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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
채만식
1
그 뒤로
 
 
2
이 1편은 「어느 일요일날의 삽화(揷話)」의 속편으로 볼 수 있는 것인바 그 「어느 일요일날의 삽화」는 어떠한 사정으로 발표를 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하여 둔다. (작자)
 
 
3
오월달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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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한 P는 같이 모여 점심을 먹던 동지들을 작별하고 M과 같이 종로 네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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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세 번째나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P에게는 처음 때와 달라 별로 이 ‘출옥한 때의 특이한 감상’같은 것은 첨예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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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번 이 사 년─칠 년이었으나 삼 년은 감형이 되었다 ─사 년이라는 비교적 긴 동안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변천된 경성의 면모가 현저하게 그의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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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 입힌 여러 층 벽돌집, 디파트먼트, 빌딩, 일류미네이션, 쇼윈도, 그리고 여객 수송 비행기, 버스, 허리가 늘씬한 게 호마같이 날쌔어 보이는 뽀키전차, 수가 버쩍 늘고 최하가 시보레로 된 자동차, 꽤 자주 들리는 각가지의 사이렌……의 모든 것이 제법 규모가 큰 도회미(美)와 분잡한 기계미를 띠려는 기색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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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는 마치 시골 사람처럼 두리번두리번하면서 발길은 저절로 동편으로 행하였다.
 
9
M은 P가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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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 년 동안 딴 세상에 가 살고 오더니 아주 시골 사람이 되었네 그려?”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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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도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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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그런 게 아닐세. 자네는 그 공기 속에서 살었으니까 분명허게 의식을 못했는지 모르겠네만 내가 보기에는 서울도 인제는 꽤 모던화를 해가는 게 선뜻 눈에 띄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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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적 모던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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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 기형적이야…… 그렇지만 기형적은 기형적이면서 그것이 조선으로서는 필연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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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발성치매(早發性癡呆)의 세 살 먹은 어린것이 성적 기능(性的機能)을 가지는 것이 필연은 필연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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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허, 너무 지독헌걸…… 그것보다는 바다에 바람이 불어 큰 물결이 일어나면 해변 얕은 데도 따러 물결이 일어난다구 허는 것이 필연인 것처럼……이라는 게 점잖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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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오는 사이에 탑골공원 앞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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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니 들어가 보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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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 보지……. 지금두 천냥만냥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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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구 없겠나…… 그렇지만 자네 너무 피곤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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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 피곤헌 게 아니라 일을 안 허니까 권태가 생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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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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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지고 난 나뭇가지에는 열푸른 새 잎들이 나풋나풋 솟아나고 철이른 백양은 벌써 녹음이 우거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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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봄내 음산한 옷을 입은 죄수같이 꼴사납게 서 있던 상록수들도 조금은 밝은 빛이 떠돌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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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석 저 구석 앉을 만한 곳으로 벤치에, 잔디 위에는 금시 돈더미가 쏟아져나오는 것같이 소곤소곤 천냥만냥을 하는 친구들과 로댕이 보았으면 「생각하는 사람」 대신 ‘게으른 사람’이라는 조각을 새겼을 모델감들이 방금 겨드랑이 속에서 이(虱)라도 더듬어낼 듯이 느리차분하게 앉아 햇볕을 쪼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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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와 M은 서편 온실 옆으로 가서 겨우 벤치 하나를 찾아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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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년 동안 옥중에서 연연히 생각을 하였고 이날 아침 옥문을 나서면서부터도 P의 마음에 간절히 소식을 알고 싶은 것은 K ─그의 안해였었다.
 
28
감옥 앞에서 또는 동지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과거 사 년 동안 일어난 새로운 소식, 궁금한 소식은 많이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였으나 K에 관하여서는 누구 하나 입을 열지도 아니하고 마치 무슨 약속이나 한 것처럼─또 차마 P 자신도 물어보려고 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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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물어보지 못할 것도 아니었으나 K가 자기를 맞으러 옥문 앞까지 오지 아니한 것으로 그는 예감한 바가 있어 묻기를 주저하였던 것이다.
 
30
그러나 종로로 나서서 P가 동편으로 거의 무식중에 발길을 옮겨놓은 것도 전날 K와 같이 살림살이를 하던 집이 종묘 앞에 있었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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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P는 K가 그 집에 홀로 남아 있지 아니한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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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다리고 있지 말고 진직히 ……”라고 P는 사 년 전 마지막날에 K에게 부탁하여 둔 것과 또 그가 예심에서 공판에서 일 년이나 끌려다니다가 형의 언도를 받고 입감하던 때 바로 받은 K의 편지와 출옥하기 육 개월 전에 받은 편지로써 K가 어떻게 되었을 것을 골자만은 짐작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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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지는 이러한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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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의 입감 후 일 년 만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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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보! 나는 청춘입니다. 그러고 당신이 전에 노상 말하던 모든 불리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 날로 달로 정체가 나타납니다. 당신을 생각하는 한마음만 같아서는 세상을 잊고 죽기라도 하겠읍니다마는 나한테 지금의 죽음은 너무도 무서운 것입니다. 그 반면으로 생의 유혹은 너무도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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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어떻게 할까요? 나는 청춘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있읍니다. 어떻게 하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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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성격도 잘 알고 있읍니다. 가실 제 하신 부탁일 결코 거짓이거나 입에 붙은 말이 아닌 것도 잘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러한 만큼 나의 고민은 더합니다. 결정해야 할 시기는 박두하여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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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떻게 하랍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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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의 출옥하기 육 개월 전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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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노여워하거나 저를 원망하거나는 아니하실 줄 알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은 그러한 것이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41
나는 길을 잘못 밟았읍니다. 잘못 밟은 길이 괴로울수록 옛날이 더욱 그립습니다.
 
42
인제는 P가 영영 남의 P가 되고 이 K가 P의 K가 아닌 것을 생각하면 죽도록 섧습니다.
 
43
이것이 우리 사이의 마지막 편지일 것 같습니다. 더구나 뵈오려고는 생각도 못합니다. 어떻게 당신을 치어다볼 기운이 날 리가 있어야지요 ……… 그동안 기다리고 있었으면 앞으로 일 년만 있으면─감형되셨다지요? 퍽도 반갑습니다.─당신을 번듯한 얼굴로 만날 수가 있었을 터인데 이 탐탁치 아니한 생활을 얻느라고! ……”
 
44
이 두 장 편지에 대하여 물론 P는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제하고 밝고 쾌활한 말로써 답장을 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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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P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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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다리고 있지 말고……”라고 마지막날 K에게 부탁을 한 그것이 비록 K의 약하고도 또 시대와 환경에 적응성 없는 순박하고 센티멘탈한 성격이 P 자기를 기다리고 있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을 P는 잘 알았기 때문에 차라리 이편에서 산뜻하게 일러둔 말은 말이었으나 급기야 기한이 지나 출옥을 하고 나서 생각을 하매 공연히 부질없는 말을 하였었다 하는 안타까운 후회와 K가 좀은 박정하다는 섭섭한 생각도 약간 나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었었다.
 
47
이렇게 정의 미련이 있는 만큼 한편으로는 K가 그 뒤로 영락이 되어 비참하게─P가 노상 머리속에 K한테 연관시켜 보고 위협을 느끼던 당시의 소위 여류문사 ××순이와 같은─그러한 경로에 서서 걸어가고 있지나 아니한가 하는 불안과 조민이 P의 가슴을 조바심치게 하였다.
 
48
그리하여 조용하게 되면 M이 응당 이야기를 들려주리라고 생각을 하고 그의 입에서 말이 굴러나오기만 고대하였으나 M은 일부러 그 말을 피하는 것처럼 딴 이야기만 하였었다.
 
49
P는 참다 못하여 스스로 말을 꺼냈다.
 
50
“여보게, 내가 묻는 말에 기탄없이 대답을 해주어야 허네.”
 
51
M은 눈치를 알아챈 듯이
 
52
“새삼스리 그건 또 무슨 조건인가?” 하고 P의 낯꽃을 살폈다.
 
53
“새삼스리가 아니라…… 저…… K……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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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따위 계집은 물어 무얼 허나?” 하고 M은 쌀쌀하게 반문하였다.
 
55
P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러나 예측이 있는 터라 다시 혼연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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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어떻게 허는 말인가?”
 
57
“그 따위 화냥년을……”
 
58
“허허…… 이 사람아, 그렇게 혼자만 분개헐 것이 아니라 직접 당사자인 나도 속을 좀 아세그려……?”
 
59
M은 화가 치닫는 듯이 피우던 담배를 뻑뻑 빨다가 메어 부딪듯이 대답을 하였다.
 
60
“이야기를 해야 별 것 있나! …… 자네가 들어간 뒤에 한 일 년 동안은 자네를 기다리겠노라구 그렁그렁 지내더니, 웬걸 봄이 느짓허니까 생 오두발광이 나서 S인지 제 소위 시인이랍시는 자식허구 붙어가지구 요짐은 또 ××× 여기자까지 됐었다던가……”
 
61
P는 M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심장이 바지직하는 질투─K가 전에 자기에게 보내던 그러한 정다움을 S가 받고 있으리라는 것을 눈앞에 광경으로 그려보매 거기 대한 질투의 불길이 뭉클 치밀어올랐다.
 
62
그러나 P는 그것을 한편으로 젖혀놓고 모든 것을 냉정하게 생각할 수가 있었다.
 
63
“허허허허…… 이 사람아 원 그것쯤 가지구 그렇게 분개헐 게야 무엇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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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은 M인만큼 하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P를 물끄러미 치어다만 보았다.
 
65
“왜 치어다보나? 내가 이렇게 농기(태평)하게 웃는 속을 모르겠단 말이지? 그러면 들어보게…… 자네는 알겠지만 K가 단순허구두 시인 기질이기 때문에 센티멘탈허면서 또 생활욕이 썩 풍부헌 여자가 아닌가? 그런데다가 스물셋부터 그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르는 그동안을 그 좋은 시절을 그대루 혼자 지낼 수가 있을 겐가? 사람이 살랴는 사람이니까 사람인 대루 살어야지……? 그것이 인간성의 필연이 아닌가……? 그 필연헌 요구를 감옥에 들어간 남편─ 묵은 도덕에서는 나허구 K 사이를 부부간이라구 인정두 안해 주지만 그것이 조건은 못된다구 치더래두─남편이 있다는 조건만으루 인생의 필연헌 큰 요구를 막어야 옳을 일인가? 자네는 이론뿐이지 실제를 몰라서 탈인데다가 아직두 침이 완전히 당거지지 못헌 떨떨헌 감(柿)이야……”
 
66
P가 침착하고 쾌활한 대신 M은 도리어 반감이 생겼다.
 
67
“그러면 자네는 ‘우리’ 의 의리론에서 부부의 의리라든가 정조 같은 것은 도외시헌단 말인가.”
 
68
“천만에…… 퍽 중요허게 보지…… 그러나 의리나 정조가 때와 경우를 따러 변통성을 가진 것이지 결코 절대적의 것은 아니니까…… 그뿐 아니라 이것을 보게. 만일 K가 표면으로만 생활욕을 억제하고 더러운 밀매음이 되여서 성욕과 뱃속의 만족을 채우면서 겉으루만 젠체허구 돌아다니는 년들보담은 얼마라 정정당당헌가……? 어때 내 말이 옳지? 그렇지 않어? 허허허.”
 
69
“나는 안 그래…… 나 같으면 그 따위 화냥년을 가랭이를 짝 찢어버리지.’
 
70
“허―따 괘―니 그래…… 더구나 K가 여자니까 그렇지만 남자가 그랬다면 자네가 그렇게 분개허든 않겠지?”
 
71
M은 할 말이 궁하였다.
 
72
그것을 보고 P는 다시 유쾌하게 웃었다.
 
73
“여보게…… 자네가 머리속에 든 떫은 기운이 아직두 덜 빠져서 그런다니까…… 그러나 내가 한 가지 맘에 걸리는 것은─K가 그렇게 헌 것이 물론 잘못은 아니지만─아무래도 지금 K가 생활이 그닥지 재미스럽지가 못헌 모양인데…… 맘이 뇌이지를 않어.”
 
74
이 말에 M은 P를 핀잔 줄 기회를 얻었다.
 
75
“흥 인제 보니까 감옥에서 인도주의자가 되여가지구 나왔구나?”
 
76
“인도주의? 하하…… 어찌 들으면 그렇기두 허렷다…… 그러나 뭘 내가 무슨 관념을 가지구 ‘저편을 행복되게 허느라구 나를 희생헌다’ 는 그런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조재헌 사실을 이론에 따라 비판허구, 나는 내 과거에 생긴 삽화의 한 페이지를 넘겨바린다 그 말이니까…… 그러구 나는 다시 다른 대상을 장만허구……”
 
77
“듣기 싫여…… 그 따위 궤변……”
 
78
“허허허허 망헐 녀석이……”
 
79
M도 할 수 없이 웃고 말았다.
 
80
P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81
‘그만 가세.’ 하고 기지개 불끈 썼다.
 
82
M은 그대로 앉은 채
 
83
“가기는 어데루 가? 자네 기다려 줄 데가 어데 있어서?” 하고 빈들빈들 웃기만 하였다.
 
84
“허허…… 딴은 그래…… 하숙이나 하나 잡어 들지.”
 
85
“못난이 바보…… 계집 뺏긴 못난이……”
 
86
“그 대신 또 하나 중매나 들어주게그려.”
 
87
“또 뺏기라구?”
 
88
“허허허허……”
 
89
“허허허허……”
 
90
두 사람은 뱃심껏 웃었다.
 
91
벤치에서 일어서서 걸어가다가 M은 정색을 하고 P에게 물었다.
 
92
“앞으로는 어떻게 헐 텐가?”
 
93
“무얼?”
 
94
“신진대사 말이야……”
 
95
“벌어야지.”
 
96
“어떻게?”
 
97
“어떻게구 무엇이구 그것으로 맘이야 썩힐 것은 뭣 있나……? 다른 일두 걱정이 태산 같은데……”
 
98
“그렇지만 먹구 봐야지?”
 
99
“먹지.”
 
100
“어떻게?”
 
101
“다라운 샐러리맨은 띠어걸구 …… 어느 놈이 써준대두 고멘다.”
 
102
“그럼?”
 
103
“벗여붙여야지…… 그래야만……”
 
104
“위선은?”
 
105
“하숙집에 가서 외상밥이나 먹지.”
 
106
“우리 집으로 가세.”
 
107
“방이 웬 게 있나?”
 
108
“응.”
 
109
“가세.”
 
110
M의 집으로 가느라고 공원 뒷문을 향하여 두 사람은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에 P의 머리에는 K와 지내던 과거가 파노라마와 같이 전개되었다.
 
111
“사람이 다정도 허구 좋았었는데……”
 
112
이렇게 P는 가벼운 한숨을 내어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113
일곱 달이 지나갔다.
 
114
경성전기회사 전차과의 104호 운전수 P는 견습을 마친 날 아침에 218호의 뽀키차를 힘차게 몰고 동대문으로부터 종로로 향하여 살같이 내달렸다.
 
 
115
(1929.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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