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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9.25 (발표:『조선지광』, 192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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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최근에 이르러 작품 행동이란 말을 자주 하게 되고, 자주 쓰게 되었다. 그러면 과연 작품이 한낱 행동으로 인증될 것인가? 또한 인증된다면 그 이유와 조건이 어디 있는가를 간단히 구명하여 보겠다. 문예 작품을 한개의 행동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물론 우리로서는 한 개의 작품을 한 개의 행동으로 인증할 뿐만 아니라 작품의 행동화를 의식적으로 주장하기 때문에 문제는 오직 간단하여질 뿐이다. 다만 나머지 문제는 어떠한 이유와 어떠한 조건이 작품으로써 행동화를 주장하게 되고, 작품 행동으로 인증받게 되더라도 비합법적, 비합리적, 비과학적이 아니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논평하여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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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벌써부터 무산계급 문예와, 무산계급 문예운동을 명확히 구별하여 왔다. 무산자의 문예! 프롤레타리아의 예술! 이 말은 막연한 경지에서 무산계급을 위한 문예(아나키즘 상띠칼리즘 등)라든가 노동자의 생활을 주제로 한 문예라든가, 또한 무산 계급에게 예술을 위한 예술품으로서 감상시키기 위한 문예품이라든가, 또한 자연 발생기에 속한 문예품(빈궁 문예, 비조직적 반항 문예, 개인 행동적 ××문예 등등)은 초기에 있어서 무산계급 문예라고는 인정할 수 있으되 절대로 무산계급 문예운동은 아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무산계급 문예운동은 어떠한 조직 형태로 진출되었는가 또한 진전되어 나가는가? 무산계급 문예운동이 과연 운동다운 운동으로 형태를 갖추게 되기는 문예 영역에 있어서 목적 의식성을 고조한 때부터 비로소 완전한 운동 형태로 진출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목적 의식성을 운위하기 전에는 문예운동이 없었던가. 아니다. 있기는 이었으나 엄정한 의미에 있어서 완전한 문예운동이 아니었던 것은 사실이다. 질적으로 운동다운 운동의 조직 형태를 구비하지 못하였던 관계상 우리는 목적 의식기 이후의 운동을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문예운동이라 하고 또한 무산계급 문예와 무산계급 문예운동의 구별을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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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목적 의식기에 당면한 과연 운동다운 운동이라 할 만?한 문예 운동은 어떠하였는가? 또한 어떻게 진전되어 나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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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영역에 있어서 맑스주의적 방법론 인식하에 조직적으로 지도 이론의 확립을 힘써 왔다. 문예로서의 목적 의식성을 고조하게 되었다. 이 까닭에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무산계급 문예운동이 ××××××××× 내에 일익의 지위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문예운동으로써도 효과가 크든 작든 간에 ××××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또한 예술 운동 내부의 모든 활동이 같은 ×××지(志) 하에 움직여 나가기 때문에 객관적 정세가 휼륭히 문예 운동으로 하여금 전체성을 통한 부분 행동으로 인정받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문예운동이 질적전환을 한 이후로는 무산계급 운동의 일익적 행동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또한 일반이 인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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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이 무산계급 운동의 일익적 임무를 다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전체성을 통한 부분적 행동을 능히 담당할 수 있다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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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가 문예로서 이에만 그치지 않고 ─ 문예운동이 문예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 한 걸음 더 나아가 현 단계(×××××)의 과정을 과정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 생활의지(×××)와 합류되어 진전되기 때문에 일익적 임무, 부분적 행동으로 거리낌 없이 인정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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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의 이론 전개를 종합하여 본다면 내가 위에서 말한 바 작품이 한 개의 행동으로 인정 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간단하게 결과를 맺을 것이다. 절대적으로라도 조직적 행동화를 잊어서는 무산계급 문예운동의 본질을 망각하는 비합리적 비합법적 행위로 간파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까닭에 문예 운동이 무산 계급 운동에 있어서 일익적 임무의 기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으려면 다만 ××××× 이론 전개하에 행동화를 보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곳에 문예 운동의 전체성적 부분 운동으로서의 진정한 의의가 존재하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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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문예운동 부문 내에 작품이란 어떠한 지위에 있는가? ×××론(論)으로서의 문예이론이 있고 그 이론에 의하여 작품을 쓰게 되는 것이다. 문예운동에 있어서 작품이란 한 개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문예운동내의 모든 활동이 현단계에 이르러 모조리 행동으로 인정하게 되었다면 물론 한 개의 작품도 훌륭한 행동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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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까닭에 우리 진영 내에서는 최근에 이르러 작품 행동이란 말을 자주 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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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때때로 잡지사에 있는 동지에게서나 신문사에 있는 동지에게서 아래와 같은 주문을 받게 되는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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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 감상문이나 수필 같은 것 하나 써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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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이나 수필이요?…”하고 주저하기를 마지않는다. 그 이유는 잡문이나 수필이나 감상문 같은 것이 창작(소설)이나 평론보다 어려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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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로서는 한 개의 소설이나 문예이론 투쟁에 한 도움이 되는 평론보다도 잡문이나 수필 같은 것이 더 한층 어렵게 생각된다. 이삼백 페이지 내외의 양으로 되는 평론보다 수필이나 잡문 같은 것이 양으로 적다고 소홀히 생각하다가 혹시 무책임한 소리나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는 까닭에 창작이나 평론 이외에는 주저하기를 마지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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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혹 동지가 쓴 잡문이나 수필 같은 단문 중에서 무책임한 소리와 탈선되는 논조와 배격 당할 만한 내용의 글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 따라 우리는 그 글의 양이 비록 적으나 질적으로 다대한 영향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같은 진영내의 통일을 위하여 그들의 오류를 지적해서 이면적으로는 서로 만나 격렬히 논쟁하여 왔다. 그러나 그 방법이 옳은 방법은 아니었다. 우리의 주의자의 가까운 행동은 아니었다. 맑스주의자는 한 개의 오류를 발견하는 때에는 반드시 표면적으로 공공연하게 이론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극적 행동을 취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체적 글이 아닌 단문이라는 데 있고, 또 하나는 수필이나 잡문 한 개로써 같은 진영 내에 혼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데에 내면적으로만 서로 주의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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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로서는 내내 이러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절대로 그런 비과학적 태도를 취하여서는 안 된다. 한 개의 수필, 한 개의 잡문이라도 근본적 오류를 있는 때에는 적극적으로 지적 구명하여서 비본질적 오류를 발표하여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이래야 한 개의 잡문과 수필이라고 무책임하도록 쓰지 않게 되고 개인주의에 흐르지 않는 글을 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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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 연일 계속해서 기재되는「일인일문」중 김동환의「명문장」이란 제목하에 발표된 글은 우리로서는 그대로 묵과할 수 없는 착각적 내용이므로 한 번 검토할 필요를 느끼고 이 붓을 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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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동환에게 묻노니 당신의 생각하는 바의 명문장이란 어떠한 것을 지적해서 운위하는 것이며 또한 명문장의 표준이 나변에 재한 지 알고 싶다. 나는 그 글을 한숨에 읽고 나서는 그의 두뇌를 의심하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그 글의 내용이 또한 . 명문장이 되어 소위 명문장을 감상할 줄 모르는 사람이 그 글 - 과연 명문장? - 을 읽어서 그랬는 지는 모르지마는 나로서는 김동환의 두뇌의 혼란을 반증한 것이라고 밖에 더 호의로 해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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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부터 그 글의 내용을 부분 부분 지적 검토하여 그의 혼란된 두뇌를 바로 잡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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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씨의 문장에는 역시 세론(世論)은 있으나「민족 개조론」과「인생 향기」가 제일 명문이었다. 안광천씨의「정우회(正友會) 해체 선언」도 고귀한 문헌이자 조리정연한 명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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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의 이와 같은 논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내용은 어찌 되었든지 간에 표현하는 문장만이 명문장될 만한 요소를 구비한다면 명문장으로 인증하고 뿐만 아니라 명문장이라고 추천하여 선전까지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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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추천한 바의「민족 개조론」도 명문장이요,「정우회 해체 선언」도 명문장이란 말은 결국 그의 무절조를 일반에게 표시하고만 것뿐이다. 과연 절조 있는 사람이라면 춘원의「민족 개조론」이 명문장이라고 인증하게 되는 때에「정우회 해체 선언」은 반드시 비명문장으로 여길 것이요,「정우회 해체 선언」을 명문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연히「민족 개조론」을 비명문장으로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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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이데올로기를 파악한 사람이라면 배치되는 내용의 두 가지 글을 다 각각 명문장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비록 표현의 기교가 울리고 감격하게 되고 의분을 일으킬 만한 충분한 요소를 구비하였다고 하더라도 어느 편으로든지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서로가 반동적 내용의 글에는 아무리 충분한 요소가 있어도 그 요소의 힘을 상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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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의 입을 빌어 문장은 과연 명문장이나 내용이 우리가 요구하지 않는, 썩어진 내용이라면 명문장의 의의라든가 가치 등이 무엇에 필요하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치 오장육부가 썩어들어 가는 사람이 얼굴에다 분칠을 하고 온몸에다가는 비단옷을 입고 나다니는 것과 같다. 또한 냄새나는 송장 몸에다 값진 금의(錦衣)를 입혀 놓은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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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김동환은 이광수의 글이나 안광천의 글이 다 각각 명문장이라고 열거하였으니 도대체 명문장의 가치 표준이 알고 싶다. 또한 춘원의 글을 논박한 회월의「문예쇄담을 읽고」란 논박문이 명문장이라고 지적하였으니 과연 어느 편짝의 글이 명문장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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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말하면 김씨는 혹시 이렇게 생각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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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의 「민족 개조론」은 그 시기에 명문장이었고 박씨의「문예쇄담을 읽고」라는 반박문도 그 시기에 명문장이기 때문에 내용은 어찌 되었든지간에 시대를 초월한 명문장이다. 시대가 바뀌면 바뀔수록 명문장은 어느 때든지 명문장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진정한 면문장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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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본의가 이곳에 있다면 씨의 근본 논지가 예술의 영원성을 고조한 데 불과하다. 사실 그러하다면 우리로서는 더 논의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씨의 의식은 그 경지를 벗어난 지 이미 오래이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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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아래에 김씨가 지적한 명문장 등을 재기록하여 과연 명문장인가 명문장이 못 되는가를 독자 제씨의 엄정한 비판에 맡기고 또한 나로서 재검토를 하여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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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글이란 읽고 또 읽고 싶으며 한 번 읽은 뒤에 그 인상의 뚜렷함을 가르친 것일까. 어떤 글이나 한 번을 겨우 읽고 마는 내 성품에도 두 번 세번 본 것이 있으니 문예 작가 중에 이것을 찾는다면 시가에 춘원의「님」, 요한의「대동강 불놀이」, 포석의「하늘이 움메 땅이 움메 운운」, 김려수의「원산 해변에서」, 무애의「해곡삼장」, 안서의「애별」등이요, 소설로는 춘원의「가실」, 상섭의「만세전」, 동인의「감자」, 빙허의「불」,포석의「낙동강」, 서해의「홍염」,독견의「승방비곡」중「배교자」이며 문예평론으로는 팔봉「춘원 제 일기, 상섭 제 이기 운운」하는 그 글과 회월의 「문예쇄담을 읽고」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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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하에 프롤레타리아 운동자인 우리로서는 내용이 형식을 규범한다는 말을 그대로 실행하려고 한다. 또한 다원론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같은 진영 내에 우리는 일원론자로 자처하니 않는가? 일원론자로 자처한다는 말은 현단계에 있어서 전체성적으로 집중하여 조직적 행동을 감행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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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춘원의「님」이라든가, 안서의「애별」등이 우리가 요구하는 내용이었던가? 형식이었던가? 또한 김동환의 말마따나 만인을 울리고 웃기었는가? 천만에…. 내용이나 형식이 우리가 요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들의 시가가 의식적 전위 분자를 울리고 웃기었는가? 아니다, 아니다. 전위 분자들은 그와 센티멘털하게 애상적 기분에 흐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울리고자 하는 문구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코웃음치며 비웃게 되고 웃기고자 한 곳에 이르러서는 불쾌를 느낄 뿐이다. 이 까닭에 내용의 근본적 오류가 있으면 아무리 문장이 묘하고 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문장이 아무리 명문장이라고 하나 감염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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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춘원의 소설이 명문장? 포석의 소설이 명문장? 동인의 소설이 명문장? 빙허의 소설이 명문장? 서해의 소설이 명문장? 누구누구의 글이 명문장? 이와 같이 명문장을 지적하였으니 우리는 다 같이 그들의 글을 명문장으로 인정하고 있는가? 그가 지적한 바의 소설이 거개 내용을 표준한 것 같다. 그러면 내용이 형식을 규범하게 되는 동시에 또한 내용이 문장을 결정하기 때문에 포석과 서행의 소설이 명문장이라는 것을 김동환 자신이 반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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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 구명한 논지가 합리적 귀결이라면 김동환의 주장에는 수긍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론의 파탄을 폭로하였고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맨 먼저 그의 글이 착각적 내용이라고 하였고, 두뇌의 혼란을 반증하였다고 단언하였다. 과연 나의 단언이 독단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아래에 한 구절을 더 인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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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간 공산당 공판 첫날에 『동아일보』제 이면에 쓰인 서설(序說)은 누가 썼는지 잘 쓴 글이더라. 그 밖의 중외(中外)의 신일선양 약혼때에 쓴 로맨스 기사도 멋지고 능란하고 호화로워 독자를 광취케 하는 좋은 글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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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에 대한 글도 명문장이고, 신일선에 대한 글도 명문장이라고 하였으니 그래 명문장의 표준을 무엇으로 결정하는지? 도대체 어떠한 것을 명문장이라고 인정하는지? 이보다 더 심한 두뇌의 혼란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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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명문장에 대한 정의를 한 번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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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명문장이나 명연설이 어째 좋으냐. 전대에 긍하도록 그 글이 길고 또 만인을 울리고 웃기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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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명문장의 요소는 전대에 긍할 만한 영원성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김씨는 우리가 배격하고자 하는 부류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나 김씨는 예술의 영원성을 찬양하고 모순에 찬 현실과 싸우는 투사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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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요소는 “만인을 울리고 웃기고 하는구나.” 하였으니 그러면 지금의 우리가 요구하는 문장이 울게 되고 웃기 위한 글이던가? 아니다. 우리는 울고 앉았거나 웃고 드러누웠을 때가 아니다. 오직 우리 앞에는 ………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김씨도 잘 아는 사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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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씨의 이번 글을 그 자신이 오류로 인정하지 않고 내내 그대로 주장한다면 김씨의 이번 글이야말로 일생일대의 〈명문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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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명한’ 김씨는 이번 글을 취소하실 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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