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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역사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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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024년 1월 27일
13. 씨족 정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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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2024.01.27. 13:48) 
◈ 13. 씨족 정착사
현풍곽씨 회진리 장동 문중, 동래정씨 회진리 문중, 동래정씨 신기문중, 고흥유씨 부흥리 문중, 밀양박씨 상필 문중, 삭녕최씨 백여리 문중, 전주이씨 이목마을 문중, 화순최씨 백련리 문중, 강화노씨 이윤문중, 장수황씨 율치문중
주요성씨의 집성촌
 
현풍곽씨 회진리 장동 문중
 
현풍은 경상북도 달성군에 속한 곳으로 신라시대에는 추량화현(推良火縣) 삼량화현(三良火縣) 또는 현효현(玄驍縣)이라 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현풍현이라 하였고 조선시대 초 포산(苞山)이라 부르다가 후에 현풍이라 고친 뒤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시조는 포산군 곽경(苞山君 郭鏡)은 중국 송(宋)에서 약관의 학사로 청운의 큰 뜻을 품고 고려로 귀화하여 1138년 고려 인종조에 출사(出仕), 후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훈작(勳爵)을 받고 포산군에 봉군(封君)되고 현풍을 봉강(封疆)받았다. 그의 후손인 안방(安邦,淸白吏)이 파조이며 입향조는 그의 10세손 경화(慶華,淸白吏)로 정조 7년(1742)경 괴질을 피하여 산수가려(山水佳麗)한 이곳 장동에 정착하여 선조의 청백리 정신을 이어받아 청렴하게 살아가고 있다.
 
 
동래정씨 회진리 문중
 
동래는 부산 직할시와 경남 양산군의 일부 지역을 차지했던 지명으로 본래 장산국(혹은 萊山國)인데 신라때 점령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으로 고치고 경덕왕때 동래군으로 개칭하였다가 고려 현종때 울주(울산)에 편입시켰다가 1547년 부로 승격시키고 1895년 관찰부(觀察府)를 설치, 1896년 부윤으로 삼았으며 1903년 군으로 고쳤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부산부에 속하였고 부산부에 속하지 않은 구역과 기장군 일원을 병합하여 동래군을 이루었다.
동래 정씨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虜)의 육부촌장(六部村長)으로 정씨(鄭氏)의 성(姓)을 하사받았던 취산진지촌장(聚山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의 원손(遠孫)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받들고 고려 초에 보윤(甫尹)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1세조로 하며 누대에 걸쳐 정착 세거(世居)해온 동래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오두목에 정착한 동래정씨의 파조는 정지원으로부터 14세손 광좌(光佐)이며 입향 조는 21세조 행표(行標)로 청웅면 청계리에서 오두목으로 오셨다. 오두목 동래정씨중 29세인 정인준(鄭寅駿)은 군의회 의원과 현재는 임실군 산림조합장을 엮임하고 있으며 30세인 굉모(宏謨)딸 유경은 현재 검사로 제직 중에 있다. 30세인 영모(榮謨) 택모(澤謨) 봉모(鳳謨)는 이학박사학위를 받아 활동중에 있으며 윤모(允謨)는 치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활동 중에 있다.
 
 
동래정씨 신기문중
 
신기마을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오두목마을의 동래정씨와 같으며 전회문(鄭繪文)을 시조로하고 1세조는 지원(之遠)이며 안산공파(安山公派)후예이다. 신기마을에는 당초 인동 장씨들과 달성 서씨들이 세거를 이루며 살고 있었으나 동래정씨 창영공파(昌寧公派) 22세조인 가 입향하여 신기문중에서 세거를 이룸으로서 많을 때에는 2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또한 회진문증은 기록으로 볼 때 21세조가 들어와 세거를 이루고 있다. 신기마을에는 29세인 정인표(鄭寅杓)씨가 문중을 지키고 있으며 정인성(鄭寅成)은 전북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고흥유씨 부흥리 문중
 
고흥유씨는 유영(柳英)을 시조로, 영밀공(英密公) 유청신(柳淸臣)을 중시조로 한다. 유청신의 손자 충정공(忠正公) 유탁(柳濯)의 현손 유면(柳沔)은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를 지냈다.
유춘발(柳春發)은 유청신의 손자 충정공 유탁의 현손인 유면의 손자로 1536년(중종 31) 서울에서 태어나 중형인 유춘영을 따라서 고창읍 양곡(暘谷)으로 옮겨 와 정착하였다. 유정방(柳廷芳)은 영밀공 유청신의 13대손으로 1574년(선조 7) 전라북도 정읍시 소성면 보화리에서 태어나 흥덕면 동복오씨 집안의 사위가 되어 신림면 외화리 환산에 정착하였다.
시조 영(英)이후 파조는 시조의 19세손인 희진(希津)이다. 입향조는 그의 26세손 광원(匡源)으로 순조5년(1815)경에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조 영(英)의 23세손인 계손(繼孫, 監務公)께서 정읍 북면 승부리에 정착하여 15대를 살아오던 중 괴질이 만연하여 양자손이 심히 어렵다고 느낀 나머지 부인 전주이씨 께서 세 아들을 데리고 이곳 강진면 서창마을에 처음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은 홍수로 인하여 집도 떠내려갔고 어머니는 물에 휩쓸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3형제는 부흥리로 이사를 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아들 3형제는 영옥(榮玉) 영지(榮池) 영식(榮植)이며 특히 세 아들 중 막내인 영식은 근검하여 형제간은 물론 출가녀 에게도 분재(分財)를 하여주고 과객(過客)접대를 융숭히 하였기에 그가 서거(逝去)한 근 2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칭송이 자자하다.
한편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부흥리 고흥 유씨는 현대사회에서 강원대학교 경제학장을 지낸 31세 유석규를 비롯하여 32세 종욱(鍾旭)은 의학박사를 종근(鍾根)은 건축시공기술사 종락(鍾洛)은 법학박사를 취득하여 광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33세인 기영(其永)과 태영(太永)은 의사로 있으며 수영(秀永)과 판영(判永)공인회계사, 철훈(喆薰)은 변리사, 학영(學永)과 재영(在永)은 농학, 공학박사를 취득하여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있다.
 
 
밀양박씨 상필 문중
 
밀양은 경상남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원래 마한시대에 변한의 일부로 가락국에 속하였으며 신라 법흥왕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가 서기 757년 밀성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때에는 밀주(密州)로 하였고 1390년 밀양부로 승격 그 후 여러 차례 변신을 거듭하다가 1895년 밀양군으로 개칭하였다.
밀양박씨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의 8대군 중 세자인 박언침으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져 단일 본관으로서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임을 자랑하여왔다.
박씨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밀양박씨는 중시조 언침이 밀성대군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을 밀양으로 하게 되었으며 8세손 언부(彦孚)를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를 비롯하여 규정공파(糾正公派)를 끝으로 12개파로 나뉘어져 있다.
강진면 필봉리의 규정공파(糾正公派)는 박현(朴鉉)의 후손으로 충정공파이며 그의 16세손 박신린(字 廣德)이 이곳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 뒤쪽으로 밀양박씨 규정공파 집안의 재실이 있는데 영효재(永孝齋)이다. 이 재실은 상냥문에 4292년 己亥 10월 3일 입주라고 기록되어 있어 1959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영효재는 정면 3칸으로 되어 있고 측면은 2칸으로서 팔작 기와지붕으로 지어졌다. 후손인 24세 박노완(朴魯完)은 외무고시를 합격하여 베트남 대사를 엮임 하였고 박노선(朴魯善)은 무주군청 사무관이었으며 박정규(朴正圭)는 임실군의회의원을 엮임하였다. 25세인 박홍철(朴洪徹)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서 풍수지리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삭녕최씨 백여리 문중
 
시조 최천로(崔天老)는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고 한다. 시조가 대대로 살던 곳은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 대전리 괴음촌이며, 현재는 휴전선 안에 위치하고 있다.
최천로(崔天老)의 후손 중시조(中始祖) 최유가(崔瑜賈:價)는 고려시대 1169년 기축방(己丑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추밀원사(樞密院使)를 거쳐 참지정사(知政事)를 지냈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
최유가 이전 이후 중간 세계가 전해지지 않아 상고할 수 없으므로 친어모군낭장(親禦侮軍郎將) 최선보(崔善甫)를 1세조로 하는 낭장공파(郎將公派)와 함경전부사(含慶殿副使) 최연(崔珚)을 1세조로 하는 부사공파(副使公派)의 두 계통(系統)이 존재(存在)하고 있다.
삭녕 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3명, 영의정 2명을 배출하였다.
임실에는 영의정을 지낸 최항(崔恒,1409~1474)의 손자인 최수웅(崔秀雄,1464~1492))께서 지금의 오수면 둔덕리에 입향 하시어 통례공파를 이루었다. 백여리에는 최수웅의 고손인 상인(尙認,1560~1647)의 후예들께서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그동안 삶은 세거지에서 밭을 이루어 담배와 닥나무 등을 재배하여 소득원으로 삼았으며 감나무를 심어 곶감을 만들고 약초 등을 재배 또는 채취하여 소득을 올리며 살다가 문명의 발달과 사회적 변화에 힘입어 많은 젊은이들이 대도시로 나가 살고 있기에 마을 인구가 줄어들고 있으나 지금도 집성촌을 이루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주이씨 이목마을 문중
 
이목마을의 전주이씨는 효령대군의 후예들로 청웅면 지역에 살고 있는 전주이씨 라고 한다. 이목마을로 들어온 전주이씨 입향조는 효령대군 으로부터 11世祖인 세일(世日)이며 약 250년전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목마을에 세거를 이루고 있는 이강인의 가계를 보면 이강인 으로부터 9대조 8대조 7대조 6대조 5대조 고조 증조까지 독자로 이어져 왔으며, 그 후 증조께서 3형제를 두심으로 모두가 이목리에서 일가를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이목리의 전주이씨는 6.25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20여호가 살고 있다가 지금은 5호정도가 살고 있다.
 
 
화순최씨 백련리 문중
 
화순 최씨의 시조 최세기는 고려 때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화순군에 봉해짐으로써 화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최세기와 같이 몽골군의 침입 때 공을 세우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최부(崔傅)를 함께 시조로 삼기도 한다. 그 후 상계가 실전되어 서북면 도감판관(西北面都監判官)을 지낸 최언(崔堰)을 기세조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최윤의(崔允儀)를 기세조로 삼는 계통도 있다.
최세기는 고려 중엽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평장사를 거쳐 남도 안렴사(南道按廉使)가 되었다. 이후 몽골군의 침입 때 공을 세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에 이르고, 오산군에 봉해져서 화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후손들이 화순에 세거하면서 본관(本貫)을 화순으로 하였다. 백련리 화순최씨는 1614년에 최상흡(崔象洽)이 입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백련마을에는 많은 화순최씨가 세거를 이루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면서 최씨 들도 고향을 떠나 지금은 몇호 뿐이다.
 
강화노씨 이윤문중
 
강화 노씨(江華 魯氏)는 강화군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시조 노용신(魯龍臣)은 고려 명종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고종 때 몽골이 침입하여 강화(江華)로 천도할 때 강화현령(江華縣令)으로 공을 세워 강화군(江華君)에 봉해졌다.
노용신의 아들 노유(魯維)는 고려시대에 상서(尙書)를, 손자 노충(魯沖)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증손 노몽량(魯夢良)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강화 노씨(江華 魯氏)는 노충의 8세손을 파조로 하여 6개의 파로 나뉘었는데 노인호(魯仁好)는 병사공파(兵使公派), 노인지(魯仁止)는 감사공파(監司公派), 노인복(魯仁復)은 한림공파(翰林公派), 노인철(魯仁喆)은 현감공파(縣監公派), 노인언(魯仁彦)은 감찰공파(監察公派), 노계원(魯繼元)은 부사공파(府使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이윤마을 강화노씨 문중은 임실읍 갈마동에서 강화노씨 남원 손(孫)인 노방용(魯邦龍)이 강진면 이윤마을에 입향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윤마을은 본래 나주 임씨들이 세거를 이루고 살고 있었으나 노씨가 들어오면서 노씨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6.25를 전후하여서는 15호 정도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이거를 하여 단 2호만 살고 있다.
 
 
장수황씨 율치문중
 
장수황씨 집성촌인 율치 마을은 북쪽으로 옥정호를 이루며 남쪽으로는 강진 소재지를 두고 있다. 장수황씨 시조는 신라시중(新羅侍中) 황경(黃瓊)은 통일신라시대 경순왕의 부마로 시중을 지냈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우리나라 황씨의 도시조 황락(黃洛)의 후손이며 장수군에 봉해진 을고의 아들로 전한다.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후손들은 참의를 지낸 황석부(黃石富)를 1세조로 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의 사대명상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황희(黃喜)정승을 들 수 있다. 율치마을에 세거를 이루고 있는 장수황씨는 11세손 시(時)와 부인 광산김씨가 운암면 쌍암리에 처음으로 입향을 하였으며 율치 마을에는 16세손인 종(鍾)이 일찍 돌아가시고 부인인 밀양박씨 할머니가 어린 아들 3형제(根, 柱. 棬)을 데리고 오셨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는 동안 30여호가 살았으며 지금도 18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또한 운암면 학암리가 임실군에서 대표적인 장수황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장수황씨의 후손들은 각기 노력하여 20세손인 태현(太顯)은 대 목수가 되어 6.25한국전쟁에 불타버린 마을주민들의 집을 지어주기 시작하여 현재도 그때지은 집이 몇 채 남아있기도 한다. 또한 후손들 중 22세손인 의덕은 육군대령출신이고 의갑은 전 고등학교 교장을 엮임하였다. 23세손인 영섭은 병원장을 하였으며 하연은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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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