 그들은 가로되
237
"어떤 지역에 어떤 사람이 한 나라를 세우고, 그곳 임금이 된다 하는 것은, 지나가다가 갑자기 되는 일이 아니요, 그럴 만한 연유와 역사와 배경 등을 가지고서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무력으로 정복을 하거나.
238
그런데, 여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즉, 백제의 시조 고온조(高溫祚) 는, 마한 땅에 백제국을 세웠다. 그런데 그 고온조가, 마한인이냐 하면 그렇지 않아, 마한에서 낙랑(지나 영토) 천리를 건너, 부여 땅에 있는 고구려 국의 왕자이다. 이 고구려 왕자가, 부여 지역에도 빈 땅이 많고 많거늘, 그 곳을 버리고, 외국 영토인 낙랑도 지나서 마한까지 내려가서, 거기다가 나라를 세웠으며, 마한인은 또 어찌하여, 자기네와는 민족계통으로건 어디 로건 아무 관련도 없는 고구려 왕자를 자기네의 임금으로 맞았는가. 이해 할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고온조가 부여 계통의 왕자인 것은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부여 왕자인 고온조가 나라를 버리고, 낙랑도 지나서 마한 땅에 내려가서 백제국을 세운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운운 "
239
한사(韓史)의 일부분을 고의(악의)로 부인하고, 그런 뒤에 그 부인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이런 모순에 봉착하여 쩔쩔매는 것이다.
240
우리 역사를 가지고 가장 상식적으로 가장 자연적으로 해석하면 아무 이상한 일도 없는 바인데, 그들은 우리에게서 단군을 부인하고 따라서 단군 시대에 단군께 예속되었던 영역이 ‘부여 전역과 낙랑 등 한령(漢領) 전부와 삼한 전역’이라는 전사(前史)를 부인하고, 거기서 출발한 결론으로 북부 부여 지방, 반도 중부 한령지방, 남부 삼한지방, 이렇듯 세 토막으로 나누고 보니, 북부 부여의 왕자가 아무 인연도 없는 마한에 와서 임금이 된다는 것이 이상하고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보일 것이다.
241
그러면 우리의 역사를 기본삼아, 가장 자연적이요 상식적으로 해석 하자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242
성조 단군이 압록강 연변이요 장백산 줄기 지역에 터를 잡고 나라를 세우고 그 덕화(德化)가 차차 널리 퍼져서, 남쪽은 우도(牛島)의 최남단까지, 북쪽은 인류가 살 수 있는 최북(最北)까지 동쪽은 바다까지 서쪽은 요의 전역이 단군께 예속케 되었다.
243
이 단군 후예의 평화로운 발전은 한민족의 팽창과 충돌하여, 반도의 중부 지대는 기자를 수령으로 한 한족의 침략 때문에 잃어버리고 단군 영역은 허리를 끊겨 두 조각에 났다.
244
불, 빛, 밝, 해, 한 등은 이 단군민족의 거룩한 상징이요, 내셔날 심볼이다. 두 토막에 난 북부지방은 ‘불’에서 와전된 ‘부여’라는 지방이름 겸 민족 이름 겸 나라이름 겸, 임금의 성씨 겸한 말로 알리었다. 북부여의 임금 해부루는 ‘해’와‘불’의 합칭으로 거룩하다는 상징이며 하늘의 아들이요 고주몽의 아버지는 ‘해모수’라 전한다.
245
남부로 갈린 부분은 ‘한’이라 하며 ‘韓[한]’자를 여기 맞추어 삼한이라 하게 되었다.
246
하늘을 상징하는 ‘해모수’의 아들 고주몽이 하늘의 뜻을 받아, 이 민족의 통솔자가 되어 고구려국을 건설함에 그 셋째 아들 고온조는 멀리 남쪽에(한 령을 지나서) 있는 단군 후예의 한 갈래를 품에 품고자 아버지의 나라를 떠났다.
247
동족과 갈려 남쪽에 마한이라는 일컬음으로 분리되어 있던 분자들은 평생 그리던 조국의 왕자를 맞아서-.
248
더 부연할 필요도 없다. 일본인이 두고두고‘엄연한 사실이지만 부자연 키짝 없는 사실이라’고 하던 일이 어디 추호나 부자연한 데가 있는가. 단군을 부인하고 삼한(일인 가로되, 삼한족이 오늘날의 조선족의 祖先[조선] 이라 云[운])과 부여(일인 가로되, 부여는 만주인의 祖先[조선]이라 云[운]) 와를 별개 물이라 하여 떼어내고보니, 부여의 왕자가 한역(韓域)에 내려와서 건국 했다는 것이 부자연하게 보일 것이다.
249
7. 所謂[소위] ‘神功征韓[신공정한]’ 說[설]
250
소위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정한(征韓)이라 하여, 일본사가며 일본인들은 크게 떠들고 있지만 한사(韓史)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
251
대체 일본역사라는 것이 되는 대로 꾸며낸 것이라, 그 소위 신공이 정한을 했다는 연대가, 신라로 보자면 어느 왕의 어우(御宇)며, 어느 연대인지 전혀 찾을 길 없지만, 신라사(新羅史)에는 ‘왜의 내침’은 빼지 않고 기록 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삼한을 석권하였노라’는 신공의 침략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倭人來侵[왜인내침]’이라는 많고많은 기록중의 그 어느 하나가 거기 해당하겠지만 일인이 자랑하고 떠드는 것 같은 ‘三韓 席卷[삼한 석권]’ 대란(大亂)의 기록은 없다.
252
대체 ‘神功征韓[신공정한]’이라는 것은 명치(明治) 이전까지는, 일본의 학자들도 가급적 이를 감추고 혹은 말하기를 피하려 하였다. 역사에 뚜렷이 기록 되었으니, 부인할 수는 없지만, 모두 할 수 있는껏 소사변(小事變) 인듯 덮고 감추려 하였다.
253
그 까닭은, 신공이 정한할 생각을 낸 바의 그 동기가 국치에 가까운 창피한데서 생긴 것이 그 첫째니, ‘바다 건너 서쪽 나라(신라)에는 금은보화가 산적되어 있다.’ 는 전설이 젊은 여인인 신공의 마음을 움직여서, 지아비 천황이 애써 말리는데도 그냥 고집 출정하였다.
254
그 말리던 지아비 천황이 갑자기 죽어서(그 죽음에도 예전의 일본 학자는 의심을 두었다) 말리는 사람이 없어지매, 신공은 부상(夫喪)을 감추고, 신과부(新寡婦)의 몸으로 정한의 길을 떠난 것이다.
255
당시(명치 이전)의 일본 학자들은, 그들이 학문의 선진국으로 추앙하는 한국에,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켜서, 여인의 허영심 때문에 국제적 과오를 범하였다 하여, 꺼리고 감추려 한 것이다.
256
그것이 일본 명치 팽창기를 만나서, 해외발전의 국시가 서자, 신공의 그 행위는 선구적 영웅행위로 찬양의 목표로 돌아선 것이다.
257
우리는 일본역사(「日本書紀[일본서기]」며 「古書記[고서기]」)에서 당시의 경위를 한번 조사해 보자.
258
"중애천황 8년 9월, 그때 구마소〔態襲[웅습]〕를 정벌하던 중 이었는데, 구마소는 잘 항복하지 않고 전쟁은 난전(難戰)으로 되었다. 그때 황후(신공)는 ‘신탁(神託)’이라 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259
‘보잘것 없는 구마소를 가지고 왜 이다지 애쓰는 것이냐. 바다 건너 서쪽나라 신라는 금은을 깔로 보화를 밟는 지역이니, 그 나라를 얻을 생각을 않고, 왜 보잘것 없는 구마소에 힘을 들이느냐.’
260
천황은 이에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사면을 둘러보고, 내려와서, ‘내 살펴보아야 서쪽에는 바다 또 바다이지, 뭍은 보이지를 않더라’고 하였다. 황후는 다시 신탁이라 하여, ‘네 내말을 믿지 않고 내말을 비방하니, 너는 그 금은의 나라를 못 얻으리라.’ 고 일종의 위협미를 띤 선고를 하였으나, 천황은 굳이 그 말은 좇지 않고 구마소 정벌만 계속하다가 그나마 이기지도 못하였다.
261
그로부터 다섯 달 뒤인 9년 2월, 천황은 갑자기 죽었다.
263
‘천황이 신탁을 믿지 않고 그로서 갑자기 승하했으니, 이 상은 그냥 감추어 두고, 먼저 신라 정벌을 한 뒤에 장례 치르자.’고 하여, 시체는 그냥 감추어 두고 말았다.
264
금은보화의 나라 신라 정벌욕에 현혹된 신공은, 기회 있을 적마다, 신탁을 빙자하여 신라 정벌을 하겠다는 결의를 대신들에게 보이기를 게을리 않았다.
265
그러다가 그 해 가을 9월(夫喪[부상] 7개월 뒤요 겸해 태중 7삭이었다) 신라 정벌을 정식으로 발표하고 군사를 모았다.
266
한 달 뒤 10월 3일에 신라 원정군은 용감하게 떠났다. 이 원정군의 통수자인 신공은 임신 8개월의 남산만한 배(초산이다)를 안고 선봉으로 나갔다.
267
두 달 뒤인 12월에 원정군은 ‘삼한을 석권하고 개선’하였다.
268
그 개선 열사흘인가 나흘인가 뒤인 12월 14일에 태중 시일 10개월 반인가 11개월(천황 급사에서 起算[기산]하여)의 황자가 났다."
269
- 이상이 일본정사(日本正史)에 나타나 있는 바의 신공정한기다.
270
출발에서 귀착까지 단 2개월의 짧은 날짜에, 아무리 신조(神助)가 있어서 빨리 왕복하였다 할지라도 ‘신라 왕이 놀라서 나와서 항복하고(싸우지도 않고), 또 멀리 백제며, 더구나 2천 리 밖의 고구려에까지 그 소문이 가서고구려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하니, 비행기며 유선 무선의 전신이 있는 지금 세상에서도 보지 못할 기적이다.
271
더우기 신라 왕의 항복하는 맹서문 가운데, ‘해가 서에서 뜨고, 압록강 물이 거슬러 흐를지라도 운운’의 구가 있으니, 신라 왕이 하필 왜 신라 땅안에 있는 낙동강을 버려두고 멀리 남의 나라 압록강을 끌어 맹서하리오.
272
이 여러가지의 모순되고 우스운 점들로, 일본 학자들도 할 수 있는껏 이 소위 정한을 외면코자 한 것이다.
273
지금에 앉아서, 모든 정치적이며 도덕적이며의 문제를 떠나 공평코 냉정히 관찰하면 그때의 경위를 이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
274
‘젊은 여인 -더구나 임신녀- 의 신경에 금은보화에 대한 동경이 영향 되어(이를 억누르는 부군까지 이미 제거했으니) 해산키 전, 즉 산욕(産褥)에 눕기 전, 아직 홑몸인 동안에 결행하고자 8개월의 큰 배를 부둥켜 안고 운파 만리(雲波萬里)의 길을 떠났다. 신라까지 이르렀는지, 혹은 대마(對馬) 나 일기(一岐) 쯤까지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뭍〔陸〕에 도착하여, 그 곳 토민을 붙들고, (신라에는 흔하고 흔한- 그리고 일본서는 三種神器[삼종신기]의 하나로까지 존중히 여기는) 구옥(勾玉) 몇 개며 근처 토민들의 일용품 깨나 약탈해 가지고, (해산이 목전이라 절대로 주저하지 못할 입장이라) 황황히 ’개선‘하였다.’
275
황후가 몸소 한 일이라, 장병들이며 본토 토인들도, ‘승리의 명예군이나 맞는 듯’이 맞지 않을 수 없다.
276
이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해적행위라, 명치 이전까지는 쉬쉬하여 말하기를 꺼리어 오던 것이다.
277
한사에서는 항다반사인 ‘왜적’의 하나쯤으로 여기었기에, 특서치 않았지, 황후 친솔의 해적단일 줄 알기만 했더면 대서특서하였을 것이다.
279
한인(韓人)은 한사 중에 기록이 없다 하여, 임나(任那)의 존재를 부인 하려 한다.
280
일본인은 옛날에 일본이 남조선에 ‘일본부(日本府)’를 두었었다, 즉, 임나가 한지(韓地)의 일본부라 하여, 임나의 존재를 과장하려 한다.
281
그러면 임나는 과연 있었느냐 없었느냐.
282
지나의 기록인 남사(南史)며 북사(北史)며 당서(唐書) 등에 편입된 ‘왜국 전(倭國傳)’을 보면 ‘왜국 왕을 무지절도독(武持節都督) 왜(倭) 신라(新羅) 임나(任那) 가라(加羅) 진한(秦韓) 모한(慕韓), 육국제군사(六國諸軍事), 진동 대장군(鎭東大將軍) 왜국왕(倭國王)으로 봉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구려 호태왕의 비문에도, ‘追至任那 加羅從拔城[추지임나 가라종발성]’ 이란 구가 있어, 임나가 실존하였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283
그러면 한사(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고의로 이를 말살한 것이 분명하다. 왜 · 신라 후인이니 찬자 김부식의 좁으러운 마음으로 옛날일망정 신라 경내에 일본부가 있었다는 것은 싫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서 고구려며 백제사(百濟史)에도 「삼국사기」에는 상당한 곡필이 있을 것이 추측 되거니와-.
284
지금의 김해 고령 땅 근처에 옛날 일본부가 있었다는 것은 말 잘 꾸며대는 일본인에게 말하라면 허울좋은 말이 나오겠지만, 실질에 있어서는 임나에서의 일본의 패퇴일 따름이다.
285
단군께서 불함산 기슭에 만년기업을 세우실 그 당년에는 배달족 밖에 남부에는 왜며 남양토인의 표류민들이 여기저기 부락을 이룩하고 선주(先主) 하여 있었다. 신라(처음은 서라벌)도 주변 겨우 30~40리 내외지, 대구 지방도 후에야 신라에 들었다. 그리고 종족계통으로도 ‘배달’후예가 아닌 종족의 부락이 곳곳에 산재했으니 ‘서라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검고 크고 머리털 굽실굽실하고 사람 잡아먹는 인간이 있어서 책(柵)으로 막고 살았다는 기록으로 보면, 아프리카의 식인종의 부락도 있었던 모양이다.
286
이러한 가운데를 단군 후예 배달자손이 북쪽에서 차차 남하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며 번성하였으니 단군 후예가 크느라고 저절로 차차 압축되어, 마지막에는 흔적까지 없어진 종족 가운데 식인종도 있거니와 김해지방의 임나 왜종(倭種)도 있다.
287
민족발전과 쇠망에 있어서, 반드시 밟는 과정을 밟아서 한 때 반도땅에 일본 표류민의 부락(뒤따라 이를 보호하고 감독할 일본관부)이 생겼다가 한족 발전에 따라 소멸된다는 것은 일본인으로 자랑할 것도 아닌 대신, 한인으로 부끄러이 여길 일이 아니다.
288
「삼국사기」 이외의 모든 사서가 임나 있었음을 증명하고, 여기 대한 반증은 없으니, 임나는 분명 지금의 김해 근방에 존재하였었다.
290
금년이 일본 기원 이천육백 몇 해라 한다. 소위 인황 초대(人皇 初代) 신무(神武)가 즉위한 지 이천육백 몇 해란 뜻이다. 이것은 일본의 칙정정사(勅定正史)인 「일본서기」에 의지한 연수다.
291
그런데 일본 학자들은 이 연기(年紀)를 믿지 않는다. 칙정사(勅定史)에 그렇다 하니 부인은 못하나 믿지는 않는다.
292
그럼 왜 믿지를 않는가. 사람의 상식으로는 믿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93
대체 사람의 1세대(사람이 나서 후속자를 낳기까지)를 25~26년으로 잡아 야한다. 무론 유난히 늦고 유난히 이른 사람도 있겠지만, 평균잡아 25~26 이 가장 옳다고 볼 것이다. 고대에 조혼하는 풍습이 있고, 왕실 등 상류사회는 더 일찍 결혼하는 것이 통례였으니까 왕실 등의 1세대는 20 내외로 보는 것이 가장 옳다. 신라가 1왕의 재위율 평균 18년이요는 20가 22년이요는외로 20년, 고려는 14년 평균이다.
294
그런데 ‘일본 황실’의 연수를 따지면 신무(神武)에서 숭준(崇峻)까지 계 21세 32제(帝)의 세대 연월은 매대 평균 59년이 된다. 즉 쉰아홉 해 뒤에야 차대(次代)에 물려준 셈이 된다. 따지자면 팔십 생남도 없는 배 아니지만 평균 59년은 상식으로 승인할 수 없다. 더우기 신무에서 윤공(允恭)간 17세 19제 평균은 65 - 즉 예순다섯 해 뒤에야 차대가 생긴 셈이 된다.
295
이것은 무론 상식으로 승인할 수 없는 배라, 왜학자(倭學者)들은 비공식(공식으로는 기원년수가 勅定[칙정]된 배라 부인 못한다)으로 부인하는 소이다. 그리고 여러가지로 따진 끝에, 공식 기원은 실제보다 약 630년 더 늘었다. 실무기원은 2천 년 조금 미만이라고 한다. 기원 이천육백 몇 해가 아니요 일천구백칠십 몇 년이라는 것이다.
296
처음에는 고제(古帝)들의 수 몇천 몇만세설을 정정하기 위하여, 그 몇 천 몇 만에서 ‘천’이상의 ‘고수(高數)’는 떼기로(예컨대 모 천황의 수가 고사에 54, 321세라 되어 있으면 ‘고수’인 54,000은 떼고 321 만으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만, 천만 떼니, 700, 800세의 천황이 또한 수두룩 해지므로 이도 부자연하다 하여 백위(百位)까지를 없애기로 하여, 수는 모두 100 세 이하로- 말하자면 과한 부자연미(不自然味)는 없어졌지만, 그 대신 새로운 우스운 것이 많이 생겼다. 예컨대, 3, 401세이던 제에게서 100이상의 고수를 떼면, 단 1세로 되는 둥, 혹은 70, 80, 90에 비로소 후계자를 낳는 듯, 별의별 기괴망칙한 역사가 되어버린다.
297
전 일본의 지혜를 총합하여 이러한 곤란 등을 극복하고 창출하고 산출 해낸 것이, ‘공식 기원년대에서 630년 더 깎아야 한다’는 설이요, 이것은 일본의 학자며 지식인이 이만하면 무난하다고 용인은 하는 배다. 즉, 과히 황무(荒誣) 치도 않고, 또는 일본적 자존심을 과히 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298
그러나 우리 한인으로는 좀더 따지고 싶으니, 즉 비유컨대 김 모가 모 일에 이 모의 집에 간다 하면, 그 모 일에는 이 모의 집에는 김 모가 왔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왜와 이웃해 사는 한토에는 모 일에 왜가 왔으면 그것이 서로 들어맞아야 한다. 왜가 갔으면 한에는 왔고, 이렇듯이….
299
왜의 모가 한에 왔다 치면, 왜가 떠나기를 오늘 떠났으면 한토에는 어제도 착할 수는 없다. 그런 기록이 있으면 위기록(僞記錄)이다.
300
이렇게 따져 보자면, 왜의 꼬두머리 신인 천조(신무의 6대조라 한다)의 아우 되는 소잔명(素戔命)이 신라의 우수산(牛首山)에 왔다는 것이 왜사(倭史)에 있다. 또한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신라사에는 그런 왕자 없다) 이 신대(神代)의 왜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로 보자면 적어도 천조(天照) 의아 우는 즉 왜의 ‘신대(神代)’는 신라 건국 이후의- 더우기 우수산이 신라 령(新羅領)(본시 濊[예] 땅이요 뒤에 고구려 땅이요, 신라령으로 되기는 꽤후이다) 이 된 뒤의 일로 볼 것이요, 따라서 천조의 6대손인 신무가 기원한 것은 신라 건국 수백 년 뒤(사람의 代數[대수]로는 여섯대 이상 뒤)요 지금부터 홑 1,800~1,900년 전이라 단정할 밖에 없다(신라 기원이 거금 2004~2005년 전이다).
301
신대(神代) 일본에 갔다는 ‘신라 왕자 천일창’의 5대손(1대를 30년 으로잡아도, 천일창의 150년 뒤밖에 안된다)이 일본의 수인 천황(垂仁天皇)(일본기원 630년경에 재위했다)조에 일본에 살았다 하니, 왜사는 모두 뒤죽박죽이다.
302
한사에는 간지(干支)가 기록되고 겸해 지나사(支那史)와 서로 연대가 거의 부합 되어 그와 대착(大錯)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사는 뒤죽박죽이다.
303
그러면서도 신정백석(新井白石) 같은 사람은 도리어 ‘韓史有誤紀元[한사유오기원]’ 이라 하여, 같은 왜학자간의 웃음을 산 일까지 있다.
304
일본은 공식 기원에서 한 1천 년쯤 더 줄이어야 실년대가 될 것이다.
305
기원 이천육백 몇 해란 당찮은 말이다. (끝에 참고로 한마디 부언할 것은, 일본에 記錄術[기록술]이 수입되고 역사가 좀 정확하게 된 제 20세인 安慶帝[안경제] 부터 소화까지 106세는 1대 평균 14년 强[강]인데, 그 이전에서 거꾸로 신무까지는 1제 평균 60년 弱[약]으로 된다. 1세 60년 약이던 종족이 갑자기 1세 14년 강으로 돌변한 것이다.)
307
위에도 소위 ‘신공황후 삼한정벌’이라는 것에 대하여 몇 마디 썼지만 좀더 부연을 하자면,
308
안해인 황후(신공)의 삼한정벌하자는 의견을 억누르다가 그날 밤에 갑자기 죽은(2월 6일 死[사]) 중애천황(仲哀天皇)의 그때(죽은 때)의 나이가 52 살이었고, 안해 신공은 그 뒤 70년(69년이다)간을 아들 손주대에 섭정을 하였으니까, 당시는 20세 안팎의 소녀였을 것이다. 서방에 금은보화가 산적된 나라가 있다 하면, 한사코 손대어 보고 싶을 허영의 적령이다. 임신 8 개월의 몸을 가지고, 신상부(新喪夫)의 젊은 과부로서 만리 해로를 떠난 것이다. 금은보화에 욕심이 나서….
309
이 무겁고 부자유한 몸을 가지고 출발(일본 筑紫[축자]에서 10월 초사흗날) 부터 귀착(12월 14일에 해산했으니까, 귀착은 12월 초로 본다)까지가 단 2개월이라는 짧은 날짜로 소위 삼한을 석권하였겠는지 어떨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310
부황 중애가 원정을 엄금하다가 급사한 그 사인도, 미흡키 짝이 없다. 혹은 ‘中敵矢而崩[중적시이붕]’이라 혹은 ‘忽病發而崩[홀병발이붕]’ 이라, 혹은 ‘忽痛身而明日崩[홀통신이명일붕]’이라 등등으로, 대중을 잡을 수가 없고, 따라서 의혹이 붙게가 된다. 황실의 일이라 공공히 독살설을 꺼내지는 못하지만….
311
그리고, 그 출정의 안목이 전혀 ‘신라에는 금은이 많다’는 전설에 의지 하여 실행된 바이라 이 국모의 해적행위에 남편 중애도 이를 부끄럽게 여겨 극력 제지하다가 급사하였고, 후일의 유자(儒者)며 학자들도 마찬가지 로서 ‘彼不窺我[피불규아], 又不叛[우불반], 出師[출사] 義無名無[의무명무]’(藤井懶齋[등정라제])라 또는 ‘何據而征韓之耶[하거이정한지야]’(貝原益軒[패원익헌]) 등 비난이 자자했던 것이다.
312
그러나 이 신공은 그래도 인물이었던 모양으로 「한서(漢書)」에도 ‘왜는 여왕의 나라요, 비미호(卑彌呼)라는 여왕이 이를 다스린다’하였고, 「삼국사기」에도 비미호의 이름이 보인다.
313
이 비미호를 일부 일본 학자는 신공황후가 아니요, 다른 여추(女酋)라 하고, 또 「후한서(後漢書)」 에 ‘卑彌呼年長不嫁[비미호년장불가], 事鬼神道能以妖惑衆[사귀신도능이요혹중], 於是共立爲王[어시공입위왕], 侍婢一千[시비일천] , 少有見者[소유견자], 唯一男子給食傳辭語[유일남자급식전사어], 居處宮室[거처궁실] 云云[운운]’으로 아닌 듯도 싶지만, 그 업적 등으로 신공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른 일부의 학자는 ‘卑彌呼[비미호]’를 ヒメコ(姬子[희자])라 읽지 않고 ‘ヒソミコ(日之御子[일지어자])’라 읽고 신공으로 인정한다.
314
좌우간 20살 안팎의 소녀로, 더구나 임신 8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80 척의 전선을 끄을고, 멀리 해외에 원정할 생각을 내었던 만큼(그 원인이며 동기는 那邊[나변]에 있던 간에) 범녀(凡女)는 아니었다.
317
‘왜’와 ‘왜놈’은 같은 말로- 그리고 ‘일본’‘일본인’을 가리키는말로,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바이다. 즉, ‘倭[왜]’와 ‘倭奴[왜노]’ 는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다.
318
그러나 명치유신 이후에 차차 발흥하여 세계 열강에 한몫 끼게까지 올라간 일본인으로서는, 부인하고 싶은 창피스런 칭호이었다.
319
더구나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자랑하고 일찌기 외국에 굴해보지 않았 노라는 일본인에게는(타민족을 수모하기 위하여 漢人[한인]이 지어준 예컨대, 濊[예], 貊[맥], 犬戎[견융], 靺鞨[말갈], 鮮卑[선비] 등 같은 악칭- 대체 한족은 다른 민족에게는 발음이 비슷한 고약한 글자를 붙여서 불러주는 습성이 있다-인) ‘왜노’라는 칭호를 매우 싫어 하였다. 더우기 왜노가 옛날한(漢)에게 예속되어 한을 상국으로 섬겼다는 등은 절대로 부인하여 왔다.
320
그런데 불행히도 구주 어떤 곳에서 어떤 농부가 밭을 갈다가 한 개의 금인(金印)을 얻었는데 거기는, ‘漢委奴國王[한위노국왕]’이라고 새겨져 있다.
321
이것이 다른 땅에서 발견되었으면 ‘우리는 혹 왜(倭)는 될지언정 왜노(倭奴)는 아니니, 우리 일본과는 관련이 없는 인이라’고 부인할 것이지만, 불행, 일본 영역 안에서 발견된 자라. ‘왜노(倭奴)는 왜노(倭奴)의 략이라’고 밖에는 인정할 수가 없게 되었다.
322
그러면 ‘한나라의 왜현(倭県)’이었었다는 것은 그 금인이 명백히 증명 하였다.
323
말을 돌려꾸미기를 잘하는 일본인은 여기서 다시 통상(通商) 또는 문화 수입의 필요상 용인한 외교적 문자라고 돌려대기는 하였지만, ‘왜노’ 즉 왜놈이라는 칭호만은 벗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후한서」 왜전(倭傳)에 ‘建武中元二年[건무중원이년], 倭奴國奉貢朝賀[왜노국봉공조하], 使人自稱大夫[사인자칭대부], 倭國之極南界也[왜국지극남계야]’라는 구절과 왜전에 ‘略[략]. 至伊都國[지이도국], 又東南百里至奴國[우동남백리지노국], 又東行百里至不稱國[우동행백리지불칭국], 云云[운운]’ 의 구를 발견하고 여기 부회 하여, ‘왜국과 왜노국은 별개 존재다. 즉 왜인의 노(奴) 들만이 사는 나라이 따로 있다. 일본인은 왜인일지언정 왜노인은 아니다.’ 라는 말을 시작하여 자기네는 왜노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324
한인에게 왜노라는 말이 생기면서 우리 겨레에게는 ‘왜놈’이란 말이 생겼으니, ‘왜’와 ‘왜노’가 다르면, ‘왜’와‘왜의 종’이라는 조선말도 있을 법한데, 그러면 이 조선말의 ‘왜놈’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뿐더 러, 「신당서(新唐書)」에는 ‘日本[일본], 古之倭奴[고지왜노]’라고 밝히기까지 하였다.
325
원래 일본인은 이렇듯 말절(末節)에 구애되어 마음쓰는 인종이다. 1천 년 2천 년 전에 왜라 불리었으면 어떻고, 왜노라 불리었으면 어떻다는 말인가. 현재 세계의 제일등국들도 100~200년 전까지만 해도 ‘양귀자(洋鬼子)’가 아니었던가.
326
그런 좁살스러운 인종이니까, 합병후, 해방전까지 자기네의 식민지에 불과한 조선이 옛날에는 자기네보다 훌륭하였다는 것을 샘하고, 애써서 한인으로 하여금 고사(古事)를 모르게 하려 한 것이다.
327
일본문화의 스승인 ‘왕인(王仁)’이 백제인이라는 것을 꺼리어서 ‘왕인은 백제에 입적(入籍)은 하였지만 그 조상은 한인(漢人)이라’는 둥 당당한 부여말 고구려초의 문화산인 평양 근처 낙랑지(樂浪趾)의 고분 발굴 품을 ‘낙랑 문화’라 따로이 이름을 붙여서, ‘한문화(漢文化)의 일부’ 라는둥….
328
그때에 그 지역이 한령 낙랑군지(漢領 樂浪郡趾)이니 그 치자 내지 행정자는 한인일지 모르나, 향토문화의 주인인 그곳 토민은 단군 후예인 배달민족이요, 이르는 바 고조선족이다. 그것을 ‘낙랑문화’라 따로이 이름 붙이고, 한 문화의 일부라 하여 우리 한민족(韓民族)과 떼어내는 등의 생각하면 야스 껍기 짝이 없는 일본인이다.
329
또한 단군께서 창업하신 뒤에, 배달민족은 차차 번식하고 흥왕하며 차차 남하 하였다. 그리고-.
330
그때에 반도의 남부(지금의 慶[경], 全[전] 等[등])의 남쪽에는, 선주민으로 왜가 꽤 많이 살고 있었다.
331
한적의 ‘후한서-동이전’이며 ‘위지-동이전’을 볼지라도, 마한조에, ‘略[략]. 基北與樂浪[기북여락랑], 南與倭接[남여왜접]. 云云[운운]’ 이라 되어 있고, 진한도 역시 ‘남접왜(南接倭)’로 되었고, 그 중간지에 바다가 있다는 기록이거나 격해이접왜(隔海而接倭)란 말이 없으니, 삼한 때에는 왜가 현재 남부 조선지방의 선주민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고대 ‘민족 이동’ 시에 북방에서 남방으로 왜족이 이동하던 그 꼬리인지 혹은 표류민 등인지는 알 수 없지만.
332
그런 때에 현재의 김해 고령 근처에 임나부(任那府)가 있어서 반도에 건너와 있는 왜인들을 감독하던 관부였던 것이다. 일본인이 말하는 바 ‘官家([관가] 미야케- ミヤケ)’ 다.
333
현재 만주 즙안현에 있는 고구려 호태왕 비문에 보건대, 백제와 신라는 옛날 왜노의 신민(臣民)이 되어 있었고, 신라 왕이 호태왕께 구원을 청하므로 보기(步騎) 5만을 이끌고 달려가서 보니, ‘至新羅城[지신라성], 倭滿其中[왜만기중]’ 이라 하였고 「일본서기」에 보면 신라, 더우기 백제는 일본(왜)의 보호국 이었던 듯이 기록되어 있다.
334
수나라의 강성, 당나라의 웅대에도 머리를 굽히지 않은 고구려까지도, 자기네(왜)에게 조공한 듯이 기록한 왜의 기록이라, 얼마만치 에누리는 하여서 볼 것이로되, 백제며 신라가 처음 미약한 소부락에서 건국하여 차차 늘여 갔으니, 선주민인 왜에게 처음은 한동안 굴하여 지냈을 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335
이렇듯 차차 단군 후예의 점대(漸大)에 밀려서 쫓겨난 선주민인 왜인이, 그 기록에는 자기네가 자기네 임의로 백제 왕을 혹은 봉하고 혹은 갈고 혹은 폐한 듯이 꾸미었으며, 백제 왕이 몸붙일 곳이 협소하므로 자기네(왜)가 점령 하였던 땅(현재 남조선이 일부)을 백제 왕에게 ‘하사’하여 입도 거주(立都居住)케 한 듯이 꾸며대었다.
336
일본인의 기록에는 어떻게 꾸몄든 간에, 배달민족의 점대로, 선주민인 왜종은 완전히 바다 건너로 쫓아낸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337
12. 婆娑尼師今[파사이사금], 于老舒弗邯[우노서불감]
338
일본의 칙정정사인 「일본서기」에 이르기를 ‘신공녀’의 남편인 ‘중애왕’ 이 갑자기 죽은 것은 중애 9년(서기 200년) 2월 초엿새(혹일 닷새) 라하고, 10월 초사흗날 신공은 축자를 떠나서 신라 정벌의 길에 올랐다 하니, 남편 죽는 전날이나 당일조에 임신하였다 할지라도 만 8개월의 거복(巨腹)이다.
339
이 거복을 붙안고 바다를 건너 ‘삼한을 석권’하고, 축자에 돌아와서 해산한 것이 12월 열나흘, 즉 정신적이며 육체적이며 태과(太過)한 격동 가운데 서도 조산은커녕 1개월 만산을 하였다.
340
그런데 그 신공이(「일본서기」왈) 80척 전선을 이끌고 신라에 이르매,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이 나와서 항복했다 한다.
341
그런데 신라에는 파사매금이란 임금은 없고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이란 임금이 있는데, 서기 80년부터 111년까지 재위했다. 이 임금의 어우(御宇)에는 ‘왜적 내침’의 기록은 없다. 한사(韓史)의 ‘파사이사금’을 왜사의 ‘파사매금’으로 보아야겠는데, 그러니가 따라서 파사이사금이 신공의 군문(軍門)에 항복했다고 보아야겠는데, 파사이사금과 신공과는 연대도 맞지 않거니와 여러가지 점으로 미루어, 일본 사학자들도 신공의 신라 원정은, 파사왕 때가 아니고 다른 왕의 때(어느 왕의 때인지는 각설이 각이하다)라 한다.
342
그런데 ‘一云[일운]’이라 하여 이런 것이 또 왜사(倭史)에 있다. 가로되
343
"신공이 남장하고 신라 원정을 떠났는데, 신라왕 우류조 부리지간(宇流助 富利智干)이 나와서 항복했다. 그 항복하는 신라 왕을 잡아서 죽이고, 땅에 묻은 뒤에, 관원 한 사람을 남겨두고 다 본국으로 개선하였다. 그런데 신라왕의 안해가 부왕(夫王)의 시체를 찾으려고 아(왜)의 관원을 뇌물 하여 묻은 곳을 알아내고, 그 관원(왜)을 죽여서 부왕의 시체 아래 깔아 개장(改葬) 하고,
344
‘온갖 사물에는 상하가 있는 법이라. 너는 죽은 송장일지라도 마땅히 아래 깔려야 하느니라.’ 고 하였다. 천황(왜)은 이 말을 듣고, 다시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아주 멸하려 했는데, 신라 백성이 왕처를 죽여 사죄하므로 일이 끝났다. 운운 "
345
즉 ‘파사매금’이 아니고‘우류조 부리지간’이다. 그리고 일서(一書)에는 항복받고 돌아갔다 하고 일서(一書)에는 항복하는 나왕을 죽였다 하였다. 뒤죽박죽이다.
346
그런데, 한사(삼국사기)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으니, 즉 ‘삼국사기 본기 첨해이사금(沾海尼師今)’조(서기 250년경)에 첨해왕 3년 4월에, 왜인이 서불한(舒弗邯-벼슬이름)‘우로(于老)’를 죽였다 하였고, 동 열전 ‘석우로(昔于老)’ 조에,
347
"우로(于老)가 왜사(倭使) 갈나고(葛那古)를 응대하다가, 농담으로 조만간 너희 왕을 잡아 염노(鹽奴)로 쓰고 너희 왕처는 부엌데기로 쓰겠다 했더니, 왜왕은 분개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서 싸우려 하였다.
348
‘우로’는 이 일은, 내게서 생겨난 일이니 내가 책임진다 하고, 스스로 왜의 군문에 이르러, ‘전에 희롱으로 한 말 때문에 이렇듯 소란이냐’고 하니, 왜인은 대답치 않고 우로를 잡아서 섶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였다. 그때 우로의 아들은 아직 어렸다.
349
그 뒤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서기 260년경) 때에 왜국 대신이 내빙 했는데, 우로의 안해는 왕께 허가얻어 왜 대신을 집에서 향응하다가 취한 뒤(왜가)에 뜰에 끌어내려 불태워서 죽여서 망부의 원수를 갚았다. 왜는 분개하여 금성(金城)에 내공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운"
350
왜 기록에는 ‘신라왕 우류조 부리지간’이라 했고 「삼국사기」에는 ‘서불한우로’라 하여서 좀 다르지만, ‘우로(于老)’와 ‘우류(宇流)’, 또는 분살(焚殺), 처의 보수(報讐)등, 공통되는 점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왜 기록의 우류를 우로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51
「삼국사기」는 「신라고기」등 예로부터 있던 기록을 김부식이 정리 하여 찬술한 것이니, 그 왕대며 연조 등은 신빙할 만한 것이다.
352
그러나 왜사는 왜 기원 1,300년 뒤에, ‘어떤 기억력 좋은 억력’이 과거
353
1,300년간의 춘추를 기억해서 술(여기 관해서는 아래 다시 쓸 기회가 있을것이다) 한 것이니, 스스로 뒤죽박죽이 씘력’선후도착이 될 것은 정한 이치다.
354
신공녀(이름은 ‘息長帶日費命[식장대일비명]’이다)라는 허영심과 야심 만만한 젊은 여편네가 있어서, 이웃나라 신라에는 금은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중애천황)에게 이를 빼앗으러 가자고 조른다. 그러나 남편은 나이가 50을 넘은 초로의 사람으로, 그런 허영에 들뜰 시절은 지낸 사람이라 안해의 허욕을 꾸짖기만 한다.
355
이에 안해는 꾀를 내어 소위‘신탁’이라 하여, 하늘의 분부까지 있으니 꼭 금은을 구해다가 나라를 가멸케 하고 자손을 안락되게 하자고 고집한다.
356
남편은 산에 올라가서 사면을 살펴본 뒤에, 다시 안해에게 ‘서쪽에는 바다만이지 뭍이 보이지 않으니, 무슨 나라가 있단 말이냐. 신탁이라 하니 무엇이라는 신의 분부가 그러하냐.’ 고 묻는다. 안해는, ‘표통남(表筒男)’ ‘중통남(中筒男)’ ‘저통남(底筒男)’ 의 삼신의 분부라 한다.
357
그러나 남편은 그냥 못하리라고 금하였다. 그런데 그 이튿날 남편은 갑자기 죽었다. 소위 ‘忽痛身[홀통신]’으로….
358
스무살 안팎의 젊은 여인으로, 더우기 전지(그때 態襲[태습]지방 정벌 도중 이었다)에서 남편을 잃었으면 망지소조하여 정신을 못차릴 터이나, 이 신공녀는 2~3 대신과 의논하고 부상을 감추고 금은 획득의 계획만 진척 시키고있었다.
359
그런데 신공녀의 배가 점점 커갔다. 그 뒷날의 해산일자로 보아서 고중애(남편)의 씨라고는 보기 힘든 태아였다.
360
신라를 다녀 오려면, 해산전에 다녀 와야지, 산욕중이거나 유아가 품에 달리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직 홑몸일 적에 결행해야 할 것이다.
361
신라에 좌우간 다녀는 왔다. 그의 결의로 보아서는, 명실(名實)이 같게 삼한을 석권하고 싶었겠지만, 해산기가 임박한 몸이라, 욕심대로 할 수 없고, 왜토(倭土)가 아닌 어떤 해안에 이르러, 이곳을 신라로 인정하고 토민을 붙들고, 토민의 소지품(토민의 소지품이라 할지라도, 아직 석기시대를 벗지못한 왜의 눈에는 희귀한 보물로 보였을 것이다)을 약간 약탈해 가지고, 위세 좋게 개선하였다.
362
황후가 몸소 멀리 해외에 원정가다가, 그래도 패귀분환(敗歸奔還)은 아니니, 왜종 건국 이래의 대사였다. 더우기 그뒤 69년간을, 신공은 자손의 대에 섭정을 하였으니 신공 섭정의 전 기간은 그 사건(신라 원정)을 과장하여 찬송하고 떠들었을 것이다.
363
생리학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는 시절이니, 인태(人胎)가 모체 속에 며칠 동안 있는 것인지 정확한 날짜는 모르고, 10개월쯤이라는 막연한 지식만 가졌으니, 부(父?) 사후 10개월 하고 또 열흘이나 뒤에 난 아이에게도 아무 부자연성(不自然性)을 몰랐다.
364
10월초 발정(發程)하여 12월초 (개선)귀환하였다는 것은, 왜종이 두고두고 자손들에게 자랑하여 전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렇게 빨리 이겼노라고….
365
그러나 불행 아직 기록술을 모르는 미개종족이라 기록은 없이 입에서 귀로 전해 내려왔다.
367
일본인은 한사(韓史)를 가리켜, ‘高麗王時[고려왕시], 號爲粗略[호위조략], 在千歲之下[재천세지하], 三國之後[삼국지후], 綴拾補遺[철습보유], 屬辭比事[속사비사], 尤多牴牾[우다저오], 豈可盡信乎[기가진신호]’라 하여 한사는 수천 년 뒤에 주워모은 기록이니 믿을 수 없다 한다.
368
옳은 말이다. 그러기에, 한사는 기록술이 생긴 뒤에 비로소 역사다웁다.
369
그전엣 것은, 가령‘단군’하면 단군이 업을 일으키셨다는 뿐이지, 단군의 아들 손주 등, 계속된 기록은 전혀 없고, 기자 역 그렇고, 위씨(衛氏)며 삼한, 모두 그렇다. 상기(詳記)가 없으니, 이것으로 보아서, 거짓없는 기록으로 믿을 수 있다. 그리고, 고려조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찬하는 당년)까지는, 「고 삼국사기」며, 고구려 「유기(留記)」며, 「백제기(百濟紀)」 등이 잔존하였고, 민간전설이며 야사 등이 있었으며, 거기서 추린 것이, 김부식 「삼국사기」 며 일연 「삼국유사」이니, 그 두 가지 서적은, (찬자가 어떤 착각으로 改筆[개필]한 것을 제하고는) 믿을 수 있다. 일본인은 덮어놓고 삼국 이전은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간략한 것으로 보아서 믿을 것이라 본다.
370
일본인은 한사를 그렇듯 내려친 뒤에, 자기네 일본인은 한사보다 400여 년더 먼저 된 것이요, 고사(古史)도 상세히 기록되어 한사의 조잡과는 다르다 자랑 한다.
371
그러면 일본인이 자랑하는 일본 최고사(最古史)인 「고사기(古事記)」는 어떻게 하여 된 것인가.
372
왜 제40대 제인 천무천황(天武天皇)(일본 서기로 따지자면 신무 기원 1,300여 년 뒤다) 이 평소에 각처에 전하는 자국 역사가 차차 정실(正實) 엣 멀어가고 거짓이 많이 섞여가는 것을 한탄하여, 제 자신이 삭위정실(削爲定實) 하여, 잘 외어 두었다가,‘패전아례(稗田阿禮)’라는, 기억력 썩 좋은(28살 났다) 사람에게 말하여 주어, 다 외우게 하였다. 그 패전 모(某)가 60세가 넘으매 당시 왕 원명제(元明帝)가 패전 죽을 것을 근심하여, 안부모(安部某)에게 칙(勅)하여 패전에게 그 고사(古史-1300년간의)를 다시 잘 들려가지고, 그때 찬술한 것이 일본 최고사 「고사기」라 한다.
373
말의 씨가 먹은 것인지 아닌지는 독자가 스스로 판단하라. 천무제(天武帝) 이전에는 무엇으로 전하여 천무까지 1,300년간을 그렇듯 상세하게 전해왔으며, 어떤 신감(神感)으로 천무는 ‘전하는 바의 고사에는 정실을 잃은 것이 많다’ 고 단정하였으며, 무엇을 표준삼아 ‘정정’하였으며, 1,300년의 장구한 세월의 역사를 기억하는 그 기억력(더우기 태고시의 몇 월 몇 일 같은 숫자 등까지도)은 무슨 신술(神術)이며, 이런 것들을 전수받은 패전 모가, 28 소년 때에 들은 것은 60 옹이 되어 제삼자에게 또 전수를 하였다니, 모두가 참으로 신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니다.
374
그리고, 신무제(神武帝) 때부터 천무 때까지 1,300년간을 지내노라니, 이야기의 원형과는 아주 딴 것이 되었을 것이며, 그것을 또 천무의 주관으로 첨삭을 하고, 패전이 또 근 40년간을 머릿속에 품고 있었으니, 무엇이 되었겠는가….
375
그 「고사기」의 벽두에 말하기를 ‘伊弉諾尊[이장낙존]’ ‘伊弉册尊[이장책존]’의 남녀 신이 팔심전(八尋殿)에서 서로 만나,
376
"내게는 생기다가 남은 것이 있고, 네게는 생기다가 모자란 것이 있으니, 내 남은 것과 네 모자란 것을 맞추어 보자."
377
하여, 둘이 교미하고, 이리하여서, ‘대팔주(大八州)’를 낳고, 다음에는 바다, 산천, 초목, 풍화(風火) 등을 낳고, 그리고서는 천조(天照), 월독(月讀), 소잔(素戔) 등의 3자녀를 낳았다. -이상이 일본 신화의 첫 혈(頁)이요 일본 역사의 시작이다.
378
그리고는 6세에 긍(亙)한 신대(神代)가 있고, 그 뒤를 계속하여 신무 이상의 인황시대(人皇時代)가 온다. 세기 어렵도록 여러번, 칙령으로 한(漢), 한사(韓史) 보는 것을 엄금하고, 또는 천황이 직접 입안한 일본사를 꾸미는 등, 하도 백성이 믿지 않을 역사라, 이를 믿게 하도록(尊皇心 發興을 위하여) 많은 애를 썼다.
379
이 역사를 가지고 도리어, 한사는 황당무계하고, 더우기 상고사는 결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380
한사는 김부식 「삼국사기」이전에 「해동고기(海東古記)」「단 군기(壇君記)」「신지 비기(神誌秘記)」 등이며, 고구려에는 「유기(留記)」「고기(古記)」 등이 있은 기록이 있고, (문자 보급된 나라이니만치 민간에 야사 패기가 있었을 것은, 있었다는 기록이며 現品[현품]이 없으니 내버리고라도) 백제에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記)」등이 있었다는 것은, 「일본서기」에까지 올랐으며, 신라는 삼국중 가장 늦게까지 서 있었고, 당나라와의 접촉이 빈번했으니 무론 사기가 있었고, 이것들이 「삼국사기」 며 「삼국유사」 찬술된 고려 중엽까지는, 「단군고기(壇君古記)」등과 아울러 잔존했던 것은, ‘유사(遺事)’를 보아도 알 것이며 ‘삼국사’도 김부식 이전의 「구삼국사기(舊三國史記)」가 있었다 하나, 이 나라 민족성이 문헌을 허수로이 하며, 더우기 고려국의 특수입장 때문에, 신「삼국사기」 나온 뒤에는 고기록은 차차 민멸(泯滅)되고, 신「삼국사기」는 유자(儒者)의 찬(撰) 이니만치, 지나 고전에서 기자를 구해내어 단군을 경원하였다. 게다가 연해 겪은병화며 지나인의 휴거(携去) 등으로 옛 문헌은 얻어볼 바이 없고, 그 대신 김부식 「삼국사기」는 전기(前記) 문헌들을 토대로 꾸민 것이라, 특별한 대목(고구려와 신라의 민족적 갈등이며 對[대]지나 반항 등에는 약간의 가필이 있을 것이다)을 제하고는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찬(撰)’이지 창작이 아니기 때문에….
381
그러나,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등은, 1천 수백 년간의 무지한 민간의 전설만을 토대로, 게다가 왜족의 자존심이 가미되고, 천무제의 성벽과 취미와 신앙 등이 가감되고, 또한 패전 모의 40년 전의 낡은 기억까지 작용한 거이니, 어찌 가히 동일(同日)에 논할 수 있으랴.
382
그러므로 왜사야말로, 한(韓), 한(漢) 등과 관계가 생기고 한한기록(韓漢記錄)에도 오른 이전의 분은, 전연 부인하여도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다.
383
일본인은 그 황당무계한 역사로 자국민을 속여 왔다. 그러나, 사람이 차차 개명하고 교통이 넓어지매 외국과도 저절로 교섭이 생기고, 이리하여 휘지 비지(諱之秘之) 하던 문외불출(門外不出)의 일본사도 그냥 감추고 버티지 못 하게 되었다. 여기서, 명치 초(明治初)에, 학자들의 전지낭(全智襄)을 모아서 역사를 해설케 하였다. 황당무계한- 근대인의 상식으로는 절대로 믿지못 할 일본사를, 상식적으로 개작케 한 것이었다.
384
이리하여, 가로되, 이신(二身-伊弉[이장] 諾[낙]과 册[책]의 남녀)이 대팔주를 낳았다는 것은, 즉 정복한 것을 비유함이요, 소잔이 신라에 나무 팔십 주를 가지고 가서 심었다는 것은 식민(殖民)을 비유함이요 등…등…. 한(韓) 이나 한사(漢史)와 부합되지 않는 것은, 한(韓 혹 漢)사(史)의 잘못이요, 자국사는 철두철미 정확한 것이로되, 비유로 표명된 것이 많아서 무지한 대중은 오해하기 쉽다. 운운.
385
무슨 까닭으로, 해석키 힘든 비유로 썼는지는 해설이 없다.
386
좌우간 일본 최고사인 「고사기」는, 일종의 음서(淫書)를 읽는 취미와, 기담(奇譚)을 읽는 취미로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388
일본에, ‘삼종(三種)의 신기(神器)’라 하여, 신비적으로 숭앙하는 물건이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즉 거울과 검과 구슬이다.
389
이것은 천조대신이 손주 경경저(瓊瓊杵)에게 주어, 왜황 대대로, 황위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물로 여기어 오늘까지 이른 것이다.
390
그런데 동방문화의 대표되는 지나에도, 거울은 거금 2,200~2,300년 전 전국시대에 비로소 생겼고, 제작이 조금 완비된 것은 한대(漢代)부터다. 그러나 역시 유리제(製)가 아니요 동이나 철이다.
391
경경(瓊瓊)이 어느 때의 사람(神)인지는 알 수 없지만,(일본 서기로 따지자면 거금 2,700~2,800년 전이다) 일본 신대(神代)에 거울이 일본까지 건너간 것이 있었다 하면, 지극히 열악한 물건일 것이다. 무론 동(銅) 혹은 철경(鐵鏡)이다. 건너도 못갔겠지만….
392
그런 열악품이나마, 이전에는 물에나 비추어 보던 자기의 모양을, 이 기구로 볼 수가 있게 되니, 중지보지(重之寶之)하여 국보로, 존중히 여기었을것이다.
393
또 검은 일본에 야금술이 백제에서 건너간 것은, 백제 건국 수백 년 뒤니까 왜 석기시대에 철검이 있었다 하면 무론 박래품(舶來品)이요, 소잔(素戔- 천조의 아우)이 그 검으로 풀을 잘라서 ‘초치(草薙)’의 칭호가 붙었으니, 낫이나 일반인 물건일 것이나, 석기시대의 철검이라 역시 중지 보지 했을것이다.
394
구슬은 한역(韓域)에 사전시대(史前時代)부터 장식품으로 써오던 것이 왜에 건너갔을 것이다.
395
그러니까 그것의 값으로 따지자면서 푼짜리도 못 될 것이지만, 그러나, 구경도 못하던 귀중품이니, 국보로 자자손손이 전해 내려온 것이다.
396
그러나 그 물건이 생긴 지(일본인의 말로는) 2,700~2,800년을 지난 오늘이니, 그 물건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일본의 공식 기록으로 보자면 수영란(壽永亂) 때에 신검은 바다에 잠겨서 잃고, 이세신궁(伊勢神宮)에서 대신 바친것으로 바꾸었고, 옥새는 그때(수영란)에 바다에 떨어졌다가 다시 저절로 떠오르고 다른 것들은 그냥 경경 이래의 보물이라 한다.
397
그러나, 일본의 황권이 북조(北朝)로 남조(南朝)로, 떠돌기 몇 번이요, 천황이 반적(反賊)에게 쫓겨서 옷도 못 입고 도망다니며, 혹은 정배(定配) 가며, 혹은 전연 무가(武家)에게 밀리어 손님이 왔는데도, 입을 옷이 없어서 모기장 〔蚊帳〕을 두르고 나가 응대하는 따위의 가난한 영락생활(명치 이전은 거진 그랬다)을 1천 년이나 하는 동안에, 그 부후물(腐朽物)들이 그냥 보존 되어 있다고는 상상치 못할 일이다(황권과 삼종신기는 숙명적으로 떠날수 없는 물건으로, 반란이 있으면 반인은 우선 그 신기를 입수하려 한다).
398
소위 천조대신은 여신이다. 거울이며 장도(裝刀) 구슬 등은 항용, 사내가 계집에게 정표로 주는 물건이다. 천조의 동생 소잔은, 신라를 비국(妣國- 母國) 이라 일컬었다. 이 점들을 종합해 생각할 때에 무슨 로맨스가 연상 되지 않을까. 필자가 일본인만한 재간이 있으면 이 점을 좀 연구해 보고 싶다.
399
대체 일본인은 파고 들어가는 데는 영악하여, 예컨대 한 사서에 ‘波[파]’ 자가 든 고유명사가 있으면, ‘파’ ‘패’ ‘핀’ ‘팔’ ‘팡’ ‘바’ ‘배’ ‘백’ ‘뱀’ ‘뱉’ ‘밥’ ‘밤’ ‘발’ 등의 음(音) 유사한 글자를 모두 뒤지어, ‘이것의 와전인가 싶다’‘이것의 오음(誤音)인가 싶다’ 운운으로, 하여간, 신라의 ‘거세간(居世干)’을 일본식으로 ‘居’ 를 ‘이(ヰ)’ 로, ‘世サ’를 ‘사(サ)’로, ‘干’은 모양 비슷한 ‘于’ 로, 다시 ‘우(ウ)’로, 이리하여 ‘居世干’을 ‘이사우(ヰサウ)’라 강견(强牽) 하고, 왜의 신조(神祖) ‘이장(伊弉)’에 갖다대느니만치 융통성 좋고(필자의 학생시대에, 어떤 일본인 조선어학자는, 조선말 ‘싸라기눈’과 일본말 ‘유기<コキ>’의, 그 ‘아기’와 ‘유기<コキ>’가 같은 것으로 보아, 한일 동어원이라는 학설을 발표한 일이 있다) 영악하다.
400
그렇듯, 비슷한 것이거나, 일부만이라도, 비슷한 것이 있으면, 다 갖다 맞추어 본다. 그러니만치 때때로는, 엉뚱한- 다른 사람으로는 상상도 못할 것을 영악스럽게, 바로 맞추는 수도 있다. 대개는 맹랑한 망설에 지나지 못하지만 때때로는 놀랄 만한 적중도 있는 것이다.
401
일본인이 꾸민 한사(韓史)를 뒤지어 보다가, 때때로는 입을 딱 벌리게 놀랄만한 ‘지적’을 발견한다.
402
그런 재간으로써 삼종신기라는 것을 신비의 광훈(光彙) 뒤에 깊이 감추고, 백성들에게는, 무조건으로 믿고 숭앙하기만 강제하여 오던 것이다.
403
그 또 소위 만세일계라는 것도, 인황(人皇) 제1대인 신무부터 지금까지가, 그 할아범의 아들, 또 그 다을 이렇듯 대대로 아비의 아들이거나 할아비의 손주가 계승했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제1대 신무의 후손이면 몇백 대 내려가서, 촌수로 몇 촌간이 되었던 간에, 황휘에 오를 수 있은 것이다. 그러니까, 왕고(往古)에는 탈위(奪位) 사건이 자주 있었다. 신무의 후손이면 누구든 소위 삼종신기만 입수하면 황위에 오를 수 있으니까, 시정에 걸식 하던 어떤 소원한 황손이, 빈한에, 진저리나면 무사 몇을 입수해 가지고, 대궐(황이 거하니 칭왈 대궐이지, 초라한 집이라)로 뛰쳐들어가서 ‘신기’ 를 입수하고 신새(神璽)를 입수하면, 그 시(時)부터 천황이 된다.
404
그러나 명색이 천황이지, 무가정치(武家政治) 이후에는 한낱 허수아비에 지나지 못하였다. 탐내는 사람도 그리 없는 허위였다. 부귀 겸전(兼全) 하여 인간의 가진 호사 다 해보고, 최후로, 하도 심심하니 천황 노릇도 좀 해볼까 한 호사객이 몇 있었을 뿐이다.
405
더우기 남북조가 갈린 뒤에는, 북조의 세상이 되어, 남조의 황윤(皇胤) 들은 망명하여서 숨어 다니고, 그 구복(口腹)조차 보장해 주는 사람이 없다가, 명치가 북조의 황손으로, 황위에 오르자, 자신이 북조의 손이면서도 남조를 정통으로 잡고, 그 새(남조 落魄[락백]기간중) 빈한에 싸이어 사망 한남조 망명황들에게는 천황호를 추상(追上)하고 재세중(在世中) 천황 노릇을 한 북조 전천황(前天皇)들을 모두 ‘상황(上皇)’‘원(院)’등으로 내려 깎았다.
406
이리하여 온 일본이 천황으로 섬기던 북조제 5대는 모두 떨어지고, 그 대신 시정에 낙탁했던, 그리고 유랑중 사망한 남조주(南朝主)가 황호(皇號) 를 추상 받았고, 명치의 전황(前皇)인 효명(孝明)은, 북조를 정통으로, 자신 은제 122세 천황이라 자칭했지만, 명치는 남조를 정통으로 명치도 122세라 한다.
407
그러니까, 소위 만세일계라 하는 것은, 소위 ‘2,600년’전의 한 할아비의 후손이라 하는 것일 뿐, 예수교인이 ‘사람은 다 아담의 자손이라’ 하여, 형님 누님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것으로, 별로이 신기하고 신통할 아무 것도 없다.
408
이 일본의, 남북을 뒤집어, 영락한 ‘남(南)’을 다시 추켜 세우고, 득의의 ‘북(北)’을 내려쳐 놓은 것에는 몇몇 문사의 힘이 꽤 많이 섞였다. 지나에서 남북조가 갈렸던 것을 남조로 정통을 삼은 것도 영향되었거니와, 문인들의 붓이 남조충신 남정성(楠正成)을 사모하는 글과 연극을 꾸미어서, 일본 국민간에는 남조를 사모하는 마음이 창일하여, 국론이 남조를 정(正)으로 사모하게 되었고, 더우기 남조의 근본 사상이 ‘존황도막(尊皇倒幕)’ 인지라, 명치는 부조(父祖)에 역하고 남조를 황실 정통조(正統祖)로 잡은것이다.
410
여기 소위 일본의 남북조에 관해서 몇 자 적어 보자면, 일본 기원 2,000년 전후경에 일본의 황실은 ‘지명원(持明院)계통’과 ‘대각사(大覺寺) 계통’의 두 파로 갈리어서, 황위 계승권에 대해서 오래 다투어 오다가,
411
막부(幕府)에서 ‘서로 교체해서 하면 좋으리라’는 의견을 내어, 양계통이 교체 해서 황위에 오르기로 작정 했는데, 막부에서는, ‘현재의 천황(지명 계통의 花園天皇[화원천황]이다)의 뒤는 후제 호(後醍醐- 대각사계) 로, 또 후제호의 뒤는 방량친왕(邦良親王-역시 대각사계다) 로, 또 그 뒤는 양인친왕(量仁親王-지명계)으로’- 이 순서로 황위에 오르라고 지휘하였다.
412
그 지휘대로, 후제호가 황위에 오르고, 방량이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태자로 책봉된 방량은 불행 얼마 안되어 죽고, ‘대신 세울 태자는 내 의견대로 하자’ 는 ‘후제호’의 주장을 무시하고, 막부는 양인(量仁 -친왕)을 태자로 정했다.
413
여기 불만이 생긴 ‘후제호’는, 홧김에 잠간 남도(南都)로 잠행한 그 틈에, 막부에서는, ‘후제호’를 폐하고(太上皇[태상황]이라 경원했다) ‘양인’을 천황으로 삼고, 고 ‘방량’의 아들을 태자로 정하였다. 이 ‘양인’ 이 ‘광엄천황(光嚴天皇)’이다.
414
잠간 길 떠났다가 폐위당한 ‘후제호’는, ‘신기(검, 새 등)가 그냥 내 손에 있으니 내가 그냥 천황이노라’고 주장하여, 막부에서는, 당황 하여 ‘후제 호’ 를 경도로 천하여, 소위 ‘신기도어지의(神器渡御之儀)’를 하고서, ‘후제호’는 ‘은기(隱岐)’로 보냈다.
415
그런데 ‘후제호’는 여전히 신기는 내 손에 있노라고 자기가 천황임을 주장 하는 이런 시절에, 막부가 그만 넘어지고, 따라서 은기로 쫓겨갔던 ‘후제 호’ 도, 경도(京都)로 돌아와서 대쿠데타를 단행하여 이전 ‘후제 호’가 남도로 잠행하기 전에 원상대로 돌려 놓았다.
416
그런데 ‘족리존씨(足利尊氏)’가 막부를 재건하고 ‘후제호’때문에 황위에서 내려 쫓긴 광엄 전황(光嚴前皇)의 아우 ‘광명(光明)’을 천황으로 모시고, ‘후제호’(도망가서 절간에 숨어 있었다)를 청하여 새 천황 ‘광명’과 화의하도록 하였다.
417
그러나‘후제호’는 빠져 피해서, ‘요시노’에 조정을 세우고, ‘광명’ 조정에 대하였다.
418
이것이 이르는 바 남북조다. ‘요시노’조정을 남조라 한다. 경도(뒤에 가마 꾸라) 조정을 북조라 한다.
419
북조는, 무력의 막부의 지지를 받느니만치, 절대 우세였다. 남정성(楠正成) 부자와 형제의 충성으로도, 북조의 힘은 당할 수가 없어서, 나날이 비운에 빠져 들어가는 가운데서, ‘후제호’도 죽고, ‘후촌상(後村上)이 섰다.
420
그런데, 북조에도 불길한 일이 생겼다. 북조 무력의 주인인 족리존씨 형제간에 세력다툼이 생기고, 심해져서, 형 ‘존씨’는 아우를 치기 위하여 후고(後顧)를 덜고자, 남조에 항복하고, ‘숭광(崇光)’(‘광명’을 계승 해서 위에 올랐던 천황이다)을 폐하고 신기(후제호 때 북조에 넘어왔던)를 남조에 바쳤다.
421
이리하여 임시 한때 북조는 소멸된 듯하였지만, ‘존씨’의 아들이 다시 북조 무력을 대표하여 일어나, ‘숭광’(존씨가 폐했던 북조 전황이다)의 아우 ‘후광 엄(後光嚴)’을 천황으로 세우고, 남북조는 다시 대립하였다.
422
남조에서는 ‘후촌상’의 뒤에 ‘장경(長慶)’‘후구산(後龜山)’이 이어서 서고, 북조에서는, ‘후광엄’의 뒤에, ‘후원융(後圓融)’ ‘후소송(後小松))’ 등이 이어서 섰으나, 무력 배경을 가진 북조가 절대 우세이어서 남조의 존재는 아주 미미하였다.
423
게다가 북조에서는 남조에 대하여 아주 철저한 절멸책(絶滅策)을 쓰기 위하여 남조의 황윤(皇胤)은 차례로 모두 승적(僧籍)에 집어넣었다.
424
이리하여 남조는 후손을 못보며 차차 사망하니, 얼마 뒤에는, 남조에는 경쟁할 만한 남손(男孫)이 없게 되었다. 대대로, 북조만이-아니 인젠 북조가 아니라, 일본 유일의 황통(皇統-본시는 북조 계통)이 황위에 올랐다.
425
효명, 명치, 대정, 소화, 모두 근본은 북통이다.
426
따라서 일본의 황보(皇譜)에는, 본시는 ‘후제 호’ ‘후촌상’ ‘장경’ ‘후구산’ 등 남통제(南統帝)는 빼었었고(소위 ‘院[원]’이라 되어 있었다), 그 대신 ‘광엄’, ‘광명’, ‘숭광’, ‘후광엄’, ‘후원융’ 등 북통인(北統人)이 천황으로 되어 있었다.
427
그런데 명치 때에 명치가 유신을 하고 보니, 세상의 동정과 여론은 모두 남조에 모이고 남조를 사모한다.
428
이에 명치는 자기의 직계 조상인 북조 전(前) 천황을 모두 ‘원(院)’ 이라 ‘상황(上皇)’ 이라 내려치고, 남조의 ‘원’이며 ‘상황’이었던 사람을 다시 천황호(天皇號)를 올려 바치고, ‘일본 황실은 남조를 정통으로, 남조를 계승한다.’ 고 선언한 것이다.
429
이리하여 명치 이후의 일본 황실은, 북조의 적손(嫡孫)으로 남조의 양손(養孫) 이 된 것이다.
431
신정 백석(新井白石) 같은 사람은, 한사(韓史)를 가리켜, 황탄하다고 하지만,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왜사(倭史)야말로 한 고담(古譚)이지 역사가 아니며, 그 연대 등은 도저히 따져볼 재간도 없거니와 소위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건너왔다고 하며, 일본의 사학자들(黑川眞賴[흑천진뢰], 吉田東俉[길전동오] 輩[배])이며 ‘天日槍 歸化時代考[천일창귀화시대고]’등은, 천일창 일본 도래가, 신대(神代) 일본이라 하며, 그런 지라, 천일창의 5대손이 일본 수인천황(垂仁天皇)때에 일본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 연대상으로 맞지 않으므로, (천일창이 신대의 사람이면, 적어도 垂仁朝[수인조] 면 천일창의 20~30대 후손이지 5대손은 아닐 것이다.) 여기 돌려 꾸미어, ‘천일창’은 제1세 제2세하여, 수십 세가 있었으리라는 기설(奇設)을 창출하였다.
432
그런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일본 최고사인 「고사기(古事記)」에는 천일창은 수인천황 때에 귀화했다 하였다. 또 「일본서기」에는 천일창의 4 대손이 수인(垂仁)에게 신사(臣仕)하였다고 한다.
433
들숭날숭, 뒤죽박죽, 왜사의 정체는 이러하다.
434
그런데 한사에는 전연 없는 인물이라 근본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서는 꽤 존숭되어, 천일창을 모신 신사(神社)가 놀랍게 많으며 천일창의 후손이 뻗어서 적지 않은 명족(名族)이 그의 줄기에서 났고, ‘성씨록(姓氏錄)’을 보면, 그의 계통은 단단히 넓게 퍼지었다.
435
「고사기」에 나타난 그의 전설을 보건대,
436
"신라의 아구노마(阿具奴摩)라는 못〔池[지]〕가에 웬 천한 아낙네가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밝은 볕이 음부에 비취고 있었다. 그런데 웬 사내가 그 여인을 가까이 하여, 여인은 임신하였다. 결국 붉은 구슬(알)을 하나 낳았는데, 사내는 구슬을 달래서 허리에 찼다. 그리고 밭에 일하는 사람들을 먹이려고, 소에 음식을 싣고 밭으로 향하였다. 가다가 이곳 주인의 아들인 천일창을 만나서, 천일창이 구슬을 소청하므로 구슬을 천일창에게 주었다. 천일창은 구슬을 상(床)귀에 놓아 두었더니, 구슬은 한 아름다운 새시로 화하여 안해가 되어 온갖 시중을 다 한다. 운운 "
437
소설 작가의 눈에 비친 이 이야기는, 틀이 잡히지 않고 줄거리의 단속(斷續)에 티가 크고, 머리와 꼬리가 붙지 않고, 말하자면 아이들의 시재 꾸며서 하는 옛말인 듯, 서툴고, 초라하고 원시적이기 짝이 없으나, 우리로 하여금 저으기 흥미를 끌게 하는 것이, 이 이야기는 일본적이 아니오 한적(韓的) 이라 하는 점이다.
438
햇볓에 의지한 수태와 사람의 산주(産珠 혹은 産卵[산란])는,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신화가 그 원천이다.
439
알(혹은 구슬)에서 동자(혹은 미녀)가 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440
거기서 생긴 미녀가, 안해가 되어 시중 든다는 것은, ‘거타지(居陁知)’ 며 ‘심청(沈淸)’설화의 건디기를 이룩하는 자로서, 배달 고대민족의 상상이 낳은 아름다운 꿈이다.
441
천일창 전설은 분명 우리 민족이 산출한 줄거리에서 생긴 것이다.
442
아직 미개하여, 설화의 시(始)와 종(終)의 구성형태며 방식을 모르는 왜인이, 자기의 재간으로 꾸며놓은 배달 설화의 이식물(移植物)이다.
443
이로 보아서 천일창은, 한사에는 거기 해당하는 신라 왕자 없으니, 신라 왕자는 아닐지라도 한계(韓系)의 인물임엔 틀림이 없다.
444
천일창 이야기는 이상 한적(韓的) 설화 기초에서 시작되어 진전되다가, 왜적(倭的) 결말을 지었으니, 가로되,
445
"이렇듯 구슬의 색시는 천일창의 안해가 되었는데, 천일창이 차차 교만하게 되어 안해를 꾸짖고 하니, 안해는 ‘나는 너같은 사람과 부부가 될 사람이 아니라’고 남편의 집에서 뛰쳐나와서 배를 훔쳐 타고, ‘나니와’로 도망쳤다.
446
천일창은 안해의 도망한 것을 알고, 쫓아와서 ‘나니와’에서 배를 건너려는데, 나루의 신이 받지 않아 못 건너고, 다시, ‘다지마’로 가서, 거기서 다른 안해를 맞아 많은 자식을 낳고 잘 살았다. 운운 "
447
유치하나마, ‘배달’적 신화 이야기로 출발하고 진전하다가 왜적으로 결말 지은 설화- 역사상이고 문헌상이고, 유례를 찾기 어려운 색채 다른 설화다.
449
일본인은, 지금의 조선인과 고구려와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고구려를 우리에게서 떼어가려 한다. 위정가(爲政家)가 정략 필요상 이런 설을 주장 하자, 학자들은, 그 설을 쫓아서 조선과 고구려를 떼어내려 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족이라고.
450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하자, 백제의 유민은 얼마는 일본에 투화(投化) 하고, 나머지는 고토에 주저앉아 새 치자인 신라의 백성 노릇을 하였다. 백제의 영토는 신라에 편입되었다. 그 뒤, 왕건이 고려국을 세우자, 신라, 백제, 모두 고려의 품에 흡수되었다.
451
그 뒤 나당에게 고구려가 망하자, 고구려의 장수요 귀족인 ‘대조영’이 고구려 국의 유민을 불러 발해국을 세웠다.
452
그런데 고구려 국민을 종족 계통으로 대별하자면,(본시는 같은 壇裔[단예]이지만) 부여족과 읍루(숙신)족으로, 나누인다. 그런데 한서 「삼국지」 동이 열전을 보자면 ‘동이전, 부여’ 조에, ‘食飮皆用俎豆[식음개용조두], 會同拜爵洗爵[회동배작세작] 揖讓[읍양] 升降以殷[승강이은], 正月祭天[정월제천](略) 在國衣尙白[재국의상백], 白布大袂[백포대몌] 袍袴履革鞜[포고리혁탑], 出國則尙繪繡錦罽[출국칙상회수금계], 大人加狐狸抗白黑貂裘[대인가호리항백흑초구], 以金銀飾帽[이금은식모], 云云[운운]’ 이라 하여, 부여는 상당한 문화와, 예의관념과, 사치와 및 그 제도, 율제(律制), 모두 구비되어, ‘大體與中國相彷彿也[대체여중국상방불야]’라 하였다.
453
그러면 동서에 읍루(후일 고구려에 복귀되어 고구려 국민이 된 말갈 종이다)는 어떤 민도(民度)를 가진 종족이라 기록되었는가.
454
‘(略[략])常穴居[상혈거] 大家深九梯[대가심구제], 以多爲好[이다위호], 土氣寒劇於扶餘[토기한극어부여], 其俗好養豬[기속호양저], 食其肉衣其皮[식기육의기피], 多以豬膏塗身厚數分[다이저고도신후수분], 以禦風寒[이어풍한], 夏則裸袒[하칙라단], 以尺布隱其前後[이척포은기전후], 以蔽體形[이폐체형], 其人不潔[기인불결], 作()在中央[작()재중앙], 人圍其表居[인위기표거](略[략]) 唯把婁不法[유파루불법](於飮食[어음식]) 俗最無綱紀也[속최무강기야]. 云云[운운]’
456
일본인은 ‘부여, 읍루 등은 금일의 만주의 조(祖)라’고 하지만 읍루(의 일부)는 만주의 조일것이나 부여는 고구려의 조다(그 더 이전에는, 兩族[양족] 다 同祖[동조]였었던 것이 분리되어 나누이었다). 그 민도(民度)가 양자의 새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457
문화라는 것은 일조일석에 생기는 것이 아니요, 민도 또한 일조일석에 고정 되는 것이 아니라, 이로 미루어, 부여족은 오래 전부터 인족(隣族) 들과 달리, 자기 문화를 건설하여 온 것이 입증되고, 겸하여 일찌기 우수한 지도자를 가졌었다는 것이 입증된다. 같은 ‘배달’예(裔)의 손으로, ‘고려’국이 건립된 것이다.
458
삼국(삼한 아울러) 이전의 배달종족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일본인은 고구려를 떼어서 만주로 가져가려 하나, 민족조(民族祖)와, 민족정신과 민족 신화, 전설은 오늘날의 우리 겨레(신라 후인이나 백제 후인이나 고구려 후인을 막론하고)는 모두 다 분립되었던 삼국시대와 삼한시대를 건너 뛰어서 성조(聖祖) 단군에 갖다 상접시킨다.
459
일본인의 교육정신과 거기 영향된 그릇된 판단 때문에, 일부인은, ‘현재의 조선은 신라의 통이요, 고구려의 통은 만주라’는 생각을 품고 있으나, 말갈 등으로 여진으로, 여진은 다시 만주로 이렇듯 만주는 읍루 전후 때부터 부여와 갈려나간 딴 통이요, 신라는 부여통의 한줄기다. 본시는 역시 단군 예지만.
461
‘진한(辰韓)은 진한(秦韓)이요, 진(秦)나라의 망명인들로 조직된 나라요, 신라는 진한 땅에서 생겼으니 신라는 진통이라.’는 설을 주장하여, 근본이 동이가 아니요 화국 진의 후라 자랑한다. 그러나이것은 유교중심의 망족(忘族)사상의 산물이지, 일고할 배도 못되니 설사 진의 망인들에게 땅을 빌려주어서 나라를 세웠다 할지라도 ‘배달’ 종족이 포열 거주(布列居住) 하는 지역에 망명 진인이 나라를 세웠다 하면, 그 국민은 ‘배달인’일 것이요, 차차 연하여 남하 번식하는 ‘배달인’에게 흡수되고 말 것이다.
462
더우기 진한 땅에 배달 예로 건국된 신라라, 진인과의 관련성은 아주 박약할 것이다. 진인과의 잡종은 어떤 정도까지 있을는지 모르지만….
463
좌우간, 그 언어로 보아 ‘徐羅伐[서라벌]’, ‘斯盧[사노]’, ‘新羅[신라]’라는 신라어와 ‘所夫里[소부리]’, ‘沙泚[사차]’라는 백제말이, 오늘의 ‘서울’의 원어며, 나라의 수도를 가리키는 말이, 신라와 백제가 같은 점으로 보아서 ‘진의 계통’이라는 신라와 ‘부여의 계통’인 백제가 결코 남이 아니다.
464
오늘날의 우리는, 고려 시조 왕건의 덕으로, 삼국시대에 세 조각으로 나누이었던 식구가 다시 한 곳에 모이었다. 그 영토는 태반(고구려 때의 고구려 영토) 이나 북쪽에 흘리고, 인구도 적지 않게, 영토와 함께 북에 떨어뜨리고. 문화유산까지도 고구려의 것은, 고구려 파멸되고 유랑(고구려)하는 동안에 자취없이 없어졌으나, 그 옛날 지나족을 압도하며 동방에 군림하던 우수한 종족(삼국)이 함께 탐탁하게 모였으니, 옛날의 고구려의 위대하던 힘, 백제의 섬세하던 기술, 신라의 우미하던 기능, 모두 합하여 발휘하여 그 총 합한 힘으로서 배달 예의 자랑을 떨쳐 보야 할 것이다.
465
(1947, 相互出版社[상호출판사]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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