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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閑中錄)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2019.11.21. 19:07) 
◈ 한중록과 헤경궁 홍씨
​올해는 정조임금이 어머니 혜경궁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행궁으로 행차하여 회갑잔치를 베푼 지 220주년이다. 6천명이 넘는 수행원을 이끈 최대 규모의 국왕행차와 도성을 벗어난 최초의 왕실잔치로 그 주인공인 혜경궁 홍씨에 대하여 올린다.
​올해는 정조임금이 어머니 혜경궁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행궁으로 행차하여 회갑잔치를 베푼 지 220주년이다. 6천명이 넘는 수행원을 이끈 최대 규모의 국왕행차와 도성을 벗어난 최초의 왕실잔치로 그 주인공인 혜경궁 홍씨에 대하여 올린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정조의 모친이다. [한중록]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녀의 일생을 재구성하기란 쉽지 않다. 팔십여 년의 일생 중 칠십 여년을 삼엄한 궁중에서 생활해야 했던 여인 혜경궁 홍씨. 그녀는 한 많고 억울한 감정을 호소하기 위해 그녀의 궁중 인생이 녹여진 [한중록]을 집필했다.
 
과거 혜경궁 홍씨의 이미지는 [한중록]에서 묘사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도세자는 정신병자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고, 그런 남편을 견디어야 하는 인고의 여성상이었다. 그런 이유로 혜경궁 홍씨는 동정을 받아야 하는 인물이었고, 모진 세월을 뚫고 아들인 정조를 왕위에 올린 훌륭한 어머니이기도 했다.
 
비운의 여성으로, 혹은 정조를 낳은 훌륭한 어머니로 묘사되던 혜경궁 홍씨는 최근에 들어와 권력 지향적인 냉혹한 여성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한 상반된 이미지가 나오게 된 것은 남편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그녀가 방조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정신병이 아닌 노론과 소론의 당쟁 속에서 비참하게 희생되었다고 본다면, 노론을 친정으로 둔 혜경궁 홍씨는 과연 누구의 편을 들었을까?
 
\na-;▼수원화성박물관 특별기획전 ( ~8/9)
 
 
혜경궁 홍씨(이하 홍씨)는 1735년 6월 18일 서울 거평동(오늘날 서대문 밖 평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홍봉한(洪鳳漢)이다. 홍봉한은 혜경궁 홍씨가 태어나기 전에 검은 용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홍씨가 태어난 해에 홍봉한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었다. 딸이 태어나고 정확히 두 달 뒤인 8월 18일에 홍봉한은 성균관 진사 신분으로 송시열과 송준길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홍봉한의 상소를 영조는 그리 달가워 하지 않았다. 상소가 불만이었던지 영조는 곧바로 성균관 유생들의 출석을 점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유부남인 탓에 출석점수가 낮았던 홍봉한은 5년간의 자격정지 처벌을 받았다. 규칙은 2년간의 자격정지였지만, 영조는 특명을 내려 5년으로 늘렸다. 사돈지간이 될 홍봉한과 영조의 출발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8년이 흐른 뒤 이들은 자식의 혼사 문제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린 시절 홍씨는 집안에서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하였고 외조부인 홍현보(예조판서)는 그녀가 보통 아이와는 다르다는 것을 일찍 간파하였다. 홍씨가 살았던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였으므로 개인의 능력이 우선시 되는 사회가 아니었다. 가문의 배경이 인생을 좌우하던 시대였다. 때문에 노론 집안 출신이라는 그녀의 가문 배경은 그녀를 세자빈으로 만들었지만, 그것은 양날의 칼처럼 일생동안 짊어지어야 할 운명이기도 했다.
 
장래 그녀의 남편이 된 사도세자와 홍씨는 1735년생으로 동갑내기였다. 1743년 9세가 된 사도세자는 그해 봄, 유교의 성인식인 관례(冠禮)를 치뤘다. 비록 9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관례를 치름으로써 사도세자는 공식적으로는 성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세자는 관례 이후 성균관을 참배하는 것이 순서였다. 사도세자도 관례 직후인 3월 23일 부친인 영조와 함께 성균관을 참배했다. 이날 영조는 대사례(大射禮, 성균관에서 거행하는 활쏘기 행사)를 거행한 뒤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알성시(謁聖試)를 시행하였다.
알성시는 국왕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공자에게 참배한 후 치르는 과거시험이었다. 당시 성균관 장의(掌議 : 지금의 학생회장)였던 홍봉한은 시험에서 떨어졌고, 다음날 궁궐에서 떨어진 학생으로 참석하여 영조를 직접 뵈었다. 이때 홍봉한의 나이 31세였고 영조는 50세였다. 홍봉한은 영조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시험에서도 낙방하고 말았다.
 
첫 만남 때와 달리 영조는 홍봉한에게 호감을 가졌던 듯싶다. 그의 딸을 세자의 배필로 결정했고 그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세자의 배필을 뽑는 세 번의 간택 중 첫 번째 간택에서 약 100명의 처녀들이 참여했다. 대부분이 한성부에 거주하는 명문대가 출신이었다.
​그러나 간택이 시작되기 전에 홍씨는 이미 세자빈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과 누나인 화평옹주가 간택 자리에 가기도 전에 불러다가 예절 교육까지 시킬 정도였다. 혼인식은 1744년(영조 20) 1월 11일에 있었다. 홍씨는 세자를 따라 창덕궁으로 갔다. 이때 세자나 홍씨 둘 다 10세에 불과한 미성년자들이었다.
혼인 당시 등과(登科)도 못하고 9품직에 머물러 있던 홍봉한은 왕실과 혼인을 맺으면서 그렇게도 자주 떨어졌던 문과 전시(초시,복시 후 치루는 3차시험)에 합격하였다. 이제 그의 출세 길은 탄탄대로였다.
 
10세의 어린 세자빈은 궁궐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궁궐에는 심성 곧고 예의 바른 그녀를 이끌어주는 실질적인 시어머니 선희궁 이씨와 시누이들인 화평, 화협, 화완, 화순옹주들이 있었다.
시아버지 영조는 여러 딸들 중에서도 특히 화평옹주를 가장 사랑했다고 전한다. 화평옹주는 영조와 선희궁 사이에서 태어난 맏딸이다. 영조의 편애를 받은 화평옹주는 하나뿐인 남동생 사도세자의 든든한 후견인이자 버팀목이었다.
 
세자빈 홍씨의 궁궐 생활은 고달팠다. 이른 아침부터 남편인 세자와 함께 궁궐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를 가야 하는 일로 하루 일이 시작되었다. 궁궐 생활을 막 시작하여 매사에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세자빈과 달리 세자는 태평이었다. 세자빈은 그런 세자를 받아들여야 했다.
 
고달픈 생활도 적응이 되어 갈 무렵, 세자 부부의 후견인 역할을 하던 화평옹주가 난산(難産) 끝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가장 사랑하는 딸인 화평옹주가 죽자 영조는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했고, 영조의 과도한 슬픔은 곧 세자부부의 인생에 격랑을 몰고 왔다.
 
화평옹주가 세상을 떠난 뒤 15세가 된 세자 부부는 성인식을 치르고 비로소 합방을 했다. 마음이 설레던 성인식 날, 갑자기 영조는 세자에게 선위교서(禪位敎書, 선위란 왕이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를 내렸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영조는 세자가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렸다며 처음부터 자신은 왕위에 관심이 없었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는 경종의 독살설에 대한 ‘결백증명쇼’일 뿐이었다. 이런 일은 처음도 아니었고 몇 년에 한 번씩 반복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때만큼은 영조의 태도는 아주 강경했다. 세자를 통 믿을 수 없으므로 그가 정치를 어떻게 하는지 생전에 지켜봐야겠다는 말도 했다. 세자는 영조 앞에서 통곡을 했다. 신하들의 강력한 만류로 물러나겠다는 뜻을 접긴 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세자 부부의 마음은 타들어갔을 것이다.
 
여리면서도 감정 기복이 심했던 영조는 특정 자식들에 대한 편애가 심한 아버지였고, 특히 사랑하던 맏딸 화평옹주가 죽은 뒤로는 의지해야 할 아들인 세자를 오히려 멀리했다. 사도세자는 사실 영조가 42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을 처음부터 영조가 싫어할 리 만무했다.
 
당시 영조는 경종을 모셨던 궁녀와 환관들에게 아들을 맡겨 결백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왕과 세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사도세자는 속죄양 신세였다. 결국, 자식마저도 자신을 선왕을 죽인 살인자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졌을는지도 모른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점점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사이로 변해갔다. 영조의 어정쩡한 태도는 세자를 병들게 만들었다. 사도세자는 부친인 영조를 원망했고, 불만을 가졌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세자는 울화증이 생겨 잠도 못 자고 식사도 잘못했다고 한다.
 
시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세자빈 홍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 1755년(영조 31)에 친정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고, 세자 편이었던 대비 김씨와 왕비 서씨마저도 승하하였다. 이제 세자 곁에는 완충 역할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영조는 급기야 공공연히 세자에게 면박을 주었고, 세자의 울화증은 깊어 갔다. 영조와의 불화로 세자의 상태는 점점 나빠져가 마침내 내시 김한채를 밀고자로 의심하여 그의 머리를 베어 버리는 일이 생겼다.
안타깝게도 세자빈 홍씨는 남편의 살인 행각을 힘없이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평소에는 멀쩡하던 세자는 발작이 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마침내 세자의 생모 선희궁은 세자의 살기(殺氣)가 부친 영조마저 위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선희궁은 영조에게 아들 사도세자의 행태를 모두 밝혔다. 선희궁은 아들을 버렸고, 세자빈 홍씨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버렸다. 삼복더위가 한창이던 날,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불우한 삶을 마감했다.
16살이 된 세자빈 홍씨는 1750년(영조 26)에 첫째 아들을 낳았다. 이가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이다. 영조에게는 첫 손자였지만, 전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들을 낳다 죽은 딸 화평옹주를 생각하며 오히려 슬픔에 젖었다. 그래서인지 의소세손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세 어린 나이에 아들을 잃는 고통을 겪은 세자빈 홍씨는 그해 가을에 둘째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훗날의 정조다. 잃어버린 아들과 새로 얻은 아들, 20살도 안 된 나이에 그녀는 이미 세상의 이치를 모두 깨달은 여인이 되어갔다.
 
영조는 죽은 사도세자를 폐서인했다. 폐서인이란 세자를 폐위하여 평민으로 만든다는 의미이다. 세자빈 홍씨도 더 이상 세자빈이 아니었다. 어느덧 28살의 나이가 된 홍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사도세자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세자빈 신분을 되찾았고 궁궐로 들어갔다. 이제 홍씨에게 남은 희망은 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아버지 영조와 불화한 남편 사도세자의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되었다. 홍씨는 시아버지 영조의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궁궐로 재입궁한 뒤 몇 개월이 지나 만난 영조에게 홍씨는 “저희 모자가 보전함은 모두 전하의 성은이로소이다.”라며 원망과 비난 대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 홍씨의 태도에 영조는 “내가 너를 볼 마음이 어려웠는데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니 아름답구나.”라며 감격해 했다. 영조는 그녀의 효행을 칭찬하고 표창까지 내렸다. 시아버지의 신임을 얻은 것이다. 홍씨의 희망대로 영조와 세손 사이에는 유대감이 쌓이기 시작했다.
 
1764년(영조 40) 7월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이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영조는 12년을 더 살았다. 선희궁도 죽자 궁궐 안에 홍씨를 후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변에는 그녀를 감시하고 도전하는 사람들뿐이었다. 게다가 남편과 자식 없이 궁궐 생활을 했던 화완옹주는 세손을 마치 자기 아들인 양 독점하려 들었다.
 
어느 날 영조는 세손을 죽은 효장세자의 후사로 삼는다고 했다. 효장세자는 10세의 나이로 요절한 영조의 장남이었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된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홍씨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남편을 잃고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어나갔던 홍씨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이 일에 대해 홍씨는 [한중록]에서 다음과 같이 억울한 심정을 토해냈다.
화완옹주와 젊디 젊은 왕비 김씨(정순왕후)의 도전에도 홍씨는 세자를 잘 지켜냈다. 1776년 3월 마침내 혜빈 홍씨의 아들이자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가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생모인 혜빈 홍씨를 혜경궁(惠慶宮)으로 높이고 지성으로 효도를 다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혜경궁은 젊은 시절부터 몸에 종기가 자주 나는 지병이 있었다고 한다. 정조는 모친이 부스럼으로 고통으로 받자 궁중 내의원들을 물리치고 밤새 손이 퉁퉁 부을 때까지 약을 발라주었고 이런 효성에 씻은 듯이 낫기도 했다고 한다.
 
혜경궁이 환갑이 되던 해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수원으로 행차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지 32년 만에 남편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에 간 것이다. 실로 모진 세월을 이겨내고 얻은 보상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정조 사후에도 15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1815년(순조 15) 12월 15일에 81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사연 많은 삶을 놓아두고 세상을 떠났다.
​남편(사도세자)을 먼저 보내고 자식(정조)을 가슴에 묻은 홍씨무덤은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수원 융릉에 합장되어 있다.
 
\na-;▼한중록 (閑中錄)은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가 지은 회고록이며 <계축일기>, <인현왕후전>과 함께​ 궁궐 문학의 빼어난 작품이다. 작품은 일생 회고, 사도세자 일생, 친정 무죄 입증으로 구성되어 있다.
 
 
 
 
 
 
 
\na-;▼홍씨가 77세에 쓴 글씨와 한시
 
 
 
 
 
 
 
★느낀 점 : 오직 아들이 잘 되기만을 원하고 바랬던 혜경궁 홍씨, 그것 만이 그녀가 살아가는 삶의 전부요, 목적이었다. 그래서 혜경궁은 그 모진 세월을 견디며 살아 온 파란만장한 삶을 한중록으로 남겼다. 남편(사도세자)과 자식(정조)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혜경궁의 한중록(閑中錄)을 읍혈록(泣血錄)이라고도 하는데 그만큼 피눈물이 서려 있다는 얘기다. 혜경궁은 그녀의 힘있는 글씨체처럼 어려운 풍파를 이겨낸 비운의 여인이다. ​
 
\na-;출처: 네이버, 민족문화백과, 문화재청, 고궁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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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閑中錄)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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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