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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내린 효자, 최루백(崔婁伯)
2015년 7월 3일
about 문화재·역사·전
내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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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1. 19:07) 
◈ 하늘이 내린 효자, 최루백(崔婁伯)
수원 박물관에서 "조선의 책문화"란 강좌때 들은 효자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이야 내리사랑이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도리를 다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요즘 들리는 뉴스처럼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부모에게 효를 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세종때 효를 널리 알리고자 글보다 알기 쉬운 그림으로 만든 책이 삼강행실도다. 그 삼강행실도에 있는 하늘이 내린 효자, 최루백에 대해 적는다.
수원 박물관에서 "조선의 책문화"란 강좌때 들은 효자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이야 내리사랑이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도리를 다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요즘 들리는 뉴스처럼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부모에게 효를 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세종때 효를 널리 알리고자 글보다 알기 쉬운 그림으로 만든 책이 삼강행실도다. 그 삼강행실도에 있는 하늘이 내린 효자, 최루백에 대해 적는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삼강은 임금과 신하 간의 군위신강 君爲臣綱, 어버이와 자식 간의 父爲子綱, 부부간의 夫爲婦綱 )
1428년 진주(晉州)에 사는 김화(金禾)가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에 대하여 강상죄(綱常罪: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난 죄)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논의되었다. 이에 세종은 엄벌에 앞서 세상에 효행(孝行)의 풍습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발간 배포(發刊配布) 해서 백성들에게 항상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에서 만든 것이 삼강행실도다. 직제학(直提學) 설순(偰循) 등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부자·부부의 삼강에 모범이 될만한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아 만든 책으로 3권 1책이다.
 
\na-;▼ 고려때 최루백이 도끼로 호랑이를 죽여 부친 원수를 갚다.(삼강행실도에서)
 
 
 
●최루백(崔婁伯 : ?~1205))
①수원의 아전 최상저(崔尙翥)의 아들이다. 최상저는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수원최씨(수주최씨)의 시조이다.
②최루백은 고려 때부터 효자로 널리 알려져 '고려사' 열전 효우편과 조선시대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에 그 일화가 남겨져 있다.
③그의 효자비각은 현재 봉담읍 분천리 165-1번지에 위치하며, 화성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돼 있다.
​▼최루백효자비각 : 최루백은 그의 관직생활보다도 그의 효행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최루백 효자비각은 고려 의종 때 최루백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④효자 최루백의 일화는 다음과 같다.
 
15세에 아버지가 사냥을 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이에 최루백은 어머니의 만류에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도끼를 들고 나섰다. 그는 호랑이의 발자국을 쫓아가 배불리 먹고 누워있는 호랑이를 발견했다. "네 어찌 하늘같이 받들고 있는 나의 아버지를 네가 무참히 해했느냐. 나는 너를 잡아 먹어야겠다"하고 꾸짖으니 호랑이는 그 자리에서 이내 꼬리를 내리고 납작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최루백은 도끼로 호랑이 머리를 내리치고 배를 갈라, 부친의 뼈와 살점을 골라 그릇에 넣어 홍법산 서쪽에 매장했다. 그리고 그 곁에 움막을 세워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시묘중인 어느 날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아버지가 나타나 “숲을 헤치고 효자의 여막에 이르니 정(情)이 많으매 느끼는 눈물이 다함이 없도다. 흙을 져서 날마다 무덤 위에 보태니 소리를 아는 것은 명월(明月)과 청풍(淸風)뿐이로다. 살아서는 봉양(奉養)하고 죽어서는 지키니 누가 효(孝)가 시종이 없다 이를 소냐.”라는 시를 읊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정말 호랑이를 때려잡았을까? 이런 의문이 든다. . 답은 하늘이 내린 효자라 가능하단다.
 
⑤후에 최루백은 과거에 급제해 1153년(의종 7) 사신으로 금나라에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기 위해 다녀왔으며, 1154년(의종 12)에 치러진 승보시(升補試: 생원을 뽑는 시험)를 국자제주 염직량과 함께 주관하는 등 여러 관직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 국자사업(國子司業) 한림학사(翰林學士) 벼슬을 했다.
 
⑥최루백과 그의 아내
염경애(廉瓊愛 : 1100~1146) 묘지명의 삶을 통해 ‘인물 최루백’에게 한걸음 더 다가가 보자.
 
최루백은 효자이면서도 검소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의 묘지명에는 ‘그가 사람됨이 너그럽고 공손하며 검소하였다’고 적고 있다. 아내 염경애의 묘지명에는 최루백의 검소하고 강직한 모습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가난한 삶을 살아온 최루백이 지제고(知制誥:고려시대 관직으로 조서(詔書)·교서(敎書) 등을 작성하는 일을 맡는다)에 임명되니, 아내인 염경애는 “우리의 가난이 가시려나 봅니다”라고 기쁜 빛을 띠며 말했다.
 
이에 최루백은 “간관은 녹이나 지키는 자리가 아니오”라고 하자, 아내가 다시 “문득 어느 날 그대가 궁전의 섬돌에 서서 천자(天子)와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논쟁하게 된다며,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가게 되더라도 또한 달게 여길 것입니다."라고 했다. 최루백의 검소하고 강직한 삶과 함께 이를 지키도록 한 아내 염경애의 내조가 엿 보이는 일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⑦최루백은 자신의 처인 염경애가 1146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 아쉬움에 자신이 직접 묘지명을 짓는다. 보통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는데, 최루백이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고려시대 여성 ‘염경애’라는 이름 대신 ‘봉성현군 염씨’, ‘최루백의 처’로만 기억될 일이었다. 최루백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음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실이라 할 수 있다.
 
⑧묘지석의 내용은 최루백 자신과 가난을 함께 하며 아무런 말없이 옆을 지켜준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함께 한 23년 세월 동안 모시지 못한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해마다 제사를 지낸 아내의 효심과 자신에게 올바른 내조를 해준 일들을 고마워하는 내용, 아내가 죽은 후 집안의 형편은 더 나아졌지만, 아내가 있을 때만 못하다는 아쉬움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글로 가득하다. 최루백이 아내 염경애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담아 써 내려갔음이 글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다.
 
⑨최루백은 효자이며,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가장이었다. 가정, 개인과 나라, 그래서 효와 충은 오늘날 양립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다. 부모님 살아계실 적에 효도를 다하거라고 가르침을 받은 유교 국가에서는 충보다 효를 우선시한다. 충과 효중 하나만 고르라면 당신은?
 
 
 
 
 
 
\na-;출처: 수원문화원,네이버지식백과. 중부일보,역사스폐설 ,유튜브
 

 
※ 원문보기
문화재·역사·전
• 어느 임금 글씨가 맘에 드세요? -후편-
• 하늘이 내린 효자, 최루백(崔婁伯)
• 어느 임금 글씨가 맘에 드세요?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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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