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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演劇)의 무대기술(舞臺技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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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7
함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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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劇[연극]의 舞臺技術[무대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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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地演劇[내지연극]이라 해도 朝鮮演劇[조선연극]같이 성격이나 스타일이나 기술에 있어서 藝術面[예술면]을 구별할 아무것도 못 가진 類型的[유형적]인 것이 아니고 歌舞伎[가무기], 新派[신파], 新劇[신극]을 위시하야 新大衆演劇[신대중연극], 中間演劇[중간연극], ロツパ, 曾我迺屋劇[증아내옥극] 등 확실히 個性[개성]과 傳統[전통]을 달리한 연극 형태의 總和[총화]로 돼 있으므로 劇團[극단] 劇團[극단]에 따라 舞臺的[무대적] 技術[기술]도 판이하다. 화려한 色彩[색채]와 絢爛[현란]한 旋律[선율]과 樣式[양식]과 線[선]에서 출발한 歌舞伎[가무기]는 거기에 即應[즉응]한 기술이 있고 小劇場[소극장]을 기초로 한 新劇[신극]에는 簡潔[간결]과 省略[생략]과 暗示[암시]에 기술이 있다. 또 한 가지 前言[전언]할 것은 舞臺機構[무대기구]와 裝置[장치]에 있어서도 松竹系劇場[송죽계극장]과 築地小劇場[축지소극장]의 大道具[대도구]가 15代[대]를 계승해 나온 長谷川勘兵衛[장곡천감병위]의 直系[직계] 혹은 제자인 데 대하야 東寳系[동보계]의 극장은 東寳舞臺課[동보무대과]에서 양성한 혹은 ○家[가]에서 轉出[전출]한 新人[신인]들이며, 松竹系劇場[송죽계극장]이 シギ를 사용하고 장치가 입체적인 데 비하야 후자는 歐米式[구미식]으로 핀을 사용하고 주로 張物[장물] 切出萬能[절출만능]의 평면적인 것이라는, 內地[내지]에도 그 기술의 판이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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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어데까지든지 이것은 극히 稍末的[초말적]인 기술문제요 연극이 가진바 그 기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그러므로 玆[자]에는 대외적으로 그 秀逸[수일]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을 記[기]하겠다. 실로 內地演劇[내지연극]이 가진 유일, 독특한 것이며 纏綿[전면] 幾千年[기천년]에 이르는 서양연극사에도 볼 수 없는 것에 花道[화도](ハナミチ)가 있다. 그 기원은 能舞臺[능무대]의 舞臺[무대]와 樂屋[낙옥]을 連[연]하는 통로에서 변천했다는 說[설]과 관객이 자기들 支持[지지] 役者[역자]에게 꽃을 보내기 위하야 꽃가지에 目錄[목록]을 붙여가지고 단기던 통로로 처음에는 臨時的[임시적]으로 假設[가설]했던 것이 후에 劇場構造[극장구조]의 변천에 따라 기본적 機構[기구]로 됐다는 兩說[양설]이 있으나 후자가 事實[사실]인 듯하다 한다. 世界[세계]의 劇場史[극장사]가 다 그러한 거와 같이 內地[내지]의 극장도 최초는 舞臺[무대] 三方[삼방]이 客席[객석]에 圍繞[위요]돼 있는 소위 演壇式[연단식]에서 점차로 현재의 額椽式[액연식]으로 進化[진화]해왔으나 內地[내지]의 극장이 절대적인 額椽式舞臺[액연식무대]로 될 수 없는 것은 이 花道[화도]의 존재 때문이며, 花道[화도]를 철거하고 內地演劇[내지연극]의 演出[연출]을 想像[상상]할 수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歐米舞臺[구미무대]와 日本舞臺[일본무대]를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것도 이 花道[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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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道[화도]가 극장의 기본구조로서 최초로 나타는 것은 寬文[관문] 8年[년] 江戶[강호]의 河原崎座[하원기좌]의 新築[신축]에 설치된 것을 시초로 한다. 花道[화도]의 기능은 額椽[액연] 속에 갇히어 있는 배우와 관객의 무한한 親炙[친자]의 다리가 되는 것이 第一目的[제일목적]이며 장소적으로는 무대의 延長[연장]이 되고 시간적으로는 劇[극]의 前篇[전편] 혹은 後篇[후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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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사베스’朝[조]의 ‘쉑스피어’劇[극]이, ‘코매듸·후랑쎄-스’의 모리엘’劇[극]이 俳優[배우]와 民衆[민중]의 특수한 親炙[친자] 관계 속에 성장 발전한 것과 같이 內地[내지] 演劇[연극] 역시 德川幕府[덕천막부]의 町人[정인]들이 봉건적 경제 제도의 붕괴로 말미암아 生長[생장]한 것은 누구나 다 熟知[숙지]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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往昔[왕석]의 배우는 일종의 藝者[예자]로서 酒席[주석]에 나가 奉侍[봉시]한 習慣[습관]은 明治頃[명치경]까지 존속했었다. 役者[역자]의 人氣[인기]는 모-든 通俗的[통속적] 流行[유행]을 지배하야 食料品[식료품], 衣裳[의상], 세간살이로부터 浮世繪書物[부세회서물]까지 그들의 취향이 침투했었다. 이만큼 친밀했던 배우와 관객이 극장 속에 있어 한 쪽은 푸로세니암 아-치 속에 演劇[연극]하고 한 쪽은 그 밖에서 眺望[조망]함을 만족할 리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 前記[전기] 私生活的[사생활적] 親炙[친자]의 延長[연장]으로 객석과 무대를 連[연]하야 한 가지로 喜怒哀樂[희로애락]의 감정에 싸일려는 藝術的[예술적] 親炙欲求[친자욕구]가 생기고 그것의 구체적 표현으로 이 花道[화도]가 연극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했다. 현재 國民演劇[국민연극] 理論家[이론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作者[작자]와 俳優[배우]와 觀客[관객]의 一致[일치]는 실로 이 花道[화도]의 驅使[구사]로 인하야 효력을 낼 것이라 생각한다. 배우는 客席[객석]의 복판에 들어가서 산 彫刻[조각]을 그들의 咫尺[지척]에 玩賞[완상]케 하고 극장의 분위기는 演者[연자], 觀者[관자]의 장벽을 철폐하야 이 속에 釀成[양성]되는 歌舞伎[가무기] 獨特[독특]의 夢幻混淆[몽환혼효]의 세계를 전개한다. 延寳[연보] 4年[년] 市村竹之函[시촌죽지함]은 千秋樂[천추락] 날 花道[화도]에서 剃髮[체발]하고 관객과 눈물로 헤어져 入山[입산]했고 市川市藏[시천시장]가 天竺德兵衛[천축덕병위]의 親父殺害[친부살해]하는 一場面[일장면]에는 선량한 시골무사가 “이 불효한 놈”하고 花道[화도]로 뛰어 올라와 그를 죽인다는 대소동이 있었다 한다. 이것들은 이 花道[화도]가 얼마나 관객과 배우의 감정·생활·사상을 相通[상통]하고 있었다는 것을 代言[대언]하는 例[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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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花道[화도]가 戯曲[희곡]의 前篇[전편] 혹은 後篇[후편]의 演出場[연출장]으로서 시간적 역할을 하는 것도 그 중요한 기능의 한 가지다. 희곡의 序曲[서곡]으로서의 예를 들면 親母[친모]를 찾아 諸國[제국]을 遍歷[편력]하는 어린 巡禮[순례]가 花道[화도]에 나타나면 무대에는 悲劇[비극]이 전개될 것을 관객은 예측케 되고(近松[근송]의 凈瑠璃[정유리]), 眞山靑果[진산청과]의 〈將軍江戶[장군강호]を去[거]る〉에 慶喜[경희]가 花道[화도]에 나타나면 그를 展送[전송]하는 江戶市民[강호시민]들의 울음이 터지기 시작한다. 歌舞伎[가무기], 歷史劇[역사극], 新派[신파]를 막론하고 四十七士[사십칠사] 吉良家邸[길량가저] 侵入[침입], 七卿落[칠경락], 大名行列[대명항렬], 籠かぎ, 情死[정사]할려는 남녀의 登場[등장], 飛脚[비각], 自轉車[자전거]를 탄 村長[촌장]의 戶戶訪問[호호방문] 등 그 효과는 무한하다. 특히 序曲[서곡]보다 幕切[막절]의 희곡이 비극적 연출을 요구할 때의 花道[화도]가 주는 여운은 內地演劇[내지연극]의 血脈[혈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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啄木[탁목]이 자기반 아해들에게 가르친 노래를 離別曲[이별곡]으로 澁民村[삽민촌]을 쫓겨갈 때의 幕切[막절]같은 것은 花道[화도] 이용으로 그 여운과 인상을 폐막 후까지 길이 주게 한다. 春香傳[춘향전], 沈淸傳[심청전] 등을 花道[화도] 사용코 연출할 때 생각해보라. 그 작품이 가진바 相逢[상봉], 別離[별리] 등이 얼마나 입체적으로 살 것인가. 심봉사가 乞人[걸인] 잔채를 찾아 나타날 때 樓閣[누각]에서 父[부]를 발견하는 심청이나, 商賈[상고]에 팔려가는 심청을 싸리문 밖에서 보내는 父[부]나, 房子[방자]가 편지를 들고 서울을 찾아 쩔래 쩔래 花道[화도]에 나타날 때(劇藝術硏究會[극예술연구회]에서 柳致眞[유치진] 氏[씨] 演出[연출]하고 假花道[가화도]를 썼다) 等[등] 우리 唱劇[창극]이 극장과 화도를 가지고 성장했다면? 을 공상해보는 것은 나의 愚[우]일까. 上手[상수]에 필요상 임시로 假設[가설]하는 花道[화도]를 假花道[가화도]라 한다. 花道[화도]가 舞臺[무대]의 延長[연장] 혹은 일부로 사용할 때는 勸進帳[권진장]에는 關門[관문]다리(忠臣藏[충신장]), 시내(鯉[리]つり)도 되고 柴木戶[시목호]를 세워놓고 문 밖 街道[가도]로도 쓴다. 本花道[본화도]를 河川[하천]으로 보고 假花道[가화도]를 岸壁[안벽]으로 본 野崎[야기]의 幕切[막절], 兩花道[양화도]를 兩岸[양안]으로 본 妹背山[매배산]의 山場面[산장면], 인물이 假花道[가화도]에서 등장하야 舞臺前端[무대전단]을 지나 本花道[본화도]로 나갈 때 무대배경이 바뀌어 東海道[동해도] 53次[차]를 전개하는 등은 희랍부터 印度[인도], 支那[지나], 日本[일본]까지의 古今東西[고금동서]의 연극을 知悉[지실]하고 무대에서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을 다한 ‘막스·라인할트’도 손을 대지 못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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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西洋[서양]에도 모리엘의 〈마-라드·이매지낼〉, 아택산드·듀-마의 〈키-ㄴ〉等[등] 배우가 객석을 통행한 예는 있으나 花道[화도]를 사용한 예는 絶無[절무]하다. 라인할트가 후리-드릿히·후레그사의 無言劇[무언극] 〈스무루-〉에 日本[일본]의 花道[화도]를 비로소 사용했으나 사용법에 있어 無知[무지]하야 효과를 조곰도 내지 못했다 한다. 나는 英國[영국]의 劇評家[극평가] 쿠래맨트·스콧트의 團十郎觀劇記[단십랑관극기], 伯林博物館長[백림박물관장] 쿠르트·구라사아의 〈沼津[소진]の平作[평작]〉觀劇記[관극기], 英國[영국] 劇評家[극평가] 알벨 메-본의 日本劇壇記[일본극단기] 등을 이 稿[고]를 抄[초]하는 참고로 뒤져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경이와 선망으로 花道[화도]의 讃嘆[찬탄]을 아끼지 않은 것을 알았다. 小山內薰[소산내훈]은 “우리들은 우리가 가진 유일의 자랑인 花道[화도]를 一層[일층] 有效[유효]하게, 一層[일층] 藝術的[예술적]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廻轉舞臺[회전무대]를 그만큼 이용한 라인할트가 만일 日本[일본]의 花道[화도]의 진실한 사용법을 알면 이 앞으로 또 무슨 기교를 案出[안출]할지 예측치 못한다. 廻轉舞臺[회전무대]에 西洋[서양]에게 진 일본이 花道[화도]에까지 지면 얼마나 원통하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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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劇[근대극]의 출현은 演劇[연극]에 깊은 내용과 사상을 부여하고 卑俗化[비속화]한 演劇[연극]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켰으나 무대는 依然[의연] 300年來[년래] 전통인 額椽舞臺[액연무대]에서 一步[일보]를 나가지 못했다. ‘라인할트’가 ‘슈-만’의 曲馬場[곡마장]을 개조하야 兩國[양국]의 國技館[국기관] 같은 극장을 만들어 객석에게 무대를 圍繞[위요]케 하고, ‘메이엘흐리드’가 因襲的[인습적]인 장치와 幕[막]을 배척하고 裸體的[나체적]인 演劇[연극]을 創製[창제]할려고 노력하고, 나치스 독일이 딩그스필(自然劇場[자연극장])을 지어 自然[자연]의 地形[지형]을 이용하야 祝祭的[축제적], 鄕土的[향토적] 演劇[연극]을 창조할려는 等[등]은 모두가 관객과 배우의 잊어버렸던 親和性[친화성]을 다시 찾을려는 데 기인한다. 여기에 花道[화도]의 의의와 그 특이성이 한층 더 世界演劇家[세계연극가]의 瞠目[당목]을 끄는 연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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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東京[동경] 각 극장의 花道[화도]는 歌舞伎座[가무기좌] 長九間八寸[장구간팔촌] 幅五尺八寸[폭오척팔촌], 東京劇場[동경극장] 長十一間[장십일간] 幅五尺五寸[폭오척오촌], 明治座[명치좌] 長九間六寸[장구간육촌] 幅五尺三寸[폭오척삼촌], 新橋演舞場[신교연무장] 長十一間八寸[장십일간팔촌] 幅五尺[폭오척]으로 檜木[회목] 八寸幅[팔촌폭]의 널로 짜되 규정으로는 무대와 수평이지만 明治座[명치좌]는 객석으로 점점 얕게 傾斜[경사]를 지고 있다. 寳塚劇場[보총극장] 有樂座帝劇[유락좌제극]은 舞臺前端兩側[무대전단양측] 府民館[부민관] 같은 것이 조금 길게 달렸으나 공간을 一直線[일직선]으로 긋지 못하므로 花道[화도]라 할 수는 없다. 花道[화도]에도 舞臺[무대]에서 三分[삼분], 場幕[장막]에서 七分[칠분]되는 地點[지점]에 スツポン, 通稱[통칭] 七三[칠삼]이라는 機構[기구]가 있다. 奈落[내락]에서 迫[박]り上[상]り, 迫出[박출]え도 하고 또 주역배우가 일단 정지하야 소위 ‘見得[견득]を切[절]る’한다고 觀客[관객]에게 친밀을 倍加[배가]하는 표정과 동작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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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道[화도]와 함께 內地[내지] 舞臺技術[무대기술]의 자랑에 廻轉舞臺[회전무대]가 있다. 熟知[숙지]하는 바와 같이 무대에 圓形[원형]의 盆[분]을 회전함으로써 轉換時間[전환시간]을 단축할려는 것이 목적이다. 內地[내지]의 劇場[극장]에 廻轉舞臺[회전무대]가 案出[안출]된 것은 寳曆[보력] 8年[년](西紀[서기] 1757年[년])의 가을 大阪角座[대판각좌]에서 작자 竝木正三[병목정삼]이 〈三十石艠始[삼십석등시]〉를 상연할 때 팽이의 이치에서 案出[안출]하야 창안한 것으로 江戶[강호]에서는 4년 후인 寳曆[보력] 12年[년] 3月[월] 市村羽左衛門[시촌우좌위문]의 市村座[시촌좌]에서 〈殘雪曾我[잔설증아]〉의 上演時[상연시] 비로소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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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廻轉[회전]은 道具[도구] 옆에다 바퀴를 달아 무대는 돌지 않고 도구만 돌렸다. 即前[즉전] 番演劇[번연극] 콩클 때 阿娘[아낭]의 〈幸福[행복]의 啓示[계시]〉의 장치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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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寬政[관정] 5年[년] 4月[월](西曆[서력] 1793年[년]) 二世[이세] 澤村宗十郎[택촌종십랑]이 關西[관서]에서 강호에 진출하야 中村座[중촌좌]에서 〈赤穗鹽竈적수염조]〉를 上演[상연]할 때 그가 같이 데리고 간 老住屋[노주옥] 重次郎[중차랑]이란 大道具師[대도구사]가 무대를 파고 盆[분] 째 돌린 후 爾來[이래] 현재에 이르렀다. 서양에 廻轉舞臺[회전무대]가 사용하기는 서기 1896年[년] 독일 ‘뮤닛히’의 王立劇場[왕립극장]의 主事[주사] ‘라우텐·슈레겔’의 考案[고안]으로 되어 歐米劇場[구미극장]에 보급했으니 年代[연대]로 보아 실로 139年[년]이나 日本演劇[일본연극]이 앞섰던 것이다. 현재 동경에 있는 廻轉舞臺[회전무대]의 直徑[직경]과 舞臺間口[무대간구]는 左記[좌기]와 같다. 歌舞伎座[가무기좌] 直徑[직경] 60척 65척, 東京劇場[동경극장] 同[동] 52척 60척, 明治座[명치좌] 同[동] 42척 46척, 大臣通幅[대신통폭]. 이상과 같이 間口[간구]가 盆[분]의 직경보다 훨씬 넓으므로 많이 해야 2場面[장면] 3場面[장면]밖에 장치를 할 수 없는데 缺陷[결함]이다. 이 점 서양의 것은 반대로 間口[간구]보다 盆[분]이 넓으므로 한번에 56杯[배]를 세울 수 있는 것이 內地[내지]의 것보다 우수한 점이다. 그리고 歐米[구미]에서는 전부 電力[전력]이나 水力[수력]을 쓰지만 內地[내지]에서는 歌舞伎座[가무기좌], 第一劇場[제일극장], 演舞場[연무장]은 人力[인력]으로 穴番[혈번]이라는 사람이 奈落[내락]에서 돌리고 其外[기외]는 전력으로 스윗치만 누르면 회전하게 되었다. 전통과 격식을 존중하는 歌舞伎役者[가무기역자] 중에는 무대의 機械化[기계화]를 기피하야 電力[전력]의 廻轉[회전]은 연극의 기분을 손상한다고 穴番[혈번]이 아니면 무대에 안 선 團十郎[단십랑] 같은 사람도 있었다. 構造[구조]는 大阪角座[대판각좌]같이 上部[상부]에 ‘레-루’가 달려 실로 竝木正三[병목정삼]의 창안 그대로 팽이처럼 도는 것과 演舞場[연무장]같이 下部[하부]에 레-루가 붙은 것, 明治座[명치좌]같이 上下盆[상하분]이 함께 도는 식 등 구구하다. 그 종류로 普通[보통] 盆[분] 하나인 것과 中央固定[중앙고정], 蛇[사]の目[목], 親子[친자], 雙子[쌍자], 環狀舞臺[환상무대] 등이 있으나 현재 일본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盆[분] 하나인 것과 蛇[사]ノ目[목]의 二種類[이종류]뿐이다. 廻轉舞臺[회전무대]는 花道[화도]처럼 그 자체가 특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한번에 2,3杯[배]를 세워 轉換時間[전환시간]을 단축시킨다는 것 외에 보통무대와 다를 게 없으나 이것이 轉換[전환]할 때 비로소 그 특징을 발휘한다. 熟知[숙지]하는 바와 같이 暗轉[암전]은 불이 꺼지고 다음의 새 장면이 나오는 것이므로 피하고 여기에는 明轉[명전]에 관해서만 述[술]하고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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岡本綺堂[강본기당] 作[작] 〈修禪寺物語[수선사물어]〉는 明轉[명전]의 대표적 작품이다. 장소는 제1장 伊豆[이두]의 夜刄王[야인왕]의 草庵[초암], 제2장 修禪寺[수선사]로 향하는 桂川[계천]의 다리, 제3장 다시 夜刄王[야인왕]의 草庵[초암]으로 시간적으로는 그대로 1,2,3장이 연결된다. 將軍賴家[장군뢰가]가 花道[화도](草庵[초암])로 가는 길로 들어와 자기의 탈을 찾고 夜刄[야인]의 딸에게 燈[등]을 들려가지고 다시 花道[화도]로 나간 후 무대는 夜刄[야인]가 선 채 돌아가면 달 밝은 桂川[계천] 場面[장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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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계]가 花道[화도](이번에는 修禪寺[수선사]로 가는 河邊[하변]으로 된다)로 들어와 ‘러브신’이 있고 무대는 밝은 채 돌아가면 前記[전기] 夜刄王[야인왕]의 草庵[초암]이 되고 頻死[빈사]의 カツラ가 主[주]의 面[면]을 쓰고 달려온다. 이 劇[극]은 廻轉舞臺[회전무대]와 花道[화도]를 最高限[최고한]으로 사용, 연출한 것으로 佛蘭西[불란서]의 名優[명우] 훨만제미애가 오대온 座[좌]에서 상연할 때는 花道[화도]가 없어 어색했다 한다. 明轉時[명전시]는 前後面[전후면]의 배경과 배경 사이를 막어 입체적으로 하고 廻轉時[회전시] 馬立[마립], 天井[천정], 其他[기타] 舞臺[무대] 뒤의 허접 쓰레기가 보이지 않도록 盆外部[분외부]를 天井[천정]까지 둘러싸는 쿱펠호리손트 같은 半圓筒型幕[반원통형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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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3배 장치로 明轉[명전]을 할 경우에는 180도로 회전을 하지 않고 45도 내지 90도로 돌린다. 山本有三[산본유삼]의 女人哀詞[여인애사], 長谷川伸[장곡천신]의 一本刀士俵入[일본도사표입], 村松松風[촌송송풍]의 殘菊物語[잔국물어] 등은 이 2番目物[번목물]에 사용하는 것으로 처음에 집 내부를 보이고 돌면 우물이 있고 벚꽃이 핀 뒤꼍이 나오고 또 돌면 현관과 庭木戶[정목호]가 나오는 式[식]이다. 이 회전을 ‘半廻シ’[반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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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記[상기] 회전은 盆[분]만 돌아가고 門口[문구]는 盆[분]보다 없으므로 양쪽 袖[수]에 張物[장물]을 대되 이 圍[위]는 전환을 빠르게 하기 위하야 책장처럼 3,4매를 포개놓고 한 장씩 넘겨 裝置[장치]를 바꾼다. 이것을 ‘アオリ’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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蛇[사]の目廻[목회]シ는 蛇[사]ノ目傘[목산]처럼 이중의 廻轉盆[회전분]이 있어 內外盆[내외분]이 併行[병행] 혹은 逆行[역행]으로 돌아가는 기구로 天保[천보] 13년(西曆[서력] 1841年[년]) 二世[이세] 長谷川勘兵衛[장곡천감병위]가 市村座[시촌좌]에 三世[삼세] 菊五郎[국오랑]의 〈五十三次[오십삼차]〉所演時案出[소연시안출]한 것이다. 長谷川勘兵衛[장곡천감병위]는 劇場[극장] 大道具[대도구]의 棟梁[동량]으로 化政期[화정기]에서 天保時代[천보시대] 사이에 幾多[기다]한 무대적 창안을 하였고 〈千入廻[천입회]シ〉, 〈三方迫上[삼방박상]げ〉等[등] 다 그의 발명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저국의 大道具[대도구]를 혼자 떠맡아가지고 있고 歌舞伎座[가무기좌]의 長谷川源次郎[장곡천원차랑], 明治座[명치좌] 築地小劇場[축지소극장]의 長谷天音太郎[장곡천음태랑]은 그의 16代[대] 후손이며 東京劇場[동경극장]의 金井由太郎[금정유태랑], 新橋演舞場[신교연무장]의 金井忠次郎[금정충차랑], 國際劇場及[국제극장급] 淺草[천초]의 諸劇場[제극장]의 矢部榮吉[시부영길]은 다 그의 徒弟親族[도제친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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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동경서 蛇[사]の目[목] 舞臺[무대]를 가진 곳은 歌舞伎座[가무기좌]와 東京劇場[동경극장] 뿐으로 그 사용례로는 〈小笠原騷動[소립원소동]〉의 刹陣[찰진]에 양편이 쳐들어와 외소나무 밑에서 對陣[대진]하는 것, 新派[신파]의 〈二筋道[이근도]〉에 外盆[외분]과 內盆[내분]을 併行廻轉[병행회전]해서 인력거를 타고 앞에 가는 인력거를 암만 달려도 못 따라가는 것, 혹은 鏑木淸方[적목청방] 裝置[장치]의 〈梅[매]ごよみ〉에서 隅田川場面[우전천장면]에 外盆[외분] 內盆[내분]에 하나씩 있는 남녀의 배가 서로 상봉하는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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歐洲[구주]에서는 1918年[년] 독일의 구스타푸 듀-몬의 고안으로 비로소 사용케 됐으니 이것도 실로 77年[년]이나 일본이 앞서 창안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廻轉舞臺[회전무대]를 잘 이용한 사람은 막스·라인할트로 獨逸座[독일좌]에서 상연한 〈화우스트〉, 〈핸리-4세〉(제1부, 제2부)로 10장, 12장을 한꺼번에 장식하야 舞臺技巧[무대기교]의 극치를 이루었다 한다. 그러나 이 라인할트도 ‘蛇[사]の目廻[목회]し’만은 교묘히 쓰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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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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廻轉舞臺[회전무대]와 함께 또 한 가지 정교한 舞臺術[무대술]을 자랑하는 것에 迫[박]り出[출]し가 있다. 舞臺[무대] 마루창을 四角[사각] 혹은 短形[단형]으로 파고 奈落[내락]에서 배우 또느 大道具[대도구]를 舞臺[무대] 우으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기구로 スツポン, 大迫[대박]り, 奧[오]の大迫[대박]り의 세 종류가 있다. スツポン은 花道[화도]에서 잠깐 말한 바와 같이 7·3의 位置[위치]에 있어 주로 배우를 올리고, 大迫[대박]り는 舞臺前端[무대전단]과 大臣通[대신통] 即즉] 舞臺定式線[무대정식선] 사이의 正面[정면]에 있는 것으로 劇場[극장]에 따라 다르지만 縱[종] 3척 5촌, 橫[횡] 9척의 短形[단형]으로 역시 주로 役者[역자]를 올린다. 무대장치를 올리는 것은 주로 舞臺心[무대심] 後方[후방]의 奧[오]の大迫[대박]り로 전력 또는 인력으로 도구를 昇降[승강]한다. 이 迫[박]り出[출]し機構[기구]는 寳曆[보력] 7년 (西曆[서력] 1756년) 겨울 豊竹座[풍죽좌]의 〈祈園[기원] 祭禮信仰記[제례신앙기]〉의 所演時[소연시] 作者[작자] 若竹笛躬[약죽적궁]이 창안하야 4막 째에 金閣寺[금각사]를 올린 것이 그 始初[시초]이다. 그러나 奈落[내락]의 깊이가 얕어 金閣寺[금각사] 전부를 그대로 내릴 수는 없으므로 底面[저면]을 넓게, 中部[중부]를 약간 적게, 지붕은 더 적게 해서 카메라 다리처럼 접어 넣은 후 滑車[활차]로 올리고 내리고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人形淨琉璃[인형정유리]로 극히 소규모의 것이었고, 初代竝木五甁[초대병목오병]이 〈樓門五三桐[누문오삼동]〉에서 南禪寺[남선사] 樓門[누문]을 迫[박]の上[상]げ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용례이다. 이 迫[박]り出[출]し는 道具昇降[도구승강]에만이 아니라 무대 후면의 山谷[산곡], 絶壁[절벽], 河川[하천]으로도 사용되고 ‘엘마-롸이스’의 〈거리의 風景[풍경]〉같이 街道[가도]로 출입하는 지하실 등 그 응용의 범위는 실로 부지기수다. 日本[일본]의 迫[박]り出[출]し는 무대의 盆[분] 속에 파게 되므로 自然[자연] 面積[면적]이 局限[국한]되지 않을 수 없이 寳塚劇場[보총극장]의 橫[횡] 36척, 縱[종] 9척과 歌舞技座[가무기좌]의 橫[횡] 24척, 縱[종] 12척을 필두로 其外[기외]는 모두 그보다 협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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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迫[박]り出[출]し機構[기구]를 기초로 독일에서 창안된 舞臺[무대]가 에레배-타 舞臺[무대], 즉 昇降舞臺[승강무대]이다. 무대마루 전부가 三枚[삼매]의 橫[횡] 18미터, 縱[종] 6미터의 迫[박]り出[출]し機構[기구]로 돼 있어 지하 수십 미터의 奈落[내락]까지 승강하야 상연 중 如何[여하]한 대규모의 장치라도 지하에서 신속, 용이하게 할 수 있다. 이 무대는 예술가인 동시에 機械技師[기계기사]인 린내밧하가 도레스댄 王室劇場[왕실극장]에서 최초로 試使[시사]한 것으로 현재의 舞臺機構[무대기구]로서는 가장 완벽에 가까운 것이다. 이것도 실로 日本[일본]이 100年[년] 가까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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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舞臺技術[무대기술]이 관객의 흥미를 신선케 하고 전환을 신속히 하고저 함에 출발점을 둔 것과 같이 押[압]し出[출]し舞臺[무대] 역시 그 필연의 産物[산물]도 廻轉舞臺[회전무대], 迫[박]り出[출]し舞臺[무대]와 시기를 같이하고 발명된 것이다. 日本[일본]의 廻轉舞臺[회전무대]는 ‘호리손트’를 사용치 못하는 점에 최대의 결함이 있으나 이 押[압]し出[출]し舞臺[무대]는 호리손트 앞에 더 한층 그 효능을 발휘하고 장치를 立體化[입체화], 彫朔化[조삭화]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구조는 長[장] 6척 내지 8척, 幅[폭] 3척, 高[고] 4촌의 二重[이중] 우에다가 道具[도구]를 세워가지고 二重[이중] 밑에 달린 나무바퀴(木車[목거])로 상하좌우로 끌고 단기게된 것이다. 開幕前[개막전] 미리 장치를 해두었다가 시간이 되면 밀어다 자리에 놓고 左右前後[좌우전후]에 간단한 切出[절출]을 붙이고 小道具[소도구]만 배치하면 場面[장면]을 형성할 수 있고 轉換時[전환시]에는 다시 끌어내가면 된다. 간단한 도구면 1개로 足[족]하고 복잡한 것에는 前記[전기] 二重[이중]으로 數個[수개] 합해서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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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押出舞臺[압출무대]를 사용할려면 무대 좌우 혹은 후방에 무대를 收藏[수장]할 만한 면적을 필요케 하고 이곳을 통칭 溜[유]リ라고 한다. 현재 동경서 溜[유]リ를 가진 劇場[극장]은 新橋演舞場[신교연무장]뿐으로 擧槪[거개]는 廻轉[회전]만을 주로 쓴다. 山庵[산암]·城門[성문]·鐘樓[종루]·山門[산문] 등, 鳥居[조거]·銅像[동상], 간단한 二重屋體[이중옥체] 등은 이 무대의 활용으로 말미암아 1분 내지 30초로 轉換[전환]을 할 수 있다. 또한 무대로 表面[표면]과 裏面[이면]을 사용할 수 있으므로 경제상으로 보아도 퍽 유리하다. 正德時[정덕시](西曆[서력] 1711년경) 中村傳七[중촌전칠]이라는 극작가가 창안하였다. 독일서 사용하는 것은 長[장] 4미터, 幅[폭] 2미터, 高[고] 50센티미터로 臺底[대저]에는 고무바퀴가 달렸다. 후랑크 훌트, 앰·마인 所演[소연]의 쥬리아스·시-자-의 장치가 그 대표적 무대로 3개의 押出舞臺[압출무대]의 위치변화와 天幕[천막]에 필요한 幕[막]과 戰場[전장]에 필요한 극소의 소도구로써 十數場[십수장]의 전환을 演了[연료]하였다. 通稱[통칭] 引[인]キ道具[도구] 혹은 引( )라고 한다. 前記[전기]와 같이 押出[압출]シ舞臺[무대]는 고정된 무대 우에 그보다 적은 二重[이중] 舞臺[무대]를 이동하는 것이지만 이 이치를 이용하야 대규모로 무대 전체를 통째 左右後[좌우후]의 3方[방]으로 移轉[이전]하는 것이 ‘슬라이등·스테-지’ 即즉] 移動舞臺[이동무대]다. 西曆[서력] 1857년 독일의 카-로·부란드가 발명하야 후에 伯林王室劇場[백림왕실극장]의 機械技師長[기계기사장] 옷트·부람이 개량하였다. 그러나 규모의 대소와 기구의 변화는 있으되 146년 전 內地[내지]에서 먼저 사용된 押之出之舞臺[압지출지무대]와 같은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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迫[박]リ上[상]ゲ도구의 一種[일종]으로 너무나 큰 ‘트릭크’와 규모로 도중에 사용치 않게 된 것에 ‘場引割迫[장인할박]リ上[상]ゲ道具[도구]’가 있다. 昭和[소화] 3年[년] 봄 竹本座[죽본좌]에서 〈本朝甘四孝[본조감사효]〉의 所演時[소연시] 4幕[막]에서 객석과 무대를, 즉 극장건물 전체를 한꺼번에 東西[동서]로 짜개고 그 속에서 丁字形[정자형]의 御殿[어전]을 올렸다. 作者[작자] 竹田出雲[죽전출운]의 발명에 의한 것으로 安政時代[안정시대]까지 사용되었으나 그 후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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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이상] 記[기]한 것은 劇場[극장] 基本[기본] 大道具[대도구]에 관한 것이지만 五段返[오단반]シ, 八段返[팔단반]シ, 十二段返[십이단반]シ, どんでん返[반]シ, 龕燈返[감등반]シ, 田樂返[전악반]シ, 皮[피]ムキ등 무대를 움직이지 않고 도구의 ‘트릭크’적 변화로 장면 전환을 하는 예는 일일이 枚擧[매거]할려면 도저히 制限[제한]된 紙數[지수]로는 記[기]할 수 없다. 裝置方法[장치방법]에도 前記[전기] 一杯[일배]かざり, 二杯[이배]かざり, 三杯[삼배]かざり, 二重舞臺[이중무대], 鳥居[조거](二重[이중]을 양쪽에 놓고 イナツマ로 가운데 마루를 깔어 二重[이중]의 다리를 절약한 것) 외에 舞臺前端[무대전단]에 ウスバリ(薄疊[박첩]를 깔아 무대 전부를 廣間[광간]으로 사용하는 平舞臺[평무대], 大平舞臺[대평무대], 무대 우에 또 새 무대를 겹쳐 깐 所作舞臺[소작무대], 左右[좌우]의 관객에게까지 演技[연기]가 잘 보이도록 二重舞臺[이중무대]를 定式線[정식선], 즉 大欄間[대난간] 앞에 내밀어 장식하는 出舞臺[출무대] 등 실로 多種多樣[다종다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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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八百屋飾[팔백옥식]은 前面[전면]을 얕게 後面[후면]을 높게 하야 그 句配[구배] 우에 원근법에 의하야 道具[도구]를 果實店[과실점] 푸성귀 가게의 商品陳列[상품진열]같이 세우는 것으로 忠臣藏[충신장]의 殿中[전중]의 廣間[광간], 丸橋忠彌[환교충미]의 담 넘어 蓮池[연지] 장면은 이 式[식]으로 장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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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劇場[극장]에서 上演[상연]한 바고-진 作[작] 〈도끼(斧[부]의 詩[시]〉의 슈레피아놉의 장치는 全幕[전막]을 통하야 이 八百屋飾[팔백옥식]의 式[식]으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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歌舞伎劇[가무기극]에 있어 段[단]은 高底[고저]의 舞臺[무대]의 連絡[연락]으로 사용되고 연기를 주요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나, 舞臺裝置[무대장치]에 있어 절대로 없지 못할 것으로 되었다. 즉, 舞臺[무대]에 등장하는 사람은 俳優[배우]만이 아니고, 劇[극]에 따라 長唄[장패], 淸元[청원], 常磐津[상반진], 副本[부본], 新內[신내], 義太夫[의태부] 등의 음악이 필요함으로 이들 속칭 出語[출어]의 배치는 演技[연기]의 방해가 안 되도록 그리고 裝置美[장치미]와 조화되도록 해야 한다. 이 점이 歐米[구미]의 階段[계단]과는 그 성능을 달리하는 바이다. 露西亞[로서아]의 裝置家[장치가] 야그롭, 독일의 연출가 레오폴드·이에스넬, 同[동] 裝置家[장치가] 에밀패르샨, 스트로밧하 히라루쓰 등이 근대 무대장치에 기여를 한 階段式[계단식] 舞臺[무대]가 日本[일본]에서는 널리 이용 안 된 것은 실로 前記[전기]와 같이 段[단]이 주로 出語[출어]의 山臺[산대]로만 사용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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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階段[계단] 대신 開帳場[개장장]이 高處[고처]에서 低處[저처]로의 傾斜[경사]로서 언덕, 고개, 池塘[지당], 산길 등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개장장 을 가장 開帳場[ ] 잘 응용한 사람은 매이 엘·호리드로 오스트롭스키-의 〈森林[삼림]〉에 舞臺前面[무대전면]에서 後面[후면]으로 弧[호]를 그린 큰 開帳場[개장장]도 비극배우와 희극배우의 旅路[여로]의 道程[도정]을 상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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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幕[막]의 종류와 그 사용법도 상당히 우수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引幕[인막], 定式幕[정식막](一名[일명] 狂言幕[광언막])은 日本[일본] 獨特固有[독특고유]한 것으로 전자는 寬文[관문] 4년(西曆[서력] 1664년) 市村座[시촌좌]에서 羽左衛內[우좌위내]이 〈今川忍[금천인]ひ〉所演時[소연시] 비로소 고안했고, 후자는 寬永[관영] 10년 9월 猿若勘三郎[원약감삼랑]이 德川御船手[덕천어선수]의 安宅丸[안택환]에서 받은 布帳[포장]에서 고안한 것이다. 쨍쨍하는 折[절]소래와 함께 幕[막]이 옆으로 겉히는 開幕[개막]은 歌舞伎[가무기]와 불가분한 것이다. 其外[기외] 緞帳[단장], 割緞[할단], 淺黃幕[천황막], 黑幕[흑막], 道具幕[도구막], 段幕[단막], 暗轉幕[암전막], 霞幕[하막] 등이 각각 연극의 내용에 따라 그 분위기에 적합하게 사용된다. 그리고 단지 開閉[개폐]에 그치지 않고 어느キツカヶ에 툭 떨어트리기도 하고 裝置[장치]를 덮기도 하고 變幻自在[변환자재]이다. 특히 道具幕[도구막]은 작품에 따라 形形色色[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들, 산, 거리 등의 배경을 사용했던 것으로 江戶作者[강호작자] 金井三笑[금정삼소]의 창안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이 幕[막]은 용도가 끊겨 自然消滅[자연소멸]했었던 것을 막스·라인할트가 〈토-란돗드 公主[공주]〉에 이용하야 놀랠 만한 성과를 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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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廻轉舞臺[회전무대], 迫[박]り出[출]し機構[기구], 押[압]シ出[출]シ舞臺[무대], 階段[계단], 八百屋[팔백옥]かざり, 開帳場[개장장], 幕[막] 등이 한 가지도 歐洲[구주]에서 본뜸이 없이 창안됐고 年代的[연대적]으로 보아도 백여 년이나 앞섰으나 그 이용에 있어서는 현재 전부 뒤떨어져 있다. 보라. 현재의 극장을 歌舞伎[가무기], 座帝劇[좌제극]같이 近代的[근대적] 設備[설비]의 劇場[극장]에 구태의연히 一文字[일문자](스카이, 드롭푸스)가 4열, 5열 늘어달렸고 兩便[양편] 우잉그, 즉 ソデ에는 場幕[장막], オ囃子[잡자], 部屋[부옥]을 막는 カコイ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지 않는가. 그 연유는 구구하겠지만 小山內薰[소산내훈]의 말을 빌면 左記[좌기] 두 가지라 한다. 첫째로 근대 무대예술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照明[조명]을 망각 혹은 등한하야 光陰[광음]이 釀出[양출]하는 美[미]를 捕捉[포착]치 못한 것과 호리손트를 못 가진 것, 둘째는 內地演劇[내지연극]이 너무도 傳統[전통]과 世襲[세습]을 尊重[존중]히 하야 長谷川勘兵衛[장곡천감병위] 一門[일문]이 전국의 舞臺[무대]를 꽉 장악하고 있어 새로운 演劇學徒[연극학도] 혹은 舞臺改革[무대개혁]을 기도하는 기술자가 있어도 一步[일보]도 발을 들이지 않으며 其實[기실]에 있어서는 자기들 先代[선대]가 가지가지로 苦心創案[고심창안]한 手工的[수공적], 機械的[기계적] 技術[기술]을 준수하기에 그치고 더 한층 발전시킬려고 노력치 않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筆者[필자]는 이 외에 두 가지 원인을 加[가]하고 싶다. 하나는 우수한 演出家[연출가]와 데사이나-가 없고 설혹 출현을 보아도 대극장 연극이 전부 배우 중심으로 되어 있으므로 자기들이 가진 理想[이상]을 구체화할 기회가 없었던 것과, 藝術[예술]과 科學[과학]이 극장에서 융합되지 못한 것이 즉 그것이다. 그러나 朝鮮[조선]의 演劇人[연극인]은 鐵壁[철벽] 같은 그 封建的[봉건적] 舞臺[무대] 뒤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日本[일본] 演劇[연극]의 이 가지가지 좋은 遺產[유산]을 전승하야 라인할트나 메이엘호리드가 完備[완비]된 劇場[극장]에 활용한 데 있어 우리는 府民館[부민관] 講堂[강당], 城寳映畫館[성보영화관], 東洋劇場[동양극장]을 비롯하야 榮山浦[영산포] 養蠶市場[양잠시장], 東海岸[동해안] 假設劇場[가설극장], 安東[안동] 倉庫劇場[창고극장] 등에다 새로운 기술을 가진 國民演劇[국민연극]을 수립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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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1943. 7. 24~31.)
【원문】연극(演劇)의 무대기술(舞臺技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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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세덕(咸世德)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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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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