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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8
계용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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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3
대문을 들어서자 건너방 문 소리가 나더니 전에 없이 처조카 아이가 마주 달려나오며 숨이 찼다.
 
4
“짐, 짐이 왔어요.”
 
5
이 소리를 내가 들으면 오죽 반가워하랴, 어서 일러 드리고 싶은 마음에나 들어오기를 조급히 기다리고 앉았던 모양이다.
 
6
“짐, 짐이 두 짝이래요.”
 
7
여전히 찬 숨이다.
 
8
“짐이 왔어! 두 짝?”
 
9
사실 반가웠다.
 
10
8·15 이후 굳어진 삼팔선 때문에 겨울옷 한 벌을 댕그라니 입은 그대로 초라히 고향을 떠나 올라와, 이불 한 자리밖에 더 마련을 못 하고 오늘까지 해로 이태, 스물넉 달 동안을 사철 두루 그 옷 한 벌로 지냈다. 그나마 새 것이나 입고 왔더라면 그래도 좀 나을 것이 삼팔경계선에서 입은 옷까지 벗기고 내의만 남겨 돌려보내는 일도 없는 일이 아니라고들 해서 옷을 벗기울 예정으로 일부러 낡은 것을 택했던 것이다. 몇 달이 못 가서 사타구니 짬이 히룽히룽 물러나며 엉덩이에 창이 드러난다. 이런 걸 천연하게 입고 뻐젓이 나다니게까지 그렇게 나는 탈속을 못했다. 창피해서 그래도 꿰어지지 않은게 좀 낫지 않을까, 일정 시대 강제에 못 이겨 입던 정말 입기 끔찍한 그 소위 국방복으로(이것은 내 자식이 삼팔선을 넘을 때 입고 온 것) 바꾸어 입었더니 그나마 며칠이 못 가 엉덩이 판이 해작해진다. 이럴 바에야 하필 국방복을 입잘 필요가 없어, 벗어 던졌던 그 동복을 도로 바꾸어 입었다. 이러구러 또 다시 여름을 맞아 벌써 베옷에 노타이가 희끗희끗 날마다 늘어 가는데 동복 그나마도 여지없이 해어진 걸 더덕더덕 꿰매 입고 땀을 흘리며 다니자니 짐이 왔다는 소리가 아니 반가울 수가 없다.
 
11
“두 짝이래? 잉이 짐이?”
 
12
나는 다시 재차 물었다.
 
13
짐이 두 짝이면 시재 입고 살 건 가져왔을 것이다. 눈이 번쩍 뜨인다. 마루 위부터 살펴보았다.
 
14
그러나, 마루엔 아침에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배급 받아다 놓은 밀가루 자루가 댕그라니 하나 안쪽 구석에 놓여 있을 뿐, 아무것도 눈에 뜨이는 것이 없다. 방안에 들여다 놓았나 구두를 벗고 올라서려는데,
 
15
“봉래정으루 다 왔다구 이자 태진이가 와서 그래서 고문 짐 가지러 갔어요.”
 
16
뒤에 달려 들어오며 처조카 아이는 또 전한다.
 
17
봉래정이란 누이의 집이다. 제 남편이 역시 8·15 이후 서울로 올라 와선 내려오지를 않으므로 궁금해서 올라와 보니 집 한 칸을 못 쓰고 전재민이 들어 있는 봉래정 어느 무너져 가는 시멘트 창고 비슷한 움막에 방이라고 신문 조각을 발라 꾸려 놓고 들어앉아 박봉으로 허덕이는 젊은 홀아비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서른도 아직 먼 한참 혈기에 돈 일천 오백 원에 목을 매고 늘어져서 점심도 못 먹고 밀 수제비 빵 조각으로 조석의 끼니나마 간신히 이어 가는 딱한 사정을 목도하였을 때 아내로서의 누이의 마음은 자못 처량하였던 것이다. 다시 집으로 내려가 가장 집물을 다 팔아 올려다 가두에 나앉아 빈대떡 장사라도 해야 살 것 같아 삼팔선을 다시 넘어간다고 해서 이왕이면 그럼 우리 짐도 좀 가져다 줄 수 없겠느냐고 아내는 부탁을 했던 것이다. 부탁은 하면서도 원체 곧잘 잃는 짐이요 떼이기가 일쑤인 짐이라, 무사히 올라올 것인가가 자못 의문이었다.
 
18
작년 가을 아내도 내가 혼자 와 있는 것을 염려하여 시재 필요한 옷가지를 륙색에 한 짐 넣어 짊어지고 오다가 기어코 말썽이 생겨 해주 어느 안다는 여관에 맡겨두었던 것이 그 후 도적을 맞았노라고 빙자하고 내어주지를 않아 한 가지 건지지 못하고 온통 잃어먹은 예도 있다. 그리곤 다시 옷을 가져올 생념이 나지 않아 거지 모양으로 차리고 한번 삼팔선을 넘어온 그대로, 방공연습에 끌려 다니며 입던 소위 그 몸빼(이것도 아내가 뺏길 예정으로 일부러 택해서 입고 올라왔던 것) 한 벌에 싸여 치마도 없이 삼동을 났다. 내 매부보다는 그래도 그 수입이 좀 나은 편이나 월급 푼에 약간의 고료가 받쳐지는 그러한 정도의 수입으로는 먹고 사는 데만도 여유가 없다. 그런 데다가 이북 고향에서 알몸으로 연일 넘어와 며칠씩 묵삭는 손님이 큰 부담이다. 입는 데까지 눈을 넘겨다볼 겨를이 없었다. 아내 역시 옷가지가 올라왔다는 데 아니 반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곧 달려간 눈치다.
 
 
 

2

 
20
이윽고 대문이 밀리고 아내가 들어서는데 보니 머리 위에는 손재봉틀 한대가 위태롭게 얹혀 있다.
 
21
“아아니! 재봉틀두 가져왔어?”
 
22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옷가지도 어려운 데 재봉틀까지…….
 
23
“아니, 걔가 이걸 어떻게……?”
 
24
“글쎄 말이예요. 아이 고생 무척 했나 봐요.”
 
25
아닌 게 아니라 고생은 무척 하였을 게 빤하다.
 
26
“청단(靑丹)으루 왔대? 배루 왔대”
 
27
“청단으루 오면서 배두 타구 하다가 국경을 넘어서야 차를 탔대나요. 아이, 여자가 혼자서 그걸 어떻게 드다루구…….”
 
28
“제 짐두 있을 텐데”?
 
29
“있다뿐이겠어요! 방안으로 하나를 가져다 놨는데.”
 
30
아내는 그 육중한 걸 이고 봉래정서 이까지, 꽤 목이 아픈 모양이다. 목을 좌우로 지긋둥지긋둥 일며 운동을 시키더니,
 
31
“아, 참 좁은데 어서 남의 짐은 치워 줘야겠더라. 범수(처조카) 너 얼른 짐 좀 가서 가져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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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고 아내는 마루로 올라와선 재봉틀을 떠나지 못하고 붙들고 앉아,
 
33
“아이 저걸…… 저걸 글쎄 누이가 가져왔구만.”
 
34
하고 어떻게나 만족해하는지 모른다.
 
35
옷도 옷이려니와 재봉틀에도 여간 목이 말랐던 아내가 아니다.
 
36
얼마 전 꿰어진 내 양복을 들고 남의 집 걸 좀 얻어 써 볼까 떠났다가 병이 났노라, 혹은 바늘이 없노라, 심지어는 쇠를 잠그고 쇠를 잃었노라 하고 빌리기를 거절하는 집까지 있어 재봉틀 생각이 더욱 간절했던 데다가, 재봉틀 한 대만 가졌으면 여자도 제 밥벌이는 근심이 없다는 소리를 어디서 얻어듣고는 삯바느질이라도 해서 군색한 살림에 보탤 의향으로 재봉틀을 어떻게 하나 구했으면 하고 말을 하다간 그것이 까마득한 공상임을 미루어 보고는 한숨을 짓곤 하던 그 재봉틀이다. 그런 재봉틀이 뜻밖에도 왔다. 생활의 밑천이 이젠 생긴 것이다. 여섯시를 들어가건만 저녁 지을 생각도 않고,
 
37
“상헌 덴 없나?”
 
38
“인젠 또 실을 사야지. 참 이비갬질 기계가 쫓아왔는지 모르겠군.”
 
39
하고 벌써부터 바느질 설계를 세우는 듯이 손잡이를 둘러 보고, 뺄함을 열어 보고 하며 수선이다.
 
 
 

3

 
41
짐은 밤에야 왔다.
 
42
둥글둥글한 시꺼먼 보자기가 커다란 고리짝 하나만은 한 부피다. 이태나 묵은 껍데기를 갈아입혀 줄 짐 속이라, 이 짐 속이 급하게 엿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짐 앞으로 대뜸 나앉았거니와,
 
43
“고춧가루도 넣었대더라, 사발두 넣구.”
 
44
하고 아내도 덩실 나앉으며 먼저 짐에다 손을 댄다. 과연 고춧가루 단지, 사발개가 짐 속에서 디그르르 미끄러 떨어진다.
 
45
“이것 보지! 아이, 어머니가 객지에서 이런 게 오직 귀할까 염려스러워 다 넣어 보냈으리 -.”
 
46
이런 것에까지 생각이 미친 어머니를 못내 감사해야하는 듯이 중얼거리며 미끄러지는 족족 들어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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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장보기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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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참 꿈 밖이라는 듯이 신기해서 나더러도 어머니의 그 주밀한 솜씨에 감사의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들어내 가지곤 내 눈앞에 내민다. 나는 보기도 싫었다.
 
49
알루미늄 대접 두 개밖에 산 것이 없고, 미국 통조림 깍대기로 밥그릇을 대용하고 있는 그러한 형편이라, 주발 같은 것도 필요치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밥만 있으면 그릇은 문제가 아니다. 지금 모양으로 바가지에다 한 그릇 그냥 떠다 놓고도 통조림통 몇 개면 얼마든지 들어붙어 나누어 먹을 수가 있다. 벗고서는 나다니는 수가 없다. 시급한 문제가 옷가지다. 우선 겨울 양복을 벗어야 살겠다. 그 그릇들 대신에 실제적일 옷가지를 한 가지라도 더 넣었으면 하는 생각에 나는 도리어 불쾌하기까지 했다.
 
50
“이건 또 당신 밥 담아 잡숫던 합(盒).”
 
51
“아이! 내 것두 올려보냈어.”
 
52
아내는 노상 혼자 흥이 나서 기명을 들어낸다. 이런 걸 다 꺼내 놓고 이불 한 자리, 요 한 자리를 들어내니 입을 것이라곤 겨우 아내의 바지 두 개에 치마 하나, 그리곤 겨울에 입을 내 명주 바지저고리 한 벌뿐, 꿰어진 버선목다리를 빨은 게 다섯 켤레가 된다. 그리고 나중에 남은 손보자기를 풀어헤치니 버선을 기워 신으란 건지 필(疋)도 아닌 쓸데도 없는 조각 무명 오락지가 그 손보자기로 하나이 가득했다.
 
53
기가 막힌다. 양복 한 벌 없다. 내의 한 벌 없다. 대체 이 짐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도 자유로 다닐 수 없는 삼팔선, 이 삼팔선을 짐을 가지고 넘어오는 모험, 이런 모험이 다시 두 번 있을 것 같지 않은 이 기회에 기껏 가져왔다는 것이 없어도 무방할 밥 그릇이요 버선목다리 따위다. 이것이 꾸리는 짐에 주요시되었던 게 분명하다. 이건 필시 저쪽에서 올려 보낸 사람보다 이쪽에서 이른 사람의 잘못인 탓 같아 보인다.
 
54
“여보! 누이더러 어떻게 짐을 가져오라구 일렀기에 대체 온 짐이 이 모양이오?”
 
55
나는 이렇게 아니 물어볼 수 없었다.
 
56
“이르긴 머 버선 한 켤레 없어 버선까지 사 신는 형편이라구 그랬지요.”
 
57
“그리군?”
 
58
“그릇두 없어 바가지에다 밥을 퍼다가 먹는다구 그랬구요.”
 
59
답답한 소리다. 화가 벌컥 동한다.
 
60
“그랬으니 짐이 이렇게 된 게 아니요?”
 
61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울렸다.
 
62
“그만침 일렀음 다 없다는 소린 줄 알게 아니에요? 누이 저두 와서 형편을 보기까지 했는데.”
 
63
“어머니 같으신 시굴 노인이 서울 있는 지금 우리 형편을 어떻게 그렇게 소상히 안단 말이요? 들음 듣는 대루 짐작할 따름이지, 일러 보내길 똑똑히 일러 보냈음 안 이렇게 되요, 짐이? 듣는 말이 짐 한 짝 넘기는 데 사천 원이라구 하는데 두 짝임 돈이 얼마야? 입을 것두 없는 장종백이, 버선목다리를 가져다 놓구 돈이 만 원이야, 만 원!”
 
64
안타까움에 나는 다시 책상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65
그 중 돈이 됨직한 이불이니 요니, 바지저고리 따위 같은 건 다 주워 팔아도 실상 이 짐삯 만 원을 지울 것 같지 못하다. 빈대떡 장사라도 해서 어떻게 살아 보겠다고 삼팔선을 넘어가 모험을 해온 돈이다. 갚아 줘도 시급히 갚아 줘야 할 경위다. 눈앞이 다 아득해진다.
 
66
“인젠 재봉틀을 팔아 짐삯을 물어 줘야겠소.”
 
67
홧김에 한 말이긴 하나 실상 이렇게 아니 되고는 만 원 구처가 딱하다.
 
68
“아이, 양복이 그 장롱 위 양복통에 죄다 들어 있는데 -.”
 
69
재봉틀을 판다는 소리가 아내는 가슴에 맺혔는지, 새삼스레 안타까웠다.
 
70
“필목(疋木)이나 몇 필 가져왔어두 두 짐삯은 거나 팔아두 지울걸 …….”
 
71
그러나 이미 쑤어 놓은 죽이 밥이 되는 수는 없다.
 
72
벌여 놓은 짐을 주워 담을 생념도 없어 멍하니 저대로 벽만 건너다보며 앉아 있었다.
 
73
+ (1947. 5 28.)
 
 
74
〔발표지〕《백민》 (1947. 8)
75
〔수록단행본〕『별을 헨다』(처희문사.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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