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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許浚)의 본은 양천(陽川)이요 선조(宣祖) 대왕 때에 고명한 어의였다. 소시에 매우 가난하여 서울 구리개에서 약국을 내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의술도 배우기 전인데 하루는 어떤 노인이 낡은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촌 사람 모양으로 찾아와서 아무 말도 없이 여러 시간이 지나도록 앉아만 있었다. 허준은 괴이히 여겨 묻기를 노인은 누구인데 무슨 일로 이와같이 오랫동안 앉았느냐 하니 그 노인은 말하기를 내가 누구와 이 약국으로 만나자고 언약을 하였는데 그 사람이 여태 오지 않기로 기다리는 중이외다. 이처럼 분주한데 오래 앉아서 매우 불안하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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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노인은 좀처럼 자리를 일지 않고 그를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그래서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하기를 며칠이 그냥 가는 동안에 하루는 한 사람이 약을 지으러 왔다. 병증은 자기 안해가 해산을 하고 넘어졌는데 그대로 까무러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허준은 약만 지을 줄 알았지 방문을 낼 줄은 모를 때라 의원에게 가서 방문을 내어 오라 한즉 그때에 구석에 앉았던 노인이 말하기를 그럴 것 없이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 3첩만 지어 보내라 한다. 허준이 반대하였으나 그 노인이 그냥 굳이 고집하여 지어 보냈던 바 과연 산모는 그 약으로 살아났다 한다. 그 다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3살 난 아이가 마마를 하다가 흑함(黑陷)이 되어 위급한 경우에 이르렀다 한다. 그 노인은 이번에도 곽향정기산을 지어 주라 하였다. 과연 그 아이도 그 약으로 살아났다. 인제는 허준이 그 노인을 범인(凡人)으로 알지 않고 간청하여 그에게서 의술을 배워 나중에는 그의 의명(醫名)이 궁중에까지 들어가서 선조대왕의 어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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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선조대왕은 허준을 시켜 조선 안에서 나는 약초를 모다 속어로 달아 민가에서 응용할 수 있는 의서를 만들어 보급케 하였고 그보다도 그의 공적이 큰 것은 나라에서 500여 권의 의서를 받아가지고 15년이란 긴 세월에 난리를 겪으면서도 의서를 정리편찬(整理編纂)하였으니 그의 공이야말로 행림계(杏林界)에 금자탑일 것이다. 책이름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이요 25 권으로 되었다. 그동안에 선조께서는 승하하시고 광해군(光海君)이 위에 오르셨는바 광해군은 동의보감을 보고 선생의 뜻을 성취한 것이라 하여 곧 개간(開刊)하여 경향(京鄕)에 널리 반포케 하였으며 친히 제조신(提調臣) 이정구(李廷龜)를 시켜 서문을 쓰게 하셨으니 그 서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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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삼대기서(三大奇書)가 있으니 일은 율곡(栗谷 李珥)의「성학집요(聖學輯要)」요 이는 허준의「동의보감」이요 삼은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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