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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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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임금의 귀여운 딸 연화공주의 병은 나아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이름난 의원을 불러오고 좋다는 약을 모두 써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임금과 왕비는 물론 신하들까지 밤마다 뜬눈으로 지새우며 걱정했고 얼굴은 날로 수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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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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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한국음악학학회 / 2011, vol.19, no.1, 통권 20호 pp. 169-222 (54 pages)
이 글은 현제명이 1903년에 태어나 1945년 8월 해방이 될 때까지 42년간, 곧 일제 강점기의 현제명의 음악 활동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활동했는지를 살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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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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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소릿길’이라 불리던 걸치기재는 옛날 이서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고개가 워낙 가파르고 험해 먼 길에 지친 나그네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쉬어가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이서면을 가로지르는 호남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완주군이 이 재를 폭 7m로 확장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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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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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Tip. 독문학과 교수진이 가장 질문과 문제를 내는데 선호하는 시기는 질풍노도의 시기, 낭만주의 시기를 뽑을 수 있다. 특히 질풍노도의 시기는 괴테의 젊은 시절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대변되는 격변기이며,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을 기점으로 독일문학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신고전주의 시대로 넘어간다. 낭만주의는 괴테, 쉴러 등의 대문호들을 낳은 시기이자, 괴테의 경우에는 이탈리아 여행으로부터의 과거 르네상스의 인문주의가 문학에 연동되면서 풍성한 대작의 시기로 넘어감을 보여준다. (Ex: 파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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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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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옛날 운장산(雲長山) 영봉을 마주한 계곡의 산촌에 마흔이 넘은 착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남달리 금슬이 좋은 두 사람은 부지런히 일하며 행복하게 지냈다. 다만 마흔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는 것이 유일한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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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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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평 윤씨 시조 윤신달의 13세손 윤승례 선생은 영평군 윤척(鈴平君 尹陟)의 자(尹承休, 承度, 承順, 承慶,承禮) 오형제 중 끝분으로서 장단군 장목동(현장단군 진동면 작목리)에서 사시면서 고려 공민왕 16년(1367)에 신돈(辛旽)의 살해를 모의하다 누설되어 유배되었다가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주살된 후 풀려나 응양군 상호군(鷹楊軍 上護軍)이 되어 수차에 걸친 왜구(倭寇)들의 침입을 막아 공을 세웠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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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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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 때의 일이다. 완주군 고산면 오산리에 구석린(仇錫麟)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구석린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육 년 동안 시묘(侍墓)를 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지극한 효성에 감복했고, 호랑이마저 그 마음에 감동해 구석린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면 호랑이가 나타나 떨고 있는 구석린을 품에 안고 몸을 녹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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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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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수구 청학동에 흔들못이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어 어디가 어딘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을 만큼 변해 버렸지만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청학동에 많이 살던 최씨 문중과 관련이 있었던 연못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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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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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옛날 운장산(雲長山) 기슭에 효심이 지극한 김만수(金萬壽)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마흔을 넘긴 그는 환갑이 지난 홀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두 남매를 거느리며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낮에는 아내와 함께 땀 흘려 일하고, 밤이면 호롱불을 밝히고 책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어엿한 선비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서방에게도 한 가지 큰 고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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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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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에 이승지라고 불리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아들의 결혼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몇 달 전에 이미 사돈이 될 집안이 정해졌으나 주위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친구 한 사람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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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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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넓게 펼쳐진 호남평야를 앞에 두고 동북쪽으로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와 비봉면 봉산리 사이에 약 400m 높이의 봉실산이 우뚝 솟아 있다. 이 산은 호랑이가 새끼를 품에 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동남쪽에는 학림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전승에 따르면 고려 진평왕 시대에 해성선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산의 모습이 날아가는 학을 닮아 학림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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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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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나리오 용어 / 카메라에 관한 용어 / 사운드에 관한 용어 / 집필에 관한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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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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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옛날 어느 고을에 농사꾼의 막내딸이 있었다. 처녀는 얼굴은 예뻤지만 방귀를 아주 잘 뀌었다. 시집갈 나이가 되자 건너 마을에 사는 이참봉 집의 큰며느리로 들어갔다. 며느리는 삼 년 동안 시부모를 정성껏 모시고 남편도 잘 봉양했다.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고 이참봉도 크게 만족해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참봉이 큰며느리의 얼굴을 보니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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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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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철마산의 원래 이름은 천마산이었다. 옛날 이 산 속에는 양 어깨에 날개가 달린 천마가 살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가깝게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산 아래 마을에는 전설이 생겨났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근처에 영웅이 태어나고, 그 말을 타고 출정할 것이라는 신령스러운 전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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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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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전주에서 서남쪽으로 가면 모악산이라는 아름다운 산이 있고, 그곳에는 대원사라는 절이 있다. 대원사 위쪽에는 수왕사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아주 먼 옛날 이 암자에서 두 승려가 불도를 닦고 있었다. 한 사람은 주지승, 다른 한 사람은 상좌승이었다. 같은 절에서 함께 수행했지만 성격은 크게 달랐다. 주지승은 말수가 적고 불심이 깊었으며, 상좌승은 활달하고 무슨 일이든 먼저 벌이고 보는 성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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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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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강화도는 유배 1번지라고 할 만하다. 많은 왕족들이 이곳으로 귀양을 왔고, 더러는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조선시대 최고의 폭군이었던 연산군과, 왕족으로 이곳에서 나무꾼 생활을 하다가 왕이 된 철종 임금, 그리고 광해군의 동생으로 8살 나이에 강화에 귀양 와서 목숨을 잃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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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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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완주군 동상면에는 험준하기로 이름난 운장산이 있다. 산은 동서로 길게 뻗어 완주군과 진안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산세가 험해 예부터 교통이 불편한 곳으로 알려졌다. 운장산 아래에는 용마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먼 옛날, 이곳에 마음씨 착하고 순박한 늙은 부부가 살았다. 살림은 가난했지만 두 사람은 남부러울 것 없이 사이좋게 지냈다. 다만 이순이 넘도록 아들이나 딸 하나 없다는 것이 유일한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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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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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부평 고을에 신관 사또가 부임해 왔다. 관아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을 먹으려 할 때였다. 고을의 방범 경찰 업무를 맡은 병방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와 보고하는 것이었다. “나리, 징맹이 고개에서 도둑 떼가 행인의 짐을 털었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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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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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사방을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넓은 들판 한가운데 아늑하게 자리 잡은 완주군 고산천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물이 흘렀고, 물고기들은 은빛 비늘을 번쩍이며 헤엄쳤다. 고산에는 ‘고산녀석하미처(高山麗石何美處)’라는, 산천의 수려함을 노래한 문구가 선비들의 입을 통해 전해왔다. 예부터 놀이터로도 삼남(三南)에서 으뜸으로 꼽혀 전국 방방곡곡에서 여행객이 몰려들었다. ‘오늘은 전라, 내일은 충청’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여러 고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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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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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완주군 동상면에는 험준하기로 이름난 운장산이 있다. 산은 동서로 길게 뻗어 완주군과 진안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산세가 험해 예부터 교통이 불편한 곳으로 알려졌다. 운장산 아래에는 용마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먼 옛날, 이곳에 마음씨 착하고 순박한 늙은 부부가 살았다. 살림은 가난했지만 두 사람은 남부러울 것 없이 사이좋게 지냈다. 다만 이순이 넘도록 아들이나 딸 하나 없다는 것이 유일한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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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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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아주 먼 옛날, 지금의 완주군 소양면 위봉사 아래 어느 마을에 호심이라는 효성 지극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 호심은 남의 집 일을 거들며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처지였지만,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정성만큼은 어느 부자 못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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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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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매죽헌(梅竹軒)의 아들은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에는 아들이 5명으로 되어있고, 회곡공파보(檜谷公派譜) 구보(舊譜)에는 원(元) 맹첨(孟瞻) 맹평(孟平) 맹종(孟終) 금년생(今年生)으로 되어있었으나 동학(東鶴) 숙모전(肅慕殿) 병자원적(丙子寃籍)에는 성맹첨(成孟瞻) 성맹평(成孟平) 성맹종(成孟終) 성헌(成憲) 성택(成澤) 성무명(成無名) 성금년생(成今年生) 7명이 올라있다. 장남(長男) 성원(成元)은 일찍 요사(夭死)하였으므로 병자원적(丙子寃籍)에 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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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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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옛날 어느 마을에 머리 부스럼을 늘 앓는 사람과 눈병을 앓는 사람, 그리고 늘 코를 훌쩍이는 코흘리개가 살았다. 부스럼장이는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긁적였고, 눈병을 앓는 사람은 눈가에 모여드는 파리떼를 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코흘리개는 항상 코를 훌쩍이며 소매 끝으로 콧물을 닦았다. 그런데 세 사람 모두 자기 허물은 잊은 채 서로의 흉만 잡고 헐뜯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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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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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저녁이 이슥해서 들어가면 모두가 시체가 되어서 나온다는 혼골(魂谷)은 영천시 북안면 내포리에 위치하여 있다. 어느 해인가 나라에서는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전국에 과거 실시의 방을 붙이게 되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 기뻐서 눈물까지 흘리던 영천 땅의 한 선비는 집안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해오던 상아빛 연적 등을 싼 개나리봇짐을 짊어지고 한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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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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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어느 시골에 예쁘기로 소문난 처녀가 살았다. 갑자기 부모를 잃고 혼자 살게 되었지만, 인물도 좋고 솜씨도 뛰어나 여러 곳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그러나 처녀는 부모의 삼 년 상이 끝날 때까지는 시집갈 생각이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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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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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849년 6월, 조선의 헌종 임금이 돌아가셨다. 대를 이을 아들 하나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실에서는 서둘러 강화도의 나무꾼인 원범이를 철종으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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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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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옛날 팔도에서 방귀를 잘 뀌기로 이름난 사람이 둘 있었다. 한 사람은 경상도 방귀장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전라도 방귀장이였다. 어느 날 전라도 방귀장이는 이왕이면 팔도에서 제일가는 방귀장이가 되겠다며 경상도까지 원정 시합을 떠났다. 먼 길을 걸어 경상도 방귀장이의 집을 찾아갔지만 주인은 마침 장에 가고 없었다. 집을 둘러보니 초라한 초가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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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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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탄현면 성동리 요풍동에 전주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그들은 나무를 하다가 쉬는 틈을 타서 돌을 산 밑으로 굴리면서 장난을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씨가 굴린 돌이 밑으로 굴러가 산 중턱에 있던 호랑이 굴을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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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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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전주·남원 간 도로에서 약 200m 떨어지고 의암 수원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100m쯤 되는 곳에 높이 20~30m의 채기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옷도리’라는 인물에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이 마을에는 품팔이로 살아가는 과부가 있었다.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꾼 뒤 저절로 임신하여 여섯 달 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는 허리 윗부분만 있는 모습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아이를 ‘웃도리’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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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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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완판본은 전주에서 발간한 한글고전소설을 말하고, 경판본은 서울에서 발간한 한글고전소설을 말한다. 물론 경기도 안성에서 발간한 한글고전소설은 안성판이라 하는데 대체로 경판본에 넣어서 분류하고 있다. 이처럼 원래 완판본이란 명칭은 한글고전소설을 경판본과 비교하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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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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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옛날 이 마을에는 마흔이 넘은 착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주변에는 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산골이라 화전을 일구어 잡곡을 심고 산채를 뜯어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남달리 금슬이 좋았던 부부는 부지런히 일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마흔이 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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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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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가로세로비 (Aspect ratio) : 프레임의 가로 세로 비율.
• 고감도 필름 (Fast stock, fast film) : 빛에 매우 민감하고 입자가 굵은 필름.
• 고전영화 (Classical cinema) : 대략 1910년대 중반 그리피드로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제작된 대부분의 극영화를 지칭하는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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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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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영천시 도동 고갯길에서 봉동에 이르는 국도 중간 지점에서 남쪽으로 쳐다보면 쪽지머리를 한 여인의 실눈썹 같은 아름다운 북안천이 흐른다. 이 강에는 명주실을 한 꾸러미를 드리워도 닿지 않는다는 커다란 웅덩이가 있엇다. 사실 그렇게 깊은 웅덩이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30여년 전만해도 사람이 들어가면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다. 지금은 상류에서 밀려온 토석으로 묻혀 웅덩이는 형체도 없고 주위는 사과밭으로 변했거나 공장으로 변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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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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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옛날 운장산(雲長山) 영봉을 마주한 계곡의 산촌에 마흔이 넘은 착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남달리 금슬이 좋은 두 사람은 부지런히 일하며 행복하게 지냈다. 다만 마흔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는 것이 유일한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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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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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영천에서 북천을 건너 쳐다보면 쌍계동 뒤편에 그리 높지 않은 3개의 산봉우리가 있다. 그 중 금호 쪽으로 있는 2개의 산봉우리는 옛날 통신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봉화산이고, 나머지 한 봉우리는 한 여인이 애틋한 사연을 간직한 채 조용히 잠들어 있는 곳이다. 지금도 정상에는 무덤이 남아있다. 그러니까 조선 중엽이라고 전해진다. 당씨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영천군수로 부임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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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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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영천시 도동 고갯길에서 봉동에 이르는 국도 중간 지점에서 남쪽으로 쳐다보면 쪽지머리를 한 여인의 실눈썹 같은 아름다운 북안천이 흐른다. 이 강에는 명주실을 한 꾸러미를 드리워도 닿지 않는다는 커다란 웅덩이가 있엇다. 사실 그렇게 깊은 웅덩이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30여년 전만해도 사람이 들어가면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다. 지금은 상류에서 밀려온 토석으로 묻혀 웅덩이는 형체도 없고 주위는 사과밭으로 변했거나 공장으로 변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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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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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옛날 영천 땅에 구(具)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꽃처럼 예쁜 고명딸이 있었다. 그 때의 풍속대로 그녀는 어릴 때 이미 인근의 건강한 청년과 정혼을 하였다. 그러나 양가 모두 지지리도 가난하여 정식으로 예식을 올리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젊은 청년과 규수는 서로 안타깝게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서로가 먼발치에서 곁눈질로 훔쳐보며 속으로 부모님들이 야속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혼례라도 올려 주면 두 사람이 합심하여 노력한다면 남부럽지 않게 살 것 같기도 했으나 그들의 심정을 이야기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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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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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 글은 인터넷에 떠도는 글이다. 고 박완서 선생이 쓴 글이라며 ‘박완서의 노년관(老年觀)’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그러나 이 글은 윤세영 작가가 2016년 3월3일자 동아일보에 ‘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이란 칼럼에 기고한 글이다. 윤 작가는 1956년 충남 아산 출생으로 2010년 ‘시와 산문’으로 등단한 수필가이며 동아일보 기자를 지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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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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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산세 좋고 물이 맑아 경관이 좋기로 유명한 팔공산 동쪽 기슭에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김유신 장군이 어린 시절 지혜를 닦고 힘을 길렀다는 석굴이 있다. 그 석굴 아래 마치 대문처럼 생긴 석벽을 들어서면 탁 트인 공간에 뒤로는 높은 산이 버티고 섰고 그 중턱에 매달리듯 아담한 암자가 하나 지어져 있다. 바로 돌구멍 절이라 불리는 중암암(中岩庵)이다. 이 암자는 신라시대 만들어졌는데 어느 해부턴가 원주스님 한 분만 절을 지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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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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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황형(黃衡, 1459~1520)은 일찍이 과거 무과에 급제하여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했을 때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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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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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팔공산의 동봉에서 신녕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산세가 좋아 큰 인물이 배출될 것이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지맥을 끊었다는 절도바위가 있고 다시 조금 내려오면 천년수라는 약수터가 있다. 지금은 바짝 마른 채 흔적만 남아있지만 옛날에는 이곳에서 백일동안 기도만 드리면 마른 땅에서 물이 나오고, 그 물을 마시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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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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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靑丘永言(珍本)에 수록된 呼兒曲四調並詩 로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龍湖 趙存性(1554~1628)에 관한 연구는 실상 미미한 형편이다.1) 이처럼 연구가 부진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핵심은 그의 문집이 부재했던 데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서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하여 知敦寧府事(인조 4)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생활을 거쳤으나, 시조 작품인 呼兒曲 이외의 시문이나 문집은 그 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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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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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청통면 신원리에는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거조암 영산전이 있다. 영산전 안에는 526분의 나한님이 봉안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지금부터 1천 수 백 년 전에 이 암자에는 도를 터득한 스님이 한 분 살고 계셨다.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심산에 오직 바람과 짐승과 나무들과 이야기를 하며 생활하던 스님은 평야가 그리워 하루는 인가가 있는 마을 쪽으로 하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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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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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조리면 봉일천에서 서북쪽으로 샛길을 따라 1km정도 걸어 들어가면 20여가구가 모여 사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도깨비 촌으로 탑삭골이라고 불리어왔다. 옛날 이 탑삭골 능선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려던 젊은이가 있었다. 공릉 장터에서 산 물건을 잔뜩 지게에 짊어지고 걷다보니 귀가시간이 늦어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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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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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영천시 중심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남천(南川 : 즉 자호천(紫湖川)) 가에 탕건바위라 부르는 크지 않는 바위가 하나 있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이 바위 아래에는 수심이 깊고 폭이 넓은 소가 있어 여름철이면 물이 맑아 피서지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곳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애틋한 사랑의 전설이 스며있다. 언제인지는 모르나 아주 오랜 옛날 야사동에는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성질이 고약하고 욕심이 많아 주위 사람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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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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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사방을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넓은 들판 한가운데 아늑하게 자리 잡은 완주군 고산천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물이 흘렀고, 물고기들은 은빛 비늘을 번쩍이며 헤엄쳤다. 고산에는 ‘고산녀석하미처(高山麗石何美處)’라는, 산천의 수려함을 노래한 문구가 선비들의 입을 통해 전해왔다. 예부터 놀이터로도 삼남(三南)에서 으뜸으로 꼽혀 전국 방방곡곡에서 여행객이 몰려들었다. ‘오늘은 전라, 내일은 충청’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여러 고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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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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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영천시에서 강줄기를 따라 4km쯤 올라가면 주남 평야 일만 두락의 젖줄기인 금호강을 가로 막은 주남 신보가 있고 다시 절벽 아래 오솔길을 거슬러 오르면 주남 구보가 나온다. 이 보의 서북 양면은 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으나 동쪽과 남쪽은 높이 100m가 넘는 절벽이 곧 쓰러져 보안을 메울 듯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행여 넘어질까 지나는 이의 걸음을 재촉한다. 그 절벽의 중턱에 높이 10m정도의 큰 바위덩이가 곧 떨어질 듯 바위는 절을 밀고 절벽은 바위를 잡아당기고 섰으니 이것이 바로 용마바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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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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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전주·남원 간 도로에서 약 200m 떨어지고 의암 수원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100m쯤 되는 곳에 높이 20~30m의 채기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옷도리’라는 인물에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이 마을에는 품팔이로 살아가는 과부가 있었다.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꾼 뒤 저절로 임신하여 여섯 달 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는 허리 윗부분만 있는 모습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아이를 ‘웃도리’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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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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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영천시 망정주공아파트 자리에 미륵등이란 곳이 있었다. 옛날 이곳에는 아늑한 마을이 있었으며, 그 마을에는 한 아버지가 아들과 정답게 살고 있었다. 비록 가난한 농부의 신분이었지만 윗대 조상들은 높은 벼슬에 있었으며 할아버지 때만 하여도 부농으로 이 마을에서 제일 부자였으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찌된 일인지 가세가 점점 기울어져 그 많던 농토를 다 팔아버리고 지금은 부자는 소작으로 연명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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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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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옛날 영천 땅에 구(具)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꽃처럼 예쁜 고명딸이 있었다. 그 때의 풍속대로 그녀는 어릴 때 이미 인근의 건강한 청년과 정혼을 하였다. 그러나 양가 모두 지지리도 가난하여 정식으로 예식을 올리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젊은 청년과 규수는 서로 안타깝게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서로가 먼발치에서 곁눈질로 훔쳐보며 속으로 부모님들이 야속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혼례라도 올려 주면 두 사람이 합심하여 노력한다면 남부럽지 않게 살 것 같기도 했으나 그들의 심정을 이야기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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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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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아주 옛날 금호강변에 자리 잡은 영천땅 어느 고을에 강갈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엿한 양반집 자손으로써 노름도 일종의 재주라고 여겼다. 아침밥술을 놓기가 무섭게 투전판으로 달려갔다. 돈을 한 꾸러미씩 안고서 모여든 노름꾼들은 며칠 낮 며칠 밤을 세워가며 화투장을 돌렸던 것이다. 돈은 돌고 돌다가 오늘따라 운 좋게 강갈이 앞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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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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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팔공산의 동봉에서 신녕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산세가 좋아 큰 인물이 배출될 것이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지맥을 끊었다는 절도바위가 있고 다시 조금 내려오면 천년수라는 약수터가 있다. 지금은 바짝 마른 채 흔적만 남아있지만 옛날에는 이곳에서 백일동안 기도만 드리면 마른 땅에서 물이 나오고, 그 물을 마시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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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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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저녁이 이슥해서 들어가면 모두가 시체가 되어서 나온다는 혼골(魂谷)은 영천시 북안면 내포리에 위치하여 있다. 어느 해인가 나라에서는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전국에 과거 실시의 방을 붙이게 되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 기뻐서 눈물까지 흘리던 영천 땅의 한 선비는 집안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해오던 상아빛 연적 등을 싼 개나리봇짐을 짊어지고 한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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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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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이 논문의 목적은 「홍계월전」의 여성영웅 공간의 양상과 문학적 의미에 새로운 해석을 더해 보는 데 있다. 세대를 초월한 강인한 여성영웅의 탄생이 가능했던 토대, 그녀가 종횡으로 누볐던 ‘공간’의 양상에서 문학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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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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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경부고속도로를 따라가면 영천 인터체인지가 있고 그 부근에 청지라는 큰 못이 있다. 원래는 못이 아니고 동네였다고 한다. 하루는 이 동네에 큰 경사가 생겼다. 5대 독자로 내려오는 가정에서 아들을 순산한 것이다. 장가를 든 지 20년이 지나도 수태를 하지 못하여 근심스럽게 지내던 중 생각지도 않던 후손을 얻었으니 부부는 물론 온 동네가 즐거워했다.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그 부인이 잉태한 사실도 모르고 있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갑자기 산기가 있어 낳아보니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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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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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황해도 장산곶 남쪽 백령도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하늘나라 옥황상제가 선녀 자매에게, “너희들 두 자매 선녀는 저 하계 조선국의 백사장이 쓸쓸하니 꽃을 심고 오너라.”“어떤 꽃을 심는 것이 좋겠습니까?”“바닷가 비바람에도 잘 견디고 꽃이 아름다운 해당화가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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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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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해발 1124m의 보현산이 서남쪽으로 뻗어내려 긴 협곡을 이룬 곳에 조그마한 동네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영천군 자양면 신방동이다. 이 동네에는 강씨 성을 가진 마음 착한 청년이 살았는데 하루는 그 아버지가 몹쓸 병에 걸려 몸져눕게 되었다.효성 또한 지극한 강 청년은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아버지를 간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차도는 없고 오히려 악화되어 이제 죽는 날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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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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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시청(이야기파주)】덕진산성 마루에 임진강과 가까운 쪽으로 10여평의 평지가 있는데 봉우리가 강가로 돌출된 형상을 하고 있어 임진강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소로 이곳에 슬픈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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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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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고려 중엽 조정에서는 전국 명산에 사찰을 보내 보국안민을 빌게 되었다. 그 당시 영천군 화북면 법화동 보현산 중턱에 지은 절이 바로 보현사였다. 절이 창건된 후 빼어난 산수 덕분인지 많은 승려들이 찾아와 수도하였고 신도 또한 많이 출입 하였던바 사찰은 날이 갈수록 번창해져 인근에서는 가장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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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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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소릿길’이라 불리던 걸치기재는 옛날 이서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고개가 워낙 가파르고 험해 먼 길에 지친 나그네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쉬어가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이서면을 가로지르는 호남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완주군이 이 재를 폭 7m로 확장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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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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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영천시 대창면 오길리는 채산을 등지고 야산들이 앞을 가로 막고 있어 높지는 않지만 심산유곡이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이 동네는 다른 동네보다 늦게 해가 뜨고 일찍 해가 져 햇빛이 적게 드는 동네다. 그러나 인심은 순후하고 넓지는 않지만 골짝마다 기름진 옥답이 있어 살기 좋은 동네이다. 더구나 채산에는 갖가지 나물과 약초가 자생하여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므로 마을 사람들은 무척 고맙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채산에는 불길한 전설이 있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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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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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 때의 일이다. 완주군 고산면 오산리에 구석린(仇錫麟)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구석린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육 년 동안 시묘(侍墓)를 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지극한 효성에 감복했고, 호랑이마저 그 마음에 감동해 구석린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면 호랑이가 나타나 떨고 있는 구석린을 품에 안고 몸을 녹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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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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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영천댐의 호반에 현대식 양옥들로 단장된 새 마을이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답다. 이곳은 댐이 이루어지므로써 새로 생긴 자양(紫陽)면 소재지다. 이 소재지 서편 산기슭에 울창한 노송 등이 둘레 약 2km나 되는 큰 원을 그리며 우거져 있고 그 도래솔 안 벌에 큰 무덤들과 비석들이 있으며, 그 근처 솔밭 사이사이에는 고색창연한 옛 기와집들이 이어져 있으니 이곳이 바로 정 효자가 얻은 명당자리 일대(一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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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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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옛날 어느 마을에 머리 부스럼을 늘 앓는 사람과 눈병을 앓는 사람, 그리고 늘 코를 훌쩍이는 코흘리개가 살았다. 부스럼장이는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긁적였고, 눈병을 앓는 사람은 눈가에 모여드는 파리떼를 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코흘리개는 항상 코를 훌쩍이며 소매 끝으로 콧물을 닦았다. 그런데 세 사람 모두 자기 허물은 잊은 채 서로의 흉만 잡고 헐뜯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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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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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한국음악학학회 / 2011, vol.19, no.1, 통권 20호 pp. 169-222 (54 pages)
이 글은 현제명이 1903년에 태어나 1945년 8월 해방이 될 때까지 42년간, 곧 일제 강점기의 현제명의 음악 활동이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활동했는지를 살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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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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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어느 시골에 예쁘기로 소문난 처녀가 살았다. 갑자기 부모를 잃고 혼자 살게 되었지만, 인물도 좋고 솜씨도 뛰어나 여러 곳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그러나 처녀는 부모의 삼 년 상이 끝날 때까지는 시집갈 생각이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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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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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이 논문의 목적은 「홍계월전」의 여성영웅 공간의 양상과 문학적 의미에 새로운 해석을 더해 보는 데 있다. 세대를 초월한 강인한 여성영웅의 탄생이 가능했던 토대, 그녀가 종횡으로 누볐던 ‘공간’의 양상에서 문학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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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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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고려 중엽 조정에서는 전국 명산에 사찰을 보내 보국안민을 빌게 되었다. 그 당시 영천군 화북면 법화동 보현산 중턱에 지은 절이 바로 보현사였다. 절이 창건된 후 빼어난 산수 덕분인지 많은 승려들이 찾아와 수도하였고 신도 또한 많이 출입 하였던바 사찰은 날이 갈수록 번창해져 인근에서는 가장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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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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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 글은 인터넷에 떠도는 글이다. 고 박완서 선생이 쓴 글이라며 ‘박완서의 노년관(老年觀)’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그러나 이 글은 윤세영 작가가 2016년 3월3일자 동아일보에 ‘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이란 칼럼에 기고한 글이다. 윤 작가는 1956년 충남 아산 출생으로 2010년 ‘시와 산문’으로 등단한 수필가이며 동아일보 기자를 지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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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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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조선 세종 때 일이었다. 현재의 경서동 범머리산에 갑자기 말을 탄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베로 만든 건을 쓴 사람들도 있었고 언젠가 이 마을에 나타난 적이 있는 부평 관아의 이방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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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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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완판본은 전주에서 발간한 한글고전소설을 말하고, 경판본은 서울에서 발간한 한글고전소설을 말한다. 물론 경기도 안성에서 발간한 한글고전소설은 안성판이라 하는데 대체로 경판본에 넣어서 분류하고 있다. 이처럼 원래 완판본이란 명칭은 한글고전소설을 경판본과 비교하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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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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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수구 동춘동 동막의 도곡 부락을 흔히 삼정승 고을이니 큰 대신, 작은 대신 동리니 하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는 아버지가 영의정을 추증 받고 큰아들이 우의정, 작은아들이 좌의정을 지냈다는 삼부자 이야기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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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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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靑丘永言(珍本)에 수록된 呼兒曲四調並詩 로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龍湖 趙存性(1554~1628)에 관한 연구는 실상 미미한 형편이다.1) 이처럼 연구가 부진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핵심은 그의 문집이 부재했던 데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서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하여 知敦寧府事(인조 4)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생활을 거쳤으나, 시조 작품인 呼兒曲 이외의 시문이나 문집은 그 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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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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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한시(漢詩)의 이해 : 초보자는 반드시 읽어 볼 것! - 漢詩는 시대의 변천과 함께 그 형식을 갖추어 오다가 당나라 때에 이르러 엄격한 규칙을 수반하는 전형(典型)이 확립되었다. 이 엄격한 규칙을 수반하는 당나라 이후의 한시를 근체시(近體詩)라 하고, 그 이전의 시를 고체시(古體詩)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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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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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매죽헌(梅竹軒)의 아들은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에는 아들이 5명으로 되어있고, 회곡공파보(檜谷公派譜) 구보(舊譜)에는 원(元) 맹첨(孟瞻) 맹평(孟平) 맹종(孟終) 금년생(今年生)으로 되어있었으나 동학(東鶴) 숙모전(肅慕殿) 병자원적(丙子寃籍)에는 성맹첨(成孟瞻) 성맹평(成孟平) 성맹종(成孟終) 성헌(成憲) 성택(成澤) 성무명(成無名) 성금년생(成今年生) 7명이 올라있다. 장남(長男) 성원(成元)은 일찍 요사(夭死)하였으므로 병자원적(丙子寃籍)에 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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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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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넓게 펼쳐진 호남평야를 앞에 두고 동북쪽으로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와 비봉면 봉산리 사이에 약 400m 높이의 봉실산이 우뚝 솟아 있다. 이 산은 호랑이가 새끼를 품에 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동남쪽에는 학림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전승에 따르면 고려 진평왕 시대에 해성선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산의 모습이 날아가는 학을 닮아 학림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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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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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 충절은 첫 번째 덕목이었고,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는 윤리사상이었다. 조선 건국시 공을 많이 세웠거나 단종복 위의 충절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충의지사들이야말로 충절에 있어서는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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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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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임금의 귀여운 딸 연화공주의 병은 나아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이름난 의원을 불러오고 좋다는 약을 모두 써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임금과 왕비는 물론 신하들까지 밤마다 뜬눈으로 지새우며 걱정했고 얼굴은 날로 수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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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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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풍류한량(風流閑良)들과 기녀(妓女)들의 화답(和答)의 노래나 그녀들의 이야기에 나타난 것을 보면, 기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화류계(花流界)의 여자(女子)' 내지는 '몸을 파는 여인(女人)' 들의 이미지와는 엄청나게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참조】다음 카페 (漢字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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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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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옛날 어느 고을에 농사꾼의 막내딸이 있었다. 처녀는 얼굴은 예뻤지만 방귀를 아주 잘 뀌었다. 시집갈 나이가 되자 건너 마을에 사는 이참봉 집의 큰며느리로 들어갔다. 며느리는 삼 년 동안 시부모를 정성껏 모시고 남편도 잘 봉양했다.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고 이참봉도 크게 만족해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참봉이 큰며느리의 얼굴을 보니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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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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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조선 왕조의 세종대왕은 학문에 열중한 탓에 눈병을 앓아 온천물로 목욕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한양 도성에서 가까운 곳에는 온천이 없기 때문에 궁궐을 떠나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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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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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옛날 이 마을에는 마흔이 넘은 착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주변에는 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산골이라 화전을 일구어 잡곡을 심고 산채를 뜯어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남달리 금슬이 좋았던 부부는 부지런히 일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마흔이 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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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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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금의 부개동은 옛 지명이 마분리(馬賁里)였다. 아마도 큰 말무덤이 있어서 그렇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금의 부평동 일대는 대정리(大井里)였는데 그 뜻으로 보면 큰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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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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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영천에서 북천을 건너 쳐다보면 쌍계동 뒤편에 그리 높지 않은 3개의 산봉우리가 있다. 그 중 금호 쪽으로 있는 2개의 산봉우리는 옛날 통신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봉화산이고, 나머지 한 봉우리는 한 여인이 애틋한 사연을 간직한 채 조용히 잠들어 있는 곳이다. 지금도 정상에는 무덤이 남아있다. 그러니까 조선 중엽이라고 전해진다. 당씨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영천군수로 부임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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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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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적산은 깊고 숲이 우거져서 호랑이가 살았다. 그리고 맛좋은 산나물이 지천으로 많아서 음력 삼월부터 석 달 동안 여인네들이 쑥부쟁이와 두릅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루하루 날이 지남에 따라 원추리, 취나물, 고비, 홑잎나물 등을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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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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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산세 좋고 물이 맑아 경관이 좋기로 유명한 팔공산 동쪽 기슭에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김유신 장군이 어린 시절 지혜를 닦고 힘을 길렀다는 석굴이 있다. 그 석굴 아래 마치 대문처럼 생긴 석벽을 들어서면 탁 트인 공간에 뒤로는 높은 산이 버티고 섰고 그 중턱에 매달리듯 아담한 암자가 하나 지어져 있다. 바로 돌구멍 절이라 불리는 중암암(中岩庵)이다. 이 암자는 신라시대 만들어졌는데 어느 해부턴가 원주스님 한 분만 절을 지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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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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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부평구 산곡동과 서구 석남동 사이에 뻗어 내린 계양산의 지맥이 봉우리로 우뚝 솟은 것이 원적산이다. 조선 시대에 경인 운하를 파는 공사를 할 때, 이 산을 뚫지 못해 실패했다 하여 원통함을 쌓았다는 뜻으로 원적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뒤에 한자 표기가 ‘원(元)’자로 바뀌었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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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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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영천댐의 호반에 현대식 양옥들로 단장된 새 마을이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답다. 이곳은 댐이 이루어지므로써 새로 생긴 자양(紫陽)면 소재지다. 이 소재지 서편 산기슭에 울창한 노송 등이 둘레 약 2km나 되는 큰 원을 그리며 우거져 있고 그 도래솔 안 벌에 큰 무덤들과 비석들이 있으며, 그 근처 솔밭 사이사이에는 고색창연한 옛 기와집들이 이어져 있으니 이곳이 바로 정 효자가 얻은 명당자리 일대(一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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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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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안하지 고개는 부평구 청천동과 서구 가정동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의 이름에 관해서는 그럴 듯한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기러기가 날아드는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청천동 동쪽에서 바라보면 서구 가정동 앞바다에서 기러기가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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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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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강화대교를 넘자마자 오른편에‘만남의 광장’이라 하여 관광객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곳에서 제일 눈에 먼저 띄는 것이 인삼이 그려진 간판이다. 그리고 강화읍에도 인삼 센터가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이는 사람들이 강화도의 특산물로 인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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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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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부평 지역의 중요한 지명으로 남아 있는 굴포천과 원통현은 옛날부터 여러 차례 시도했던 경인운하 사업과 관련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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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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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636년 12월 어느 날 밤 한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어둠을 깨뜨렸다. “상감마마, 북쪽의 오랑캐 10만 명이 압록강을 넘어 벌써 평양이 함락되고 지금 한양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무엇이 ? 청나라가 또 쳐들어왔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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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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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미년 3월, 한반도는 독립 만세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인천에서도 3월 6일 인천상업중학과 인천공립보통학교가 시위를 하고 동맹 휴학에 들어갔으며, 같은 날 강화에서도 1천 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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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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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한에는 단군과 관련된 유적이 두 곳밖에 없다. 그런데 그 두 곳이 모두 강화도에 있다. 단군께서 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안함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참성단(전국체육대회의 성화를 이곳 참성단에서 밝히는 이유도 단군과 관련된 이유에서다.)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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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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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계양동의 다남동 마을은 여자에 비해 남자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인데 다랑리라고도 불리웠다. 역시‘다남’처럼 남자가 많다는 뜻이었다. 이 마을 에서는 옛날부터 남자 아기가 많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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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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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 시조(始祖).비조(鼻祖).중조(中祖) / 始祖란 제일 처음의 先祖로서 첫번째 조상이며 鼻祖란 시조 이전의 先系祖上중 가장 높은 사람을 일컫는다. / 中始祖란 시조 이하 系代에 대 家門을 中興시킨 先祖를 宗中의 公論에 의하여 追尊하여 부르는 先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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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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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계양동의 오류동 마을은 부평 땅의 고려 때 지명인 수주(樹州)의 소재지였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조선 시대에 효자의 마을로 명성이 높았다. 임진왜란 직후 부평 부사를 지낸 윤명선이라는 사람이 자리잡아 파평 윤씨 가문이 대대로 살아 왔는데 일가 모두가 효성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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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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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전주에서 서남쪽으로 가면 모악산이라는 아름다운 산이 있고, 그곳에는 대원사라는 절이 있다. 대원사 위쪽에는 수왕사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아주 먼 옛날 이 암자에서 두 승려가 불도를 닦고 있었다. 한 사람은 주지승, 다른 한 사람은 상좌승이었다. 같은 절에서 함께 수행했지만 성격은 크게 달랐다. 주지승은 말수가 적고 불심이 깊었으며, 상좌승은 활달하고 무슨 일이든 먼저 벌이고 보는 성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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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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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부평 고을에 신관 사또가 부임해 왔다. 관아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을 먹으려 할 때였다. 고을의 방범 경찰 업무를 맡은 병방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와 보고하는 것이었다. “나리, 징맹이 고개에서 도둑 떼가 행인의 짐을 털었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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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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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아주 먼 옛날, 지금의 완주군 소양면 위봉사 아래 어느 마을에 호심이라는 효성 지극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 호심은 남의 집 일을 거들며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처지였지만,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정성만큼은 어느 부자 못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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