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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응의 아우내장터 독립만세 운동 연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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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천면 유관순(柳寬順) 천안시(天安市) # 3.1만세운동 # 김구응 # 병천교회 # 아우내
【문화】
(2023.11.07. 13:43) 
◈ 김구응의 아우내장터 독립만세 운동 연구자료
출전 : 성공회 역사연구회 정기소식지 <제13호>(2006년 3월 16일)
유관순 열사에 가려진 아우내 독립만세 운동에 대한 성공회역사연구회 연구자료
출전 : 성공회 역사연구회 정기소식지 <제13호>(2006년 3월 16일)
 
 
병천교회는 이제 선교 100년이 되는 긴 역사를 가진 교회가 되었다. 100년이란 시간은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지난 세기 100년을 피로 얼룩진 시련의 근대사라고도 하지 않던가. 이 글에서는 그 100년의 역사 속에서 가장 큰 민족의 수난이었던 일제 강점기 때의 3. 1만세운동에서 병천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관순 열사를 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이 지역에서의 3. 1만세운동의 모든 것은 유관순열사로부터 시작되고 또 그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사건의 진실이 많은 부분 포장되고 상품화되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연유로 그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우리 병천교회와 또 우리 교회가 운영하던 진명학교와 그 학교 교사였던 김구응 선생님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묻혀있었다. 그래서 이 글은 유관순열사가 3.1만세운동의 중심이 되기까지의 속사정과 그리고 우리 병천교회와 진명학교의 3.1만세운동에서의 중심적 역할에 대해 밝히는 데 있다.
 
 
1. 유관순 열사 중심의 3.1만세운동에 대한 반박
 
유관순 열사에 대한 현재의 역사적 평가는 김구응 선생과 그가 속해있던 병천교회와 진명학교에 대한 전무한 평가에 대해서는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드러나지 않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병천(아우내)은 매우 좁은 지역사회라는 것이다. 병천이란 곳은 천안 동부 6개면의 중심이기도 하려니와 순대라는 먹거리와 인근 독립기념관과 유관순기념관, 상록리조트 등 많은 관광자원을 갖고 있어 유동인구는 무척 많지만 정작 면 인구는 5천여명 정도 밖에 안되는 아주 작은 지역사회이다. 그러다 보니 아우내 만세운동에 관련된 사람들의 자손들이 현재 이곳에 아직 살고 있으면서 모두 사돈의 팔촌 등 친인척 관계로 연결되어 있거나 또는 몇 대째 내려오는 아주 가까운 이웃사촌지간인 것이다. 따라서 의가 상할 민감한 이야기는 서로 조심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는 것이 지역 문화라는 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런 사실을 밝혀서 지역사회에 전혀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유관순 열사는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생가는 물론 기념관, 초혼묘등이 복원 내지는 건립되어 성지화 되었고 또 그것이 연유되어 독립기념관까지 인근에 세워졌으며 매년 엄청난 숫자의 학생들이 수학여행등을 통해 찾아오는 등 지역경제에 큰 이바지를 하고 있는 이 마당에 굳이 그게 아니라고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세 번째, 3.1만세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그 거사에 적극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옥고를 치르거나 심한 감시를 받았다. 또한 그 가족들은 물론 이 지역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한층 심해졌다. 일반 지역민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겪는 불편함은 그대로 불순분자 가족들, 즉 거사에 적극 가담했던 투사들의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이에 유관순 열사의 가족 대부분과 김구응 선생의 가족들은 자의반 타의반 이곳을 떠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구태여 그날 거사에 대한 실패한 기록을 남길 필요도 없었을 뿐더러 더군다나 그에 가담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따로 보관하는 위험천만한 일을 할 필요성은 전혀 없었다. 지금 남아있는 기록은 대부분 일제의 재판기록 등 일본에 의해 남겨진 기록들과 지역민들의 후손에게 전해진 구전이 전부이다. 따라서 유관순 열사와 같이 방대한 재판 기록을 갖고 있는 경우와 달리 그날 현장에서 바로 죽음으로써 재판 따위의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는 그 평가에 있어서 불리 할 수 밖에 없다. 즉 다시 말해서 그날 현장에서 즉사한 김구응 선생과 그의 어머니 최씨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그리고 남아있는 가족들마저 먼 친척들에 의해 서둘러 소개됨으로써 기록은 고사하고 기억마저 애써 지워버린 상황에서 적절한 평가 따위를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이유들로 인하여 아우내 만세운동에 관한 한 유관순열사를 제외한 다른 적극 가담자들에 대하여는 많은 자료가 있지도 않을 뿐더러 그 평가 또한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당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유관순 열사는 어떻게 하여 이거사에 가장 중심적 인물로 되었는지 살펴보자.
 
 
1919년 4월1일(음력3월초하루)에 있었던 3.1만세운동은 그 기세에 밀린 일본 경찰이 철수한 후 10여일만에 일본군이 다시 들어옴으로서 일단락된다. 그리고 병천 일대에 주모자 및 가담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열풍과 탄압이 시작된다. 주모자들은 검거되거나 자수하였으며 그 주모자 가족들은 자의반타의반 이 지역을 떠나거나 입 다물고 조용히 지내게 된다. 이 지역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곧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해방이 될 때까지 26년 동안 이 만세운동을 기념한다거나 그 희생자들을 추모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행사나 행동은 있을 수도 없었다. 그 날의 모든 것은 과거의 한 사건으로 서서히 잊혀질 뿐이었다.
 
해방 후 이 지역 출신이면서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인 조인원의 아들이기도 한 독립운동가인 조병옥(1894-1960)박사가 대한민국 수립정부에 입각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은 새로운 조명을 받기 시작한다.
 
조박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과 함께 경무장관, 대통령특사, 유엔 한국대표 등을 겸직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과 민족적 구심점을 찾기에 고심한다. 그는 한 동네의 유관순을 생각해내고 그녀를 한국의 잔다크로, 해방의 여전사로 부각시킨다. 또한 조박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도 자신의 부친 조인원이 아우내 만세운동에서의 주동자 중 한 사람이며 현장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것을 알리는 등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것도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관순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제작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는 볼거리가 없던 당시 공전의 히트를 쳤으며, 그 후 1962년에도 역시 이를 소재로 한 같은 영화가 제작되어 교육목적으로 대한민국 학생이라면 모두 단체관람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후 유관순 열사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되고 그 후 계속해서 병천에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각종 사업들이 줄을 이었으며 그 결과 '유관순 기념교회'의 건립(1967), '유관순생가'의 복원(1991년), '추모각과 봉화탑'의 건립(1972), '유관순 열사의동상'건립(2003) 등이 이루어진다.
 
바로 여기에다 약간의 상업적 요소, 즉 다시 말해서 이를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려는 지역사회의 의도가 맞물리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아도 크게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유관순 열사에 대해 그녀의 만세운동의 업적을 폄훼하거나 그녀의 민족 영웅화를 비판하자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그녀의 독립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아우내 만세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뿐만아니라 그녀는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어 그 다음 해에 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형무소 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독방에 갇히기도 했으며 끝까지 우리나라 독립의 정당성과 일본의 부당한 강점에 항의했다는 것은 익히널리 알려진 바와 같으며 이는 우리들에게 민족의 큰 별로써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유관순열사 그 자체에 문제점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의 유관순 열사에 대한 상품화와 그로인해 다른 많은 3.1 아우내 만세운동의 실질적인 주역들이 묻혀버렸다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3.1만세운동을 류관순열사 중심이 아닌 성공회 병천교회와 진명학교를 중심으로 재구성해봄으로서 어느 것이 더 객관적이고 사실에 부합하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병천교회와 3.1운동
 
유관순은 당시 이화학당에 재학중인 학생의 신분으로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가 풀려난다. 그리고 3월 10일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인 병천으로 내려와 서울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세한 소식을 그의 오빠를 지도했던 성공회 진명학교의 김구응 선생에게 전달한다. 그는 이미 오래 전 부터 광복회원이었던 유창순, 김상훈 등과 독립의 방법을 의논하며 농촌계몽운동을 꾸준히 펼쳐오던 바였다. 또 이미 천안 지역과 직산 등지에서는 크고 작은 시위가 있었으며 3월14일 바로 옆 동네인 목천보통학교 학생 120여명이 교정에서 벌였던 시위운동은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인 그에게 병천 지역에서의 시위를 주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진명학교 부교장이면서 병천교회의 전도사였던 박병무(어거스틴), 강내희 등 교회 청년들과 매일 밤 교회사무실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를 했다. 바로 이곳에서 만세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나오고, 일정이 정해지고,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음은 여러 정황과 그리고 그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서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3.1만세 운동에 대한 일본의 재판 기록은 두 건의 사건으로되어 별도의 재판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지역의 만세운동이 그 운동에 참여하다 잡힌 사람들을 한데 묶어 하나의 사건으로 처리, 재판했던 것과는 크게 다른점이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아우내 만세운동의 주도세력이 하나가 아니라 최소한 둘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세력은 별도로 만세운동을 준비했음을 이것으로 알 수 있다. 때문에 재판부는 이를 하나의 사건으로 도저히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보면 그 두 세력이 아주 긴밀하게 협조하였다는 것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왜냐면 병천은 무척 작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그러나 조직적으로 거사가 일어났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도 한 날 한 시에 같은 장소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두 세력의 긴밀했던 사전 교류와 협조는 분명 지역 공동체가 그 중심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했던 때도 아니고 기껏해야 사람의 입과 발에 의존하던 시절에 그처럼 조직적인 거사 준비를 했다는 것은 그것을 총괄하고 조정하던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만세운동을 위한 공동체가 이를 임박하여 조직되었을 리는 없을 것이며 오히려 기존에 있던 것을 이용했으리라는 것이다. 당시 병천에 그만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공동체는 성공회와 그곳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뿐이었다. 감리교회는 성공회보다 먼저 들어왔지만 곧 없어졌고 만세운동이 끝난 1920년에 다시 세워졌으며, 그 밖에 그런 일을 감당해낼 만한 다른 공동체는 달리 없었다.
 
성공회와 진명학교, 그리고 그 공동체 내의 소모임이었던 기독청년회의 주축은 김구응 선생과 박병무 전도사이다. 그곳에서 모의하고 준비했던 구체적인 시위 계획은 다음과 같다.
 
 
(1) 효과적으로 시위를 하기 위해 지역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모두 6개 지역으로 나누었는데 주로 기독청년회의 회원들인 목천면의 홍장섭, 북면의 유연하, 병천면(당시갈전면)의 박제식, 동면의 김소용, 수신면과 성남면의 강태희가 그들이다.
 
(2) 인근 지역 인원을 최대한 동원하고 지역 내 유지들의 협조를 최대한 받음으로해서 거족적 만세운동이 되도록 한다.
 
(3) 만세운동은 평화적 방법을 원칙으로 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아니된다.
 
(4) 만세운동 당일에 사용할 태극기 그리는 일을 하였다. 이 일은 박병무 전도사는 물론 김구응 선생과 진명학교 학생들, 그리고 교인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는 물론 진술에 따른 것이며 그 진위를 파악하기란 어렵다. 다만 유관순 열사가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남아있으며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 역시 확실하다.
 
 
"(전략)........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철천 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조선 독립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꾀하고 자택에서 태극기 (구 한국국기 압수 영 제 1호)를 만들어 이를 휴대하고 동일 하오 1시경 동 시장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수천 명의 군중 단체에 참가하여 전시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시위운동을 감행하여 치안을 방해하였고. . . . ." (후략)
 
 
태극기의 제작은 유관순 열사가 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당시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이 병천에는 극히 적었거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서울에서 이미 만세시위운동을 보고 겪은 유관순 열사가 가지고 내려온 태극기를 참고하여 대량 제작에 나섰을 터인데 그 시작은 물론 유관순 열사였을 테지만 기껏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인쇄에 의존하지 않고 수천 장의 태극기를 혼자 그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태극기의 제작은 유관순열사가 서울에서 가지고 내려온 것을 샘플로 하여 진명학교에서 교인들과 기독청년회와 학생들이 함께모여 비밀리에 제작하였다는 진술이 설득력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수천 장이나 되는 그렇게 많은 태극기를 그릴 수 있는 장소와 인원이 동원될 수 있는 곳은 진명학교 밖에는 없었고 또 진명학교는 영국인 사제 구세실 신부가 교장으로 있는 곳이니 만큼 일본의 감시와 통제로부터 조금은 자유스러운 곳이었을 것이다.
 
또한 작은 지역사회에서 일본 경찰도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고 있던 터이라 당시 유지였던 강대형(아브라함), 정관서(요셉) 등이 신자로 있는 성공회 교회나 진명학교에 대하여 그토록 강압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3. 아우내 만세운동의 현장
 
만세운동을 앞둔 며칠 전부터 병천의 주위 모든 산에 봉화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이는 당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면서 곳곳에서 보여졌던 봉화시위 현상으로서 비단 병천 만의 풍경은 아니었다. 거사를 하루 앞둔 전날 밤 평상시와는 다르게 모든 병천을 둘러싸고 있는 동림산, 서림산, 은석산, 매봉산, 상봉산 등에 일제히 봉화가 올려진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유관순열사도 4월 1일(음력으로는 3월1일) 장날을 이용한 만세운동을 알리기 위해 직접 매봉산에 올라 봉화를 올린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유관순 열사는 이에 앞서 그의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인근 지역을 다니며 장날을 이용한 만세운동을 알리며 그 참석을 종용하였다. 이는 아무래도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기에는 어린 여학생이 유리했을 것이기에 그러했다고 그의 사촌동생 유정석은 증언한다.
 
한편, 김구응 선생과 박병무전도사는 당시 진명학교 학생들과 기독청년회원 등 40여명을 동원하여 장날 모여드는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준다. 이 태극기들은 며칠 전부터 김엘리야, 김인애, 강신덕, 강태민 등이 밤마다 모여 그려 만들었던 것이다.
 
평소 장날보다 많은 군중으로 뒤덮인 병천 읍내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기록마다 그 동원인원에는 차이가 있는데 병천 읍내의 규모나 장터의 크기(길이350미터, 폭 40미터)로 보아, 그리고 당시 인근 지역 주민의 동원 가능한 인원수를 고려해 볼 때 약 5천여명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시위 군중의 앞장을 누가 섰는가라는 점에 있어서도 그 주장들이 상반된다. 가장 일반적인 것이 조인원과 유관순열사라는 주장이다. 이는 앞에서도 밝혔듯이 해방 후에 조병옥박사에 의해 유관순열사를 기리는 영화가 제작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도 신방성있는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겠지만 어느 특정한 한 면만을 부각시켰기에 나머지는 모두 가려졌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이 만세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최소 2개 이상의 서로 다른 집단이었다. 한 장소에서 두 개 이상의 주도세력에 의해 이 운동은 진행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도 그럴것이 음향시설 같은 것이 전혀 없던 시절에 단지 육성만으로 5천여 명이나 되는 군중을 이끌기에는, 그것도 길이가 350미터나 되는 긴 종렬의 장터에서 한 무리가 선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만세운동에 앞장선 그룹은 조인원, 유관순이 이끄는 군중과 박병무 전도사와 김구응선생이 이끌었던 성공회교회의 기독청년회와 진명학교가 주축이된 군중이 더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후에 있었던 일본 재판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5천명 이상되는 군중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반면에 당시 병천 지역에 있던 일본 헌병은 모두 7명이었고 그 가족까지 어림잡아 20명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에 대한 피해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보아 이 만세운동이 초기에는 얼마나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나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또 몰려드는 많은 군중에 몹시 겁에 질렸던 일본헌병은 지원군을 요청했고 오후 늦게서야 연락을 받은 일본군 2개 소대가 도착하여 총을 쏘며 진압하게 되자 많은 사상자가 났으며 만세운동은 새로운 국면으로접어들게 된다.
 
일본군의 총탄에 가장 먼저 쓰러진 자가 바로 진명학교 교사였던 김구응선생었다. 그는 만세운동 군중의 맨 앞에서 군중을 인도하다가 지원 나온 일본군의 총탄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된다. '쓰러진 그의 손에는 독립선언서가 쥐어져 있었다' 고 전해진다.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조만형 등은 생전에 '독립선언서 낭독을 김구응이 했다' 고 증언하였다. 반면에 천안 향토사학연구소장인 임명순 소장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독립선언서가 아우내 만세운동에서 읽혀졌다고는 보기 힘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구응 선생이 만세 군중 맨 앞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총탄에 가장 먼저 쓰러졌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신문의 보도에도 자세하게 나타나있어 이에 소개한다.
 
 
' 지난 4월경에 천안군 병천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운동이 있었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 이제 <독립신보>를 의지하여 자세한 소식을 게재하노라.
 
당초에 독립시위운동이 일어날 때에 김구응, 박종만 양씨 주도하에 수천여명의 군중이 맹렬하게 시위운동을 행할 때에 든든하고 당당한 농민 1인이 선두에 태극기를 잡고 행진하는 중에 1만 군중은 독립만세를 끊임없이 높이 부르는데 저 무법한 왜 경관은 그곳에 급히 이르러 적수공권의 손에 촌철의 무기도 갖지 않은 평화적 독립을 부르짖는 우리 족속 30여명을 총사하여 즉시 우리 독립군의 귀신이 되었더라. 부상한 수효는 얼마나 많은 수효를 다 알 수 없고 왜경관이 독립기를 든 사람의 손을 칼로 찍으려 하는 고로 기수는 맨 손으로 대검을 잡아 유혈이 림리(피가 뚝뚝 떨어지는 모양_필자)하고 마침내 저 왜적에게 복부가 찔려 순절하였으며, 김구응씨와 왜 경관이 서로 쟁론할 때 저 왜적이 말이 몰려 궁색하여 제가 제 총으로 자살하겠다 하더니 총날을 김씨의 복부에다 대고 발포하여 당장에 죽인 후에 시체에 대하여 머리를 깨뜨리고 검으로 사지를 어지러히 하매 김씨의 모친 노인이 이미 시체를 어루만져 혼도하며 오랑캐 왜적에게 대하여 "나도 죽여달라" 하고 강경한 어휘로 왜적에게 항거한 즉 저 오랑캐 역시 그의 늙은 모친까지 찔러 그만 세상을 하직하였더라.
 
부상한 자는 그 부근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병이 좀 나아서 환입하는 자에게는 일일이 항서를 강제로 요구하였으며, 일일이 거절하면 감옥으로 돌려보냈더라."
 
 
이 기사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을 알게 되는데, ' 수천여명의 군중이 맹렬하게 시위운동을 행할 때에 든든하고 당당한 농민 1인이 선두에 태극기를 잡고 행진하는 중에. . . . .' 라는 기사에서 선두에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앞장섰던 바로 그가 후에 진명학교교사를 했던 이종성의 부친 이춘범이라는 사실이다. 아들인 이종성 역시 만세운동에 앞장섰으며 그 이유로 서울제일고등보통학교를 퇴학당하고 진명학교 교사로 채용된다.
 
이 밖에도 우리 성공회 교인으로서, 또는 진명학교 학생으로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인물로는 정정문, 이바톨로메오, 이사겸, 조만형, 정관서(요셉, 회장), 임화삼(사무엘), 홍장섭(야고보), 배도삼(사가리아) 등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아우내 만세운동에서 성공회 병천교회와 진명학교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또 많은 인원이 이에 적극 가담하였고 그 과정에서 사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몇가지로 볼 수 있겠는데, 그 첫 번째 이유는 앞서도 계속 밝혔듯이 유관순, 조인원 중심의 아우내 만세운동으로 제작된 영화와 책자들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이 만세운동에서 가장 주도적 역할을 했던 김구응 선생이 현장에서 바로 사살됨으로서 재판 등 그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의 가족들마저도 일본의 후환이 두려워 쉬쉬하며 그 고장을 떠나 흩어져 살아 온 까닭에 재대로 된 기록 하나 남아있지 못하다. 성공하지 못한 거사는 결국 묻혀지기 마련인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성공회 병천교회의 주축 교인들 중 강대형(아브라함), 정관서(요셉), 송인섭 등이 워낙 병천지역에서 큰 인물이다 보니 일본 경찰도 그들에 대해서는 눈치를 아니 볼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헌병에 쫓기거나 잡혀간 많은 교인들과 지역민들을 숨겨주고 빼주었으며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해주기도 하였다. 물론 이런 사실을 일본 경찰도 알고 있었으나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입으로 전해지는 미담만 남아 있을 뿐 재판 등 문서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까닭에 그러하다. 이밖에도 일본과 영국과의 친밀했던 밀월 분위기의 정치적 이유로 영국인 구세실 신부가 사제와 교장으로 있던 병천교회와 진명학교에 대해 아무래도 호의적인 입장이었을 것이라는 추리는 가능하다.
병천면 유관순(柳寬順) 천안시(天安市) # 3.1만세운동 # 김구응 # 병천교회 # 아우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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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월 초기시 3편 발굴 (경향신문 2004.04.30)
• 김구응의 아우내장터 독립만세 운동 연구자료
• 족보의 일반 상식-용어 해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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