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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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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본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燕巖集卷之六○別集 / 書事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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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李邦翼事 沔川郡守臣朴趾源奉 敎撰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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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익(李邦翼)의 사건을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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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 군수(沔川郡守) 신 박지원은 교명(敎命)을 받들어 지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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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之二十年 淸嘉慶元年 九月二十一日。濟州人前忠壯將李邦翼。將覲其父於京師。舟遇大風。至十月初六日。泊于澎湖。官給衣食。留十餘日。護送至臺灣抵廈門。歷福建,浙江,江南,山東諸省。達于北京。由遼陽。明年丁巳閏六月還國。水陸萬有餘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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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今上 정조(正祖) ) 20년 - 청(淸) 나라 가경(嘉慶) 원년(1796) - 9월 21일에 제주 사람 전(前) 충장장(忠壯將) 이방익이 서울에 있는 자기 부친을 뵐 양으로 배를 탔다가 큰바람을 만나 표류되어 10월 6일에 팽호도(澎湖島)에 닿았습니다. 관에서 의복과 음식을 주어 십여 일을 머물게 한 뒤에 호송하여 대만(臺灣)에 당도하고, 거기서 또 하문(厦門)을 경유하여 복건(福建), 절강(浙江), 강남(江南), 산동(山東) 등 여러 성(省)들을 거쳐 북경(北京)에 도달하고, 요양(遼陽)을 경유하여 다음해인 정사년 윤6월에 서울에 돌아오니, 수륙(水陸) 만여 리를 거쳐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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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特召見邦翼。問以所經山川風俗。命史官錄其事。同舟八人。惟邦翼曉文字。然僅記程途。又追憶口奏。往往失次。臣趾源以沔川郡守。陛辭入侍于煕政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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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께서 특별히 방익을 불러 보고 지나온 산천과 풍속을 하문하면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그 일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배를 같이 탄 8명 가운데 방익만이 문자를 알기는 하였으나, 겨우 노정(路程)만을 기록해 놓았을 뿐이요, 또 기억을 더듬어 입으로 아뢴 것도 왕왕 차서(次序)를 잃었습니다. 신 지원이 면천 군수로서 사은숙배(謝恩肅拜)하러 희정당(熙政堂)에 입시(入侍)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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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曰。李邦翼事甚奇。惜無好文字。爾宜撰進一編。臣趾源承命震越。退取其事。略加證正焉。邦翼父前五衛將光彬。曾赴武擧。涉海漂至日本之長崎島。番舶湊集。市里繁華。有一醫士延光彬。至其家。款待勸留。光彬堅請歸國。醫士引入內堂。出妖嬌少娥。使拜光彬曰。吾家累千金。無一箇男。只有此女。煩君爲吾女婿。吾老且死。千金之財。君所有也。睇其女。齒白如霜。末染鐵汁。果是室女也。光彬大言曰。棄其父母之邦。耽慕財色。投屬異國。犬彘之不若也。且吾歸國登科。富貴可得。何必君之財與君之女哉。醫士知其無可柰何。而遣還云。光彬雖是島中武弁。毅然有烈士之風。其父子遠遊異國。亦可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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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께서 분부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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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익의 사건이 몹시 기이한데 좋은 기록이 없어 애석하니 네가 한 책을 지어 올리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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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었습니다. 이에 신 지원이 송구한 마음으로 명을 받들고는 물러나 그 사실을 가져다 대략 증정(證正)을 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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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익의 부친은 전(前) 오위장(五衛將) 광빈(光彬)인데 일찍이 무과에 응시하려고 바다를 건너다가 표류되어 일본 장기도(長崎島)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외국 선박들이 많이 모이고 시장과 마을이 번화하였습니다. 그때 의사(醫士) 한 사람이 광빈을 맞아 그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잘 대접하면서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광빈이 굳이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하니 의사가 내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예쁘장한 젊은 계집을 나오라 하여 광빈에게 절을 시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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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에 천금 재산을 쌓아 놓았으나 사내자식은 하나도 없고 다만 이 계집애가 있을 뿐이니, 원컨대 그대는 내 사위가 되어 달라. 내가 늙어서 죽게 되면 천금의 재산은 그대의 차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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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습니다. 그 계집을 슬쩍 보니 치아가 서리같이 하얗고 아직 철즙(鐵汁)을 물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과연 처녀였습니다. 광빈이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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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재물을 탐내고 여색에 연연해서 다른 나라 사람이 되어 버린다면 이는 개돼지만도 못한 자이다. 더구나 나는 내 나라에 돌아가면 과거에 올라 부귀를 누릴 수 있는데, 하필 그대의 재물과 그대의 딸을 탐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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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더니, 의사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광빈이 비록 섬 속의 무인(武人)이지만 의젓하여 열사(烈士)의 기풍이 있었으며, 그 부자(父子)가 멀리 이국에 노닐게 된 것도 역시 기이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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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濟州。古耽羅也。北史云。百濟南海行。有耽牟羅國。土多獐鹿。附庸於百濟。又云。高句麗使芮悉弗言於魏宣武曰。黃金出於夫餘。珂則涉羅所產。今夫餘爲勿吉所逐。涉羅爲百濟所幷。二品所以不登也。唐書云。龍朔初。有澹羅者。其王儒理都羅。遣使入朝。國在新羅武州南島上。俗樸陋。衣犬皮。夏革屋。冬窟室。初附百濟。後附新羅。按此皆指耽羅也。東國方言。島謂之剡。而國謂之羅。羅耽涉澹三音。並與剡相類。蓋云島國也。古記所稱。初泊耽津。朝新羅。故曰耽羅者。附會之說也。宋嘉祐中。蘇州崑山縣海上。有一船。桅折風飄。抵岸。船中三十餘人。衣冠如唐人。係紅鞓角帶。短皁布衫。見人皆痛哭。言語不可曉。試令書字。字亦不可讀。行則相綴如鴈行。久之。出一書示人。乃漢字。唐天授中。告勅屯羅島首領陪戎副尉制。又有一書。乃是上高麗表。稱屯羅島。亦用漢字。知崑山縣事。使人爲治其桅。桅舊植船木上。不可動。工人爲之造轉軸。敎其起倒之法。按濟州古亦稱乇羅。韓文公稱耽浮羅。所謂屯羅者。乇羅之訛也。天授者。高麗太祖年號也。高麗史天授二十年。乇羅島主來朝。王賜爵是也。宋人以爲則天年號。則尤謬也。濟州人之漂入中國。自古有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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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옛날의 탐라(耽羅)입니다. 《북사(北史)》에 이르기를, “백제에서 남쪽으로 항해하면 탐모라(耽牟羅)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땅에는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백제에 복속하였다.”라 했고, 또 이르기를,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이 위(魏) 나라 선무제(宣武帝)에게 말하기를, ‘황금은 부여(夫餘)에서 나고 옥은 섭라(涉羅)에서 산출되는데 지금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이 됐으므로, 이 두 가지 물품은 그 때문에 올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용삭(龍朔) 초에 담라(澹羅)가 있었는데 그 왕 유리도라(儒理都羅)가 사신을 보내 입조(入朝)했다. 나라는 신라 무주(武州) 남쪽 섬에 있는데 풍속이 박루(樸陋)하여 개가죽 옷을 입고 여름에는 혁옥(革屋 가죽을 펴서 지붕을 삼은 집 )에서 살고 겨울에는 움집에서 생활한다. 처음에는 백제에 복속되었으나 후에 신라에 복속되었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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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이는 다 탐라를 가리킵니다. 우리나라 방언에 도(島)를 ‘섬’이라 이르고 국(國)을 ‘나라’라 이르는데 탐(耽)ㆍ섭(涉)ㆍ담(澹) 세 음은 모두 ‘섬’과 유사하니 대개 섬나라라는 뜻입니다. 옛 기록에 일컬은 바, “처음에 탐진(耽津 강진(康津) )에 배를 정박하고 신라에 조회했기 때문에 ‘탐라’라 한다.”고 한 것은 견강부회의 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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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나라 가우(嘉祐) 연간에 소주(蘇州) 곤산현(崑山縣) 해상에 배 하나가 돛대 꼭지가 부러져 바람에 날리어 해안에 닿았는데, 배 안에는 30여 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의관(衣冠)은 당 나라 사람 같았으며 홍정(紅鞓 붉은 가죽 띠 )과 각대(角帶 뿔로 장식한 허리띠 )를 띠고 짧고 검은 베적삼을 입었는데, 사람을 보면 모두 통곡만 하고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험 삼아 글자를 쓰게 했더니 쓴 글자 역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다닐 적에는 서로 줄지어 다녀 기러기 줄과 같았습니다. 한동안 있다가 문서 하나를 꺼내어 사람에게 보이는데, 바로 한자(漢字)로 씌어진 것으로서 당 나라 천수(天授 690~692 ) 연간에 둔라도(屯羅島) 수령 배융부위(陪戎副尉)에 임명한다는 제서(制書 왕의 명령서 )이고, 또 하나의 문서가 있는데 바로 고려에 올리는 표문(表文)으로서 ‘둔라도’라 칭했으며 그 역시 한자를 사용했습니다. 곤산현 지사(崑山縣知事)가 사람을 시켜 그 돛대 꼭지를 수리해 주게 했는데 그 돛대 꼭지는 예전에는 선목(船木) 위에 꽂혀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인(工人)이 그를 위하여 돌리는 굴대를 만들어 돛대를 일으키고 눕히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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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제주는 옛날에 또한 ‘탁라(乇羅)’라고도 불렸으며 한 문공(韓文公 한유(韓愈) )은 ‘탐부라(耽浮羅)’라 불렀습니다. 이른바 ‘둔라(屯羅)’라는 것은 ‘탁라(乇羅)’의 와전입니다. 천수(天授)는 고려 태조의 연호이니 《고려사》에 “천수 20년에 탁라 도주(乇羅島主)가 내조(來朝)하여 왕이 작(爵)을 내렸다.”는 것이 바로 그 실례입니다. 송 나라 사람이 이를 당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연호로 본 것은 더욱 틀린 것으로서, 제주 사람이 중국에 표류되어 들어간 것은 예로부터 있어 온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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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邦翼奏曰。舟爲風所飄蕩。或東西。或南北。凡十有六日。將近日本。忽又轉向中國。糧盡不食者累日。忽有大魚躍入舟中。八人共生啗之。淡水旣盡。天又大雨。爭掬飮解渴。船之始泊也。昏暈不省人事。有人遠立覘望。小頃成羣而至。收拾船中衣服等項。各負一人而去。三十許里。有村落。可三十餘戶。中有公廨。扁曰坤德配天堂。以米飮飮之。取火燎衣。稍定精神。乃索紙硯書問。始知爲中國福建屬島澎湖地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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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익이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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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바람에 휘날려 혹은 동서로 혹은 남북으로 표류하기를 열엿새 동안이나 하였습니다. 일본에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중국으로 향하였습니다. 양식이 떨어져서 먹지 못한 것이 여러 날이었는데, 문득 큰 물고기가 배 안으로 뛰어들어 여덟 사람이 함께 산 채로 씹어 먹었습니다. 먹을 물이 다 떨어졌는데 하늘이 또 큰비를 내려 주어 모두들 두 손을 모아 받아 마시고 갈증을 풀었습니다. 배가 처음 해안에 닿았을 때는 정신이 어지러워 인사불성이 되었사온대, 어떤 사람이 멀리 서서 이를 엿보고 있더니 이윽고 무리를 지어 배에 올라 배 안에 있는 의복 따위들을 모두 챙기고 각자 한 사람씩 업고 나섰습니다. 이렇게 30여 리를 가니 마을이 나왔는데 30여 호쯤 되었고 중앙에는 공청(公廳)이 있어 ‘곤덕배천당(坤德配天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들이 미음을 만들어 주어 마시고 화로를 가져다 옷을 말려 주곤 하여 겨우 정신을 차려서는 지필(紙筆)을 청하여 글자를 써서 묻고서야 비로소 그곳이 중국의 복건성(福建省) 소속인 팽호도(澎湖島) 지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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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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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按澎湖島西。與泉州金門相望。圖經。島有東吉西吉等三十六嶼。渡海者。必由二吉以入。舊屬同安縣。明季。因地居海中。人民散處。催科所不能及。乃議棄之。後內地苦徭役。往往逃于其中。而同安漳州之民。爲最多。及紅毛入臺灣。並其地有之。而鄭成功父子。復相繼據險。 恃此爲臺灣門戶。環繞有三十六嶼。大者曰媽祖嶼等處。澳門口。有兩砲臺。次者曰西嶼頭等處。各嶼唯西嶼稍高。餘皆平坦。自廈門至澎湖。有水如黛色。深不可測。爲舟行之。中道順風。僅七更半。水程一遇颱颶。小則漂流別港。阻滯月餘。大則犯礁覆舟。故舟子有望風占氣之法。羅經針定于午。放洋各有方向。春夏。由鎭海坼放洋。正南風。坐乾亥向巽巳。西南風。坐乾向巽。冬由寮經放洋。正北風。坐戌向辰。至夜半。坐乾戌向巽辰。東北風。坐辛戌向乙辰。或由圍頭放洋。正北風。坐乾向巽。至夜半。坐乾亥向巽巳。東北風。坐乾戌向巽辰。至天明。俱可望見澎湖西嶼頭。由澎湖至臺灣。俱向巽而行。薄暮可望見澎湖。初無水田可種。但以採捕爲生。或治圃以自給。今貿易輻輳。漸成樂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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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팽호도는 서쪽으로 천주(泉州)의 금문(金門)과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도경(圖經 지도책 )에 의하면 팽호도는 동길서(東吉嶼), 서길서(西吉嶼) 등 36개의 섬이 있어 바다를 건너는 자는 반드시 동길서와 서길서를 경유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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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동안현(同安縣)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명 나라 말기에 이르러 지역이 바다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있음으로 인해 세금 수납이 불가능하므로, 마침내 논의하여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 후 내지(內地)의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리다 못해 가끔 그 안으로 도피해 갔는데, 동안(同安)과 장주(漳州)의 백성이 가장 많았습니다. 홍모(紅毛 네덜란드인 )가 대만(臺灣)을 점령했을 때 이 지역도 아울러 차지했으며, 정성공(鄭成功) 부자(父子)가 다시 대를 이어 웅거할 때 이 지역을 맏고 대만의 문호로 삼았습니다. 주위를 빙 둘러 36개의 섬이 있는데, 그중 제일 큰 섬은 마조서(媽祖嶼) 등지로 오문구(澳門口)에 두 포대(砲臺)가 있고, 그 다음은 서서두(西嶼頭) 등지이며, 각 섬들 가운데 서서(西嶼)만이 조금 높을 뿐 나머지는 다 평탄합니다. 하문(厦門)으로부터 팽호에 이르기까지는 물빛이 검푸른 색이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으며 뱃길의 중도(中道)가 되어 순풍이면 겨우 7경(更) 반 만에 갈 수 있는 물길이지만 한번 태풍을 만나면 작게는 별항(別港)에 표류되어 한 달 남짓 지체하게 되고, 크게는 암초에 부딪쳐 배가 엎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뱃사람들은 바람을 보고 기후를 점치는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침반으로 방향을 정하였고, 바다에 나갈 때는 시기에 따라 각각 그 방향을 달리하였습니다. 즉 봄과 여름에는 진해기(鎭海圻)를 통해 바다로 나가는데, 정남풍이 불면 건해방(乾亥方 서쪽에서 북으로 45도~60도 방향 )에서 손사방(巽巳方 동쪽에서 남으로 45도~60도 방향 )을 향해 나아가며, 서남풍이 불면 건방(乾方 북서향 )에서 손방(巽方 남동향 )을 향해 나아갑니다. 겨울에는 요경(寮經)을 경유하여 바다로 나가는데, 정북풍이 불면 술방(戌方 서쪽에서 북으로 30도 방향 )에서 진방(辰方 동쪽에서 남으로 30도 방향 )을 향해 나아가고 한밤중에는 건술방(乾戌方 서쪽에서 북으로 30도~45도 방향 )에서 손진방(巽辰方 동쪽에서 남으로 30도~45도 방향 )을 향해 나아가며, 동북풍이 불면 신술방(辛戌方 서쪽에서 북으로 15도~30도 방향 )에서 을진방(乙辰方 동쪽에서 남으로 15도~30도 방향 )을 향해 나아갑니다. 혹 위두(圍頭)를 경유하여 바다로 나가기도 하는데, 정북풍이 불면 건방(乾方)에서 손방(巽方)을 향해 나아가고 한밤중에는 건해방(乾亥方)에서 손사방(巽巳方)을 향해 나아가며, 동북풍이 불면 건술방(乾戌方)에서 손진방(巽辰方)을 향해 나아갑니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든 날이 밝아질 즈음이면 모두 팽호의 서서두(西嶼頭)를 볼 수가 있습니다. 팽호를 거쳐 대만으로 갈 때에는 모두 손방(巽方)을 향해 나아가는데 저물녘이면 대만을 볼 수 있습니다. 팽호는 애초에 벼를 심을 만한 수전(水田)이 없었고 다만 고기 잡는 것으로써 생계를 삼았으며 혹은 남새를 가꾸어 자급하는 형편이었는데, 지금은 무역선이 폭주하여 점차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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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邦翼奏曰。八人同乘彩船。行五里許。詣馬宮衙門。沿江彩船數百艘。 江邊畵閣。卽衙門也。門內高唱三聲。導入八人。馬宮大人。紅袍椅坐。年可六十餘。美鬚髯。階下建紅傘。臺上侍立者。可八十人。皆紋緞衣。或藍或綠。或佩劒。或負羽。臺下朱衣兵卒可三十人。皆持杖。或竹棍。黃龍旗二雙。銅鉦一雙。引八人升臺上。馬宮大人問漂海之由。答以朝鮮全羅道全州府人云云。退出有大廈鋪設。皆錦緞。各贈竹簟枕。每日給米飮一器。鷄膏一器。又給香砂六君子湯兩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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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익이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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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사람이 함께 채선(彩船 아름답게 장식한 배 )을 타고 5리쯤 가서 마궁(馬宮)의 아문(衙門)으로 나아가니 강물을 따라 채선 수백 척이 널려 있고 강가에는 화각(畵閣)이 있는데 바로 아문이었습니다. 문 안에서 소리를 높여 세 번 외치고는 우리 여덟 사람을 인도하였습니다. 마궁의 대인(大人 고위 벼슬아치 )이 홍포(紅袍)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나이는 예순 남짓하고 수염이 좋게 났으며, 계단 아래에는 붉은 일산을 세우고 대상(臺上)에는 시립(侍立)해 있는 자가 80명쯤 되었습니다. 모두 무늬 새긴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혹은 남색 혹은 녹색이었으며, 혹은 칼을 차고 혹은 화살을 짊어졌고, 대하(臺下)에는 붉은 옷 입은 병졸이 30명쯤 되는데 모두 몽둥이를 쥐고 있었으며 간혹 대나무 작대기도 쥐고 있었습니다. 황룡기 2쌍을 들고 징 1쌍을 울리면서 우리 여덟 사람을 인도하여 대상에 올라가니 마궁의 대인이 바다에 표류된 연유를 묻기에, 우리는 조선 전라도 전주부(全州府) 사람으로서 이러이러한 연유로 표류하게 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고는 물러 나오니, 큰 건물이 있는데 바닥에 깐 것이 모두 주단이었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 대로 만든 자리와 베개를 주고 날마다 미음 한 그릇과 닭고깃국 한 그릇을 주고 또 향사육군자탕(香砂六君子湯)을 두 때씩 주었습니다.”
 
32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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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按馬宮大人之宮字。似是公字。公宮華音相同。當是馬姓人。作通判者耳。又耽羅人之漂到異國者。諱稱本籍。托以靈光康津南海全州等地方者。俗傳琉球商舶。被耽羅所害故云耳。或言非琉球。乃安南。李重煥擇里志。俱載其詩。然非有古記可證。只是世俗流傳。不必多辨其眞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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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마궁 대인의 그 궁(宮) 자는 아마도 공(公) 자인 것 같습니다. 공(公)과 궁(宮)이 중국 음으로는 서로 같으므로 이는 응당 마씨(馬氏) 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통판(通判 주부(州府)의 장관(長官) 다음 직책 )이 된 자일 것입니다. 또 탐라 사람이 이국에 표류된 경우 본적을 일컫기를 꺼리고 영광(靈光)ㆍ강진(康津)ㆍ해남(海南)ㆍ전주(全州) 등의 지방으로 둘러대는 것은, 속(俗)에서 전하기를 유구(琉球)의 상선(商船)이 탐라 사람의 해를 입은 때문이라고 합니다. 혹은 유구가 아니고 안남(安南)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 그에 대한 시(詩)가 모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증거가 될 만한 옛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세속의 유전(流傳)일 뿐이니 굳이 그 진위(眞僞)를 분변하려 들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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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邦翼奏曰。以兩大船分載。西南向二日。到臺灣府北門外下陸。繁華 壯麗。樓臺夾路。夜張琉璃燈。通明如晝。又有異鳥。馴之彩籠。知更而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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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익이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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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척의 큰 배에 나누어 타고 서남(西南)으로 향하여 이틀 만에 대만부(臺灣府)의 북문(北門) 밖에서 하륙(下陸)했는데, 번화하고 장려하여 길 양옆에 누대가 늘어서 있고 밤에는 유리등을 켜 대낮처럼 밝았습니다. 또 기이한 새를 채색 초롱에 기르고 있는데 그 새는 시간을 알아서 울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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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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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按臺灣。明史稱鷄籠山。又稱東蕃。永樂時。鄭和歷東西大洋。靡不獻琛。獨東蕃遠避。和惡之。家貽一銅鈴。俾掛其項。蓋擬之狗國也。其後人反寶之。富者至綴數枚曰。此祖宗所遺。俗不食雉鷄。但取其毛以爲飾。乾隆五十二年。討林爽文之亂。爽文兵敗。入內山。生蕃等。縛而獻之。熱河文廟大成門右壁碑。記其事。生蕃等。皆短小。剪髮覆額。髮色漆黑。眉間或頤上。印烙若卦文。穿耳輪。揷錫筒。前後通明。或貫黃木。懸骨牌。其名有曰投旺。曰匀力力。曰囉沙懷祝。曰也璜哇丹。曰懷目懷。曾入朝熱河者也。○海環府境。皆是舟人。其渡洋。不辨里程。一日夜。以十更爲率。自鷄籠淡水舟行至福州港口五更。自臺灣港。至澎湖四更。自澎湖至泉州金門所七更。東北至日本國七十二更。南至呂宋國六十更。東南至大港二十二更。西南至南澳七更。皆就順風而言。海居極東。月常早上。故潮水長退。視廈門同安。亦較早焉。海多颶風。最甚爲颱。土蕃有識颱草。草生無節。則周歲無風。一節則颱一吹。多亦如之。無不驗。○鹿耳門在臺灣西三十里。形如鹿耳。故名。兩岸皆築砲臺。水流峽中。委曲回旋而入。中有海翁崛。多浮沙水淺。風急則深淺頓易。最爲險要。門內水勢寬濶。可藏千艘。卽大圓港也。○嘉義縣。鄭氏屬天興州。康煕二十三年。分置諸羅。乾隆五十二年。臺灣賊林爽文攻縣城。城內居民四萬。助提督城守。因敕改諸羅爲嘉義以㫌之。○安平鎭城在一崑身之上。崑身者。蕃語沙堤也。東抵灣街渡頭。西畔沙坡抵大海。南至二崑身。北有海門原。紅毛夾版船出入之處。按一崑身。周廻五里。紅毛築城。用大塼。桐油和石灰。共搗而成。城基入地丈餘。深廣亦一二丈。城墻各垜。俱用鐵釘釘之。方圓一里。堅固不可壞。東畔設屋宇市肆。聽民貿易。城內屈曲如樓臺。下上井泉。醎淡不一。另有一井。僅小孔。桶不能入。水從壁上流下。其西南畔一帶。原係沙墩。紅毛載石堅築。水衝不崩。○赤嵌城亦係紅毛所築。在臺灣海邊。與安平鎭相向。其城方圓不過半里。鷄籠淡水小城也。紅毛築之以防海飄。然利于南風。不利于北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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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대만은 《명사(明史)》에 계롱산(鷄籠山)이라 칭하였고 또 동번(東蕃)이라 칭했습니다. 영락(永樂) 연간에 정화(鄭和)가 동서의 대양(大洋)을 두루 원정하여 모두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유독 동번만은 멀리 피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화가 이를 미워하여 집마다 하나씩 구리 방울을 주어 그 목에 걸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구국(狗國)에 비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사람들은 도리어 그 방울을 보배로 여겨, 부자는 여러 개씩을 걸고 다니며 ‘이는 조상이 물려준 것’이라며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풍속은 꿩을 먹지 않고 다만 그 털만 취하여 장식품을 만든다 합니다. 건륭 52년(1787)에 임상문(林爽文)의 난을 토벌하자 임상문의 군사가 패하여 내산(內山)으로 들어가니 생번(生番)들이 포박하여 바쳤는데 열하(熱河)의 문묘(文廟) 대성문(大成門) 바른편 벽의 비(碑)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번들은 다 키가 왜소하며 단발한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머리카락은 칠흑색이며 양미간이나 턱 위에 팔괘(八卦) 무늬와도 같은 낙인을 찍었으며, 귓바퀴를 뚫어 주석(朱錫) 통을 꽂았는데 그 통은 앞뒤가 통하며, 혹은 횡목(橫木)을 꿰어 골패(骨牌)를 달고 다닌다고 합니다. 투왕(投旺), 균력력(勻力力), 나사회축(囉沙懷祝), 야황와단(也璜哇丹), 회목회(懷目懷)라 불리는 자들은 일찍이 열하에 입조(入朝)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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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로 둘러싸인 대만부(臺灣府)의 경내에는 모두 뱃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는 것을 거리로 구분하지 않고 하루를 10경(更)으로 나눈 시간으로 기준을 삼습니다. 계롱(鷄籠)과 담수(淡水)에서 배로 복주(福州) 항구에 이르자면 5경(更)이 걸리고, 대만항으로부터 팽호(澎湖)에 이르자면 4경이 걸리고, 팽호로부터 천주(泉州) 금문소(金門所)에 이르자면 7경이 걸립니다. 동북으로 향하여 일본국에 이르자면 72경이 걸리며, 남으로 여송국(呂宋國 스페인 치하의 필리핀 루손섬 )에 이르자면 60경이 걸리며, 동남으로 대항(大港)에 이르자면 22경이 걸리며, 서남으로 남오(南澳)에 이르자면 7경이 걸리는데, 다 순풍을 만났을 때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동쪽 끝의 바다에 위치하여 달이 항상 일찍 뜨기 때문에 조수(潮水)의 드나듦도 하문(厦門)과 동안(同安)에 비교하여 또한 이른 편입니다. 바다에 큰바람이 많아서 그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태풍(颱風)입니다. 토번(土蕃)에 태풍이 오는 것을 알려 주는 풀이 있어 이 풀이 나면서 마디가 없으면 일 년 내내 바람이 없고, 마디가 하나면 태풍이 한 번 불고, 마디가 많으면 태풍 또한 그 수만큼 부는데, 들어맞지 않는 적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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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이문(鹿耳門)은 대만 서쪽 30리에 있는데 그 형상이 사슴의 귀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양쪽 해안에 모두 포대(砲臺)를 쌓아 놓았고 바닷물이 해협 사이로 흘러 구불구불 휘돌아 들어옵니다. 그 가운데에 해옹굴(海翁崛)이 있는데 평소에는 뜬모래가 많고 물이 얕으나, 바람이 세게 불면 깊이가 돌변하여 가장 험한 곳이 됩니다. 녹이문 안으로 들어가면 수세(水勢)가 약해지고 넓은 곳이 나와 1000척의 배를 정박해 둘 만한 곳이 있으니 곧 대원항(大圓港)이라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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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의현(嘉義縣)은 정씨(鄭氏) 때에 천흥주(天興州)에 속하였다가 강희(康熙) 23년(1684)에 분리되어 제라현(諸羅縣)이 되었습니다. 건륭 52년(1787)에 대만의 도적 임상문이 현성(縣城)을 공격했을 때 성내의 거주민 4만 명이 제독(提督)을 도와 성을 지켰으므로, 이로 인해 칙령을 내려 제라현을 가의현으로 고쳐 정표(旌表)를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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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평진성(安平鎭城)은 일곤신(一崑身)의 위에 있는데, 곤신(崑身)이란 번어(蕃語 원주민의 말 )로 모래 제방이라는 뜻입니다. 동쪽으로는 만가도두(灣街渡頭)에 닿고 서쪽의 모래언덕은 대해(大海)에 닿으며, 남쪽으로는 이곤신(二崑身)에 이릅니다. 북쪽에는 해문(海門 해협)이 있는데 원래 홍모(紅毛)의 협판선(夾板船)이 드나들던 곳입니다. 살펴보건대, 일곤신은 둘레가 5리입니다. 홍모가 성을 쌓을 때 큰 벽돌을 이용하고 동실유(桐實油)와 석회를 섞어 함께 다져서 만든 것입니다. 성의 기초는 땅 밑으로 한 길 남짓 들어가고 깊이와 너비도 한두 길이나 됩니다. 성벽 위의 성가퀴는 모두 쇠못을 박았는데 둘레가 1리이며 견고하여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동쪽 지역에는 집들과 시장을 마련하여 백성의 무역을 허용하였습니다. 성안은 누대를 오르내리듯 굴곡이 심하고, 우물물은 싱겁고 짠맛이 일정하지 않아 별도로 우물을 파 놓았는데 구멍이 하도 작아서 두레박이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고 물이 벽에서 흘러내립니다. 서쪽과 남쪽 일대는 본시 모래 돈대였는데 홍모들이 돌을 실어다 견고하게 쌓아서 파도가 대질러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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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감성(赤嵌城) 역시 홍모가 쌓은 것인데 대만의 해변에 있어 안평진(安平鎭)과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 성의 둘레는 반 리(里)에 지나지 않습니다. 계롱(鷄籠)과 담수(淡水)는 조그마한 성인데 홍모가 쌓아서 바닷바람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풍만 막아 줄 뿐 북풍은 막아 주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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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邦翼奏曰。留臺灣七日。呈書乞歸。官給衣一襲。設餞送別。握手眷眷。舟到廈門。止舍于紫陽書院。入拜朱子像。儒生數百人來見。款款途險。又以竹轎擔去。過同安縣治泉州府興化府。有大虹橋。左右龍舟萬艘。歌吹喧轟。
 
47
방익이 아뢰기를,
 
48
“대만에 머문 지 7일째 되던 날 글을 올리고 돌아갈 것을 청했더니 관에서 옷 한 벌을 내주고 전별연을 열어 송별해 주었는데 손을 꼭 잡고 아쉬워하였습니다. 배로 하문(厦門)에 이르러 자양서원(紫陽書院)에 머물렀는데, 들어가서 주자(朱子)의 상(像)에 절을 하니 유생 수백 명이 와서 보고 다정스레 대해 주었습니다. 험한 길에는 또 죽교(竹轎)를 타고 갔으며 동안현(同安縣)의 치소(治所)와 천주부(泉州府)ㆍ흥화부(興化府)를 지났는데, 대홍교(大虹橋 대형 무지개다리 )가 있어 좌우로 용주(龍舟 용머리로 장식한 경주용 배 ) 만여 척이 줄지어 서 있고 노래와 풍악 소리로 시끌벅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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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습니다.
 
 
50
• 按朱子主同安簿。造高士軒。與諸儒講習其中。今書院或其遺址。又元至正間。邑令孔公俊。建請賜額。大同書院者卽此。大虹橋卽洛陽橋。唐宣宗微行。覽山川之勝。至此歎曰。大類吾家洛陽也。故名洛陽橋。一名萬安橋。江口。又有娘仔橋。甚長。先是。海渡歲溺死者無數。郡守蔡襄。欲壘石爲梁。慮潮浸。不可以人力勝。乃遺海神檄。遣一吏往。吏酣飮。睡於海厓半日。潮落而醒。則文書已易封矣。歸呈襄啓之。唯一醋字。襄悟曰。神其命我以廿一日酉時。興工乎。至期潮果退舍。凡八日夕而工成。費金錢一千四百萬。長三百六十丈。廣丈有五尺。先是。漂還濟人。亦有歷此橋者。或稱橋長十里。或稱五十里。苦無的見。或云長三百六十丈。虹空四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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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주자가 동안현의 주부(主簿)로 있을 때에 고사헌(高士軒)을 지어 여러 유생과 더불어 그곳에서 강습한 일이 있는데 지금의 서원이 서 있는 자리는 아마도 그 옛터인 듯합니다. 또 원(元) 나라 지정(至正) 연간에 고을 수령 공공준(孔公俊)이 서원을 세우고 청하여 대동서원(大同書院)이란 액호를 하사받았는데 바로 이 서원을 가리킵니다. 대홍교는 곧 낙양교(洛陽橋)로서, 당 나라 선종(宣宗)이 미행(微行)을 나와 산천의 승경(勝景)을 구경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경탄하며 하는 말이, “우리 낙양과 너무나 닮았구나.” 했기 때문에 낙양교라 이름한 것이고, 일명(一名) 만안교(萬安橋)라고도 합니다. 또 강어귀에 낭자교(娘仔橋)가 있는데 그 길이가 매우 깁니다. 예전에 바닷나루〔海渡〕에서 해마다 빠져 죽는 자가 수없이 많았기에 군수 채양(蔡襄)이 돌을 포개어서 교량을 만들고자 했는데, 조수가 밀려들어 인력으로는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침내 해신(海神)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지어 한 아전에게 주어 보냈는데 그 아전이 술을 실컷 마시고는 해안에서 반나절 동안이나 잠을 자다가 조수(潮水)가 빠질 때 깨어나 보니 문서는 이미 봉투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돌아와서 바치므로 채양이 열어 보았더니 다만 작(醋) 자 한 자만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채양이 그 뜻을 깨닫고서 “신(神)이 나에게 스무하룻날 유시(酉時)에 공사를 시작하라고 하는구나.”라고 하였는데 그날에 이르자 조수가 과연 물러갔습니다. 그리하여 8일 저녁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는데 소비된 금전이 1400만이요, 길이가 360장(丈)이요, 너비는 1장 5척(尺)입니다. 예전에도 표류하다 돌아온 제주 사람 가운데 이 다리를 지나온 자가 있었는데, 어떤 이는 다리의 길이가 10리라 하고 어떤 이는 50리라 하는 등 안타깝게도 정확하게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기록에는 길이가 360장이고 홍공(虹空)이 47개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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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邦翼奏曰。正月初五日。入福建省。門內有法海寺。大麥已黃。橘柚垂實。衣服飮食。與我國彷彿。來見者兢以蔗糖投之。或留戀不能去。或著我人衣服。而相視流涕。或有抱衣歸。示其家人而還曰。愛玩傳看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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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익이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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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초닷샛날 복건성(福建省)에 들어서니 문안에 법해사(法海寺)라는 절이 있었고 보리는 하마 누렇게 익었으며 귤과 유자(柚子)는 열매가 드리워 있고 의복과 음식이 우리나라와 비슷하였습니다. 우리를 보러 온 사람들이 앞 다투어 사탕수수를 던져 주었으며, 어떤 이는 머뭇거리고 아쉬워하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고 어떤 이는 우리의 의복을 입어 보고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는 옷을 안고 돌아가 가족들에게 보여 주고 돌아와서는 ‘소중하게 감상하면서 가족들과 돌려 보았다’고도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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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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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按漳州。有新羅縣。唐時新羅入貢之地。又云。新羅侵吳越。畫地而居之。則泉漳之間。遺俗之略同於我人。無足恠者。至見衣服而流涕者。可見猶有思漢之心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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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장주(漳州)에는 신라현(新羅縣)이 있는데 당 나라 시대에 신라가 조공을 바칠 때 거쳤던 지역이었습니다. 또 “신라가 오(吳)ㆍ월(越)을 침범하여 그 지역의 일부를 점령하여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주(泉州)와 장주 지역의 유속(遺俗)이 우리와 유사하다는 것은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 의복을 보고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아직도 고국을 그리는 마음이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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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邦翼奏曰。以行李遲滯。又呈書哀乞于巡撫府。有官人某乘雙轎。導黃傘過去。卽遮路陳情。某官。思之良久曰。數日後三十五員官齊會時。更來。依其言往訴。則衆官輪回看畢。告于巡撫府。以巡檢某派定護送。出城西門。行四十里。至黃津橋。登小船。兩日下陸。過西陽嶺寶華寺。至浙江省度仙霞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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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익이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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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차가 지체되어 또다시 글을 올려 순무부(巡撫府)에 애걸하던 차에 관인(官人) 한 사람이 쌍가마를 타고 누런 일산(日傘)을 받치고 지나가기에 바로 나아가 길을 가로막고 진정하였더니, 그 관원이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며칠 후에 서른다섯 명의 관원이 일제히 모일 터이니 그때 다시 오라.’ 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가서 호소하였더니 뭇 관원이 돌려 가면서 보고 나서 순무부에 고하여 순검(巡檢) 한 사람을 임명해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성(城)의 서문(西門)으로 나와 40리를 가서 황진교(黃津橋)에 당도하였고, 작은 배에 올라 이틀 만에 상륙하여 서양령(西陽嶺), 보화사(寶華寺)를 경유하여 절강성(浙江省)에 당도하여 선하령(仙霞嶺)을 넘었습니다.”
 
61
하였습니다.
 
 
62
• 按仙霞嶺。在江山縣。宋史浩帥師過此。以石甃路。凡三百六十級。
 
63
살펴보건대, 선하령은 강산현(江山縣)에 있습니다. 송 나라 사호(史浩)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곳을 지나면서 돌을 쌓아 길을 냈는데 모두 360개의 층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64
• 邦翼奏曰。到江南省江山縣。以舟催行。江上有小船。漁翁載數十靑鳧。放之中流。鳧䘖魚入舟中。
 
65
방익이 아뢰기를,
 
66
“강남성(江南省) 강산현(江山縣)에 당도한 다음 배를 타고 길을 재촉하여 떠났습니다. 강가에 작은 배가 있는데 어옹(漁翁)이 청둥오리〔靑鳧〕 수십 마리를 싣고 가서 물 한가운데에다 풀어놓으니 그 오리가 고기를 물고 배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67
하였습니다.
 
 
68
• 按江山縣。有江郞山故名。船人飼猪。以糓豬味異常。語云性之美者。大荔之羊。江山之豕。又捉魚。靑鳧乃鸕鷀。非鳧也。一名烏鬼。杜甫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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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강산현의 지명은 그곳에 강랑산(江郞山)이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뱃사람이 곡식으로 돼지를 키워 돼지고기 맛이 보통과 다른데, 사람들 말에 이르기를 “희생(犧牲)으로는 대려(大荔)의 염소와 강산의 돼지가 가장 좋다.” 하였습니다. 또 고기를 잡아 오는 청둥오리는 바로 가마우지요, 물오리가 아닙니다. 일명 오귀(烏鬼)라고도 하는데 두보(杜甫)의 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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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家家養烏鬼。頓頓食黃魚者是也。江南畵幅往往有此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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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집마다 오귀를 기르니 / 家家養烏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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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마다 황어를 먹게 된다 / 頓頓食黃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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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강남 지방을 그린 그림 속에 왕왕 이러한 풍경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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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邦翼奏曰。過龍游縣。到嚴州。登子陵臺。臺傍有子陵祠。至杭州府北關大善寺。山川之秀麗。人物之繁庶。樓臺之侈壯。目不暇給。大船縹緲。妓女數輩。遊戱船頭。環珮琅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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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익이 아뢰기를,
 
76
“용유현(龍游縣)을 지나서 엄주(嚴州)에 당도하여 자릉대(子陵臺)에 올라보니 대(臺) 곁에 자릉사(子陵祠)가 있었습니다. 항주부(杭州府) 북관(北關)의 대선사(大善寺)에 이르니 산천의 수려함이라든가 인구의 번성함이라든가 누대의 웅장함이 쉴 새 없이 보아도 다 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큰 배가 출렁이는 물결 위에 떠 있어 여러 명의 기녀들이 뱃머리에서 유희를 하고 있었는데 차고 있는 패옥 소리가 쟁그랑쟁그랑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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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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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按龍邱山。在龍遊縣。九石秀立。狀似芙蓉。漢龍邱萇隱此。與嚴光善。釣臺。卽嚴光隱處也。兩崖峭立。夾黔婺之水。而下桐廬。蜿曲如游龍者七里。水漲則磯激如箭。山腰二巨石對峙突兀。欲傾墜。名以釣臺。天作之矣。好事者亭其上。左垂綸百尺。右留鼎一絲。登臺而俯。深淵水靛如綠玉。山麓萬木參天。下有十九泉。陸羽所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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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용구산(龍邱山)은 용유현에 있는데 아홉 개의 바윗돌이 수려하게 솟아서 형상이 연꽃과 흡사합니다. 한(漢) 나라 용구장(龍邱萇)이 이곳에 은거하였는데 엄광(嚴光)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조대(釣臺)는 바로 엄광이 은거한 곳으로서 두 벼랑이 깎아지른 듯이 서서 검주(黔州)와 무주(婺州)에서 흘러온 물을 끼고 동려(桐廬)현으로 내려가는데 꾸불꾸불 헤엄치는 용의 형세로 7리를 뻗쳐 있습니다. 물이 불어나면 물살이 부딪치는 것이 화살과 같고 산허리에 큰 바윗돌 두 개가 우뚝하니 마주 서서 기울어 떨어질 듯하므로 조대(釣臺)라고 이름한 것이니 이는 천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호사자(好事者)가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왼편에는 백 척(尺)의 낚싯줄을 드리우고 오른편에는 아주 작은 솥 하나를 남겨 두었습니다. 대(臺)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깊은 못은 물빛이 녹옥(綠玉 에메랄드 )처럼 검푸른 빛을 띠고 있고 산기슭에는 온갖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뻗어 있으며 아래에는 십구천(十九泉)이 있는데 육우(陸羽)의 품평을 거친 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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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邦翼奏曰。自杭州六日至蘇州。西有寒山寺。黃瓦四十間也。知縣王公。設饌款待。使之遊賞。舟行十里至姑蘇臺。又三十里有岳陽樓。以銅爲柱。牕戶廳版。皆用琉璃。爲之鑿池於廳底。養五色魚。前望洞庭還。又至虎邱寺。天下第一大寺云。七級浮圖。望見無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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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익이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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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杭州)로부터 엿새 만에 소주(蘇州)에 당도하니 서쪽에 한산사(寒山寺)가 있는데 누런 기와집 40칸이었습니다. 지현(知縣)인 왕공(王公)이 음식을 장만하여 후대하고 저희들에게 유람을 시켜 주었습니다. 배로 10리를 가니 고소대(姑蘇臺)에 당도했고 또 30리를 가니 악양루(岳陽樓)가 나왔는데 구리로 기둥을 세웠고 창문과 대청마루는 다 유리를 써서 만들었으며 대청 밑에다 못을 파고 오색 물고기를 길렀고, 앞으로는 동정호(洞庭湖)가 바라보였습니다. 거기서 돌아와서 또 호구사(虎邱寺)에 당도하니 천하에서 제일 큰 절이라고 하는데 7층의 탑이 바라보니 가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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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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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臣趾源嘗聞中國人稱江山杭州爲勝。繁華蘇州爲勝。又曰。婦人首髻。當以蘇州樣爲善。蓋以蘇州一州賦稅觀之。比他郡常十倍。則蘇州爲天下財賦所出可知矣。寒山寺。以寒山拾得。甞止此故名。東人慣聽張繼詩姑蘇城外寒山寺一句。到處必以此題品。失之摸擬。而至於眞寒山眞姑蘇。則從未有身到此地者。今邦翼乃能振衣閶門。濯纓太湖。而其曰岳陽樓者。殆如說夢。蓋太湖有東洞庭之名。中有包山。又名洞庭山。以此洞庭之名。遂冒岳州。城西門樓之稱。則太逕庭矣。今附太湖諸記。以破耳食之論。○太湖在吳郡之西南。廣三萬六千頃。中有山七十二。襟帶蘇湖常三州。一名具區。一名笠澤。一名五湖。虞仲翔云。太湖東通長洲松江。南通烏程霅溪。西通宜興荊溪。北通晉陵湢湖。東連嘉興韭溪。水凡五道故。謂之五湖。今湖中亦自有五湖。曰菱湖,莫湖,游湖,貢湖,胥湖。莫釐之東周三十餘里曰菱湖。其西北周五十里曰莫湖。長山之東周五十里曰游湖。沿無錫老岸周一百九十里曰貢湖。胥山之西南周六十里曰胥湖。五湖之外。又有三小湖。曰梅梁湖。曰金鼎湖。曰東皐里湖。而吳人稱謂則惟曰太湖云。太湖有七十二峯。其發自天目。迤邐至宜興。入太湖。峙爲諸山。湖之西北爲山十有四。馬跡最大。又東爲山四十有一。西洞庭最大。又東爲山十有七。東洞庭最大。馬跡兩洞庭。望之渺然如世外。卽之。茂林平野閭巷井舍仙宮梵宇。星布碁列。馬跡之北。津里夫椒爲大。夫差敗越處也。西洞庭之東。北渡渚黿山橫山陰山奉餘長沙山爲大。長沙之西。衝山漫山爲大。東洞庭之東武山。北則餘山。西南三山厥山澤山爲大。此其上亦有居人數百家。馬跡之西北。有若積錢者。曰錢堆。稍東曰大屼小屼。與錫山若連而斷。舟行其中。曰獨山。有若二鳧相向者曰東鴨西鴨。中有三峯稍南大墮小墮。與夫椒相對而差小。爲小椒爲杜圻。范蠡所嘗止也。西洞庭之北貢。湖中有兩山相近。曰大貢小貢。有若五星聚。曰五石浮。曰茆浮。曰思夫山。有若兩鳥飛且止者。曰南烏北烏。其西兩山。南北相對而不相見。見卽有風雷之異曰大雷小雷。橫山之東。曰干山紹山。曰疃浮。曰東嶽。西嶽世傳吳王於此。置男女二獄也。其前爲粥山云。吳王飼囚者也。有若琴者曰琴山。若杵曰杵山。曰大竹小竹。與衝山近。若物浮水面可見者曰長浮癩頭浮殿前浮。與黿山相對而差小者爲龜山。有二女娟好相對曰謝姑。有若立柱。嶻㠔玉柱。稍卻金庭。其南爲峐山爲歷耳。中高而旁下者。筆格。驤首若逝者。石蛇。有若老人立者石公。石蛇石公最奇。與黿山龜山南北對面曰鼉山。山旁曰小鼉山。若蠃者靑浮二鼉之間。若隱若見曰驚藍。東洞庭之南。首銳而末歧者曰箭浮。若屋攲者曰王舍浮苧浮。又南爲白浮澤厥之間。有若笠浮水面者。曰蒻帽。有逸於前後追而及之者。曰猫鼠。有若碑碣橫者。曰石碑。是爲七十二。然其最大而名者兩洞庭也。漢書云。下有洞穴。潛行水底。無所不通。號爲地脈道。書以爲第九洞天。○虎邱山一名海湧峯。中多小溪曲。磵夾其間如抱月。然其最幽麗者。莫善和靖祠墟。靑攢白外與天接。其上有浮圖。下瞰姑蘇。可一掌轉浮圖而南。世傳生公講堂。悟石軒在焉。軒側有劒池。兩厓峭壁如剖。側立數千尺。水淸寒。㶁㶁鳴下。有巨石。環敞磅礴。可坐千人。中有白蓮池。白蓮挺挺。華若丹碧。又稍下小石路迤邐其間。泉益奇。石益恠。俄斗絶突起。松篁豁然。卽和靖讀書處也。吳王闔閭葬所。中多金鳧玉雁銅駝水精碧海丹砂諸物。嘗有白虎盤踞其巓故名。晉司徒王珣及弟珉。俱宅於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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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지원이 일찍이 듣건대, 중국 사람들은 강산이 아름답기로는 항주가 제일이요, 번화하기로는 소주가 제일이라 하였고, 또 여자의 머리 모양새는 소주에서 유행하는 모양을 제일로 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소주는 한 주(州)의 부세(賦稅)만 보더라도 다른 고을에 비하여 항상 10배가 더하니, 천하의 재물과 부세가 소주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산사(寒山寺)는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 일찍이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장계(張繼)의 시(詩) 중에 ‘고소성 밖의 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라는 시구를 익히 들어 왔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반드시 이로써 품평을 하는데 이것은 모방이 지나친 것으로, 진짜 한산사나 진짜 고소대로 말하자면 종래로 이곳에 몸소 갔다 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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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방익이 창문(閶門)에서 옷을 털고 태호(太湖)에서 갓끈을 씻을 수는 있으나, 그가 악양루(岳陽樓)를 보았다고 말한 것은 사뭇 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대개 태호는 동동정(東洞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고 태호 속에는 포산(包山)이 있어 이를 또 동정산(洞庭山)이라 불렀습니다. 이 동정(洞庭)이라는 이름 때문에 마침내 악주성(岳州城) 서문루(西門樓 악양루 )의 이름까지 함부로 들먹였으니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태호와 관련된 여러 기록들을 부기(附記)하여 근거 없이 하는 이야기를 논파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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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호는 오군(吳郡)의 서남쪽에 있는데 넓이가 3만 6000경(頃)이며 그 안에는 72개의 산이 있고 소주(蘇州), 호주(湖州), 상주(常州)를 접하고 있습니다. 일명은 구구(具區)이며 일명은 입택(笠澤), 일명은 오호(五湖)입니다. 우중상(虞仲翔)이 말하기를, “태호는 동으로 장주(長洲)의 송강(松江)과 통하고, 남으로 오정(烏程)의 삽계(霅溪)와 통하고, 서로 의흥(宜興)의 형계(荊溪)와 통하고, 북으로 진릉(晉陵)의 격호(滆湖)와 통하고, 동으로 가흥(嘉興)의 구계(韭溪)와 이어진다. 물이 무릇 다섯 길로 흐르기 때문에 오호라 이른다.” 하였습니다. 지금 호수 속에 또한 다섯 개의 호수가 있는데 즉 능호(菱湖), 막호(莫湖), 유호(游湖), 공호(貢湖), 서호(胥湖)입니다. 막리산(莫釐山)의 동에 30여 리를 두른 것은 능호요, 그 서북으로 50리를 두른 것은 막호요, 장산(長山)의 동으로 50리를 두른 것은 유호요, 무석(無錫)과 노안(老岸)을 따라 내려가서 190리를 두른 것은 공호요, 서산(胥山)의 서남쪽 60리를 두른 것은 서호입니다. 오호 이외에 또 세 개의 작은 호수, 즉 매량호(梅梁湖), 금정호(金鼎湖), 동고리호(東皐里湖)가 있는데 오인(吳人 강남 지방 사람 )들은 이들을 일컬을 때 오직 태호라고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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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에는 봉우리가 72개가 있는데 그 시발(始發)은 천목산(天目山)으로부터 뻗어 와서 의흥(宜興)에까지 이르고 태호에 들어 우뚝 솟아 여러 산이 되었습니다. 태호의 서북쪽에 있는 산은 14개인데 그중에 마적산(馬跡山)이 가장 크며, 또 서쪽에 있는 산은 41개인데 서동정산(西洞庭山)이 가장 크고, 또 동쪽에 있는 산은 17개인데 동동정산(東洞庭山)이 가장 큽니다. 마적산과 두 동정산을 멀리서 바라보면 아득하여 속세를 벗어난 듯한데, 가까이 나아가 보면 무성한 숲과 넓은 들, 여항(閭巷)과 정사(井舍), 선궁(仙宮 도관(道觀) )과 범우(梵宇 )들이 별이나 바둑알처럼 널려 있습니다. 마적산의 북쪽에는 진리산(津里山)과 부초산(夫椒山)이 큰 산인데 부초산은 부차(夫差)가 월 나라를 무너뜨린 곳입니다. 서동정산의 동북쪽에는 도저산(渡渚山), 원산(黿山), 횡산(橫山), 음산(陰山), 봉여산(奉餘山), 장사산(長沙山)이 큰 산이며, 장사산의 서쪽에는 충산(衝山), 만산(漫山)이 큰 산입니다. 동동정산의 동쪽에는 무산(武山)이 있고, 북쪽에는 여산(餘山)이 있으며, 서남쪽에는 삼산(三山), 궐산(厥山), 택산(澤山)이 큰 산입니다. 이들 산 위에도 사람들이 수백 가호가 살고 있습니다. 마적산의 서북쪽에는 마치 돈을 쌓아 놓은 듯한 산이 있는데 이름은 전퇴산(錢堆山)이라 합니다. 조금 동으로 가면 대올산(大屼山)과 소올산(小屼山)이 있으며, 석산(錫山)과 더불어 이어진 것 같으면서도 끊어져서 배가 그 사이로 다니는데 이를 독산(獨山)이라 하며, 물오리 두 마리가 서로 향하고 있는 것 같은 것이 있는데 이는 동압산(東鴨山)과 서압산(西鴨山)이며 그 가운데 삼봉산(三峯山)이 있습니다. 조금 남으로 나가면 대타산(大墮山)과 소타산(小墮山)이 있고 부초산과 더불어 마주 대하면서 조금 작은 산이 있는데 이것을 소초산(小椒山), 두기산(杜圻山)이라 합니다. 두기산은 범려(范蠡)가 일찍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서동정산의 북쪽 공호(貢湖) 가운데 두 개의 산이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데 대공산(大貢山), 소공산(小貢山)이라 이르며, 오성(五星)이 모인 것 같은 산이 있는데, 이는 오석부산(五石浮山)이라 합니다. 또 묘부산(茆浮山)과 사부산(思夫山)이 있으며, 마치 두 새가 날려다가 그친 것 같은 산이 있는데 이는 남오산(南烏山), 북오산(北烏山)입니다. 그 서쪽으로 두 산이 남북으로 마주했으나 서로 보이지 아니하며, 보이면 바로 바람 불든가 번개 치든가 하는 이상(異常) 현상이 있으니 이는 대뢰산(大雷山), 소뢰산(小雷山)입니다. 횡산의 동쪽에는 천산(千山)과 소산(紹山)이 있고 탄부산(疃浮山)이 있으며 또 동옥산(東獄山)과 서옥산(西獄山)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오 나라 왕이 이곳에다 남녀의 감옥을 각각 설치했다 합니다. 그 앞은 죽산(粥山)이라 하는데 오왕(吳王)이 죄수를 먹이던 곳이라 합니다. 거문고 같은 모양의 산이 있는데 이는 금산(琴山)이요, 방앗공이 같은 모양의 산이 있는데 이는 저산(杵山)이며, 대죽산(大竹山)과 소죽산(小竹山)은 충산(衝山)에 가까이 있습니다. 마치 물건이 수면에 뜬 것 같아서 볼 만한 것이 있는데 이는 장부산(長浮山), 나두부산(癩頭浮山), 전전부산(殿前浮山)이며, 원산(黿山)과 더불어 마주 대하여 조금 작은 것은 구산(龜山)이라 하며, 두 여자가 곱게 단장하고 서로 대한 것 같은 것은 사고산(謝姑山)입니다. 깎아지른 듯한 산머리에 기둥을 세운 것 같은 것이 있는데 옥주산(玉柱山)이요, 조금 물러서서 금정산(金庭山)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해산(峐山)이 있고 역이산(歷耳山)이 있으며, 가운데는 높고 옆이 낮은 산은 필격산(筆格山)이요, 머리를 쳐들고 달리는 것 같은 산은 석사산(石蛇山)이요, 노인이 섰는 것 같은 산은 석공산(石公山)인데 석사산과 석공산이 가장 기이합니다. 원산ㆍ구산과 더불어 남북으로 대면한 산은 타산(鼉山)이며 그 산 옆에는 소타산(小鼉山)이 있습니다. 소라 같은 모양의 산은 청부산(靑浮山)이며, 타산과 소타산 사이에 보일락 말락 한 산이 있는데 이것은 경람산(驚藍山)입니다. 동동정산의 남쪽으로 산머리가 뾰족하고 산자락이 갈라진 산은 전부산(箭浮山)이며, 집이 마치 틀어진 것 같이 생긴 것은 왕사부산(王舍浮山), 저부산(苧浮山)이요, 또 남으로 나가면 백부산(白浮山)이 되었으며, 택산(澤山)과 궐산(厥山)의 사이에 삿갓이 수면에 떠 있는 모습의 산이 있는데 이것은 약모산(蒻帽山)이요, 앞에서 도망가고 뒤에서 쫓아가서 잡은 모습의 산이 있는데 이는 묘서산(猫鼠山)이요, 마치 비석이 드러누워 있는 것 같은 산이 있는데 이는 석비산(石碑山)입니다. 이상은 태호 속에 있는 일흔두 봉을 열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크고 이름난 것은 두 동정산입니다.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그 아래에 동굴이 있어 물밑으로 잠행(潛行)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지맥(地脈)이라 부른다.” 하였고, 도가서(道家書)에는 이것을 제구동천(第九洞天)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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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구산(虎邱山)은 일명 해용봉(海湧峯)으로 불리는데 그 안에 작은 시내가 많고 굽이쳐 흐르는 물이 그 사이로 끼고 돌아 마치 달을 안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 가장 깊고도 아름다운 곳으로는 화정사(和靖祠) 터가 제일인데 푸른빛이 흰빛 너머로 찌를 듯이 비치어 하늘과 더불어 서로 닿아 있으며 그 위에는 탑이 있어 그곳에서 고소대(姑蘇臺)를 내려다보면 손바닥만 하게 보입니다. 탑을 돌아 남쪽으로 가면, 대대로 전하기를 생공강당(生公講堂)과 오석헌(悟石軒)이 그곳에 있다고 하며, 오석헌 곁에는 검지(劒池)가 있는데 칼로 잘라 놓은 듯이 양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수천 척 높이로 곁에 서 있으며 맑고 차가운 물이 콸콸 소리 내며 흐르는데 그 아래에 사방이 트이고 한없이 넓은 거석(巨石)이 있어 그 위에 천 명이 앉을 만하고, 가운데에는 백련지(白蓮池)가 있는데 백련이 쭉쭉 솟아나 있고 꽃은 단청(丹靑)처럼 울긋불긋 피어 있습니다. 또 조금 내려가면 조그마한 돌길이 그 사이에 구불구불 뻗어 있는데 샘이 더욱 희한하고 돌은 더욱 기이하며, 홀연 높이 우뚝 솟아올라 소나무와 대나무가 넓게 자라나 있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화정(和靖)이 글 읽던 곳이었습니다. 호구산은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장지(葬地)여서 그 속에는 금부(金鳧)ㆍ옥안(玉雁)ㆍ동타(銅駝)ㆍ수정(水精)ㆍ벽해(碧海)ㆍ단사(丹砂) 등 여러 물건이 많았으며, 일찍이 백호(白虎)가 산마루에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진(晉) 나라의 사도(司徒) 왕순(王珣)과 그 아우 민(珉)이 함께 여기에서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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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邦翼奏曰。金山寺以五色彩瓦盖覆。寺前石假山高可百丈。又砌石周五里環。建二層閣。下層則儒生數千居住。鬻書爲業。上層歌吹薰天。漁釣之人。携竿列坐。石假山上。橫十字銅柱。以石版造廳。卽法堂也。又有鍾磬十四。木人應時自擊。一鍾先鳴。衆鍾次第皆鳴。
 
91
방익이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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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金山寺)는 오색의 채와(彩瓦)로써 지붕을 덮었으며 절 앞에는 석가산(石假山 인공으로 만든 돌산 )이 있는데 높이가 백 길은 됨 직하고 또 섬돌을 5리나 빙 둘렀으며 이층의 누각을 세웠는데 아래층은 유생(儒生) 수천 명이 거주하면서 책을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고 위층에는 노랫소리 피리 소리가 하늘을 뒤덮었으며 낚시하는 사람들이 낚싯대를 잡고 열을 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석가산 위에는 십자형(十字形)의 구리기둥이 가로놓이고 석판(石版)으로써 대청을 만들었으니 바로 법당(法堂)이었으며, 또 종경(鐘磬) 14개가 있는데 목인(木人 나무 인형 )이 때에 맞추어 저절로 치게 되어 있어 종 하나가 먼저 울면 뭇 종이 차례로 다 울게 되어 있습니다.”
 
93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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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按金山在楊子江心。其勝槩爲天下第一。山下有石。並峙其前。類雙闕然。傳爲郭璞葬處。泉曰中冷。味極甘冽。陸氏水品以爲東南第一。寺曰龍游。閣曰毘羅。毘羅之南。爲妙高臺。上故有楞伽室。宋眉山蘇公甞書經於此。北曰善財樓大悲閣。呑海留雲二亭。據山之巓。登而四望。江波渺然。臺殿皆在其下。令人神爽飛越。東坡詩金山棲閣何耽耽。撞鍾伐皷聞淮南者是也。亭南石刻妙高臺。又玉鑑堂六大字。稍下有塔基二。南北相向。蓋宋曾丞相布所建。燬於火。經觀瀾亭循石級西下。歲久石多斷裂。俯視江波。如行天上。足甚危慓。巖曰祖師中肖唐裴頭陀像。卽開山得金。山因以名者也。巖之右有洞。深黑不可入。有龍池。旱歲禱之。可致雲雨。左有龍王祠。著祀典。又有江山一覽。烟雲奇觀。二亭尤爲奇絶。邦翼所云二層閣。卽江天閣。釋惠凱,馮夢楨,吳廷簡諸記。可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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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금산(金山)은 양자강 한가운데에 있는데 그 빼어난 경치가 천하의 제일이라 합니다. 산아래에는 돌들이 그 앞에 나란히 솟아 쌍궐(雙闕)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곽박(郭璞)을 장사 지낸 곳이라 전해집니다. 그곳에 있는 샘을 중냉천(中冷泉)이라 하는데 맛이 극히 달고 차서 육씨(陸氏)의 수품(水品)에는 이 샘을 동남 지방의 제일로 삼았습니다. 절로는 용유사(龍游寺)가 있고 누각으로는 비라각(毘羅閣)이 있습니다. 비라각의 남쪽은 묘고대(妙高臺)라 하는데 대(臺) 위에는 예전에 능가실(楞伽室)이 있어 송 나라 미산(眉山) 소공(蘇公)이 일찍이 여기서 불경을 베껴 썼다 합니다. 북쪽은 선재루(善財樓)와 대비각(大悲閣)이 있으며, 탄해정(呑海亭)ㆍ유운정(留雲亭) 두 정자가 산마루를 웅거하여 있고 그 두 정자를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강 물결이 아득하여 대(臺)와 전(殿)이 모두 그 아래에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날아갈 듯 정신이 상쾌해지게 만든다고 합니다. 동파(東坡)의 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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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의 누각은 어찌 그리 심원한가 / 金山樓閣何耽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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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북소리가 회남까지 들려오네 / 撞鍾伐鼓聞淮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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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은 이를 묘사한 것입니다. 정자 남쪽에는 돌에 묘고대(妙高臺)와 옥감당(玉鑑堂)이라는 여섯 자의 큰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조금 내려가면 탑의 기단(基壇)이 둘이 있는데 남북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송 나라 승상 증포(曾布)가 건립한 것인 듯한데, 불에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관란정(觀瀾亭)을 경유하여 돌계단을 타고 서쪽으로 내려가면, 세월이 오래되어 계단의 돌이 많이 끊어지고 짜개졌으며, 강물결을 굽어보면 하늘 위를 다니는 것 같아서 발이 몹시 부들부들 떨린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조사암(祖師巖)이라는 바위가 있어, 가운데 부분이 당 나라 배두타(裴頭陀)의 형상과 닮았는데, 배두타가 산을 개간하다가 금을 얻었으므로 이 산의 이름을 금산(金山)이라 부른 것입니다. 바위의 바른편에는 동굴이 있어 깊고 캄캄하여 들어갈 수가 없으며, 용지(龍池)가 있어 가문 해에 기도를 드리면 비구름을 일으킬 수 있다 합니다. 왼편에는 용왕사(龍王祠)가 있는데 사전(祠典)에 나타나 있습니다. 또 강산일람정(江山一覽亭)과 연운기관정(烟雲奇觀亭)이라는 두 정자가 있는데 더욱 기이하고 빼어나다 합니다. 방익이 말한 이층의 누각은 바로 강천각(江天閣)으로서, 중 혜개(惠凱), 풍몽정(馮夢楨), 오정간(吳廷簡) 등 여러 사람의 기(記)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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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邦翼奏曰。山東省以後。下舟登車。土俗鄙野。人民儉嗇。蓬門蓽戶。食惟黍稷。槩所不錄。邦翼年四十一。登甲辰武科。拜守門將。陞武兼宣傳官。以試射居首。特陞資。邦翼之召見也。以壯遊勞苦。特除全羅道中軍。以榮其歸。在昔 宣廟朝。有武人魯認者。被俘於倭。逃至婺州。廩食于考亭書院。還自鴨綠閩中諸名士別詩。至今藏于其家。魯認之後。遠遊者當以邦翼爲首。先是入燕京者。聞有水賊。梗南海商旅阻隔云。今邦翼貫穿萬里未之或聞。則宇內之昇平可見矣。邦翼所記程途。與周行備覽等書。沕合不差。故附錄焉。
 
100
방익이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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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성(山東省) 이후로는 배에서 내려 수레를 탔는데 풍속이 비루하고 인민이 검소하여 가시싸리문에 먹는 것이라고는 기장과 서숙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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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일체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103
방익은 나이 41세로, 갑진년(1784)에 무과에 올라 수문장(守門將)에 제수되고, 승진하여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이 되었는데, 활쏘기 시합에 으뜸을 차지하여 특별히 자급(資級)을 올린 것입니다. 상께서 방익을 불러 보고는 장유(壯游)로 고생했다고 하여 특별히 전라도 중군(全羅道中軍)을 제수하여 그의 귀환을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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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宣祖) 치세에 무인(武人)인 노인(魯認)이라는 자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쳐서 무주(婺州)에 이르러 고정서원(考亭書院)에서 늠생(廩生)으로 지내다가 압록강(鴨綠江)을 통해 돌아왔는데, 민중(閩中 복건성 ) 지방의 여러 명사(名士)들로부터 받은 송별시가 지금까지 그 집에 수장되어 있습니다. 노인 이후로 국외에 멀리 나간 자로는 방익을 처음으로 꼽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앞서 연경(燕京)에 들어간 자가 들은 바로는 해적이 중국의 남해를 가로막고 있어 상려(商旅)가 통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방익이 만리 길을 뚫고 지나왔으나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조금도 듣지 못했으니 온 누리가 태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방익이 기록한 도정(途程)은 《주행비람(周行備覽)》 등의 책들과 꼭 들어맞아 어긋나지 않으므로 이에 부록(附錄)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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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澎湖臺灣府。廈門。同安縣。泉州府。興化府。福淸。福寧。福建省城。法海寺。黃津橋。閩淸縣。黃田驛。淸風館。 金沙馹。南平縣。大王館。太平馹。建寧府。藥坊館。建陽縣。仁化館。西陽嶺。萬壽橋。寶華寺。浦城縣。浙江省。 仙霞嶺。峽口站。江南省。衢州府。江山縣。齊河館。西安縣。浮江山。龍游縣。嚴州府。建德縣。子陵釣臺。銅爐縣。富陽縣。杭州府。北關大善寺。石門縣。嘉興府。蘇州府。寒山寺。姑蘇臺。虎邱寺。東洞庭。常州府。無錫縣。 長州府。丹陽縣。近江府。瓜州府。楊州府。江都縣。金山寺。下信縣。高郵縣。高郵寺。懷府。懷縣。淸江阜。王家營。寶應縣。山陽縣。淸湖縣。桃源縣。桃源驛。山東省。 剡城縣。李家庄。蘭山縣。半城館。徐公店。杜庄店。蒙陰縣。新泰縣。楊柳店。太安府。長城館。齊河縣。禹城縣。 德州府。景州府。河閒縣。涿州府。娘娜縣。北京。澎湖至臺灣。水路二日。臺灣至廈門。水路十日。廈門至福建省城一千六百里。福州至燕京。六千八百里。燕京至我境義州。二千七十里。義州至王京。一千三十里。王京至康津。九百里。耽羅北抵康津南距臺灣。水路不論。合一萬二千四百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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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호(澎湖) → 대만부(臺灣府) → 하문(厦門) → 동안현(同安縣) → 천주부(泉州府) → 흥화부(興化府) → 복청(福淸) → 복녕(福寧) → 복건성성(福建省城) 법해사(法海寺) → 황진교(黃津橋) → 민청현(閩淸縣) 황전역(黃田驛) → 청풍관(淸風館) → 금사일(金沙馹) → 남평현(南平縣) 대왕관(大王館) → 태평일(太平馹) → 건녕부(建寧府) 섭방관(葉坊館) → 건양현(建陽縣) 인화관(仁化館) → 서양령(西陽嶺) → 만수교(萬壽橋) → 보화사(寶華寺) → 포성현(浦城縣) → 절강성(浙江省) 선하령(仙霞嶺) → 협구참(峽口站) → 절강성(浙江省) 구주부(衢州府) 강산현(江山縣) 제하관(齊河館) → 서안현(西安縣) 부강산(浮江山) → 용유현(龍游縣) → 엄주부(嚴州府) 건덕현(建德縣) → 자릉조대(子陵釣臺) → 동려현(桐廬縣) → 부양현(富陽縣) → 항주부(杭州府) 북관(北關) 대선사(大善寺) → 석문현(石門縣) → 가흥부(嘉興府) → 소주부(蘇州府) 한산사(寒山寺) → 고소대(姑蘇臺) → 호구사(虎邱寺) → 동동정(東洞庭) → 상주부(常州府) 무석현(無錫縣) → 장주(長洲) → 단양현(丹陽縣) → 근강부(近江府) → 과주(瓜洲) → 양주부(楊州府) 강도현(江都縣) → 금산사(金山寺) → 하신현(下信縣) → 고우현(高郵縣) 고우사(高郵寺) → 회부(懷府) 회현(懷縣) → 청강부(淸江阜) → 왕가영(王家營) → 보응현(寶應縣) → 산양현(山陽縣) → 청호현(淸湖縣) → 도원현(桃源縣) 도원역(桃源驛) → 산동성(山東省) 담성현(郯城縣) → 이가장(李家庄) → 난산현(蘭山縣) 반성관(半城館) → 서공점(徐公店) → 두장점(杜庄店) → 몽음현(蒙陰縣) → 신태현(新泰縣) 양류점(楊柳店) → 태안부(太安府) 장성관(長城館) → 제하현(齊河縣) → 우성현(禹城縣) → 덕주(德州) → 경주(景州) → 하간현(河閒縣) → 탁주(𣵠州) → 낭야현(娘縣) → 북경(北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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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호에서 대만까지는 수로(水路)로 2일이요, 대만에서 하문(厦門)까지는 수로로 10일이며, 하문에서 복건성성(福建省城)까지는 1600리요, 복주(福州)에서 연경(燕京)까지는 6800리이고, 연경에서 우리 국경 의주(義州)까지는 2070리이며, 의주에서 서울까지는 1030리이고, 서울에서 강진(康津)까지는 900리입니다. 탐라에서 북으로 강진까지와 남으로 대만까지의 수로는 계산에 넣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합 1만 2400리의 여정이 됩니다.
【원문】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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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원(朴趾源) [저자]
 
  연암집(燕巖集) [출처]
 
  1796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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