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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영 (經營) ◈
◇ 1 ◇
해설   목차 (총 : 3권)     처음◀ 1권 다음
1940
김남천
1
아홉 시에서 아홉 시 반까지, 현저동 사식 차입집 앞까지, 차 한 대만 꼭 보내게 해 달라고, 며칠 전부터 신신 부탁이지만, 바쁜 틈에 혹시 잊어버리지나 않을까 근심되어서, 최무경(崔武卿)이는 사무실을 나오려고 할 때에 다시 한 번 자동차 영업소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마침 말하는 중이었다. 다른 또 하나의 전화 번호를 불러도 통화 중이었다. 수화기를 걸고 의자를 탄 채 바람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고, 캘린더를 무심히 스쳐 보고, 그리고는 다시 수화기를 쥐었으나, 그 때에 전화는 밖으로부터 걸려 와서, 책상 밑에 달린 종이 요란스럽게 울었다.
 
2
"야마도 아파트 사무실이올시다."
 
3
하고, 언제나 하는 버릇대로 먼저 지껄여 모았으나, 이내,
 
4
"네, 저올시다. 제가 최무경이에요. 안녕하신가요? 네,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네? 내일루요?"
 
5
그리고는 다시 대답을 이어 나가지 못하고, 그저 들려 오는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그는 탁상 전화를 틀어 쥐듯이 하고 입을 바싹 들여 댄 뒤,
 
6
"내일루 연기라지만, 그러다가 아주 틀어지는 거나 아닌가요?"
 
7
하고 따지듯이 물어 본다. 그러나 한참 만에,
 
8
"글쎄요. 그렇다면 몰라두요. 무슨 본인의 잘못 같은 걸루 일이 시끄럽게 되는 건 아니겠지요? 네, 그럼 안심하겠읍니다. 내일은 틀림없겠죠? 그럼 그렇게 알구 있겠읍니다. 안녕히 계세요."
 
9
맥없이 전화를 끊고 멍청하니 의자에 기대어 본다.
 
10
클라이맥스를 향해서 한 장면 한 장면 접쳐 올라가던 판에 필름이 뚝 끊어진 때처럼 허파의 공기가 쑥 빠져 버리는 것 같다.
 
11
내일 이맘때까지 스물 네 시간, 눈이 뒤집힐 듯이 바쁘던 며칠이 있은 끝에, 갑자기 찾아온 텅 빈 공간 같은, 예측하지 않았던 시간이다.
 
12
회전 의자여서 분김에 발뿌리로 책상 다리를 차면, 몸은 핑그르르 돌아가 저절로 강 영감을 보게 된다.
 
13
강 영감은 꾸부리고 앉아서 손주딸이 날라 온 벤또에 차를 부어서, 훌훌 소리가 나게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으나, 전화 받는 뭄으로 대강한 사연을 짐작은 하였다는 듯이, 힐끗 젊은 여 사무원의 얼굴을 쳐다보곤,
 
14
"그저 재판소 일이란 게 그렇다니께. 제에길."
 
15
그러더니 먹은 그릇을 덜그럭거리며 치우고 나선,
 
16
"그래, 또 무슨 까닭인구?"
 
17
하고 뻐끔히 주름살이 구긴 얼굴로 무경이를 바라본다.
 
18
"전들 무슨 심판인지 알 수 있세요. 변호사의 말은 예심 판사가 아직 검사의 승낙을 못 받았답니다. 언제는 검사의 승낙을 얻기에 힘이 들구 애가 씨었다더니. 나와야 나오는 게지, 변호사의 말이라구, 제멋대로 주어 섬기는 걸 믿을 수가 있어야죠. 그렇다구 하나하나 따져 볼 수도 없는 일이구……"
 
19
"아무렴. 그런 일이란 건 으레 그런 법인걸. 이편은 바쁘지만 저이들야 무어 바쁠 것 있어. 제 볼일 다 보구 생각 나믄 뒤적거려 보는걸. 그러나 머, 낙심허실 것 없이, 여태 기대렸으니께 그깟 것 하룻쯤야. 또 그래야 만나 뵈시는 데 재미두 더 허구, 흐흐흐……"
 
20
이가 군데군데 빠져서 입김이 샌다. 선량한 늙은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쓸쓸하고도 정다운 생각이 들어서, 무경이는 빙그레 웃음을 입술 위에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웃음은 강 영감과의 오랜 생활에서 거의 습관처럼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속으론 딴 것을 희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21
――어떻게 할까. 집으로 가서 어젯밤의 되풀이를 또 한 번 치를 것인가. 저녁은 외식을 하고, 나오는 분을 맞이다가 아파트에 안내한 뒤, 일러도 열 한 시나 자정이 되어야 집으로 들아오게 될 것이라고, 아침에 나올 때에 일러 두었는데……역시 간단히 무어든간 사 먹고 가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22
무경이는 택시 영업소로 전화를 걸고 사무실을 나와서 구내 식당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강 영감이 있듯이 식당에는 산쨩이라는 어린 소년이 있어서, 그는 이 안에 들어설 때마다 반가운 표정을 짓게 된다. 새로 빨아서 깨끗이 다린 흰 옷을 입은 어린 소년은,
 
23
"어유, 최 선생님이 어쩐 일이유. 저녁 진지를 식당에서 다 잡수시구."
 
24
그의 뒤를 달랑달랑 쫓아오면서 생글거리기 시작한다.
 
25
무경이는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서, 눈이 마주친 손님들께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데, 상 머리에 서서 나막신 끝으로 시멘트 바닥을 울리면서 말끄러미 무경이의 눈동자를 지키고 섰던 산쨩은,
 
26
"사진 구경 가실려구. 어딘지 맞치리까?"
 
27
하고 똥구란 눈을 삼빡거린다.
 
28
"사진 구경은 누가 산쨩인 줄 아는 게군."
 
29
유쾌로운 얼굴로 백을 식탁에다 놓고 웃어 보이니까.
 
30
"오오라, 참, 부민관, 내 참, 음악횐 걸 까빡 잊었네."
 
31
쉴 새 없이 핑글핑글 돌아가는 전기 시계를 펀뜻 쳐다보더니,
 
32
"늦었수. 어서 가세야지. 무어 잡수실려? 라이스모논 카레에하구 하야시만 남았는데. 빨리 될 걸룬 가께우동."
 
33
무경이는 소년의 지껄이는 것이 재미나서,
 
34
"그럼 가께우동 하지."
 
35
마치 음악회나 가려는 것처럼 대답해 보내는 것이다.
 
36
음악회――참말 음악회의 표를 미리 사서 간직해 두었던 것을 지금서야 생각한다. 까빡 잊었었다. 첫날 치였으니까, 벌써 시효도 넘었다.
 
37
백에서 속갈피를 뒤적이니까 한편 구석에서 티켓이 나왔다. 일 년에 잘 해야 한 차례씩이나 얻어 들을 수 있는 교향악단의 밤이었다. 지금쯤은 차이코프스키의 파테티크가 연주되기 시작하였을 얷을. 그는 요즘 며칠 동안 제 정신이 어디로 팔려 버렸던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러나 기뻤다. 어떤 숭고한 일에 정성을 썼다는 만족이 그의 마음을 느긋하게 어루만져 준다. 음악회 티켓 같은 것, 열 장 스무 장이 무효로 되어 버려도 그는 도무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음악회라면 하찮은 학생들의 연주회에도 빠지지 않고 쫓아다니던 것을……
 
38
우동이 왔다. 두어 젓가락으로 빨간 국물만 남는 깜찍한 우동 그릇이 오늘처럼 그의 마음에 합당한 때는 없었다. 그는 따끈한 국물을 마시고 식당을 나왔다. 그 길로 삼층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다. 복도를 돌아서 그는 하나의 도어 앞에서 발을 멈춘다.
 
39
방 앞에 서면 언제나 감격이 새로워서 가슴이 울렁거린다.
 
40
이 년이 되어 온다. 그런데 아직 예심 종결도 나지 않았다. 예심이 종결되기 전에 보석 운동을 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처음은 면회도 할 줄 몰랐다. 변호사를 대고 차츰 이력이 나서, 졸라 보고, 떼를 쓰고, 계교도 꾸며 보고, 갖은 애를 써서 면회도 비교적 잦아졌고, 그리고 두 달 전부터는 보석 운동에 손을 댈 욕심까지 가져 본 것이다. 그러한 정성이 지금 여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41
핸드백에서 열소리르 꺼내 잠갔던 문을 여니까, 쌍끗한 꽃의 향기가 몸에 안기는 것 같아서, 그는 그것을 함뿍이 들이마시면서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문지방에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서편 창으로부터 맞은편 언덕을 넘어가는 낙조가 푸른 문장에 비껴서 은은한 광선이 꽃병이 놓인 나지막한 서가를 비스듬히 비치고 있다. 서가의 두 칸대는 텅 비었으나, 가운데 칸대에는 신간과 새 달의 종합 잡지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그 가운데 경제 연보가 두 책. 하얀 바람벽에는 흰 테두리 속에 들은 수채화가 한 폭. 흰 요를 깔아 놓은 침대는 북쪽 바람벽에 붙어서 누워 있고, 침대 머리맡에 전기 스탠드, 그 밑에 철필과 잉크를 놓은 작은 탁자. 양복장과 취사장이 지금 무경이가 서 있는 옆으로 나란히 설비되어 있으나, 물론 그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훤하게 유리알이 발린 남쪽 창문이 옆으로 하고 간단한 응접 세트와 사무 탁자. 응접 테이블 위에는 화분이 하나.
 
42
무경은 구두를 벗고 신장을 열어서, 거기에 들어가 있는 새 슬리퍼를 꺼내어 신고 방 안으로 들어선다. 이 커다란 건물 안에서 그 중 좋은 방이거나, 제일 큰 방은 아니지만, 조촐하게 독신자가 들 수 있을 남향으로 된 아파트의 한 칸이다. 침대 위에 놓인 옷 보퉁이를 한옆으로 밀어 놓고 그 옆에 털석 걸터앉아서, 그는 벌써 한 일주일째나 하루 두세 번씩은 해 보굿 하는 마음과 눈의 작은 절차를 오늘도 세 번째나 되풀이해 본다.
 
43
――무어 부족한 거나 없는가?――방 안을 쭉 돌려 살피는 것이다. 옷 보퉁이에는 새 잠옷이 있고, 침대는 이만했으면 쇠약한 몸을 편하게 가로눕힐 만큼은 편안하고, 방 안의 장치도 설비도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간소한 대로 정성을 다한 것, 오랫동안 새로운 지식에 굶주렸으니 그 동안의 사회 정세의 변동이나 추세나 짐작할 정도의 신간, 경제를 전문하던 터이니 경제 연보의 새것을 두 권, 그리고 복잡한 세계의 분위기나 두루 살피라고 종합 잡지를 사다 꽂았다. 꽃을 한 묶음 화병에 꽂고, 집에서 정성들여 기르던 꽃화분을 하나 탁자에 준비하고……이만 했으면 우선 그를 맞아들이기에 시급한 준비는 된 것이라고 그는 거듭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한참 동안 입술 가에 만족한 웃음을 그러면서 앉아 있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핸드백을 들고 그 안에서 사나이의 회중 시계를 하나 꺼내었다. 커다란 크롬 껍질의 월쌈이 제깍제깍 소리를 울리며 기다란 쇠줄을 끌면서 나타났다. 손에 쥐어 보면 묵직한 것이 믿음성이 있다.
 
44
오시형(吳時亨)이가 학생 시대부터 차고 다니던 것이다. 사건의 취조가 끝나고 검사국으로 송치가 된 뒤, 검사 구류 기간 열흘이 지나서 드디어 예심으로 회부가 되어 시형이가 영영 영어의 몸이 되어 버렸을 때, 입고 들어갔던 옷가지와 함께 취하(取下)해 가져온 물건 중의 하나였다. 그 때로부터 이 년 가까이, 이 묵직한 회중 시계는 주인의 품을 떠나서, 언제나 무경이의 핸드백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장침과 단침은 대체 몇천 번이나 빤뜩빤뜩한 흰 판을 달리고 돌았는가. 초침이 한 초 한 초씩 시간을 먹어 들어가는 소리를 물끄러미 듣고 앉았다가 그는 시계를 가만히 제 얼굴에다 부비어 보았다. 차갑다. 그러나 가슴 속에선 누르고 참았던 감정이 포근히 끓어 올라서, 이내 그의 볼편의 체온은 크롬 껍질을 따끈하게 데우고야 만다. 가슴을 복받치는 울렁거리는 혈조를 가라 앉히기 위해서 그는 한참이나 낯을 침대에 묻고 가만히 엎드려 봤다.
 
45
어머니에게 저희의 관계를 승인시키기에 얼마나 애가 쓰였는가. 집과 인연을 끊듯이 한 시형의 차입을 대고, 보석 운동을 하느라고 얼마나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고, 뼈가 시그러지도록 일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직업에도 나서 보았다. 재판소, 변호사, 형무소를 통하는 길을 미친 년처럼 쫓아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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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슴 속으로 맑고도 숭고한 쾌감을 포근히 느껴 보면서 침대에서 낯을 들고 시계를 백에 챙겨 넣은 뒤 방을 나왔다. 내일, 내일 저녁이며, 그러한 정성이 하나의 보답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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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은 벌써 땅거미가 꺼멓게 기어들고 있었다. 아직도 채 식지 않은 공기가 바람에 불려서 훈훈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땀발이 잡히려던 피부엔 넓은 언덕에서 흔들리는 저녁 바람은 선뜩하였다. 북아현정 쪽의 푸른 주택지를 잠시 바라보고 섰었으나, 오랫동안의 습관으로 거리 위에 나서면 그는 늘 바쁜 사람처럼 종종걸음으로 서두른다. 감영 앞, 종로, 안국동, 이렇게 세 군데서나 차를 바꾸어 타는 것도, 어쩐지 분주한 듯이 서둘러 대고 싶은 마음에 합당한 것 같아서, 오늘 저녁의 그에게는 다시 없는 가벼운 흥분으로 즐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화동 골목까지 치마폭에서 휘파람 소리가 날 지경으로 활개를 치며 걸어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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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보고도 같이 가시자고 말해 보리라. 처음엔 믿음직 못하다고 한사코 나무랐으나, 그런 것 때문에 이 년 만에 돌아오는 그를 대견하게 맞아 주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인저 누가 뭐래도 장래의 사위가 아닌가. 예식만 갖추면 아들 맞잡이, 단 하나의 어머니의 사위가 아닌가. 어머니도 요즘엔 은근히 기다리고 계셨다. 같이 가시자면 기뻐하실 것이다. 나오는 당자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을 게구……
 
49
저희 집 대문을 들어설 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50
"엄마 있수?"
 
51
하고 응석을 담아서 불러 본다. 꽃화분이 쭈루니 얹히어진 높직이 층계가 진 선반 옆에 선 채 무경은 어머니 방을 향하여 불러 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식모 방에서, 이 집에 들어온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되는 식모가 툇마루로 뛰쳐 나오며,
 
52
"아이구, 아가씨가 오셨네."
 
53
하고, 얼굴에 크림이라도 바르고 있었는지, 당황히 옷고춤을 매만지고 섰다.
 
54
"마님은 손님이 오셔서 같이 나가셨는데, 인제 늦지 않게 돋 다녀오신다구서……그런데 아가씬 웬일이세요?"
 
55
"내일 저녁으루 연기야."
 
56
하고 대답해 주곤 무경은 곧바로 제 방문을 열었다.
 
57
"대야에 물 좀 떠 놔 ! 그리구 밥 있어?"
 
58
식모는 댓돌에서 해진 고무신을 발뿌리에 꿰면서 뜰로 내려선다.
 
59
"네. 그래두 찬이 씨언찮으신데……아가씬 왜, 저녁, 밖에서 잡수신다구 허시군……"
 
60
수도에서 물을 받아서 놋대야를 대청으로 나르고 비루곽과 수건을 갖다 놓고는 부엌으로 들어간다.
 
61
무경은 낯을 씻었다.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가서 볼편에 크림을 바르고 있는데,
 
62
"진지상 이리루 디릴까요?"
 
63
하고 식모가 문지방 밖에서 엿보듯 한다. 안방 어머니 방에서 함께 모여서 먹는 것을 알고 있는 식모는, 밥은 역시 그 속에서 먹는 것을 정측으로 생각하고라도 있는 것 같다.
 
64
"그래. 내 인저 건너갈께. 어머니 방으루 딜여다 놔."
 
65
"찬은 머, 굴비허구 장아찌밖엔 없는데 어떻거실까……"
 
66
하고 걱정하는 것을,
 
67
"그게문 되지, 찬물에 풀어서 한술 들면 될걸 뭐."
 
68
분첩으로 볼편을 두어 번 뚜들기고 무경은 어머니 방으로 건너가서 상 앞에 주저앉았다. 밥술을 막 들려고 하는데, 길마리 머릿장 밑에 보지 않던 부채가 한 자루 있었다. 무경은 그것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69
"아이, 손님이 부채를 노시구 가셨네."
 
70
무경의 눈길을 따라가 본 식모는 대청 마루에 엎드리듯이 턱을 받치고 주인 아가씨의 진지 드는 모양을 바라보려다가, 눈에 띈 부채에 대해서 그러한 설명을 들려 주었다. 그러나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부채를 들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다시 뜰로 나가 버렸다.
 
71
무경은 술을 든 채 밥그릇으로 손을 옮기진 못하였다. 그는 술을 놓고 일어서서, 지금 식모가 챙겨 놓고 나간 부채를 가져 다 펼쳐 보았다. 틀림없는 사나이의 소유물이었다. 곱게 색채를 써서 그린 산수화가 있고, 위 하곡대인청상( 爲河谷大仁淸賞)이라고 쓴 밑에 청산(靑山)이란 화가의 낙관이 찍혀 있다. 이것으로 보아, 청산이란 화가가 그림을 그려서 하곡이란 분에게 선물로 보낸 부채라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부채의 임자는 하곡이란 아호를 가진 분이다. 그러고 어머니는 이 하곡이란 분과 함께 외출하신 것이다――그런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무경이는 첫째 하곡이란 분을 알지 못하였다.
 
72
"하곡? 하곡."
 
73
하고 입 안으로 두어 번 뇌어 봤으나 그러한 아호와 함께 나타나는 환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74
"낯도 잘 알고, 이름도 잘 아는 분이면서도, 내가 그이의 호를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지."
 
75
그렇게 생각하면서 부채를 다시 책상 위에 놓은 뒤에 밥상 앞으로 돌아왔고,
 
76
"많지두 않은 찬에 어란을 잊었었네."
 
77
하고 변명하듯 하면서, 가지고 들어온 식모의 손에서 접시도 그대로 묵묵히 받아 놓았으나, 어쩌지 마음은 말끔히 가시지 않았다.
 
78
어머니와 같이 나간 손님이 어떻게 생긴 분인가를 식모에게 물어 보려다가 그것도 그만두었다. 그는 잠시 멍청하니 상 앞에 앉아 있었으나, 식모에게 눈치 채일까 저어하며, 이내 밥통을 열고 물대접에 밥을 말았다. 그리고는,
 
79
"나 혼자 먹을께 나가 있어."
 
80
하고 식모도 밖으로 쫓아 버렸다.
 
81
마른 반찬에 얼려서 두어 술 떠 넣고 그는 다시 방 안을 살펴보지 않을 순 없었다. 장농과 의걸이, 문갑, 책상, 책상 위의 성경책들, 모두 다 놓았던 자리에 놓여 있다. 그러나 책상 밑을 들여다보았을 때 무경이는 다소 마음이 띠끔했다. 치레 거리로 놓아 두던 놋 재떨이에 피우다 버린 담배 꽁초가 하나 부비어 꽂혀 있기 때문이다. 손님은 담배를 피우는 분이었다는 것을 그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고 그것은 결코 대수롭지 않은 발견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아는 분으로서 담배를 피우는 이는 무경의 기억 속에는 들어가 앉아 있지 않았다. 이 십여 년 동안 예수교 풍속에 젖어 온 분이고, 그 속에서 청상 과부를 지켜 온 어머니로서 끽연의 습관을 가진 사나이 손님을 가지고 있었을 리 만무하다.
 
82
"다 먹었으니께 상 치어."
 
83
하고 외치듯 하고는 무경은 제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84
부채, 하곡, 담배――이런 것이 함께 엉켜 돌면서 종시 그의 머리를 놓아 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의심은 다시금 얼마 전에 경험한 한 가지 사건을 그의 머리 속에 불러 내는 것이었다.
 
85
달포 전의 일이었다. 화창한 초여름의 공일날, 벌써 몇 해째의 습관에 따라 무경이는 오랜만에 만나는 휴일을 집에서 책을 읽었고, 어머니만 예배당에 가신다고 집을 나갔었다. 오정이 좀 넘으면 으레 예배당에서 돌아오셨으므로, 그는 돌아오시는 어머니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잠시 본정이라도 다녀오려고 그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86
그러나 어머니는 어쩐 셈이신지 한 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강설이 길어져서 예배 시간이 오래 되는 것이라고 얼마를 더 기다렸으나 두 시가 되어도 종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무경이는 혼자서 점심을 먹고 집을 나왔다. 안국동 네 거리를 거진 나왔는데, 예배당 전도 부인을 길에서 만났다.
 
87
"오래간만이올시다."
 
88
하고, 이 근년에 신통치 않아진 '타락된 교인'은, 목사도 전도 부인을 만나면 다소 면구스러워져서 그다지 기다란 인사를 늘어놓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면 도회인답게 경우가 빠른 목사나 전도 부인도 이내 무경의 태도를 눈치 채고, 그 이상의 긴 수작을 늘어놓으려고 하지 않았었으나, 오늘만큼은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89
"어머님이 예배당엘 안 오셨게 무슨, 몸이래두 편치 않으신가 해서, 난 있다 저녁녘에 잠시 들려 볼려던 참인데……"
 
90
하고 무경이를 붙들어 세우려 들었다.
 
91
"아뇨, 별일 없으신데, 그리구 어머닌 예배당에 가신다구 오전에 나가셔서 여태 안 들어오셨는데요."
 
92
그러나 그 이상 이야기를 연장시키고 싶지 않아서,
 
93
"아마 도중에서 누굴 만나셔서 예배당에두 못 들리시구 어데 급한 일이 있어 그리루 가신 게구먼요."
 
94
하고 간단히 처치해 버렸다. 그러니까 전도 부인도,
 
95
"글쎄 그러신 게구먼."
 
96
하고 가 버렸다.
 
97
초여름의 태양이 쨍쨍하고 유쾌해서 전차도 안 타고 본정까지 걸어가면서도 무경이는 그것에 관해서 별로 깊은 생각은 품어 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볼일을 보고 그는 두어 시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그 때에도 돌아와 있지 않았다. 참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해서 궁금했으나, 어머니는 해가 질 녘에야 낯이 좀 발그레하니 끄슨 것처럼 되어서 총총한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98
"가정 심방에 같이 따라 나섰다가 진력이 났다."
 
99
하고 묻기도 전에 어머니는 변명한다. 무경이는 깜짝 놀라 어머니의 낯을 건너다보지 않을 순 없었다. 가정 심방? 예배당에도 안 가셨던 분이 전도 부인과 목사와 함께 가정 심방이라니 어떻게 하시는 말씀일까? 어머니는 그 때 옷을 벗어서 옷장 안에 들여 걸고 있었으므로 다행히 딸의 변해진 눈초리와 놀란 표정을 눈치 채진 못하였으나, 무경이는 한참 동안 마루 위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진 조각처럼 서 있었다. 다시 어머니가 마루로 나오면서,
 
100
"난 김 장로 댁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너희들이나 어서 먹어라. 그러구 얘, 나 물 좀 다우."
 
101
하고 서둘러 댈 때엔 무경이는 낯을 돌리고 딴 쪽을 향하여 일부러 어머니의 얼굴을 피하였다. 어머니의 하는 말이 지어 낸 공연한 거짓인 걸 아는 바엔, 당황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려고 벙뗑하니 서둘러 대는 어머니의 표정을 정면으로 추궁하기가 겸연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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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어디를 갔었기에 이렇게 나를 속이시는 것일까――따져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일 것 같으면서도, 홀어머니의 자식으로서 믿고, 의지하고, 응석을 부려 오던 어머니인만큼, 자기를 속였다는 그것 한 가지 사실만으로 그는 한없이 쓸쓸하고 슬퍼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뒤엔 그것을 깊이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었지만, 그 때로부터 달포나 지내었을까 한 지금, 추측할 수 없는 사나이 손님이 어머니와 같이 외출을 하였다는 사실에 부딪치면, 민첩한 처녀의 예감은 벌써 어떤 길하지 못한 사태에 대하여 생각의 촉수를 뻗어 보게 되는 것이다.
 
103
무경이는 제 방에 와서도 일손이 잡히질 않아서 멍청하니 책상머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젯밤처럼, 세상에 나올 오시형이를 생각하면서 즐거운 환상을 향락하고 있을 마음의 여유도 생겨나지 않는다. 상상력이 뻗을 수 있는 턱까지 공상을 거듭하면서 사정의 이면으로 파고들려 애써 보나, 엉크러진 생각이 붙드는 결론은 언제나 그의 마음을 쓸쓸한 구렁텅이로 떨어뜨리고 만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다투기나 하듯이 머리를 흔들었다――설마 어머니가……그럴 리는 없다. 나 하나를 믿고 청춘을 짓밟아 버린 어머니가 아닌가. 모든 잡념을 털어 버리고 유혹의 손을 물리쳐 버리기 위해서, 젊은 감정과 정서를 송두리째 뜯어서 파묻어 버리기 위해서 살림에 군색지는 않은 처지면서 스스로 원하여 병자를 다루는 직업 가운데 자기의 위치를 선택하였던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스물 다섯의, 서른의, 서른 다섯의, 어려운 고비를 성스럽게 넘기고 사십의 고개를 이미 넘어 버린 어머니가 설마 그럴 리야 있는가――
 
104
제 생각을 채찍질하고 제 마음에 모욕을 주면서 어머니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으나, 열 한 시가 가까워서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가 대문 밖에 들릴 때엔, 그는 기계적으로 전기 스탠드의 줄을 낚아서 불을 끄고 캄캄한 방 속에 숨어서 어머니의 얼굴과 마주 대하기를 스스로 피하여 버렸다. 식모가 어머니에게, 그가 일찍이 돌아오게 된 사연을 아뢰는 것을 귓결에 들으면서도, 그는 귀를 틀어막듯이 하고 방바닥에 엎드려서 숨을 죽이고 어깻죽지를 가느다랗게 떨고 있었다.
【원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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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1940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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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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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5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