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사노비는 개인의 자산이다. 많은 권문세가 집은 노비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유지되었다. 그 와중에 종이 주인을 잘 만나 면천(免賤) 하여 다른 양반집에 양자로 가서 훗날 형조판서를 지낸 반석평의 스토리를 소개한다.
우리나라 전통적 신분제 사회에서의 최하층 신분. 통속적으로는 ‘종’이라 불렀는데 노(奴)는 사내종, 비(婢)는 계집종을 뜻한다.
조선시대 참판집 종인 반석평(潘碩枰, ?∼1540)은 주인집 아들이 공부하는 동안 몰래 밖에서 도둑 공부를 하는 등 공부에 대한 열의를 보였습니다. 나중에 주인의 사랑을 받아 글을 배우고 아들 없는 사대부집의 양자로 입양되어 1507년(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쳐 예조참판·한성부판윤·형조판서를 역임했다.
●반석평(潘碩枰) 형조판서 시절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자신의 노비 신분을 없애 준 주인의 아들을 만나게 되는데, 주인 집안은 몰락했고 그 아들인 이오성은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종 2품인 반석평은 그를 보자 바로 가마에서 내려와 절을 합니다.
후에 반석평은 중종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이오성에게 자기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합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중종은 반석평의 지위를 유지함과 동시에 이오성에게 벼슬을 내렸다. 본래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조안리에 있었던 반석평의 묘를 충북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 해산으로 이장하였다.
자신의 재산인 노비를 크게 될 인물로 보고 놓아준 이침판의 그릇이 크고, 그 기대에 부응하여 노비에서 형조판서까지 오른 반석평을 보면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 원문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