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마천 사기 강의 자료 요약 |
【 김영환교수의 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7. 23:36 | |
| | ⊙ 사마천 사기 395강 강의자료 요약 (2025.9.04) |
최초등록 2025.09.07. 23: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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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司馬遷《史記》 原文 강독, 부수적으로 (1) 唐詩〈春怨〉와 작자 金昌緖 및 주요 단어(伊州歌, 꾀꼬리의 다양한 명칭 등......)에 대해서 설명 ; (2) 《論語》〈里仁〉「放于利而行,多怨」에서 放에 대한 古注와 新注 풀이 비교설명 ; 利와 관련된 財, 貨, 資, 殖 등의 개념 설명 ; 義와 利에 관한(義利之辨) 《論語》, 《孟子》, 《荀子》, 《大學》, 朱熹(《論語集註》, 《朱子語類》, 《日講四書解義》)의 관련문장을 인용하여 설명 ; (3) 修身養性의 3단계(識己, 納己, 律己) 과정 설명 ; (4) 《論語》에 나타난 「我師」와 「爲師」에 대하여 문법과 기타문헌을 통하여 상세히 설명 ; (5) 가르치는 자의 책임, 등급, 조건, 우선, 명칭 등에 대하여 설명 ; (6) 禮의 甲骨文과 《說文解字》에서의 문자학적 의미 설명 ; (7) 「禮賢下士」에 대하여 《史記》〈魯周公世家〉의 「一沐三捉髮, 一飯三吐哺」를 인용하여 상세히 설명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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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8:05 | |
| | ⊙ 온천을 메워 버리다 |
최초등록 2025.09.02. 18: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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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왕조의 세종대왕은 학문에 열중한 탓에 눈병을 앓아 온천물로 목욕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한양 도성에서 가까운 곳에는 온천이 없기 때문에 궁궐을 떠나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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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8:02 | |
| | ⊙ 코박굴 코바위의 전설 |
최초등록 2025.09.02. 18: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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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의 부개동은 옛 지명이 마분리(馬賁里)였다. 아마도 큰 말무덤이 있어서 그렇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금의 부평동 일대는 대정리(大井里)였는데 그 뜻으로 보면 큰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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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8:00 | |
| | ⊙ 원적산의 호랑이굴 |
최초등록 2025.09.02. 18: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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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적산은 깊고 숲이 우거져서 호랑이가 살았다. 그리고 맛좋은 산나물이 지천으로 많아서 음력 삼월부터 석 달 동안 여인네들이 쑥부쟁이와 두릅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루하루 날이 지남에 따라 원추리, 취나물, 고비, 홑잎나물 등을 뜯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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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57 | |
| | ⊙ 원적사의 빈대와 말무덤 |
최초등록 2025.09.02. 17:5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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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평구 산곡동과 서구 석남동 사이에 뻗어 내린 계양산의 지맥이 봉우리로 우뚝 솟은 것이 원적산이다. 조선 시대에 경인 운하를 파는 공사를 할 때, 이 산을 뚫지 못해 실패했다 하여 원통함을 쌓았다는 뜻으로 원적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뒤에 한자 표기가 ‘원(元)’자로 바뀌었다는 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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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54 | |
| | ⊙ 안하지 고개 |
최초등록 2025.09.02. 17: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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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하지 고개는 부평구 청천동과 서구 가정동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의 이름에 관해서는 그럴 듯한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기러기가 날아드는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청천동 동쪽에서 바라보면 서구 가정동 앞바다에서 기러기가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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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50 | |
| | ⊙ 굴포천과 원통이 고개 |
최초등록 2025.09.02. 17:5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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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평 지역의 중요한 지명으로 남아 있는 굴포천과 원통현은 옛날부터 여러 차례 시도했던 경인운하 사업과 관련된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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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46 | |
| | ⊙ 황어장의 3·1만세 시위 |
최초등록 2025.09.02. 17:4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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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미년 3월, 한반도는 독립 만세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인천에서도 3월 6일 인천상업중학과 인천공립보통학교가 시위를 하고 동맹 휴학에 들어갔으며, 같은 날 강화에서도 1천 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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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45 | |
| | ⊙ 다남동과 독갑산 |
최초등록 2025.09.02. 17: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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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양동의 다남동 마을은 여자에 비해 남자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인데 다랑리라고도 불리웠다. 역시‘다남’처럼 남자가 많다는 뜻이었다. 이 마을 에서는 옛날부터 남자 아기가 많이 태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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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41 | |
| | ⊙ 효자의 마을 오류동 |
최초등록 2025.09.02. 17: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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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양동의 오류동 마을은 부평 땅의 고려 때 지명인 수주(樹州)의 소재지였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조선 시대에 효자의 마을로 명성이 높았다. 임진왜란 직후 부평 부사를 지낸 윤명선이라는 사람이 자리잡아 파평 윤씨 가문이 대대로 살아 왔는데 일가 모두가 효성이 깊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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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37 | |
| | ⊙ 경명현의 도둑 두목 |
최초등록 2025.09.02. 17: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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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부평 고을에 신관 사또가 부임해 왔다. 관아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을 먹으려 할 때였다. 고을의 방범 경찰 업무를 맡은 병방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와 보고하는 것이었다. “나리, 징맹이 고개에서 도둑 떼가 행인의 짐을 털었습니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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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32 | |
| | ⊙ 계양산의 장사굴 |
최초등록 2025.09.02. 17: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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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양산 남록에 장사굴이라고 불리는 작은 굴이 있었다. 입구가 땅바닥에 붙어 있는 데다가 앞에 소나무와 관목들이 무성해서 여간해서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입구가 좁아서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지만 안에 들어서면 바람이 없이 아늑하고 빛도 적당히 들어오고 예닐곱 명이 앉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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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28 | |
| | ⊙ 인조대왕, 백발 노인의 말대로 부왕의 능을 정하다 |
최초등록 2025.09.02. 17: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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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아버지 원종대왕의 능을 옮기려고 묏자리를 잘 보는 지관 한 사람만 데리고 계양산 근처에 왔다. 그가 대왕인 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조대왕과 지관은 산기슭에 관을 놓고 묏자리를 파고 있는 가난한 사람을 목격했다. 그런데 거기는 수맥이 흐르는 험한 묏자리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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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25 | |
| | ⊙ 계양산에 온 충렬왕과 제국공주 |
최초등록 2025.09.02. 17: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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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렬왕은 태자 시절을 몽고에서 보내면서 원나라 세조의 딸 홀도로계리미실 공주와 결혼했으며 부왕이 죽자 공주와 함께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고려에서는 몽고 공주 출신의 왕비를 제국대장공주라고 불렀다. 또는 줄여서 제국공주라고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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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22 | |
| | ⊙ 계양산은 강서의 진산 |
최초등록 2025.09.02. 17: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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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양산은 해발 395미터로 인천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수주악, 안남산, 아남산, 노적봉, 환여금, 용장자산 등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규보가 지은 『망해지』에는 산정에 올라가 보면 삼면이 모두 물이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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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18 | |
| | ⊙ 깨끔재의 영험한 샘물 |
최초등록 2025.09.02. 17: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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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곶과 검단의 해안은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서 썰물 때면 끝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넓게 갯벌이 드러났다. 주로 부녀자들이 이 시간에 갯벌로 나가 낙지, 게, 소라, 조개, 맛조개 따위를 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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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15 | |
| | ⊙ 한들방죽에 거지를 생매장하다 |
최초등록 2025.09.02. 17: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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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석동의 한들방죽은 거지방죽이라고도 부른다. 서곶과 검단의 해안 쪽이 거의 다 그러하지만 이곳도 지난날 바닷물이 드나드는 드넓은 갯벌이었다. 한들 마을 앞의 갯벌은 경사도가 낮아 썰물 때면 어머어마하게 넓게 드러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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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10 | |
| | ⊙ 신관 사또가 처녀의 원혼을 풀다 |
최초등록 2025.09.02. 17: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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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단 사거리의 옛 이름은 원현(院峴)이다. 그곳은 역참이 있었고 지난날 지방 관장이나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반드시 하루를 묵어갔다.어느 해 새로 부임해 오는 신관 사또가 이곳 원현에서 묵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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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09 | |
| | ⊙ 도자기 배가 수렁에 빠지다 |
최초등록 2025.09.02. 17: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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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서동에는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좋은 흙이 있어 삼국 시대부터 가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녹청자 도요지(사적 제211호)가 있다. 그리고 경서동 해안에서 서곶로 국도까지 이어진 길 좌우에는 30년 전까지만 해도 옹기를 굽는 가마가 십여 개 있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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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04 | |
| | ⊙ 정희량의 일생 |
최초등록 2025.09.02. 17: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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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암동 앞산을 허암봉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조선 전기의 강직한 관리이자 도학자이며 차(茶)와 술에 심취해 많은 일화를 남긴 정희량의 호에서 유래한다. 지금도 산의 북쪽 중턱에는 그가 찾아와 조용히 숨어 살았던 암자 흔적이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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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7:02 | |
| | ⊙ 대제학의 상여가 지나간 경서동 섬피둑길 |
최초등록 2025.09.02. 17: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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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세종 때 일이었다. 현재의 경서동 범머리산에 갑자기 말을 탄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베로 만든 건을 쓴 사람들도 있었고 언젠가 이 마을에 나타난 적이 있는 부평 관아의 이방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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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2. 16:55 | |
| | ⊙ 과거 길에 사랑에 빠진 젊은 선비 |
최초등록 2025.09.02. 16:5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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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천동은 고려 때 장모루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남부 지방에서 고려의 왕도인 개경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하루를 묵어 갔다. 마을에 여러 개의 여관이 있어서 나그네들에게 침식을 제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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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50 | |
| | ⊙ 으스스한 이름의 도깨비다리 |
최초등록 2025.09.01. 11:5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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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사래말이라 불리던 숭의동은 오늘날은 전혀 알아볼 수 없이 변했지만, 1920년대 이전 낙섬 일대에 염전을 축조하며 긴 방죽을 쌓기 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가였다. 1903년 장천리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던 것을 보아도 이 지역에 사행천(蛇行川)처럼 길고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개천이 있어서 장사래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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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50 | |
| | ⊙ 세 번 이름을 부르고 이별하던 가슴 아픈 삼호현 |
최초등록 2025.09.01. 12: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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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호현이라고 불리는 고개는 지난 날 인천 읍내 쪽에서 송도 해안으로 나올 때 이용하던 고개인데, 지금으로 보면 문학동에서 청학동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이다. 이 길에는 많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우선 이 고갯길의 이름만도 삼호현, 삼해주현, 사모현 등이 있다. 더불어 발음에 따라 사모지 고개, 사모재 고개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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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44 | |
| | ⊙ 천마와 아기 장수 |
최초등록 2025.09.01. 12: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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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마산의 원래 이름은 천마산이었다. 옛날 이 산 속에는 양 어깨에 날개가 달린 천마가 살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가깝게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산 아래 마을에는 전설이 생겨났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근처에 영웅이 태어나고, 그 말을 타고 출정할 것이라는 신령스러운 전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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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42 | |
| | ⊙ 흔들못의 용마를 닮은 아기 |
최초등록 2025.09.01. 12:4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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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수구 청학동에 흔들못이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어 어디가 어딘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을 만큼 변해 버렸지만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청학동에 많이 살던 최씨 문중과 관련이 있었던 연못이 아닌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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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39 | |
| | ⊙ 삼호현의 또 다른 술 바위 전설 |
최초등록 2025.09.01. 12:3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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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수구 청학동의 삼호현을 달리 삼해주현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그 고개에 술이 나오는 바위가 있었다는 전설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삼해주 전설과 술이 나오는 술 바위 전설과는 내용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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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35 | |
| | ⊙ 동막의 삼정승 영일 정씨 가문 |
최초등록 2025.09.01. 12: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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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수구 동춘동 동막의 도곡 부락을 흔히 삼정승 고을이니 큰 대신, 작은 대신 동리니 하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는 아버지가 영의정을 추증 받고 큰아들이 우의정, 작은아들이 좌의정을 지냈다는 삼부자 이야기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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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33 | |
| | ⊙ 인천 이씨 중시조 이허겸 |
최초등록 2025.09.01. 12:3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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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수동 원인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연화사거리가 있다. 이 사거리 주변 문학산 남동쪽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동네가 부수지(浮水地)마을이라고 불리는데 이 일대의 지형이 풍수지리적으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즉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세라고 해서 예로부터 불리어 온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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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32 | |
| | ⊙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 영세를 받은 이승훈 |
최초등록 2025.09.01. 12: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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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훈은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되었다. 그 과정에서 비록 몇 차례의 배교를 했다고 해도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조금도 낮아지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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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28 | |
| | ⊙ 불행하게 일생을 산 삼각산 이장사 |
최초등록 2025.09.01. 12: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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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동구에 위치한 소래산 서쪽에 세간에서 부르기를 담뱅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었다. 조선조 말기인 고종 때 이 담뱅이 마을에 사는 전주 이씨 가문에 아기가 태어났다. 그런데 나면서부터 벌써 기골이 장대한 것이 누구든지 한눈에 아기가 장사임을 알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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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27 | |
| | ⊙ 여인으로 변장한 장사 박창보 |
최초등록 2025.09.01. 12: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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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의 남동구 간석동에 박창보라는 장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원래 포수였는데 워낙 힘이 센 장사인 데다가 담력도 크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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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22 | |
| | ⊙ 도둑 시아버지를 뉘우치게 했다는 오닭 전설 |
최초등록 2025.09.01. 12: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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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동구 구월동에 ‘오달기(또는 오닭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주막거리가 있었다. 이곳은 인천부 청사가 있는 관교동 쪽에서 서울로 가거나 수원 쪽 방향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길가에 자연스럽게 주막이 생겨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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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19 | |
| | ⊙ 헛수고로 돌아간 산신 우물가의 백일 기도 |
최초등록 2025.09.01. 12: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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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채골은 옛 문학초등학교 교장 사택 뒷산 작은 골짜기를 말하는데 이곳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이 우물을 사람들은 ‘산신(産神) 우물’이라는 이름 그대로 아기를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이 우물가에서 치성을 다해 백일 기도를 드리면 태기가 없던 사람도 아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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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17 | |
| | ⊙ 존장의 사과를 받은 여섯 살짜리 제운 선생 |
최초등록 2025.09.01. 12: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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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구 학익동은 예로부터 제운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는데 그것은 조선 숙종 때 교육자로서, 또 효행자로서 높이 칭송을 받는 이세주가 이곳 학익동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호가 제운이었기 때문이다. 이세주는 부평 이씨지만 그의 명성이 너무 유명해서 아호가 곧 본관처럼 쓰일 정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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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15 | |
| | ⊙ 삼면이 바다로 둘러사인 맑고 시원한 청량산 |
최초등록 2025.09.01. 12: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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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은 완전히 도시화 한 연수구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서해를 내려다보고 있는 청량산. 옛날에는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이 산을 청량산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그 풍경이 맑고 아름답고 시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 서적에도 이 산에 대해 ‘깨끗하다’,‘빼어나다’라는 설명과 함께 청량산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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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12 | |
| | ⊙ 능허대와 한나루의 기생 바위 |
최초등록 2025.09.01. 12: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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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능허대는 백제가 한강 하류까지 세력을 크게 확장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추진하던 시절, 두 나라 사이의 바닷길을 연결해 사신들이 오고가던 전초 기지 같은 곳이다. 오늘날 작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 옥련동의 능허대 일대가 바로 당시 백제 사신들이 중국으로 떠나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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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 가담항설의지식창고 】 |
최종변경 2025.09.01. 12:06 | |
| | ⊙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갑옷바위 |
최초등록 2025.09.01. 12: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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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전에 사모지 고개에서 동춘동 쪽 방향으로 저금 가다 보면 바위 하나가 있었다. 이 바위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전해 내려오는 이름이 바위 석함에 갑옷을 넣어 두었다 하여 갑옷바위였다. 그러나 실상은 상자 바위로 불리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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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변경 2025.09.01. 12:05 | |
| | ⊙ 뱀떼가 망하게 한 주안산 |
최초등록 2025.09.01. 12: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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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동구 간석3동 중심지에 솟아있는 높이 187.1미터의 만월산은 원래 이름이 주안산이다. 인천의 대표적 땅이름 가운데 하나인 주안(朱安)이 바로 이 산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그 원래 위치도 지금의 주안이 아닌 이곳 간석동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주안산이 바로 지금의 만월산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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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변경 2025.09.01. 12:03 | |
| | ⊙ 여덟 장사의 전설을 지닌 장자골 |
최초등록 2025.09.01. 12: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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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동구 장수동에 장자골이라는 동네가 있다. 장자리라고도 부르던 장자골은 다른 지역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지명인데 대개는 ‘부자가 살았던 마을’이 아니면‘맏아들들이 살았다’는 전설을 가진 마을이다. 장자골은 또‘장사골’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이 동네에 살았다는 여덟 장사의 전설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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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변경 2025.09.01. 12:00 | |
| | ⊙ 항기와 약효가 뛰어났다는 석천 사거리 돌우물 |
최초등록 2025.09.01. 12: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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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석천 사거리는 인천시청 후문 언덕길에서 간석동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나온다. 이 지점이 구월동과 간석동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건너편 모서리에 석천초등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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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변경 2025.09.01. 11:55 | |
| | ⊙ 호랑이 입 모양의 호구포 |
최초등록 2025.09.01. 11:5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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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동구 논현동 서남쪽에 있는 호구포는 말 그대로 호랑이의 입처럼 생긴 포구라는 뜻이다. 호구포 뒷산인 오봉산 기슭에 마치 호랑이가 어흥 소리를 내며 입을 한껏 벌린 듯한 형상의 검고 커다란 바위가 있어 사람들이 호구암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포구 이름도 범아가리 또는 호구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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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변경 2025.09.01. 11:55 | |
| | ⊙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왔다는 소래포구 |
최초등록 2025.09.01. 11: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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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년 11월 무렵 김장철이 되면 서울에서까지 새우젓 등 젓갈과 해물을 사려는 주부들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는 남동구 논현동 소래는 신선한 어물로 유명한 도시 안의 포구로서 인기 있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은 이제는 사라진 협궤열차 때문에 더 많이 알려지기도 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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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변경 2025.09.01. 11:47 | |
| | ⊙ 나라의 제사를 지내던 사라진 무인도 낙섬 |
최초등록 2025.09.01. 11:4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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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안 매립으로 생긴 남구 용현5동, 지금은 철거된 개항 100주년 탑 부근에 작은 무인도 낙섬이 있었다. 이십여 년 전 바다를 매립하면서 섬 전체를 까뭉개 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일제 때 염전을 조성하기 위해 쌓은 긴 제방 끝에 낙섬이 있었다. 몇몇 문헌에는 이 낙섬을 ‘잔나비(원숭이) 섬’이라는 뜻의 ‘원도(猿島)’라고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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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변경 2025.09.01. 11:44 | |
| | ⊙ 문학산 안관당에 얽힌 이야기 |
최초등록 2025.09.01. 11: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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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문학산 봉화대가 있던 자리 밑에는 안관당이라는 사당이 하나 있었다. 이 안관당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할아버지와 할머니 목조상이 모셔져 있었다. 할아버지의 상은 아주 험상한 듯하면서도 위엄이 있고, 눈을 부라린 모습이 매우 용맹하게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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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변경 2025.09.01. 11:41 | |
| | ⊙ 홍두깨가 팔미도에 떠오르다 |
최초등록 2025.09.01. 11: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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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흔히‘문학산의 이상한 우물’이라고 말하는데 지금은 군사 시설이라 민간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지만 옛 문학산성 동문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150미터 가량 떨어진 안관당 뒷마당에 돌로 쌓아 올린 우물 하나가 있었다. 바로 이것이 몇 해 전까지도 맑은 물이 솟아 넘치던 우물이었다. 해발 180미터의 산에 이런 우물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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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날 옛적에 인천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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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변경 2025.09.01. 11:39 | |
| | ⊙ 비극의 주인공 비류와 미추홀 |
최초등록 2025.09.01. 11: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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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을 대표하는 산이라고 한다면 문학산을 꼽아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인천에 관한 가장 오랜 역사 기록으로서, 기원전 18년 비류가 문학산 주변을 도읍으로 했던 미추홀 왕국의 설화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비류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설화는 몇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이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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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변경 2025.09.01. 11:32 | |
| | ⊙ 인당수와 연봉바위 |
최초등록 2025.09.01. 11: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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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해도 황주 도화동에 살던 심봉사의 외동딸 심청이 눈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중국 남경을 왕래하는 상인들에게 공양미 300석에 팔려 인당수에 제물로 몸을 던졌는데, 그 갸륵한 효성에 감복한 옥황상제가 심청을 아름다운 한 송이 연꽃으로 변하게 하여 이곳 연못에 떠오르게 한 데서 연지(蓮池)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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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변경 2025.09.01. 11:29 | |
| | ⊙ 백령도와 거타지 |
최초등록 2025.09.01. 11: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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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진성여왕 때 일이다. 신라 사신 아찬(阿飡) 양패(良貝)가 당나라로 떠나려 할 때, 후백제의 해적들이 바로 당나라로 가는 길목인 진도에 집결해 바닷길을 가로막으려 한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그러자 양패는 이에 대비해 활 잘 쏘는 군사 50명을 뽑아 호위하게 하고는 곡도(鵠島, 백령도의 옛 이름)에 당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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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변경 2025.09.01. 11:27 | |
| | ⊙ 용마정의 물맛 |
최초등록 2025.09.01. 11: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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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흥면 외리에 물맛 좋기로 유명한 용마정(龍馬井)이란 우물이 하나 있다. 이 작은 우물은 그저 평범한 우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녘에 물을 긷던 아낙네가 우물 주위에서 낯선 흔적을 발견했다. 어찌 보면 커다란 말 발자국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큰 거인 발자국 같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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