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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女子)의 일생(一生) ◈
◇ 사랑 있는 둥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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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5
채만식
1
女子[여자]의 一生[일생]
 
2
2. 사랑 있는 둥우리
 
 
3
고의적삼 바람에 초립만 쓰고 읽던 『맹자』를 옆에 끼고 새서방 준호가 대문간을 지나 차면 안으로 들어선다.
 
4
집안은 안방에만 불빛이 환하고 건넌방은 깜깜하고 두루 조용하고 하여 전과 아무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그 사이 큰 풍파가 일었던 것을 알 바가 없고 소년은 오직 매일 밤의 버릇대로 이 밤이 즐거우냐 불행하냐를 가슴속에 점치면서 총총히 섬돌 아래까지 다다른다.
 
5
섬돌로 올라서면서는 제법 어른스럽게 밭은기침과 함께
 
6
“삼월아?”
 
7
하고 부른다. 삼월이를 찾는 것이 아니라 모친한테(모친한테보다도 장가를 든 뒤로부터는 새댁 진주한테) 제가 들어온 기척을 하는 뜻이었다.
 
8
부르는 소리와 동시에 윗문이 가만히 열리면서 새댁이 방긋이 웃는 얼굴로 마루로 마주 나온다. 준호는 우선 마음이 놓이고 즐거웠다.
 
9
집에 들어 졸연히 즐거움이라고는 없는 준호에게도 꼭 세 가지는 즐거움이 있을 수가 있었다. 석양에 학교로부터 돌아와서나 글방으로부터 돌아와서나 준호는 새댁이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방긋이 웃으면서 마주 나와주는 것이 첫번의 즐거움이었다. 반대로 새댁이 얼른 보이지 아니하거나 보여도 기색이 좋지 못하거나 하면 그만 마음이 언짢고 슬프다.
 
10
준호의 그러는 근경을 잘 알고 있는 진주는 방금 어떠한 일이 있었더라도, 가령 오늘 밤 같은 풍파를 겪고 나서도 정신을 수습하고 마음을 평화히 가졌다.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아들이기를 범연히 하지 아니한다. 밤이요 어둔 마루건만 준호는 직감적으로 새댁의 얼굴이 웃는 것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만큼 예민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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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이 모친이었다.
 
12
안방으로 들어가 무릎 꿇고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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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다녀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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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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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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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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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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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부인은 말없이 고개만 가볍게 끄덕이다 이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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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가 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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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영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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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비로소 가슴 조마조마하던 것이 갈앉고 살아난다. 둘쨋번의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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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고 건너가 자거라 하는 대신 며느리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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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자리 가져오느라!”
 
24
하면 준호는 둘쨋번의 즐거움이 물론이요 그 다음에 올 세쨋번의 즐거움마저 잃어버려야 한다. 실망하여 밤참도 마다하고 새댁이 모친의 옆에다 펴주고 물러가는 자리에 꼬부리고 누워 고달픈 꿈을 맺는다.
 
 
25
뜻밖에 모친이 방에 있지 아니한 것을 보고 준호는 뒤따라 들어오는 새댁더러 눈으로 묻는다. 진주는 섬뻑 무어라고 대답할 바를 몰라 주저주저한다. 준호는 기다리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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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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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 외삼춘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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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외가 즉 박씨부인의 친정집이었다. 한 동네요 해서 무시로 서로 오고가고 할 뿐 아니라 화가 나서 나가는 날이면 그건 영락없이 친정집이었지 갈 곳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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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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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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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준호는 눈을 깜작깜작 무엇을 생각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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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무시구 오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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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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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얼굴에 안도의 빛이 서언히 떠오른다.
 
36
부친을 일찍 여의고 없고 오직 하나의 어버이요 어머니였다. 웬만만 하여도 그 어머니를 한시라도 못보면 아쉬워할 열두살박이 소년이 도리어 어머니 없은 시간을 은근히 다행스러할 이치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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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에미 자식일수록 다잡고 엄히 길러 행신과 처세 범백이 빠짐없고 단정해야만 남에게 후레자식 소리를 아니 들으며 가문에 욕을 아니 끼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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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박씨부인의 이른바 훈육방침의 대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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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까지 가고 한 어른놈이 하인을 점잖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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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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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동무나 부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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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아? 삼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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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고 얼마나 꾸중을 들으며 종종 매도 맞았던지 모른다.
 
44
아침 일어나기를 몇 분 더디 하였다고 글을 못 외어 바친다고 매질이 난다. 걸음걸이가 의젓하지 못하다고, 의관을 똑바로 아니한다고 가벼워야 꾸중이요 그렇지 않으면 역시 매질이다. 제향날 지방을 한 획만 함부로 그었거나 축을 한 자만 잘못 읽은다치면 이튿날 반드시 볼기를 맞아야 한다. 누구와 혹시 싸우거나 다툼질을 하였단 보아 ── 별로 싸우거나 다툼질을 하는 아이도 아니지만 혹시 말이었다 ── 연유와 시비는 어디 가있던 반 죽고도 남는다. 돈 같은 것은 여간하여서 피천 한푼 제 마음대로 쓰라고 손에 쥐어주지를 아니한다. 소년은 위태한 가지에 깃든 새와 같이 저무나 새나 불안코 조심이 되어 일시도 지기를 펴볼 날이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벌써 모친이 있고, 모친의 온갖 간섭과 책망과 매질이 있고, 상투와 피곤함과 글읽기가 있고 한 하루가 변함없이 기다리고 있다. 그만 가슴이 납덩이를 삼킨 것처럼 무겁고 저절로 이마가 찌푸려진다. 이리하여 소년은 좀처럼 마음이 거뜬하고 편안할 겨를이 없고서 늘 찌뿌듬하니 걱정스럽다. 들거나 나거나 공부를 하면서나 쉬며 놀면서나 혹시 또 재미있는 일이 있을 때까지도 마음은 언제든지 한 가드락이 뜨윽 걱정스러 가지고 있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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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엄히 길러서 물론 나쁠 며리는 없었다. 그러나 박씨부인은 없는 남편을 대신하여 그 엄격한 아버지 노릇도 하여야 하던 것이지만 일변 지극한 자애를 가지고 임하여야 하는 실로 어머니로서의 의무가 없지 아니한 몸이었다. 그리하건만 자애란 고물도 비치는 것이 없고 그저 엄히 엄히 하면서 가혹히만 굴기로 주장이었다. 그도 남의 어머니거든 하물며 그 자식이 어떤 자식이라고 마음에까지 소중하고 사랑겨웁지 아니하다면 오히려 빈말이리라. 사실 마음으로는 끔찍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그러면서도 일체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어 말 한마디 낯색 한번 상냥히 하여 주지를 아니하였다. 결국 그리하여 박씨부인은 자식을 엄히 기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학대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어머니라기보다도 소년의 사지를 꽁꽁 결박짓고 머리를 내리누르고 하는 무형의 밧줄이요 무형의 바윗돌이요 할 따름이었다. 그의 훈육방침은 활발히 뛰놀고 맘대로 웃고 소리지르고 하면서 씩씩히 자라갈 열두살박이 선머슴더러 부처님같이 얌전하고 시집 온 새각시같이 말치 없기를 고문하는 형틀(刑具[형구])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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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두렵기만한 어머니고 보매, 소년이 정을 붙이고자 한들 붙일 길이 있으며, 따르고자 한들 따를 길이 있을 바 만무한 것이었다.
 
 
47
진주와 준호 저희들끼리의 비둘기 둥우리 건넌방에서……
 
48
진주가 삶은 밤을 벗겨 쟁반 한옆에 놓고 놓고 하는 것을 준호는 그 앞에 가 앉아서 첨사로 찍어다 입에 넣고 넣고 한다. 뒷문에 드리운 발로 간간이 바람이 스며들어 놋촛대의 육촛불이 너울너울 흔들린다. 잘 닦은 장롱과 반닫이가 그 백통장식들이 불빛을 받아 으리으리 윤이 난다. 진주가 밤을 벗기고 있는 은장도(銀粧刀)도 손가락의 굵은 은가락지도 또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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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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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먹구 싶잖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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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가 밤을 또 한 알 찍어올리면서 권하고 진주는 웃으면서 대답이다. 밤참에 입맛을 다시는 적이 없는 줄 알면서도 준호는 언제나 몇 번이고 권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그는 진주가 정말로 먹고 싶지 않아서 먹지 않는 것이 아닌 줄을 모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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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쪽밤이 나왔다. 준호는 그 한쪽을 찍어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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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밤 혼자 먹으믄 덧니 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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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만 잡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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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만 먹으믄 응…… 쪽니가 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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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떡허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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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깐 둘이 노나먹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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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찍은 밤쪽을 진주의 입 바투 가져다 대어준다. 진주는 까르르 웃어지려는 것을 손등으로 입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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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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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가 먹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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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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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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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할 수 없이 밤쪽을 뽑아다 입에 넣는다. 그리고는 둘이 서로 보면서 새로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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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으로 큰 압박이 있는데다, 겸하여 휴식과 수면을 충분히 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년 준호는 한창 자라기 시작할 나이면서도 발육이 정지된 듯 살도 오르지 아니하고 더 크지도 아니하고 빼빼 야위어 가지고는 밤낮 고만하고 있다. 가냘픈 몸집, 가느다란 목, 그 위에 가 올라앉은 커다란 머리통, 어웅한 눈…… 보기에조차 위태위태하다. 체질이 본판 약한 것이라고 인삼과 녹용으로 보약을 장복시키나 살을 깎아내고 피를 졸여주는 과로와 정신적 압박이 있는 이상 아무런 소용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소년에게 일맥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지나간 봄 혼인을 한 이후부터 시작된 진주의 다정스런 마음성과 알뜰살뜰한 거천이었다.
 
65
잠은 소년의 무엇과도 바꾸기 어려운 욕망이요 낙이었다. 글방으로부터 돌아오는 그는 눈을 뜨지 못한다. 그러던 그가 새댁이 마루로 마주 나서주게 되면 단박 눈이 초롱초롱하여진다. 그러고는 저희들의 비둘기 둥우리로 들어와서는 밤참도 먹고 하면서 잠시 동안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잠을 잔다. 또 그래야만 잠이 오는 것이다. 이것이 소년의 집에 들어 세쨋번의 즐거움이요 최고의 즐거움이었다. 지금에 만일 소년에게서 진주를 빼앗아버린다고 하면, 그의 실망과 타격은 말할 수 없이 심각할 것이었다.
 
66
“바느질 또 허우?”
 
67
이부자리를 펴고 있는 진주더러 준호가 묻는다.
 
68
“행전허구 쾌자허굴 못다 마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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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일러루 안 가지구 오우?”
 
70
“안방으루 가서 해예죠! 어머님이 혹시 오시드래두……”
 
71
“안 오신다믄서?”
 
72
“오신다구두 아니 오신다구두 아녀셌은깐 막상 몰라 기대려 드려예죠!”
 
73
“그럼 난?”
 
74
“얘기허다 잠드신 거 보구서 가께요!”
 
75
처음부터 진주는 아까 인 풍파는 씻어 덮어두고 말을 비추지 아니하기로 하였다. 눈이 부으면 눈치를 채일까 보아서 그런 생각을 하고 울음도 이내 거두었었다. 내일이건 언제건 종차 아는 때 알고야 말값에 구태여 미리서 알게 하여 일껏 편안한 마음을 흐트려주고 싶지가 아니하였던 것이다.
 
76
준호는 초립과 망건을 벗다가 그 끝에 문득 생각이 나서
 
77
“난 언제나 머릴 깎우!”
 
78
“그래두 아무때구 어머님이 깎아라 헤세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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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죽겠는걸!”
 
80
“애야 어머님 허락 없인 깎지 말아요 응?”
 
81
“서울루 유학 갈댐 깎으라실까?”
 
82
“서울루 공부 가라시나요?”
 
83
“지끔은 한문 공분 만날 소용 없대! 서울 가서 신학문 학교공부 많이 해예지 허지……”
 
84
“그랬으믄야 좋지만서두 어머님이……”
 
85
“안 보내주시믄 난 머 몰래 도망해 갈꺼!”
 
86
“에구우! ……”
 
87
“일없어! 난……”
 
88
“그럼 못써요!”
 
89
“지끔은 신학문 못헌 사람은 아무것두 못헌대! 병신이래!”
 
90
“건 그렇지만서두 어머님 몰래 그랬다 어떻자구요? 학비랑은 누가 대주구……”
 
91
“밥값이 십 원이구. 십 원만 더 있으믄 된대!”
 
92
“다달이?”
 
93
“응!”
 
94
“어머님이 안 대주시믄 다달이 이십 원이 어디서 나우?”
 
95
“외삼춘더러…… 후제 도루 다아 갚아 드리마구……”
 
96
“외삼춘이 그리 넉넉하세야죠?”
 
97
“………”
 
98
“지금 삼학년인깐 내년 내후년 아녜요? 그러니깐 안직 여기 학교공부나 부지런히 허지 벌써버틈 그렇게 맘 떠가지구 그럼 되려 못써요! 응?”
 
99
“응!”
 
100
고집이 노상 없는 바가 아니나 이른 말도 잘 듣는 소년이었다. 진주의 말이면 더구나 잘 들었다.
 
101
어느덧 숨결 소리가 고르게 들렸다. 진주는 베개며 처네 같은 것을 다독다독 잘 고쳐 주고 다스려 주고 한 후에 살며시 그 옆을 일어선다. 기다렸던 듯 닭이 홰를 치고 운다. 이어서 멀고 가까이 닭 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안방에서 괘종이 땡땡 두 번을 친다.
 
102
‘벌써! ……’
 
103
오래지 않아 날이 밝을 생각을 하고 비로소 밝는 아침의 걱정이 일시에 눌렸던 머리를 쳐들면서 가슴에 탁 맞힌다.
 
104
별수 없었다. 내일 조반 후에 삼월이나 앞세우고 시외삼촌댁으로 쫓아가는 것이었다. 시집 온 지 겨우 다섯 달, 아직껏 대문 밖에도 나서 보지 아니한 새각시로 쓰개치마 뒤쓰고 행길을 나간다는 것이 심히 온당치 못함이 아님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니 가는 수는 없었다. 가서 시외삼촌 내외분의 만류와 권념도 있고 하는 자리에서 그저 죽여 주십시오 손이 발이 되게 비는 것이었다. 그렇게 가서 빌어서 들으시면 만행이요, 아니 들으신다 치더라도 그러는 것이 나 할 도리를 하는 것이었다.
 
105
너무 선선할 것 같아서 진주는 발을 걷고 뒷문을 닫는다. 그러고는 촛불을 끄고 나오기 전에 방안을 미진한 것이나 없나 하고 한 바퀴 둘러보다가 눈이 새서방의 무심히 잠든 얼굴에 멎은 채 오래도록 옮기지 못한다. 그러다 훨씬만에 가벼운 한숨과 더불어 이슬이 눈가를 적신다. 사랑스럽고 애처로운 그 두 정이 그새보다 유난히 더 샘물 솟듯 곡진하게 솟아오르던 것이었었다.
【원문】사랑 있는 둥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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