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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때 ‘쟘’ 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개구쟁이 오빠는 언제나 “야 잠자리!” 하고 나를 불렀다 호리호리한 폼에 눈만 몹시 컸기 때문에 불린 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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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이 상했지만 오빠한테 싸움을 걸 수도 없어서 혼자 구석에서 홀짝홀짝 울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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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있으면 어머니는 또 울보라고 놀리셔서 점점 더 옥생각하여 하루 종일 홀짝거리며 구석에 쪼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벽에다 손가락으로 낙서를 하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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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홀짝거리던 그 구석 벽에는 세계지도가 붙어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홀짝홀짝 울 때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 지도 위에 선을 그으며 ‘여기는 미국! 우리 집은 이런 데 있구나!‘ 하며 혼자 재미있어 했다 그럴 때 누군가가 러시아를 가리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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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북극이라 사람이 살 수 없단다. 낮에도 어두컴컴하지. 그리고 오로라를 볼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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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북극, 오로라, 낮에도 어둡다, 라는 말에 ‘어머~! 멋있는 나라겠다.‘ 라고 생각했다. 십삼 세 소녀의 꿈은 끝없이 펼쳐졌다. 그때부터 나의 홀짝홀짝 구석에 붙어 있는 세계지도는 내 생활의 전부인 듯이 생각되었다. 북극, 오로라만이 아니라 레나 강도 찾아내었고 바이칼 호도 우랄 산도 나의 아름다운 꿈속에서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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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꼭 레나 강에 조각배를 띄우고 강변에는 자작나무로 된 통나무집을 짓고 눈이 하얗게 덮인 설원을 걸으며 아름다운 오로라를 바라볼거야! 그리고 초라한 방랑시인이 되어 우랄 산을 넘을 땐 새빨간 보석 루비를 찾아 볼가의 뱃노래를 멀리서 들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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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뱃노래를 멀리서 듣는다. 내 머릿속은 공상의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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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나 같은 울보 잠자리가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이런 꿈에 젖었는지 조금 이상하다. 정말로 나는 이상한 여자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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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상한 여자애에게도 시간은 흐르고 세월은 쌓여 열아홉 살의 봄을, 아니 열아홉 살의 가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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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찬스가 왔다. 감상의 오랜 꿈은 빨간 열매로 익어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든 소녀 여행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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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알았을까! 이 소녀가 바로 행복과 애정으로 가득한, 따뜻한 가정을 빠져나온 마음 약한 잠자리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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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난, 페르시안 고양이처럼 얌전한 모습을 한 채 허용될 수 없는 모험에 가슴을 콩닥거리며 홀짝홀짝 울며 길러온 꿈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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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고향을 나올 때, 병든 친구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난생 처음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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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에서 배로 웅기까지 가는 동안 짧은 단발머리를 볼품없이 틀어올려 시골 여자애로 변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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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아마 이천 톤 정도의 상선이었다고 생각한다.) 웅기항으로 들어갈 때 선객은 모두 내릴 준비로 분주했지만 나는 재빨리 폼을 감출 장소를 찾느라 분주했다. 마침내 선객들이 내리기 시작하자 나는 초조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옆에서 누가 보았다면 내 눈은 새빨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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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선객 속에 섞여 있던 내 눈에 갑자기 뛰어든 것은 변소였다. 그래서 변소 안에 숨어 배가 가는 곳까지 어디라도 가자, 만약 도중에 들키면 그뿐이다, 라고 마음을 정해버렸다. 어떻게 그렇게 대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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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다섯 시간 웅기항에서 닻을 올리기까지 변소 안에 쭈그리고 앉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다리가 저려 오고, 아니 막대기가 되었다가 돌이 되고, 그리고는 어떻게 됐는지 무엇이 됐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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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경찰의 선내 검사가 끝나고 배는 닻을 올리기 시작했다. 다행이 수상 경찰의 눈은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 날카로운 경찰들도 변소 안에 페르시안 고양이로 변한 잠자리가 숨어 있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이것으로 첫 난관은 무사히 통과한 셈이지만 앞으로가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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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기항을 출발하여 잠시 지난 후 누군가가 변소 안에 들어오는 것 같아 숨을 죽이고 귀를 나팔처럼 벌려 바짝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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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온 사람은 크게 헛기침을 하고 문을 노크했다. 나는 눈을 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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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서려 뭐가 되어버린 건지 모를 정도로 저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문이 확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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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짝 뒤로부터 그 사람 가슴속으로 뛰어드는 애인처럼 쓰려져버렸다. 그 사람은 놀라서 잠시 말도 안 나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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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입니다. 살려주세요. 내 부모님은 러시아에 있습니다. 제발 러시아에 가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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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고 눈물까지 흘렸다. 눈물은 정말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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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요. 밀항하는 걸 들키면 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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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가장 먼저 이 말을 하고 무서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민첩한 내 눈에 비친 그는 젊은 남자로 아름다울 리 없는 삼등실 보이의 면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치스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다만 무작정 정말로 무작정 한시라도 빨리 구출 받고 싶다는 일심으로, 열심히 내가 어여쁜 처녀라는 것을 알리고자 안달을 했다. 여자만의 무기 ! 그것을 가지고 그 남자를 극복하고자 하는 무서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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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용맹스런 세상의 젊은 남성들이여 ! 이렇게도 약한 인종인가!” 라고 탄식할 마음의 여유는 없었지만 나는 아무튼 승리를 쟁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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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장면이 닥친다면 그때는 또 제이의 여자의 무기가 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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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한 가정의 외동딸, 게다가 청순하고 허위를 모른다. 나한테 반했으니 장래에는 이런 삼등실 보이 따위는 우습지. 당당한 사위가 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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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그가 진심으로 자각하게까지 유도해가는 것……. 이건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정말로 순수한 처녀였고 아름다웠으니까 그는 무지하기 때문에 이런 나의 본질을 알아도 멍청하게 속아 넘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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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변소 안에서 선실 아래로 철 계단을 따라 내려가 뱃짐과 함께 밀항 쥐가 되었다. 그는 나를 선녀처럼 대하며 더구나 사랑을 동경하면서 먹을 것까지 갖다 주고 위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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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쑥 내밀 정도로 닮아빠지진 않았지만 아무튼 재미있어 견딜 수가 없었다. 새까만 선저 ! 귓속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심장은 기쁨으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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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 십여 시간 뒤 드디어 배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것 같았다. 그 보이의 마지막 경고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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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모릅니다. 곧 게베우의 군인이 조사하러 올 겁니다. 그때 들켜도 내 말은 하지 마세요. 들켜도 정말 난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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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파랗게 질린 듯이 느껴졌다. 물론 내 간도 콩알만 해졌다. 잠시 후 시끄러운 구두 소리와 함께 게베우 군인이 직접 배 안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총살당하는 것도 그렇게 무의미한 최후라고는 할 수 없어. 푸른 하늘 아래서 몇 발의 총탄을 맞고 픽 쓰러져 죽는 것도 재미있을 거야! 어쩌면 혹, 총살 오 분 전에 구출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운명을 이어받지 말리는 법도 없고, 아무튼 될 대로 되라, 라고 생각하며 화물 밑에서 숨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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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한없이 행운아였는지 게베우의 눈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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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다행이었어. 오늘밤 안에 이 배에서 도망가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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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그 보이 씨는 내 옆에 와서 기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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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열한 시간이 경과한 한밤중이었다. 갑판에서는 인부들이 화물을 내리려고 몰려들었다. 나는 남자 모습으로 변장하고 인부 속에 섞여 들어가 그 보이 씨에게 일금 삼십 원을 답례로 건네고, 갑판에서 무려십칠팔 척 아래에 있는 선창을 향해 두 눈을 꼭 감고 펄쩍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는 순간 양 귀가 공중을 나는 것도 같고 하늘로 끌어올려지는 것도 같았는데 다음 순간에는 선창 위에 엉덩방아를 찧고 너무나도 비참한 포즈로 내동맹이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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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서진 것처럼 아픈 꼬리뼈를 양손으로 누르며 달아나는 토끼처럼 물건 뒤에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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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다음 순간 내 심장은 얼음처럼 싸늘해지고 말았다. 번쩍 빛나는 처참한 빛을 띤 총검이 내 옆구리에 바짝 들이대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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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심해라! 그때 나는, 잠자리 본성을 다 드러내 부들부들 떨며 으앙, 하고 아기처럼 울부짖었다. 아름답던 꿈! 동경하던 꿈속에 빠져버린 나! 나의 꿈은 현실세계에서는 너무나도 무서운 모험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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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명천을 찢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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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검을 내 배에 들이댄 그 러시아 병사의 모습은 철제거인처럼 느껴졌다. 그는 큰 소리로 뭐라 뭐라 외치면서 나에게 서서 걸으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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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검에 찔려 죽는 일은 면했구나, 하고 눈물을 닦으며 일어서서 병사가 가리키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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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보니 어느 사이엔지 눈물은 말라버린 듯했다. 조금씩 정신을 차려가며 약간은 대담해지기도 하여 일부러 걸음을 늦춰도 보고, 빨리도 해보고, 때로는 딴 방향으로 걸어보기도 했다. 그러자 병사는 그때마다 고함을 치며 허리 부근에 딱 들이댔던 총검을 옆구리 쪽을 지나 눈앞에 번쩍하고 빛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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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지지 않고 그때마다 기겁을 했다는 듯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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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얼마를 걸었는지 모르겠는데 십 리도 넘었겠다고 생각될 무렵 한 채의 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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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니 큰 테이블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실내에 루바시카를 입은 사람이 한 사람 있었는데 병사와 오랫동안 문답을 하더니 내 옆으로 다가와 몸을 수색한 후 한 의자에 앉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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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약 십 분쯤 지나자 다른 병사가 들어와 내게 말을 걸었다. 아주 무섭게 생긴 얼굴이어서 일부러 더 떠는 것처럼 행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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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그 병사가 나를 데리고 제칠천국과 똑같은 긴 계단을 걸어 마침내 칠 층까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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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그곳은 내 고향집보다 하늘의 별들이 가깝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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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문을 열고는 들어가라는 몸짓을 하기에 나는 젖가슴에서 떼놓으려 할 때의 아기처럼 병사의 가슴팍에 확 달라붙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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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떼를 쓰는 아이처럼 발을 동동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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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이겠지 ! 병사는 점점 더 화를 냈다. 그때 문득 보니 병사의 모자 가장자리에 커다란 빈대가 유유히 산보를 하고 있어, 나는 깜짝 놀라 병사에게서 떨어져 들어가라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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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건물이 바로 ‘게베우극동본부’ 인가 뭔가 하는 곳으로 내가 들어간 제칠천국 그것은 유치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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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높은 창문에서 아래 길을 내려다보면 조선옷이나 기모노 모습은 한 사람도 섞여 있지 않았다. 양복을 입은 사람뿐이어서 나는 비로소 조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실감했다. 더구나 철창에 갇힌 몸이라고 하는 잠자리의 공포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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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어느 날 두 사람의 병사에 호송되어 배에 태워진 채 세 시간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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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려 내린 후 보니 산에 둘러싸인 목가적 정서가 넘치는 시베리아 풍의 작은 항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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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한 풀숲 속에 빨간 깃발이 세워진 하얀 건물 안에 다시 갇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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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칠 일간! 철창은 부러지거나 굽어 있어 밤에 달이 뜨면 철창밖으로 보이는 설경에 가슴이 어는 것 같았다. 아침과 저녁에 한 번씩 검은 빵을 한 근씩 나누어주고 대소변을 보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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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밖에 나가는 것이 좋아서 그때마다 밖으로 나갔다. 넓은 들판에 제각각 자리를 잡고 마음대로 용변을 보는 광경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맛볼 수 없는 유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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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변소가 없다. 변소를 정해서 냄새를 참아가며 용변을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넓은 들판이다. 설령 한 이름의 변을 떨어뜨린다 해도 이렇게 거대한 풍경에 무슨 흠이 되랴. 더구나 달밤에 달을 바라보며 총검을 든 보초병을 세워놓고 천천히 용변을 보고 있노라면 들똥 맛, 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겠지만 일종의 상쾌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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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새벽 ! 아마도 영하 이삼십 도는 되는 이른 아침에 나는 끌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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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나와 보니 중국인 네 명이 나란히 서 있고 말을 탄 두 사람의 병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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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 호령 한마디에 네 사람의 중국인 뒤에 줄을 서 나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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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넓은 시베리아의……라는 노랫말 그대로인 넓고 넓은 설원을 지나 황량한 언덕과 산을 걸어서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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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탄 두 병사는 목소리를 맞춰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황량한 풍경과 너무나 잘 어울려 나도 모르게 뚝뚝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은 닦지 않아도 거센 찬바람이 가지고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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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십 리나 걸었으리라 생각될 무렵 나는 한 언덕 아래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두 병사가 뛰어내려 뭐라고 서로 외치더니 그중 젊은 쪽이 나를 가볍게 들어 안고 말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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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안기어 말을 타본 적은 있지만, 시베리아의 넓은 설원을 러시아 병사에게 안기어, 말을 타고 지나는 느낌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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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는 말고삐를 한 손에는 나를! 그리고 네 명의 중국인은 병든 노예처럼 뒤를 따른다. 마치 서부활극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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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통했다면 그때 병사와 나는 아주 멋진 말들을 속삭였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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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때때로 나를 꽉 안으며 빙긋 웃어 보였고, 나는 그에 답하여 살짝 흘기는 눈짓을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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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달콤한 시간이었다. 아! 십수 년간 혼자 홀짝거리며 깊어간 꿈! 그 꿈이 이뤄진 아름다운 현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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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 그대로 짧은 겨울날은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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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하는 듯 병사의 눈은 어두워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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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들도, 언덕도, 산도 모두 지났고 지금은 무성한 싸리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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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소련과 만주의 국경에 가까운 곳으로 나는 그 국경에서 이 병사의 손에 의해 추방되는 거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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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동안 그 싸리나무 숲길을 가더니 병사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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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숲 동쪽에 강이 흐르고 있소, 그 강을 따라 내려가면 한 채의 조선 농가가 있소, 거기서 도움을 받으시오. 나도 뒤에 가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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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러시아어를 몇 마디밖에 모르는 내가 이것을 이해하기까지는 십 분 이상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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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나는 말에서 내려져 혼자 오도카니 싸리 숲에 남겨지고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전진하여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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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아와 추위에 떨며 잰걸음으로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손과 얼굴은 싸리나무 가지에 긁혀 벗겨지고 피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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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 가 날은 완전히 저물고 공포는 점점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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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단지 동사에 대한공포!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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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어둠 사이로 하얗게 언 강이 보였다. 나는 그 언 강 위를 마구 달려 갔다. 칠전팔기 정도가 아니라 수십 번을 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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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한 등불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러나 밤의 등불! 그것은 요물처럼 가까이 가면 저만큼 멀어지며 “이리 와 이리 와” 하고 손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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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것은 인간이다. 이 세상에 도대체 무엇이 인간보다 더 무섭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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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디어 병사가 가르쳐준 농가에 당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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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런 나를 잠자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107
그 농가에서는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주어 그제야 겨우 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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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얼굴은 꽁꽁 언데다 긁혀서 까지고 부딪혀 멍이 들어 꼭 문둥이 같았다.
109
밤은 무시무시한 북풍 소리와 함께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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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온몸이 아파 이리저리 뒤척이며 끙끙댈 뿐 자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112
바람 소리 속에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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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일어나 다리를 끌며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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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없는 그 병사였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몹시 기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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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밀항자를 국외로 추방해야 하는 자신의 임무를 어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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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병사는 농가주인과 보드카를 마시며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를 꼭 잘 부탁한다고 당부를 하고는 새벽에 떠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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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감시를 전하고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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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저편으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받으며 우물물을 걷고 달을 바라보며 들똥을 누고……그러는 사이 한 달이 지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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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 주인의 호의로 여권을 얻을 수가 있었다. 나는 ‘쿠세레야 김’ 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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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내려 사람 물결에 휩쓸리며 도시 입구에 서자 양두마차 이것이 (포장마차이리라.) 가 달려가는 것이 정말로 러시아다운 느낌이었다. 금야부지하처숙 평사만리절인연今夜不知何處宿 平沙萬里絶人烟이라는 한시의 심경으로 하염없이 도시 입구에 서 있었다. 내지였다면 몇 번이나 불심검문을 받았을 텐데 이곳의 순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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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한 여자가 길가에 우두커니 슬픈 얼굴로 서 있어도 그들 눈에는 다만, 심각한 사상의 ‘정적’ 속에 빠져 있는 것이겠지, 정도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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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서 있던 내 쪽이 오히려 견딜 수 없어서 걷기 시작했다. 아무리 걸어봐도 갈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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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은 감상적인 눈물에 젖어 이 감상을 한 수의 시에라도 담고 싶었다. 정말로 나라는 여자애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서운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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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찌할 셈이었던가? 지금 돌이켜보면 몸서리가 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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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모르고, 아는 이라곤 강아지 한 마리도 없는 타국의 거리에서 돈이라곤 종이에 싸서 가지고 있는 십삼 원 육십일 전뿐인데. 아아! 도대체 어찌할 셈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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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신보》, 1939년 4월 23일/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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