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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역사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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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024년 1월 27일
9. 강진면의 주요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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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2024.01.27. 12:53) 
◈ 9. 강진면의 주요 기념물
임실필봉농악은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옛이름:중뱅이골)에서 400여년이 가까운 세월동안 전승되어 오고 있는 작은 농경 마을공동체 사회가 낳은 문화유산이다.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만큼 긴 세월에 거쳐 삶이 예술로, 예술이 삶에로 상호 침투를 거듭하며 고차적인 예술양식으로 가다듬어져 왔다.
강진의 주요 기념물
 
필봉농악 전수관
 
임실필봉농악은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옛이름:중뱅이골)에서 400여년이 가까운 세월동안 전승되어 오고 있는 작은 농경 마을공동체 사회가 낳은 문화유산이다.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만큼 긴 세월에 거쳐 삶이 예술로, 예술이 삶에로 상호 침투를 거듭하며 고차적인 예술양식으로 가다듬어져 왔다.
 
한국농악은 대개 마을굿 전통의 유형과 전문가 집단의 유형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을굿 전통의 유형은 비전문 음악가들인 마을 두레성원에 의해 연행되고 전승되는 굿이며, 전문가 집단의 유형은 흔히 포장걸립이라는 용어와 함께 설명되는 전문적 연행집단에 의한 굿이다. 그런데 마을굿 유형의 굿에는 순수한 비전문 음악가들에 의해 연행되는 농악이 있는 반면, 걸출한 상쇠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연행되어 예능적 활동반경을 보다 광범위하게 넓힌 농악이 있다. 임실필봉농악이 이에 해당된다.
 
실존적 재구가 가능한 전승계보 범위에서 1대 상쇠로 거론되는 박학삼은 필봉마을 농악이 공연예술의 영역에서 요구되는 정형화된 양식의 기초를 세울 수 있었다. 오늘날의 중요무형문화재로서의 필봉농악은 2대 송주호 상쇠에 이어 3대 상쇠인 양순용의 땀과 노력의 결과물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양순용 상쇠는 해방과 한국전쟁 등 연이은 정치․경제․사회의 격변시대 속에서 급속도로 사라지는 마을 굿을 지키며, 전승의 위기에 처한 마을 굿을 이론과 함께 연행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또한 임실필봉농악의 굿 체계와 교육 체계의 기반을 갖춰 오늘을 있게 한 중추적인 인물로서, 한국 농악사에 있어서 반드시 기억되어야만 할 인물이다.
 
양순용 상쇠의 뒤를 이은 4대 양진성 상쇠는 양순용 상쇠의 장자이며, 취학 이전 필봉농악의 무동으로 자연스럽게 굿판에 입문하였다. 필봉농악이 1988년에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때, 전수조교로 함께 지정받아 양순용 상쇠의 전승활동 및 교육을 보조해왔고, 양순용 상쇠 타계 이후 보존회의 총회를 거쳐 필봉농악 상쇠를 이어받았다. 그가 이끄는 필봉농악보존회는 전통과 현대를 잇는 창의적 전승활동으로 현대 공연예술과 전통 예술의 연행양식을 결합한 공연예술 작품 창작, 전승 기반 확충을 위한 국내외 다양한 형태의 전승 교육을 전개하면서 무형문화재 전승단체 중에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들 상쇠를 비롯하여 임실필봉농악을 전승해 왔고 전승해 가고 있는 사람들을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로 연결하는 가치는 곧 ‘푸진 굿 푸진 삶’이라는 명제로 압축 설명된다. 굿(농악)과 삶은 별개가 아닌 일심동체이며, 현실에서 협력하고 화합하는 공동사회성을 습득하는 가장 좋은 교육장소가‘굿판’이라는 인식, 그리고 가장 강력한 공동체 유지 비결이 곧 농악이라는 공감대가 깊고 넓게 형성되어 있다.
 
이 명제는 안과 겉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현대 사회의 전승자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며, 오늘날의 다양한 전승활동의 가치 환원점으로 기능하고 있다. 어제의 여기 그들에게 임실필봉농악이 그랬듯이, 현재의 여기 우리들이 필봉농악이 담지해 온 공동체사회의 문화적 전통을 당대에 잘 이해해서 공유하면서 쓰고 후속세대에게도 잘 이어주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창의적이고 시대융합적인 공동성을 발현하는 활동들을 강구하고 실천하려 노력 중에 있다.
 
 
필봉농악의 현황
 
현재 임실필봉농악은 198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로 지정됨으로써 발족한 임실필봉농악보존회에 의해 주도적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공연·교육·문화교류 등을 통해 활발히 전승, 전파되고 있다. 매년 음력 섣달과 정월에 제액초복과 벽사진경을 기원하는 매 굿, 당산 굿, 마당밟이 등의 마을 굿을 전통에 기반하여 재현하고 있으며, 현대사회에서의 축제 형태로 농악과 농경공동체 관련 문화를 포괄하는 주제의‘필봉마을 굿 축제’도 매년 8월 셋째 주에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또한 무형유산의 지속성을 위한 당대 사람의 책무로서 제도에서 권장하는 전수교육을 통해 핵심 전승자(이수자, 전수자)양성 외에도 학교와 사회 문화예술교육, 지역사회에서의 농악을 매개로 한 문화공동체 확장을 꾀하고 있으며, 제도교육과의 연계와 국내외 공연을 통한 전파 활동까지 다양한 형태의 전승 활동을 펼치며, 안과 밖 그리고 현재를 거점으로 과거와 미래의 지평을 잇는 역할을 자발적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필봉농악의 예술 내용
 
아주 작은 마을공동체 사회에서 오랜 시간 전승되어 온 임실필봉농악은 연행의 목적, 시기, 장소에 따라 상호 공통성과 변별성을 가진 다양한 양식들로 연행되어 오고 있다. 구체적으로 나열하면, 제의-축원 형태의 마을 굿인 뜰볿이/마당밟이, 당산 굿, 노디 고사 굿, 농경-세시행사 형태의 두레 굿, 찰밥걷이 굿, 걸궁 굿/걸립 굿, 대동 판놀음 형태의 마을 굿인 대동 판굿 등이 있다.
 
이 연행 양식들은 상호 연계성이 깊지만 당산 굿, 뜰볿이/마당밟이, 매 굿과 같은 제의-축원 형태의 마을 굿을 근간으로 여기는 점이 마을의 문화적 전통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전통사회에서 농악은 마을 사회적 범주에서 정서적 소통과 치유 그리고 생활목적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능을 담당해 왔다. 특히 임실필봉농악 굿판에서 보여주는‘수평적 인간관계와 협화, 그리고 집단신명을 위한 상호 공헌과 상생 지향의 공연 세계관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소중한 공동체 사상의 요체이다.
 
1) 제의-축원 형태의 마을굿
 
농경사회의 농악은‘벽사진경’즉 액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는 의식이 표면화된 예술 양식이다. 따라서 절차 구성이나 연행 방식의 원리는 그 심층적 요인이라고 볼 수 있는‘벽사진경’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총동원된 전통 지식과 엄숙한 상징체계에 구속된다. 한 해의 끝인 섣달부터 새해 정월까지 벌어지는 제의-축원형태의 굿들은 일련의 기능적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매 굿
매 굿은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풍물 굿을 치며 지내는 동제(洞祭)이다. 매 굿은 새 해 새 날이 밝기 전에 마을 곳곳의 묵은 액을 쫓아내고, 악귀를 몰아내기 위한 제사 굿이다.
 
당산 굿
필봉마을의 당산 굿은 본디 음력 정월 초아흐렛날에 마을의 당산에서 마을의 제액초복을 위해 지내는 동제로서 마을 사람의 인식과 관습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점하고 있다. 현재는 정월대보름날 마당밟이를 하기 전에 당산제를 지내며 당산굿을 연행하고 있다.
 
뜰볿이/마당밟이
뜰볿이/마당밟이는 새해를 맞이하여 마을과 가정에 복을 불러들이기 위해 마을공동체 구성원의 집집을 방문하여 풍물 굿으로 복을 기원해주는 축원성이 강한 굿 양식이다.
 
노디고사 굿
노디고사 굿은 음력 정월 대보름날 노디/징검다리에서 행해지는 공공 노동과 축원 형태의 굿이 결합한 마을 굿이다.
 
 
2) 농경-세시 행사 형태의 마을 굿
 
두레 굿과 호미씻이/백중굿
두레 굿은 내용과 형태면에서 공동 놀이 굿에 들며, 정월에 연행하는 제의-축원형태의 굿인 당산 굿과 뜰볿이/마당 밟이 만큼이나 농경 공동체에게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지는 행사이다. 이 날 마을에서는 술과 음식을 충분히 장만하여 하루 종일 풍물 굿을 치며 흥겹게 논다. 논매기를 모두 다 마치면 백중(음력 7월 15일) 무렵이 되는데 이 때는 날을 정하여 호미씻이를 한다.
 
찰밥 걷이 굿
찰밥걷이 굿은 음력 정월대보름날 낮에 마을굿패가 마을 집집을 방문하여 각 가정에서 세시 음식으로 준비한 찰밥을 걷는 세시 놀이 굿이다. 이렇게 거둔 찰밥은 술로 빚어져서 뒷날 마을 굿패가 다른 마을로 걸궁/걸립을 돌고 돌아오면 벌이는‘파접례’에서 다함께 나눠 마신다.
 
걸궁 굿
걸궁 굿/걸립 굿이란 마을을 벗어난 다른 마을 또는 지역에서 연행하는 굿을 말한다. 걸궁 굿/걸립 굿은 마을 전통으로는 정월대보름을 쇠고 본격적인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의 틈을 이용하여 행해져왔다. 필봉마을 굿패가 연행하는 걸궁굿/걸립굿에는 농작(農作)에 필요한‘거름’과‘물’‘노동력’을 마련하기 위한 초걸굿/풀걸립, 물걸립, 품앗이걸립 등이 있고, 마을 공공사업을 위한 소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의 걸립이 행해져왔다.
 
 
3) 대동판놀음-판굿 형태의 마을 굿
일반적으로‘판놀음’과‘판굿’의 정의는 굿패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정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공연 무대로서의 이른바‘판’을 만들어서 다양한 기예와 문화적 의식들을 집대성해서 보여주는 종합예술 양식으로 설명된다.
 
필봉마을의 대동판 굿은 굿패가 가진 예술적 역량들이 총동원되어 실현되는 가장 큰 놀이 굿이다. 하지만 제의-축원굿 형태의 마을 굿이나 농경-세시 문화로서의 마을 굿에 연장선상에 놓인 굿 양식이란 점에서 판굿의 속성을 단지‘사람들이 놀기 위한 굿’으로만 해석해서는 곤란하며,‘신을 모신 가운데 벌이는 신명풀이’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한편 필봉농악에서는 한옥자원을 활용한 야간상설공연을 필봉농악전수교육관 취락원에서 진행하고 있다. 6월부터 진행되는 야간공연은 <춤추는 상쇠-희희낭락 필봉!> 이라는 제목의 공연으로서 9월까지 진행되는데 매주 토요일 오후 8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또한 7월과 8월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씩 공연을 진행한다.
<춤추는 상쇠-희희낭락 필봉!>은 풍물소리가 풍성한 40년대 필봉마을을 배경으로 진행되는데 급변하는 시대 속에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마을을 다시 찾아 쑈단에 입단한 필봉마을 출신 상쇠 봉필이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관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임실필봉농악보존회장은 공연의 제목인 “희희낭락 필봉!” 이야기는 선조들이 살면서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농악을 바탕으로 긴 세월 꿋꿋하게 살아오고 있는 필봉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이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느끼고 그 가치에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이번 상설공연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필봉농악의 시설현황
 
 
 
회문산의 회문
 
회문산(回文山) 정상에서 북쪽으로 강진면 용수리 백운마을이 있는데 백운마을 뒤 협곡을 따라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 도중(백운마을에서 약3km)에 회문(回門)이 있다.
규모는 넓이가 4m 높이가 3m의 원형석문(石門)으로 되어 있으며 석문 남쪽에서 아래로 3m 옆에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은 한두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는 동굴로 형성되어 있다.
조선 중엽 홍 씨가 그 동굴에서 10년간 기도드리며 공부를 하였다는데 10년 마지막 날 기도를 드리려고 음식을 차려놓고 막 절을 하려할 때 털머리 총각이 불쑥 나타나 음식을 좀 먹자고 하자 홍씨는 기절을 하였다 한다. 기절에서 깨어나 땅을 먼저 보았는데 그 순간 지리(地理)를 통달하였다 한다.
 
홍씨는 석문에서 10년간 공부를 하여 이름이 홍석문(洪石門)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리를 통달하여 대사가 되었으며 특히 홍석문 대사는 명당을 잘 알았다고 한다. 홍석문 대사가 잡은 곳은 다 명당이라고 하며 지금도 마을에서 노인들이 지극히 믿고 있다고 한다. 홍석문 대사는 명당을 무슨 명당은 얼마고 무슨 명당은 1,000냥이라는 등 글로 써서 대나무에다 만사지 같이 죽 달고 다니며 마을을 돌며 외치고 다였다. 지나가다 시장할 때 밥 한 그릇만 대접을 받아도 그 공을 갚기 위해 명당 한자리씩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있다. 선량 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은 금시발복 할 명당자리를 팔지 않고 주기도 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회문산(回文山)은 회문(回門)에서 유래되어 회문산이라 칭하지 않았나 주민들은 이야기 하고 있으며 그뿐만이 아니라 回文山은 3개군 6개면에 연계되어 임실에서는 덕치 회문산 정읍에서는 산내 회문산 순창에서는 순창 회문산으로 부르고 있다. 이 거대한 회문산은 한 지역에서만 개발할 처지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임진란 때도 회문산이 전적지요. 구한말 의병을 일으킨 의병들의 활동지도 되었다. 6.25 한국 전쟁때 수복 당시는 빨치산들이 마지막까지 우리 국군과 격렬한 전투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심산 유곡중의 산자수명한 회문산 어느 산에 비유할 손가.?
이 산은 임실 순창 정읍시에서 共同 개발할 처지도 아닌 것 같으며 오로지 국가적 차원에서 국립공원 회문산이 되어야 마땅하다.
멀리는 서울이지만 가깝게는 광주, 전주, 익산, 군산등 대소도시가 인접에 있으며 휴양지로 얼마나 적합 한가.?
회문산을 끼고 있는 옥정호 그리고 운암대교등 물과 산이 어울려 있는 천혜의 여건이 그뿐이랴.
 
회문산 정상에서 사방으로 장군봉 투구봉 깃대봉 사자암 등 지명과 흡사한 그 절경 어느 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고.?
깊숙하고 아름다운 절경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는 곳 마다 절경이요 흐르는 계곡물은 청강수요.
우는 새 소리들 신기하기도 하며,
온갖 꽃들이 3계절 그치지 않고 피어나고 있어 오신 손님 웃고 맞이하네.
겨울철에는 곱게 물든 단풍 아름다운 암벽등 회문산을 찾은 등산객들은 한번 왔다 가면 계절 따라 찾고 또 찾은 명산인데 전북인만 알고 있어야 하는가 알리자.
전국으로 그리고 세계로 회문산을 알리자.
 
 
회문산의 김난식과 김현채의 묘
강진면 용수리 백여 마을을 지나 가리점마을에 들어서면 작은 마을이 있다. 마을에서 골짜기로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가 1.2km지점 우측 산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묘 2기가 있는데 이곳이 김대건 신부의 동생인 김난식과 조카인 김현채의 묘이다.
1977년 6월 말경 당시 조종래씨가 강진면 부면장을 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온 천주교 수녀님들이 두 분의 묘를 찾으로 면사무소로 오게 된바 부면장인 조종래씨는 기꺼이 동참하여 수소문 하던 차에 가리점마을에서 주민들의 이야기로 발견하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수 십년을 마을에 살고 있던 송씨가 대대로 벌초를 하고있는 무연고 묘지가 있다는 내용을 들었다. 송씨 할아버지께서는 함께 숫을 굽고 생활하던 사람들로서 후손에게 유언하기를 너희들은 앞으로도 혹시 내 묘는 벌초를 안 하더라도 이 두분의 묘지는 계속하여 벌초를 하고 관리를 하라는 유언을 하여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한다.
 
이때 수녀님들이 알고 있는 내용과 스토리가 비슷하기에 김난식과 김현채의 묘가 분명함을 감지하고 현장을 답사하였으며 사진도 찍었고 후에 천주교 신보에 게재한다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으며 그해 7월호에 게재되었다고 한다.
이 묘지는 정읍시 관할로 현재는 신태인 천주교에서 관리하고 있으나 이곳을 갈 수 있는 곳은 임실군 강진면 백운마을 가리점 에서 찾아들어가야 하기에 임실천주교에서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라는 의견이 있다. 이곳에는 묘지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는데 아래와 같이 기록되었다.
 
 
김난식과 김현채의 묘 설명문
 
회문산 자락 깊숙한 이곳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생 김난식 프란치스코(1827~1873)와 7촌 조카 김현채 토마스(1825~1888)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말 천주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잇따르자 경기·충청지역의 신자들이 대거 전라도와 경상도로 피난을 떠났고, 그들은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깊숙한 산중에 교우촌을 형성하고 신앙생활을 지속하였다. 여기 ‘먹구니’는 김난식 프란치스코와 김현채 토마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으로 피난을 오면서 교우촌이 만들어 졌다. 그들은 화전을 일구고 살면서 신앙에 매진하다 생을 마감하였으며, 이곳에 안장되어 후세에 신앙생활의 참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갈담리 영세불망비군
 
강진면 갈담리는 조선시대 역참으로서 삼례찰방소속이었다. 지금도 이곳은 임실과 순창을 이어주고 정읍과 전주까지 소통하는 길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역사와 문화가 함축된 갈담리에 옛길이 있고 옛길은 덕치면을 향하여 광주 등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데 길 주변의 바위에 새겨진 영세불망비 7기가 있다. 이는 현감 정동시(1818년 부임~1822년퇴임), 최천서(1702년부임~1707년영전), 이문저(1680년부임~1684년사임), 임성주(1754년부임~1758년퇴임), 정규상(1758년부임~1763퇴임), 원세철(1868년부임~1870영전), 이희기(1801년부임~1804퇴임)의 영세불망비가 새겨져 있다.
 
한편 임실군에 집단적으로 바위에 새겨진 비석 군이 있는 곳은 강진 갈담리를 비롯하여 성수면 오류리 말치와 오수면 국평 마을 등 세 곳에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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