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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제 한담(表題閔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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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용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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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 한담(表題閔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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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누구나 그 작품의 표제를 헐(敏)히 붙이려고 하는 사람이 없겠지만 나처럼 신경을 쓰는 사람도 있을까 하고 혼자 생각해 보는 때가 있다. 작품에 손을 대면 작품이 되기 전부터 우선 표제 생각을 한다. 좀체 그럴 듯한 표제가 떠오르지 아니하면 작품을 쓰면서도 연방 표제 생각이다. 주인공의 이름을 하나 뚝 따서 붙이면 무난할 것이나 그건 싫다. 운치가 없기 때문이다. 내용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표제도 싫다. 한두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면 그 표제로 말미암아 내용이 빤히 들여다보이기 쉽기 때문이다. 내용을 설명해 주면 서로 그것이 단적으로 드러나지 아니하고 내용을 은근히 깊게 만드는 그러한 표제 그런 것을 나는 늘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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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라는 것을 나는 사람에게 이름을 지어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편의상 표제를 붙여 놓아야 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하고, 표제는 내용을 살피는 한 중요한 부분적 역할을 하는 골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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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작품은 이미 완성이 되어서도 그 표제가 적당하다고 인정이 되지 않을 때는 마감 기일의 박두도 무시하고 원고를 내지 못한다. 이 표제 때문에 원고를 쓰는 때나 못지않게 애를 태우며 밤잠을 못 잔 일이 거의 작품마다였다. 연중(然中)에도 잊히지 않은 것은 「병풍에 그린 닭이」라는 표제를 붙일 때와 「마을은 자동차 타고」「캉가루의 조상이」 「별을 헨다」 같은 작품의 표제에서 애를 태우던 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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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자동차 타고」(검열 불통과로 분실된 원고)는 농촌의 몰락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120여 매의 원고를 월여나 두고 시달리며 정력을 다하여 탈고를 시키긴 하였으나 그 내용을 상징적으로 깊게 살려 줄만한 표제가 숫제 떠오르지 않아서 이 표제로도 또 월여의 세월을 허실하였다. 낮이나 밤이나 이 표제 생각을 잊어 본 적이 있었으련만, 그날 밤도 이 작품의 내용을 속으로 되풀어 보며 열두시가 넘어서야 자리에 들어가, 들어가서도 가슴 위에다 손을 얹고 고요히 생각에 잠겨서 표제의 탐색을 하다가 잠이 어릿어릿한 절반 꿈속에 든 것 같은 반수 상태 속에서 불쑥 ‘마을은 자동차 타고’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외워 보고 닁큼 정신이 들어 후닥닥 일어나 불을 다시 켜고 종이 위에다 그것을 적어 보았다. 그럴 듯이 생각되었다. 지금까지 수십 개나 생각해 내 보았으나 이 이상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아주 결정하는데 한 점의 미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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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즐겁던 생각을 무엇으로 어떻게 형용하랴, 그날 밤 나는 몇 천번이나 이 '마을은 자동차 타고' 를 외워 보다가 드디어 원고에다가 정식으로 표제를 붙여 놓고 또 외워 보고 외워 보고 하며 변동 밤을 밝히다시피 잠을 설치는 반가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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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에 그린 닭이」도 잊히지 않는 표제다. 처음 이것은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끝에 「병풍에 그린 닭이 홰를 칠 때」라고 붙여서《여성(女性》 잡지에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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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교정 때 나온 표제를 보니까 그렇지 않아도 거치장스럽던 길다란 표제가 그 굵다란 일호 활자로 쭈욱 내려 박아 놓은 것이 도시체재가 흉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 이상 더 적합한 표제를 얻지 못해서 이렇게 붙여 놓았던 이 표제를 이렇게 간단하게 금시 처리하는 수도 없고 해서 그저 멍하니 붓방아를 찧기 무릇 시간여나 하다가 교정지가 손에 것채워 '병풍에 그린 닭이' 와 '홰를 칠 때' 와의 사이가 찢어져 동강이 나서 ‘병풍에 그런 닭이' 만이 손에 들렸다. 읽어 보니 '홰를 칠 때' 가 잘린 것이 도리어 더 산뜻하고 여운이 있고 함축성이 있는 것 같았다. 읽어 볼수록 그것은 ‘홰를 칠 때’가 붙었을 때보다 여운이 길이 파동을 치는 것 같았다. 당연히 잘라 버려야 할 것을 거기에까지 미처 생각이 못 미쳤던 것임을 깨달았다. 이제야 비로소 완전한 표제를 얻었다고 여겨졌다. 만일 내가 자진해서 교정을 원하지 않았던들 지금껏 ‘병풍에 그린 닭이 홰를 칠 때’ 하고 ‘홰를 칠 때’라는 꼬리가 거치장스럽게 달려 걸리적거리며 마음을 꺼림칙하게 만들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당시 모 평가(評家)가 이 작품을 월평에서 논하되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인지 제목으로는 조금도 짐작을 못 하다가 다 읽고 나서야 그 제목의 뜻을 알았노라고 한 것을 보면 역시 이 표제는 내 뜻대로 성공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캉가루의 조상이」도 꽤 오랜 시일이 경과되어서야 겨우 「미래의 역사」라는 표제가 달려 《조광(朝光)》 잡지로 넘어가게 되었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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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일 때문에 마음이 달갑게 내키지 않는 이런 표제를 달아놓은 것이 무슨 실수나 한 것처럼 늘 마음이 꺼림칙하게 개운치 않아서 인쇄에 회부하기 전에 어떻게 표제를 갈아 넣어 보려고 무한히 애를 썼으나 역시 「미래의 역사」만한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는 수가 없어서 그대로 지내다가 하루는 고향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밤차를 타고 먼 여행을 하며 졸다가 늘 잊지 못하던 이 표제가 이때도 그저 그 표제만을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역시 그 줄거리를 되풀어 보며 고요히 감은 눈앞에 '캉가루의 조상이' 라는 글자가 불쑥 떠올라와 버려졌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애를 쓰면서 찾으려던 표제 같았다. 주저없이 그것으로 결정을 하고 그 즉석에서 차장을 불러 차내에서 조광사(朝光社)에 전보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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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상경하는 즉시로 표제가 갈리었는가의 여부를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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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를 갈아 놓지는 않았으나 그런 뜻은 이미 알고 갈려고 하고 있던 차였다. 갈아 줄 뜻을 재차 전하니 이 소리를 들은 사원의 한 사람인 정모씨는“이번에도 또 '이' 요?" 하고 웃는다. 이 '이' 라는 것은 「병풍에 그린 닭이」이라는 '이' 를 말하는 것이었다. 손님으로 왔던 박모 작가는 "다음에는 또 무슨 '이' 가 나오려나?" 하고 나의 이상한 표제에 쓰는 신경을 농으로 물으며 웃는다. 「캉가루의 조상이」라는 표제가 활자화되어 나타났을 때에도 그 연달아 나온 이 '이' 는 친지간에 많은 화제가 되었다. 그들은 이 표제를 어떻게 보고 화제를 삼던 간 나는 다만 내가 찾아야 할 표제를 찾은 것만이 즐거웠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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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캉가루의 조상이」라는 표제가 잡지의 검열에서는 무난히 통과되었던 것이 일단 단행본으로 출판을 하려고 검열에 제출하였을 때에는 그것이 건전한 표제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그 표제를 건전한 표제로 갈아야 통과를 시켜 주겠다는 경무국 도서과 검열계의 지시였다. 어떻게도 애를 써서 찾아낸 표제인데, 이제 이것을 갈라는 것은 그 작품의 생명을 짓밟는 것 같아서 심히 불유쾌하였으나 어느 영(令)이라고 거역하는 수도 없이 성도 가는 세상인데(당시의 소위 창씨) 하고 「행복의 탐구」로 고칠 때의 그 희비의 교차는 지금도 잊을 길이 없다. 해방으로 말미암아 다행히 「캉가루의 조상이」는 원명대로 다시 『청춘도』라는 단편집에서 복구시키므로 그 작품의 생명을 그대로 유지하게는 되었으나 아무튼 이 표제를 살리기까지에는 이러한 곡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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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헨다」는 해방 직후 《동아일보》의 청탁으로 집필을 승낙했더니, 연재 광고를 미리 내겠노라고 표제를 먼저 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래서 이제 써야 할 그 내용의 표제를 그날 종일을 또 밤에도 밤새도록 생각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좀체 적당한 표제를 얻을 길이 없어 내용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표제 방식인 그대로 「귀국」이라 우선 붙여서 색책(塞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그 광고가 나기 전에 표제를 마련해서 바꾸려고 종일을 여기에다 머리를 썼으나 이렇다 흡족한 표제를 여전히 얻지 못했다. 원고가 끝나는 4, 5일의 경과에 있어서도 제(題)는 붙이지를 못하고 그 원고를 외투 호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면서 조용한 틈만 생기면 그것을 꺼내서 읽어 보며 생각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 또 2, 3일, 드디어 마감 기일은 와서 원고 독촉이 왔다. 그래도 이 원고에다 「귀국」이라는 제를 그대로 붙여 보내는 수는 없었다. 끼고 내놓지를 않기 또 2, 3일, 원고 독촉은 하루에도 1 2차가 있기를 날마다였다. 하루는 직접 편집국장이 사무실로 찾아오기까지 해서 하는 독촉을 받고 초조한 마음으로 변소에 들어가 앉았다가 의외에 「별을 헨다」라는 제를 캐냈다. 다시 씹어 보니 버리기 어려운 제목이었다. 변소를 나오는손, 비어 두었던 제목 자리에 「별을 헨다」라는 흥에 겨운 글씨가 제물에 들어갔다. 더 생각할 필요가 없는 만족한 표제였다. 써 넣는 그 즉석으로 원고를 보내는 데 조금도 아쉬운 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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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들의 표제는 이렇게 되었다. 이러한 고심 끝에 이루어졌다. 하나는 이불 속에서 하나는 찻간에서 하나는 교정실에서 하나는 변소에서. 책상머리에 염착(染着)이 되어 앉아서 부등부등 애를 쓸 때보다 이런 찻간이나 변소 같은 협착한 곳에서 정신을 통일시키므로 눈을 고요히 감을 때에 의외로 좋은 상이 떠오르는 것은 나만의 경험하는 의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러구려 나는 표제에다 이렇게 신경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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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신경을 써 가며 붙이는 표제가 잡지 편집자의 임의에서 자기의 비위에 맞는 표제로 갈리어 나옴을 볼 때의 그때의 불쾌함이란 또 무엇으로 어떻다 형용해 말을 해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무지한 피해를 입어 보기 무려 수삼차이거니와 「심원(心猿)」 이라는 소품도 그것이 「심원」이라는 표제가 붙기까지에는 장시일의 애가 씌었던 것인데 이것이 편집자의 손에서 「김선달」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딴 표제로 갈리어 나옴을 보았다. 더욱이 그 편집자가 작가이었음을 알았을 때, 나는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작가가 표제를 붙이는 그 표제의 의의(意義)의 해석에 나는 나를 스스로 높이 평가해보려고 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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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표제를 붙이는 것이 물론, 그 작가의 취미와 성격 나름에 따라 각각 다를 것이기는 하겠지만 단적으로 내용을 설명해 주는 표제는 작품의 가치를 마이너스로 이끄는 것밖에 안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표제는 모름지기 그 작품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은근한 깊이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원문】표제 한담(表題閔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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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10월 0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