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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가에 대한 작가로서의 불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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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2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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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論家에 대한 作者로서의 不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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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30일을 첫회로「창작계의 이삼(二三)고찰」이라는 함일돈(咸逸敦 ) 씨의 1930년 1년간 창작총평(創作總評)이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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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틈에 끼여 작년 중『신소설(新小說)』지에 실린 졸작「산동이」와 「앙탈」도 평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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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에 대하여 작자로서의 불복(不服)이 있기에 이 일문(一文)을 초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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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씨는 이렇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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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씨의「산동이」등등 실로 부르조아 작품의 칠팔분(七八分)이 연애 혹은 남녀관계의 각종 문제를 취급한 작품이다.” (방점一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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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절로써「산동이」는 “연애 혹은 남녀관계를 취급한 부르조아 작품”이 되어가지고 함씨의 평의 도마 위에 올려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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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찌해서「산동이」가 부르조아 작품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비쳐 놓지 아니하였다. (이 억울한영광을 입은 작품이「산동이」나「앙탈」이외에 다른 작가의 것도 몇편이 있을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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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위선 작자로서의 불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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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가지고 함씨는「산동이」를 부르조아 작품이라고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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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가 본 대로 “……거기에는(일반 부르조아 작품― 채) 별다른 새 경향도 없는 듯하며 여전히 연애문제 혹은 남녀관계의 각종 문제가 다수를 점령하고 있는 듯”한데「산동이」도 남녀관계를 취급하였기 때문에 부르조아 작품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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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다시 말하면 1930년에 나타난 부르조아 작품의 대다수가 연애문제 혹은 남녀관계를 취급하였다. 그런데「산동이」도 남녀관계를 취급하였다. 그러니까「산동이」도 부르조아 작품이다……는 결론을 얻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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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게아니라「산동이」란 졸작이 남녀관계를 취급을 하기는 하였다.그러나 결코 그것뿐만이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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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독자로서는 싱거운 일이며, 작자로서는 거북한 일이, 일단 발표 된 작품의 설명을 하지 아니치 못하게 된 것을 독자에게 사(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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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국 시절에 시골 군수로 지내면서 국재(國財)와 민재(民財)를 토색질하여 부자——지주——가 되어가지고 기미(己未) 이후에는 권총 청년이 무서워서 서울로 올라와 큰 안동 아방궁을 짓고 술과 계집으로 여년을 보내는 ‘창평영감’이라는 부르조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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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나이 어릴 때에 얻어 기른 산동이라는 충실한 하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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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이는 자라 나이 20이 넘고 또 창평영감이 시골서 데려온 산지기 딸 ‘옥섬’이라는 계집아이가 그의 생활권 내에 들어오자 개성(個性)의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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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한 뿌띠 부르조아 의식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요, 따라서 상전에게 언제까지든지 충실하고 그 은혜를 감사하며 그 상전의 비호를 우러러 받들려 하는 것이지 결코 대립과 반항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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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산동이와 옥섬이는 앞날에 올 무풍지대의 자유를 바라보면서 점점 정이 깊어갔다.(주인도 그들을 짝을 지어 주기로 약속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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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호색가 창평영감의 첩이 달아났다. 매우 궁금한 판에 창평영감은 옥섬이를 강간을 한다. 그때에 산동이는 건넌방에 있었다. 그 광경을 눈으로 보는 듯이 듣고 있던 그는 주먹을 부르쥐고 기절하여 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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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아침 산동이는 그 집을 나간다. 나가기 전에 그는 옥섬이와 작별을 한다. 옥섬이는 따라가지도 못하고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한다. 산동이는 눈이 째지게 창평영감이 있는 사랑방을 흘겨보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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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일이 있은 지 4년 후에 만주에 어떠한 조직의 배경을 가진 산동이가 조선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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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서 두 가지의 일을 하였다. 그 나중에 한 것이 즉 안동 아방궁에 가서 창평영감을 쏘아죽이고 자기는 어쩔 수 없이 ××의 총알에 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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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산동이」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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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그러하고 형식은 어느 테러(그것을 일반은 테러라고 보나 공간적관계가 있을 따름이지 결코 테러가 아니다)가 어느 곳에다 폭탄을 던졌다. 그곳은 아직 안동 아방궁이 아니다.(조선 가옥에는 다이나마이트는 효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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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는 사이에 안동 아방궁에 ‘탕’소리가 나며 피가 흐르고……등으로 제1단을 삼고 제2단으로 산동이의 전신(前身)과 및 그가 만주로 가기 전날까지의 경위를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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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하여 제1단의 산동이의 행동의 설명에 대하여 염상섭 ‧ 김기진 씨 등으로부터 적잖은 나무람이 있었다. 함일돈 씨도 그러한 느낌이 없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로는『신소설』사의 무책(無責)한 인쇄교정으로 맨 처음 ‘쾅’하는 폭발탄 소리가 ‘◇’로 되고 또 중간에 ‘……’의 점선을 넣어 단락을 지어 가지고 산동이의 폭발탄을 사용한 행동과 ‘탕’하는 피스톨을 사용한 행동의 구별이 불분명하게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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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그러한 것을 어떻게 ‘다다’파의 시같이 도막도막 끊어서 전후 연락이나 내용 짐작에 곤란하도록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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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작자인 나로서는 그것이 아닌 검열에 통과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 터이다.(만일 산동이의 행동을 알아보기 쉽게 노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아마 함씨적 존재는 허(許)하지 못한 세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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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함씨는 물론이요 친절한 독자가 있어 소설(산동이)을 읽던 기억을 돌이켜보면 그것이 부르조아 작품이기에는 전연 억울한 영광임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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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미 불복을 말하던 터이니 김기진 씨에게도 한 말 하여두고자 한다.(씨의 평은 작년 6월호『신소설』에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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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이」는 함씨까지 합하여 염상섭 ‧ 김기진 세 분의 평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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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분 중 김기진 씨만은 비교적 요령 있는 평을 하였었다. 그러나 그 역(亦) 불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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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진 씨는 이렇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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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산동이는 김부호(창평영감)에게 단순히 복수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 날 그 자리에서 옥섬이가 우물에 빠져죽을 때에 식칼을 들고 뛰어들어가서(김기진 씨의 본 바에 의하면 그때의 산동이의 분노가 ‘적개심’이라는데 그것이 과연 적개심일까?) 죽이든지 어쩌든지 못하고 무슨 볼일이 있어서(무슨 볼일이……무서운 ‘허니꾸’다―채) 만주로 달아났다 와서 복수를 하였는가? (중략―채) 작자는 일부러 이렇게 했다. 소위 시간(이 시간은 時局의 오식인 듯하다―채)을 시끄럽게 하는 돌비적(突飛的)인 대사건을 만들기 위하여서 두 가지의 사실을 연결시켰을 뿐이다. 이렇게 하는 데서 작자(이 작자는 혹 독자가 아닐까?―채)의 흥미는 이 작품에서 더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말하면 산동이라는 인물은 결국 개죽음을 하였다.(김기진 씨가 이러한 말——개죽음 운운——을 만주에 가서 했다면 결과는 어찌될꼬?―채) 다시 말하면 간신히 근소한 의의밖에는 그의 죽음에서 찾지 못한다. 개인적 복수의 길 외에 좀더 산동이쯤으로서도 다른 길을 발견하였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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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하여 나는 김기진 씨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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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이는 물론 그 당장에서라도 복수를 할 마음이 없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식칼을 들고 들어가서’ 복수를 하였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을 하게 되지 아니하였을까? 아무런 계급적 의의를 가지지 못한 개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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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 아니라 산동이는 근성이 깊이 박힌 노예였었다. 제아무리 분이 치달아도 그때의 산동이에게는 ‘창평영감’은 범치 못할 사람이었었다. 그러니까 그는 그 안날 밤에도 기절을 하여 넘어졌을 뿐이었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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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볼일로 만주를 갔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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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산동이 자신도 몰랐다. 다만 그때의 마음으로는 ‘잘되어 가지고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으로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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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로 간 결과 그는 조직체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것이 촛점이다. 4년 후에 ‘폭탄’과 ‘피스톨’을 가지고 돌아온 산동이는 옛날 산동이가 아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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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공간의 구속 때문에 조직적 활동상 많은 견제를 받아 김기진 씨에게 ‘개죽음’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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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진 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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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라고 하는데 또 만주에 있는 ‘××××과 ××××××의 통일제휴”라는 문구를 무엇으로 해석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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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이의 ‘폭탄’과 ‘피스톨’로의 두 가지 다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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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책임을 교정(敎正)과 작자인 내가 뒤집어쓰고 말려니와 조금이라도 계급적 작품을 평한다는 계급적 양심이 있거든 다시 한번 생각을 하여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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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본론으로 들어가 함일돈 씨에게 대한「앙탈」의 불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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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탈」에 대하여 함씨는 이렇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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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씨의「앙탈」도 작품의 성불성(成不成)을 별문제로 하고 조선 구직청년의 곤경(고민이 아님―咸)을 테마로 하여 현대 조선상(朝鮮相)에 터치하였다고 본다.(중략) 동종의 제재는 조선사회에 너무도 많이 있을 줄 안다. 정면으로 묘사는 못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노력은 있어야 할 터인데 그 노력조차 보이지 아니하는 것은 가장 중대문제다. 즉 민족주의 문학 운운의 기초가 전복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문학이란 것이 과연 어떠한 것을 지칭함인지 미지(未知)거니와「앙탈」「거리의 여자」「마적」등의 제재를 떠나 다만 살인사건이나 남녀의 정사나 취급하고 있는 동안 그런 문학의 존재를 우리는 긍정할 수 없으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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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나의어리석은 소견으로 해석하건대 이러한 의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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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탈」도 형사피고인이 죄의 신문과 논고가 없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이 무조건으로(함씨의 논문에 나타난 것만을 가지고 보면―채) 부르조아 작품이라는 낙인을 찍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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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앙탈」에 있어서는「산동이」와 달라 조선상에 터치를 하였다. 그러므로「앙탈」은 민족주의문학이라는 것을 긍정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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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앙탈」에 있어서는 부르조아 작품이라는 억울한 영광을 입는 동시에 또한 ‘민족주의 문학’(민족문학이 아님―채)의 작품이라는 또 한 겹의 억울한 영광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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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그 결과도 함씨가 본 바와는 다른 것이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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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탈」에 있어서 나는 한 “앙탈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물론 함씨가 말한 바와 같이 구직하는 조선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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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실직한 인텔리의 사람이다. 하숙에서는 석 달째 밀린 밥값에 죽도록 졸린다. 그렇건만 그는 자리 밑에 양복바지를 깔고 줄을 잡아 입는다. 언더양말이 구멍이 난 것은 “구두를 신을 터이니까”라고 겨우 안심을 한다. 양복이 해진 것은 멀리서는 아니 보이리라고 안심을 한다. 그러면서 그런 것들이 그래도 마음에 걸려 안타까와한다. 길에 나서서는 자기의 허술한 것을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멀리 피해가면서 그래도 곁눈으로 슬금슬금 훔치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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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필경 졸릴 것이 무서워서 하숙집에를 돌아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하숙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친구에게 하기가 창피해서 친구 있는 곳에 가서 자지를 못하고 취운정(翠雲亭)에 가서 한잠을 잔다. 그러면서도 공상을 한다. 오 전만 있으면……아니 십 전만……아니 십원 백 원 만 원 백만 원……이렇게 공상을 한다. 그놈이 다시 만 원 백 원 십 원 십 전 오 전으로 즉 호떡 한 개 값으로 내려온다. 그것도 벌어서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길에 흘린 것을 얻었으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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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새벽에는 남처럼 아침 산보를 하러 올라온 것같이 세수를 하고 친구가 있는 잡지사로 내려온다. 배는 고프다 못해 경련이 일어나고 첫봄의 추위는 몸이 얼어붙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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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친구가 노동이라도 하라고 권고하지만 듣지 아니한다. 그 자리에서 아침 요기거리를 빌려달라고 하고 싶지만 창피해서 그냥 나와 속으로 부르짖는다. “앞에 올 호화로운 생활, 어디선지 모르나 기다리고 있을 미지의 애인을 버리고 더러운 노동이라니 될 말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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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배가 고픈데야 하는 수가 없다. 황금정 직업소개소로 간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음을 다행으로 그곳에서 광산노동자로 뽑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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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그 개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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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거에서 나는 한 얄미운 존재를 본다. 되사리고 없는 것으로 맵시를 내고 체면을 보려고 하고 허무한 장래를 꿈을 꾸고……이렇게 앙탈하는 얄미운 존재 그 주인공인 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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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몰락하고 만다. 인텔리는 그 관념적 이상과 허옇게 퇴색된 후광을 부여잡고 앙탈을 하면서 그래도 필연의 세(勢)로 몰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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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위에 더 말하지 아니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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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앙탈」이 부르조아 작품이요 민족주의 문학이라 하면 나는 함씨를 안톤 체홉의「벚동산」도 부르조아 작품이요 민족주의 문학(민족문학이아님―채)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라고 보아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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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함씨에게 한말 하고자 하는 것은 부디 작품을 대할 때에 의사가 병자를 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대할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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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그 수업에 있어서 한 전문(專門)이 있어야 한다. 내과면 내과 외과면 외과 또 치과면 치과, 부인과면 부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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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수업이 있은 뒤에 한 병자를 대할 때에 그 병이 자기의 전문에 속한 것이면 메스를 들어 해부를 한다든지 투약을 하여 치료를 할 것이요, 만일 그 병이 자기의 전문 이외의 것이라면 그는 모름지기 그 환자를 다른 전문으로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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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마찬가지로 문예평론도 그 전문적 즉 계급적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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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자체가 엄연히 계급적으로 갈리어 있는 이상 평론가도 마땅히 그리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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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만을 ‘박쥐적 태도’를 허하기에는 시대는 너무도 모든 것의 색채가 선명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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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 일보(東亞日報)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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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2월 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