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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덕쇄기(陽德瑣記) 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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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7.23~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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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쇄기(陽德瑣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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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천서 온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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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목(流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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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열한 시 이십 분 자동차로 성천을 떠나기로 정하고 먼 곳에 전화를 걸었다. 친구나 친척집에도 하지만, 또 장소를 옮길 때마다 꼭 알려야 하는 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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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같이 양덕까지 안내해 주기로 된 세무서의 K씨에게 전화를 걸고, 들추지 않는 좋은 자리를 하나 잡아 가지고, 내 집 앞에까지 와서 자동차를 세워 달라고 부탁하여 놓았다. 이 즈음 시골 다니는 자동차들은 무시로 세우지 않기로 되었다고 한다. 가솔린 경제로 일정한 처소 이외에선 정차 안 한다고 하나, 상당한 상거가 있는 내 집에서 그 곳까지 짐을 들고 가기가 대단하므로 미리 부탁해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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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서 양덕까지 가는 데는 두 길이 있다. 하나는 기차편이다. 신성천역까지 30리를 버스 자동차로 가서그 곳서 평원내부선의 양덕행을 타고 가면 종점이 바로 양덕 신읍이다. 또 하나는 그냥 버스형 자동차로 평원 일등 도로를 굴러서 곧 바로 목적지까지 가는 것으로 내가 지금 타려는 열한 시 차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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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이나 모두 편안치 못한 것으로 매일반이다. 걷거나 말을 타거나 승교(乘轎)를 타거나 하던 옛날에다 비할 건 못되지만 기차라는 건 가끔 자동차와 경주하다가 판로(坂路)에서는 지는 수까지 있는 느린 물건이요 무엇보다도 집도 몇 채 안 되는 정거장마다 긴 시간을 머물러 있는 것이 안들증날 일이다. 버스는 어찌된 스프링이 이 모양인지 등허리가 벗겨지도록 몹시 까불지만 휭하니 나타날 땐 시원도 하고 또 기차보다도 융통성도 있다. 그래 나는 이걸 타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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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선 정림역까지는 내가 장근 다니던 길이다. 평천서 방선문 밖을 나서서 평평한 벌판을 제법 속력을 내어 달아나면 얼마 안 해서 망주산을 휘돌아 마륙령이란 높직한 고개에 이른다. 성천서 장림까지 사십 리 길인데 결국은 이 고개를 뱅뱅 돌아서 올라갔다가 다시 열아믄 고패 휘돌아서 다시 내려오면 고마이다. 이 부근의 산은 전부가 광구(鑛區)다. 아니 양덕까지 가는 데서 보이는 전부의 산이 광구에 들었을 게다. 차 탄 분들의 말이 여직 광구에 들지 않은 산은 손뼉만치도 안 남았을 게라고 하니 가히 짐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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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내려서 아카시아와 포플러 속에 뚫린 흰 신작로를 초하(初夏)의 따거운 햇볕 속으로 달아가는데 갑자기 사이드 낚아채는 소리, 기어 넣는 소리가 운전대에서 나면서 무겁게 차대(車臺)가 급정거를 한다. 앞을 바라보니 바른쪽 숲속에서 큰 구렁이가 으므적거리며 신작로로 기어나오고 있다. 나는 호기심으로 차 밖으로 그놈을 깔아 보자고 하니 운전수는 다시 사이드를 밀고 기어를 위로 넣으면서 ‘넘기나 해서는 잘라지지 않습니다’하고 긴 뱀이 한일자로 건너서기를 잠간 동안 기다린다. 윙 소리가 나면서 급진을 하다가 뒷바퀴를 땅 위에 붙이고 덜컹 차는 멎는다. 차창으로 내어다보니 뒷바퀴에 땅이 두 치나 패었는데 구렁이는 스스로 풀숲으로 빠져나간다. 운전수는 씩 웃고 덤덤히 다시 차를 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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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림역 구내에 댐이 있고 연광(鉛鑛)에서 쓰는 케이블카가 있따. 송전선과 함께 최근에 발견하는 이 고장 풍경이다. 산꼭대기를 향하여 늘어지게 상자를 단 줄이 뻗쳐 있다. 누가 지었는지 이걸 솔개미 기계라고 한다. 까만 상자가 윙하니 산을 넘어 날러드는 것이 과시 병아리를 채려는 소리개나 독수리가리로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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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림서 별창, 화창을 지나서 양덕 읍내, 즉 신읍에 이른다. 별창서 한 시오 리 허(許)에 성천 금강이란 곳이 있다는 걸 어려서부터 들어 왔으므로 일부러 운전수에 부탁하여 차창으로 내다보았는데, ○○이 묘(妙)하고 바위가 제법 만물상을 흉내내려다가 푸른 물 속에 잠겨 버렸으나, 그 명칭에 해당할 만한 경치는 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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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보다 내 눈에 흥미 있게 보인 것은 유목이다. 떼[筏]를 무어 흘릴만한 강이 못되는 물이었고 여울이 많아서 이렇게 개개로 띄워서 장림까지 홀린다고 한다. 고견순(高見順)의 『流木[유목]』을 연상하면서, 어째 철로를 이용치 않느냐 물으니 운임 관계라 한다. 전부가 소나무, 그것도 꼭 광산의 동발(갱목)로 쓰일 5, 6척 짜리 애솔들이다. 여울에 흐르다 걸린 것도 있고, 버들포기에 걸리었다가 다른 것이 몰아쳐 내려오는 바람에 다시 떨어져서 흐르는 것도 있다. 옅고 파란 개울은 벌린 소나무 토막에 쌔워서 양덕까지 연대었다. 성천서 떠난 지 한 시간, 우리를 태운 차는 읍내의 거리를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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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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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정사(市井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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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골 읍내와 비슷한 고장에 와서 토박이 사람으로 친근한 이가 생기면 나는 으레 물어 보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이 고장서 제일로 가는 호상(豪商)이 누군데 어떻게 해서 성공하였는가 하는 경로다. 이렇게 해 본 결과 나는 내 깐으로 흥미 있는 사실을 몇 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의 근본과 성공의 경로가 대체로 공통한 게 무엇보다 재미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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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깨끗한 양덕의 시가지를 한 번 휭 돌고 나서 나는 인차 지우(知友)에게 물어 보았다. 이 고을엔 큰 상점이 하나밖에는 없다. 양품과 식료품과 잡화와 포목까지를 겸했다. 그리고 그 집 상호가 붙은 트럭이 많고 재목 상에도 같은 상호가 붙었는데 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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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이러했다. T라는 내지인으로 약 20년 전(?) 별창(別倉)서 인단(人丹) 봉지나 팔다가 이 곳에서 와서 먼저 잡화상을 차려 놓아 돈을 잡았는데 지금은 여러 가지 상업으로 이 고을 안을 독점했다고 한다. 사실 성천 같은데 많은 포목상도 이 고을 안엔 그 집 이외엔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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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내 물음은 그에게 자식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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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골 고을에는 O라는 내지인이 큰 상점을 잡고 있다가 연전에 작고했다. 이 사람은 보호 정치 시대에 우편 체부(遞夫)로 우리 고을에 들어왔다가 수비대 상대로 용달을 보아 돈을 잡아 가지고 그 뒤 잡화상을 벌이고 일변 돈놀이도 했다. 이 근년에 순사로 은급(恩級) 달린 N이라는 내지인이 이와 대항해서 상점을 벌였었으나 성공치 못했다. O에겐 물론 자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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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지금은 내지로 떠났지만 내 시골서 가장 큰 여관을 경영하는 S라는 이는 헌병 분견대 시대에 마부로 있다가 여관 영업에 착안하여 그 뒤 돈놀이도 하면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자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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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O나 S의 대신으로 새로 대선 사람도 이와 사정이 비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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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골서 요리업을 하다가 지금 영등포로 이사(移徙)간 A라는 이는 남양 순회선(南洋巡廻船)의 선부였다. 이도 자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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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다른 고을서 성공한 이의 실례에서 조사해 보면 전부가 어금지금한 사정의 경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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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상 더 이야기하는 것은 현존 인물들의 내면 사정에 관한 염려도 있으므로 다시 추정해서 말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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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본은 퍽 미미했다는 것. 그러므로 처음 올 때는 대개 총각이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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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공의 경로는 새것에 눈치가 빨랐고, 또 돈을 잘 돌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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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처는 대체로 초기의 창기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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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므로 자식은 없고 간혹 양자나 두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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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 고을서 면협(面協) 의원 등으로 있는 이가 많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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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제 사정을 두루 두루 종합해 보면 읍민의 하나의 전형을 잡아 볼 수 있지 않는가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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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딴 고장에 와서 알고 싶은 것은 양반이로라 재기는 집안이나 또 돈 있고 오래 지방에 산, 말하자면 세력 있는 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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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의 평양 부근 지방, 그것도 읍내 부근에서는 상반의 차별이 없어진건 퍽 오래다. 돈냥이나 있고 관계(官界)에 출신 있는 집들이 양반의 대신으로 세력을 쓴다. 관계라야 그것 역시 대수롭지 않은 걸로 군에나 면에나 그러한 관청에 하급 공직자로 다니는 것을 말함에 불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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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가령 이씨면 이씨, 박씨면 박씨 이들이 몇 대째 이 고장에 사는가, 또 누구 대에 와서 쇠운에 빠졌다가, 누구 대에 와서 중흥했다든가 지금은 그들이 무엇을 한다든가 아들과 손자와 그들의 사람됨과 또 생김 생김새가 어떻다든가 등등 이런 걸 물으면서 잡담하여 밤을 새는 건 좋은 경치나 유서 깊은 유적(遺跡)을 더듬어 보는 거나 한가지로 여행할 때에 있는 내 가장 큰 소득이고 또 유쾌사(愉快事)이다. 양덕에 와서도 이런 방면으로 얻어 들은 바와 본 바가 많은 것은 적지않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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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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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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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역에 내려서 초라한 역후(驛後) 풍경에 마음이 시서늘해진 채 고 알뜰한 전차를 타고 보면 그 다음에 귀에 거슬리는 것이 아마 사투리일게다. 우리처럼 이 사투리에 젖어서 자라나고 성장한 사람도 그러하니 경기나 남도 사람의 초행자의 귀에는 어지간할 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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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 하는 이들은 언어 통일과 정리상 방언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지 몰라도 이 즈음 문단에서는 속어나 비어(鄙語)나 방언을 문학어로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 상당한 것 같다. 민촌이 충청도 사투리를 많이 쓰는 건 일반이 아는 일이고 채만식 군이 「탁류」나 「천하태평춘」등에서 전라도 사투리와 속어를 문학어로 정착시켜 보려는 노력이나 박태원 군의 서울 속어와 비어의 활용, 또는 신인으로서는 이선희 씨의 원산 사투리, 현덕 씨의 아동 용어의 문학적 연마(練馬) 등 하나 하나 매거하기에 바쁠 지경이다. 말을 창조하고 활용시키는 건 어학자가 아니고 문학자이므로 이러한 경향은 결코 그릇된 노력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평안도 사투리만은 문학 용어로 좀 난점이 많은가 생각되는 때가 가끔 있다. 춘원이나 요한 , 안서, 동인이 모두 평안도 출신이니 평안도 방언의 중앙화에는 이 분들의 공로가 적지 않을 줄 알거니와 같은 사람이 할 수 없어서 대화 같은 데에 사투리를 쓰면서 제일 고약스럽고 시끄러운 ‘다’‘자’의 구별과 ‘타’‘차’간의 차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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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이 ‘덩거장’이라도 모르겠는데 그놈이 한번 더 돌아서 ‘덩기동’이 되어 버린 데는 과시 혀를 빼물 만하다. 이 밖에 남자의 말과 여자의 말이 잘 구별이 서지 않는다. 대체로 우직하고 퉁명스럽고 밍밍하고 섬싹하고 맛이 없다. 인쇄해 논 걸 보면 오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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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같은 평안남도라도 양덕은 다르다. 이 곳은 대체로 ‘테’가 바로 ‘체’로 발음되고 ‘디’가 ‘지’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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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야 ‘소’가 성천 ‘궤’를 싣고 양덕 ‘지’릉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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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말의 마지막에는 ‘소’가 잘 붙는다. 성천말의 마지막에는 ‘궤’가 붙던 것이 양덕으로 가면 ‘지’가 된다는 말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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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평양에선 ‘밥먹었소?’가 성천에선 ‘밥 먹었수궤?’로 되고, 양덕에선 ‘밥 먹었지?’가 된다. 성첞서도 평양 내왕이 많아서 ‘궤’는 대부분 없어졌는데 ‘다’나 ‘타’행은 그대로다. ‘먹었지’가 아니라 ‘먹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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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서 성천이 불과 백여 리인데, 이디서부터 이렇게 말이 변했는가 알아보니, 별창과 화창 중간이라 한다. 군계에서 짝, 갈라진 것이다. 성천시 6, 7십 리, 양덕서 3, 4십 리 되는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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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양덕읍서 6십 리를 원산 쪽으로 가면 석갈지(石渴池)인데, 국수집 같은 데서 장날 같은 때는 함경도 사투리를 많이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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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과 성천 간의 방언의 차이는 물론 발음의 차이가 제일 심하다. 이 밖에 양덕 와서 얻어 듣는 소리로는 유행어에 ‘괏다’는 것이 있고, 또 제법 귓맛이 당기는 말에 ‘장근’이란 말이 있다. 전자는 성천 같은 데서는 ‘세다’ ‘상당하다’ ‘엔간하다’ ‘뻐근하다’ 등으로 쓴 곳을 모두 종합하여 ‘괏다’로 쓴다 별로 추장(推獎)할 것이 못되나 후자는 ‘장근’은 ‘노’ ‘늘상’ ‘항상’과 일맥 통하면서 또한 딴 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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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는 억양이라든가 말투라든가 평양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평안도 방언의 문학 용어로서의 활용은 양덕 말이 기준으로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보았다. 발음을 이 고장으로 기준 삼고 성천이든가 강동, 순천, 강서, 안주 등과 평양의 특유한 말을 골라서 섞어 쓰는 것이 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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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 지명 같은 것으로 특수한 것은 평양이나 성천서도 그대로 따라간 것을 본다. 나는 처음 평양과 성천서 ‘대탕지’니 ‘돌탕지’니 하는 말을 듣고 ‘탕’은 ‘湯[탕]’이로되 ‘지’는 무슨 ‘지’자일까 의심했었다. 그랬더니 ‘池[지]’자이었다. 평양 발음에 준하면 ‘디’가 될 것인데 양덕 것이니까 그 곳 발음을 따라 ‘지’가 된 것이다. 또 ‘朝鮮[조선]’을 ‘도선’이나 ‘되선’이라고 발음하는 사람도 성천에서는 볼 수 없었었다. 모두 ‘조선’이라고 옳게 발음한다. 이런 것으로 보아 어감이 나쁘고 써서 읽기도 맛없고 오식 잘나는 건 다 깎아 버리고 좋은 말을 살구어서 문학어로 활용하면 평안도 사람의 고유한 맛을 전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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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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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邑舊(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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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 읍내서 원산 가는 자동차를 나고 가노라면 눈에 띨 만한 부락으로 40리 가서 순우교 그 곳서 20리 가서 온천면 석탕지 다시 20리를 가서 동양(東陽)이라는 데가 있다. 동양서 원산이 아직 20백 리 길인데 그 곳까지밖에는 더 가 보지를 못했다(평양서 동양까지는 3백 오십 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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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우교라는 데는 현재 양덕까지 개통된 평원선이 고원까지 마저 놓이면 역이 생길 곳이다. 기차는 산곡을 굽이굽이 돌아서 이미 커다란 동리를 이룬 석탕지에도 동양에도 들르지 않고 집이나 두서넛 덩그렁하니 붙어있던 작은 다릿목에다 정거장을 짓게 마련이다. 지금 한창 측량을 하며 밭과 산에 깃발을 꽂고 야단법석이니 오래지 않아 공사가 시작될 것이다. 순웃다리 옆에 새집이 부리나케 여나문 집 생겼고 지금도 한창 신작로를 끼고서 집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공사장의 기숙사가 서게 되니 이것을 상대로 위선 음식 그릇이나 술이나 웃음을 팔다가 개통이 되면 그대로 자저부터서 소역전에 항용 있는 운송점, 여관, 술집, 담배가게, 소잡화점으로 변신할 채비다. 더구나 석탕 온청이 20리 길이므로 차 시간 맞추어 버스로 다닐 것이다. 역명이 무엇으로 되려는 미처 알지 못했다. 順于[순우]가 順于[순우]이 되어 ‘순우’ 대신에 ‘순간’이라는 오독(誤讀)이 유행한다니 순간역이 될는지도 모른다고 지인의 한 사람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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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탕지라는 데 양덕서 제일가는 온천이 있어서 예부터 내력 있는 동리가 되어 있다. 지금 7, 80호나 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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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이라는 데는 ‘구골’이라고도 하고 ‘구읍’이라고도 한다. 전날에는 이곳에 관부 (官府)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것과 대비해서 지금 양덕읍을 ‘신읍’이라고도 했다. 신읍 사람들은 이런 호칭을 싫어하지만 성천 같은 데서 고로(古老)들이 아직도 곧잘 신읍을 파읍(罷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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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는 신읍에 고을이 있다가 이것을 파하고 구읍으로 관부를 옮겼더란다 그래서 신읍을 파읍이라 불러 왔는데 근년에 다시 이전을 하여 신읍이 군청 소재지로 된 탓에 구읍 신읍이란 말이 새로이 생긴 것이라 한다. ‘구골’다시 말하면 동양에는 문묘(文廟)도 있고 서원도 있고 홍살문까지 남아 있어서 될수록 옛 고을로서의 면목을 유지하려는 데 동민의 노력하는 것을 알수 있었다. 홍살문같은 거나 또는 그 옆에 비각 같은 것이 단청이 새롭고 개축의 자리가 엿보이는 것은 신읍과의 대항을 오직 이런 유물로써 해 보겠다는 동민의 애쓰는 자취처럼 보이어 행인의 감상을 건드리는 바 없지 않았다. 그러나 기차마저 멀리서 이를 돌보지 않았으니, 이 부근에서 커다란 금광이나 중석광이라도 생기기 전에는 재흥(再興[재흥])의 기(機)가 올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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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읍 초입구에 말근댐이라는 무인지경이 있는데 벌도 넓지 않고 옆에 산도 가로막혔으나, 겨울엔 바람이 몹시 세다고 동행의 지인 운전수가 말한다. 옛날 원님이 말타고 행차했다가 바람을 만나 코와 얼굴과 귀와 발이 얼어서 얼마나 혼이 났던지 그 뒤 서울서 누구 양덕 고을 초입 말근댐이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손으로 얼굴을 가리우면서 ‘바람이야 바람이라 문을 바삐 닫아 주게’ 하였다고 한다. 조작의 말이나마 바람이 얼마나 강한지는 짐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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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서 동양까지 가는 일등 도로에는 화물 자동차가 많이 내왕한다. 어느 편으로든가 차를 타고 가로라면 십 분 안짝에 마주오는 트럭을 만난다. 산비탈을 크락숀을 울리면서 굽이쳐 돌면은 트럭의 앞머리가 쑥 나선다. 모두 재목을 운반하는 트럭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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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가 없으니 모르지만 평남 도내에 평양 다음엔 양덕이 트럭 많기론 제일이라 한다. 덕택에 썩베루가 깔린 희고 곱던 판판한 신작로가 모두 패여서 한 곳 치고 성한 곳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내가 체류하고 있는 여사(旅舍)가 석탕지인데 2층 창문으로 평원 도로가 바로 보인다. 심심결에 세어 보았더니 무려 4, 50대의 트럭이 내왕하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운전수 없는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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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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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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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제 의미 불명 ( ─ 편자) 성천 원님과 양덕 원님이 풀내기하듯 서로 제 고을 자랑을 하다가 성천이 말하되 ‘너희 고을에 봉선루가 있냐’했더란다. 양덕엔 이런 누각이나 유적이나 경치라고 별로 들어서 말할 게 없다. 그래 양덕은 대뜸 ‘너희 고을에 소나무가 있냐’하고 대구를 놓았다고 한다. 과시 양덕엔 소나무가 명물이다. 소나무가 아니라 송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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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에서도 성천부터는 벌써 산간 지대에 든다. 그러나 산이 원체 옳게 첩첩히 싸인 곳은 장림을 지나 양덕 땅으로 들어서서부터다. 사면이 산이고 그것이 전부 푸른 소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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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라면 언뜻 생각키에 구불구불 꺼부러져서 운치 있는 노송을 연상키가 쉽다. 평양의 기자능 송림이나, 성천의 향교 송림을 보아 온 이는, 그러므로 양덕 와서는 적지않게 놀란다. 낙엽송은 본대 그런 것이나 말할 것도 없지만, 적송 흑송이 곧기가 삼목(杉木) 이상이다. 이런 것이 첩첩히 둘러싸인 산에, 잡뿍 디리 실려 있는 것이다. 이 산틈에 흰 길이 기어가고, 좀 팡파짐하여 옥계가 흐르는 곳에 부락이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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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 이름이 무어엔가고 물어도 아는 이는 하나도 없다. 산에 이름이 무슨 이름일까보냐고 하는 표정이다. 산줄기의 이름이라도 없기야 하련만은 어느 것이 어느 산이 어떤지 가물가물하여 기억을 뒤지기도 곤란하거니와 한번 둘러 보아 특징이 있거나 인상에 남는 것도 없으니 이름 같은 걸 붙여 보았자 더 번거롭기만 할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성천 같은 데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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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강(沸流江)에 둘러싸인 반도형(半島形)의 그리 깊지도 않은 산인데, 산 이름과 봉우리 이름이 어떻게 많은지 모른다. ○골산성이 있었다는 무산 12봉이 3, 4리 되나마나 한 기장에 열두 개의 봉명이 붙었고(벽옥, 금로, 천주, 몽선, 고당, 양대, 신녀, 조운, 모우, 생학, 자지, 화주) 다시 구선봉, 옥호봉, 운봉산으로 그 나머지 몇 봉우리의 이름이 붙어 있다. 그 뒤에 연붙은 산이 궁산, 이미산, 마주 보이는 것이 측학산, ○○산, 이 밖에 현봉산, 형제산, 운흥산, 천정산, 계두산, 하나 하나 기록할 겨를이 없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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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어쨌건 양덕에 있는 산들은 묘하거나 기한 것은 없는 대신 산림이 무섭게 울창하였다. 이 나무를 운반하느라고 트럭과 기차와 강물이 쉴 새가 없이 바쁜 것이다. 양덕역 부근 빈터에 쌓여 있는 목재를 보고 놀라지 않을 이는 얼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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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소나무만이 아니다. 양덕 신읍서 맹산 가는 길을 따라가면 유전령 을 (楡田嶺) 가운데로 하고 대 수림이 우거진 채 있다. 그 곳에는 소나무보다도, 가당나무, 황철나무, 백화, 참나무, 박달나무 등이 많은 것 같았다. 지인 운전수의 안내로, 신읍서 백석까지 130리 길을 다섯 시간에 왕복을 하면서 이 수림을 구경하였다. 본시 이 길은 전부가 산길이다. 좀 판판한 길은 전후 2, 30리나 되고 나머지 백여 리는 수림이 울울한 준령과 태산을 2, 3백 척의 산곡을 굽어보면서 위태한 삼등 도로로 굽이 굽이 산허리를 돌고 있는 것이다. 타고 앉은 내가 마음이 자릿자릿하니, 운전하는 친구가 땀을 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행인은 하나도 없고 트럭의 내왕도 극히 드물다. 새소리도 없는 글자 그대로의 처녀림이다. 가랑잎이 무릎에까지 쌓인 곳이 있었고 나무는 저희끼리 부딪쳐서 부러지고 꺾어져서 그대로 썩고 있었다. 도처에 ‘평안남도 모범림’의 말뚝과 ‘산화 주의’의 딱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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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산화가 일어났던 곳에 군데군데 보인다. 몇 달 전에 일주일 연달아 붙은 큰 산화가 신읍과 석탕지 간의 산 속에 있었다. 차창으로 보면 불길에 끄슬려서 나무가 단풍이 든 것처럼 발간 것이 행인의 눈을 괄목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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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두 시간을 태양도 바로 보이지 않는 컴컴한 산림 속을 아슬아슬하니 돌아가다가 우리는 가끔 계류가 흐르는 곳에서 차를 세웠다. 사이다나 맥주를 한 십분씩 담그고 채웠다가 마시고는 가는 것이다. 혹은 가는 길에 채웠다가 오는 길에 먹기도 하였다. 다섯 시간 나머지에 이 산 속을 왕복하고 오니 비로소 녹색에서 해방된 눈이 하이얀 신작로 위에 새물새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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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38년 7월 23 ~ 28일)
【원문】양덕쇄기(陽德瑣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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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기본
  # 양덕쇄기 소 [제목]
 
  김남천(金南天)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38년 [발표]
 
  기행문(紀行文) [분류]
 
  수필(隨筆) [분류]
 
◈ 참조
  # 성천군
 
  # 양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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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덕쇄기(陽德瑣記) 소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