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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화공주 (善花公主) ◈
◇ 한가위 잔치 ◇
해설   목차 (총 : 5권)     처음◀ 1권 다음
1941년
현진건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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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2
팔월 한가위 , 축시에 기운 달은 그 의젓하고 밝은 얼굴을 안압지(雁鴨池) 물속에 뉘엿뉘엿 잠그었다. 어지럽게 반공에 떠돌던 삼죽(三竹) 삼현(三絃) 박판(拍板) 대고(大鼓)가 어우러진 줄풍류 소리도 스러지고 구슬처럼 물 얼굴을 스쳐 가던 청아하고도 구슬픈「회소곡」도 끊인 지 오래다. 임해전(臨海殿) 밤 잔치도 거의거의 끝이 난 모양이었다.
 
3
육부의 처녀를 모아 두 패로 갈라 놓고 칠월 보름부터 팔월 한가위까지 두레 삼을 삼아 승부를 다툰 끝에 지는 편이 진수성찬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한턱을 내고 집안이 가난한 탓으로 음식을 준비 못해 내는 처녀는 그 벌로 「회소곡」을 불러 일좌의 흥을 돕던 옛 풍속도 오늘날 와서는 길쌈의 승부도 승부려니와 길쌈 끝난 한가위 달 밝은 밤은 위로 왕과 왕비를 모시고 왕자며 공주며 첫째 뼈 둘째 뼈의 귀인과 벼슬아치와 향단을 대표하는 부로와 육부의 처녀가 한자리에 모여 크나큰 잔치가 벌어지는 명절이 되고 말았다.
 
4
한순간 질탕한 잔치가 끝나려는 괴괴한 적막이 일대를 싸고 돈다.
 
5
연잎에 나리는 이슬 방울이 제법 사르럭사르럭 소리를 낸다. 수멀거리는 물속에 축 늘어진 갈대 그림자가 유난히 길어 보이었다…….
 
6
문득 잠귀 밝은 물새 떼가 깜짝 놀랜 듯 푸드득 날아 오른다. 그 윤나는 나래는 마치 서릿발을 맞은 듯 달빛에 번득인다.
 
7
아니나 다를까 뒤미처 우둥우둥하는 발자최와 왁자지껄하는 사람 소리, 흐르렁거리는 말의 호통과 소의 울음이 고요하던 공기를 뒤흔든다. 궁문 밖에 등대했던 구종들이 상전 행차의 전갈을 듣고 별안간 그 차비에 법석을 하는 까닭이었다. 감격하고 즐겁고 흥겨운 이 밤의 놀이건만 닭이 두 홰 째 울었으니 아니 돌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8
어느새 임해전 길고 넓은 복도와 뜰엔 사람의 사태다. 활짝 열어제친 궁문으로 그들은 물결처럼 구비쳐 흐른다.
 
9
근엄한 늙은 재상의 걸음걸이도 약간 지척거린다. 어떤 귀인은 황금 올린 복두가 뒤로 벌렁 제켜졌다. 느슨하게 띤 백옥 띠가 하마하마 끌러질 듯.
 
10
귀부인들의 태깔 있는 발길은 의젓하고 얌전하였지마는 이 붐비는 통에도 분진 같은 손을 들어 대모 봉채와 구슬 뒤꽂이를 연신 만져보고 또 만져보는 것은 향락의 회호리바람에 제 소중한 물건이 날아가지나 않았나 새삼스럽게 의심이 나고 또 나는 탓이리라. 금실 은실로 공작 꼬리를 수놓은 소맷자락이 풍정 있게 벌어지려다가 말고 살짝 얼굴을 붉히는 부인은 아마도 무심코 멋떨어진 무척(舞尺)의 흉내를 내보다가 제출물에 무안해 하는 것이리라.
 
11
처녀들의 한 패는 어깨동무를 하고 춤추는 듯한 발길을 항청항청 군호나 맞춘 것처럼 떼어 놓으며 웃고 지껄이며 지나간다. 그들의 뺨은 농익은 연시와 같이 터질 듯이 붉다.
 
12
궁문 밖은 탈것과 등불의 바다다. 찢어지도록 밝은 달 아래 홍사초롱 청사초롱은 마치 땅 위에 별처럼 반짝거린다.
 
13
자단향목과 심향목으로 맨든 호화로운 가마채가 떴다. 자줏빛 붉은빛 남빛 휘장이 펄렁거린다. 혼란한 비단 실들이 흔들린다. 주렁주렁 달린 은 갈구리 옥 갈구리가 쟁그렁거린다.
 
14
가슴걸이를 비단으로 치장한 황소가 뚜벅뚜벅 둔한 걸음을 옮기면 수레바퀴는 덜덜 가볍게 구른다. 은등자 구리등자가 번쩍번쩍 달빛을 차면 말들은 호기좋게 뛰닫는다.
 
15
한동안 서라벌의 거리와 한길과 골목은 선선한 새벽 바람에 금세로 지나간 황홀한 꿈자락을 더듬으며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는 굽과 바퀴와 발자최로 어지러웠다.
 
16
한참 분잡하던 궁문 앞도 사람의 그림자가 거의 드물어졌을 무렵 맨 나종으로 지껄이며 떠들며 휘젓고 휩쓸고 나오는 젊은이 한 축이 있었다.
 
17
의복 차림차림으로 보아 나이보담 벼슬 계제는 매우 높은 듯. 아마 참뼈(眞骨)나 육두품(六頭品)의 귀공자들이리라.
 
18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구종들은 제 상전이 나타나는 것을 잽싸게 알아보자, 제각기 혹은 수레 혹은 말들을 끌고 몰아 제 주인 앞으로 달려들었다.
 
19
그 중 두셋은 곤죽이 다 된 몸을 제 수레에 실었으나, 남은 축은 그래도 여흥이 미진한 듯 또는 친구를 차마 놓기 싫은 듯 머뭇거린다.
 
20
"얘 여봐라, 난 수레 타기 싫다. 천천히 걸어갈 테니 너 먼저 가려무나, 응. 알아들었니? 응."
 
21
그 중 몸피 호리호리한 한 사람이 제 집 구종에게 이렇게 호령하고 손까지 내저어 보이었다.
 
22
"어, 좋아, 좋아. 수품(首品) 파진찬(波珍飱) 말이 좋아. 자아 우리도 모두 걸어들 가세나. 이 좋은 밤에 집에 일찍 돌아가면 뭘 한단 말인가?"
 
23
일행 중에 가장 의젓해 보이는 한 사람이 대번에 파진찬 수품의 의견에 맞장구를 쳤다.
 
24
그것 참 좋은 말일세 " , 바람도 이렇게 선선하고 달도 이렇게 밝고…… 파진찬 칠부(漆夫) 자네도 그런 운치가 있을 줄은 뜻밖일세. 허허.
 
25
여럿의 웃음소리는 더욱 흥겨로웠다.
 
26
"왜 나를 벽창호로 알았던가?"
 
27
"여느 때에는 너무 점잔을 빼니 말이지."
 
28
"점잖은 사람일수록 운치를 더 아는 법이어. 허허."
 
29
그들은 말과 수레와 구종들을 돌려보낸 뒤에 윤나는 자피화(紫皮靴)로 달 그림자를 밟으며 느렁느렁 비척비척 발길을 옮기었다.
 
 

2. 2

 
31
생명의 찬 이슬이 소매자락에 축축히 나렸지만 그들은 치운 줄도 몰랐다.
 
32
감흥과 환락과 도취의 도가니 속에서 빠져 나온 그들은 아직도 몸과 마음이 화끈화끈 달았던 것이다.
 
33
멋갈진 노랫 가락이 귓가에서 잉잉 운다. 어사주의 달고도 준한 맛이 따근따근 하게 목구멍을 넘는다. 더구나 찬란한 꽃밭을 이룬 부인네와 처녀들의 자리에서 풍기던 물씬한 향기는 좀처럼 코에서 떨어질 것 같지도 않았다.
 
34
달 가에 하르르하게 흐르는 한 조각 구름도 너울거리는 춤 소매인 양하였다.
 
35
"어, 성대여, 성대."
 
36
칠부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다가 감격에 넘쳐 중얼거렸다.
 
37
"자네, 그 그 무슨 소린가? 지금 새삼스레 성대다 마다……."
 
38
일행 중에 가장 나이 낮고 가장 술이 많이 취한 듯한 대아찬(大阿飱) 눌문 (訥文)이 쓰러지듯이 칠부의 어깨를 탁 짚으며 꼬부라진 혀 끝을 간신히 돌린다.
 
39
"원, 이 사람, 누군 뭐라고 했나? 성대랬지."
 
40
눌문이 어깨를 짚는 바람에 하마하더면 넘어질 뻔한 칠부가 겨우 몸을 가누고 뒤받는다.
 
41
"글쎄, 내 말이 그 말이야."
 
42
"그럼 구만이지."
 
43
"아니 구만이구 말구 간에 금상 상감마마 같으신 어른이 전대에 또 계셨더냐 말야."
 
44
눌문의 취한 말투는 언제든지 시비조다.
 
45
어 이 사람 아무리 " , 취중이기로 무엄하게 그 무슨 객쩍은 소린고? 상감 마마의 키가 크네 작네……."
 
46
"그래, 자네 눈에는 그 그 크신 키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그래, 그 키가 예삿 키란 말인가?"
 
47
눌문은 버럭버럭 대어든다.
 
48
"누가 키야 크지 않다고야 하나뵈. 지망지망히 그런 소리를 않는 게라는 게지."
 
49
"이를테면 자네가 누굴 훈계를 합시는 모양일세그려. 아스시게 아서. 자네 훈계 들을 사람은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다네."
 
50
하고 눌문은 칠부의 어깨 짚었던 손을 떼어 한 걸음 주춤 물러서다가,
 
51
"참, 참, 크신 키야. 아마도 열 마는 넘으실걸."
 
52
감탄을 마지 않는다.
 
53
"크시고 말고, 나는 일어섰을 적마다 그 드높은 전각의 추녀가 어두(御頭)에 닿을까 싶어서 황송쩍었어."
 
54
"키만 크신가, 그 몸피는……."
 
55
"무엄한 말이지만 육체의 주위를 재어 본다면 한 아름이 넘으실 거야."
 
56
여럿은 눌문의 끄집어낸 화두로 돌아갔다.
 
57
"하늘이 내신 어른은 다르거든."
 
58
"그러기에 성골(聖骨)이 아니신가!"
 
59
"지금 띠고 계시는 옥대만 해도 예사 사람은 쳐들지도 못할거야."
 
60
"오, 참, 그 하늘에서 나리신 옥대 말이지."
 
61
"정말 하늘에서 나렸을까?"
 
62
"그럼."
 
63
"뭘?"
 
64
"내 눈으로 본걸."
 
65
"정말 보았단 말인가?"
 
66
"보구 말구. 그날은 일기가 약간 흐리었어.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겹겹이 쌓이었는데 별안간 오색 무지개가 하늘 한복판으로부터 바루 궁 앞 뜰에 박혔겠지. 그러더니만 어느 결엔지 칠보 화관을 쓰고 이상야릇한 붉은 학창의를 떨뜨린 천사가 나려와서 외여 가로되'상황의 명을 받들어 옥대를 왕께 전하노니 받들지어다.'상감께서는 곧 뜰에 나리시어 무릎을 꿇고 그 옥대를 받으셨는데 그 옥대가 상감의 두 손 위에 놓여지자마자 오색 무지개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천사도 온 곳 간 곳이 없데그려. 얼핏 하늘을 우러러보니 산더미같은 구름 한 가운데가 턱 갈라지며 금세로 연연한 붉은 빛이 도는데 현연히 천사의 옷자락이 펄렁하고 보이는 것 같데……."
 
67
여럿 사람의 개개풀린 눈초리는 옥대를 가져온 천사를 보았다는 동관의 입술 위에 모이었다. 그 동관의 눈은 감격에 번쩍이고 잠깐 말을 끊은 입은 엄숙하게 닫혀졌다. 그 태도의 어느 모를 뜯어보아도 털끝만한 어설픈 구석이 없었다. 더더군다나 거짓이 숨겨진 자최가 있을 리 없었다.
 
68
"갸륵한 일이어."
 
69
수품이 감탄하였다.
 
70
"하늘이 내신 어른은 암만해도 다르시거든. 그 날 꼭 천사가 나려올 줄 아셨던 모양이지."
 
71
"그렇구 말구, 그 날 따라 대내에는 아침결부터 황토를 펴라 하시고 정갈하게 소제까지 시켜 놓으셨다니 상감께서는 미리 무슨 짐작이라도 하셨던 것 아닌가뵈."
 
72
옥대 나린 광경을 목도한 동관은 다시 말을 이었다.
 
73
"그런데 그 옥대 기럭지가 어떻게 길었던지 얼른 보기에 우리 발로는 열 발이 넘을 거란 말이야. 세상에도 진기한 옥으로 아로새겼고 황금으로 꾸몄으니 여간 인력 가지고야 맨들어 내려 해도 맨들어 낼 수가 없거든. 더구나 띠돈을 새겼단 것만 헤어 봐도 예순 하고도 두 개란 말이어. 천상천하에 이런 보물은 쉽지가 않을 것 아닌가. 더구나 이상한 것은 이 육중하고 혼란한 옥대를 상감께서 띠시고 보니 쩍말없이 들어맞는단 말이거든……."
 
74
"참 이상한 일이야."
 
75
"그 어마어마하게 크신 허리에 쩍말없이 맞게까지 하였으니."
 
76
"그야 하늘에서 나리신 게니 아니 맞을 리야 만무한 일이지."
 
77
어쨌든 이 옥대 이야기로 신이야 넋이야 떠들어대었다.
 
78
"옥대도 옥대지마는 상감마마의 신용(神勇)이 절륜하신 것은 정말 놀랠 일이거든."
 
79
이번에는 칠부가 또 화제를 돌리었다
 
80
"사냥을 하실 제 한 번 옥음을 높게 지르시면 달아나던 산도야지가 제자리에 펄썩 주저 앉아 올 곳 갈 곳을 모르는 것은 우리도 여러 번 뵈었거니와, 천주사(天柱寺)를 처음 이룩하시고 거기 거동을 하셨을 때 돌사다리를 올라가시니 그 우람스럽고 육중한 돌 사다리가 마치 썩은 나뭇가지와 같이 찌근하고 부러지지를 않았겠나"
 
81
"옳지, 참 그런 일이 있었지. 상감께서는 한 번 밟아 분질러 놓으셨지만 여간 인력을 가지고는 분질러진 그 돌멩이를 움직일 수도 없어 그대로 내버려 두었는데 그게 이 서라벌 서울 다섯 개 움직이지 않는 돌(五不動石 [오불동석])의 하나가 아닌가?"
 
82
칠부가 수품의 말을 받았다.
 
83
"위로 그런 성주(聖主)를 뫼셨으니 올 내년 안으로 고구려 백제를 때려부시어 삼한(三韓)을 통일할 날도 멀지는 않을 걸세."
 
84
눌문이 팔을 뽐내었다.
 
85
"그런데 걱정은 꼭 한 가지가 있지."
 
86
칠부가 정중하게 말을 끄집어내었다.
 
87
"무슨 한 가지 걱정이란 말인가?"
 
88
여럿은 고이쩍다는 듯이 칠부를 쳐다보았다.
 
89
"상감의 보령이 벌써 사십이 넘으셨는데 아직 아드님이 없지 않으신가."
 
90
"아드님을 아직 못 두신 것은 걱정이라면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출중한 공주가 세 분이나 계시지 않나?"
 
91
여러 사람의 지향 없는 발길은 자기네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주사 문 앞까지 다다랐다.
 
92
"우리가 이렇게 떠들고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다시 안압지 못가로 가세그려. 그 못둑 비단길 같은 잔디 우에나 앉아 이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주고 받세그려."
 
93
수품은 마치 뒤에서 누가 잡아 당기기나 하는 듯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여럿의 운에 따라 옮기다가, 마츰내 이런 제의를 하였다.
 
94
"수품과 파진찬 말이 그럴 듯하이. 어째 임해전이 멀어갈수록 마음이 허전허전해지는 듯하네. 안압지로 다시 올라가세."
 
95
눌문이 대번에 수품의 말에 찬성하였다.
 
96
"그래, 그래, 그 말이 좋군. 한 발자욱 두 발자욱 우리가 흥을 떨던 자리가 멀어가는 것이 따는 휘젓도 하거든"
 
97
여럿은 안압지 못 가에 다시 허청거리는 발길을 멈추었다. 이슬 나린 풀밭에 앉고 쓰러지고 누운 채 다시금 아까 이야기의 뒤끝을 찾는다.
 
98
"아까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두었던가? 오 옳지. 상감께서는 아드님을 두시지는 못했으나 달도 같고 꽃도 같은 공주 세 분을 두셨다고 그랬것다……."
 
99
"암만해도 맏따님 덕만(德蔓)공주께서 인금은 으뜸이시지."
 
100
하고 수품은 여럿의 동의나 구하는 듯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101
"그야 다 이를 말인가. 어질고 착하시고 또 총명이 제일 하시다고 들었으니 설령 태자가 아니 나시는 한이 있드래도 맏공주님께서 의당당히 나랏뒤를 이으실 것 아닌가?"
 
102
칠부는 수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덕만 공주의 칭찬을 늘어 놓았다.
 
103
키도 부왕을 닮으시어서 " 훤출하시고 그 얼굴도 마치 오늘밤 은달 모양으로 맑고 밝으시고 덕성스러우시고……. 치마를 두르셨기에 여자시지, 어느 남자고 그 어른을 따르실 만한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104
"워낙 천품이 뛰어나시거든, 당나라에서 목단화 꽃씨를 보내고 만발한 그 꽃을 그린 그림을 보냈을 적에 덕만 공주께서는 그 그림을 한번 보시고 이 꽃이 화려하고 탐스럽기는 하나, 필경 향기가 없으리라고 하셨다지. 상감께서 이상히 여기시고 어째 네가 그 꽃에 향기가 없을 줄 아느냐, 물으시매 공주의 대답이 절창이거든. 꽃만 그려 놓고 나비를 그리지 않은 것을 보면 정녕 향기 없는 꽃인 줄로 아옵니다, 아뢰었단 말이지. 그 후 그 꽃씨를 심어 꽃이 핀 뒤에 보니 과연 향기가 없더란 말이어. 이 조그만한 일 한 가지만 보드래도 어째 범상한 어른이라 할 수가 있느냐 말이야. 성인의 바탕이 시거든."
 
105
칠부의 입에는 침이 없었다.
 
106
"그는 그러하시지만 너무 덕성스러우시지."
 
107
눌문은 의미있게 하늘을 쳐다본다.
 
108
"너무 덕성스러웁단 말이 웬 말인가?"
 
109
칠부가 시비나 차릴 듯이 대어든다.
 
110
"아기자기한 여자다운 맛이 적단 말일세. 예삿 어른이 아니고 성인이란 말일세."
 
111
"그러기에 성골이시지."
 
112
"그래 성골이시지."
 
113
"그러면 둘째 공주는 어떠신고?"
 
114
"달만(月蔓)공주, 곧 달 애기씨 말이지."
 
115
"따지기는 왜 이렇게 따져, 뻔한 노릇을."
 
116
"글쎄, 어떻다고 할까. 달같이 환하시기야 하시지만……."
 
117
"너무 아버님을 많이 닮으셨어."
 
118
"키가 너무 크시단 말이지."
 
119
"허헛허."
 
120
여럿의 웃음소리는 달빛을 따라 흩어졌다.
 
121
"워낙 잘 나신 큰 공주와 아름다우신 셋째 공주 틈에 끼였으니 그러하지.
 
122
둘째 공주 님도 따로만 떼어 놓고 보면 여느 인물에 대일 수야 있나!"
 
123
"그야 물론이지."
 
124
"그러면 셋째 따님 선화(善花) 공주, 곧 꽃 애기씨는 어떠신가?"
 
125
"꽃 애기씨!"
 
126
여럿의 입술은 너무 귀여운 듯 너무 아까운 듯 너무 안타까운 듯 일제히 속살거리었다.
 
127
"꽃 애기씨의 인물이야 어떻다 할까? 저 달에 비기자니 너무 곱고 부드럽고…… 후우……."
 
128
수품은 마악 구름 자락에서 뛰쳐나온 쨍쨍한 달을 쳐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129
"꽃에 견주자니 너무도 깨끗하고 맑고……흥."
 
130
눌문도 가볍게 탄식하였다.
 
131
"버들 잎새보담 더 가늘고 진한 눈썹 밑에 번쩍이는 두 눈은 가을 호수와 같다 할까? 그 오목한 코끝은 백옥으로 깎았다면 되려 쌀쌀스럽게 들리겠지."
 
132
"그 도톰한 두 뺨은 어쩌면 그렇게도 그렇게도 연연할까."
 
133
"언제든지 언제든지 방씻방씻 웃음이 떠도는 듯한 그 두 입술은……."
 
134
"크도 작도 않으시나마 설멍한 편인 그 알맞은 키는……."
 
135
"훨씬 펴진 목 고개…… 마치 흰 기름이 엉긴 듯한 그 고운 살결은 손만 대면 손바닥 밑에서 그대로 녹아 나릴 것만 같애……."
 
136
눌문은 감격에 겨운 눈을 껌벅껌벅 하며 마치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137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품은 별안간에 숨길이라도 막힌 듯이 시근벌떡거리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결엔지 그의 손에는 서리 같은 환도를 빼어 들었다.
 
138
"무 무엄한 놈!"
 
139
게거품을 흘리며 한 마디 배앝자 다짜고짜로 눌문에게 달겨들었다.
 
140
여럿은 이 뜻하지 않은 살풍경에 우하고 일어나서 두 사람의 사이를 가루 막았다.
 
141
"웬일이야, 웬일이야!"
 
142
수품은 제 분을 제가 못 참는 듯 몸을 사시나무 떨듯한다.
 
143
"무 무엄한 놈! 뭣이 어쩌고 어째! 꽃 애기씨를 손에 대면 녹아 나린다.
 
144
이눔! 꽃 애기씨를 손에만 대였담 봐라, 한칼에 네눔의 몸은 두 동강이가 날 줄 알아라!
 
145
수품의 호통은 뒤이어 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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