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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역사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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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024년 1월 27일
16. 6.25사변과 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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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2024.01.27. 14:11) 
◈ 16. 6.25사변과 강진
해방 직후 우리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는 식민지 지주제의 속박으로부터 농민을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인 현실에서 농지개혁은 농민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기본 조건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지주-소작인 간의 신분관계를 해체하여 근대적 사회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근대국가 수립을 위해 토지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계급적 대립관계를 해소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였다.
한국전쟁과 강진
 
 
Ⅰ. 항일 투쟁기 임실
 
3·1독립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박준승(朴準承)선생이 임실군 청웅면 출신이다. 박준승 선생은 천도교에 입교하여 접주를 지낸 인물로 3·1운동 이후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고 고문 후유증으로 순도하였다. 임실의 3·1운동은 천도교 교구를 통해 전파되었다. 독립선언서와 서울의 3·1운동 소식이 천도교 전주교구를 통해 임실 교구로 전달되고, 천도교 교인들을 통해 임실읍, 오수면, 운암, 청웅, 관촌, 성수면 등으로 배포되었다.
 
임실 읍에서는 장날인 3월 12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오수면에서는 3월 10일 오수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3월 15일과 3월 23일 장터에 모여 주재소를 공격하다가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다. 임실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10일부터 4월 6일까지 청웅, 성수, 지사, 강진, 신덕면 등 임실군 전역에서 계속되었다.
 
3·1운동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이 고양되어, 1920년대 이후 임실에서는 여러 차례 항일투쟁이 발생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25년 봄에 있었던 청웅 농악단의 주재소 습격사건이다. 이 사건은 ‘청웅면 구고리’ 농민들의 농악대를 일본 경찰인 사토(佐藤)가 해산시키려 하면서 발생하였다. 농민들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파괴하고 사토를 구금하는 등 격렬히 저항하였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일본의 억압과 약탈(공출)이 심화되면서 집단적인 저항이나 봉기는 위축되었다.
 
 
Ⅱ. 해방 전후의 임실
 
1. 임실지역의 농지개혁
 
해방 직후 우리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는 식민지 지주제의 속박으로부터 농민을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인구의 80% 이상이 농민인 현실에서 농지개혁은 농민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기본 조건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지주-소작인 간의 신분관계를 해체하여 근대적 사회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근대국가 수립을 위해 토지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계급적 대립관계를 해소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였다.
 
해방 이후 임실지역에서의 농지개혁 상황을 보면 분배면적은 논 1,735정보, 밭 1,083정보로 총 2,818정보이고 이는 당시 임실군 전체 농지면적 11,320정보의 24,9%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해방 이후 자작지율의 변화를 보면, 일제 강점기부터 농지개혁 이전인 1948년까지 임실군의 자작지 비율은 전국은 물론 전북에 비해서도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농지개혁 이후의 상황은 이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즉 1960년 임실군의 자작지 비율은 전체 농지의 75.5%로 전국의 88.0%, 전북의 90.4%에 비해서 현저하게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임실지역에서 농지개혁의 추진과정이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일제 강점기 동안 전라북도의 평야지역에 일본인들의 토지수탈이 집중되어 일본인들의 거대농장이 건설되었던 것에 비하여 임실지역 토지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해방 이후 임실지역에서 토지문제를 둘러싼 지주와 소작인 간의 갈등관계가 적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도내 다른 지역에 비해 임실지역에서 대지주의 토지수탈이 심하지 않았던 반면 토지를 둘러싼 갈등관계가 심각했던 것은 면별, 마을별로 중소지주들과 소작인들과의 갈등이 상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해방 직후 농지분배에 관한 지역 농민들의 기대와 요구가 매우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각 지방의 중소지주들과 소작인간의 대립과 갈등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당시의 지주-소작관계는 경제적 소유관계 속에 신분적 차별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해방 공간에서 양자 간의 갈등에는 합리적 개혁 욕구 뿐 아니라 감정적 한(恨)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2. 해방정국의 임실
 
1) 정부 수립 이전
 
해방 되던 해인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찬탁진영과 반탁진영 사이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를 놓고 벌어진 이 시위는 미 군정하에서 전국적 규모의 조직적인 좌-우익 세력간 대립이었다.
 
1946년 9월 철도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9월 총파업이 전개되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자주관리운동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미군정에 맞서 철도노조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사회경제적 요구를 내세우며 총파업에 돌입한 것이다. 여기에 전화국, 우체국 노동자들이 가담하면서 총파업에는 전국적으로 25만명 이상의 노동자가 참여하였다. 9월 24일 서울의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고 여기에 동조하는 제조업부문 노동자들과 전신전화, 사무직 노동자들이 가세하면서 파업은 확산되었다.
 
10월 초순에 들어서면서 총파업은 지방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28일에는 완주의 철도종업원 700여 명이 파업에 참가 하였다. 이 여파로 임실지역 관내의 관촌과 오수역이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전라북도 내에서도 2·7투쟁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특히 임실 성수와, 삼계 와리, 관촌 그리고 부안 줄포 등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실에서는 1948년 2월 26일을 기해 일제히 야산대의 봉기가 일어났기 때문에 ‘2·26사건’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임실에서의 2·26 봉기는 임실 성수면, 삼계면, 관촌면, 신평면, 오수면 등 군내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해 진술한 월평리와 삼봉리의 제보자(박찬명, 84세)의 말을 정리하면, 당시 임실지역에서는 2·26사건에 대해서 짐작하고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수면 회치골에 모인 인원의 규모가 워낙 컸고, 이들은 성수로 들어오는 모든 도로를 차단하고 지서 습격을 감행했다고 한다.
같은 날 새벽 임실지역 여러 곳에서 지서 습격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최내우의 월파유고에 의하면 그날 새벽 폭동이 발생했는데, 관촌 지서에서는 총격전이 벌어져 인명 피해가 있었고, 신평지서도 습격을 받아 경찰을 묶고 총기를 가져갔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임실 지역내에서는 지서와 도로, 교량, 전신주 등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2·26사건을 계기로 임실지역 내에서 좌익세력의 색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임실지역에서 2·26사건은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는 임실지역 내 좌익세력이 거의 완전히 노출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남로당 지방조직은 비합법체제로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지방 야산대의 무장봉기는 지역 내 남로당원의 실체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지역 내에서 2·26사건의 가담자를 체포하여 취조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세력들도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후 여순사건과 보도연맹 등 좌익과 관련된 사건이 있을 때마다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주민들 내에서 좌-우를 분리시키는 경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2·26사건의 처리과정에서 주민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가 한국전쟁 당시 좌-우익 세력의 주민들에 대한 보복 여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이 시기에 좌익 가담자들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일을 한 동네 주민들에 대해서는 좌익세력들이 부채의식을 지니게 되고, 이들은 한국전쟁기 인공치하에서 이들을 다치게 하지 않음으로써 빚을 갚는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어 아직 임실이 점령되기 전인 1950년 7월경 신평 면에서는 경찰이 2•26사건 가담자들을 연행하였다. 이로 미루어 임실지역 보도연맹사건은 2·26사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2·26사건이 남로당 야산대 들의 봉기였다는 점에서 2·26사건 가담자들 대부분이 임실지역 보도연맹 가입 대상자들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추정 가능한 일이다.
 
 
2) 정부 수립 이후
 
1948년 제주 4·3항쟁을 계기로 일어난 10월의 여·순 봉기 이후 육지에서 무장투쟁이 조직적으로 시작되었다. 여·순 봉기 세력들 중 일부는 벌교, 고흥, 보성 방면으로 진출하였고, 다른 일부는 구례, 곡성, 남원 등으로 북상하였다. 여·순 봉기는 전라북도 남원지역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남원보다 북쪽에 위치한 임실지역에서는 봉기 당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인 영향은 작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여·순 봉기 세력이 진압되면서 봉기에 참석한 군인들과 무장한 민간인들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항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지리산, 백운산 등에 거점을 마련하였다.
 
좌익세력은 1949년 7월부터 보다 조직적인 대규모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지구별로 3개 병단을 편성했는데, 오대산 지구(제1병단), 약 1천 5백여 명이 지리산 지구 제2병단(사령관 이현상)의 주력을 이루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1949년 겨울에 실시된 군경의 동계토벌작전으로 큰 타격을 입고 흩어졌는데, 이중 일부가 임실 덕치면 회문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소규모 부대로 생존을 위한 보급투쟁 등을 전개하였으며, 전쟁 직전 지리산에 약 1백여 명, 회문산 일대에 약 60여 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전쟁 직전인 5월 15일 신덕면 오궁리 주민 4명과 6월 20일 임실읍 이인리 주민 3명 등이 경찰에 대한 협조 혐의로 이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들의 토벌에 나선 경찰전투대에 의해 임실읍 정월리 음지마을 주민 5명이 빨치산에 협조한 혐의로 사살되었다. 이것이 임실지역 최초의 주민 희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가장 먼저 전국적으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희생은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국민보도연맹이란 과거 좌익계열의 단체에 가담한 전력이 있는 인물들을 관리·감시하기 위하여 조직된 단체이다. 1949년 4월 21일 민전 조사부장을 지낸 박우천을 이사장으로 창설 되었으며, 6월 5일에는 서울시 공관에서 ‘국민보도연맹 결성총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정부는 과거 남로당 혹은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등 좌익계열에 가담한 전력이 있는 인물들을 대상으로 그해 10월 25일부터 11월 30일까지 모두 3차에 걸친 자수기간을 설정하여 좌익세력의 전향을 추진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시작된 보도연맹 가입자 예비검속은 1950년 6월에서 8월 중순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기록이 아니라 신문, 잡지, 방송 등의 취재에 의해서 밝혀진 내용이거나, 민간차원의 진상규명을 통해서 밝혀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전라북도에서의 보도연맹 예비검속은 7월 20일 경찰과 방첩대에 의해 이루어진 전주의 예비검속과 정읍, 부안, 군산에서의 예비검속 사건에 관해서만 기록되어 있다.
 
임실지역에서는 성수면 오류리에서 7명이 1950년 7월 21일과 22일(음력 6월 7일, 8일)에 임실경찰서로 끌려가 청웅면 모래재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오수면 대정리에서도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2명이 살해당했으며, 삼계면 후천리와 홍곡리, 그리고 임실읍 이인리 에서도 예비검속에 의한 희생자가 각각 1명씩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처럼 임실군에서도 여러 지역에서 보도연맹사건 희생자에 대한 증언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몇몇 제보자들의 단편적인 증언 이외에 정확한 피해 현황을 알아낼 수 있는 자료는 전무한 형편이다.
 
 
Ⅲ. 6·25 전쟁 시기 임실의 지리적, 정치사회적 환경
 
1. 지리적 환경
 
임실은 지리적으로 전라북도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동경 127도 북위 35도상에 펼쳐 있다. 동으로는 진안군, 장수군, 남원시, 서로는 순창군, 정읍시, 북으로는 완주군과 각각 접하고 있다. 군내 면적은 597.09㎢로서 전라북도 전체의 7.4%를 차지하고 있다. 노령산맥의 줄기는 동쪽의 장수군의 팔공산, 진안군 백운면을 거쳐 임실의 성수산으로 연결된다. 다시 지사면과 임실읍의 두만산, 그리고 강진면의 백련산과 덕치면의 회문산에 이른다. 이렇게 회문산과 백련산, 운암의 국사봉은 노령산맥의 줄기를 타고 청웅과 성수를 거쳐 동북쪽으로 덕유산, 그리고 동남쪽으로 지리산과 연결된다.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진안군 백운면과 마령면 그리고 임실군 관촌면과 신평면을 거쳐 운암으로 모여 옥정호수를 이루다가 순창을 지나 전남 곡성으로 흘러 나가는 섬진강이 흐리고 있다. 또한 장수군 산서면에서 발원한 지사면 영천을 거쳐 오수로 흐르며 성수면 지류인 평당천이 오수에서 합류하여 삼계, 동계를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이러한 자연 지리적 조건은 한국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판단된다. 노령산맥의 줄기는 한국전쟁기 남부군(이현상)과 전북도당(방준표)의 주요 이동 경로가 되기 때문이다.
 
임실과 순창의 경계지역에 자리 잡은 회문산은 그 산세와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전쟁 당시 좌익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던 지역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전쟁이 경과함에 따라 국군의 토벌이 가장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덕치, 강진, 청웅 등 회문산 부근 지역에서 집단학살의 피해자들이 다수 보고되고 있다. 한편 오원천이 흘러들어 모이는 옥정호 저수지와 운암면 국사봉 일대도 토벌이 집중되었던 지역이다.
 
 
2. 정치사회적 환경
 
한국전쟁 이전 임실군은 유례없는 인구변동을 경험하였다. 즉 해방 이전인 1940년 약 8만여명이던 인구가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에는 9만 6천여명으로 1만 6천명 가량이 증가하였다. 전쟁기간 중에는 다시 9만 2천여명으로 감소하였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인 1960년도에는 106.888명으로 또한 1966년도 임실의 인구는 118.277명이었을 때도 있었다. 해방 직전 약 160만명 가량이던 전라북도의 인구가 해방 이후 200여만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한 것과 견주어 볼 때, 임실군의 인구의 자연 증가와 함께 귀환동포, 월남피난민 등의 증가에 기인한 바 큰 것으로 판단된다.
 
전쟁 이전 임실의 산업은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게 되자 생산수단인 토지부족 현상으로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당시 한국사회 전체가 그랬던 것처럼 귀환동포, 북으로부터 남하한 사람들 등으로 인해 늘어난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문제가 되었다. 특히 인구증가로 인한 식량문제는 해방 직후 한국사회의 중대한 해결과제였다.
 
전쟁이 일어나기전인 1949년 임실군 전체의 인구는 1만 4천여 가구에 9만 6천여 명이며 그 중 1만 3천여 가구 9만여 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임실군 전체 농경지 면적은 논 7천 1백 ha, 밭 5천 4백ha로 총 1만 2천 5백여ha에 불과하였다. 호당 경지면적이 1.0ha도 미치지 못하는 정도여서, 당시 임실지역은 갑자기 증가한 인구로 인해 전체 주민의 경제적인 여건이 더욱 악화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948년의 “2.26사건” 등의 사례로 볼 때 해방 정국에서 임실군의 좌익 활동이 남노당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음이 확인되며, 그 활동도 비교적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전부터 지속되어 온 토지 문제를 둘러싼 대립과 해방 이후 지역 내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이념의 영향, 그리고 행정 및 경찰력이 효과적으로 미치기 어려운 지형적 조건 등이 임실지역 내의 이념적 특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특히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경 전주에서 후퇴하는 국군 제7사단 병력이 17번 국도를 따라 전주-관촌-임실을 경유하여 남원으로 후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실에서는 다른 지역에서와 달리 보도연맹 피해자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Ⅳ. 전쟁 당시 임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 전라북도에 북한군이 들어온 것은 7월 20일이었다. 익산, 전주가 점령된 이날부터 9월 28일 미 제2사단 병력에 의해 전주, 익산이 수복될 때까지 전라북도는 실질적으로 인민공화국 체제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후 약 2년여에 걸쳐 군경에 의한 토벌작전이 전개된 시기까지 전라북도가 전쟁을 겪는 시기라 할 수 있다. 민간인 피해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피해 유형은 시기별로 각 지역이 겪은 전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 전쟁의 발발과 군경의 이동경로(1950년 7월 25일까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전라북도에 들어온 것은 1950년 7월 19일이다. 다음날인 20일 익산을 점령하고 다음날 새벽 전주에 들어왔다. 그리고 22일 임실과 정읍으로 향하여, 17번 국도를 따라 남하하였다.
 
이에 따라 전주에 주둔하고 있는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는 새벽 2시경 남원으로 철수를 시작하였고, 민기식 대령이 이끄는 국군 제7사단 병력이 17번 국도를 따라 전주-관촌-임실을 거쳐 남원으로 철수하였다. 남원에는 전주에서 후퇴한 제7사단 병력 6백여 명과 광주에서 이동해 온 제5사단 1개 대대 병력 5백여 명, 그리고 학도병 7백여 명이 집결하였다.
 
7월 23일 7사단장 민기식 대령은 전주를 공격하기 위해 반격명령을 내리고, 그날 밤 전주공격을 위해 해병대 김성은 부대가 오수역에 도착했으나, 인민군에 의한 남원 공격이 이미 시작된 것을 알고 급히 철수하여 7사단과 함께 운봉으로 후퇴하였다.
 
한편 덕유산 일대에 집결해 있던 2개 중대의 공비가 진안을 습격하여, 그곳의 경찰병력은 장수로 철수하여, 전주의 경찰 병력 150여 명이 산청으로 퇴각해 있다가 장수로 돌아와 전북경찰 병력과 합류하여, 7월 22일 진안을 거쳐 7월 23일 임실 관촌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전력의 부족으로 전주 수복을 포기하고 다시 남원으로 후퇴하여 7월 25일에는 운봉을 거쳐 낙동강으로 철수하였다. 그 사이 북한 인민군 제6사단이 25일 임실을 점령하고, 7월 26일에는 남원을 점령한 후, 하동-사천으로 진출하였다. 이로써 7월 25일 이후 임실은 인민군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7월 이후에는 미군의 공습이 시작된 것으로 확인되는데, 7월 23일 미공군 F-84 세이버 제트전투기가 관촌에 소이탄을 투하하여 가옥 피해가 발생하였다. 미군의 공습으로 관촌 사선대의 전라선 철교가 파괴되고 관촌 터널도 공격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8월 4일에는 미공군기에 의해 임실경찰서 건물이 파괴되고, 오수역의 역사도 불탔으며, 오수 오산리에서는 미군 폭격에 의해 사망자가 1명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다.
 
1950년 7월 19일 북한군이 전라북도에 진출한 이후 전라북도 전역이 북한군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는 7월 26일까지 국군과 경찰은 남원과 진안으로 후퇴하여 임실을 전주 탈환을 위한 전선으로 구축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는 별 다른 전투 없이 군경이 남원을 거쳐 운봉, 하동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에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관촌의 철교 파괴와 가옥 파괴 등이 발생하고 있을 뿐 전투로 인한 인명피해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 인민공화국 시절
 
1950년 7월 25일부터 9월 하순까지 전라북도 전역이 인민군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인민군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동네에 며칠 전부터 돌았다. 그래서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끼리 인민군이 들어올 때 환영식을 준비하자는 상의를 하기도 하였다. 인민공화국 치하에 들면서 임실군내 각 지역의 행정과 치안을 맡은 인물들은 2.26사건을 주도했던 지역의 좌익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좌익세력은 2.26사건 이후 경찰의 탄압과 감시를 받아왔고, 보도연맹 사건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7월 22일과 23일 군인들이 모두 남원으로 후퇴하고 난 뒤에도 경찰은 임실군내 일부 지역에 하루쯤 더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경찰이 떠나고 곧바로 일부 면에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한다.(최내우) 인민군이 점령하면서 임실군은 바로 인민공화국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면 단위로 인민위원회, 분주소가 구성되어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였다. 또 마을별로도 행정·치안조직이 만들어지고 자위대, 여성위원회 등이 결성되었는데, 각 조직의 대표는 마을 출신자들이 맡았다. 또한 인민의용군을 모집하여 전선에 투입하기도 하였다.
 
화폐개혁으로 인민폐가 통용되고, 면별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토지 분배는 지역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분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마을별로 전체 토지를 주민들이 균등하게 나눈다는 원칙으로 진행되었다. 지방 지주들의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토지 분배는 지역사회에서 인민공화국 체제의 안정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약 2개월간의 인민공화국 시절은 추수 이전에 끝났기 때문에 토지분배가 마을의 토지소유관계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다만 지주와 소작인 간의 감정적인 갈등을 더욱 심화시켜 놓았을 것이다.
 
인민위원회는 마을별로 전체 주민들을 동원하여 집단노동체제로 정비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마을별로 각각의 임무를 받아 일을 하였다. 민천원, 부녀회 등의 회의가 계속되고, 각종 선전전 등을 마을별로 개최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또 폭격으로 파괴된 시설의 복구와 건설 작업, 야간 경비, 그리고 각종 행정보조 업무들에 주민을 동원하여 배치하였다. 8월이 되면서 공출을 위한 농산물 수확량 조사를 실시하였다. 최내우(1994)유고집에는 이에 대하여 “전답을 일일이 돌며 서숙, 수수, 벼 이삭 알 수를 세고 장부에 기재했다. 그것도 주민 일부는 ‘제 것은 좀 낮추어 달라’고 부탁도 하였다”고 적혀 있다.
 
인민군이 임실을 점령한 이후 지방의 권력은 지방 좌익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지방의 좌익세력에게 인민공화국은 토지분배, 신분적 차별의 해소와 같은 사회주의 사회의 실현 뿐 아니라, 그동안의 억압에 대한 한(恨)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을 것이다. 분주소와 자위대를 중심으로 우익 세력에 대한 수색과 연행이 진행되었다.
 
공무원, 경찰, 군인과 그 가족, 독립 촉성회와 대한청년단 활동을 한 사람, 그리고 토지 및 재산이 많은 지주 등이 우익 세력으로 지목되었다. 인공 시절 지역의 행정과 치안을 주로 마을의 좌익세력들이 담당하였고, 이들은 2.26사건이나 해방 직후 좌익 활동을 하다가 경찰이나 독립 촉성회, 대한청년단원들에게 탄압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우익세력을 선별하고 연행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익 세력에 대한 대응이 전쟁 이전의 경험에 대한 보복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사적인 감정 등에 의한 보복도 일부에서 자행되었을 것이다.
 
우익 세력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연행되어 구금되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예를 들어 인민군 시기 성수면 지주골에서는 인공 시절 마을 구장을 지낸 사람과 독립 촉성회 간부, 그리고 지주와 마을에서 인심을 잃은 부유층 등을 끌어다가 가두어 두었다가 처형하기도 하였다.
 
1950년 9월 하순이 되면서 인민공화국체제는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부산 지역의 전황이 인민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으며, 인민군이 후퇴하고 있다는 소문이 동네에 돌기도 하였다. 그리고 9월 말경에는 후퇴하는 인민군 부상병 무리가 임실에서 목격되었다. 최내우의 유고집에서는 이 시기에 좌익세력에 의한 집단학살 사건이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인민군과 지방 좌익세력들이 후퇴하면서 구금하고 있던 우익 세력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한 것이다.
 
‘임실읍 방공호사건’, ‘관촌면 오원철교사건’, 그리고 ‘덕치면 물우리사건’, ‘삼계면 분주소 토굴사건’ 등이 있다.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소방대원, 경찰, 공무원, 독립 촉성회 간부, 대한청년단원 등 이른바 우익인사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인공 치하에서 연행되어 구금되어 있다가, 9월 하순 경 인민군들과 좌익세력이 후퇴하기 직전 집단적으로 살해되었다.
 
 
3. 수복과 토벌 작전(1950년 9월 28일 ~ 1952년 3월)
 
1950년 9월 28일 미 제2사단 병력에 의해 남원과 임실, 전주가 차례로 탈환되었고, 29일 익산과 군산도 탈환되었다. 전라북도 경찰대는 바로 각 경찰서 단위로 부대를 편성하여, 9월 21일 부산을 출발하여 10월 1일에는 전라북도에 돌아와 다시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다. 임실 경찰대는 그 다음 날인 10월 2일 임실로 복귀하였다.
 
1950년 9월 하순 이후 퇴로를 잃은 호남지역의 인민군 세력은 유격대를 조직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라북도에서는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도당위원장 방준표)를 조직하여 회문산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저항을 시작하였다. 전북도당 유격대는 전주시당 벼락병단, 완주군당 돌진유격대, 김제유격대, 전북유격대, 임실 담양유격대, 순창 백암부대, 정읍 칠보부대, 지구기동대, 허사령부, 독수리병단, 카추샤병단, 번개병단, 보위병단, 기포병단, 탱크병단 등을 편성하였다.
 
이들은 임실 덕치면 장군봉과 순창 구림면 회문산 사이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또 임실 강진면 운암댐 하류 히여터에 유격사령부와 야전병원, 무기 및 피복 제조공장, 유격전 훈련학원 등을 설치하였다.
 
전북도당 유격사령부는 1951년 5월 중순경 덕유산 송치골에서 6개 도당회의(전남북, 경남북, 충남북)를 열어, 병단을 통합하여 사단체제로 개편하고 지리산에 통일적인 지휘본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총 지휘는 이현상이 맡고, 전북도당은 사령관 방준표, 부사령관 조병하, 그리고 직속부대로 익산, 진안, 장수, 무주, 남원, 정읍, 고창, 부안군당 등 11개 유격대를 두었다. 도당 지휘부는 회문산에 두었다. 이들은 1950년 9월부터 지리산-덕유산-회문산-운장산 등을 거점으로 노령산맥 줄기 산악지대를 이동하면서 유격전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빨치산의 유격전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양민 피해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하나는 피해가 특정 지역에서 집중되어 발생한다는 점이다. 즉 빨치산 유격대가 거점으로 삼고 있었던 회문산에 자리한 청웅면, 신덕면, 운암면 등에서 빨치산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또 하나는 인공 시절과 달리 조직적이고 원칙적인 기준으로 우익세력을 선별하는 것이 아니고, 소문이나 밀고 또는 개인적 경험 등에 의해 우익세력 또는 군경에 대한 협조 혐의, 또는 변절 혐의 등으로 살해가 자행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공시기와 같은 집단살해 사건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던 우익세력이나 협조 혐의자들에 대한 개별적인 살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회문산 일대가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빨치산 유격전이 치열하게 벌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빨치산에 의한 민간인 피해도 1951년 이후까지, 주변 여러 마을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 피해자들의 수도 매우 많다.
 
국군은 1950년 10월 초부터 토벌부대를 편성하여 이른바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호남지역에는 세 차례에 걸쳐 토벌부대가 편성되고 공비토벌작전이 전개되는데, 호남지구 공비토벌을 위한 부대편성은 수복 직후인 10월 초부터 시작되었는데, 첫 번째 작전은 제1군단에 속해있던 제11사단이 맡았다. 제11사단 소속 9연대, 13연대, 20연대가 각각 전남, 전북, 지리산지구 토벌작전에 배치되었다.
 
이 중 13연대는 경남 진해에서 10월 9일 전주로 이동하여 배치되었다. 제13연대는 이때부터 이듬해 3월 30일까지 남원-전주-진안-무주-장수-운암-칠보-부안 일대를 중심으로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약 6개월 동안 제11사단 공비토벌작전으로 거둔 전과는 사살 약 2천명, 포로 및 귀순 2,178명, 부상 4,576명이라고 『화랑부대전사』에서 밝히고 있다.
 
제11사단은 1951년 4월 6일 호남지구 토벌작전을 제8사단에게 인계하고 부대를 철수하였다. 제8사단은 1951년 4월 3일 강원도 횡성에서 전주로 이동하여 4월 중순부터 약 한 달가량 국사봉지구 전투부대와 부안지구 전투부대를 편성하였다. 여기에는 제8사단 정규군 뿐 아니라 전북 제18전투 경찰대대, 청년방위대 등 경찰과 비정규군이 포함되어 있다. 국사봉지구 전투부대는 5월 4일부터 9일까지 국사봉과 회문산 일대에 병력을 배치하고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에서 거둔 전과는 사살 410명, 생포 573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약 8개월에 걸친 토벌작전으로 빨치산 유격대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면서 유격대는 부대를 재편하고 재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앞에서 간단히 설명했듯이 이현상 중심의 일원화된 지휘체계가 확립되고,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저항을 시작하였다.
 
육군본부는 다시 1951년 11월 말, 백야전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약 4만여 명의 병력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 수도사단과 제8사단이 1952년 봄까지 회문산-성수산-팔공산-장안산을 잇는 노령산맥 일대에서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백야전 전투사령부의 토벌작전은 모두 4기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임실을 비롯한 노령산맥 일대에서의 작전은 1951년 12월 16일에서 1952년 1월 4일까지 전개된 제2기 작전기에 집중되어 있다.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작전기간 동안 사살 5천 8백명, 포로 5천 7백명의 전과를 올렸다고 발표하였다.
 
1950년 10월 이후 군경에 의한 토벌작전은 크게 3개의 시기로 나누어 전개되었다. 이 기간동안에 나타나는 민간인 피해는 주로 토벌작전에 의한 피해들이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에는 군경에 의한 집단 살해 사건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군경의 토벌작전 기간 동안의 민간인 피해는 초기(1950년 10월 경)에는 임실읍, 삼계면 등 비 산악지역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여, 1950년 말과 이듬해 초에는 점차 회문산 주변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여 덕치면, 청웅면 등에서 집단적인 민간인 피해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성수산, 팔공산 등으로 군경이 이동하면서, 성수면 등에서 집단적인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즉 1950년 10월 경에는 임실읍 ‘정월리 군경토벌사건’, 삼계면 ‘학정리 원통산 토벌사건’ 등 집단살해 사건이 발생하였고, 1950년 겨울부터는 회문산 주변으로 피해지역이 옮겨가고 있다. 1950년 12월에 덕치면 ‘암치사건’, 1951년 초에는 청웅면 ‘부흥광산사건’, 강진면 ‘배소고지 사건’ 등 회문산 주변에서 집단적인 피해가 있었다. 그리고 성수면 부근에서 ‘문바우 사건’이 발생하였다.
 
 
Ⅴ. 임실지역의 민간인 피해 양상
 
1. 민간인 피해의 시기별 특징
 
한국전쟁 기간 중 전북 일원에서의 인명피해는 사망 1만8천5백3명, 부상 4천3백77명, 납치 3천8백43명, 해방불명 1백18명으로 모두 2만6천8백41명에 달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망자 중 민간인이 1만 6천 4백 58명에 달하며, 경찰 1천17명, 공무원 6백 93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그리고 청년단체원 1백 82명과 의용경찰 1백 43명이 사망하였다(전북일보사, 1953~1954년판, 238) 이러한 기록은 전쟁 기간 중 인명피해가 민간인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
 
지방에서 좌익세력의 활동은 경찰과 지방 우익세력과 충돌하였다. 특히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의 지방 우익세력의 횡포가 심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4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심화되었으며, 1948년 2월의 2.26사건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2.26사건은 전국적으로 벌어진 2·7 구국투쟁의 임실군 봉기이다. 1948년 2월 26일 새벽, 임실 내 여러 지역에서 좌익세력이 동시에 지서를 습격하였다. 성수, 관촌, 신평, 삼계면 등에서 지서습격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48년 10월 여·순 봉기의 영향은 임실지역에서도 미친 것으로 확인된다. 이번 조사에서 여·순 봉기 관련 민간인 피해자가 14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들은 여·순 봉기 당시의 피해자들은 아니다. 여·순봉기가 진압된 이후 잔여세력들이 장기적 항쟁을 위하여 지리산 등지로 들어가는데, 그중 일부가 회문산에 자리를 잡게 된다. 이들이 전북지역에 자리 잡은 최초의 산사람(빨치산)이 되며, 이들에 의해서 또는 이들에 대한 협조 혐의로 회문산 인근 마을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였다. 실제로 여·순 봉기 관련 희생자는 모두가 신덕면, 강진면, 임실읍 등 회문산 인근에서 나왔다.
 
 
2) 한국전쟁의 발발과 보도연맹 사건
 
1949년 4월 조직된 국민보도연맹은 그해 10월부터 11월에 걸쳐 자수기간을 설정함으로써 수십만 명에 달하는 연맹원을 가입시켰다. 특히 지방에는 보도연맹 가입자 수를 할당하여 강제 가입을 시키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후퇴하는 군경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소환되어 희생되었다.
 
인민군이 순식간에 밀려 내려오면서 서울과 경기 북부 지역은 보도연맹원의 피해가 전혀 없었지만, 남부지방으로 내려오면서 군경의 보도연맹원에 대한 가해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도연맹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어, 이 사건에 관해서는 민간기관에 의해 부분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일부 지역에서의 피해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임실지역의 보도연맹 사건은 1950년 7월 21일과 22일(음력 6월 7일과 8일)에 발생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임실에서 군인이 최종적으로 철수한 날짜가 7월 23일이고, 경찰은 그보다 하루 더 머무른 것으로 보아, 이 날짜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임실경찰서로 연행되거나 구금되어 있던 보도연맹 관련자들은 ‘임실읍 모래재’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살해된 보도연맹원 중에는 성수면 출신 7명과 삼계면 출신 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3) 인민군의 점령과 인민공화국 시기
 
1950년 7월 25일부터 10월 초까지는 임실지역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어 인민공화국 체제가 수립되었던 기간이다. 이 시기 동안 지역의 행정 및 치안은 인민위원회와 분주소 에서 맡았고 그 역할은 대부분 지역 출신 좌익 활동가들이 담당하였다. 이들은 해방 이후 토지개혁의 욕구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이며, 전근대적 신분제의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들 지방 좌익은 1948년 2.26사건의 주요 가담자들이었고, 보도연맹사건의 피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미 한국전쟁 이전에 지주와 지방 토호세력들, 경찰과 공무원, 그리고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 지역사회에서 권력으로 군림하던 지방 우익과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사건들은 모두 수복 직전인 1950년 9월 말경 발생하였다. 이들 집단 살해사건의 내용은 지역만 다를 뿐 경찰, 공무원 및 그 가족, 지방의 인심을 잃은 재산가들, 독립 촉성회 및 대한청년단 간부 등이 다수를 차지한다. 각 지역에서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지방 우익세력이 한꺼번에 학살당한 이 사건은 1950년 전쟁 초기의 보도연맹사건과 매우 닮아 있다. 인공 시기, 좌익에 의한 살해사건은 대체로 집단살해의 유형을 보인다. 이미 선정되어 있는 처벌 대상자들을 끌어다가 가두거나 처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4) 수복과 군경의 토벌작전
 
1950년 9월 28일 전라북도 전역이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수복된 후, 임실군에 경찰이 돌아와 치안을 맡게 된 것은 10월 2일이었다. 그리고 10월 4일부터 1951년 5월 11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전라북도에서의 토벌작전을 위해 토벌부대가 편성되어, 각각 제11사단 화랑부대와 제8사단이 토벌작전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951년 11월 30일부터 1952년 3월까지 전국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전라북도에서는 수도사단과 제8사단이 주로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후에는 부분적으로 토벌작전이 계속되었는데, 전라북도에서 토벌작전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것은 1952년 8월 4일이었다.
 
대규모 집단살해 사건은 주로 1950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경에 집중되어 있다. 1950년 10월에 발생한 임실읍 정월리 군경토벌사건과 삼계면 학정리 원통산 토벌사건, 그리고 그해 12월에 발생한 덕치면 암치사건 등 군경이 마을을 대상으로 토벌작전을 전개하면서 마을 주민들이 집단적인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당시 군경은 작전지역 내에 포함된 마을들도 작전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몇 가지 사건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언은 군경이 빨치산 소탕을 위하여 마을에 들어와 마을을 불태우고, 마을 주민들을 잡아가거나 사살했다는 점이다. 반면 수복 이후 토벌작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인민군이나 빨치산에 의한 집단살해사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 가지 더 덧붙여야 할 것은 이 시기에 마을에서 나타나는 민가인 피해 중에는 군경이 아닌 지방 우익들에 의해 입은 피해들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관촌 면에서는 지방 우익들에 의해서 마을의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은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5) 토벌작전 종결 이후
 
토벌부대를 편성하여 전개한 작전 기간이 지난 1952년 8월 이후에도 회문산과 성수산, 그리고 운암 일대의 산지에는 빨치산 잔여세력 일부가 남아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52년 이후 임실지역에서 나타난 민간인 피해 중 대규모 집단희생사건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회문산 주변과 운암 일대, 그리고 성수산 주변에서 빨치산과 군경에 의한 피해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청웅면에서 1952년 12월에 있었던 고수동굴사건에서는 군경에 의해 7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반면 운암, 신덕, 신평 등에서는 빨치산에 의한 피해가 각각 4명에서 10여 명씩 발생하여 모두 35명이 사망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Ⅳ. 강진면의 전쟁전후 피해유형과 실태
 
1) 지역개관
 
강진면은 임실군청이 있는 임실읍 이도리로부터 33번 국도를 따라서 남서쪽으로 약 16km를 달리면 강진면 면사무소가 위치해 있는 갈담리에 도착을 하게 된다. 강진면은 기본적으로 산악지대이다. 덕치면에 있는 회문산, 백련산 등과 연결된 높은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으로는 운암면과, 남쪽으로는 덕치면과 경계를 짓고 있다. 서쪽으로는 정읍의 산외면, 산내면,순창의 구림면 등과 맞닿아 있다.
 
산세도 험하지만, 청웅에서 흘러내려온 시냇물과 학석 방면에서 흐르는 물이 합류되어 옥정호를 이루고 있다. 옥정호는 1926년 일제강점기에 섬진강 상류를 막는 대토건 사업으로 만들어진 인공호수이다. 총 길이 212km로 운암면, 강진면, 정읍군의 산내면에 걸쳐 있다. 이 호수의 저수면적은 26.5km², 총저수량은 4억3천만 톤에 이른다. 그 중 운암면은 절반 가까이가 물에 잠겼고, 수몰지역의 주민들은 계화도 간척지 및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옥정호의 물은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의 섬진강수력발전소로 유입되어 발전소를 돌린 뒤에 다시 67km의 도수로를 통해 계화도 간척지의 청호저수지까지 흘러간다. 물이 서쪽으로 흘러내려가는 동안 주변의 논과 밭을 적시고 마침내는 만경 평야일대를 옥토로 만들어 주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운암댐은 한국전갱기에는 강진, 운암과 순창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피난민들, 인민군, 군경이 이 댐 위를 지나서 이동을 했다. 이 댐길을 차단하고자 했던 군사 작전 때문에 매번 피난민들은 피해를 보았다. 깊은 물과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강진의 근대사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는 반대로 더 싶은 역사의 상흔이 드리워져 있다.
 
강진면 부흥리에는 항일 투쟁기 금광이 개발되어 한 때 광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던 시기가 있었다. 청웅면 남산리 방향에서도 금광이 개발되는 등 약 10여년 금을 캐내던 부흥리 일대 광산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이르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폐광으로 남게 된 부흥광산 안은 한국전쟁시기에 피난민들, 지방좌익들 및 빨치산들이 한데 몰려들어서 수백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전쟁 후기 군경토벌대가 부흥광산에 숨어있던 사람들을 강제로 유인하려다가 집단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강진은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전쟁기에는 전략효충지가 되기도 하고, 또 피난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이 지역에서는 군경 또는 적대세력에 의한 집단살해사건이 유독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2) 전쟁전후 피해 특징
 
강진면에는 지역적인 특성으로 인해서 군경토벌대 및 빨치산에 의한 집단살해사건이 발생한 지역이다. 회문산과 연결된 산악루트, 옥정호 위에 놓인 구댐 등이 빨치산, 피난민들의 주요이동경로로 사용되면서 군경의 토벌이 집중되었던 곳이다. 군경토벌대에 의해서 일어난 주요한 집단학살사건이 두건이나 발생하였다. 하나는 배소고지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부흥광산 사건이다.
 
배소고지 사건은 1951년 3월 11사단에 의해서 민간인이 약 200여명이 집단살해당한 것을 말한다.(전라북도의회, 1994:199-222) 그리고 부흥광산사건은 청웅면, 덕치면에 걸쳐있던 부흥광산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일차로 한번 부흥광산에서 집단살해하고(약 370명 추정) 투항자들 약 30여명을 맷골(회진리)로 끌고 가 살해하였다.
 
 
3) 전쟁전후 피해유형과 실태
 
한국전쟁 시기 집단희생 관련 강진면의 피해상황을 시대별, 유형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해방 후
강진 면에서는 해방 후 좌우가 격돌하는 큰 사건은 없었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전국적인 검색기간에 학석리 송인호와 백련리의 권남주가 잡혀가서 송인호는 형무소에서 죽고(전언자 증언 김진용), 권남주는 심하게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으나 곧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전언자 증언 권종주). 송인호의 동생도 그 후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행방불명되었다.
 
(2) 인민공화국시기
강진면의 경우 인민공화국 시기의 특징은 주민들이 인민군을 따라서 가는 일들이 많았다. 학석리의 경우는 세 명(이점산, 이정택, 김이진)이 인민군을 따라갔고, 그 후에는 행방불명되었다(전언자 증언 김진용). 같은 리에서 좌익활동을 했던 최영식, 양진구, 송만호, 곽병술, 조내기, 곽병엽, 김창만의 형, 최판식, 송인호의 동생, 문천수, 문한수는 1950년 가을에 빨치산을 따라서 산으로 갔으나 그 후에는 행방불명되었다(전언자 증언 김진용). 용수리에서는 육일만, 최쌍쇠가 회문산으로 들어갔으나 그 후 소식이 끊어졌다(전언자 증언 이광수).
 
(3) 수복 후
 
① 군경 토벌기에 일어난 사건
 
○ 배소고지 사건
1951년 3월 2일에서 6일까지 11사단 소속 군부대(문방리에 주둔)에 의하여 200여명의 민간인이 배소고지에서 학살당했다(1994년 10월 전북도의회 6·25양민학살진상실태조사보고서 199쪽). 배소마을 위 배소고지에 국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구 댐(섬진강댐)을 통하여 정읍 산내와 임실 옥정을 오가며 토벌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1951년 3월 6일 옥정리에 살고 있던 한상열씨 가족은 정읍 산내면 종성 이화동 위 옹고개로 이사 가서 살다가 빨치산들에게 밥을 해준 이유로 빨갱이로 몰려서 일가족이 모조리 배소고지로 끌려왔다(유족 증언 조보순). 이때 같은 마을에 살던 배옥식(증인 백양님의 오빠)의 일가족도 전부 끌려왔다. 같은 날 용수리 백운마을의 박용태, 박옥동, 한성규씨 일가족도 정읍으로 피난 나가다가 군인들에게 붙잡혀 배소고지로 끌려왔다(전언자 증언 정경모). 군인들은 이들을 배소고지에 모두 세워놓고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그 자리에 잡혀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 죽고, 증인 백양님씨만 살아남았다. 그는 사람 하나 숨을 만 한 돌 틈 뒤에 숨어서 천우신조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날 함께 죽은 사람만 50명이 넘는다(유적 증언 백양님).
1951년 3월 2일 문방리 문방마을의 차성규, 차재규 형제 등 마을 사람 몇 명도 배소고지로 끌려가서 희생을 당하였다고 한다.
 
근데 밥을 했디야, 가마솥 걸어놓고 밥을 하다가 군인들한테 걸렸어. 근게 그 사람들을 싹 몰고 내려왔다니까. 그러자 우리 친척 권속이 거기다가 합쳐져 버렸어, 다른 데로 비켰으면 괜찮을 텐데. 나도 남편이 임실에 가 있으라니까, 남편 곁으로 온다고 나도 따라 나왔잖아, 애기는 거기에다 두고. 근데 왔데 거기를, 연락해서. 거기서 군인들한테 듣고는 왔어. 배소고지를. 근데 그 여자 빨치산 노릇 했으니까, 니가 대신 죽으라고 하더래, 근데 그런다고 못 살리고 나가. 여기 있는 그 동생만 데리고 나왔어, 오누이 간에...
 
그럴 때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된다. 그렇게 생각을 했지. 내 앞에가 독이, 이렇게 딱 사람하나 꼭 들어가도록 맞대어 있어 거기에가, 시방도 있을 거야. 그래서 나는 거기로 들어가 버렸지. [죽은 사람이] 삼십 명이라고 소문났어. 그래서 고리로 들어갔는데, 아니 내 살에도 총알이 들었어도 이렇게 안 아프냐 싶어. 애기들도 우는 놈, 안은 놈, 뱃속에 든 놈 다 죽였어요. 아이고, 지금도 생각하면 참...(강진면 옥정리 백양님. 80세)
 
인공 때 몇 가족이 대한민국 쪽으로 나가다가 군인들한테 박 씨 가족은 3형제가 다 죽고, 한 씨 가족도 일부는 군인들한테 떨어져서 식사당번을 해줬는데, 아들은 군인들 밥해줘서 살았고 그래서 강진으로 피난 가다가 뮈시냐 그때 군인들이 약이 올라서 군인들한테 다 죽어버렸지. 나도 그때 뭐시냐 군인들한테서 밥도 날라주고 그랬는데 그 아들 말 들으니까 그 아들이 군인들하고 같이 자기 아버지, 형제간들 시신을 찾으러 배소고지를 갔었어. 배소고지에서 겁나게 죽어버렸어. 그때 군인들이 약이 올라가지고 있는 판에 피난 가다가 잡혀가지고 다 죽은 거지(강진면 용수리 정경모. 82세)
 
1951년 3월 2일 문방리 문방마을의 송영준씨에 의하면, 차성규, 차재규 형제 등 마을사람 몇 명도 배소고지로 끌려가서 희생당했다고 한다. 1994년 10월 전북도의회 6·25양민학살진상실태조사보고서 222쪽에는 차성규 형제를 포함해서 12명이 끌려갔다는 것을 증언한 자료가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조사에서는 문방리 문방마을의 5명의 명단만 나왔다. 문방리에는 군의 대대본부가 있었고, 배소고지에는 그 예하부대가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회문산에서 붙잡은 사람들을 배소고지로 보내서 처형하곤 했다는 문방리 송영준씨의 증언이 있다.
 
사람들이 겁나게 죽어버렸어. 사람들이 발에 걸려서 못 다녔당게. 버글버글 했어. 여그 배소고지라고, 군인들이 회문산 가서 작전함서 인자 낮에 들어가서 밥에는 여기 저녁판 되면 이리 돌아와. 화랑사단 대대본부가 있었어요. 군인들이 낮에 올라가서 민간인들 겁난디 그 가운데 총 가진 빨치산들이 있어. 거기서 빨치산들을 잡아와 군인들이 잡아다가 구덩이를 파서 죽여버려. 회문산에서 군인들이 잡아다 죽였응게 얼마나 죽였는지 모른당게. 말 들으면 군인들이 잡아다가 강물에다가 몽땅 엮어가지고, 그냥 죽여 버렸당게. 군인들도 무지하게 죽었더(강진면 문방리 송영준. 74세)
 
송영준의 증언 속에는 배소고지 사건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그는 자기 마을 사람들이 처형당한 장소가 배소고지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다만, 군인들이 총살해서 죽인 사람들을 강물 속에 빠뜨렸다는 사실 즉 ‘군인들이 잡아다가 강물에다가 몽땅 엮어가지고, 그냥 죽여 버렸당게’ 하는 증언이 바로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이 사람들을 처형한 방법이었다. 이 사실은 배소고지사건을 증언 한 다른 구술자의 말에서 확인되고 있다.
 
배소고지에서는 실제로 약 200여명이 희생당했다고 하나, 이번 조사에서는 약 50여명 정도의 명단만 나왔다. 그 이유는 1994년 전북도의회 조사 시에는 생존자가 더 있었고, 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는 배소고지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크게 줄은 데다가, 두 사람의 생존자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배소고지 희생자 명단>
 
* 옥정리 마을
한상열, 한상열의 처, 한정섭, 한정섭의 처, 자녀2명, 한완섭, 한완섭의 처, 자녀3명
한희섭, 한희섭의 처, 자녀2명, 한 장섭
한철술, 한철술의 처, 송모씨
정읍 산내 종성 이화동에서 끌려온 백옥식, 백옥식의 처, 태아포함 자녀 6명
 
* 용수리 백운마을의 박씨 3형제, 한성규 가족
백운마을에 살다가 피난을 나가는데 군인들에게 잡혀서 배소고지로 끌려와 모두 함께 총살당하였다.
 
<피해자>
박용태, 박용태의 처, 자녀2명, 박옥동, 박옥동의 처, 자녀2명
한성규, 한성규의 자녀 3명
 
* 문방리 문방마을
회문산으로 피난 나갔다가 차씨 형제와 마을사람 몇이 군인들에게 붙잡혀 배소고지로 끌려가서 총살당하였다.
 
<피해자>
차성규, 차재규 형제, 송영록, 송영진, 김창식
(차씨 형제 포함 12명이 끌려가는 걸 보았다는 기록이 있음)
 
 
○ 부흥광산 사건
9.28수복 이후 미처 퇴각하지 못한 소수 인민군과 지방 빨치산 그리고 여수 반란사건에 연루되었거나 남로당에 물들었던 사람들은 빨치산에 합류하여 지리산, 덕유산, 원통산, 회문산, 백련산 등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공비토벌에 제8사단 제2사단은 중부지부에서 적의 잔여 병력을 없애기 위해 소탕작전을 전개하였고, 호남지구는 제11사단 등을 투입 회문산 줄기, 가막골 육상작전과 공군 전투기폭격으로 빨치산 대부대가 소탕되자 원통산 회문산 백련산 등지의 잔여 빨치산들이 폭격을 피하여 부흥광산 굴을 찾게 되었다 한다.
 
부흥광산 굴에 모여든 빨치산과 피난민들은 무려 370여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보를 입수한 군경들이 주민을 동원 1951년 3월 15일 부흥 광산굴에 불을 때기 시작하여 장장 6일간 계속 청솔가지, 고춧대, 고추를 태워 굴속에 있던 빨치산과 피난민들이 대부분 질식사 하였다(1994, 『전북도의회 6·25양민학살진상실태조사보고서』 221쪽).
갈담, 백련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부흥광산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30여명을 군인들이 끌고 와서 갈담초등학교 관사에 하룻밤을 재우고 다음날 회진리, 망월리 방향으로 끌고 가서 죽였다고 한다(청웅면 부흥광산 사건 참조).
 
폭탄도 안 들어오고 쏠 데도 없고 근게로 요 근방이 전부로 부대가 들어가부렀어요. 들어갔는디 인제 자기들은 불 땔 줄 몰랐제. 몰라갖고 그리 들어갔는디. 근디 여 근방에 자유대 향방 동원해갖고 내가 근게 향방에 있었는디. 여 근방에 절읍하고 고추 걷었어요. 걷어가지고 막 불어 땠어. 근게 불이 기가 맥히게 잘 들어. 청웅면 남산리가 있거든. 불이 그렇게 잘 들었어.
 
연기 한 방울도 쪽쪽 빨아들여. 그래갖고 엿새를 땟어. 주야로. 밤에 안 땠구나. 낮에만 땠구나 거기를 지켰어. 밤이믄 근디 사흘인가 때버린게 기름병에다가 실구 꼽아갖고 불딩겨간고 캄캄 허믄 못 들어간게. 들어간디는 요만씩밖에 안해. 들어간데는 들어가믄 굴이 겁나지만 그래갖고 경창들이 향방들이 다니면서 끄집어 내 올린게 무지허게 많이 죽었어요.
 
거기 안에 가먼 방죽도 있고 거기 빠져 죽기도 허고 가족단위로 속에다 돌멩이로 방을 만들었드라고 식구별로 긍게 거기서도 무지허게 많이 죽었어. 시체도 많이 끄집어 냈어요. 글고 이 근방 부흥리 사람들이 많이 나왔지. 부흥리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많이 해갖고 거가 많이 그 사람들이 찾아왔지. 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근방 있는 사람들은 많이 찾아왔어. 손들고 나온 사람들은 저녁판에 쭉 데리고 나오면 코가 땅에까지 닿아. 그게 질질 써져. 근게 얼마나 머리에 써진가 몰라. 그래서 군인들이 인솔혀. 데꼬 내려가. 군인들이 요 앞으로 데꼬 광산에 백련리 들어간디 고리 둘인가가 도망가드라고 근게 막 쏴 죽여버려. 그 사람들이 직접 쏴버려. 막. 소영없어. 그러고 데리고 내려가 갖고 일부는 회진리 근방 가서 망월리란데 거그서 많이 죽였다고 그려(강진면 부흥리 이경재. 76세)
 
<부흥광산 희생자 명단>
 
회진리-정인묵회
방현리-전광렬
갈담리-박찬갑, 박인정
부흥리-노병기,임막동,이판남,양싸룡,임병선 부
 
 
○ 부역혐의자 살해
1951년 국군이 수복을 한 후 부역혐의자를 처형하는 일들이 각 마을에서 일어났다. 용수리의 박문기는 군인에 의해서 사살되었고(전언자 증언 이광수), 회진리의 정삼암(전언자 증언 정인옥), 학석리의 나승환(전언자 증언 김진용)은 경찰에 의해서 사살되었다. 부흥리의 임실고, 김영상은 경찰서에서 총살당했다(전언자 증언 유원규). 1952/3년에는 학석리의 이남용씨가 형무소로 가서 처형당했다.
 
학석리의 최병식씨는 남광주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서 처형당했다(전언자 증언 김진용). 수복 후 군경이 빨치산 토벌 초기에는 부역자를 그 자리에서 처형하는 방식으로 급하게 처리했으나 후기에는 형무소나 수용소로 데려가서 일정한 과정을 밟은 후 처형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빨치산에 의한 학살
옥정리 조윤옥씨는 촉성회의 회장으로 활동을 했고 마을에서 꽤 잘사는 지주였다. 빨치산들은 그를 반동이라고 끌고 가서 구타를 했다. 그는 다행히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고 그 후 순창으로 도망갔다. 순창에서 다시 잡혀서 전주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전주형무소를 불태우던 날 탈출했으나 집에 남아있는 가족들은 반동가족이라 하여 1951년 1월 2일 빨치산들이 가족들(시조모, 시모, 시동생3)을 모두 마을앞산으로 끌고 가서 죽였다. 탁병기 가족 4명도 이날 같이 죽었다. 증언자 백양님씨(조윤옥씨의 며느리)는 마침 친정으로 아기 낳으러 가서 살았는데 거기까지 쫓아와서 죽이려고 하던 조윤옥이 두 아들을 전주로 불러서 다행히 세 사람은 살아남았다.
 
백련리 신기, 부흥리 부흥, 이목마을에서는 4명이 구장 활동을 했다고 1950년 12월 23일 빨치산들에게 반동으로 몰려 가목마을 앞에서 덕치면으로 넘어가는 대림재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다.
회진리(2명), 필봉리(11명, 김기곤 군인가족 포함, 동생 김해곤의 증언), 학석리(1명), 부흥리(6명), 갈담리(2명, 1명은 생환)는 빨치산들이 반동으로 몰아서 처형하였다.
강진 소재지인 갈담리에서는 의경대원이 빨치산들과 싸우다가 죽거나(2명) 상해(4명)를 입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현재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고 있다고 한다(전언자 증언 박기준).
 
우리 시아버지가 옛날에 촉진대장이었어요. 그래서 빨치산이 가족을 반동이라고 다 죽였어. 우리 시어머니, 시할머니, 시동생 셋 그렇게 다섯 명이 죽었어요. 쬐금한 애기들 하나는 아홉 살 먹고, 여섯 살 먹고, 세 살 먹고 그랬어. 빨치산이 전부 다 죽였다니까 동짓달 음력으로 스물 닷새 날 이여. 1951년도 6.25 나던 해 음력 11월 25일. 나는 아기 날 때가 된 게 친정에 가서 있고, 시아버지는 빨치산들한테 안 죽을 만큼 두들겨 맞았어. 그 아래가 어떻게 맞았는가 살이 위아래가 시커멓더라고. 그때 용케 살긴 했는데 그날 저녁에 또 와서 사람을 죽이려고 또 쫓아왔어요. 우리 하고 세 집이 있어. 탁병기하고 그 양반네 마누라 둘. 큰 어머니 작은 어머니 그리고는 탁씨들하고 두 집이 죽었어. 탁기철하고 그 양반 마누라 이 분도 빨치산이 같은 날에 끌고 가서 그랬다고(강진면 옥정리 백양님. 80세)
 
 
4) 강진면 마을별 피해 상황
 
강진면 옥정리 사건
 
피해규모는 옥정리에는 국군에 의한 배소고지 집단희생 27명, 빨치산 희생 17명, 군경토벌 한 명으로 피해 규모가 상당히 크다. 발생 시기는 1951년 1월~1951년 3월이며 주요사건 지역은 배소고지, 마을 앞산, 정읍 종성리 이다. 옥정리는 자연마을이 옥정(새터), 양지, 배소(없어짐)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옥정리는 배소고지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51년 3월 6일 한상열씨 일가족 18명이 정읍 산내 종성에서 빨치산들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혐의로 모조리 배소고지로 끌려왔고(유족 증언 조보순), 같은 날 백옥식씨 일가족 8명도 함께 끌려왔다. 아기 낳으러 친정으로 가있던 백양님씨도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군인들이 총을 쐈는데 모조리 죽고 백양님씨만 천우신조로 돌 뒤에 숨어서 살았다 한다(유가족 증언 백양님).
 
현재 배소마을엔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한다. 백양님씨의 시부 조윤옥씨가 촉성회 회장 활동을 했고 마을에서 지주였는데, 빨치산들이 반동가족이라 하여 가족들(시조모, 시모, 시동생3)을 마을 앞산으로 끌고 가서 일가족이 죽임을 당했다. 증언자 백양님씨는 정읍으로 아기 낳으러 가서 살았다. 시아버지와 남편, 시동생은 전주로 피신해서 살아남았다. 마을 사람 몇 명은 빨치산들에 의해 정읍 종성으로 끌려가서 죽었다. 댐 길이 열려 있어서 강진 옥정리와 정읍 산내가 이어져 있기에 군인과 빨치산, 피난민들의 주요 통행로가 되었다.
유족(옥정리 백양님, 옥정리 조보순)
 
 
강진면 문방리 사건
 
문방리의 피해규모는 배소고지에서 5건, 군경토벌작전에서 6건, 빨치산들이 2건 발생되었으며 발생 시기는 1950년 가을~1951년 초로서 주요사건지역은 배소고지와 마을 근처이다.
문방리는 문방(문치), 수방, 산막, 용강촌으로 되어있다. 문방마을(문치)에 군대부가 오래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차성규 형제 등이 회문산으로 피난 가다가 군인들에게 붙들려서 옥정리 배소고지로 끌려가서 학살당하였다. 문방마을에서는 군인들에 의해 마을 사람 2명이 죽었으며 빨치산에 의해 2명이 마을 근처에서 총살당하였다(전언자 증언 송영준). 수방마을에서는 주민들이 피난 가다가 군인들에 의해 3명이 총살당하였다(전언자 증언 오길수).
 
 
강진면 용수리 사건
 
피해규모는 배소고지 16건이며 군경토벌작전으로 2명이 희생되고, 부역혐의로 1건, 빨치산으로하여금 2건이 발생하였는데 시기는 1951년~1953년으로 주요사건지역은 배소고지와 백여마을 이다.
 
용수리는 백여, 백운, 용수마을이 있는데 주요사건으로는 백운마을의 박용태씨와 박용택씨 일가족 16명이 순창으로 피난을 가다가 군인들에게 붙들려 옥정마을 사람들과 같은 날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게 무참하게 집단학살을 당하였다(전언자 증언 정경모). 백여마을의 최모씨는 소 끌고 가려는 군인을 말리다가 그 군인에 의해 돌에 맞았고, 또 다른 최모씨는 불에타는 집에서 소를 꺼내려다가 불에 타서 죽었다. 백여 마을의 박문기씨는 빨치산 연락책을 했다는 혐의로 군인들에게 잡혀서 총살당하였고, 육일만, 최쌍쇠씨는 빨치산에게 끌려가서 행방불명되었다(전언자 증언 이광수).
 
 
강진면 회진리 사건
 
피해규모는 빨치산 3견, 부역혐의 1건, 군경토벌 7건(부흥광산4건)으로 발생시기는 1951년~1951년이며, 주요사건지역은 부흥광산과 회진마을이다. 회진리는 오두목과 장동마을이 있는데 회진리 오두목 마을은 정씨들이 주로 살고 있던 마을이다.
 
주요사건은 정평조, 정성조, 정인종씨 3인은 빨치산을 따라 산에 들어갔다가 행방불명되었다. 군인들을 피해 부흥광산으로 피신했던 정인묵 외 3명이 부흥광산 안에서 질식사하여 죽었다. 군경 토벌시에 마을에 있다가 정영조씨는 발에 총상을 입고 죽었고, 정해권씨는 발 뒷꿈치에 총상을 입었으나 살아남아 절룩거리며 살다가 돌아가셨다. 정정구씨의 형은 마을뒷산 토굴로 피난 갔다가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 정삼암씨는 빨치산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마을 출신 의경대원에게 집에서 총살당했다. 회진리 장동마을 옆(멧골)에 부흥광산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 30여명을 군인들이 끌고 와서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전언자 증언 정인옥).
 
 
강진면 필봉리, 방현리 사건
 
피해규모는 군경토벌(부흥광산 1건)2건, 빨치산 11건이며 발생시기는 1950년 가을~1951년 봄으로 마을뒷산과 부흥광산, 그리고 회문 산이다.
 
필봉리는 상필, 하필마을이며 방현리는 이윤, 방현으로 이루어졌다. 주요사건은 군인들과 빨치산이 이윤마을 뒷산에서 전투를 하는데, 총에 맞을까 두려워서 그 곳을 피하다가 이판춘씨가 총을 맞고 죽었으며(전언자 증언 노현식) 전광렬씨는 부흥광산으로 피신했다가 질식사하여 죽었다(전언자 증언 홍일표). 하필마을에서는 군인가족 김기곤 외 8명이 마을의 누군가의 모함으로 빨치산들에게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다(유족 증언 김해곤).
 
 
강진면 학석리 사건
 
피해규모는 인민군 3건, 빨치산 12건, 부역혐의 2건, 여순사건1건, 개별사건 1건으로 발생시기는 1948년~1953년까지이다. 주요사건지역은 마을과 형무소, 회문산이다.
 
주요사건은 진주해온 인민군대를 따라간 이점산, 이정택, 김이진 3명이 행방물명되었다(전언자 증언 김진용). 학석리에서 빨치산을 따라가서 행방불명된 사람들이 최영식 외 14명이나 되는 마을이다. 송인호는 여순사건 즈음해서 군인들에게 붙잡혀서 형무소에서 총살당하였다. 최병식은 부역혐의로 잡혀서 남광주 포로수용소에서 총살당하였다(전언자 증언 김진용).
봄에 산나물을 캐고 내려오던 노만용의 누나, 조내기의 처가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전언자 증언 김진용). 박사관은 전쟁 전에 좌익들의 꾐에 빠져 몽둥이를 들고 지서를 습격하러 갔다가 경찰의 총을 맞고 간신히 도망쳐서 살았다(전언자 증언 이병갑).
 
 
강진면 갈담리 사건
 
피해규모는 군경토벌중 부흥광산에서 2건, 빨치산 피해가 11건이며 발생시기는 1950년~1951년이다. 주요사건지역은 부흥광산과 회문산이다.
 
갈담리는 면소재지로 갈담, 강서, 강진으로 이루어져 있는 마을이다. 갈담리의 주요사건은 면당위원장 하던 박찬갑과 그의 딸은 부흥광산으로 피신했다가 질식사하여 죽었다. 윤때보, 윤종구, 박길동 3명은 빨치산에 끌려가서 죽었고, 김유복은 창에 찔렸으나 살아 돌아왔다. 이경만은 집의 마루 밑에 숨어있다가 빨치산의 총에 맞아 죽었다. 박희수 외 5명은 의경대원으로 군경토벌 작전에 동원되어 빨치산과 전투 중에 총상을 입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부흥광산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생존자 30여명을 갈담의 초등학교 관사에 하루밤 재우고 다음날 망월리 방향으로 끌고 가서 죽였다고 한다.
전언자(갈담리 이종구, 79), 전언자(갈담리 박기준, 75), 전언자(갈담리 조동인, 72)
 
 
강진면 부흥리, 백련리 사건
 
이곳의 피해규모는 군경토벌(부흥광산 3건) 8건, 빨치산 9건, 부역혐의 3건, 여순사건 1건이며 발생 시기는 1950년~1951년이다. 주요사건지역은 부흥광산, 대림재, 마을, 경찰서이다.
부흥리는 부흥, 이목, 가목으로되어 있고 백련리는 신기, 백련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사건은 부흥광산으로 피신한 노병기, 양싸룡, 임길도, 임막동, 이판남은 굴 안에서 질식사하여 죽었다(전언자 증언 유원규).
 
1950년 12월 23일 유농규(전언자 증언 유원규), 이강영(전언자 증언 이경재), 정평조(전언자 증언 강경희)는 당시에 마을에서 구장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빨치산들에게 끌려가서 가목마을에서 덕치면으로 넘어가는 대림재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정평조의 처는 남편이 끌려가는 것을 말리다가 마을 앞에서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전언자 증언 강경희). 또 다른 1명은 부역혐의로 경찰에 끌려가서 총살당하였다(전언 증언 유원규).
 
가목마을에서 고기를 잡던 청년 열 명이 경찰에게 잡혀갔는데, 조사를 받은 후에 김석재 혼자만 빨치산 전령 활동했다고 부역혐의로 죽임을 당하였다(전언자 증언 조행곤).
정병모의 모친, 엄준섭의 여동생은 길목에 서 있다가 군인들에게 여자라는 이유로 재수 없다고 총을 쏘아 맞아 죽었다(유족 증언 정병모).
가목마을 당위원장은 경찰이 마을에 숨었는데도 좌익세력들에게 고발하지 않고 모르는체 했고, 수복 후에는 반대로 그때 도움 받은 경찰들이 그들을 자수시켜서 목숨을 구해주었다(전언자 증언 조행곤).
 
여순사건과 관련해서 권남주는 좌익활동 혐의로 경찰에게 끌려가서 죽도록 구타당하고, 집으로 풀려나오긴 했지만 매 맞은 후유증으로 며칠 만에 바로 사망하였다(전언자 증언 권종주).
 
 
또 다른 부흥 광산 토벌작전 야화(野話)
 
1950年 6·25 남침으로 남하하여 최후 낙동강전투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UN군이 참전하게 되자 전투는 반전되기 시작하여 북한군은 후퇴하기에 이르렀고 1950年 9月 18日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북괴 정예군 대부분은 강원도 태백산맥을 타고 38선 밖 이북으로 후퇴하였으나 소수 인민군과 지방빨치산 그리고 여수 반란사건에 연루되었거나 사변 전 남노당에 물들었던 자들이 빨치산에 끼어 지리산, 덕유산, 원통산, 회문산, 백년산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빨치산들이 살인, 방화, 약탈, 도로 및 철도망기습, 폭파 등으로 산간지역 주민들은 살길이 막연하였다.
 
그 원인은 낮에는 대한민국이고 밤이면 인민공화국으로 치안이 확실하게 되지 않아 밀치락 달치락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공비토벌에 제8사단 제2사단은 중부지구에서 적의 잔여병력을 소탕작전을 전개하였고 호남지구는 제11사단 등을 투입 회문산줄기 가막골 작전과 공군 전투기 폭격으로 빨치산 대부대가 소탕되자 원통산 회문산 백련산등지의 잔여 빨치산들이 폭격을 피할 수 있고 육상 전을 할 수 없는 부흥광산 굴을 찾게 되었다 한다.(강진면 백련리산 154번지)
 
부흥광산 굴에 모여든 빨치산은 무려 600여명이나 되어 청웅, 강진, 덕치 등 야간에 식량 이불 가축 등 필요한 것들을 마구 약탈하여 어디론가 가버려 밤만 되면 불안에 떨고 시달리며 오던 중 정보를 입수한 군경들이 주민을 동원 1952년2月(陰二月1日) 1日 부흥광산 굴에 불을 때기 시작하여 장장 7일간 계속 청솔가지 고추 대 고추를 태워 굴속에 있던 600여 빨치산들이 질식사 하였다.
 
임실군 지구 군경들은 지방 빨치산들이기 때문에 작전을 전개하기 전 굴 안에다 스피카 방송을 통하여 무기를 버리고 자수하라 자수하면 살려줄 테니 하고 권유하였으나 골수 빨치산들이 양측통로에 무장하고 자수하려는 자는 사살함으로써 자수할 수 없었고 특히 가족들을 동원 울부짖으며 자수를 권유하였으나 끝내는 자수하지 못하고 질식사 하였다. 그 중 한 두명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여생을 보냈으며 부흥광산 굴 소탕으로 밤이면 불안했던 시절을 청산하고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또 다른 부흥 광산 토벌작전 야화(野話)
 
1951년 국군 11사단 토벌군의 공산유격대 은신처 일소작전인 건벽청야(乾壁淸野) 작전 때에 산촌마을 주택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전라북도 경찰국 자료의 『꽃피는 산하(山河)』내용의 일부인 다음의 문구는 부흥광산 소개 작전 당시 그 피해 규모를 짐작케 해 준다.
 
1951년 3월 14일에 일심 경찰서장 송우대 소재의 금광동굴에 공비 250명이 은거 집결하여 무수히 많은 양민을 살상하고 방화약탈을 일삼고 있던 공비들을 완전 섬멸했다(全羅北道警察局, 1968서남지구 공비의 만행 남원경찰서, 『꽃피는 산하(山河) - 6.25의 흔적(痕跡)을 찾아서-』,48)
 
당시 달리 피난처가 없던 산촌주민들은 주변을 헤매며 살다가 유격대와 토벌대에 의해 적과의 협조자 혐의로 쌍방으로부터 희생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부흥광산 사건이다. 부흥광산은 임실과 순창사이 도로변 청웅면 남산리에서 강진면 부흥리에 연결된 폐광으로 굴이 깊어 많은 사람들이 은신해 있을 수 있었다.
 
국군 제11사단 회문산 작전이 종료단계에 있었던 1951년 2월 25일, 부흥광산 굴속에 많은 수의 공산유격대와 협력주민들이 숨어있다는 제보가 들어와 군경토벌대가 출동, 굴 안에서 나오도록 유인했으나 실패하고 돌아갔다. 3월 14일 공산유격대뿐 아니라 공산치하 때 임실군당인민위원회 산하 덕치, 삼계, 청웅, 강진면당 위원회 협력주민들이 함께 은신해 있다는 제보가 다시 임실경찰서에 접수되었다.
 
국군 제11사단 13연대 2대대병력과 임실경찰서 전투경찰 등 군경토벌대가 다시 출동, 광산일대를 포위하고 이번에는 32개의 폐광입구 중 28개를 폐쇄하고 나머지 4개의 굴 입구에 고추나무 대와 생솔가지를 쌓아 놓고 불을 질러 연기를 굴 안으로 몰아넣는 오소리작전을 폈다. 6일간 계속된 오소리작전으로 굴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 질식사했으며 연기를 이기지 못해 굴 밖으로 뛰어나온 사람들은 사살되었다.
 
부흥광산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인민군이고 빨치산 이었던 것은 아니다. 9·28 수복이 되고 군경들에게 당할 것이 걱정되어 가족 중 한명이라도 좌익 활동을 했다면 그 일가족이 광산으로 피신을 하였다. 또한 조금만 광산 안에서 참으면 다시 인민군이 쳐들어와 논도 나눠주고 배도 굶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말에 꼬여서 별 생각 없이 굴로 들어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빨치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사람도 있었다. 관련 조사에서 청웅면 부흥광산 사건으로 사망한 사람은 70여명으로 조사되었으나 실제 피해 규모는 500여명이 훌쩍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목리 피해사건
 
가남실 이기연 집에서 빨치산들이 소재미상의 양민 6명을 집에서 때려죽였으며 가남실 마을 앞 남쪽으로 밭에 구덩이를 파고 사람 2명을 창으로 찌르고 때려서 생매장을 하여 죽였다.
 

 
강진면내 민간인 피해 사건 연표
 
1948년 02월 26일 관촌, 성수, 신평, 삼계, 오수 등지에서 지서습격사건(2.26사건) 발발.
1950년 여름경 강진면 학석리 주민 3명 인민군에게 끌려간 후 행방불명
1950년 가을경 강진면 학석리 주민 10명 빨치산에 의하여 끌려간 후 행방불명
1950년 가을경 강진면 필봉리 주민 11명 빨치산에 의하여 척살 당함.
1950년 겨울경 강진면 갈담리 주민 4명 빨치산에 의하여 척살 당함.
1950년 12월 23일 강진면 부흥리 대림재에서 빨치산에 의하여 마을 주민 3명 척살 당함
1951년 1월 2일 강진면 옥정리 주민 9명 새터마을 앞산에서 빨치산에 의하여 죽음.
1951년 3월 15일~17일 강진면 부흥리 부흥광산 사건으로 63명 사망
1951년 강진면 주민 7명 빨치산에 의하여 총살당함.
강진면 배소고지에서 49명 집단사망사건
 
 
강진면의 개인별 피해 사건 연표
 
신기리 김학용(40세)은 1950년 12월경 빨치산에 밤에 끌려가 산에서 죽음.
신기리 백종환(40세)은 1950년 12월경 말 안듣는다고 빨치산이 산으로 끌고가 죽임.
신기리 정평조(50세)는 1950년 12월 23일 이장으로 활동하다가 반동으로 몰려 부흥리 유농규, 이목 이강영과 함께 빨치산에 끌려가 죽음.
신기리 정평조의처(48세)는 1950년 12월 23일 강제로 끌려가는 남편을 쫓아가다가 마을 앞에서 빨치산에게 당함.
 
백련리 권남주(20세)는 1948년 10월경 여순사건으로 경찰서에서 구타를 당하여 사망.
백련리 김갑룡(29세)은 1950년 8월 3일 적대세력으로 하여금 강진교 다리 밑에서 피살됨.
백련리 최금섭(40세)은 1951년 군경토벌 작전시 백련마을에서 군인에 의하여 총살당함.
백련리 김덕순은 1950년 10월 15일 빨치산에 의하여 학살.
백련리 김영순은 1950년 10월 15일 빨치산에 의하여 학살.
백련리 장인선은 1950년 10월 15일 빨치산에 의하여 학살.
 
부흥리 김갑오(50대)는 1951년 7월 9일 부흥리 산골짜기에서 빨치산에 의하여 죽음.
부흥리 김영상(40대)은 1951년 부역혐의로 경찰서에서 총살을 당함.
부흥리 노병기(40세)는 1951년 3월 15일 군경 토벌작전 시 부흥광산에서 질식사.
부흥리 양싸룡(40대)은 1951년 3월 15일군경 토벌작전 시 부흥광산에서 질식사.
부흥리 유농규(45세)는 1950년 12월 23일 빨치산에 끌려가 죽음.
부흥리 이판남(40세)은 1951년 3월 15일 군경 토벌작전 시 부흥광산에서 질식사.
부흥리 임길도(40대)는 1951년 부역협의로 경찰서에서 총살 당함.
부흥리 임막동(40세)은 1951년 3월 15일 군경 토벌작전 시 부흥리 광산에서 질식사.
부흥리 임준섭의제(10대)는 군경토벌시 부흥마을앞에서 총살을 당함.
 
이목리 박창엽(80세)은 1951년경 이목리 산위에서 지키다가 빨치산에 총을 맞아 부상당함.
이목리 서영길(30대)은 1951년 군경 토벌작전시 이목마을 뒷산에서 총상을 입음.
이목리 이강영(40대)은 1950년 12월 23일 빨치산이 가목리 대림재로 끌고 가서 창으로 찔러 죽임.
이목리 정병모의 모(40대)는 1951년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마을앞 도로에서 총상을 당함.
 
가목리 김석재(20세)는 1951년 부역혐의로 경찰서에서 총살을 당함.
가목리 대만이(25세)는 1950년 가을경 빨치산의 심부름을 하다가 죽은 것으로 추정
 
갈담리 김영조(20대)는 1951년경 의경대원으로 일하다가 빨치산에 총맞고 죽음.
갈담리 박인정(16세)은 1951년 3월 15일 군경 토벌작전 시 부흥광산에서 질식사.
갈담리 박찬갑(50세)은 1951년 3월 15일 군경 토벌작전 시 부흥광산에서 질식사.
갈담리 윤종구(34세)는 1950년 12월 빨치산에 끌려가 죽음.
갈담리 윤때보(57세)는 1950년 12월 빨치산에 끌려가 죽음.
갈담리 탁기철처(미상) 1951년 1월 2일 빨치산에게 끌려가 죽음.
갈담리 탁병기의자(10대) 1951년 1월 2일 빨치산에게 끌려가 죽음
갈담리 탁병기의처1.(40대) 1951년 1월 2일 빨치산에게 끌려가 죽음
갈담리 탁병기의처2.(30대) 1951년 1월 2일 빨치산에게 끌려가 죽음
갈담리 윤병호는 1950년 10월 28일 빨치산에 의하여 학살.
갈담리 윤정암은 1950년 10월 28일 빨치산에 의하여 학살.
갈담리 윤한포는 1950년 10월 28일 빡치산에 의하여 학살.
갈담리 김영복은 1950년 10월 10일 빨치산에 의하여 학살.
갈담리 최종길은 1950년 10월 10일 빨치산에 의하여 학살.
 
강진리 전정민(80세)은 1951년경 의경대원으로 활동중 빨치산에 총맞아 부상당함.
강진리 정인권(20대)은 1951년경 경찰로 활동하다가 빨치산에게 총을 맞아 손에 부상을 당함.
 
강서리 강인수(20대)는 1951년 빨치산에 의하여 총살당함.
강서리 박희수(30세)는 1951년경 의경대장으로 활동중 빨치산에 총을 맞아 부상당함.
강서리 이경만(28세)은 1951년경 집 마루 밑에 숨어 있다가 빨치산에게 총맞아 죽음.
강서리 조동일(20대)은 1951년경 의경으로 활동중 빨치산에게 총을 맞아 팔이 부러지는 총상을 입음.
 
회진리 정삼암(30세)은 1951년 자택에서 경찰에 의하여 부역협의로 총살을 당함.
회진리 정성조(25세)는 1951년경 빨치산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가 행방불명됨.
회진리 정용조(24세)는 1951년 군경합동토벌작전으로 마을에서 총살을 당함.
회진리 정인묵(30대)은 1951년 3월 15일 군경 토벌작전 시 부흥리 광산에서 질식사
회진리 정인종(19세)은 1951년경 빨치산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가 행방불명됨.
회진리 정평조(19세)는 1951년경 빨치산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가 행방불명됨.
회진리 정해권(60세)은 1951년 군경합동 토벌작전에 의하여 마을에서 총상을 입음.
회진리 정 씨(13세)는 1951년 학생으로 군경합동 토벌작전 시 마을뒷산 토굴에서 총살을 당함.
회진리 정 씨1.(미상)은 1951년 3월 15일 군경 토벌작전 시 부흥리 광산에서 질식사
회진리 정 씨2.(미상)은 1951년 3월 15일 군경 토벌작전 시 부흥리 광산에서 질식사
회진리 정 씨3.(미상)은 1951년 3월 15일 군경 토벌작전 시 부흥리 광산에서 질식사
 
백여리 박문기(40세)는 1953년경 부역혐의로 군인들로부터 총살을 당함.
백여리 최씨 1(51세)는 1951년 군경 토벌작전 시 백여 마을에서 총살당함.
백여리 최씨 2(51세)는 1951년 군경 토벌작전 시 백여 마을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박용태(30대)는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작전 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박용태의처(30대)는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작전 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박용태의큰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작전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박용태의둘째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 작전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박용택(20대)는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작전 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박용택의처(20대)는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작전 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박용택큰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작전 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박용택작은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작전 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박옥동(20대)는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작전 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박옥동의 처(20대)는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작전 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박옥동 큰 아들(미상)는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작전 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박옥동 작은 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작전 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한성규(30대)는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작전 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한성규의 큰 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작전 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한성규의 둘째 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작전 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백운리 한성규의 셋째 아들(미상)는 1951년 3월 6일 군경 토벌작전 시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총살당함.
 
용수리 육일만(23세)은 년도미상의 어느 날 빨치산에 의하여 회문산으로 끌려가 행방불명임.
용수리 최쌍쇠(23세)는 1950년경 빨치산에게 회문산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됨.
 
옥정리 강복덕(50세)은 1952년 10월경 임실읍내에서 빨치산에 의하여 총살 당함.
옥정리 김병태(미상)는 1951년 빨치산에 끌려가서 죽음.
옥정리 김재선(미상)은 1951년 빨치산에 끌려가 척살 당함.
옥정리 백옥식(40대)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일곱 가족들과함께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백옥식의처(30대)는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백옥식의 큰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백옥식의 둘째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백옥식의 셋째 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백옥식의 넷째 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백옥식의 다섯째 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백옥식의 여섯째 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송 씨(미상)는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송철수(30대)는 한국전쟁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오창근(미상)은 1951년경 빨치산에 끌려가 죽음.
옥정리 임호진(30대)은 빨치산들에게 구타를 당하여 사망
옥정리 조영자(6세)는 1951년 1월 2일 빨치산들이 일가족(시조모.시모, 시동생)을 함께 끌고 가서 죽임.
옥정리 조용곤(9세)은 1951년 1월 2일 빨치산들이 일가족(시조모.시모, 시동생)을 함께 끌고 가서 죽임.
옥정리 조입분(60대)은 1951년 1월 2일 빨치산들이 일가족(시조모.시모, 시동생)이새터마을앞산에서 척살됨
옥정리 조천열(미상)은 1951년경 빨치산에게 끌려가서 죽음.
옥정리 조충근(3세)은 1951년 1월 2일 빨치산들이 일가족(시조모.시모, 시동생)을 함께 끌고 가서 죽임.
옥정리 탁원철(30대)은 1951년 1월 정읍 종성리로 끌려가 빨치산에 의하여 척살 당함.
옥정리 탁한철(30대)은 1951년 1월경 빨치산들에 의하여 정읍 종성리에서 척살 당함.
옥정리 한상열(50대)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상열의처(50대)는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정섭(30대)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정섭의처(30대)는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정섭의 큰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정섭의 작은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완섭(30대)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완섭의 처(30대)는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완섭의 큰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완섭의 둘째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완섭의 세째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희섭 (20대)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희섭의 처(20대)는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희섭의 큰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희섭의 둘째아들(미상)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장섭(20대)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철술(20대)은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한철술의처(20대)는 1951년 3월 6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옥정리 조공식은 아군에 의하여 학살.
옥정리 송상응은 아군에 의하여 학살.
옥정리 한원섭은 아군에 의하여 학살.
옥정리 한만섭은 아군에 의하여 학살.
옥정리 한광섭은 아군에 의하여 학살.
옥정리 조천일은 아군에 의하여 학살.
옥정리 송철주는 아군에 의하여 학살.
 
문방리 김기철(24세)은 1951년 군경 토벌작전 시 회문산에서 총살당함.
문방리 김영환(34세)은 1950년 12월 20일 군경 토벌작전 시 수방마을 근처에서 총살당함.
문방리 김창식(21세)은 1951년 3월 2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문방리 송강호(55세)는 1951년 회문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전령으로 오인 받아 빨치산들에게 죽음.
문방리 송기호(35세)는 1950년 가을경 군경 토벌작전시 문방마을 앞에서 총살을 당함.
문방리 송영진(20세)은 1951년 3월 2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문방리 송영록(16세)은 1951년 3월 2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문방리 신상우(35세)는 1951년 군경 토벌작전 시 회문산에서 총살당함.
문방리 차성규(20대)는 1951년 3월 2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문방리 차재규(20대)는 1951년 3월 2일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총살당함.
 
수방리 김태식(22세)은 1950년 12월경 군경 토벌작전 시 수방마을 근처에서 총살당함.
 
학석리 김창민의형(25세)은 1950년 가을경 빨치산에 의하여 행방불명됨.
학석리 김철만의형(25세)은 1950년 가을경 빨치산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서 실종됨.
학석리 곽병술(23세)은 1950년 가을경 빨치산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서 실종됨.
학석리 곽병엽(37세)은 1950년 가을경 빨치산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서 실종됨.
학석리 김미진(20세)은 1950년 7월 경 의용군에 입대 낙동강 전투에서 죽었을 것으로 추정.
학석리 나승환(20세)은 1951년 봄경 강진지서에서 고문치사 하였음.
학석리 노만용의 누나(17세)는 1951년봄 군경 토벌작전 시 총살당함.
학석리 문천수(27세)는 1950년 가을경 빨치산에 의하여 행방불명됨.
학석리 문한수(27세)는 1950년 가을경 빨치산에 의하여 행방불명됨.
학석리 박사관(60세) 1950년봄 경찰에 의하여 학석리 뒷산에서 총살을 당함.
학석리 송만호(21세)는 1950년 가을경 빨치산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 실종됨.
학석리 송인호(37세)는 1948년 10월경 여순사건으로 형무소에서 총살당함.
학석리 송인호제(29세)는 1950년 가을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산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
학석리 양진구(40세)는 1950년 가을에 빨치산에 의하여 행방불명됨.
학석리 이남용(37세)은 1952년경 부역혐의로 군경 합동에 의하여 형무소에서 총살당함.
학석리 이점산(25세)은 1950년 여름 인민군에 끌려가 행방불명됨.
학석리 이정택(25세)은 1950년 여름 인민군에 끌려가 행방불명됨.
학석리 정국선(22세)은 1951년 빨치산에 의하여 행방불명됨.
학석리 조내기(25세)는 1950년 가을경 빨치산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서 실종됨.
학석리 조내기의처(20세)는 1951년봄에 군경토벌작전시 학석마을 뒷산에서 총살당함.
학석리 최병식(25세)은 1953년 군경합동 부역혐의로 남광주 포로수용소에서 총살당함.
학석리 최영식(20세)은 1950년 가을경 빨치산을 따라서 산으로간 후 실종됨.
학석리 최판식(19세)은 1950년 가을경 빨치산을 따라서 산으로간 후 실종됨.
 
방현리 전광렬(40세)은 1951년 3월 15일 군경 토벌작전 시 부흥광산에서 질식사
방현리 전광열은 아군에 의하여 학살.
방현리 조명옥은 아군에 의하여 학살.
방현리 전종열은 아군에 의하여 학살.
방현리 전원조는 아군에 의하여 학살.
방현리 정인기는 아군에 의하여 학살.
 
이윤리 이판춘(30세)은 군경 토벌작전시 이윤마을 뒷산에서 총살당함.
 
필봉리 강진구(22세)는 1950년 가을에 빨치산에 끌려가 죽음.
필봉리 곽정록(29세)은 1950년 11월 15일 빨치산에 끌려가서 죽음.
필봉리 김기곤(26세)은 1950년 겨울 빨치산에 끌려가서 죽음
필봉리 홍영표(26세)는 1950년 12월 20일 빨치산에 끌려가서 죽음.
 
상필리 양봉춘(20세)은 1950년 11월 15일 빨치산에 의하여 끌려가 죽음.
 
하필리 노판욱(26세)은 1950년 겨울 빨치산에 끌려가서 죽음.
하필리 박산용(30세)은 1950년 겨울 빨치산에 끌려가 죽음.
하필리 박판산(20세)은 1950년 겨울 빨치산에 끌려가서 죽음.
하필리 서연철(26세)은 1950년 겨울 빨치산에 끌려가서 죽음.
하필리 송명선(40세)은 1950년 겨울 빨치산에 끌려가서 죽음.
하필리 조일남(50세)은 1950년 겨울 빨치산에 의하여 척살됨.
 
(미상)하상리 박수만은 1950년 12월 14일 빨치산에 의하여 학살.
(미상)하상리 원한선은 1950년 10월 28일 빨치산에 의하여 학살.
(미상)하상리 조종대는 1951년 11월 4일 빨치산에 의하여 학살.
(미상)하상리 소대앙은 1950년 10월 5일 빨치산에 의하여 학살.
(미상)하상리 서정화는 1950년 12월 5일 빨치산에 의하여 학살.
(미상)하상리 최간록은 1950년 12월 5일 빨치산에 의하여 학살.
 
강진면 김유복(58세)은 1950년 12월경 빨치산에 끌려가 창에 찔렸으나 살아 돌아와 후유증으로 죽음.
강진면 박길동(33세)은 1950년 12월 빨치산에 끌려가 죽음.
 
총 184명
 
註 : 1994년 10월 전라북도의회에서 6.25양민학살진상실태조사보고서와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6.25민간학살자료 및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집단희생관련 2008년 민간인 피해 최종 결과보고서에 의함
 
 

 
6.25한국전쟁 중 임실지역사건 또 다른 이야기들
(제1회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제68주기전북합동추모제 자료 67~73쪽과 87~93쪽의 내용에서 인용함.)
 
<전쟁 전 정치적 피해>
임실에서는 1948년 2월 26일 시위대가 성수지서를 점거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7명이 사살 당했으며 이에 분개한 시위대는 붙잡힌 경찰 2명을 살해했다. 사건 이후 임실경찰서는 무장경찰을 성수지서에 파견하여 주민들을 진압하고 287명을 검거했다.
 
1948년 12월 1일에는 임실경찰서에 감금되어 있던 박세열과 박훈 등 20여 명의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이런 사건은 25일에도 저질러졌다. 당시 희생자들은 청웅면 석두리 백길동 등 20여 명이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임실지역의 국민 보도연맹원 들이 소집되거나 연행되어 경찰서 임시유치시설에 감금되었다. 이들은 1950년 7월 20일경 임실군 오수면 봉천리 말티재와 임실읍 두만리 모래재에서 살해당했다.
 
말티재에서 12명이 총살당했다고 하는데, 임실경찰서는 후퇴하기 전 거물급들만 사살하고 나머지는 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희생자 수가 22명이라는 주장에서부터, 60여 명에 달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 점령기 인민군 측에 의한 주민피해도 있었다. 1950년 9월 27일 임실 내무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군청과 등기소 뒤 방공호 4개에서 희생되었다. 같은 날 관촌분주소에 감금되었던 주민 30여 명이 관촌면 관촌리 오원철교 및 포탄구덩이에서 집단 희생되었다.
 
 
<11사단 사건>
인민군 후퇴 후 10월 2일 임실경찰서가 복구되었다. 그러나 10월 말 11사단이 진입하기 전까지 부역혐의를 받아 희생된 주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군 11사단 13연대는 1950년 10월 말부터 11월 초 사이 2대대 7·8중대를 주둔시켰으며, 1951년 3월에는 1대대를 주둔시켰다.
 
이들이 주둔을 시작하면서 임실읍 정월리 양지마을 신동갑 외 9명이 11사단 화랑부대에 의해 희생당했다. 11월 7일에 11사단은 청웅면 향교리 수풍마을을 공격하였다. 같은 날 국군은 모래재에서 총을 쏘면서 마을에 진입하자 겁에 질린 주민들은 마을 뒷산으로 피신했다. 국군은 진입로 길가에 있던 수풍마을에 먼저 들어와 무 밭에 있던 박영술의 처를 사살하였다.
총소리를 듣고 산으로 숨었던 최재의는 군인들이 이미 마을을 빠져 나갔다고 생각하고 산에서 내려왔으나 채 마을을 빠져나가지 않았던 군인에게 발각되어 마을 안 개천 옆에서 사살 당했다.
 
1950년 12월 14일 군인들이 덕치면 장암리(암치)에 진입하여 마을 전체를 소각시키면서 마을주민을 마을 앞 당산나무에 집결시킨 뒤 주민 45명을 학살했다. 같은 날 구담마을에서도 소개 작전을 하여 주민 50여 명을 순창군 인계면 사무소 앞에서 학살했다. 순창경찰서도 피난민을 같은 장소에서 학살했다.
 
11사단은 1951년 3월 2일부터 6일까지 200여 명의 피난민들이 강진면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학살했다. 3월 20일에는 성수면 주민 송주동 등 100여 명을 성수면 왕방리 문바위에서 총살하였다. 당시 지서 주임이었던 오갑수는 주민들 중 수복 이전에 좌익 활동을 했거나 자의던 타의던 관계없이 부역했던 사람들은 모두 지서에 나와 자수하게 하였다.
 
성수면 주민들은 대부분 당시 오갑수 주임이 부역자들을 처벌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훈방시켜 빨치산과의 관계를 끊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자수한 주민들은 지서 유치장에 임시로 구금되어 있었는데, 속칭 백골부대라는 국군 부대가 성수면의 성수산, 그리고 성수면에 접해있는 진안군 백운면의 덕태산, 시루봉(1120m) 등지로 토벌작전을 가기 위해 면소재지를 통과하여 백운면으로 이동했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큰 피해를 당하고는 성수면으로 돌아와 그 화풀이로 지서에 구금되어 있던 주민들을 총살한 것이었다. 당시 오갑수는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군인들이 총을 꺼내며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므로 힘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군인들은 감금되어 있던 주민들을 성수면 왕방리의 속칭 문바위로 끌고 가 구덩이를 파게하고는 모두 총살시킨 후 귀를 잘라 그 숫자까지 확인해 갔다고 한다. 사건이 발생했던 1951년 3월 중순 임실군 성수면지역에 주둔하며 작전을 했던 부대는 국군 11사단에 배속되었던 2경비대대(부대장 김병육)였다. 2경비대대는 원래 유격사령부 예하의 제5유격대를 개칭하여 1950년 11월 24일 편성된 부대였다.
 
이 부대는 1951년 3월 3일 육본작전명령 263호에 의해 11사단에 배속되었고 같은 달 12일에 전주에 도착하였으며 15일에는 임실군으로 이동하여 주둔지 인근을 수색, 토벌하다가 19일부터 27일까지 성수면의 성수산과 그에 인접한 진안군 백운면 덕태산에서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희생자 수는 30여 명에서 70여 명, 심지어 100여 명까지 되었을 것이라고 했으나, 희생자 중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람은 23명뿐이었다. 성수지서 오갑수 주임이 치안본부로 신고하여 CIC가 이 사건을 조사했으며 그 결과 백골부대는 해체되고 지휘관이 처벌받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1951년 3월 18일에는 임실경찰서 경찰과 국군이 임실읍 성가리 주민 구복순을 빨치산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운암면 학암리에서 살해하였다. 박세열의 처 구복순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여성동맹에서 활동하다가 수복 무렵 입산하였다. 사건 당시 구복순과 함께 입산하여 활동했던 임실읍 이도리 주민 박순애(당시 22세)는 청웅면 남산리 폐금광에 숨어 있다가 군경의 작전을 피해 폐금광을 나와 구복순 등 다른 입산자들과 함께 운암면 학암리 뒷산으로 피신하였다.
 
군경의 토벌작전이 학암리까지 이어지자 박순애는 학암리를 빠져나왔으나 구복순은 1951년 3월 18일 학암리 뒷산에서 군경에게 생포되었다. 군경은 생포한 구복순을 살해한 후 시신을 방치하였고, 그 시신은 학암리 주민들이 수습하여 매장하였다. 사건 당시 구복순의 시신은 입산했던 임방규(당시 20세)가 목격하였다.
 
 
<경찰토벌 피해>
국군이 임실지역에서 토벌작전을 벌이는 동안 이들의 지휘를 받던 임실경찰서에 의한 주민 피해도 있었다.
 
임실지역에서 11사단 등 군경의 토벌작전 중 주민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건은 청웅면 폐금광 사건이다. 당시 청웅면 남산리(강진면 부흥리) 폐금광에 피난하던 370여 명의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1951년 3월 14~16일 임실경찰서와 국군 11사단 13연대 2대대 7중대는 청웅면 남산리(강진면 부흥리) 폐 금광에 피신해 있던 주민 박완 등을 폐 금광 안팎에서 질식사 또는 총살시켰으며, 국군 11사단은 현장 생존자 50여 명을 연행하여 10여 일 후 강진면 회진리에서 총살시켰다.
 
임실읍이 수복되고 1951년 2월 9일 군경에 의한 회문산 토벌작전이 진행되면서 청웅면, 강진면, 덕치면 등에서 남산리의 폐금광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폐 금광은 청웅면 남산리 방향과 강진면 부흥리 방향으로 난 큰 입구 2개를 포함하여 모두 32개의 입구가 있었고, 내부에는 마치 벌집처럼 많은 작은 굴들이 퍼져 있었다. 피난민들은 가족끼리 모여 마을에서 가져온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군경의 토벌작전을 피했다.
 
당시 토벌과정에서 연행한 부역주민 가족들을 청웅초등학교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경찰은 이들을 동원하여 함께 양쪽의 굴 입구에서 3월 14일부터 3일간 마른 고춧대와 솔잎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연기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왔고 이들은 무차별 총격을 받았다.
 
불이 꺼지고 연기가 가라앉자 경찰은 직접 내부에 들어가 질식사한 사람들은 버려두고 숨이 붙어있는 50여 명의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어 함께 작전했던 11사단 군인들에게 인계하였다. 당시 작전에 참가했던 국군은 폐 금광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을 자신들이 주둔하고 있던 강진면 갈담리로 끌고 와 10여 일에 걸쳐 조사한 후, 강진면 회진리 장동마을과 덕치면 회문리 망월마을의 경계부근인 속칭 멧골이라는 곳에서 총살시켰다.
 
이 사건에 대하여 임실경찰서는 1951년 3월 14일 06시부터 15일 22시까지 청웅면 남산리의 적과 교전하여 217명을 사살하고 24명을 생포하였으며 일부 무기를 포획하였다며 상부에 보고하였고, 내무부 치안국은 1952년에 『대한경찰전사』를 편찬하면서 회문산의 빨치산이 청웅면 남산리 폐 금광에 숨어들어 모두 250명의 빨치산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한 청웅지서 경찰들이 3월 14일에 작전을 전개하였는데, 4개의 입구를 제외한 나머지 28개의 입구를 폐쇄시킨 후 먼저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였고, 빨치산이 이에 응하지 않아 오전 9시부터 입구에서 소나무 가지를 태우는 분화작전을 시작하였다. 연기가 들어가자 이를 참지 못한 빨치산들이 출구로 나왔고, 이때 좌우 양쪽 고지에 미리 매복시켜 두었던 경찰들이 집중사격을 가하여 사살당한 시체가 출입구를 폐쇄시킬 정도였다. 당시 경찰은 임실경찰서장 기우대가 지휘하였고, 전과로는 217명을 사살, 79명을 생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경찰은 이렇게 빨치산과의 교전 과정에서 대단한 전과를 올린 훌륭한 적전으로 이 사건을 묘사했다. 하지만, 그 큰 전과에 비해 군경 측에서는 사망자는 물론 단 1명의 부상자도 없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작전에 동원되었던 한 주민은 작전이 끝나고 폐광에 들어갔을 때 보초가 갖고 있던 총 한 자루밖에 보지 못했다라고 증언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청웅지서는 1951년 4월 7일 청웅초등학교에 수용되어있던 석두리 이영자와 백점자를 부역혐의로 청웅면 구고리 청웅초등학교 인근에서 총살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1951년 벌어진 임실 청웅면 폐광사건에 대해 『한국 전쟁사』는 5월 25일 07:00 임실경찰서장 송우대(기우대의 오기)경감이 지휘하는 경찰부대는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주변에 집결한 임실군당, 덕치, 삼계, 청웅, 강진, 면당 등 공비 250명을 확인하고 청웅면에 소재한 금광동굴에 유도하여 기지로서 적이 탈출치 못하도록 28개 통로를 폐쇄하고 4개소에서 장기 유인 공격하여 3월 14일 17:00에 적을 완전 격멸하는 대성과를 올렸다며, 사살 217명 포로 79명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날 살해당한 주민들은 국군 11사단의 토벌작전을 피해 피난하던 주민들이었으며, 위 기록에서 포로로 표기하고 있는 살아남은 주민들은 다시 11사단 국군에 의해 끌려가 모두 총살당했다.
 
국군의 토벌작전과 함께 이들의 지휘를 받던 임실경찰서에 의한 피해도 잇따랐다. 1951년 3월 30일에는 토벌 국군에 잡힌 신덕면 월성리 주민 하명호 등 3명이 임실경찰서로 이송된 후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 희생되었으며, 4월 27일에는 임실경찰서로 연행된 신덕면 금정리 주민 김정목이 총살당했다.
 
각 지서에 의한 주민피해도 있었는데, 1950년 12월 7일 청웅지서는 청웅면 향교리 수풍마을 주민 박완식을 부역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청웅면 구고리 지서 인근 청웅초등학교 뒷산노루목에서 총살하였다. 신덕지서는 1950년 12월부터 1951년 3월 사이 치안대와 함께 신덕면 월성리 주민 김막동 등 11명을 운암면과 신덕면 일대에서 사살하였다.
 
경찰과 치안대는 먼저 홍영표와 하태학을 체포하여 신덕면 수천리 율치재에서 총살하였다. 당시 하태학은 현장에서 사망하였으나 홍영표는 어깨에 총상을 입고 현장을 빠져나와 마을에 돌아왔으나 다시 체포되어 1951년 1월 23일 신덕면 빈채 재의 움막에서 총살시킨 후 움막과 함께 불태워버렸다. 경찰과 치안대는 또 황소봉과 그 동생 황중규, 황현규, 그리고 홍영표의 부친 홍범순, 이수복 들이 월성리 뒷산 옥녀봉에 숨은 것을 발견하여 1950년 12월 31일 모두 운암면과 완주군 구이면 경계부근의 속칭 못지라는 계곡으로 끌고 가 총살하였다. 경찰과 치안대가 옥녀봉에서 사람 1명을 끌고 나오는 것을 목격한 주민 김막동과 김해성도 경찰과 치안대를 피해 몸을 숨기다가 발각되어 마을 안에서 총살되었다.
 
 
<8사단 사건>
1951년 4월 임실지역에서도 11사단의 뒤를 이어 8사단이 토벌작전을 계속했으며, 이에 따라 주민들의 피해도 계속되었다. 국군 8사단 소속 군인들이 임실 운암면 학암리 광석마을에서 김학식을 연행한 후 학산마을로 이동하여 곽동섭, 신창록, 이막동도 함께 잡아 임실읍으로 끌고 갔다. 이들은 다음 날인 1951년 5월 1일 임실읍 오정리 오정마을 뒤편의 속칭 여시골에서 총살당하였다. 이 소식은 곧바로 마을로 전해져 가족들이 현장에 가서 시신을 수습하였다.
 
이상 임실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임실 폐광굴 ‘오소리 작전’
국군 제11사단의 토벌 작전은 한동안 계속됐다. 1951년 2우러 발생한 거창 · 산청 · 함양 민간인 학살 사건을 계기로, 4월 호남지구 토벌 작전이 국군 제8사단(사단장 최영희 준장)에 인계될 때까지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작전 부대가 교체됐다고 해서 민간인 학살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학살과 토벌은 늘 함께 병존했다.
한이 서려 차갑게 굳어버린 곳, 시공간이 멈춰선 채 하나로 뒤틀려버린 갱도, 그 안은 차갑고 어두웠으며 또한 을씨년스러웠다. 이데올로기 사슬에 순장이 되어 땅 속 깊은 곳에 묻힌 그들은 60년 넘는 세월 동안 새카맣게 타버린 절규를 삭히었다.
임실군 청웅면. 서쪽으로 순창 회문산이 있고, 동남쪽에 지리산이 위치해 있다. 북쪽으로는 전주와 곧장 연결된다. 호남과 영남 각 도당은 물론, 이현상이 이끈 남부군 총사령부가 자리해 도당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회문산 망월봉의 임실군 유격대(전북도당 산하 독립 중대)는 수시로 게릴라전을 펴며 군경과 대치했다(관련기사 : [전라북도 순창 - ②] “성냥 대가리 총탄, 빨치산의 처절한 항전”)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청웅면은 수많은 이가 좌익으로 몰려 피를 흘려야만 했다.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더 깊은 산으로 숨어들었고, 이것이 또 빌미가 되어 더 큰 학살을 불러왔다. 700여 명의 원혼이 뒤섞인 임실 청웅면 폐광굴은 그 대표적인 장소다.
일제강점기 금광이었던 ‘부흥광산’은 청웅면(남산리)과 강진면(부흥리)에 걸쳐 있는 꽤 큰 규모의 금광이다. 모두 32개 입구가 있고, 금을 캐기 위한 수평 및 수직 갱도가 어지럽게 얽혀 있다. 또 내부가 원체 넓어 한 번 들어가면 입구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임실에서 만난 전상하 씨(당시 20세)는 할아버지를 찾아 동굴 안에서 10시간 넘게 헤맸다고 했다. 그만큼 동굴 안이 넓고 복잡하다는 얘기다.
 
“1950년 11월 큰집 식구들이 폐금 광에 있다고 해서 처음 들어가 봤다. 모두 세 번 들어갔는데, 처음 갔을 때 세 명이 담을 쳐놓고 생활하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람을 못 찾아서 10시간 이상을 헤맸다. 하도 사람이 안 보여서 귀신에 홀렸나 싶어 다리를 꼬집으며 안에 헤집었다. 나와서 보니 허벅지가 시퍼렇게 멍들 정도였다. (…) 동굴 안은 대도시처럼 크고 넓다. 갱도가 위로 뚫린 데, 아래로 뚫린 데, 또 옆으로 뚫린 데. 금맥 찾으려고 땅을 팠다가 없으면 다른 데 파고 그랬던 게 그대로 남아 있다. 산이 굴 위에 붕 떠 있을 정도로 많은 굴이 파헤쳐져 있다. 안에는 물이 있어서 밥도 해먹고 취사도 하고 그랬다. 또 통풍이 잘돼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전상하씨 증언 중에서)
 
폐광 굴은 빨치산의 집결 장소로도 활용됐다. 회문산에서 후퇴한 전북도당 사령부는 폐광굴을 거쳐 지리산 뱀사골로 들어갔다. 이런 이유로 회문산 대토벌이 전개된 1951년 3월, 폐광굴 토벌 작전도 함께 이뤄졌다. 1951년 3월 14일, ‘폐광굴 분화 작전’이 시작됐다. 일명 ‘오소리 작전’. 제11사단 13연대 2대대가 진두지휘했다. 당시 13연대장은 최석용 대령, 2대대장은 양춘근 소령이었다. 실제 작전은 7중대가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임실경찰서장 기우대, 청웅지서 주임 임학종, 청웅면 치안대장 한병우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탈출을 막기 위해 32개 출구 가운데 28개를 틀어막았다. 나머지는 연기가 잘 빠지도록 입구를 열어뒀다. 적전 첫날 이를 방해하는 빨치산 공격이 있었지만 신경 쓸 만한 화력은 못되었다. 수류탄 등으로 응전하니 금세 잠잠해졌다.
고춧대와 솔잎 등을 긁어모은 뒤 불을 지폈다. 4개 입구가 서로 연결돼 있어 연기는 순식간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젖먹이 아이가 가장 먼저 죽고, 어린아이들이 다음으로 죽어갔다. 이어 폐가 좋지 않은 노인들이 숨을 컥컥거리며 쓰러졌다. 매캐한 연기에 몇몇이 반대편으로 나왔지만 이들을 기다린 것은 군경의 집중 사격이었다. 앞서 나온 이들이 총탄에 쓰러지고 뒤이어 뛰쳐나온 이들이 또 다시 총탄에 엎어진 채 그대로 포개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동굴이 막힐 정도가 되면 시체를 치우고 또 다시 응전 사격을 가했다. 질식해 죽든지, 총에 맞아 죽든지 둘 중 하나였다.
 
 
끌려온 가족이 불을 지피다
3월 14일 시작된 분화 작전은 16일까지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군인들은 동굴 안에 숨어든 이들의 가족에게 직접 불을 지피도록 지시했다. 주민들은 시커먼 연기가 동굴 천장을 타고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어떤 이는 발을 동동 구르고, 또 어떤 이는 오열했다.
앞서 군인들은 입산자와 부역 혐의자 가족들이 임시 수용된 청웅초등학교(청웅면 구고리)를 찾았다. 그리고는 이들을 폐광굴 입구로 모두 끌고 갔다. 그런 다음 동굴 안에 있을지 모르는 가족을 불러내라고 윽박질렀다. 총부리가 등 뒤에서 주민들을 겨누었다.
 
“○ ○ ○야, 언능 나와 ….”
“자수하면 살려 준단다 ….”
 
마을 주민들은 울먹이며 가족의 이름을 불러댔다.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군인들을 믿지 못한 데다 동굴이 원체 깊어 그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탓이었다. 총부리를 겨눈 군인들은 주민들에게 솔잎을 태우라고 지시했다. 우익 청년단도 함께 이를 거들었다. 안에 가족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불을 지폈다. 그저 내 가족이 저 안에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불은 두 군데 입구에서 피워졌다. 강진면 부흥리와 청웅면 남산리가 그곳이다. 폐금광은 위치에 따라 명칭을 달리한다. 국립임실호국원이 있는 부흥리 쪽은 부흥광산, 반대편 남산리 쪽은 남산광산으로 불린다. 당시 남산광산에서 직접 불을 피운 한영철씨(가명)는 “청웅면 사람들을 다 나오라고 해서 고춧대 걷어다가 불을 피웠다”고 증언했다. 이어 “고춧대가 징허니 맵다. 잔솔가지랑 같이 땠는데, 어찌나 맵던지”라며 고개를 휘저었다. 그는 “굴 밖으로 나온 사람도 있었는데, 군인들이 모조리 총살시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차피 죽을 것 칼로 가슴을 박아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한국청년단 대원이었던 한 씨는 “군경 지시로 좌익 청년들을 색출하고, 빨치산이 끌려오면 심문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젊은 사람 대다수가 (우익 청년단에) 가입했다. 이념을 알고 그런 것은 아니고, 그저 살기 위해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친척이 동굴 안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소리 못하고 시키는 대로 불을 지폈다. 우익 청년단임에도 불구하고 동굴에 친인척이 있다고 하면 군인에게 곧바로 총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뭔 힘이 있가니, 시키니깐 그냥 한 거제. 어디 친척이라고 얘기할 수가 있어야지, 그래 봤자 쫄짜인데 ….”
 
고개를 떨군 그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유일한 생존자 … “그저 꿈만 같다”
불 피운 연기가 모두 빠져나간 뒤 횃불을 든 경찰이 폐광굴 안으로 들어갔다. 한 씨를 비롯한 한국청년단 대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매캐한 비린내동굴 안에 진동했다. 아직 남아 있는 연기에 속이 다 뒤틀렸다. 조금 더 들어가니 널브러진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일그러진 표정 속에 마지막까지 몸부림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입을 틀어막고 죽은 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죽은 이, 땅바닥을 긁고 손톱이 모두 상한 어떤 이, 아이를 보듬은 채 엎드려 죽은 어떤 이…. 갱도 곳곳에 질식사한 사람이 즐비했다.
정확한 숫자를 셀 순 없지만 정말 많은 이가 폐광굴 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주민들은 “700명 정도 죽었다”고 말했다.
열네 살 박순남 씨도 당시 폐광굴에 있었다. 소개 작전으로 집이 모두 불탄 상태에서 별수 없이 굴속에 들어갔다. 더욱이 부역자 가족들은 모두 다 죽인다고 해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의 막내 오빠는 입산한 뒤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큰오빠는 결혼해 분가했고, 어머니와 작은오빠 그리고 만삭의 올케언니와 함께 폐광 굴에 들어갔다. 작은오빠와 새언니는 아직 혼인 신고를 하기 전이었다. 그리고 한 달여 후 분화 작전을 만났다. 사람들 소리가 여기저기 들리면서 정신이 든 그는 가족부터 찾았다. 오빠와 올케언니는 이미 주검이 됐고, 어머니는 흰 거품을 문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켜내고 있었다. 어머니를 일으키려는 순간 경찰이 목덜미를 잡아챘다. 어머니와 함께 나오려 했지만 경찰은 완강히 그를 끄집어냈다. 어머니는 그렇게 동굴 속에 버려졌다. 이날 부흥광산(임실호국원 쪽)에서 살아나온 이는 박순남을 비롯해 모두 50명. 이들은 전선에 묶여 곧바로 강진지서로 붙들러 갔다.
 
지서에 인계된 지 얼마 안 돼 한 군인이 “니가 왜 여기 있냐”며 박순남을 흔들었다. 전쟁 전 전주의 한 약국집 애기 담사리(보모)로 있을 때 거기 큰집 오빠였다. 그는 위관급 장교로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풀려난 박순남 씨는 전주에 있는 약국집으로 피신했다. 전주로 가는 차 안에서 “너는 참 운이 좋았다”고 그가 말했다. 다음 날 유치장에 감금된 이들은 모두 군에 신병이 인도된 뒤 강진면 회진리 장동마을과 덕치면 회문리 망월마을 경계인 멧골에서 집단 처형됐다. 군인들은 마을 구장(이장)에게 뒤처리를 지시했다. 하지만 원체 많은 이가 죽어 있었다. 결국 매장할 엄두를 못낸 주민들은 보리타작하고 남은 보릿대로 대충 시신을 덮어 처리했다.
현재 이곳은 축사가 들어서 있다. 축사 주인 정진열 씨는 “1980년대 말 처음 축사를 지을 때 유골이 엄청 나와 놀랐다”고 말했다. 동네 사람들이 ‘무서운 계곡’이라며 꺼려했지만 그냥 그런 줄만 알았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골도 많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2015년 10월 임실에서 만난 박순남 씨는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며 “그때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만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와 오빠 내외는 현재 선산에 모셔진 상태”라며 “그때 생각하면 진짜 꿈만 같다”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수백의 원혼이 뒤섞인 임실 폐광굴. 그 아래 호국영령을 위한 국립임실호국원이 자리하고 있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희생된 그들, 그러나 어떤 이는 그 부름에 이유 없이 희생되기도 했다. 국립임실호국원에는 ‘전쟁 영웅’과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또 다른 죽음’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현장 전국투어에서 임실 방문기록
 
2018년 10월 2일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폐 광산 앞 도로변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혼들을 위해 제를 올리고 원혼비(冤魂碑)를 세우면서 유족들의 증언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부흥리 폐 광산 학살 증언록
 
증언자1 전상하(89세)
 
1951년 3월에 빨치산 활동 (2년 3개월)하였다. 아버지 숙부2명, 동생2명 한꺼번에 5명의 가족을 잃었다. 빨치산 하면서 가족들이 없어져서 광산에 3번 들어갔다. 학살 희생자280명이 신고 되었고 나머지는 미신고자다. 약 570명이 학살당했다. 350명이 미신고자다. 가족들이 빨치산들을 피해 광산 굴에서 생활했다.
 
여러분 내가 전북도당 사령부 정찰대 정보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빨치산 안 보셨죠, 내가 빨치산입니다. 정찰정보원을 해서 광산 굴속을 잘 압니다. 사령부 정찰대 정보원으로 임실, 순창을 담당했습니다. 광산 속은 안내자 없이는 절대 못 들어갑니다. 들어가더라도 길이 여러 개라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합니다. 빨치산들이 굴 안에서 주민들을 털어 먹었다고 하는데 절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굴속에 당숙가족과 아는 사람 가족들이 죽어 있어서 시체를 끌어냈습니다. 그때 소녀 한 분이 살아남았는데 (그때 당시 15세)그 분의 가족 5명이 죽고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경찰국에 인계가 되었습니다. 굴속에 있는 이들이 무장한 빨치산들이다 라며 몰아넣고 죽였다. 큰집 사촌오빠가 대위라고 하니까 죽이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참으로 비통합니다. 위령탑을 못 세운 것이 한이 됩니다.
 
# 고춧대를 넣고 불을 땠다는데요?
그것은 헛소리입니다. 군인들이 불을 땠다고 하는데 헛소리이고 대원들이 하는 짓 이었습니다. 지역에서 조직된 대원들은 치안대 역할을 했는데 그들이 그런 겁니다. 살기위해서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대원이 된 자들이 많았습니다. 정식 경찰들은 여기에 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오신 이영희씨 아버지 안내를 받고 굴속을 들어갔습니다. 임학종(지서)이란 사람이 교대해서 불을 땠습니다. 나도 굴속에 들어가서 하루 견디어 봤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나와 버렸습니다.
 
군경이 죽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적대세력들이 여론을 퍼뜨린 말입니다. 굴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모아서 강진면 백골로 데리고 가서 총살을 했습니다. 그때 빨치산들은 사령부에 있어서 광산 굴에는 없었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청웅에 빨치산이 7명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장소를 알제”......
 
50년 11월에 굴속으로 들어가서 피신을 했습니다. 마을 주민들 중 광산에서 일을 한 사람들이 있어서 안내를 받으며 들어갔습니다.
굴속에 물이 많았습니다. 2달 먹을 것만 있으면 해방이 된다고 하며 식량을 틈틈이 조달하여 생활했습니다. 안에서 불을 때고 밥을 해 먹었습니다. 2달만 있으면 해방된다고 해서 견뎠습니다. 공기가 잘 통해서 불을 때도 연기가 차지 않았습니다. 고춧대만 때서 죽은 게 아닙니다. 다른 이유로 죽은 것 같습니다.
 
2월에 어떻게 고춧대를 가져 왔겠습니까.? 그때는 고추농사가 많지 않았고 2월에 고춧대 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솔가지와 고춧대를 넣고 불을 땠다. 50명이 교대로 불을 땠다.
대원들은 유족들을 몰고 오느라고 고춧대를 가져 올 시간이 없었습니다. 절대 군인들은 없었습니다. 굴 문이 많았습니다.
 
군인들이 들어가서 확인학살을 했다는데요.?
군인들은 없었고 군대를 곧 갈 사람들 치안대에서 일을 한 사람들이 대원을 했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들 군대에 갔다 왔습니다.
지금 책자에 군인경찰들이 그랬다는데 절대 허위입니다.
나도 1952년 5월 2일에 군경에게 잡혀서 교도소에서 10개월, 형무소에서 1개월 살았습니다.
나는 6.25 참전 용사 유공자입니다. 한 달에 38만원씩 연금을 받고 있습니다.
 
 
증언자2 서창록
 
아버지 친구를 통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굴이 여러 곳으로 뚫려 있었다. 굴 문마다 총을 대고 연기에 질식해 나오는 사람들을 무조건 쏘았다. 아버지와 같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죽고 친구 분만 살았다. 그때 내 나이 4살이어서 잘 모른다.
 
며칠 후 아버지를 찾으러 친구 분이 들어갔었는데 찾지 못했다. 굴 앞을 돌로 쌓아 막았는데 친구 분은 그곳에서 들어오는 바람으로 숨을 쉬며 살았다. 밤에 틈을 타서 돌을 빼내고 기어 나와 살았다. 아버지 신발을 찾는데 며칠이 걸렸다.
 
이것은 군경합동으로 저지른 것이다. 어떻게 민간인들이 할 수 있었겠습니까. 주민들은 말 안 들으면 죽이니까. 끌려 다니면서 한 짓이다. 연기에 질식되어 죽어 얼굴이 부어서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친구 분이 아니었으면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다. 얼굴이 엉망이어서 확인이 어려웠다. 낮에는 군인이, 밤에는 빨치산 세상이었다. 숨은 곳이 광산이어서 주민들의 피신처였다. 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빨치산이라 하며 군인들이 죽였다.
 
고춧대는 몇 십리라도 가서 가져오라면 명령이니까 가져왔다. 무조건 튀어 나오면 쏘아 죽였다. 시신을 찾으러 들어갔다가 굴이 어두워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나오곤 했다. 굴 안을 정리하기 위해 전기를 설치해서 유족들이 시신을 찾아가고 못 찾아간 수많은 시신들은 모두 모아 저쪽 저수지 속에 밀어 넣었다.
 
 
증언자 3 김성자
 
나는 그때 6살이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줄 곶감을 가지러 가다가 산 고개에서 잡혔다.
얼굴에 수건을 두르고 있어서 못 찾았다. 한복을 입었는데 명주로 허리띠를 해서 찼는데 그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시체를 찾아 거적데기에 돌돌 말아 고개 너머에 묻었다. 아버지는 27세, 어머니는 28세였다. 6살, 4살, 2살짜리 자식들을 놓고 돌아가셨다. 치가 떨립니다. 너무너무 한스러워요. 유족들은 대개 1,2,3,4,5세 때 부모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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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