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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굉장 씨(宏壯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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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12월
이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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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 씨(宏壯氏)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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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젓한 성명을 가졌건만 누가 어째서 지은지도 모르는 별명이 본명보다도 더 유명한 사람이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한둘씩은 으레껏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별명이란 대개 흉허물없는 사이거나 희영수를 할 때나 씌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굉장 씨는 특별한 관계나 필요가 없는 사람은 그의 본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정도다. 상·하동 삼백여 호에 굉장으로 통할 뿐만 아니라 삼십리나 떨어져 있는 신읍에서도 구읍(舊邑) 박굉장이라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군수고 서장이고 세무서며 조합, 우편국, 소위 관공서 직원 쳐놓고는 구읍 박굉장 댁에를 안 와본 사람이 없으니까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마는 읍내의 웬만한 상점 치부책에도 그는 박굉장으로 적혀 있다. 개중에는 굉장을 본명으로나 아호로 알고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만큼 그의 별명은 보편화해버렸다. 여기에는 그 자신이 굉장이란 별명을 시인한 때문도 있을 것이다. 그 자신은 차치하고 가족들까지도 “굉장 댁, 굉장 댁”하고 자기 집을 부르는 일까지도 있는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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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 씨의 본명이 무엇인가는 알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다만 그의 별명이 어떻게 해서 생겼던가만 알면 족할 것이다. 대개는 그가 말끝마다 ‘굉장’소리를 그야말로 굉장히 해서 굉장 댁이 된 모양으로 알지만(그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그의 집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말버릇도 말버릇이지만 그는 본래 굉장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가장 집물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몸에 지니는 단장이며 골통대, 심지어 주머니칼까지도 굉장히 부대한 것을 즐긴다. 쇠푼이나 있던 시절의 일이지만 해변으로 통하는 자동차 선로 허가를 맡아가지고 이 구읍으로 낙향을 하더니 멀쩡한 집을 헐어젖히고 가역을 시작했다. 들보는 강원도로, 주추는 서울로, 기와는 수원으로, 미장이는 전라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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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법석을 댔다. 노인 부모에 친정살이를 하는 딸 모자밖에 없는 단출한 가솔에 삼십여 칸의 그야말로 굉장한 집이다. 사랑채는 부연도 달고 유리분합을 들이고 등나무도 올리고 연못을 파고 석산을 모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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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덩그라니 완성되어갈 무렵 ― 어떤 날 굉장 씨는 서울 가는 버스 속에서 멀리 들여다보이는 자기 집을 옆 사람한테 가리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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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뉘 댁인지 참 굉장하게 짓는군. 누군지 거 굉장한 사람인 모양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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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생긴 ‘굉장’이다. 애들처럼 뻐기고 싶어하는 것이 그의 천성이다. 풍도 치나 희떱기도 하다. 헙헙한 데도 있어 어떤 편이냐면 호인이다. 쥐가 오줌독에 빠져죽은 조그만 사건도 그는 굉장 소리를 늘어놓지 않고는 설명을 못한다. 풍치는 사람이 대개 그렇듯이 말을 해도 몹시 부퍼서 정말 큰 사건을 설명할 때는 말주변은 없는데다가 성미는 급해놓아서 거품만 부걱거린다. 그러고는 그저 굉장 소리만 연성 늘어놓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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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굉장 씨가 정말 굉장한 사건을 맨 처음으로 알았으니 동네가 뒤집힐 밖에 없다. 일본 천황이 항복을 했고, 그보다 더 굉장한 사건은 조선이 독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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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기실은 관공청의 장 축들만을 불러다 한잔 내기로 한 날이다. 전 같지 않아 지금은 일년 계량도 넉넉지 못한 자작농으로 전락한 그고 보니 제한 몸 추스르기에도 가쁠 주제에 관청 장 축들이 무슨 아랑곳이랴만 뻐기는 맛, 우쭐한 맛, 펑펑대는 맛에만 사는 굉장 씨한테서 그런 기쁨조차 뺏는다는 것은 좀 가혹할지도 모른다. 궁해지면 궁해질수록에 그의 허세는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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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잣집은 광 바닥만 쓸어두 삼 년 양식은 된다더니만 굉장 댁이야 말루 아직두 할 짓은 다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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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러기 때문에만 빚을 내가며 철 맞아 턱도 냈고 기부를 해도 졸하지 않고 손도 크다. 세무관리를 넌지시 불러다 술잔을 내는 것도 세금이 떨어질까 겁냄에서요, 한번은 면에까지 가서 면장을 붙들고 남들은 다 세금이 십 곱절이나 올랐는데 나만 덜 올렸다고 힐난을 한 것도 그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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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관청 장 축들과 교제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큰 기쁨이다. 그날도 굉장 씨는 신이 났다. 양복을 입었다, 모시옷을 꺼냈다 수선을 피우는가하면 깻묵내 맡고 몰려드는 송사리처럼 도마 소리, 풍기는 기름내에 덤벼드는 조무래기들을 호령호령하며 내쫓기도 하고 고기점이 크니 작으니 저냐 빛깔이 헤식으니 치자를 더 풀라는 둥 법석을 하는 것도 그의 한 기쁨이었고, 그런 계제가 되어 받아둔 고급 관리들의 명함으로 만든 병풍을 철도 안 가리고 내다 치고 다섯 살 난 외손자를 잡고 곤니찌와 연습을 시킨다, 가미다나에 풀꽃을 꺾어다 꽂는다, 이런 것이 모두가 기쁨이다. 풍을 치고 호들갑을 떨고 활갯짓을 할 수 있는 순간이 그에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된 순간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 구읍에서 공공사업을 많이 한 사람도 우리 굉장 씨지만 일정 때 민간 앞잡이로 가장 많이 나선 것도 굉장 씨다. 약에 감초 들듯 두셋이 모이는 일에 그가 빠진 적도 없거니와 그가 들어서 안 된 일도 그 결정권이 관변에 있을 때뿐이다. 이런 그를 혹은 욕하고 혹은 칭송하나 둘 다 옳은 비판은 아니다. 그의 천성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관청보다도 솔선해서 약품을 구입한다, 소독을 독려한다, 응치 않으면 목덜미를 잡아서 주재소에다 내민 것도 그였고 소방구 설치니 공동우물, 관공리의 송영 연회 발기가 그것이요, 치수, 치도, 색의 장려, 도박 근절, 공출 장려 ― 이런 데 앞잡이로 나선 것도 그의 명함을 본다면, 다 용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명함이란 너비가 두 치에 길이 세 치나 되는 카드다. 직함으로는 전 면 협의원, 전 학문위원, 전 칠성 자동차부 주임, 전 진흥회장, 현직으로 칠성 농장주, 소방대 고문 ― 이렇듯 굉장한 것이다. 동네서‘여벌 군수’라는 별명을 듣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정말 자기가 원수놈의 국어만 했던들 군수 하나는 떼놓은 당상이라고 통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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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잔치란 것도 따지고 보면 허세를 부리고 싶어하는 그의 천성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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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다른 장 축한테는 그 굉장한 명함에, 순 한문으로 청장을 보내고 주재소 부장한테는 경의를 표하느라고 몸소 내려갔다가 다짜고짜로 빠가야로를 퍼붓고, 두 번째 설명에는 시퍼런 칼을 빼들고 나대는 통에 질겁을 해서 그저 잘못했노라 싹싹 빌면서 뒷걸음질을 쳐 뛰어나오고 말았다 ― 나와서야 그는 비로소 알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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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 씨는 봉화를 들듯 주먹을 번쩍 치켜들고 이 굉장한 뉴스를 거리로 외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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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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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씨의 방송이 전해지자 이번에는 두 주먹을 번쩍 들고 길길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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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독립 만세! 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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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씨의 지시대로 자치회가 조직되었다. 우리 굉장 씨가 솔선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위원장에 굉장 씨가 추대되었다. 위원장에 추대된 그 순간, 굉장 씨는 일생 처음으로 절대한 행복을 느꼈다. 장이 되어보기는 이것이 일생 처음이었다. 국어가 맥을 못 쓰자 당장에 장자가 자기 머리 위에 덩그머니 올라앉은 것이라 했다. 그는 황홀했다. 상기가 되었다. 그래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막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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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폭? 박상회 가서 들여오지! 자, 누가 우리집에 가서 돈 가져오시오! 축하연? 해야지. 집에 사람 보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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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공청의 가미다나를 때려부순 것도 굉장 씨였고 박상회, 정상회 배급 술을 져 내온 것도 굉장 씨다. 자정이 넘도록 징, 꽹과리가 버꾸놀음을 친다. 마시고 뛰고 만세 소리가 충천한다. 굉장 씨가 나타나는 곳에 군중이 있었고 굉장 씨의 진로에는 검부적 하나 거리끼는 것이 없었다. 그의 의사는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는 마치 이 많은 군중들이 자기를 위해서만 이렇게 환희하고 뛰고 고함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모두가 자기를 우러러 보는 것만 같다. 그는 완전히 상기가 되어 마시고, 뛰고 마시며 술잔을 든 채 만세를 부르고 부르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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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있어 그한테 일본 가 계신 이왕 전하가 환국한다는 소문을 귀띔해주었다. 그는 척추가 찌르르하는 강렬한 자극을 받았다. ‘이왕 전하가 환국을 하신다. 그렇지, 그래야지!’그는 또 만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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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전하 만세! 만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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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의사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완전히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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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다. 누구 입에선가 전쟁은 끝났으나 조선이 독립이 된 것은 아니다. 만세를 부른 사람은 읍내서도 모조리 잡아죽인다 ― 이런 소문이 돌았다. 굉장 씨는 정신이 번쩍 났다. 그런 것들은 모르고 군중은 점점 격해 갔다. 머리가 서먹해진다. 낮에 본 부장놈의 시퍼런 칼날이 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오한이 쪽 끼치며 귀가 찡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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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저쪽에서 ‘와아’ 소리가 태풍처럼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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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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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 씨는 즉각적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벌써 몸을 솟구어 군중을 뚫고 골목으로 새어빠졌다. 군중 소리는 점점 커진다. 커갈뿐더러 자기 목덜미를 쫓아온다. 그는 동구를 빠져서 내달렸다. 몇 번인가 넘어졌다. 개천에도 빠졌다. 밭골을 지나서 납작바위의 석굴까지에 그는 단 한 번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쉬지도 않았다. 사람 네댓이 웅숭거리고 비를 피할 수 있는 조그만 석굴이었다. 이 석굴이 그가 B29가 오기 시작할 때부터 눈여겨두었던 최후의 피난처였다. 돌 틈에 쌀가루도 한 봉지 간직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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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초조와 공포 속에서 그는 여름 밤을 새웠다. 깨진 무릎이 저리고 손바닥에서는 아직도 피가 안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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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녘이다. 그는 누웠다가 소스라쳐 일어났다. 그 사품에 머리를 들이받아 눈물이 핑 돈다. 분명히 사람 발소리다. 말소리도 도란도란 들린다. 그는 굴에서 나와서 다시 솔밭으로 내달았다. 골짝을 질러서 단숨에 봉우리로 내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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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 씨가 돌아온 것은 그날 밤이었다. ‘와아’소리는 순사부장을 때려잡자던 소리였고, 석굴로 그를 찾아왔던 것은 그의 아내가 혹여 하는 생각이 나서 사람을 데리고 왔었더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궁금해서 읍에 정세를 보러 갔다 왔노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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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굉장히는 멀더군. 삼십리가 백리는 되는 것 같던데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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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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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굉장 씨 부처는 이슥토록 도란도란 구수회를 했다. 그 결과 부처는 일찍이 트럭을 잡아타고 서울로 갔다. 부인은 그날 돌아왔으나 굉장 씨는 하루를 묵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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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무슨 공론을 했으며 서울 가서 무슨 공작을 하고 왔는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굉장 씨의 모든 언행이 하룻밤 사이에 홱 변한 것만은 사실이다. 첫째 남의 눈에 뜨이는 것은 그날 밤으로 싹 조선옷으로 변한 것과 양말 대신에 손버선, 구두 대신에 반화, 그 굉장히 비싼 박래품이라고 자랑자랑하던 호박 물부리를 걷어치우고 장죽을 꺼내 문 것과 걸음새가 달라진 것, 앉아도 책상다리에 버선바닥을 쓰윽쓰윽 문질러 보는 등, 자기 집을 꼭 댁이라 부르고 그렇지 않던 사이에도 말씨가 나빠진 것, 사당 출입에도 꼭 범절을 지키는 것 등등이다. 어디다 쓰는지 과목밭을 삼만원에 판 지 닷새 만에 또 텃밭을 내놓고 뒤미처 그야말로 옥답인 향교말 여덟 마지기도 내놓았다. 하루돌이로 서울서 노장패들이 두셋씩 와서는 수군대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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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밤을 새우며 주고받은 회화의 한 토막을 여기에 인용키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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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세가 그르긴 아직 전하께서도 준비가 계셔야 할 것 아니겠소. 그러니 우리는 만반 준비만 다하고 있습시다. 요새들 제가끔 다 영웅이 되어 떠들지만 전하께서 환국하신다면 어딜 감히, 다 역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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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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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돈이라니까. 운동자금이 넉넉해야지, 막걸리 잔으로야 대사가 성사되겠소. 거 원매자가 아직 안 나서오? 그것이나 서두르고 용기를 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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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굉장 씨의 심중에 의혹이 일기 시작한 때다. 그래서 그는 삼만원 부담금 중에서 이만원만을 출자하고 만원은 아직 몸에 지니고 있을 즈음이다. 그는 다음날 궐자들의 덜미를 짚어 서울로 올라가 탐문을 해보았다. 결과는 너무도 허무맹랑했다. 이만원도 오늘의 그에게는 거의 생명선이다. 그 대금이 순연히 그자들의 주색잡기의 자금이 되었다는 것, 이왕 전하의 환국이란 해가 달이 될 수 없듯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 동경으로 밀사는커녕, 선언문 한 장 박지 않고 송두리째 널름한 것이 판명되자, 그는 졸도를 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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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굉장 씨를 위해서 다행한 일은 그가 졸도를 하기 전에 새로운 광맥을 잡은 것이다.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가 불원간 환국을 한다는 것이며, 또 한 가지 다행한 일은 어렸을 적의 글방 동무를 우연히 만나고 보니 그의 가친이 요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은 그것만은 엄연한 사실이요, 신문에서도 떠들고 거리에 붙은 벽신문에서도 그 요인이 들어 있지 않은가. 여기에 또 한 가지 다행한 일이 있으니, 그것은 그의 부인의 친정 쪽으로도 요인이 한 분 있는 것이 판명된 것이다. 다만 마음에 거리끼는 것은 삼 년 전 그 부인의 생각이 달라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때 굉장 씨는 거의 빈손으로 보내다시피 했었다. 돈이 아까워서는 아니었다. 혹여 그런 사람네와 연락 있는 것이 발각되면 모두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말곡식은 갔던 터라 눈치를 보러 갔던 부인은 희색이 만연해서 돌아왔다. 뜻밖에 후대를 받고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길을 튼 후로는 곡식과 돈냥이 좋이 날라졌다. 전주 이씨 패의 협잡에 떨어진 것을 깨달은 그날부터 굉장 씨의 가풍은 다시 한번 되뒤집혔다. 그는 버선도 신지 않았고 장죽도 물지 않았다. 걸음새도 말씨도 제대로 돌아갔다. 하긴 삼례 아버지한테 반말지거리를 하다가 귀통을 한 대 보기 좋게 얻어 맞은 때문도 있었지만 그의 심정이 변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그 대신 전력을 서울에 다 썼다. 동네의 자치회는 치안대로 명칭이 변해지면서 굉장 씨는 평위원으로 물러앉고 신문지국을 하는 이순필이란 청년이 대신 들어섰다. 집에 있으면 그는 뭣이고 역시 치안대 일로 동분서주했다. 매일처럼 사오 처에서 좀도적이 불일 듯 하고 강도사건도 접종을 했다. 굉장 씨도 젊은 패들과 같이 몽둥이를 들고는 밤을 새워가며 순행을 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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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오 일 만에 그는 서울로 글방 친구를 찾아갔다. 미군이 진주한 지 사흘만이다. 그는 미군을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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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는 커단 자들이 체신머리도 없이 뭐 조따위 차를 타고 다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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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말을 되뇌이며 친구를 찾아가니 이사를 했다. 다시 그 집을 찾았더니 그것은 집이 아니라 그대로 대궐이었다. 사람도 득시글득시글한다. 한 판은 바둑을 두고 한쪽에서는 정치담이 벌어졌다. 다 쓰러져가는 일곱 칸 초가에서 콧물만 홀짝홀짝 들이마시고 있던 작자가 불과 며칠내로 금시 발복을 했다. 물론 그 집에는 그의 돈도 만여원 들어갔으리라. 그러나 집과 모인 위인들을 보니 혀가 말린다. 굉장 씨는 어물어물하다가는 또 헛물만 켤까 싶어 친구를 바짝 추켜 꿰차고 나와서 한잔 톡톡히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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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말 못해도 쓰일 세상이 왔으니 나도 한몫 보게 좀 해주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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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이를 말인가. 우리도 한판 차려봐야지. 아버지도 자네 말을 하면 잘 아실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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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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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구말구, 전에두 자넬 여간 칭찬하신 줄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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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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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 씨는 속이 다 후련했다. 몇 해 묵은 구체가 단번에 홱 뚫린 것 같다. 그는 그날도 얼큰해서 집으로 내려오며 접때 본 초가와 오늘 밤 기와집과의 구조와 분위기를 이웃 사람한테 이야기할 구변을 이리저리 궁리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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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두들 굉장하니 이번엔 굉장 소리 쑥 빼구서 얘길 한번 해봐야지. 허지만 집안은 사실로 굉장하거든, 굉장한 게야, 굉장하단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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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서울은 인민공화국이 발표되어 장안은 마치 기름가마처럼 뒤끓고 있었다. 옳다는 패도 옳지 않다는 패도 있었다. 굉장 씨는 옳지 않다는 판단을 내리었다. ‘인공’이 가진바 정치적 성격이 나쁜 것보다도 그의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장을 대고 있는 두 요인의 이름이 둘 다 그 각료 명부에서 제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친구는 지금의‘인공’은 다 헛공론이라 했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김칫국만 자꾸 마시고 앉은 격이라 했다. 굉장 씨도 그 말이 옳다 했다. 요인들이 들어와서 붙일 놈은 붙이고 뗄 놈은 떼고 대수술을 하리라 했다. 아니 수술 여부보다도 중경에는 임시정부가 벌써 조직되어 있지 않으냐. 그 정부가 그대로 들어와서 정치할 것인데 어쩌구 저쩌구가 다 무슨 객쩍은 소리들이냐. 굉장 씨는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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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다리를 긁어도 분수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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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 씨는 그렇게 되기를 빌 뿐 아니라 그것을 믿었다. 믿었기 때문에 그는 텃밭과 향교말 여덟 마지기 판 돈도 코 아래 진상을 했고, 글방 친구의 집에서 사귄 네다섯이 놀러 왔을 때는 그야말로 굉장한 잔치도 베풀었다. 코를 골도록 먹여 보내는 데만 그치지 않고 밤에, 감에, 고기에, 쌀에 그야말로 공진회 보따리처럼 꾸려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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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장래 군수감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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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동무들을 보내놓고 이렇게 흡족해했다. 그는 행복이었다. 인제는 완전히 빈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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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용돈도 아쉬웠으나 그는 ‘뭘 저금한 폭인데’했다. 그러나 세계 정세는 고사하고 국내 정세에도 밝지 못한 그는 그 저금 돈이 밑 없는 것임을 깨닫지를 못했다. 하늘에서 별 떨어지기를 기다리듯 초조히 바라던 임정 요인들이 환국을 하던 날은 그는 눈이 다 침침했었다. 박박 긁어가지고 간 돈이 떨어져서 사흘 만에 집으로 내려왔지만 그는 요인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자기가 지불한 대가보다는 황홀한 것이라 했다. 그는 그 앞에 절을 했다. 아들의 설명을 듣고 그 요인은 뭐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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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알구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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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인은 그에게 자녀가 몇인가 물었다. 그동안 뭣을 했느냐고도 물었다. 굉장 씨는 말소리가 떨리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일어서면서 살짝이 요인을 훔쳐보았다. 윗눈썹이 수북한 것만이 그의 인상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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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인은 그와 이야기하는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굉장 씨의 눈에는 그 버릇이 퍽 좋게 보였다. 그는 집에 와서도 요인처럼 손가락을 움직여본다. 틈만 있으면 그때 요인이 하던 표정도 흉내 내보며 엄지손가락을 까딱여본다. 그것이 어느새 버릇이 되어버렸다. 굉장 씨에게 손가락 움직이는 버릇이 생겼을 무렵에는 국내 정세는 또 달라졌었다. 이 산골 구읍에서도 인민위원회가 조직이 되어 점점 실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요인들에게 대한 기대도 엷어갔고, 무엇보다도 딱한 일은 우리 굉장 씨는 서울 출입에 필요한 용전까지도 궁하도록 전락하고 만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인제는 서울 출입은 할 필요조차 없이쯤 되고 말았다. 가야 찾을 사람도 없었고 찾아야 반겨줄 사람도 없었다. 주머니 속이 빈 줄안 후부터는 슬쩍슬쩍 따돌린다. 그는 가끔 너비아니 안주와 생선 굽는 냄새가 풍기는 음식점 진열장을 넋없이 바라보고 있는 너무나 초라한 자기를 발견할 때마다 울고 싶었다. 보리도 뿌려야 할 때건만 텃밭조차 이미 자기 것이 아니다. 그 기름이 잘잘 흐르던 여덟 마지기도 인제는 경작권조차 없었다. 굶는 것이 슬프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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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쩐 일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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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어깨를 치는 사람이 있어 돌아다보니 인민위원회 젊은 친구다. 굉장씨는 눈물이 나게 반갑고 고마웠다. 무인지경에서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아니 그에게 있어서 지금의 서울은 완전히 무인지경이었다. 트럭값도 만만치 않아 글방 친구한테 돈백원만 말을 했다가 거절을 당한 오늘의 굉장 씨였다. 그는 그 청년을 얼싸안고 울고 싶도록 반가웠다. 그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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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난 누구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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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나려 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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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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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같이 나려 가시지요. 오늘 서울서 회가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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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커다란 인쇄물 뭉치를 쳐들어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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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요기나 하구 가시지요. 저두 지금 먹을 것을 눈여겨보고 다니는 길입니다. 들어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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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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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은 향응에 그는 거나하게 취했다. 술에도 취했지만 젊은 청년의 구수한 이야기에도 취했다. 물은 높은 곳에서 흘러내린다 한다. 인간의 이상은 물과 같다. 이 흘러내리는 물을 막을 도리는 없다. 임시 방편으로 막을 수는 있다. 그러나 영구히 막을 방법은 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옳은 말이라 했다. 청년의 이야기는 담북장처럼 구수하다. 그런데 이 내르지르는 물줄기를 막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도 그 물줄기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환심을 사기 위해서다. 그네들은 되레 약은 사람들이다. 영리한 패들이다. 어리석은 것은 그 사람들의 말을 곧이듣고 덩달아 춤을 추는 사람들이다.
 
72
굉장 씨는 그날 밤 열시가 지나서야 집에 돌아왔다. 트럭이 고장이 나서 길에서 한 시간, 차에서 내려서 또 주막집에 참을 들였던 것이다. 전후 다섯 시간이나 젊은 사람과 이야기를 한 셈이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재미있게 했는지는 몰라도 굉장 씨는 집에 들이닥치는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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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 굉장한 사람이더군그랴! 어떻게 얘길 굉장히 잘하는지, 아주 청산유수란 말야. 청산유수야. 나이 젊다구 거 그렇게 볼 것 아냐, 아니구말구. 이치가 옳거든. 조리가 분명허구. 웅변가야, 굉장한 웅변가야! 참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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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굉장 씨는 아내를 보고 분부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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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 저녁은 한번 굉장히 차리오. 오늘 그 사람한테 어떻게 굉장히 얻어먹었는지. 술에, 밥에, 고기에, 참 굉장히 먹었어.”
 
76
불과 몇 시간 동안에 우리 굉장 씨는 잃었던 사기를 완전히 회복했다. 그는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 그까짓 돌배나무 몇 개! 밭이라구 돌자갈밭! 그까짓 논이라구(하다가 그는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 그 여덟 마지기엔 그깐 논이라고 흠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까짓 논이라도 손바닥만한 것! 굉장 씨는 인민위원회와 치안대 축들이 며칠째 숙덕대는 애국 동지회와의 사이에 일어나리라는 충돌 사건을 상상만 하여도 통쾌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도 모조리 소탕을 한다지 않는다.
 
77
“물론 해야지! 그놈들의 재산은 일체 몰수해야 말고, 너놈들 어디 보자!
 
78
배급 서기놈, 너 내가 그렇게 졸라대두 설탕 한 근 끝끝내 안 주고 말았겠다! 그러고 경작계 주임놈 이놈, 나보구 과목 안 뽑아낸다구 비국민이라구 그랬겠다? 흥, 이놈, 어디 한번 견디어봐라. 그리구 이 면장놈하구 세무소 놈들, 아니지, 세무소까지 갈 것이야 있던가. 서기놈이 다했지. 그놈이 쓱쓱 써서 내보냈지. 이놈들, 내가 전만 못해졌다고 막 멸시를 하구 세금두 막 나려깎었겠다! 흥, 그래, 어디루 보나 그까짓 방아쟁이놈보다 두 세금이 떨어진단 말야. 응, 어디루 보아서… 아니꼽살스런 놈들 같으니…”
 
79
굉장 씨는 치가 부르르 떨리었다. 그리고 또 없나 하고 아랫동네서부터 더듬어본다.
 
80
“없긴 왜 없어! 그놈, 그놈, 그래, 그 황가놈 날보구 면 협의원 자격이 없다구! 옳지 그놈두 한번 해내야지. 떡 엎어놓고서 육모 방맹이로 한번 본때 있게 어깨통을 나려치거든! 그러구 어디 음 없나? 옳지 옳지, 이놈의 정신 좀 보게, 업은 애 삼 년 찾는다더니 정작 그놈을 빼놓고서 여태 뭘했어! 허참, 그렇지, 그놈을 젤 먼저 때려잡아야지!”
 
81
굉장 씨의 토지는 절반 이상이나 한종수가 샀던 것이다. 한종수는 군수도 지내다가 고리대금도 하고 서울에다 고무공장도 내어 면내에서는 활개치는 사람이다.
 
82
“그렇구말구. 그놈을 내버려두다니. 바른 대로 말이지만 이 면에서 친일파라면 그놈 위에 갈 녀석이 누구란 말이냐. 이놈, 네가 내 땅을 모두 빼앗었겠다! 이 백여 석지기를 그저 송두리째…”
 
83
하다가 여기서 굉장 씨는 잠깐 끊고 생각을 하다가,
 
84
“하긴 거저 뺏은 건 아니지. 하지만 그놈이 뭘루 돈을 벌었단 말야. 제놈이 일본놈 밑에서 알랑알랑했으니까 그렇게 돈을 벌었지! 군술 지낸 놈이 친일파지 뭐야! 흥, 어디 좀 견디어보아라, 이놈, 음지가 양지 될 때두 있단 말이거든! 그까짓 과목밭! 그놈한테서 그 이백 석지기만 도루 찾는다면 나두 다시 한번 여봐란 듯이 뻐기구 살지! 이놈, 아주 영구히 네 것이 될 줄만 알었지! 흥, 못생긴 놈. 그래 물이 밑으로 흐르는 줄 모르느냐!”
 
85
으지끈 뚝딱 들이바수어대구, 패구 잡아 꿇리구 ― 생각만 해도 굉장 씨는 신이 난다.
 
86
“그런데 거사는 언제나 하려는가. 이삼 일 내로? 뭣하러 그렇게 늑장을 부릴 필요가 있나, 쇠뿔두 단김에 빼랬는데 그렇게 끌면 김이 빠져 자미가 있나.”
 
87
그는 몸이 비비틀리었다.
 
88
“지딱지딱 해치우지 못하고 정세는 무슨 말러비틀어진 놈의 정세야! 그깐 놈들 한꺼번에 몰아다 놓고서 그저 본때있게 해치우지. 그런데 그날은 내가 뭘하면 좋을꼬. 취조관이 될까, 아니지, 집행관이 제일이지. 집행관이 ― 그까짓것 뭐 세상이 바뀌었는데 어물어물할 게 있던가. 참 딱두 하지 그 사람이 왜 민적민적하는지 모르겠는걸. 정세는 뭣하러 본다는 겐가 ―”
 
89
굉장 씨는 이삼 일을 이렇게 기다릴 생각을 하니 몸이 뒤틀린다. 그는
 
90
‘응’소리를 치며 용을 한번 써보려 자리에 누웠다. 긴장이 풀리는지 졸음이 확 뒤집어씌운다. 그는 수전(睡戰)을 하며 이렇게 잠꼬대처럼 중얼거려본다.
 
91
“그날은 당꾸 바지에다 단장을 들구 나서야지.”
 
92
그러나 뒤미처 이렇게 정한다.
 
93
“단장으루 되나, 몽둥이래야지. 탄탄한! 손에 맞는 몽둥이…”
 
94
그러나 말끝은 다 아물지도 못한 채 그는 코를 드르렁 골기 시작했다.
 
 
95
<「백민」6호,1946년 12월>
【원문】굉장 씨(宏壯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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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굉장 씨 [제목]
 
  이무영(李無影) [저자]
 
  1946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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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4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