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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랑사 (玉娘祠) ◈
◇ 2. 양반의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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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채만식
1
玉娘祠[옥랑사]
 
2
2. 양반의 딸
 
 
3
선용이 곰의고개를 다 내려와 다시 평지로 삼십 리를 와서 조그마한 고개를 하나를 넘으면 비로소 황산골 경내가 되는 그 '닭고개’에 당도하였을 때 였다. 고개라고 하지만 이 너머서 저 너머까지 과녁 한 바탕이나 될까, 키 큰 사람이면 이 너머서 저 너머가 보인다고 할 만한 하치 아니한 언덕이었다.
 
4
이제는 다 왔느니라고 그러면서 무심코 보니 고개 너머로 웬 불빛이 환히 솟아올랐다.
 
5
선용은 불이 났으려니는 생각지 못하고 초상 마당이나 소대상 마당의 모토불이거니만 하였다. 그러나 막상 고개 위에 올라서 보니 모토불이 아니라 인가에 불이 붙고 있었다.
 
6
고개 밑에 집이 단 두 가구가 있고 그중 한 가구가 이쁘게 생긴 처녀가 있는 백생원(白生員)이라는 선비의 집인데 불은 백진사의 집에서 났었다.
 
7
선용은 단숨에 불난 집 문앞까지 뛰어내려갔다.
 
8
사립문은 잠겼고. 멀리 본동에서는 물론이요 단 한 가구 있는 이웃에서도 미처 몰랐는지 사립문 밖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9
선용은 멱서리와 손에 든 것을 부친의 제사장 보기한 것이라 급한 중에도 한 옆으로 비껴서 잘 내려놓고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안마당으로 달려들어 갔다.
 
10
불은 벌써 앞이 홱 돌았고 시뻘건 추녀토막이 우직우직 내려앉고 있었다.
 
11
안마당에서는 백생원과 어린 계집종 하나가 늙은 하인 하나와 단 셋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면서 안방을 가리키면서 할 뿐이었다. 그럴 것이 안방은 열린 앞문으로 커다랗게 불길이 확확 몰려들어가고 있어 여간 내기로는 범접을 못할만도 하였다.
 
12
"누구 못 나왔소?"
 
13
선용이 급히 묻는 말에 계집종과 백생원이 한꺼번에 대답이었다.
 
14
"애기씨가 혼자!"
 
15
"우리 딸아이가…… "
 
16
선용은 재우쳐
 
17
"이불!"
 
18
하는 소리에 계집종이 선뜻 땅바닥에서 이불을 집어 준다. 쓰고 들어가려는 이불까지는 마련해 놓았던 모양이었다.
 
19
선용은 이불을 받아 뒤쓰고 성큼 안방으로 들어갔다. 연기가 자욱하고 숨이 칵칵 막히고 처음에는 무엇이 잘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쏟쳐 들어오는 불길이 방안의 반자에 가 당기면서 그 불빛에 희미하게 연기 속으로 사람 하나가 대청으로 난 샛문 앞에 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20
처녀가 이 샛문으로 해서 대청으로 나가려고 하다가 미처 문을 열지도 못하고서 연기를 많이 쏘인 소치로 기절을 하였는지, 흑은 샛문이 밖으로 대청에서 고리가 잠겼을 리는 없고, 안으로 방에서 잠긴 것을 어마중이라 문고리 벗길 생각은 못하고서 문만 두드리다 그만 기절을 하였는지, 아뭏든 선용은 나중 가서 두고두고 궁금거리였었다.
 
21
선용은 처녀를 번쩍 들어 가슴에다 마주 앞으로 안고는 이불로 담쑥 가린 후 휘휘 둘러보았다.
 
22
들어온 앞문으로는 그새 벌써 나갈 수는 없게 되었다.
 
23
뒷벽을 가운데 중방 아래로 힘껏 발길로 내찼다. 우지끈하고 벽은 나가 자빠졌다. 그리고 짐작한 대로 뒤는 아직 그다지 불이 심하지 아니하였다.
 
24
뛰어나와 멀찍이 장독대 옆에다 이불째 내려 뉘었다.
 
25
달빛이 눈 딱 감은 처녀의 얼굴을 분명하게 비췄다.
 
26
어떻게도 이쁜지.
 
27
선용은 진작부터 이쁘게 생긴 처녀가 그 집에 있었거니는 하였지만 이다지도 흠탁하게 이쁜 줄은 몰랐었다.
 
28
선용은 넋을 놓고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비로소 정신이 들어 앞으로 대고 소리를 질렀다.
 
 
29
선용은 집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자 첫닭이 울었다.
 
30
집에는 뜻밖에 서울로 가 사는 누이 내외가 그 날 석양에 당도하였노라면서 와 있었다. 서로가 퍽 반가운 만남이었다.
 
31
집에서는 선용이 짐작하던 대로 모친이 누이 내외랑 함께 그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걱정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32
선용은 외가에서 들러오느라고 저물었다는 말을 하고 곰의고개에서 도적을 만난 이야기며 백생원의 집 불난 데를 뛰어 들어가 이러고 저러고 하였다는 이야기는 짐짓 입밖에 내지 아니하였다.
 
33
밤참 요기를 한다, 누이 내외와 적조하였던 이야기를 나눈다 하느라고 밤이 훨씬 더 깊어서야 자리에 누웠다.
 
34
선용은 몸과 머리가 함께 적지 아니 피로하였으련만 이내 잠이 오지 아니하였다.
 
35
오늘 밤 겪은 일이 꿈결 같았다.
 
36
하룻밤 단 몇 시간 사이에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죽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무엇이 씌워댄 일 같지 제가 한 일 같지가 않았다.
 
37
그러나마 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사람을 죽인 그 손으로 이번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남을 살려내고…… 이런 고르지 못할 데가 없었다.
 
38
일인 즉은 지극히 당연하고 억지와 잘잘못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시없이 모순스러웠다.
 
39
'사람이 한세상 살아가자면 별일이 다 많은 것이로군.’
 
40
선용은 이렇게 여기는 수 밖에 없었다.
 
41
잠을 청하느라고 눈을 감았다.
 
42
백생원네 집 그 처녀의 얼굴이 서언히 보였다.
 
43
갸름한 얼굴에 해맑은 살결, 날씬한 콧날, 초리가 약간 위로 치솟은 듯한 눈, 감은 그 눈의 긴 속눈썹…… 곧 그 감은 눈을 반짝 뜨고 방긋이 웃을듯만 웃을듯만 하였다.
 
44
새벽녘에야 이뭉자뭉하다가 날이 새었다.
 
45
이로부터 선용은 무시로 넋을 잃고 우두커니 무엇을 생각하기를 일쑤하는 사람이 되었다. 백생원 집 처녀를 생각하던 것이었었다.
 
46
누이 내외는 모친과 선용이 만류를 하여 이왕 설이나 쇠고 올라가기로 주저 앉았다.
 
47
매부 강영석은 본시 전주감영(全州監營)의 의원집(醫家) 아들로 지나간 계미년(癸未年)에 서울로 집안이 이사를 하였었다.
 
48
어려서부터 그 부친 밑에서 의술 공부를 하였고 올해 스물여덟인데 요새는 남대문 밖에 새로 생긴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양국병원에 다니면서 사 년째나 양국(西洋) 의술을 공부하노라고 하였다.
 
49
매부 영석은 소일삼아 앉으면 선용에게 서울과 및 세상 물정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었다.
 
50
조선이 갑신(甲申)년 이후로 차차로 개화가 되어가는 이야기…… 나라에서 혹은 민간에서 여러 군데 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보급시키는 이야기, 신문(新聞)이라는 것이 생겨난 이야기, 그동안까지는 목선이나 인태(人駄)로 시골서 거둔 세미(稅米)와 세납전(稅納錢)을 나르던 것을 시방은 큰 화륜선(火輪船)을 쓴다는 이야기, 외국과 통상을 하여 여러 가지 진기한 외국 물건이 들어와 시장에서 매매가 되는 이야기, 인경과 파루를 치는 대신 금천교에서 오시(五午)를 맞추어 '꿍’하고 오포를 놓는 이야기.
 
51
의술만 하더라도 한방의에서는 먹는 약, 바르는 약, 침질, 뜸질 이 네 가지 밖에 없었는데 신식의 양의는 주사(注射)라고 하여 약을 살속이나 핏대(血管)에다 밀어넣는 법이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52
개화당이 갑신(甲申)년에 변(郵征局事件[우정국사건])을 일으키던 이야기는 유독 신이 나서 하였다.
 
53
청국의 외세(外勢)를 배경 삼은 민씨네(閔族) 중심의 수구파들은 조정의 온갖 세력을 자기네 수중에 아그려 쥐고 악정을 함부로 하였다. 지방에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살 수 없게 되는 것도 다 조종에 그런 악한 무리들이 있어 어둔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54
이 썩고 낡은 정치를 그대로 두면 조선은 미구하여 아주 망하고 말게 될 판국이었다.
 
55
나라를 저희 한 몸보다 더 위하고 나라를 남의 나라와 같이 개명케 하여 기우는 국운을 바로 잡으려고 애쓰는 젊은이 한 파가 개화당이었다.
 
56
개화당에서는 갑신년 시월 우정국이 새로이 설치되는 날 민씨네 수구파의 재상들을 잔치에 청하는 체하고 꾀어다 등 뒤에 묻어 둔 장사들을 시켜 한꺼번에 쳐죽이고는 개화당 사람들이 상감을 모셔 새로이 정부를 조직하였다.
 
57
그런지 사흘째 되는 날 청장(淸將) 원세개(袁世凱)가 병정을 이천 명이나 거느리고 대궐로 달려들어 개화당을 돕던 일병(日軍)을 쫓고 상감을 저희 진중으로 모셔갔다.
 
58
이 난리에 개화당 정부는 삼일천하가 되고 개화당 두령들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일본으로 망명을 갔고 조정의 세력은 다시금 수구파 민씨네 손으로 넘어갔다.
 
59
"아 그날 일본공사가 그렇게 꽁무니를 빼지 않고 끝까지 일본군대의 조력을 받아 원세개란 놈을 쫓기만 하였더라면…… "
 
60
이렇게 안타까와하는 말씨로 매부 영석은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61
그러더니 한참만에 한마디 더 하는 말이었다.
 
62
"그렇지만 천하가 다 개화 속으로 나가고 하는데 제깐 놈들이 그걸 막으려고 붙잡고 늘어지면 별수 있나? 또 개화당 사람들이 일시 망명을 간 것이지 아주 없어진 건 아니겠다…… "
 
63
선용은 매부 영성이 말하는 눈치가 십상 개화당이라드냐 하는 그 패에 가담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64
선용은 며칠 동안 영석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것으로 인하여 마음 가운데한 동요(動搖)가 일게 되었다.
 
65
세상은 무엇인지를 하기 위하여 서두르고 있구나.
 
66
나처럼 이렇게 밤이나 낮이나 땅만 파먹고 아무 변화도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물굽이 치면서 자꾸자꾸 흘러가듯이 끊이지 않고 흔들리면서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되 아뭏든 어떤 무엇을 하기 위하여 앞으로 앞으로 세차게 나가고 있구나………
 
67
이렇게 선용은 깨우칠 수가 있었다.
 
68
깨우침에는 동요가 따르기 쉬운 법이었다. 더욱이 가슴에 원한과 불만이 맺혀 있고 진작부터 한바탕 떨치고 나서고 싶은 뜻이 없지 못하였던 선용이었다.
 
69
선용은 생각하였다.
 
70
'그렇다면 나는……’
 
71
'이왕이니 나도……’
 
72
이왕이니 진작부터 마음먹은 바도 있고 하니 일찌감치 떨치고 나서 보는 것이 아닐까.
 
73
잘못하다가 나는 영영 이대로 땅에 묻혀버리고 말는지도 모르는 노릇이니, 일찌감치 떨치고 나서서 물굽이치는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한바탕 세상과 함께 달리어 봄직도 한 것이 아닐는지?
 
74
이렇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곧 뛰쳐나갈 것 같았다.
 
75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저 또한 없지가 못하였다.
 
76
나 같은 녹록한 사람으로 뛰어나가서 대체 할 일이 무엇이며, 무슨 일을 하기론들 와락 변변할 것이 있을까.
 
77
학문이 투철한 바도 아니요, 인품이 두드러지게 잘난 바도 아니오……
 
78
힘꼴이나 쓴다고? 몸이 좀 날쌔고 무예(武藝)나 조금 익힌 것이 있다고 아니 애당초에 내가 힘꼴 쓰는 것을 믿고서 장차에 무슨 짓이라도 하여 보려고 몸 단련을 시키고 무예를 익히고 한 것이 도시에 외람스런 뜻이 아니었던지 몰라.
 
79
더구나 내가 없구 보면 호올로 계신 어머니를 누가 받들며……
 
80
아니다. 부질없은 생각이다.
 
81
차라리 이대로 땅에 묻혀 땅이나 파먹으면서 소리없이 명색없이 가만히 살다가 그대로 소리없고 명색없이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은 도리겠다.
 
82
이러면서 선용은 단념도 하여 보았다.
 
83
그렇지만 한번 뜨기 시작한 마음은 졸연히 갈앉으려고를 아니하였다.
 
84
그리하여 선용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생각을 하여 보던 것이나 졸연히 결단을 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 같고, 그러다가 저렇게 생각하면 저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 같고, 아무리 되풀이를 하여도 매양 그 대중이었다.
 
85
이 동요와 그리고 백생원네 집 처녀의 일사로 하여 선용은 며칠 사이에 알아보게 침울한 사람이 되었다.
 
86
모친과 누이 내외는 무슨 근심이 있는가 하여 누누이 묻고 하였으나 선용은 강잉하여 웃을 뿐 말하지 아니하였다.
 
87
그러자 바로 섣달 그믐날이었다.
 
88
백생원네 집에서 가리 한짝이 세찬으로 들어왔다.
 
89
선용은 태연하였으나 모친은 깜짝 놀라고 의아하였다.
 
90
지체도 다르다고 하면 다르다고 할 수가 있거니와 통히 서로간 내왕이 없는 터인데, 하물며 저편에서 먼저 세찬을 보내다니 모를 일이었다. 선용이 불 가운데 뛰어들어 백생원의 무남독녀 외딸을 구해주었다는 소문이 고을안에 자자하였으나 변두리에 살고 출입이 없는 선용의 모친은 감감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백생원네의 세찬이 놀랍고 의아스럴 밖에 없었다.
 
91
세찬을 가지고 온 하인은 백생원이 선용을 만나보자 한다는 전갈을 하였다. 선용은 의관을 차리고 나섰다.
 
92
선용의 모친은 더욱 놀라고 의아하였으나 아뭏든 아들이 무슨 발신(發身: 出世[출세])이라도 하게 되는 것이려니 싶어 일변 기뻐하였다.
 
93
백생원은 육십이 넘는 노인이었다.
 
94
둘이는 초면이 아니었다. 한 고을 한 동네에 살고 선용은 백생원을 백생원인 줄 알고, 백생원은 선용을 장아무의 아들로 알고 하는 터이라, 길에서는 만나면 선용은 인사를 하고 백생원은 답을 하고 하였었다.
 
95
그러나 그뿐이었다.
 
96
"기운 안녕하시오니까?"
 
97
"오냐."
 
98
서로 이러고서 지나갈 따름이었다. 따라서 피차간 생활상의 교섭이라는 것은 전혀 있은 것이 없고 있을 수도 없었다.
 
99
오늘은 그러나 물론 달랐다.
 
100
백생원은 흔연히 맞이하면서 그날 밤 그렇듯 당황하던 이와는 달리 점잖은 태도로 위험을 무릅쓰고 죽는 사람을 구하여 준 치하엣 말을 하였다.
 
101
"우리 내외가 늙발에 그것 하나를 혈육이라고 얻어 온갖 낙과 여망을 붙이고 살던 사람인데…… 자네 덕택에 끔찍한 일을 아니 당하고 무사했네."
 
102
이런 말도 하고 또,
 
103
"저의 친부 나도 감히 들어갈 염의를 못하고 수십 년 부리던 하인도 제 목숨을 애껴 들어가지를 아니하는데, 자네야 별반 가깝지도 못한 딴 남이 아닌가. 장이 기특허이."
 
104
이런 추앙도 하였다.
 
105
샛문으로 백생원의 부인이 들어왔다. 안채를 불태우고 사랑채에서 건넌방을 임시 안방으로 쓰는 모양이었다.
 
106
부인은 수다하고 흔감스럽다.
 
107
일어나 절하는 선용의 팔이라도 부여잡을 듯이 하면서
 
108
"오온 이 사람아, 세상에 이 은공을 어찌 갚는단 말인가? 우리 내외가 참 머리터럭으로 신을 삼아 주어도 외려 미진하지!"
 
109
"과분하신 말씀도 다 하십니다."
 
110
선용은 겸사를 할 밖에.
 
111
"하늘이 씨여대신 노릇이야. 아 자네가 마침 당돌아니했드라면…… 에구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하지!"
 
112
"………"
 
113
"아 글쎄 내가 그날 마침 절로 일종을 간새 일이 났던가 보데나그려."
 
114
"………"
 
115
"고년이, 고년 삼월이년이 정녕 불앜 단속을 잘 아니했어! 아 그래서 일을 저지르구선, 고년 한 짓을 좀 보게나. 자다 깨서 불이 났으니깐 저 이 애기씨를 깰 생각두 아녀구서 저만 뛰어나왔드라네. 그년을 소조를 생각하면 능지를 해도 아깝지가 않지. 그래 상전을 구할 생각을 아녀구서 저만 살자구하는 년이 어딨다는가? 저는 죽드래도 상전을 살려야 도리에 옳지 않어?"
 
116
"………"
 
117
"그년도 내 손에 반죽음을 했지만 우리 진사께서는 하두 분하구 괘씸하세서 그년 제 어멈 아범을 불러다 곤장이 부러지두룩 닦달을 하셨다네."
 
118
"………"
 
119
"아뭏든 무사했으니 다행일 데라군 없네. 그게 알고 보면 참, 다 자네 덕분이지."
 
120
"사람 된 도리지 별 다른 것이야 있겠읍니까."
 
121
"아암, 사람이 다 참 그래야 허구 말구…… 그래 자네는 올해 연기가 몇인가?"
 
122
"내일이면 스물 셋이올습니다."
 
123
"옳아. 기골두 참 좋구…… 자녀간 몇 남매나 두었는가?"
 
124
"없읍니다."
 
125
"오오 참 내 알지. 자네가 아마 저 연전에 소년 생배(喪配)를 한 그 장서방이겠다?"
 
126
"네."
 
127
"온 가엾은!…… 그래 지끔은 면환은 했겠지?"
 
128
"아직……"
 
129
"온 저런! 자네 아버니가 포흠으루 치패를 했다드니 가세가 어려워 여지껏 면환두 못한 겔세그려! 딱한 노릇두 다 있지."
 
130
"여보, 부인!"
 
131
백생원이 부인을 불러
 
132
"가 애기를 좀 데리고 나오시요."
 
133
한다.
 
134
선용은 속으로 이게 웬 일인고 하였다.
 
135
미구에 처녀가 부인의 뒤를 따라나왔다.
 
136
선용은 차마 외면을 아니하지 못하였다.
 
137
"옥봉아?"
 
138
백생원이 불렀다.
 
139
생각밖에 또렷한 음성으로
 
140
"네?"
 
141
하고 대답한다.
 
142
"이 세상 은혜 가운데 목숨을 구해준 은혜같이 큰 은혜가 없어."
 
143
"네."
 
144
"목숨을 구해 준 큰 은혜 앞에 상하와 내외 예절이 있을 법이 없어."
 
145
"네."
 
146
"이 장서방이 너를 두 세상 살게해 준 은인이야."
 
147
"………"
 
148
"절하고 치하해라."
 
149
가려 섰던 부인이 비키고 처녀 옥봉이 나풋이 팔을 짚어 절을 하였다.
 
150
선용은 황망히 제가 먼저 너풋 절을 하였다.
 
151
절 끝에 순간 얼굴이 마주쳤다.
 
152
역시 그 얼굴이었다. 바탕이 해맑고 갸름하고. 날씬한 콧날. 약간 위로 눈초리가 치솟은 듯한 눈…… 하되 그 눈은 선용의 눈앞에 주소로 밟히는 감은 눈이 아니고 동자 영롱한 뜬 눈이요, 얼굴은 핏기 함빡한 얼굴이요 하였다.
 
153
이 산 얼굴에 눈을 뜬 눈을 보는 것만 하여도 선용은 하마 원이 풀리는 듯 싶었는데 거기다 얹어 방긋 웃기까지 하였으니…… 절 끝에 얼굴이 마주치자 옥봉은 방긋, 아끼지 않고 방긋 웃던 것이었었다.
 
154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한 처녀 옥봉의 얼굴이 주소로 눈에 밟힐 적마다 방금 그 감은 눈을 반짝 뜨고 방긋이 웃을 듯 웃을 듯만 하여 선용으로 하여금 한량없이 마음 조민케 하던 그 웃음을 선용은 지금에 현실로 본 것이었었다.
 
155
부인이 조그맣게 흰 보자기에 싼 것을 선용의 무릎 앞으로 밀어놓으면서 말하였다.
 
156
"옜네. 애기가 자넬 생각허구 실빔 만든 거라네. 변변치 못하나마 가지고 가서…… "
 
157
"……… "
 
158
무어라고든 한마디 대답을 하여야 하겠는데 정신이 현황하여 말이 나와지지를 아니하였다.
 
159
한 걸인이 하루 아침 왕자(王者)가 되어 곤룡포를 입고 옥좌에 올라 앉았다더라도 오늘 이 자리에서의 장선용처럼은 행복을 느끼지는 못하였을는지 모른다.
 
 
160
해가 바뀌어 임진년(壬辰年)이요 정월 초사흗날이었다.
 
161
모친이랑 있는 자리에서 누이가 말을 내었다.
 
162
"올일랑 일찌감치 서둘러서 규수를 맞아들이두룩 해예지 어떡 허는가?"
 
163
"글쎄요."
 
164
선용의 대답은 모호하였다.
 
165
"글쎄요가 다 무언가?"
 
166
"그대지 급한가요?"
 
167
"아니 급허구? 동생두 혼자 지나기가 비편하련과, 어머니 연치가 낼 모리가 환갑이셔. 그런 어머니를 생각해 하루바삐 사람 맞아들여서 편안히 모시두룩 할 것이지 그대지 급한가요 라니?"
 
168
"허긴 그렇지요 만서두…… "
 
169
"어머니두 퍽 범연허셔. 아버지 삼년상 모신 지가 벌써 사년이나 지났는데…… 동생이 제가 나서서 서둘겠어요? 어머니가 서두셔예지."
 
170
"낸들 마음이야 없겠느냐마는 제가 도무지 뜻이 없어 하는 걸 억지루 어떡허느냐?"
 
171
모친의 발명이었다.
 
172
누이가 선용의 얼굴을 짯짯이 보다가 웃으면서 묻는다.
 
173
"동생이 요새 아마 누구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보지? 그렇지?"
 
174
"………"
 
175
선용은 피식이 웃을 뿐이고 누이가 파듯이
 
176
"정녕 그렇지? 내가 옳게 알아맞혔지?"
 
177
"있으면 어떻게 하실료?"
 
178
"내 원 풀어주지 아녀리."
 
179
"………"
 
180
"말해 봐요."
 
181
"허나마나……"
 
182
"어린 숫총각인감? 부끄러 말을 못 하게."
 
183
선용은 누이를 젖혀놓고 모친더러
 
184
"어머니 저어 백생원네 규수 있지요?"
 
185
"응 있지."
 
186
누이가 내달아
 
187
"거 보겠지? 내 짐작이 바루 들어맞었잖아?"
 
188
선용은 다시 모친더러
 
189
"어머니 그 규수가 어떤가요?"
 
190
"선비의 집 규수니 조백이야 빠질 게 없을 테지만서두…… 가만 있자 그 규수가 올해 몇 살이드라? 열…… 일곱인가 그렇지 아마?"
 
191
"전 어려서 너댓살 적에 더러 보았지만 야물게 생겼지요."
 
192
누이의 말이고 모친이 받아서
 
193
"야물게 생겼지. 들엄들엄이 들은다 치면 야물게 생긴 값을 하느라고 퍽 앙칼지구 당돌하다드라."
 
194
선용은 그제서야 비로소 불 가운데 뛰어들어 옥봉을 살려낸 이야기로 부터 그 뒤에 백생원네 집에 불려가서 수작한 이야기까지 전후 일장 사실을 다 설파하였다.
 
195
그리고 그러니 눈치가 응할 듯 싶은 눈치니 청혼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196
"글쎄…… 그렇다면 모르겠다만서두 아전의 집에서 섣불리 양반의 집으로 청혼 갔다 옛날 두껍할멈 짝나면 어떡허느냐?"
 
197
옛날 어떤 노구(老嫗)가 두꺼비를 얻어다 길렀더니 그 놈이 자라 뒷집 장자네 딸한테로 장가를 들여달라고 졸라싸서 노구가 그 청혼을 했다 혼침을 맞았다는 그 이야기였다.
 
198
며칠 후 매파가 선용의 혼담을 가지고 백생원네 집으로 갔다.
 
199
간 지 얼마 아니하여 돌아오는 매파는 입이 석 자나 나와가지고 두런거렸다.
 
200
"객적은 짓이라고 아녑디까? 애꿎인 내가 하마 성문 맞일 뻔 했소?"
 
201
그러고 나서 매파는 소경사를 이야기하였다.
 
202
매파는 가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던 끝에 넌지시 장씨네와 혼담을 꺼내 놓자 부인은 단박에 퍼르르하더니 문을 차고 백생원의 방으로 건너갔다.
 
203
"아니, 영감은 그래 무슨 망녕으루 그놈을 청해다 앉히구 분분한 치하를 하셔, 애기 알라 불러내다 절을 다 시켜셔, 그리시군 이 봉변을 허슈?"
 
204
"무엇이 어쨌길래 그러시오?"
 
205
"그 장가 집에서 우리 애기허구 그놈 홀애비 놈허구 혼인하자구 매파가 왔다우."
 
206
"무엇이 어째구 어째? 아 이런 발칙한 놈들을 보았나? 응? 아무리 말세기로서니 저이가 어딜 감히…… 이놈을 붙잡아다 당장…… "
 
207
"도시가 영감 불찰이십넨다."
 
208
"그 매파 계집 게 있소? 있거든 일러루 불러오우."
 
209
매파는 벌벌 떨면서 백생원의 앞으로 나갔다.
 
210
백생원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이었다.
 
211
"네 이 계집…… "
 
212
"거저 통촉하십시요."
 
213
"우선 너를 정강이가 부러지도록 성문을 칠 것이로되, 나이로 보아 십분 참는 것이니 가 내 말대로 이르렷다."
 
214
"분부대로 시행하옵지요."
 
215
"쌍놈이 우연한 계기에 양반댁에 은공을 끼쳤기로 내가 저를 불러 그만침 치하를 했어. 당자 댁의 애기가 나와서 상하귀천과 내외 분별 가리지 않고 치하를 했어. 그랬으면 제가 오히려 황공히 여겨야 옳지 방자스럽게 댁으로 혼인을 청해?"
 
216
"지당하십니다."
 
217
"내가 조금만 젊은 혈기였으면 놈을 잡아다 당장 물고를 냈을 테야."
 
218
"여부가 있으십니까."
 
219
"다시는 그따위 생의를 했단 일호 용서가 없을 테라고, 응?"
 
220
"네에."
 
221
매파는 설설 기면서 쫓겨온 것이었다.
 
222
선용은 비록 흉허물이 없는 모친의 앞이요, 누이 내외의 앞이라고는 하지만,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게 부끄러웠다.
 
223
그러면서 한편 아전 ——— 쌍놈의 해폐가 뼈에 사무치도록 분하였다. 이가 절로 갈렸다. 분한 대로 하면 당장 쫓아가 오만한 그 늙은 것들을 한 주먹에 박살을 내고라야 말 것 같았다.
 
224
선용의 가슴에 맺힌 양반이란 것에 대한 반감과 증오는 이로 인하여 한결이나 더 골똘한 것이 되게 되었다.
【원문】2. 양반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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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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