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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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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육가(六家)'는 여섯 사람이고, '잡영(雜詠)'은 혹은 절구(絶句)고, 혹은 고시(古詩)며, 혹은 율의 장단으로 그 형식이 하나가 아님을 이른다. 남응침 군(君)은 곧 나의 어릴 적 옛날 교우이다. 중년에는 오랫동안 소원하였다가 내가 줄곧 내의원 제조로 일할 때에 미쳐서는 서로 자주 만났는데, 일찍이 그처럼 뜻이 잘 통하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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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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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Tip. 독문학과 교수진이 가장 질문과 문제를 내는데 선호하는 시기는 질풍노도의 시기, 낭만주의 시기를 뽑을 수 있다. 특히 질풍노도의 시기는 괴테의 젊은 시절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대변되는 격변기이며,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을 기점으로 독일문학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신고전주의 시대로 넘어간다. 낭만주의는 괴테, 쉴러 등의 대문호들을 낳은 시기이자, 괴테의 경우에는 이탈리아 여행으로부터의 과거 르네상스의 인문주의가 문학에 연동되면서 풍성한 대작의 시기로 넘어감을 보여준다. (Ex: 파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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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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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청춘! 발음하는 순간 푸른 물이 톡 터지는 듯한 단어. 풋풋한 싱그러움이 느껴진다. 신록을 연상시키는 젊은 육체, 꿈을 이루기 위한 땀방울,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정신, 안이함을 거부하는 모험심, 패기와 열정, 사랑과 낭만을 꿈꾸며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가슴……. 예로부터 많은 작가들이 현란한 수식어를 동원하여 청춘의 아름다움을 예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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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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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국 주나라 건국공신 강태공(姜太公)의 후예 후(候)가 제나라 노현(盧縣)에 살아 노씨가 된 후 곤주자사 노진순(袞州刺史 盧震順)의 아들 노수(盧穗)가 범양(范陽 )에 살다가 신라 효성왕 14년(755)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아들 9형제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정착 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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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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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군내면 백학산 준령이 서남맥으로 덕진당을 거쳐 임진강변을 끼고 내려와 삼선산(三仙山) 우뚝솟은 봉우리에서 양편으로 펼쳐진 지맥 내령끝머리 쌍태봉(형제산)이 있는 아래 한수동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는 옷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찬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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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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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육가(六家)'는 여섯 사람이고, '잡영(雜詠)'은 혹은 절구(絶句)고, 혹은 고시(古詩)며, 혹은 율의 장단으로 그 형식이 하나가 아님을 이른다. 남응침 군(君)은 곧 나의 어릴 적 옛날 교우이다. 중년에는 오랫동안 소원하였다가 내가 줄곧 내의원 제조로 일할 때에 미쳐서는 서로 자주 만났는데, 일찍이 그처럼 뜻이 잘 통하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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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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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조선시대에 아이를 갖지 못하는 한 아낙이 아이 갖기를 소원한 나머지 지금은 흔적도 없는 교하면 장명산 중턱에 위치한 약수터에 올라가서 약수물에 밥을 지어 먹고 구절초 대린 물을 먹으면서 지성을 드린 후에 아이를 갖게 되자 그 소문이 한양 땅에 퍼지게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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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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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염씨(廉氏)는 우리 파주시와 연관이 깊은 성씨중의 하나이다. 해동역사 등 기록을 보면, 염씨성을 최초로 가진 사람은 낙랑군때의 '염사치'인데, 나라에 공을 세움으로써 광무제가 염씨 성과, 밭과 집 및 관모를 하사했고, 염사읍군에 봉했으며, 거주지는 낙랑군 함자현(지금의 파주 파평) 이라고 되어있어 이 때부터 파주에 염씨가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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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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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려 말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전의 일이다. 지금의 판문점부근 한 마을에 어여쁜 딸 하나를 둔 촌장이 살고 있었다. 촌장의 딸 옥화는 그 미모가 어찌나 고왔던지 인근 총각들이 보기만 하면 그만 첫눈에 홀딱 반하여 짝사랑에 가슴을 태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옥화에게 참으로 딱한 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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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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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감악산 동북맥 준령으로 삼면이 둘러싸인 산골짜기 마을에 옛날 이씨들이 정착 수십 호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중 수백석을 하는 부자가 있었다. 그는 인심이 후둑하여 늘 손객이 끊일 날이 없자 손님 치닥거리에 너무나 지쳐 어떻게 하면 손님이 안오게 하는 방법이 없나 하고 늘 고심하던 중 도승이 시주를 청하자 그의 딱한 사정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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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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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명산 동남백내력 교하면 교하리 산 1번지 끝머리는 벌판 가운데로 돌출되어 있 었는데 이 지역은 금촌 쇠곳나루(金串津)에서 배를 건너 벌판 가운데 길을 지나 이산 달걀뿌리에서 산기슭을 휘돌아 길 옆 행상독아를 지나 4km거리 옛날 교하군 청이 있는 교하리를 왕래하게 되는 큰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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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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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평 윤씨 시조 윤신달의 13세손 윤승례 선생은 영평군 윤척(鈴平君 尹陟)의 자(尹承休, 承度, 承順, 承慶,承禮) 오형제 중 끝분으로서 장단군 장목동(현장단군 진동면 작목리)에서 사시면서 고려 공민왕 16년(1367)에 신돈(辛旽)의 살해를 모의하다 누설되어 유배되었다가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주살된 후 풀려나 응양군 상호군(鷹楊軍 上護軍)이 되어 수차에 걸친 왜구(倭寇)들의 침입을 막아 공을 세웠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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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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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삼국 전쟁으로 어수선한 고구려 말 영양왕 시절, 부모가 늙어서 쇠약해지면 산에 토굴을 파서 죽기 전에 생매장을 하고 돌아가신 후 매장하는 일시적인 순장 풍속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늙어 병든 아버지가 있어 산에 굴을 파고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산에 올라가 할아버지를 토굴속에 넣어두고 지게도 버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집으로 내려오는 광경을 손자가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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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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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조선조 양주 백석면 산골짜기 어려운 가정에 태어난 임꺽정은 임계의 자식으로서 자(字)는 맹견(孟堅) 호(號)는 월창(月滄)이며 나주 임씨(羅州 林氏)이다.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학문에 뛰어나 천문, 지리, 산수, 율여, 복술(天文, 地理, 算數, 律呂, 卜術)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으며 무술(武術)에도 신출귀몰한 용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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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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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선생은 서기 1539년 9월(중종34) 월롱면 영태리 에서 출생 평안 병마절도사 수인(守仁)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 박순 (朴淳)의 문인으로서 문장과 학문에 능통하여 율곡 이이(栗谷 李珥), 구봉 송익필(龜 峰 宋翼弼)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으며 또한 당시(唐詩)에 뛰어난 백광훈 (白光勳), 이 달(李達)과 함께 3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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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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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광탄면 영장리 산 17번지에 소재한 보광사는 파주 관내에서 제일 큰 사찰로서 서기 894년(신라 진성여왕 8년) 왕명으로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것이며 당시 전국 6대 사찰 중 하나였다. 그 후 서기 1215년(고려 고종 2년)에 원진국사(圓眞國 師)가 중창하고 1388년(고려 우왕 14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3창하여 내려 오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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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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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적성면 두지리는 원래 「斗只」가 아닌 「頭者」로서 용마의 머리와 장등이 같다는 앞산이 쌀이 가득찬 견 뒤 모양을 한 견대형국(肩大刑局)으로 이루어져 붙혀진 이름이며 이곳 주민들은 재산을 모으면 타지로 떠나야 그 재산을 유지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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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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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조리면 봉일천에서 서북쪽으로 샛길을 따라 1km정도 걸어 들어가면 20여가구가 모여 사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도깨비 촌으로 탑삭골이라고 불리어왔다. 옛날 이 탑삭골 능선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려던 젊은이가 있었다. 공릉 장터에서 산 물건을 잔뜩 지게에 짊어지고 걷다보니 귀가시간이 늦어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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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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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탄현면 법흥 4리 벌두매 산골짜기 호장산하 오솔길 옆에 큰 바위가 있다. 옛날 피난을 가던 부부가 힘에 겨운 피난 보따리를 이고 지고 가다가 이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따라오던 아이가 울며 물을 달라고 보채니 여름날씨가 너무나 짜증이 난 그들 부부가 아이를 달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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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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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삼국 전쟁으로 어수선한 고구려 말 영양왕 시절, 부모가 늙어서 쇠약해지면 산에 토굴을 파서 죽기 전에 생매장을 하고 돌아가신 후 매장하는 일시적인 순장 풍속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늙어 병든 아버지가 있어 산에 굴을 파고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산에 올라가 할아버지를 토굴속에 넣어두고 지게도 버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집으로 내려오는 광경을 손자가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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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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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감악산 동북맥 준령으로 삼면이 둘러싸인 산골짜기 마을에 옛날 이씨들이 정착 수십 호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중 수백석을 하는 부자가 있었다. 그는 인심이 후둑하여 늘 손객이 끊일 날이 없자 손님 치닥거리에 너무나 지쳐 어떻게 하면 손님이 안오게 하는 방법이 없나 하고 늘 고심하던 중 도승이 시주를 청하자 그의 딱한 사정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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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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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선생은 서기 1539년 9월(중종34) 월롱면 영태리 에서 출생 평안 병마절도사 수인(守仁)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 박순 (朴淳)의 문인으로서 문장과 학문에 능통하여 율곡 이이(栗谷 李珥), 구봉 송익필(龜 峰 宋翼弼)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으며 또한 당시(唐詩)에 뛰어난 백광훈 (白光勳), 이 달(李達)과 함께 3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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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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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우리 고장 탄현면 금산리 한록산(漢麓山) 금무봉은 월롱산 서맥으로 씩씩하게 내려와 우뚝솟은 봉우리로 아름다운 옥녀가 춤을 추는 현용이라 하여 불려진 명산이다. 주위는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 삼도품을 거쳐 황해바다로 유입되고 조수물이 오르내리는 수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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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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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 산은 옛날 경기 오악(松岳, 紺岳, 雲岳, 北岳, 冠岳)중에 하나로서 감악사(紺嶽寺), 신암사(神岩寺), 운계사(雲溪寺)등이 있었고 정상에 산신과 설인귀(薛仁貴)를 모시고 제사지냈다는 감악사(紺嶽祀)가 있었다 한다. 고려시인 임춘(林春)은 감악산의 형상을 잘 표현한 시를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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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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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적성도 작은 고을이니 예전 명칭은 내소(來蘇)이고 고려적에 여러번 개성·양주의 속읍으로 되었다가 뒤에 다시 현으로 되었는데 관아는 본디 산성 남쪽에 있었다. 토지가 척박하고 토산물이 보잘 것 없어 세금과 부역을 능히 바치지 못하니 수령된 자가 모두 걱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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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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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오금리(吾今里)는 옛날 질오목(叱吾目)과 오고미(烏告美) 부락으로 되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면, 리, 동)변경에 따라 질오목에 오(吾)자와 오금미의 금(今)자를 따서 오금리로 부르게 되었다. 이는 조선조 세조대왕 당시 우참찬(右參贊)이며 밀산군(密山君)으로 계시였던 박중순(朴仲孫)이 세조 12년(1466) 55세로 돌아가시니 묘자리를 선택하고저 명지사가 명당자리를 물색하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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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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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탄현면 성동리 요풍동에 전주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그들은 나무를 하다가 쉬는 틈을 타서 돌을 산 밑으로 굴리면서 장난을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씨가 굴린 돌이 밑으로 굴러가 산 중턱에 있던 호랑이 굴을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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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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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적성면 두지리는 원래 「斗只」가 아닌 「頭者」로서 용마의 머리와 장등이 같다는 앞산이 쌀이 가득찬 견 뒤 모양을 한 견대형국(肩大刑局)으로 이루어져 붙혀진 이름이며 이곳 주민들은 재산을 모으면 타지로 떠나야 그 재산을 유지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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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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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목종은 고려 제7대왕(경종의 장자)으로 성종 17년(997)에 왕위에 올라 문식 양반 및 군인의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고 민간문역으로 주철(鑄鐵)사용을 완화시켰으며 도성에 육위군영을 세우는 한편 12절도를 4도호와 동서북 방어 진사, 현령, 진장 등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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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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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 지역 문산포는 삼국시대로부터 문산읍 선유리 동초등학교 자리에 술이홀현, 서원군 원평군 원평도호부 청사가 있을 당시 사목리 포구를 통하여 장단을 왕래하였으나 임진강의 강 흐름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문산읍 하동에 포구를 설치 수운(水運)의 중심지로서 풍덕, 김포, 강하, 고랑포, 연천, 송도와 한양등지를 황포 돛대로 왕래하면서 상선배와 농산물의 물물교환의 집결지로 대시장이 형성되어 호황을 이루고 이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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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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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릉(長陵) 이장으로 박중손(朴仲孫)의 묘소가 헐리고 다른 묘자리를 찾게 되었는데 지관이 묘자리를 찾으러 이 곳 질오목(질우목)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까마귀가 까옥까옥 하고 울어댔다. 지관이 그 까마귀 소리가 이상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묘자리를 지나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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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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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령산하(鶴翎山下) 금촌리는 한일합방 후 현 파주시청이 소재하고 있는 골짜기로 옛날 교하현청이 아골(衙谷)에 있을 당시 말의 훈련장으로 사용하였던 지역인 마무리(馬武里)에 10여가구가 살고 있었던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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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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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 산은 옛날 경기 오악(松岳, 紺岳, 雲岳, 北岳, 冠岳)중에 하나로서 감악사(紺嶽寺), 신암사(神岩寺), 운계사(雲溪寺)등이 있었고 정상에 산신과 설인귀(薛仁貴)를 모시고 제사지냈다는 감악사(紺嶽祀)가 있었다 한다. 고려시인 임춘(林春)은 감악산의 형상을 잘 표현한 시를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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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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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유씨부인(柳氏夫人)께서는 강계부사 유당(柳堂)의 6남매중 첫째딸로 관내 파평면 두포리(장계)에서 유양유씨 가문에서 태어나 동생 유몽인(柳夢寅)이 글을 배울 때 어깨너머로 경사(經史)와 시문을 배웠으며 총명하고 영특하여 경사에 통달하였고 시문(詩文)에 능한 규수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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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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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오금리(吾今里)는 옛날 질오목(叱吾目)과 오고미(烏告美) 부락으로 되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면, 리, 동)변경에 따라 질오목에 오(吾)자와 오금미의 금(今)자를 따서 오금리로 부르게 되었다. 이는 조선조 세조대왕 당시 우참찬(右參贊)이며 밀산군(密山君)으로 계시였던 박중순(朴仲孫)이 세조 12년(1466) 55세로 돌아가시니 묘자리를 선택하고저 명지사가 명당자리를 물색하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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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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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우리나라는 조선조 말엽 1900년부터 일제를 거쳐 8·15해방과 6·25동란을 거치는 1970년까지 70여년 동안 전쟁으로 인한 난시와 매년 홍수와 흉년이 거듭되면서 큰 혼란속에 보리밥과 조밥, 호밀밥, 시레기죽과 피삼죽, 수수풀떼기, 개떡, 감자와 옥수수 등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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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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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눌노천이 흐르는 하류 파평면 금파리 지역 임진강변 언덕에 궁터가 있었으니 이는 옛날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 고을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현 금파리와 장파리 구역 십여리나 되는 편편한 장마루 언덕이 이어지는 지역으로서 고을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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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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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적성면 장좌리 장자못 마을에 옛날 송씨(宋氏)라는 큰 부자가 살았는데 인색하고 포악하기 그지없어 동리사람은 물론 인근 주민들에게도 인심을 잃고 살 뿐 아니라 중이나 걸인에게도 괄세가 심하였으며 시주나 동정을 모르는 몰염치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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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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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조선조 중종때 판중추부사를 지낸 조광원(曺光遠)선생은 월롱면 도내리에 묘가 있는 분으로써 예조참의로 있을 당시 1540년 천추사로 중국 명나라 연경에 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웅주고을에서 유숙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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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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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나리오 용어 / 카메라에 관한 용어 / 사운드에 관한 용어 / 집필에 관한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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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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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려말 유관(柳寬)은 공민왕 20년(1371)에 문과급제하여 사헌중승(司憲中丞)을 역임하면서 조선이 개국하자 이성계를 도와 개국 원종 공신이 된 후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 1409년 예문관 대제학으로 지춘추 관사를 겸직하면서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찬하였으며 세종이 즉위하자 좌빈객을 역임 우의정에 승진 고려사(高麗史)를 수고하는 등 학문에 뛰어나고 시문에 능한 대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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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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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조선시대에 아이를 갖지 못하는 한 아낙이 아이 갖기를 소원한 나머지 지금은 흔적도 없는 교하면 장명산 중턱에 위치한 약수터에 올라가서 약수물에 밥을 지어 먹고 구절초 대린 물을 먹으면서 지성을 드린 후에 아이를 갖게 되자 그 소문이 한양 땅에 퍼지게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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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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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려말 조선조에 조연(趙涓)이란 충신이 있었다. 환조(桓祖)(조선 태조의 부)의 장녀 정화공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387년(고려우왕 1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개국 후 왕을 호위하면서 1400년 제 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조선 태종)을 돕는 등의 공을 세운후 좌명공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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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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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명산 동남백내력 교하면 교하리 산 1번지 끝머리는 벌판 가운데로 돌출되어 있 었는데 이 지역은 금촌 쇠곳나루(金串津)에서 배를 건너 벌판 가운데 길을 지나 이산 달걀뿌리에서 산기슭을 휘돌아 길 옆 행상독아를 지나 4km거리 옛날 교하군 청이 있는 교하리를 왕래하게 되는 큰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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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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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삼한강역고(三韓彊域考)에 의하면 파평면 눌노리 이 지역은 삼한시대(辰韓·馬韓·弁韓)에 마한의 영역권에 있었으며 당시 52지국중 고리국(古離國)의 고궁터로써 궁궐이 있던 곳은 궁갓, 감옥이 있던 곳은 옥담밭 등으로 지금까지 불려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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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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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우리 고장 탄현면 금산리 한록산(漢麓山) 금무봉은 월롱산 서맥으로 씩씩하게 내려와 우뚝솟은 봉우리로 아름다운 옥녀가 춤을 추는 현용이라 하여 불려진 명산이다. 주위는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 삼도품을 거쳐 황해바다로 유입되고 조수물이 오르내리는 수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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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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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광탄면 마장리 박달산 동맥산록에 귀암절벽이 있는데 이곳에는 마당같은 큰 바위가 있으며 그 아래 고령산에서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 흘러 물 속이 들여다 보이는 서너길 가량에 웅덩이 연못이 있었다. 이러한 경관이 아름다운 이 곳 마당에서 성 종대왕의 5남 완원군의 9대손 되는 이건섭(李建燮)선생은 벼슬을 마다하고 공부 만을 전념하는 동안 이 연못에서 목욕을 자주하면서 책과 더불어 벗을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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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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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릉(長陵) 이장으로 박중손(朴仲孫)의 묘소가 헐리고 다른 묘자리를 찾게 되었는데 지관이 묘자리를 찾으러 이 곳 질오목(질우목)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까마귀가 까옥까옥 하고 울어댔다. 지관이 그 까마귀 소리가 이상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묘자리를 지나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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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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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부터 임진강변에서 번식하고 있는 참게는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산품으로 크고 맛이 있어서 전국적으로 파주게라면 유명하였다. 특히 옥돌내(지금의 월롱면 위전리 냇가)는 임금님께 진상하는 게의 본고장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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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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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려말 조선조에 조연(趙涓)이란 충신이 있었다. 환조(桓祖)(조선 태조의 부)의 장녀 정화공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387년(고려우왕 1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개국 후 왕을 호위하면서 1400년 제 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조선 태종)을 돕는 등의 공을 세운후 좌명공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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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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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평 윤씨 시조 윤신달의 13세손 윤승례 선생은 영평군 윤척(鈴平君 尹陟)의 자(尹承休, 承度, 承順, 承慶,承禮) 오형제 중 끝분으로서 장단군 장목동(현장단군 진동면 작목리)에서 사시면서 고려 공민왕 16년(1367)에 신돈(辛旽)의 살해를 모의하다 누설되어 유배되었다가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주살된 후 풀려나 응양군 상호군(鷹楊軍 上護軍)이 되어 수차에 걸친 왜구(倭寇)들의 침입을 막아 공을 세웠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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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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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국요제(堯帝)의 후손 한고조 유방(劉邦)의 41세손 송나라 병부상서 유전이 고려 문종 36년 경북 영일군에 정착 귀화하였으나 그의 8세손 국추(國樞)가 도첨의평리 (都僉議評理)에 이르러 공을 세워 백천군(白川君)에 추봉 백천으로 개관하였고 그의 후손 유극량의 아버지는 연안에서 살게 되어 연안인(延安人)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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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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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려현종 1년 10월 이부상서 겸 참지정사 강조(吏部尙書 兼 參知政事 康兆)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하여 30만대군을 이끌고 통진 선천에 나아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거란의 임금 성종(聖宗)은 끝내 야욕을 품고 11월16일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興化鎭) 의주를 함락시킨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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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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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선조 대왕시절에 영의정 최흥원(崔興源)은 중종 24년 1월 5일 한성부 목멱산하 훈도방(木覓山下薰陶坊)현 정동, 필동부근에서 영천부원군 최수진(寧川府院君 崔秀珍)의 아들로 태어나 기풍이 특이하여 10여세 당시 문사가 대성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이준경(李浚慶)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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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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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조선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은 대륙에 침략을 성취하기 위하여 25만 대군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왜군들은 진격을 거듭 대전을 거쳐 음력 5월 2일 순식간에 한양을 함락시키는 동안 선조대왕은 몽진을 서둘러 4월 29일 깜깜한 절벽 폭우가 쏟아지는 그믐밤 임진강을 건너 의주로 파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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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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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설인귀는(613~682) 용문출신으로 서기 645년(고구려 보장왕 4)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군졸을 응모 안시성 공방전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으로 발탁된 후 655년 영주도독 정명진 좌우위중랑장 소정방과 고구려 적봉진을 침략 658년(보장왕 17) 우령군중랑장으로 승진되어 주장 이세적과 육군을 이끌고 봉천을 함락시켰으며 이어 제성을 공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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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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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황보인(皇甫仁) 정승은 광탄면 두만리 신기동 만장산(滿丈山)의 정기를 타고 태어나 생장한 것으로 유래되고 있다. 이 분은 어려서부터 총명한 재능과 학덕이 풍부 하였으며 효행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려한 기풍으로 김종서와 함께 육진(六鎭)을 개척 영의정으로 단종대왕을 보좌하였다가 수양대군에게 3대에 걸쳐 5 명이 참화를 당한 애국충절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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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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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파평산 서북맥내령 기슭에 있는 깊이 10미터 넓이 백수십보(2,000여평)가 되는 큰 연못에서 서기 893년(신라 진성왕 7) 8월 15일 천둥번개와 아울러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운무가 사면에 자욱한 가운데 연못 위로 갑자기 번쩍거리는 금궤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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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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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우리 나라 조선조에는 여성들의 개가금지법으로 인하여 일부종사를 기본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소녀과부를 비롯 수절한 열녀, 열부가 많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갖은 사연도 많았거니와 관하 자운서원경내에 있는 율곡선생님 내외분의 분묘가 전후면에 있는 것을 보게되어 누구나 의아심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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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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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감찰공(監察公) 이원수(李元秀)는 강직(剛直)하고 고결(高潔)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녹발홍안(綠發紅顔)의 청춘시대에 일찌기 강원도 강릉(江原道 江陵)에 찰방(察防)으로 있을 당시 장가를 들었으니 그 부인은 당시 명사(名士)로 경향에 이름이 쟁쟁하던 진사 신명화( 進士 申命和)의 귀동 따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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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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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법원읍 웅담리 입구 좌우측에 기암절벽으로 병풍처럼 둘러 쌓인 산이 있는데 산어귀 우측에 기암괴석이 솟아있는 산봉우리에 구한말엽 포수가 총을 메고 이산저산 돌아다니다가 이 산에 올라 두루살피니 건너 산봉우리 아래에 있는 산돼지를 발견하고 총을 당기려고 하면 사람으로 둔갑을 하여 앞으로 가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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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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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려 말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전의 일이다. 지금의 판문점부근 한 마을에 어여쁜 딸 하나를 둔 촌장이 살고 있었다. 촌장의 딸 옥화는 그 미모가 어찌나 고왔던지 인근 총각들이 보기만 하면 그만 첫눈에 홀딱 반하여 짝사랑에 가슴을 태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옥화에게 참으로 딱한 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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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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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조는 숙종대왕의 후궁인 숙빈 최씨로 부터 서기 1694(숙종 20)에 탄생하였으며 1719(숙종 44)년에 숙빈 최씨가 49세로 서거했다. 영조대왕은 어려서부터 무예와 산타기를 좋아하여 틈만 있으면 별궁과 같이 사냥을 취미삼고 이 산 저 산을 두루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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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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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적성도 작은 고을이니 예전 명칭은 내소(來蘇)이고 고려적에 여러번 개성·양주의 속읍으로 되었다가 뒤에 다시 현으로 되었는데 관아는 본디 산성 남쪽에 있었다. 토지가 척박하고 토산물이 보잘 것 없어 세금과 부역을 능히 바치지 못하니 수령된 자가 모두 걱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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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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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법원읍 갈곡리에서 양주군 가래비쪽으로 넘는 고개를 수레넘이고개라 한다. 이것은 한자 표기로 차유령(車踰嶺)이라 하는데 실을 쉰 넘이 고개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곳이 험악하여 도적의 소굴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적은 숫자로는 이 고개를 넘지 못하고 최소한 쉰명(50명) 이상이 되어야 넘을 수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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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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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목종은 고려 제7대왕(경종의 장자)으로 성종 17년(997)에 왕위에 올라 문식 양반 및 군인의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고 민간문역으로 주철(鑄鐵)사용을 완화시켰으며 도성에 육위군영을 세우는 한편 12절도를 4도호와 동서북 방어 진사, 현령, 진장 등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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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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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 혜음령 고개는 옛날 이 고개 중턱 좌측에 혜음사(惠陰寺)가 있었던 곳으로 광탄면 용미리 벽제관을 넘어 다니는 고개이며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국도이다. 이 고개 주변에는 울창한 산림이 우거져 으슥해서 도둑들이 수시로 나타나 행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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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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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눌노천이 흐르는 하류 파평면 금파리 지역 임진강변 언덕에 궁터가 있었으니 이는 옛날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 고을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현 금파리와 장파리 구역 십여리나 되는 편편한 장마루 언덕이 이어지는 지역으로서 고을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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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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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봉서산은 봉황새가 깃드려 즐기며 노래하던 곳으로 호칭하여 내려오고 있다. 이 산 정상에는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하나는 장사가 먹었다는 장사우물로서 산성에서 사용하였고 또 하나는 전대우물( 帶水)로 수원이 많은 약수로 현재 문산과 파주읍 주민들이 즐겨 마시고 있으나 이 우물이 얼마나 깊은지 명주실 한타래를 풀어도 닿지 않는다는 깊은 우물로 측량할 수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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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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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삼한강역고(三韓彊域考)에 의하면 파평면 눌노리 이 지역은 삼한시대(辰韓·馬韓·弁韓)에 마한의 영역권에 있었으며 당시 52지국중 고리국(古離國)의 고궁터로써 궁궐이 있던 곳은 궁갓, 감옥이 있던 곳은 옥담밭 등으로 지금까지 불려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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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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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조리면 봉일천4리 산21번지 맑고 맑은 공능천이 흘러 고기배가 오르내리는 명봉산 서북맥 언덕 벼랑 위 산림이 우거진 한적한 산골짜기 산정에 김정국(金正國)이란 사람이 초당을 짓고 공부를 하였다. 선생의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제 (思齊) 또는 팔여거사(八餘居士), 본관은 의성(義城), 연(璉)의 아들이며 안국(安國)의 아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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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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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부터 임진강변에서 번식하고 있는 참게는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산품으로 크고 맛이 있어서 전국적으로 파주게라면 유명하였다. 특히 옥돌내(지금의 월롱면 위전리 냇가)는 임금님께 진상하는 게의 본고장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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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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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임진나루는 옛날 한양에서 송도를 거쳐 의주로 가는 국도로서 교통이 빈번한 곳이었다. 여기에서 뱃사공을 하는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옷차림과 거동만 보아도 어떠한 사람인지 잘 알아 맞추기로 유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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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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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법원읍 웅담리 입구 좌우측에 기암절벽으로 병풍처럼 둘러 쌓인 산이 있는데 산어귀 우측에 기암괴석이 솟아있는 산봉우리에 구한말엽 포수가 총을 메고 이산저산 돌아다니다가 이 산에 올라 두루살피니 건너 산봉우리 아래에 있는 산돼지를 발견하고 총을 당기려고 하면 사람으로 둔갑을 하여 앞으로 가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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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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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교하면 동패리에 소재하고 있는 심악산은 한강하류에 있는 산으로 동편은 동패리, 서편은 서패리, 남편은 산남리등 3개리가 둘러 있다. 가운데에 우뚝 솟은 봉우리와 동체는 마치 대호가 옆으로 누워있는 형상인 것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물위 에 떠있는 큰 군함같기도 하다. 또한 장군 영병 비룡상천형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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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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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국 주나라 건국공신 강태공(姜太公)의 후예 후(候)가 제나라 노현(盧縣)에 살아 노씨가 된 후 곤주자사 노진순(袞州刺史 盧震順)의 아들 노수(盧穗)가 범양(范陽 )에 살다가 신라 효성왕 14년(755)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아들 9형제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정착 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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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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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단읍내 뒤 백학산 서맥내령 맑고 맑은 사천내가 흐르는 냇가 벌판 가운데 우뚝 솟은 봉우리 156m 도라산 고지는 주위 수목이 우거져 경관이 아름다워 주민들이 여름철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 명산이라 하겠다. 그러나 신라가 경순왕 10년(879)에 폐망하자 경순왕의 11왕자는 사분오열로 뿔뿔히 흩어지니 할 수 없이 경순왕은 신라 도읍 경주에서 머나먼 천리길 송도를 찾아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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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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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우계(牛溪)선생은 중종 30년(1535) 6월 25일 한성 순화방에서 태어났으며 중종 39년 (1544) 9월 9세 때에 아버지 청송(成寸琛)선생이 파주 우계로 이주하게 되어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스스로 자습하여 경서와 문사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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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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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교하 심악산(深岳山)은 옛날 경기 5악(송악, 감악, 심악, 북악, 관악)으로 유명한 산이다. 이 산은 상봉과 중봉(3태봉) 끝봉이 북에서 남쪽으로 나란히 솟아있는데 봉우리마다 자그마한 내령이 뻗어있다. 교하면 산남리 47번지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 송사련(안당정승서고모의 아들)이 어느 여름날 중봉상에 있는 거북바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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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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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황진이(黃眞伊)라 하면 송도삼절(松都三絶〓徐花澤 朴淵 黃眞伊)의 하나로서 조선왕조 오백년 간의 대표적 명기(名妓)임은 누구나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물이 천하절색일 뿐 아니라 문필이 또한 절등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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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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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 지역은 곡릉천의 맑은 시냇물이 쇠재독암뜰을 거쳐 흐르는 새재개울(金城川)은 금촌에서 교하로 건너 다니는 쇠곳나루를 거치게 된다. 옛날 교하군청이 금성리에 있을 당시 상선배(商船)가 쇠재를 오르내리었으나 매년 홍수로 말미암아 쇠재개울이 매몰되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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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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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조선조 제23대왕 순조(純祖)는 정조24년(1800) 정조대왕이 승하하자 11세 당시 왕위에 올라 순조34년(1834) 11월 13일 45세로 승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조 대왕릉이 있는 이곳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2번지에 안장하였으나 제24대 헌종대왕(1834~1849)을 거쳐 철종대왕이 등극하자 직접적인 양부의 능제사로서 매년 참봉하게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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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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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국요제(堯帝)의 후손 한고조 유방(劉邦)의 41세손 송나라 병부상서 유전이 고려 문종 36년 경북 영일군에 정착 귀화하였으나 그의 8세손 국추(國樞)가 도첨의평리 (都僉議評理)에 이르러 공을 세워 백천군(白川君)에 추봉 백천으로 개관하였고 그의 후손 유극량의 아버지는 연안에서 살게 되어 연안인(延安人)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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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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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소개비냥은 파평산 북맥 임진강변에 우뚝 솟은 백석산(白石山) 절벽으로 그 아래 강물은 수심이 깊었으며 비냥 위로 좁은 소로길이 있어 겨우 한사람이 지나다닐 정도였다 한다. 바로 강 건너 장단 땅에 심승경(金承景)이라는 힘이 쎄고 활 잘 쏘는 한량이 살았는데 파주땅에서는 종 출신으로 '쇠'라는 상노와 전광교(全光교)라는 중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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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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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구분 : 유래 해당지역 : 파주시 > 광탄면 / 대덕산에서 흐르는 분지천(芬芝川)과 반용산에서 화장사를 거쳐 내려오는 용둔천 (龍屯川)이 응봉산에서 흘러 합류하여 삼대천(三大川)이 되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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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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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월롱면 영태리에 겨우 세 가구가 사는 동리가 있었으니 그 동명을 공수물이라 한다. 인조반정(仁祖反正)때 이서(李曙) 등 동지들이 모여서 장단으로부터 서울로 쳐 들어갈 때 낙하도(洛河渡)를 건너 옥돌내를 지나 이 곳 공수물에 이르러 우물에서 물을 마시고 갔는데 이 우물을 공수물(供水泉)이라 하였고 또 그 마을을 공수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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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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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구암(龜岩)선생은 명종 1년(1539)에 태어나 유의태 한의원과 산초스님(도승)의 지도를 받으면서 한의를 연구한 끝에 선조8년 왕을 진찰한 후 대의가 되어 궁중왕족을 치료 하는데 많은 공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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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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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성삼문(成三問) 선생은 본군관하 법원읍 금곡리 파평산 남맥 관모봉하에서 태종 18년(1418)에 출생 할아버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성달생(成達生)에게 글을 배웠으며 계묵(溪墨) 산골짜기 현불당제터에서 자습을 하면서 글씨를 얼마나 썼던지 이 골짜기 개울에 먹물이 늘 많이 내려와 묵개울이라 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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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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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진동면 서곡리(창화동)112번지 소재에 있는 고분은 고려조 판후부사 한조(문구공)의 아들인 예문춘추관태학사 한상질(1350~1400)의 것이며 문열의 시호를 받은 대학자 묘 (한명회 조부모)라 한다. 그 묘 하단에 12지신상벽화 분묘가 있으나 이는 전설에 의하면 문열공이 일시적 애처가 되었던 무당등의 좌수(무속도감) 묘라는 말도 나오고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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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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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고려 13대 선조대왕은 왕후에게 후사가 없어 후궁인 원신궁주(元信宮主)를 맞이 하였으나 또한 아무런 보람이 없어 일상 초조히 기다리던 중 어느 날 밤 후궁한테 도승 두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 우리는 남쪽 백 여리 되는 산(현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에 사는데 양도가 끊어져 곤궁하게 산다면서 사라지자 깜짝 놀라 깨어나니 꿈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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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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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우리나라는 고려와 조선조에 이르러 나라 임금님이 궁중에서 행차할 때 수많은 중신들을 대동호위하면서 궁중악을 불며 장렬한 행렬을 펼쳤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고장은 임진강을 경계로 송도와 한성이 각각 백리 거리 이내에 있어 여러 능과 원 또는 왕족묘가 분포되었으며 아름다운 임진강을 찾아 왕들이 자주 행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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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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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구봉 선생의 명은 익필(翼弼),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또는 현승(玄繩) 본관은 여산(礪山), 사련(祀連)의 아들로 중종 29년(1534)에 현 파주시 교하면 산 남리 심악산하 궁동에서 생장하였으며 선생을 잉태 후 심악산에 나무들이 고갈되 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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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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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평면 율곡리 산 100번지에 있는 화석정은 수많은 사연이 있는 곳으로 옛날 한양과 송도를 거쳐 신의주로 가는 국도변 임진나루터 길목 우뚝 솟은 기암절벽에 자리잡고 있는데 고려말 대유(大儒) 야은 길재(冶隱 吉再)선생의 유지(遺址)로서 야은 선생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함께 삼은(三隱)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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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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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청춘! 발음하는 순간 푸른 물이 톡 터지는 듯한 단어. 풋풋한 싱그러움이 느껴진다. 신록을 연상시키는 젊은 육체, 꿈을 이루기 위한 땀방울,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정신, 안이함을 거부하는 모험심, 패기와 열정, 사랑과 낭만을 꿈꾸며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가슴……. 예로부터 많은 작가들이 현란한 수식어를 동원하여 청춘의 아름다움을 예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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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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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 입상석불은 광탄면 용미리 산 8번지 중턱 마애불(磨崖佛)로 고구려 응화(應化) 불기천년(서기 366년)에 상효군(相孝軍)인 차호진(車好鎭)과 심장기(沈長己)에 의하여 천연암벽을 동체로 삼아 불상높이 57척 2촌(18미터)의 기형적 거대한 입상을 영조(靈造)로 조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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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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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군내면 백학산 준령이 서남맥으로 덕진당을 거쳐 임진강변을 끼고 내려와 삼선산(三仙山) 우뚝솟은 봉우리에서 양편으로 펼쳐진 지맥 내령끝머리 쌍태봉(형제산)이 있는 아래 한수동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는 옷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찬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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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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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민영달은 군수 민관호(閔觀鎬)의 아들로서 철종10년(1859) 1월 24일에 태어나 마포 용강동에서 성장하고 고종 22년(1885) 중광문과 병과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고종 29년(1892)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형조, 예조판서 좌참찬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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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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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탄현면 법흥 4리 벌두매 산골짜기 호장산하 오솔길 옆에 큰 바위가 있다. 옛날 피난을 가던 부부가 힘에 겨운 피난 보따리를 이고 지고 가다가 이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따라오던 아이가 울며 물을 달라고 보채니 여름날씨가 너무나 짜증이 난 그들 부부가 아이를 달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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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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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국 주나라 건국공신 강태공(姜太公)의 후예 후(候)가 제나라 노현(盧縣)에 살아 노씨가 된 후 곤주자사 노진순(袞州刺史 盧震順)의 아들 노수(盧穗)가 범양(范陽 )에 살다가 신라 효성왕 14년(755)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아들 9형제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정착 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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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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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탄현면 성동리 요풍동에 전주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그들은 나무를 하다가 쉬는 틈을 타서 돌을 산 밑으로 굴리면서 장난을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씨가 굴린 돌이 밑으로 굴러가 산 중턱에 있던 호랑이 굴을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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