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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날. 일요일 외의 노는 날이란 언제든지 유달리 반갑다. M지의 창작란을 읽다. 그달 잡지가 책상 위에 그득히 쌓여 눈앞에 어른어른하는 동안에는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월초에 그달 잡지는 ─ 적어도 창작란만은 다 읽어 버리겠다는 작정이 달마다 틀어져 요사이 와서는 월초는새로 잡지와 씨름하다 나면 어느덧 한달 30일이 다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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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작가의 작품 매우 훌륭하다. 간결한 필치가 줄기줄기 육박하여 오는 가작. 심히 익숙한 솜씨가 아마도 자전적의 소설인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힘차게 울려올 수 없겠지. 전반은 진득하고 침울하고, 후반은 행복스럽고 ─ 필치에는 경중이 없으나 후반보다 전반이 훨씬 좋다. 행복스런 인생의 면이 ‘이이지’ 에 흐르기 쉬움에 반하여 역시 괴로운 인생의 면이 더 많이 훌륭한 예술이 되는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이, 아니 고금의 위대한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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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혼자 화로 밑 숯불을 피우고 「주리야」 기고. 편지로 온 부탁을 편지로 간단히 승낙하였으나, 승낙해 놓고 보니 큰 짐을 맡은 듯한 느낌이 새삼스럽게 난다. 반년 동안이나 어떻게 끌어 나가노. 어차피 피를 기울여 가며 새겨 갈 작품도 아니요, 아직 그럴 때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또 그것이 심심풀이의 장난이 아닌 이상 괴로운 느낌은 일반이다. 전편(全篇)의 이야기도 만들지 못하고 구상도 서지 않은 채 원고지에 향하니 머리 속이 실오리같이 어지러워 몇 시간을 걸려 겨우 넉 장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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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때 Y씨 못 오겠다는 통지. 하는 수 없이 밤에 혼자 M씨 댁을 찾다. 단 두 내외의 홋홋한 가정. 부인은 지적명모(智的明眸)를 가진 가인(佳人) ─촌에서 찾아보기 드문 신경미의 소유자. 이곳에서 문학을 서로 이야기할만한 분은 Y씨와 이 M씨 가족쯤이다. 취미와 정서란 혈연을 넘어서 족히 결합되는 것, 목적인 불어(佛語)보다도 잡담 쪽이 훨씬 성에 맞는다. 멕시코까지 갔다 온 분인 만큼 해외 사정에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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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로부터 원고 재촉의 엽서 래(來). 내월(來月)부터 실리려고 생각하였던 것이 작정이 틀려 황급히 붓을 잡다. 오정까지 다섯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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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大朝)》에 실린 다와자키(谷崎)의 수필을 읽고 그의 지필벽(遲筆癖)에 안심하다. 모든 대외관계를 끊고 하루 종일 방에 들어박혀서 애를 써야 겨우 4, 5매, 즉 신문소설의 1일분을 쓴다는 그의 고백에 웬일인지 안심이 된다. 자라를 달에 비기는 것은 아니지만 종일 들어박히면 십여 매는 쓸 수 있으니 그만하면 족하다고 생각. 지필과 속필은 재분(才分)과 소질의 정도를 떠나 순전히 생리적의 것인가 한다. 글 쓰는 사람이 지속(遲速)을 염려할 필요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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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합 10매. 방이 너무 덥고 공기가 건조해 목이 깔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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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남 가서 진하고 뜨거운 커피 한잔 먹었으면 ─ 으슬으슬 추우니 반일 동안 커피 망상만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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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거의 인이 박힌 듯하다. 평생 커피 편기(偏嗜)하였다는 발자크의 풍류를 본받아서가 아니라 언제부터인지 모르는 결에 깊은 인이 박혀 버린 것이다. 그러나 시골서는 좋은 커피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낟 채로 사다가 찌었다는 진짬 ‘자바’ 를 나남 끽다점(喫茶店)에서 나누어다가 넣어 보아도 진짬 맛은 나지 않는다. 찧어서 통에 넣은 ‘브라질’ 같은 것은 두 층이나 맛이 떨어진다. 서울서 진한 다갈색의 향기 높은 ‘모카’ 를 마시는 동무는 얼마나 다행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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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양 영어 배우러 오다. 두 혈강(頁講) 받고 보내다. K관 탕욕에서 돌아와서 속고(續稿) 10매. 며칠간에 쓴 것 도합 22매. 시일 관계로 이것만으로 1회분을 삼아 투봉(投封)하고 S에게의 편지를 첨서(添書)하다. 원(媛)에게 부탁하여 명조(明朝) 제1편에 부칠 작정. 자리에 누우니 한 시를 훨씬 넘다. 두통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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