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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 한 묶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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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9
홍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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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한 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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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그리고는 그리움이다. ‘나’와 이별…… 나는 청년이다. 아직도 앞길이 구만리같이 창창한 나로서, 무슨 그렇게 지독한 이별을 당하고서야.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이냐…… 만은 그래도 끝없는 그리움은 때없이 나를 덮어누르고 있다. 팔자 사나운 그 그리움이, 나와 무슨 업원(業寃)이 있었음인지 무슨 인연이 깊었음인지, 원수이냐, 사랑이냐 그것은 도무지 몰라도,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알아준다 하는 이도 그리움 그이요, 내가 노상 사귀어 잘 안다 하는 이도 그리움 그이다.
 
3
나는, 모든 그리움 그 속에서 이만큼 자라났다. 그리고 또 그 그리움 속에서 이만치 파리도 하여졌다. 자다가 잠꼬대도 그리움 까닭이요, 앓다가 헛소리도 그리움 타령이다. 그리움! 그리움! 그는 얼마나 억세이기에 나를 이렇게도 울리어 놓는고. 내가 울도록 보고 들은 것도 그리움 그것이요, 겪고 느낀 것도 그리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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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스물네 살…… 그렇다. 내 나이를 이르자면은, 분명히 스물네 살일 것이다. 그러나 그 나이는 내가 먹지는 아니하였다. 먹은 죄인은 따로이 있다. 이름 좋은 한울타리로, 스물네 살이라는 그곳에, 나의 이름을 잠깐 빌리어 주었을 뿐이다. 그 나이는 그리움이라는 그이가, 정말로 먹고 있는 것이다. 내 아람치의 내 나이도, 그리움이라는 그이가, 다 ─ 가로채어 맡아 가 버리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의 항용 떠드는 “나는 나이를 먹었다. 내 나이는 늙었다.”하는 그 나이들도, 아마나 그리움이라는 그이에게, 모두 횡령을 당하고도, 공연히 지껄이는 헛소리나 아닐지.
 
5
그리움! 그리움! 나는 여러 번이나 여러 사람의 입으로 부르는, 그리움의 애끊이는 노래를 들었다. 저 지나간 세상에서, 그리움으로 속태우던 이가 누구 누구이냐. 지긋지긋할손 오랑캐의 난리가 5~6년이라, 낙양성(洛陽城)을 뒤로 두고 나그네의 걸음은 그럭저럭 사천리 밖에서 “사가보월청소립(思家步月淸宵立)이요 억제간운백일면(憶弟看雲白日眠)이라” 그러나 어찌 그것뿐이랴. 낙수(洛水) 따리의 낯익은 사람은 다시 두 번 볼 수가 없구나. 외로이 후줄근하여 강포(江浦)로 돌아가면서 “마상(馬上)에 봉한식(逢寒食)하니 도중(途中)에 속모춘(屬暮春)이라.” 뒤숭숭한 꿈자리만 공연히 구름 밖에 번거러울 제 “마상상봉무지필(馬上相逢無紙筆)하니 빙군전어보평안(憑君傳語報平安)이라.” 객사(客舍) 뜰의 봄 만난 버들잎은 얼마나 그리운 근심을 새로이 돋았던고. “권군갱진일배주(勸君更進一杯酒)는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이라.” 추야장(秋夜長) 으스름 달빛에 다듬이 장단도 님이 아니 계시니 시들프고나. “학관(鶴關)에 음신단(音信斷)이요 용문(龍門)에 도로장(道路長)이라 군재천일방(君在天一方)하니 한의도자향(寒衣徒自香)이라.” 수자리 사는 이의 두고 간 지어미, 날구장천 애마르는 한탄 “타기황앵아(打起黃鶯兒)하야 막교지상제(莫敎枝上啼)하라 제시(啼時)에 경접몽(驚妾夢)이면 부득도천서(不得到遷西)를.”
 
6
무엇 무엇할 것 없이, 하고 많은 시인들은 수없이 그리움을 읊조리었다. 아지 못할게라, 어떻게 생긴 시인이 차마 정말로 그리움을 읊조리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이랴. 촌항(村巷)의 어리석은 지어미까지 “몹쓸 놈의 님이로구나. 애속한 님이 가신 이후로 약수삼천리(弱水三千里) 사이에 소식이 돈절(頓絶)이로구나.”하는 그 소리도 그리움이 아니면, 그렇게도 뼈가 녹게 슬플 까닭은 없다. 황릉묘리(黃陵廟裏)에 자고(鷓古)새 울고 오강풍림(吳江楓林)에 대동강물이 푸르든 말든 그리움이 아니면 그리도 애끊이게 울 일이 무엇이 있나. 점잖다 하는 시조나, 날탕패의 잡소리나, 교남(嶠南)의 육자백이나 관서(關西)의 수심가(愁心歌)나 천안삼거리나, 노들강변이나, 모두 다 그리움의 타령이다. 춘향이타령도 그리움의 타령이요, 심청이의 노래도 그리움의 노래다. 그뿐이랴 ‘혼자 우는 어두운밤’ 이란 그것도 그리 특별히 맡아둔 임자가 없나니 혹은 집에서, 혹은 거리에서, 혹은 쇠창살 안에서, 혹은 회색 세계 외로운 달빛 아래서, 그리움이 있어서 슬픈노래를 부른다. 그러니 어찌 하랴. 나도 그리웁다. 모든 것이 그리워 못견디겠다.
 
 
7
동생이 그리웁다. 정신병이 들었다 하는 사촌동생이 보고 싶다. 어제 저녁의 불던 바람 풍랑도 많았거니, 어두운 밤 거친 물결에, 부서진 배 조각은 어디로 어디로 떠돌아 갔느냐, 뒤숭숭한 꿈마다 소스라쳐 깨울 때에, 문득문득 깨우쳐 지나니, 병들은 동생의 소식이 알 수 없음이로구나. 그는 얼마나 몹시 앓기에, 나의 꿈자리를 그렇게도 어지러이 굴었는고. 요사이는 병세가 어찌나 되었는지, 또한 시방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약을 마시고 있느냐, 신음을 하고 있느냐, 누워서 있느냐, 잠이 들어 있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여전히 그렇게 떠들고 있느냐, 무슨 생각에 잠겨서 앉았느냐. 어웅한 얼굴이 내 눈에 서 ― ㄴ하다. 노상 중얼거리던 그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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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답답한 일이나마, 지나간 옛날 꿈타령을 다시 좇아서 한번 되풀이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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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때에, 가장 귀애하시던 손자는, 시방 병들어 있는 그 사촌과 나와 둘뿐이었었더니라. 사촌은 형도 없고 아우도 없이 아버지의 얼굴은 한 번 보지도 못한 다만 외아들 유복(遺腹)이었고, 나는 백부에게도 출계(出繼)한 생양가(生養家)에 무매독자(無妹獨子) 귀한 아들이라, 금싸라기같이 귀하다 하여 집안이 모두 얼싸어 줄 때에,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받기는 할머니의 사랑이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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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께서 우리들의 이름을 지어주실 때에, 사촌은 음전하다 무사의 자격이있다 하여 독행천리(獨行千里)하는 ‘갑기(甲騎)’라는 이름을 지어 부르셨고, 나는 안존하다 날렵한 재주가 있다 하여 장차 용문(龍門)에 올라 입신양명할 자격이니까 주역의 첫꼭대기를 그대로 갔다가 써서 ‘원룡(元龍)’이라고 지어 부르셨다. 아무렇든 시대를 어둡게 모르는 칠십 노부인의 일이었지마는, 그 때의 할머니의 생각에는 꼭 믿고 기다리셨을터이다. 갑기는 무과를 하여 만군을 호령할 대장이 되고 원룡이는 문과를 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정승이 될 터이라고……. 그래 그 때에 그 둘은, 새벽 아침의 맑은 정신을 서로 시새워가며 글을 읽을 때에, 갑기는 장차 장수가 꼭 될 작정이니까 육도(六鞱)와 삼략(三略)을 부지런히 외웠고, 원룡이는 정승이 될 양으로 서전(書傳)과 춘추를 몇 번인지 독파하였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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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 하마터면 될 뻔하던 대장과 정승은 정도 깊고 의초도 좋은 종형제였었다. 그러나 그 둘의 성격은 아주 정반대로 말도 할 수 없을만치 달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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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가 어느 때이냐. 아마 내 나이가 일곱여덟 살 적인가 보다. 동생과 뒷동산에 올라가서 숫가마 장난을 하여 보았었다. 동생은 원래 성미가 활발스러워서 잠시도 땅에 붙어 있기를 싫어하는 터이라 숫감을 떡 끌어다니는 걸 맡아서 떡갈나무 우거진 곳으로 뛰어다니고, 나는 앉아서 꼼꼼스러웁게 돌을 주어 모아싸서 숫가마를 짓게 되었었다. 그 때에 안산 골짜기에서 뻐국새가 하도 구슬피 울기에 나는 하던 장난도 시름없이 멈추우고 우두머 ―ㄴ이 서서 “그 소리야. 몹시도 처량하다”하니까, 동생은 뛰어와 가는 팔뚝을 걷어 뽐내이면서 “형아야 ― (그는 나를 형아라고 불렀다) 내 저 것을 잡아올까.”하고 흰 소리 삼아 좋아 뛰놀았었다. 건넌산 모롱이 비탈길로 구름장을 펄럭거리며 처량히 돌아가는 상두꾼의 노랫 소리를 듣고 내가 앉아 울 때에 동생은 “총때 메고 바랑지고 고개 고개 넘어갈 때 부모형제 생각 말아” 하는 그 노래를 소리 질러 불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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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강변 흰 모래밭에서, 뜨거운 뙤약볕에 알장둥이를 다 ― 데어가면서 두 벌거숭이가 모래를 긁어모아 모래성을 서로 시새워 쌓을 제 세력을 서로 연장하느라고 가끔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다. 그러할 적에마다 동생은 대장의 지위로 나는 정승의 태도로 각각 자기의 성을 위하여 다툰다. 하다가 대장은 제 분에 못 이기어서 “에라 형아 맘대로 하려므나.” 한 마디 해부치고 모래성을 내버려두고 성 밖 너른 벌판에서 혼자 말달리기나 한다고 달음박질로 뛰어나가는 일도 있었고 어떤 때는 대장이 뻗서고 우기다 못하여 슬며시 웃으며 “참, 행아 하고는 말할 수가 없어.”하며 모래성을 전부 기울여 정승의 성으로 귀화하는 일도 있었다. 수수때 말을 타고 아주까리 때 총을 메고 앞개울 뒷개울을 진(陳)터로 잡아 동네의 동자군(童子軍)들이 전쟁놀이들 할 때에도 노상 의례히 선봉대장으로 자원 출마하는 이는 내 동생 대장이었고 운주 결승하는 참모의 직책을 맡은 이는 대장의 형 정승 나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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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상 일은 매양 같지 아니하니 어찌할 수 있으랴. 나이 많으신 할머니께서는 몇 해 전에 저 세상으로 돌아가셨다. 귀엽고 잘 될 손자 우리를 두고서 어떻게 차마 돌아가셨는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자마자 좇아서 그 깊이 믿던 사촌의 대장 지위도 어디론지 스러지고 무지개빨처럼 사라져 없어졌고 나도 벌써 정승은 아니다. 그것이 도무지 꿈이었던지. 아마 이 세상에서 일컫는 수수께끼라는 그것이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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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산소 모시는 날에 하염없는 궂은 비는 눈물겨웁게도 내리는데 사촌은 그지없이 섧게 울더라. 그 때부터 그의 마음은 참으로 아팠던 것이다. 뿌리 깊은 모진 병이 남모르게 들었던 것이다. 그 뒤의 사촌은 어쩐 일인지, 무언(無言)이가 되었었다. 얼빠진 사람같이 되어버렸다. 아 ― 그것이 병이었더냐. 무언이란 그것이 병이었더냐. 우울! 우울! 그는 우울이란 그곳에서 남도 모르게 그만 병이 깊이 들었음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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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前日)에는 그렇게도 억세이던 대장아, 어찌한 일이냐 네가 병이라 하니……. 약을 주려 하나 약이 없고 위안을 주려 하였으나 도무지 효험이 없구나. 인력으론 못할 이 일이니 어찌하면 좋으냐. 생각해 보아라. 구름 너머 별 저쪽 달빛 건너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우리를 그리워 애쓰시는 할머니께서 얼마나 많이 근심을 하고 계실까를……. 얼른 하루 바삐 그 병이 나아졌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병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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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다. 아무 말도 없이 다만 명상에만 깊었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모든 사람의 무슨 비밀을 알려고 함이었던지! 그래 알아서는 아니 될 그 무슨 비밀을 억지로 알려고 한 까닭에 그 죄로 그는 벌을 받게 되었다. 사색의 쇠사슬은 그의 사지를 결박하고 명상의 큰 칼은 그의 목을 눌렀다. 그래서 죽음과 같이 미치는 독약은 그의 신경을 흥분시키었다, 착란시키었다. 그러니 대장…… 그것은 얼토당토 아니한 헛꿈이었다. 그러니 자기가 가질 분수보다도 범위보다도 더 크고 더 억세인 헛꿈을 가지고 있던 것이 불행이었던가, 자기가 소유하지 못할 것을 몽상하였던 그것이 재화(災禍)였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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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장(墓場)에서 지껄이는 귀추(鬼啾)가 듣기 싫어서 귀를 막고, 거리에서 어른거리는 홍진이 보기 싫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못 경경(耿耿)한 일념은 어떻게 하면 인생에게 인생을 구원할 만한 사상을 찾아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것을 전달할만한 말과 글을 찾아낼 수가 있을까. 그는 자기의 마음에 물어보았다. “너는 어떻게 하려느냐. 사람이 생긴 뒤에 몇 만 년 동안에 인생이란 그 것이 안심과 위자(慰藉)를 맛보았던 일이 있느냐.” 사실 인생은 항상 안심과 위자를 요구한다, 희망한다. 안심과 위자를 맛보는 그 동안이 행복이라는 까닭에……. 그러나 이때껏 그것을 한 마디라도 일러 맛보여준 이는 한 사람도 없다. 다만 그것을 만든 이는 ‘신’이라고 핑계해버렸을 뿐이었다. 그러니 ‘신’이란 그 것은 과연 무엇이냐, ‘신’은 어느 곳에 있으며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는 ‘신’을 비인(非認)하였다. 인생이 불행한데에도 ‘신’은 모른체하고 구원하지를 아니한다. 구원할만한 능력이 ‘신’에게 없는 그만큼, ‘신’의 허무함을 깨달았다. 그래 ‘신’의 존재를 비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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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느냐, 시방은 어떻게 살고 있느냐. 한길로 지나가는 여러 무리의 사람을 좀 보라. 여러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모양으로 여러 가지의 얼굴로 여러 가지의 눈초리로, 서로 노리며 서로 흘기어 보지 않는가. 해저문 언덕 밑 옹달우물에 음충스러이 비추인 고목나무 그림자를 보고서 낼 모레에 시집갈 시악시는 마음을 졸이어 절을 하고 있다. 손으로 빌며 축원을 한다. 산모롱이 서낭나무 가지에는 수도 모를 시악시의 붉은 단기가 걸리어 있다. 머리 위에는 한낱 큰별이 반짝이고 발 아래에는 커다란 대지가 돌고 있으며 지평선은 자기가 발 디딘 곳으로부터 어디론지 영원하게 사라져 버리었는데, 번쩍이는 광명과 침침한 암영은 자기의 섰는 주위에다 무한한 권계(圈界)를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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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년 전에 자기의 아버지는 열병으로 참혹히 돌아가셨으니, 으스름달 아래에서 느끼어 우시는 이팔청상(二八靑孀) 어머니의 구슬픈 눈물을 자기의 어린 뺨은 얼마나 많이 받아왔던고, 자기는 유복자다. 그리고 대장이었었다. 그러나 대장이라고 부르시던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자기는 벌써 대장이 아니다. 사람마다 살아 있다 하는 그 동안은 아마 저의 손으로 저의 무덤을 파고있는 것 같다. 저승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해마다 해마다 한 개 두 개의 낡아가는 해골을 시름없이 시세이고 있을 뿐인 것 같다. 그러니 그것이 도무지 어찌 한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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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운명, 사랑, 행복, 그것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이 세상에는 도무지 행복이라는 것이 길이 있지 않은 것 같다. 더구나 행복과 사랑을 가져다 준다 하는 그 신통한 ‘신’은 없다. 과거 몇 만 년 동안에도 없었고 현재에 사는 이 사이에도 없다. 그러니 장차 오는 미래에도 물론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으냐. 그것을 문제 삼아서라도 온통 해결해 놓고 간 사람은 이 세상에는 없다. 야소(耶蘇)는 기도하다가 하느님에게 미루어버리고 십자가로 붙들려 가버리고 석가는 염불만 하다가 부처님에게 맡기고 해탈해 버리었고 공자는 오직 하늘이라 고만 떠들다가 “오호노의(嗚呼老矣)라 오몽부복견주공(吾夢不復見周公)”이라고 한 마디 해버리고 자빠져 버리었다. 그러니 누가 그것을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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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스로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는 자기가 꼭 맡아 해결할 차례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23
그래 그는 일종의 죽음보다도 더 아찔한 그 정서를 넘어서, 사람마다 떠드는 그 평화라는 그 곳을 벗어나, 인생이라는 그것까지 내어버리고, 인간성을 떠나서 그 밖에 다른 곳으로 외따로 서서, 충실한 자기의 진리를 찾아보려 하였다. 그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눈을 뜰 때에 불빛같이 충혈 되어 붉은 눈방울이 번쩍거리며, 입으로 “해결이다” 한 마디를 소리쳐 질렀다. 어떻게 해결을 하였는지 그것은 몰라도, 어떻게 무조건으로 해결은 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보고 미쳤나 하는 것이 그에게는 해결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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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느 날 웃는 낯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언니 ― 나는 모든 것을 해결하였소. 나는 이제 참 장한 사람이지오? 나는 첫때에 언니부터 해결하였소. 전일에는 언니가 퍽 무서워 보입디다. 그래서 언니의 앞에서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었오. 제법 얼굴을 들지 못하였었오. 그러나 시방은 이렇게 씩씩하게 자유스러웁게 말도 잘 하고 행동도 잘 하오. 이것은 내가 언니라는 그 사람을 자 ― ㄹ 해결한 까닭이오. 참 훌륭한 일이지요? 아마 언니도 감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리다. 여보시오 내 말을 좀 자세히 들어보아요. 얼마나 진리 있는 말인가……. 나는 어두운 굴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가다가 별안간 무엇엔지 이마빡이를 딱 하고 부딪히었오. 너무도 몹시 소스라쳐 놀라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서 자세히 보았소. 보니까 그것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입디다. 나는 그 때부터 아무 무서움도 없이 안심하고 있었오. 그것은 무서웁던 그것이 허수아비인 줄 해결한 까닭이오. 전일(前日)에는 까닭없이 언니가 퍽 무서운 이인 줄만 알았었오. 그러나 언니를 해결해보고 나니까 언니도 역시 보통 사람과 같은 그냥의 사람입디다. 그래 인제는 죽음도 무섭지 아니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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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날이 시퍼런 식칼을 들고 나에게 와서 “나는 언니를 죽이러 왔오.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볼 때에 나에게 가장 친한 사람일수록 가장 악하고 가장 간사해 보입디다. 시방 언니도 물론 나의 가장 사랑하는 언니요, 가장 믿고 가장 친한 언니요, 언니는 아마 착한 사람이지요. 그러나 착한 그것을 내가 많이 볼 수록 악한 그것도 많이 보고, 그래 나는 악한 그것을 이 칼로 선뜻 버혀버리려 왔소. 아마 악한 그것을 죽이는 날이면 착한 그것도 사라져버릴 터이지. 그러나 언니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언니이니까 내가 그 악한 것을 차마 두고 견디어 볼 수는 없소. 자 ― 그 악을 버려버립시다. 악을 죽이어 없앴시다.” 하며 울며 덤빈 일도 있었다.
 
26
어떻든 그는 성했을 때보담 힘도 세고 말도 잘하고 성격과 행동이 성하게타는 불길과 같이 불굴적, 용진적(勇進的), 개방적,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보통 사람보담은 아주 헤아릴 수 없는 달관이 있는 듯하다. 만일 그것이 병이 아니고 참말로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아주 좋겠다. 그러나 그것은 병이라 한다. 그의 병이 요사이는 좀 어떠한지? 일전(日前)에 전하는 소식을 들으니 삼방약수(三防藥水)에서 병을 고치려고 왼종일 그 약물을 정성껏 떠마시고 있더라고 한다. 병을 고치려고 애를 쓴다는 그 소식을 들으니 더구나 불쌍하구나.
 
27
벌써 부엌 창살에 귀뚜라미는 새 정신이 나서 밤을 새워 우는 때가 되었다. 선뜩선뜩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뜰 앞에 색(色)비름은 나날이 붉은 빛이 새로와지니, 동생아 ― 너의 정신과 너의 몸도 얼른 하루 바삐 성하여지거라. 아무렇거나 내가 한 번 가마, 한 번 가서 보마.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 그리운 너를 한 번 찾아가 보마.
 
 
28
서울은 왜 이러하냐. 왜 이리도 답답하고 괴로웁고 쓸쓸하고 더러웁고 망칙스러워냐.
 
29
북악산은 뒤꼭지를 누르고, 목멱산(木覓山)은 턱을 치받히고, 인왕산(仁王山) 낙타산(駱駝山)은 좌우 옆에서 주장질을 한다. 이 가운데에서 그리도 번화하다 떠들던 소위 만호 장안은 시방에야 누가 보기에 생명이 없는 검은 체붕이 힘없이 조으는 듯하다. 하지 않을 이가 있으랴. 이름만 그저 좋아서 살기 좋은 한양산천인지, 광천(廣川) 청계산(淸溪山)에는 더러운 구정물이 검게검게 썩는다. 지린내 구린내, 모기 빈대, 아아 서울이 다 ― 망한다 하더라도 서울의 빈대는 다 없어지지 아니 하려는지. 병에는 전염병, 나날이 새로운 병명만 늘어가는 곳은 서울이니, 수구문(水口門)은 저절로 제멋대로 변하여 호거문(戶去門)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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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서울은 무서웁다. 서울은 지겨웁다. 나의 길이길이 살 영주(永住)의 낙토는 어느 곳에 있느냐. 나의 그리운 그 고향은 어느 쪽으로부터 서 있느냐.
 
31
서울성 중에는 어느 동네 누구의 집에인지는 몰라도 가장 지악(至惡)한 독약을 감추어 두었는 것이다. 그래 그 약의 독기(毒氣)는 안개같이 몽롱하게 품기여 골목골목 집집마다 한 군데도 빼어놓지 않고 샅샅히 찾아다닌다. 그리하여서 그 독기에 걸리는 사람이면은 아무든지 모조리 고치지 못할 깊은 병이 든다. 순박한 농민도 서울에 오면은 날탕패가 되어 버리고 순결한 처녀도 서울에 오며는 유량녀가 되어 버리고, 팔팔하게 날뛰던 청년도 서울에 오면은 불탄 강아지가 되어버린다. 뻗서던 이는 쓰러져 버리고 부지런하던 이는 게을러 버리고 정성이 있던 이는 맥이 풀리어 버리고 웃음을 웃던 이는 눈물을 짓게 되고 단단한 결심을 가지고 온 이는 봄눈 스러지듯이 슬며시 풀리어 버리게 되는 곳이 곧 지긋긋한 서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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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폐도(廢道). 나이 많아 녹슬은 쇠북이 다시 한 번 크게 울 듯하다고 뒤떠들던 거년(去年) 12월 24일 오후였었다. 장발 단발 할 것 없이 붓대 잡는 이들은 대강 한참 바빴으니, 집회장소는 불교청년회, 회비는 50전, 이름은 문인회, 참 좋은 이름이었었다. 쓸쓸한 문단에 격의 없는 모임, 참 누가 좋아하지 아니할 이가 있었을 것이랴. 정말이지 나도 한참은 아주 좋았다. 아주 좋아서 뛰놀 뻔하였다. 하나…… 시방은 낙심천만, 문인회가 창기(創起)한 지 우금반재(于今半載)에 그의 소식은 도무지 함흥차사(咸興差使)로구나.
 
33
나는 서울에 와서도 그렇게 쉽게 마음을 변치 않는 조선 사람의 일꾼이 그리웁다. 누가 나아가다가 퇴보하지 않으며, 누가 억세이다가 제멋에 풀이 죽어버리지 않는가. 나의 사랑하는 친구의 한 사람도 일을 하겠다고 서울에 오더니만. 한 달이 못되어서 아니 보름이 못되어서. 저절로 서울이란 곳에 자연 도태가 되어 부질없이 불우(不遇)의 탄(歎)만 부르짖으며 비 맞은 용(龍)대 기(旗)같이 흘부들레해 돌아다닌다. 어떻게 하면 서울이라는 이곳에서 그 몹쓸 독약에 휘골아 쓰러지지 아니하겠느냐.
 
34
그리고 조선의 천재가 그리웁다. 시방의 조선은 얼마나 천재에 주리었느냐. 나타난 천재, 숨은 천재, 늙은 천재, 젊은 천재, 모두 그리웁다. 천재는 어떻게 생기었으며 어느 곳에 있으며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엎드려 나오지를 아니하느냐. 엇그제 들으니, 조선에는 삼천재(三天才)가 있어 한참 이름을 드날린다 한다니 시방은 어디로 갔느냐. 어디로 도망을 해 가 버리었느냐. 죽었느냐. 살았느냐. 잠을 자느냐, 꿈을 꾸느냐. 모처럼 부리던 재주에 지진두가 되어서 넘어져 버리었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그마저 서울의 떠도는 독기에 걸리어 어즐뜨리어 쓰러졌느냐. 어찌해 천재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느냐. 천재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느냐. 천재야 천재야 얼마나 내가 그리워하는 천재이냐. 조선이 그리워하는 천재이냐. 얼른 하루 바삐 너의 힘껏 지르는 우렁찬 소리를 내 귀에다 들리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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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도 없고 천재도 볼 수 없는 이 나라에서, 무슨 새삼스러웁게 알뜰하게 예술이란 그것을 바랄 수가 있으랴마는, 나는 다시금 조선의 예술이 그리웁다. 우리 조상들의 내리어준 그 예술이 그리워 못 견디겠다. 예술로 불린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찬란하였으며, 우리의 가승(家乘)은 얼마나 혁혁하였느냐. 시방은 물론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모두 없어져버리었다. 모두 어느 시절에 어느 곳에든지 사라져 버리었다. 그러나 우리가 있지 아니하냐. 우리가 살아있지 아니하냐.
 
36
조상에게서 예술적 천성을 “유전해 받은 특별한 우리의 조선 사람이 살아있지 아니하냐. 신공(神功)을 다하여 아로새긴 원각사(圓覺社)의 돌중방이 시방은 광천교 다리 밑에 고임돌이 되어 있다. 우리가 광화문 앞에 큰 돌을 깎아 세운 해태를 볼 때에 얼마나 여린 가슴은 울렁거리어지느냐. 그러나 그것도 장차오는 어느 때에 어떤 다리를 건설할 때에 보태임돌로 들어가버릴른지. 우리는 모든 일을 보고 있다. 모든 애처로운 일을 견디어 보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에 해마다 해마다 모든 쇠퇴와 폐괴(廢壞)를 모질게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앉아서 차마 견디어 보고만 있을 것이냐. 옛 것이 헐었거든 새 것을 세우자. 헐어지는 옛 것은 무너지는 대로 내어버리고 그보담 더 나은 더 거룩한 새 것을 이룩하자. 이루어보자. 헐고 못쓸 것은 부셔뜨리어 광천교 다리 밑돌은 말고 뒷간의 주춧돌을 만들지라도 훌륭한 새 것만 세워 놓았으면 무슨 아까움이 있으랴. 나는 새 것을 이룩할 조선의 새로운 예술가가 그리웁다. 예술이 그리웁다.
 
37
비파(琵琶)의 가장 가는 줄을 오곡(五曲)의 간장이 끊어져라 하고 안타깝게 울리는 듯한 조선 사람의 정조는 얼마나 많이 울었는고. 유사 오천년 이래의 길고 긴 가는 줄은 끝없이 끊어질 듯 말 듯 하게 떨리어왔구나. 울어왔구나. 우리의 성정은 가장 가늘고 부드러웁고 구슬픔만 가졌건마는 남들은 우리를 보고서 무무하고 뚝뚝하고 천치라고 한다. 우리가 참말로 그러함이냐. 우리의 가슴에서는 성한 불길이 무서웁게 붙어 오르건마는 남들은 우리를 보고서 뱃심 좋고 게으르다 한다. 우리가 참말로 그러함이냐. 나의 눈에는 순박하고 결백한 하얀 옷이 보인다. 가는 선이 곱게 얼킨 고려자기가 생각난다. 가는 멜로디가 보드라웁게 떨리는 김매는 소리가 들린다.
 
38
아 ─ 청솔밭 밑 황토밭가 실버드나무 우거진 속의 한 채의 초가 우리 집이 그리웁다. 보리 마당질 터에서 돌이깨를 엇메이는 농군의 얼굴이 그리웁다. 물동이를 이고가는 숫시악시의 사랑이 그리웁다. 나는 모든 것이 그리워 못 견디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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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그리움! 나는 얼마나 수 모를 그리움에서 울어왔는고.
【원문】그리움의 한 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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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사용(洪思容) [저자]
 
  백조(白潮) [출처]
 
  1923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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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0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